사유(思惟)

죠셉 캠벨의 <신화의 힘>과 <그리스로마신화>를 읽기 전에

나뭇잎숨결 2008. 11. 1. 05:03

신화의 공백 또는 허위의 진실 | 기호학 2005.08.17  / 도 정 일




1. 신화 읽기,무엇 하자는 것인가

신화가 역사를 박탈하는 탈정치적 언술이라는 견해를 현대 비평의 맥락에서 새삼 제시한 것은 롤랑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그것이 말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모든 역사를 박탈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르트가 『신화들』에서 시도한 것은 과거의 신화들에 대한 읽기가 아니라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신화’ 읽어내기, 더 정확히는 현대적 신화 텍스트들의 기호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며, 그가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텍스트들도 문자 텍스트 아닌 사진·광고 등의 이미지 텍스트이거나 스포츠·복장·유행 같은 비문자 기호들이다. 텍스트와 기호의 범위를 이처럼 확장하고 비문자 텍스트들의 기호적 구성과 의미생산 기제에 주목할 수 있게 한 것은 현대 비평의 공로이다. 바르트의 경우 특별한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 확장된 기호 개념으로 ‘현대의 신화들’을 지목하고 이 신화 텍스트들을 기호학적 방법으로 읽어내되 그 읽기의 결과를 반드시 ‘이데올로기 노출’에 연결시킨다는 비평적 관심의 발휘이다. 그가 신화의 기능을 ‘역사 비우기’로 규정한 것은 바르트의 접근법이 갖고 있는 이 특별한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규정은 적어도 전통적 신화학·민속학·문화인류학의 진술 방법이 아니며 기호학 자체의 방법이 모든 경우에 도달하는, 또는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 발견도 아니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기호학의 방법으로 기호학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고 이것이 현대적 신화 읽기에 기여한 바르트의 공헌이다. 이 공헌의 성격은 ‘기호학적 신화 읽기의 정치화’이다. 말하자면 바르트는 기호학적 독법에 정치성을 찾아줌으로써 형식분석의 비평적 효용을 예증하고 방법의 비판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바르트가 기호학자 아닌 ‘비평가’로 작동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바르트가 신화의 역사 박탈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 마치』지 어느 호의 표지 사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현대 비평사의 한 신화가 되어 있는 사건이다. 사진 속의 흑인 병사는 프랑스 국기를 향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외연 의미의 차원에서 보면 군복 차림의 한 흑인이 삼색기를 올려다보며 경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사진의 직접적 의미이다.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언어적 기호이다. 그러나 내포적 형식의 차원에서 보면 이 사진 기호는 그 전체가 하나의 기표(signifier)이고 그것이 생산하는 이차적 내연 의미는 일차적 의미(‘삼색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가 아니라 ‘인종과 색깔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봉사하는 위대한 프랑스 제국’이다.1) 이 사진 기호는 말하자면 프랑스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강력한 기표이다. 문제의 사진 기호는 일차적 외연 차원에서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 내포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기표’이다. 바르트의 이 간단한 분석이 이루어내는 방법적 성취는 특정 기호가 어떻게 신화적 기표가 되는가를 형식 층위에서 관찰하여 그 기표의 ‘서사’를 읽어낸다는 것이다. 신화적 기표는 신화적 의미를 생산하며, 이렇게 생산된 의미가 말하자면 그 사진 기호의 신화 텍스트, 또는 신화 서사이다. 전달의 효율을 위해 바르트 원문을 다소 단순화하면, 이 사진이 말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화 서사는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다. 제국의 모든 아들들은 색깔에 관계 없이 제국의 깃발 아래 충실히 복무한다. 제국에 열렬히 봉사하고 있는 이 흑인 병사를 보라. 식민주의 운운하며 프랑스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 흑인 병사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 신화적 의미로부터 바르트가 읽어내는 것은 역사의 왜곡, 박탈, 비우기이다. 예의 사진 기표는 프랑스 제국이 아프리카 식민지 흑인들에게 가한 고통·박탈·죽음의 역사를 송두리째 지워 없애고 있다. 삼색기에 열렬히 경례하는 사진 속의 흑인 이미지 기호는 흑인의 과거를 신화적으로 왜곡하고 프랑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이 왜곡에 의거하여 흑인으로부터 흑인의 역사를 빼앗는다. “신화는 그것이 말하는 대상으로부터 역사를 박탈한다.” 이 박탈과 함께 흑인은 절반으로 절단되고 ‘말하는 시체’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이미지’ 또는 ‘제스처’로 바뀐다. 흑인은 거기 현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지로만 있다. 이것이 신화의 ‘현실 비우기’ 기능이다. 신화는 역사를 비우고 박탈함으로써 그 빈 자리에 현실과 역사 아닌 ‘자연’을 대신 채워넣는다. 흑인이 프랑스 제국에 봉사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고 경례하는 병사의 이미지는 역사의 빈자리를 메우는 자연질서를 재현한다. 신화가 역사를 자연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관찰에 이르면서 바르트는 ‘신화란 탈정치화한 언어’라는 정의를 제시하게 된다.


바르트는 자신의 이 정의를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신화에 대한 기호학적 정의’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이미 잘 알려진 관점의 재구성이자 재진술이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신화를 탈정치적 자연화의 언어로 보는 것은 바르트에 와서 ‘다시’ 확인된 관점이지 그가 기호학적 방법 덕택에 얻게 된 전적으로 새로운 통찰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화적 기호들과 그 의미생산의 방식에 대한 바르트의 접근법이 기호학적인 것이긴 하나, 그의 분석이 도달하고 있는 지점은 사실은 비판적 신화 읽기의 출발점이다. 신화가 그 언술의 대상으로부터 역사를 박탈하고 텍스트의 정치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현대 비판이론이 이데올로기론에서 제시해온 핵심적 관점의 하나이다. 바르트는 말하자면 기호학적 방법으로 이와 동일한 발견에 이르고 있거나 혹은 비판이론적 관점의 타당성을 기호학적 분석의 끝에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현대 신화를 읽는 일에 골몰했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시도하려는 읽기의 대상은 과거의 신화들, 그것도 주로 그리스 신화와 그 인접 신화들이다. 그리스 신화와 관계해서 퍽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이 오래된 신화가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그 발생의 문맥을 떠난 지 수천 년 된 먼 과거의 신화가 아직도 왕성한 서사적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지금은 아무도 제우스의 번개, 포세이돈의 삼지창, 아폴로의 마차를 믿지 않고 신전들은 몇 개의 앙상한 주랑과 무너진 돌무더기로만 남아 있다. 올림포스 신들이 세계로부터 철수하고 영웅들이 사라지고 신전의 향불이 꺼진 순간 이후 그리스 땅에서도 올림포스적 신화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제신(諸神)의 몰락과 함께 그 발생 문맥도 정지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신화는 정적 서사이다. 그런데 그 신화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역동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도 이것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아무도 믿지 않는 신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그 진실성을 확보하는가? 바르트 등이 지적하듯 신화의 힘과 매력은 진실성과 관계 없는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은 많고 설명의 방식도 다양하다. 고대 신화의 현대적 읽기를 시도할 때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 역동성에 관한 많은 설명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읽기 그 자체가 이미 역동성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역동성의 개념 속에는 현재성·생산성·진실성의 문제가 포함된다. 고대 신화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생산되는 것은 옛 신화가 아니라 당대적 신화 읽기이다. 신화 읽기는 옛 텍스트의 단순 소비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읽기’의 생산이라는 현재적 행위이며 이 현재적 생산성이 고대 신화를 역동적인 것이 되게 한다.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고대 신화에 대한 얼빠진 예찬이 아니고 그것의 시대착오적 재가동이나 수동적 소비도 아니다. 그 목표는 ‘현대적 문맥에서의 신화 읽기’ 그 자체이다. 새로운 읽기가 나오지 않을 때 신화의 역동성은 소멸한다. 매시대, 매세대에 새로운 읽기가 나오고 또 나와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신화 읽기가 신화 연구와 구별되는 것도 그 지점에서이다.


진실성의 문제는 신화 읽기가 봉착하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신전의 불이 살아 있었을 때의 신화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다. 제신의 존재와 제신의 이야기 사이에 간극은 없었고 세계와 그것의 서사적 재현 사이에 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들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은 지금 그 이야기는 어디서 진실의 권위를 얻는가? 문제는 또 있다. 현대인에게 고대 신화는 상상력의 산물, 지어낸 이야기, 중천에 뜬 허구이다. 바르트의 현대 신화만이 역사를 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신화 역시 역사를 비우고 있다. 신화 텍스트는 객관적 사실 관계를 담고 있는 역사 기록도 아니고 신빙할 만한 역사적 방증 자료를 내장한 역사학적 보조 문서도, 합리적 역사 해석도 아니다. 그것의 현대적 존재 양식은 에누리없는 서사적 양식, 곧 이야기로서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므로 신화의 명시적 텍스트로부터 과거의 역사적 현실을 곧바로 연역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진실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성을 적어도 역동성의 조건으로 간주할 때, 그 진실성은 무엇보다 신화의 현재적 적실성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적실성은 어디서 어떻게 확보되며 신화의 적실성과 읽기의 적실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사적 신화 연구가 신화의 발생론적 문맥을 탐색하고 복구할 수는 있어도 그 문맥 복구 자체가 이야기로서의 신화의 현대적 적실성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동어반복 같아 보이지만, 이 난처한 진실성의 문제에 대한 의존할 만한 해법은 서사적 해법 " 다시 말해 ‘이야기로서의 신화’라는 접근방식이다. 이 접근법의 일반적 원칙은 신화를 서사의 한 장르로 보고 서사 일반의 진리구현 방식이 신화서사에도 해당한다는 관점을 취택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그리스 신화서사들이 이미 당초의 생산문맥을 떠나 이야기로 존재하고 이야기로 읽히는 이상 이 일반적 접근법에는 별 무리가 없다. 문제는 역동적 진실성의 소재 지점, 그 진실성의 기원이 신화 텍스트 그 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신화 읽기에 있는가라는 점이다. 서사 일반의 진리구현 방식이 신화서사에도 해당되는 것이라면 신화는 이야기의 방식으로 모종의 진리 또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읽기가 나오지 않을 때 신화의 역동성은 소멸한다”라는 앞서의 진술을 유지할 경우 역동성은 신화서사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신화 읽기에 있다. 신화가 진실한가 신화 읽기가 진실한가? 신화 자체에 아무런 진실성이 없을 때 그 신화의 초시간적 이동(현재성)은 가능할까? 그러나 신화의 현재적 역동성을 구현하는 것이 신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읽기라면 고대 신화를 ‘지금 여기’에 살아 있게 하는 역동성의 원리는 신화 읽기에 있는 것이 된다.


서사로서의 신화라는 접근법이 갖는 유용성은 문제 처리의 기회를 신화의 서사성(narrativity)에서 얻을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서사성은 형식―내용의 양 차원에서 어떤 담론을 특별히 서사이게 하는 구성적 특성들, 그리고 서사와 비서사를 구별하게 하는 변별적 자질들의 집합이다. 신화는 거의 모든 국면에서 서사성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형식소들을 제외하고 내용 층위로 국한 할 경우, 서사성의 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서사의 진리 구현도나 현실 재현적 진실성보다는 한 편의 서사가 인간과 세계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신화시대의 사람들에게 신화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진실하고(true)’ 동시에 ‘의미있는(meaningful)’ 관계를 맺어준 이야기 형식이다. 이 경우 진실성과 의미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고대 신화는 고대인이 세계와 맺은 ‘상상적 관계’ 양상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고대인이 현실적인 것이라 생각한 그 관계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완전히 상상적인 것이다. 많은 경우 신화가 현대인에게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신화가 이 상상적 관계에 입각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신화의 세계는 허구적이고 상상적이며 경우에 따라 황당하다. 그러나 이 상상적 관계는 그것이 상상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적으로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독자에게 과거의 신화는 인간―세계 사이의 ‘상상적인(imaginary)’ 그러나 ‘의미있는’ 관계 맺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상적 관계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재현 또는 진실구현의 정도가 극히 낮다. 말하자면 그것은 허구적이고 허위적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신화는 ‘허위적(false)―허구적(fictional)’이지만 ‘의미있는’ 서사이다. 이 경우 진실성과 의미는 서로 분리된다. 고대인에게 신화가 ‘진실하고 의미있는’ 서사라면 현대인에게 고대 신화는 ‘허구적이지만 의미있는’ 서사이다. 우리의 이런 문제 처리 방식을 따를 때 신화의 현재성 일부는 신화가 여전히 의미있는 서사라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신화 읽기는 무슨 일을 하는가. 비평적 신화 읽기는 신화가 여전히 의미있는 서사라는 사실 자체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수립하는 상상적·허구적·허위적 관계 자체의 역설적이고 우회적인 진실성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한다. 신화는 인간과 세계의 상상적 관계에 관한 허구적 이야기이며 많은 양의 허위를 안고 있다. 그러나 신화의 매혹, 그것의 진실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허위성―허구성에 있다. 신화는 진실한 방식으로 허위를 추구한다. 더 정확히, 허위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신화의 진실이고 진실성이다. (이 대목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경험적 사례로는 ‘정신대 할머니의 거짓말’을 들 수 있다. 이 할머니가 어렸을 때 살았다고 말한 마을, 그가 다녔다고 말한 국민학교는 실사 결과 모두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임이 밝혀진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진실은 바로 그 거짓말 속에 있다. 그 진실은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사 일반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특히 신화는 인간이 그 삶의 과정에서 대면하는 존재와 생존의 딜레마에 대한 집중적 사유의 형식이고 그 딜레마의 서사적 해결방식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이 시간의 지배에 종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고통과 죽음은 왜 있고 여자는 왜 존재하는가, 죽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 이런 질문들은 신화가 문제삼는 존재의 딜레마들이다. 역사시간 안에서의 운명과 시간의 교차, 삶과 생산과 지배의 문제는 수많은 생존의 딜레마를 제기한다. 신화가 이런 딜레마들을 그 주요 화두로 삼는 것은 적어도 그것들을 풀지 않고는 인간 존재를 의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현실적으로 해소하기 어렵기 때문에 딜레마이다. 신화는 이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사유하고 그것들을 이야기로 푼다. 신화가 설정하는 인간―세계의 관계 양상은 이처럼 존재와 생존의 핵심적 문제들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고 그 해결의 방법이자 과정이다. 이 사유와 해결의 노력은 진지하고 진실하고 심오하며, 많은 경우 놀랄 정도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신화가 도달하는 딜레마의 해법 자체는 허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신화는 그것이 도달한, 또는 구성하고 있는 딜레마 해법의 허구성과 허위성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의식의 전략을 구사한다. 신화는 그 허위를 말하지 않고 말할 수도 없다. 이 말하지 않는 부분이 신화의 ‘공백’을 구성한다. 신화의 이 침묵 지점, 그 공백 공간을 지목하고 그것을 파고들며 그 공백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 그것이 비평적 신화 읽기이다. 신화 읽기는 공백의 탐사이고 발굴이다. 그 공백을 발굴하는 것은 바로 그 속에 신화의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공백은 신화가 배제하고 생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공백은 그러므로 신화가 지워없앤 것의 흔적이며 이 흔적은 신화가 비워버린 것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공백은 신화의 또다른 기표, 신화가 역사를 증언하는 기표이다. 신화가 이같은 공백 기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 신화의 역사적 진실이다. 이 공백 기표를 읽어내는 것은 그러므로 신화에 다시 역사를 써넣는 일, 신화의 현재적 역동성을 작동시키는 일이 된다. 나중에 천천히 보게 되겠지만 이 공백 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생략의 죄이고 배제의 폭력이다. 신화 읽기란 결국 우리가 죄의 진실과 조우하는 과정이다.

2. 남자는 어디서 오는가

남아프리카 아마줄루 족의 ‘웅쿨웅쿨루(Unkulunkulu) 이야기’는 짧은 텍스트 안에 ‘최초의 인간’ 이야기와 인간계에 죽음이 있게 된 이야기를 동시에 담고 있는 흥미로운 기원신화이다. 1884년 채록되어 문자로 정착된 이 짧은 텍스트가 기원인간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불과 석 줄에 불과하다. 첫 진술은 “최초의 인간은 웅쿨웅쿨루였다”라는 단 한 줄의 과거형 서술이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진술은 마치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듯(어쩌면 채록자는 “그에게 아내는 없었는가?”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현재형으로 되어 있고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그의 아내를 모른다. 조상들은 웅쿨웅쿨루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말은 한 바 없다. 웅쿨웅쿨루는 갈대를 꺾어 여러 민족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술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진술이 아마줄루 신화의 원 텍스트 내용이 아니라 구전 서술자가 보탠 추가적 진술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의 아내를 모른다.” 현재의 아마줄루 족이 웅쿨웅쿨루의 아내를 모르는 까닭은 조상들이 그 부분을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신화의 원 텍스트에는 기원인간 웅쿨웅쿨루의 아내만이 아니라 도대체 ‘아내(여자)’라는 말 자체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의 아내를 모른다”라는 현재 서술은 “웅쿨웅쿨루에게 아내는 없었는가? 그는 어떻게 번식했는가?”라는 질문이 외부로부터, 또는 후대 서술자들 스스로의 합리적 의문으로부터 제기된 이후의 첨가물이라 볼 수 있다.


이 신화는 기원인간 웅쿨웅쿨루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아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 아내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공백이므로 우리는 (그리고 현재의 아마줄루 족은) 기원인간 웅쿨웅쿨루의 여자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가질 수 없다. 모든 신화는 이 종류의 ‘정보의 공백’을 갖고 있다. 신화는 말하는 부분과 말하지 않는 부분으로 엮어진 겹 텍스트이다. 이 말하지 않는 부분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 공백은 단순한 실수나 부주의가 아니라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진술이며 생략의 필요성과 배제의 의지를 표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그 자체로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기표이다. 아마줄루 서사의 경우, 이 정보 공백은 최초의 인간으로 설정된 웅쿨웅쿨루 자신의 ‘최초성’ 또는 ‘기원성’ 자체를 모호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무의미하지 않다. 최초의 인간은 그 이후에 오는 인간들의 시초이고 번식의 기원이라는 점에서만 최초의 인간일 수 있다. 번식은 모든 ‘최초’에 따라붙는 의무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중종(始中終)’을 정의(『시학』)하면서 재치 있게 말했듯 ‘시(始)’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이후에는 따라오는 것이 있는 어떤 것”이다. ‘이후’가 없을 때 시작은 시작이 아니고 최초는 최초가 아니다. 웅쿨웅쿨루가 최초의 인간(남자)이라면 종족 번식을 위해 그에게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최초의 여자에 대한 정보는 공백이다. 웅쿨웅쿨루는 어떻게 번식했는가? 신화는 그가 “갈대를 꺾어 여러 민족을 만들었다”고만 이야기한다. 그가 여자를 통해 번식하지 않고 갈대로 이후의 인간들을 만들었다면 그는 인형 만들듯 인간을 만든 모종의 기술자―장인 모형이지 ‘인간의 조상’은 아니다. 기원인간으로서의 그의 운명은 모호하다. 그는 후손이 없는 조상이고 이후가 없는 최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호성은 신화의 의도가 아니다. “처음에 최초의 인간 웅쿨웅쿨루가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이 신화가 만들어진 이유이고 그 생산의 순간에 작동한 이해관계의 전부이다. “기원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신화의 논리이며 이 경우 기원의 모호성이나 비합리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여자에 대한 정보 부재는 사실 여자의 출현 문제를 놓고 고민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그리스 신화들에서 가장 현저하다. “인간은 땅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출토인(出土人, autochthonous man)’ 이야기는 그리스 여러 지방에 퍼져 있었던 퍽 특징적인 기원신화이다.2) ‘땅에 사는 자들’이란 뜻의 그리스어 에픽토니오이(epichthonioi)는 인간을 의미한다. 아테네인의 설화적 조상 에릭토니우스(Erichthonius)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땅에서 나온 사람(chthon " ‘땅’)’이고 테베의 조상들은 카드무스가 땅에 심은 용의 이빨들로부터 솟아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경우 땅에서 나온 인간이 모두 남자이며 ‘땅에서 나온 여자’ 이야기는 현존 신화 텍스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도 함께 나왔다는 이야기가 없으므로 이 기원신화들이 공통적으로 발생시키는 문제는 번식의 미스테리이다. 남자들은 여자 없이 어떻게 번식했는가? 후손들도 매번 땅에서 기어나왔는가? 출토인 신화와 서사 내용을 달리하는 그리스의 또다른 인간 기원신화들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가, 또는 프로메테우스와 그 아우 에피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남자와 ‘동시에’ 여자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헤시오드의 『신통기Theogony』에 ‘최초의 여자’ 판도라(Pandora)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구조론적 연구"에서 그리스 신화들이 인간은 “하나(땅)에서 왔는가 아니면 둘(남자와 여자)에서 왔는가?”라는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하는 이 딜레마는 아닌게 아니라 “인간은 땅에서 나왔다”는 그리스적 기원신화의 문맥에서는 의미 있다. 인간이 땅에서 왔다면 어째서 동시에 여자에게서도 오는가? 인간이 땅에서도 나고 여자에게서도 난다면 기원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중 기원은 이미 기원이 아니다. 그러나 기원의 이중성, 혹은 여자로부터의 기원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기원 이후 후속 세대들의 출현과 번식은 설명될 길이 없다. 이것은 딜레마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오이디푸스 신화의 분석에서 바로 이 문제를 오이디푸스 신화의 핵심적 딜레마로 설정한 까닭도 그 딜레마의 그리스적 중요성 때문이다. 그 딜레마는 현실적으로 해소 불가이며, 따라서 오이디푸스 신화는 상징적 방법으로 그 문제의 해소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견해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이 분석적 신화 읽기는 그 자체로는 여성 부재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지만, 기원의 이중성을 딜레마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공백의 문제에 접근한다. 신화는 딜레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므로 딜레마 그 자체도 신화 텍스트에는 서사적 설명 없는 공백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기원의 이중성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결국 여자 출현을 어떤 방식으로 서사화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신화는 여자의 존재를 서사적으로 상당 기간 공백 상태에 두고 그 출현의 시점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해소한다. 따라서 여자 부재는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사회적 문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표이고, 여자의 출현을 늦추는 서사적 지연 역시 “여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사회적 고민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기표이다. 말하자면 공백과 지연은 역사가 신화 속에 그 흔적을 남기는 형식이며, 이 흔적기표는 신화의 언어기표가 언급하고 있지 않는 역사를 증언한다.


신화 읽기가 그 주요 단계에서 이같은 공백의 기표를 읽어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백 읽기는 정보의 공백을 뒤집어 ‘공백의 정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 공백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공백의 정보이다. 생략·부재·구멍·침묵·배제 등의 용어는 이 공백의 다른 표현들이며 이것들은 신화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기표체계이다. 침묵은 이미 기표이다. 신화는 이처럼 말하는 언어기표들과 말하지 않는 침묵기표들로 짜여져 있다. 이 이중구조 때문에 신화는 말함으로써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공백·부재·생략은 침묵기표의 소외된 존재 형식이고 언어기표가 배제한 타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화가 바로 이 공백의 형식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공백은 신화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면서 조건이다. 신화는 공백을 가짐으로써만 신화가 된다.


이 공백이 증언하는 역사, 그 공백의 정보는 인간 기원서사에 여자의 공간은 허여되지 않는다는 역사적 정보이다. 인간의 기원을 확립하는 서사에서 여자는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원은 신성하고 신성한 것은 여성적 성질이 아니다. 신성한 것에서만 신성한 것이 나온다. 신성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이 나올 수는 없다.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오므로 여자가 남자의 기원이 될 수 없다 " 이것이 그 공백의 정보 내용이다. 기원신화 속에 여자가 공백으로 처리되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무존재여야 하고 그 정치적 지위가 공백이어야 했기 때문이며, 그리스 사회가 ‘여성 곧 열등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중력권에 나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있는가?”라는 그리스 특유의 질문은 한 차원에서는 진지한 철학적 화두이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기원의 남성성이라는 ‘상상적 허구’를 위해 여성은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상상적 기원의 허구는 당대 그리스 사회의 문맥에서는 상상적인 것이 아니며 여성 배제의 원리도 허위가 아니다.


(참고 삼아 지적해두자면, 그리스 고전 철학의 사유는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라는 주장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맹목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었다. 한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의 피는 남자의 피보다 검다”거나 “여자는 이빨 수가 남자보다 적다”라는 등의 괴이한 주장을 펴고 있다. (버트랜드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아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더라도 그런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비꼬고 있다.) “동그란 달걀에서는 수평아리가 나오고 길쭉한 달걀에서는 암평아리가 나온다”는 유명한 주장도 ‘생물학의 할아비’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다. 그가 이런 주장들을 편 것은 무식해서도 아니고 대상 관찰을 게을리해서도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생물체들을 관찰했던 사람이다. 오히려 그 주장들은 그의 철학적 사유의 일관성 있는 연장이고 논리적 연속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둥근 것은 완전성의 형태이고 길쭉한 것은 불완전성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둥근 달걀에서는 당연히 수평아리가, 길쭉한 달걀에서는 암평아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온다.” 불완전한 형태인 길쭉한 달걀로부터 수평아리가 나올 수 없다. ‘검다’와 ‘모자라다’도 불완전성 또는 열등성을 표현한다. 다른 기회에 상론할 생각이지만, 이 방식의 철학적 사유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신화체계를 구성한다.) 공백으로 처리되던 기원 여성의 자리는 오랜 지연 끝에 마침내 판도라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지만, 흥미롭게도 ‘최초의 여자’ 판도라는 남성을 낳는 여자가 아니며, 따라서 그녀는 남 \ 녀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의 첫 어머니가 아니다. 헤시오도스가 『신통기』에 기록하고 있는 판도라의 운명은 인간 전체의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의 어머니는 더더구나 아닌, 그저 ‘여자의 조상’이다. “여자들은 모두 판도라에게서 나왔다”고 그는 쓰고 있다. 이 진술의 의미는 “열등한 것은 열등한 것에서 나온다”이며 “열등한 것은 신성한 것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도라는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포스의 여신들을 본따서 만든 공예물적 존재이고 복사(플라톤이 말하지 않더라도 복사는 열등하다)이자 모조이며, 그 성질은 사악하다. 그 판도라를 모든 여자의 조상이 되게 함으로써 신화는 여자의 기원과 성질과 유산목록을 결정한다. 판도라에 대한 이 신화적 처리는 “여자(여성성)는 만들어진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주장을 역설적으로 지지한다.


여자가 고대 그리스 사회에 문제로 떠오른 것은 사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고려 때문이 아니라 역사시간, 또는 역사 안에서의 인간의 시간이라는 문제가 서사적 해결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사적 해결이 요구된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여성의 종족 재생산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한 “후속 세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 기원의 시간이 신성하다면 번식의 시간은 역사적이다. 또다른 문제는 “인간은 왜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딜레마, 곧 죽음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 앞에서 기원과 역사, 신화시간과 역사시간 사이에는 충돌이 발생한다. 신화는 이 충돌을 해소할 서사적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신화적 상상력은 인간 출현을 역사가 개입하지 못하는 신화적 시간대에 위치시킴으로써 신성한 기원의 서사를 만들지만, 번식과 죽음을 지배하는 현실적 역사시간의 문제는 기원신화의 시간형식으로는 풀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개입’을 서사화하는 또다른 신화가 필요하다. 여자의 등장은 이 역사시간의 개입 지점과 일치한다.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까”라는 문제는 곧 역사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동일하며 양자는 서로 같은 차원에 있다. 번식과 죽음의 역사시간은 여자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3. 카멜레온의 실수

그리스 신화에서 ‘남자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첫 인간 여성은 두칼리온의 아내 피라(Pyrrha)이다. 두칼리온은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고 피라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 난 딸이다. 제우스 신이 대홍수로 인간을 벌할 때 두칼리온과 피라는, 마치 노아의 식구들처럼, 홍수에 배를 띄워 재난을 면한다. 그들이 파르나수스 산정에 도달하자 물은 빠지고 천지에는 산 생명이 없다. 두 남녀는 산을 내려오면서 신탁의 명(“등뒤로 어머니의 뼈를 던져라”)에 따라 돌을 집어 어깨 너머로 던지는데, 남자가 던진 돌은 모두 남자가 되고 여자가 던진 돌은 모두 여자가 된다. 두칼리온과 피라 사이에 마침내 ‘아들’이 탄생한다. 그 아들이 헬렌(Hellen)이다. 이 헬렌은 이름 그대로 헬레네(그리스) 민족의 ‘조상’이다.


이 두칼리온―피라 서사는 빼어나게 정교하다. 가장 눈부신 것은, 마치 한 사람의 신화 작가가 짠 듯 극히 논리적인 연속과 단절의 플롯이다. 우선, 남자 두칼리온을 프로메테우스의 아들로, 여자 피라를 에피메테우스―판도라의 딸로 등장시킨 것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라는 동질―연속의 논리를 보여주는 서사적 설정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피라에게는 어머니(판도라)가 있는 반면 남편 두칼리온에게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다.3) 신화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내’를 정확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두칼리온의 ‘어머니’를 공백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 공백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온다”는 기원신화적 논리가 요청하는 공백, 다시 말해 우연한 생략 아닌 필연적 공백이다. 남자의 조상은 남자여야 하며 따라서 ‘두칼리온을 낳은 여자’는 서사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어머니를 분명하게 설정한다는 것은 남성 기원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오염(남녀혼합)이므로 그 어머니는 공백으로 처리되고 부재로 남아야 한다.


두칼리온에게 어머니가 없어야 한다면, 그의 아내 피라에게는 반드시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그녀는 여자이고, 이 단계까지의 신화 논리상 ‘여자는 여자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라가 판도라의 딸로 설정된 것은 동질―연속의 논리상 너무도 당연하다. 피라에게는 아버지도 있지 않은가? 신화는 피라의 아버지 에피메테우스에게 열등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플롯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에피메테우스는 그의 현명하고 신중한 형 프로메테우스에 비하면 경솔하고 생각이 없고 모자라다. 인간 창조 과정에서 에피메테우스가 저지른 실수(지상의 동물들을 창조하면서 그는 생각 없이 동물들에게 선물 하나씩을 준다. 기린에게는 긴 목을, 거북이에게는 두꺼운 갑옷을, 새들에게는 날개를 하는 식으로. 막상 인간을 만들고 났을 때 선물은 동이 나고 인간에게는 줄 것이 없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선물로 주는 것은 동생이 초래한 이 인간의 곤궁을 풀기 위해서다), 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앙녀 판도라를 덜렁 아내로 맞아들인 것 등은 그의 경솔과 결핍을 보여주는 서사적 특징 배치이다. (이름도 그러하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한다’라는 의미이고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한다’이다.) 이렇게 해서 피라의 탄생은 열등한 것과 열등한 것의 결합 결과라는 조건, 곧 ‘여자의 탄생 조건’을 만족시킨다. 덤으로 지적하자면, 두칼리온과 피라가 파르나수스 산을 내려오며 돌을 던진다는 이야기도 ‘남성―우월성, 여성―열등성’이라는 위계구조로 짜여지고 그 구조를 반영한다. “등뒤로 어머니의 뼈를 던져라”는 신탁을 은유적으로 풀어내어 ‘어머니의 뼈’란 필시 대지의 뼈, 곧 ‘돌’을 의미할 것이라는 탁월한 해석력을 발휘하는 것은 남편 두칼리온이다.4) 해석의 능력은 아무나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여자가 그런 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돌 던지기 대목은 신화의 숨은 논리를 깨뜨리는 뜻밖의 에피소드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두칼리온―피라―헬렌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 번식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기원서사의 필요성 때문이라는 가정을 유지할 때, 이 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다. 두칼리온과 피라로부터 마침내 ‘아들’ 헬렌이 태어났다는 대목은 바로 그 단절의 플롯이다. 이것은 기원신화 구성상의 큰 전환적 사건이다. 기원서사에서 오랫동안 공백과 부재로 남아 있던 기원 여성, 여자의 조상만이 아니라 동시에 남자의 조상이기도 한 여자, ‘남자의 어머니’인 여자로서 피라가 등장하고 동시에 그녀가 ‘낳은’ 아들이 출현한 것이다. 아들 헬렌의 등장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온다”는 논리의 단절이며 ‘남자는 남자에게서, 여자는 여자에게서’라는 논리의 포기이고 “인간은 남녀 결합으로부터 나온다”는 새로운 기원서사의 출발이다. 이 새로운 기원서사는 “여자가 남자의 기원일 수 없다”는 논리로부터 단절함으로써 “인간은 하나에서 왔는가 둘에서 왔는가”라는 기원의 딜레마를 해소한다. 피라의 등장과 함께 ‘순수한 기원’의 신화 공간에 번식의 현실과 역사시간이 도입되는 것이다.


이 도입을 위해 피라 이야기는 한 텍스트 안에 두 가지 이질서사를 접목시키면서 그 접합부를 눈에 띄지 않게 봉합한다. 연속의 플롯은 이 봉합의 테크닉이다. 옛 논리는 연속의 플롯 속에 남아 있고, 이 연속성이 단절의 플롯을 자연스럽게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두칼리온―피라의 돌 던지기 이야기도 연속과 단절의 두 순간을 갖고 있다. 남자가 던진 돌은 남자가, 여자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옛 논리의 연속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돌을 ‘등뒤로’ 던지는 것은 단절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과거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듯 그들은 옛 논리를 등뒤로 던져 청산하고 새로운 종족의 시조가 되기 위해 하산한다. 그들은 이제 후손을 낳기 위해 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 대홍수라는 배경도 연속(두 남녀의 살아남음), 청산(구종족의 소멸), 새 출발(신종족의 출현)의 서사를 전개하는 데는 완벽한 세팅이다. 두 남녀가 던진 돌들로부터 렐레게스(Leleges)라는 종족이 출현하는데, 이는 헬레네말고도 다른 종족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의 신화적 수용으로 볼 수 있다.


여성으로서의 판도라와 그녀의 딸 피라의 운명 사이에는 단절이 있지만, 그들의 신화적 기능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공통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 시간의 딜레마, 또는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고 그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그 공통성이다. 판도라는 인간계에 왜 죽음이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신화적 장치이다. 그녀가 들고 온 항아리 속의 모든 재앙들은 죽음이라는 하나의 재앙으로 요약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불이 ‘남자의 선물’이라면, 판도라가 가져온 죽음은 ‘여자의 선물’이다. 피라도 이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판도라의 딸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가 들고 온 여자의 선물을 계승하고 그녀를 통해 태어나는 후손들에게 그 선물을 나누어준다. 인간이 여자를 통해 태어나야 하는 한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의 상속자이다.


인간 존재가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딜레마의 하나이기 때문에 죽음은 초기 신화에서부터 적극적 사유 대상이 된 문제이다. 인간이 죽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은 실로 괴이한 현상이다. 죽음은 이상한 제도이다. 죽을 것이라면 왜 태어나는가? 존재의 목적은 소멸인가? 오로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존재는 소멸의 신을 위한 찬가에 불과한가? 죽은 아이를 안은 고금의 어미들은 하늘을 향해 “신이여, 이 아이를 일찍 죽게 할 것이었다면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고 항의한다. 아이만 일찍 죽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늦게 죽는 인간은 없다. (죽음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 앤디 와홀은 그 참으로 와홀다운 고백의 끝에 “내가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자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있는 것은 왜 계속 있지 않고 없어지는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그것이 인간을 괴롭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러니까 철학이 그 문제를 떠안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신화가 다룬 주요 화두이다. 신화는 서사적으로 문제를 사유하고 이야기로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시간과 죽음에 대해서도 신화가 하는 일은, 오백년 묵은 할미처럼, 서사 보따리부터 푸는 일이다. 신화 보따리에서 나오는 죽음의 이야기들은 풍성하고 다양하고 흥미롭고 심오하다. 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처음에 누가 실수했다”는 이야기 " 다시 말해 죽음을 바꿀 수 없는 제도가 되게 한 ‘최초의 실수’를 마치 사건의 순간을 눈으로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선명하고 권위 있게 들려주기이다. 기원 이야기는 기원에 대한 지식이며 기원에 대한 지식은 기원의 권위를 확인하고 그 이후의 질서를 당연한 것이 되게 한다.


앞서 언급한 아마줄루 서사가 죽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도 ‘실수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 서사의 뒷부분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계에 죽음이 있게 된 것은 ‘카멜레온의 실수’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 웅쿨웅쿨루가 카멜레온을 불러 이르되, “가서 전하라. 인간은 죽지 않는다.” 카멜레온은 인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러 가는 도중 나무열매 따먹으며 이리저리 놀다가 한참 시간을 지체한다. 웅쿨웅쿨루가 이번에는 도마뱀을 불러 말하기를 “가서 일러라. 인간은 죽는다.” 카멜레온이 마냥 놀고 있는 동안 도마뱀은 재빨리 달려가 인간들에게 그 말씀을 전한다. 그가 심부름을 마치고 웅쿨웅쿨루에게 되돌아온 순간까지도 카멜레온은 인간계에 도착하지 못한다. 뒤늦게 당도한 카멜레온이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인간들은 말한다. “도마뱀이 인간은 죽는다는 말씀을 이미 전했다. 우리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 인간은 죽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채록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마줄루 족은 지금도 카멜레온과 도마뱀을 모두 미워한다. 증오의 배후에는 그 증오의 관습을 안정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합리성을 기준으로 할 때, 죽음의 기원에 대한 이 아마줄루 서사는 논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웅쿨웅쿨루는 왜 두 개의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는가? 신화는 이런 질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왜?”를 만족시킬 논리적 구성을 피하고 순전히 카멜레온의 게으름 때문에 인간계에 죽음이 있게 되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엇갈린 정보를 띄우는 웅쿨웅쿨루는 그 자신 혼란스러운 존재, 일관성의 책임으로부터 제 멋대로 비켜 서 있는 존재 같아 보인다. 비록 늦긴 했지만 카멜레온이 들고 온 메시지를 어째서 인간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커뮤니케이션 착오는 왜 고쳐질 수 없단 말인가? 신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우둔해 보인다. 그들은 마치 난자가 하나의 정자를 받아들인 다음 모든 문을 걸어잠그듯 카멜레온의 메시지를 거부한다. 카멜레온은 느리고 게으르고 아둔하다. 그가 늑장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합리성의 결핍을 보이는 듯한 이 일련의 서사적 사건 배후에는 그러나 상당히 정교한 논리가 숨겨져 있다. 우선, 카멜레온이 느린 것은 그가 시간부정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부정의 메시지이다. 시간부정의 원칙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고 서두르지 않으며 재빨리 달릴 필요도 없다. 반면, 도마뱀은 시간의 원칙이고 그 원칙의 배달꾼이다. 그는 시간처럼 빨라야 하고 시간을 다투어 달려야 한다. 인간들이 카멜레온의 전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도마뱀이 들고 온 시간 원칙(“인간은 죽는다”)이 이미 인간 존재를 관통해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은 뒤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시간의 정보에 이미 침투당한 존재는 시간부정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시간질서의 위반이다. 웅쿨웅쿨루가 엇갈린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은 그가 긍정과 부정, 질서와 반질서, 또는 죽음 부정(삶)과 생명 부정(죽음)이라는 두 개의 원칙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는 생명체의 모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웅쿨웅쿨루가 아마줄루 신화에서 ‘최초의 인간’으로 설정된 대목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동시적 참여를 구현하는 인간 존재의 원형인 것이다. 물론 이 신화는 인간이 왜 그렇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라는 추궁에는 답할 생각이 없다. 신화는 다만 “그렇게 해서 죽음이 있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시간에 지배되는 존재의 현실을 수긍하게 하며 모든 책임을 ‘실수의 순간’으로 전가한다.


실수하는 자는 누구인가? 실수 모티프가 떠맡는 신화적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실수하고 누구에게 책임이 돌아가는가라는 문제이다. 아마줄루 서사가 카멜레온에게 실수의 책임을 덮어씌운다면, 그리스 신화는 ‘여자’에게 책임질 기회를 부여한다. (이것은 유태 신화 속의 이브 서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양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헬레네 서사와 유태 서사가 다 같이 여성에게 그 유명한 실수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퍽 암시적이다. 어쩌면 이 사실은 서구 서사와 비서구 서사의 한 중요한 차이일지 모른다. 유태 서사의 이브 부분은 또다른 이야기와 연결되므로 여기서 다룰 필요는 없다.) 판도라는 죽음을 인간에게 선물로 가져다주고 피라는 그 선물을 계승한다. 고통과 죽음의 역사시간은 여자와 함께, 여자 때문에 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아니, 신화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그리스적 인간 기원신화에 대한 앞에서의 관찰은 그 이유의 일단을 해명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신화 읽기가 필요한 것은 신화가 꿈 텍스트처럼 이 ‘왜?’에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와 생존의 딜레마를 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방대한 양의 서사를 생산한다. 이 서사들은 그 조직의 중심부에 마치 도너츠의 가운데 구멍처럼 빈 공백을 갖고 있다. 이 공백 공간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신화가 어떤 딜레마를 풀기 위해 저질러야 하는 생략과 배제이다. 그 생략과 배제가 타자의 운명이며 신화서사의 공백 기표는 그 타자에게 가해진 폭력을 증언한다.



1) 확인 결과, 『파리 마치』지 해당호 표지 사진에는 프랑스 국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물론 이 사실 때문에 바르트적 신화 분석의 힘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르트가 그 보이지 않는 국기를 당연히 삼색기라고 상정했다면, 이는 신화 분석자 자신이 신화를 생산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2) 제주도 삼성혈의 고량부 삼성 시조설화는 그리스의 출토인 신화와 비교할 만한 매우 흥미로운 자원이다. 등장하는 것은 인간들이 출현하고 난 한참 후의 일이다. 프로메테우스의 간계에 속고 그에게 하늘의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벌함과 동시에 인간을 징벌하기 위해 올림포스의 장인신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만든 것이 최초의 여자 판도라이다. 그 판도라가 재앙 단지를 들고 인간계로 내려와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될 때까지 신화 지평에 인간으로서의 여자는 없다.
3) 프로메테우스의 ‘아내’에 관한 산발적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아내의 이름은 각양 각색이며 분명히 언급되지 않고 모호하다. 그녀는 사실상 부재한다.
4) 두칼리온의 해석대로, 어머니로서의 대지는 여신 가이아의 은유적 지칭이므로 이 경우의 대지는 두칼리온의 생식자를 의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