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가을의 기도 외

나뭇잎숨결 2008. 9. 1. 23:41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 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과목(果木) / 박성룡


과목(果木)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事態)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ㅡ 흔히 시(詩)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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