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너의 얼굴 / 고재종

나뭇잎숨결 2024. 3. 31. 14:02

 

너의 얼굴

고재종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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