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聖週間)은 교회 전례력 중 가장 거룩한 시기다. 신자들은 부활의 기쁨이라는 절정을 위해 회개와 보속으로 사순 시기를 지낸 뒤 성주간을 맞이한다. 성주간은 특별한 예식과 전례가 많아 일반 신자들도 매년 새로울 수 있다. 성주간을 처음 보내는 신자들에게는 더욱 생소할 것이다. 지난해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새 신자 효주 아녜스씨와 본당 전례단장 모세씨의 대화를 통해 성주간의 의미를 짚어본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환호와 비난 대비시켜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 선포
Q. 효주 아녜스: 다들 나뭇가지를 들고 무엇을 하는 건가요?
A. 모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행렬과 환영하는 군중을 재현한 것이죠. 군중들이 외치는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히브리에서 유래한 말로 기쁨과 승리의 환호성입니다. 또 군중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사철 푸른 편백나무(혹은 측백나무) 가지를 사용하지요. 이날 축성된 성지(聖枝)는 보통 각 가정에 가져가 십자고상 뒤에 꽂아 약 1년간 보관한답니다.
Q. 효주 아녜스: 그런데 그렇게 환호하던 것과는 달리 수난 복음에서는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치네요.
A. 모세: 이렇게 극적으로 두 가지 주제를 대비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엄숙하게 선포되는 겁니다. 오늘 전례의 핵심은 예수님 죽음에 관한 신비의 묵상이지요. 신부님이 입으신 홍색 제의도 승리와 수난을 둘 다 의미합니다.
■ 성목요일과 주님 만찬 미사
- 예수님과 제자들 마지막 만찬 재현하고 수난 준비
Q. 효주 아녜스: 성유 축성 미사는 무엇이고, 교구의 신부님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는 뭔가요?
A. 모세: 먼저 성유란 본당에서 1년간 집전되는 여러 성사와 축성 등에 쓰이는 기름을 말합니다. 축성 성유, 병자 성유, 예비 신자 성유 이렇게 세 가지가 바로 이 미사에서 축성됩니다. 축성된 성유는 각 본당 사목자나 대리인이 직접 받아 본당에 가져갑니다. 오늘은 또 성유 축성뿐 아니라, 주교님과 교구 신부님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며 일치와 친교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처음 서품받은 때의 예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재다짐하는 ‘사제 서약 갱신식’도 하지요.
Q. 효주 아녜스: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는 뭔가요?
A. 모세: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을 재현하는 미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날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께 봉헌하셨죠. 발씻김 예식도 그날 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사랑과 겸손을 사제가 표현하는 것이랍니다.
Q. 효주 아녜스: 오늘 미사 후로 바뀌는 게 많은 것 같네요?
A. 모세: 맞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미사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합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 전까지 어떤 종도 치지 않음으로써 귀의 즐거움을 절제하고, 수난 감실에 사제가 성체를 옮긴 뒤 본당 공동체가 돌아가며 밤샘 조배를 하죠. 그래서 제대의 감실은 비어 있게 됩니다. 또 제대보를 벗겨 놓는데, 오늘부터 어떤 전례도 거행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치우거나 천으로 가려야 하지요.
성목요일 미사 후 성체는 감실을 떠나 수난 감실로 이동한다. 사진 이승환 기자
■ 주님 수난 성금요일
- 미사 거행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 죽음 깊이 묵상
Q. 효주 아녜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식은 무엇인가요?
A. 모세: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을 어느 때보다도 깊게 묵상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 외 다른 성사는 거행하지 않습니다.
Q. 효주 아녜스: 오늘은 왜 미사가 아닌 ‘예식’이라 부르나요?
A. 모세: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와 오늘 수난 예식이 완전하게 일치한다는 의미를 담아, 오늘은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습니다. 수난 예식은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순서로 거행되지요. 그래서 미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 성토요일(낮)
- 무덤에 계신 주님 묵상…1년 중 유일하게 전례 없어
Q. 효주 아녜스: 오늘은 전례 상 일 년에 단 하루밖에 없는 특별한 날이라고요?
A. 모세: 맞아요. 일 년 중 유일하게 전례가 없는 날입니다. 성금요일처럼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는 어떤 성사도 거행하지 않죠. 하지만 임종하는 이를 위한 노자(路資)성체를 모실 수는 있습니다.
파스카 성야 '빛의 예식' 때는 어둠 속에서 부활초에 빛을 밝힌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파스카 성야
- 어둠에서 빛으로…기쁨 속에 성대하게 주님 찬미
Q. 효주 아녜스: 신부님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굉장히 큰 초에 불을 붙이시네요?
A. 모세: 파스카 성야 1부 ‘빛의 예식’입니다. 큰 초는 부활초인데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죠. 초에는 ‘A’(알파)와 ‘Ω’(오메가), 그 해의 연수가 표시돼 있습니다.
Q. 효주 아녜스: 오늘은 독서가 7개나 되고, 얼마 전 경험한 세례식과 비슷한 예식도 있네요.
A. 모세: 2부 ‘말씀 전례’에서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구약과 신약이 봉독됩니다. 독서가 무려 일곱 개지만 몇 개는 생략할 수 있지요. 하지만 탈출기 14장은 반드시 봉독돼야 합니다. 3부 ‘세례 전례’에서는 신자들이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데 그 전에 실제 세례식을 하기도 해요. 4부 ‘성찬 전례’에서는 새 신자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기를 권고해요. 오늘 밤 파스카 성야는 교회 전례 중 가장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개포동성당 2024 성지주일
[2]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라간 여인들의 이 꾸밈없이 진실된 사랑의 눈길은 예수님을 위로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성주간의 시작인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서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은 입당 행렬 전에 봉독되고, 미사 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가 길게 읽힙니다. 오늘은 당신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이 제 마음에 맺힙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루카 22,26)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이 순간까지 제자들은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루카 22,23)을 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세워질 하느님 백성의 교회는, 제2독서인 필리피서에서 봉독되듯이 '낮춤과 비움'의 뿌리 위로 가지를 뻗어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친히 먼저 보여주셨듯이 힘, 명예, 돈으로 지배하는 세상 원리와 역행하는 질서를 근간으로 합니다.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루카 22,35)
자상한 눈길로 우리 모두를 향해 물으십니다. 물론 세상살이의 격류를 헤쳐가는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부족한 게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영의 눈을 활짝 열고 바라보면, 결핍의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놀랍게 체험하지요. 또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것을 챙기라고 허용하시는데, 그 둘 사이의 분별 기준은 주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
아니라고 잡아떼었지만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요. 닭 울음 소리에 놀라 예수님의 예고를 깨달은 베드로의 처참하고 황망하고 수치스런 감정을 다독이고 녹여주시며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눈빛은, 때때로 한 눈을 팔고 발을 헛디디고 곁길로 삐져 나가는 우리의 배반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시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동안의 예수님 눈길이 아직 자리싸움이나 하는 제자에게,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에게 향한 것이라면, 이 말씀의 눈길은 폭력과 조롱으로 당신에게 직접 해를 가하고 있는 유다인들과 로마병사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과 수모,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제1독서인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잘 드러나 있지요.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예수님께는 수모와 모욕 조롱에 노출된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 휩쓸려 하느님의 피조물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품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당신이 겪는 고통과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이들을 분리하시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 가득한 눈길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당장 코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파르르 떨고 약간의 손해에도 핏대를 올리는 우리는 그 일에 숨겨진 거대한 우주적 인과 관계나 하느님의 뜻, 신비적 의미를 모릅니다. 지금 내게 해가 되는 일, 사람, 사건 역시 누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행하는 역할 수행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처럼 서로서로에게 슬프고 아픈 영향을 미치는 불쌍한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자기와 이웃을 불쌍히 보는 연민으로 우리 눈빛이 예수님의 눈빛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이제까지 저를 사로잡은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들이었다면, 마지막은 복음 말미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눈길입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루카 23,55-56)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은 예수님께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여인들은 도망가거나 모르는 체 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찬찬히 시신 수습과 안장의 과정을 바라봅니다. 이는 진정 관상의 눈빛입니다. 애도와 사랑, 연민과 아쉬움,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하려는 충실함으로 그들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합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와 적대자와 온 인류에게 보낸 자비와 연민의 눈길이 여인들의 이 소박한 사랑의 눈빛으로 보상받았으리라 감히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여인들의 이 꾸밈없이 진실된 사랑의 눈길은, 우리 사랑의 눈길에 목마르고 허기지신 예수님께 이번 성주간을 통해 무엇을 드려야 할지, 실패로 점철된 사순시기를 아슬아슬 길게 지나온 우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3]주님 수난 성지주일 프란치스코교황 강론
“오늘날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랑을 부르짖으십니다”
Adriana Masotti / 번역 이창욱
4월 2일 오전 10시. 약 6만 명의 신자들로 가득 찬 성 베드로 광장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이했다. 교황은 제멜리 종합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은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올리브 가지를 축복했다. 이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군중이 환호하는 동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의 입성 장면을 묘사하는 마태오 복음의 구절이 낭독됐다. 그런 다음 이날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미사를 시작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는 신자들 사이의 중앙 통로를 따라 대성전 앞 마당을 향해 행렬을 하고 교황은 전용차로 뒤따랐다. 추기경을 비롯한 공동 집전자들은 각자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빨마) 가지를 들고 행렬했다. 추기경단의 부단장인 레오나르도 산드리 추기경이 성찬 전례를 주례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는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 시간, 곧 돌아가실 때까지의 마지막 시간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신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은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 말씀은 화답송 시편과 마태오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반복된다. 교황은 이 구절을 중심으로 강론을 시작했다. 우선 교황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가리켜 채찍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배신, 조롱, 제자들의 도망과 같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셨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십니다.”
“모든 고통 중에서 가장 타는 듯한 고통, 곧 영혼의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한 번도 아버지를 일반적인 이름인 ‘하느님’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충격을 전하기 위해 복음서는 아람어로도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유일하게 아람어로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하느님에게서 버림받는 극도의 자기낮춤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대가로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하셨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 하늘의 문이 닫힌 것을 보신 그분께서는 실존의 난파선, 모든 확실성의 붕괴를 겪으시고 인생의 쓰라린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시며 ‘왜’라고 부르짖으십니다. ‘하느님, 왜, 어찌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심연을 겪으시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교황은 성경에서 ‘버리다’라는 동사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등장한다며 “우리를 다른 이들과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가 급격하게 끊어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을 당신의 십자가에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황, 곧 버림받음과 하느님과의 거리를 겪으셨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항상 우리 곁에 계시려고,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덧붙였다. “오늘 이 사건은 한낱 공연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혹은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볼 때 –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 ,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고, 포기와 버림받음의 심연에 빠져들고, 답이 없는 수많은 ‘왜’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갈 때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고 지금도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에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거리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려고 버림받음의 거리를 견뎌내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실패할 때마다, 우리 각자가 여러 번 실패할 때마다, 내가 배신당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배신할 때마다, 내가 소외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소외할 때마다, 내가 버림받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포기할 때마다, 배신당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예수님을 생각하자고요. 바로 거기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지만 희망이 솟아나는 것은 바로 그 고통 속에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버림받았다고 부르짖으시지만 그 직후 당신 자신을 내어 맡기시고 아버지께 넘겨 주신다. 또한 버림받음의 순간에도 “당신의 제자들을 계속 사랑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받은 이들을 용서하신다. 교황은 “우리의 수많은 고통의 심연이 더 큰 사랑에 잠기면서 고립이 친교로 변하는 모습을 본다”고 강조했다. 버림받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바꾸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버림받은 이들 안에서 “당신을 찾고 사랑하도록” 부추긴다. 교황은 원고를 내려놓고 즉흥적으로 몇 달 전 성 베드로 광장의 주랑 아래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노숙인 남성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버림받은 그리스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착취당하고 내버려진 이들,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눈을 마주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얼굴이 아니라 숫자로만 존재하는 이주민들, 사회에서 거부당한 수감자들, 문제아로 낙인찍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홀로 방치된 노인들 – 그들은 어쩌면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 ,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자들, 멸시당하는 장애인들, 고통의 외침에 귀 기울여 주는 이 없이 내면에 큰 공허를 느끼는 젊은이들 등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고 숨겨진 수많은 ‘버림받은 그리스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 선택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 오늘날의 그리스도들입니다.”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서 사랑을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은총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음에서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아무도 홀로 내버려두지 말라는 요구가 나온다. 배척당하는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그분의 “살아있는 이콘”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초대하며 강론을 마무리했다.
“오늘 이 은총을 청합시다. 곧,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은총 말입니다. 그들 안에서 끊임없이 부르짖으시는 주님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무관심이라는 귀먹은 침묵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놓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외롭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도록 합시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성주간을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교황은 ‘영성체 후 기도’ 후 미사 마침 예식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쳤다. 먼저 교황은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특별히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친밀함을 표한 데 대해 감사를 전했으며 신자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갈망한다며 신자들에게 “마음의 친밀함으로 당신 아드님을 따르시고 그분과 한 영혼이 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배우며 성주간을 지내자고 권고했다. 이어 성모님께서 “고통받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교황은 교황 전용차(포프모빌)를 타고 성 베드로 광장을 천천히 돌면서 교황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기다리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강복했다.
[4] “예수님의 침묵은 승리주의를 이깁니다”
번역 이창욱
예루살렘 입성의 환호와 예수님의 굴욕. 축제의 함성과 사나운 분노. 이 두 가지 신비는 매년 성주간이 시작될 때마다 따라오는 것으로, 이 전례 거행의 두 가지 특징적인 순간에 두드러집니다. 곧, 미사 시작 때 팔마 가지와 올리브나무 가지를 든 행렬과 그 다음에 이어진 장엄한 수난 복음 독서입니다.
우리가 기도에서 청했던 것을 얻기 위해, 성령에 의해 고무된 활동에 참여합시다. 그분 고난의 위대한 가르침을 삶의 모델이자 악령을 반대하는 승리의 모델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신앙을 갖고 우리 구세주의 길에서 그분을 따라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안에 평화를 지키시며, 어려운 순간들과 가장 교활한 유혹에 우리가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평화는 초월이 아닙니다. 무감각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성부와 그분의 구원, 삶, 자비의 뜻에 신뢰를 갖고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명 안에서, 그분께서 직접 방법을 선택하시고 아버지에 대한 순명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활동”을 행하시려는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40일간의 싸움에서, 마지막에는 수난 중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적인 신뢰를 통해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건에서 이 세상의 왕자인 악마가 게임의 카드를, 승리주의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 겸손의 길에 충실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승리주의는 지름길, 거짓 약속의 길을 통해 다가오려고 애를 씁니다. 승리자의 수레 위로 올라가려 애씁니다. 승리주의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지만 십자가의 용광로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더 열등하고, 결점 많고, 실패한 존재로 판단하면서 부추깁니다. (...) 승리주의의 교묘한 형태는 가장 위험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악의적인 유혹인 세속적 경건함입니다(앙리 드 뤼박).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하여 승리주의를 파괴하셨습니다.
그분을 왕이요 메시아라고 선포하며 외쳤던 백성들, 젊은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는 그 기쁨을 (그들과) 진심으로 나누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이 지내는 축제와 열정을 보면서 기뻤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분 제자들의 스캔들에 가까운 환호를 나무라도록 예수님에게 요청했을 때, 그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겸손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메시아이시고 진정한 임금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 다른 길, 오직 그분과 아버지만 아시는 거룩한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조건”에서 “종의 조건”으로 가는 길,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6-8) 순종하는 겸손의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참된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께 공간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공간을 내어드리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곧, 자기 비움, 벌거벗음입니다. 침묵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서는 협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의 겸손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분 뒤에서, 제일 먼저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첫 번째 제자였던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동정녀와 성인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걷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삶의 고통스럽고 험난한 사건 앞에서, “특별한 마음의 부담”(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17항 참조)을 치러야 하는 신앙을 통해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밤입니다. 하지만 오직 이러한 밤에서 부활의 여명이 밝아옵니다. 십자가 아래, 마리아는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했던 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 골고타에 있던 마리아는 그 약속의 완전한 부정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당신 아드님이 범죄자처럼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겸손에 의해 파괴된 승리주의는 어머니의 마음 안에서 마찬가지로 파괴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침묵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를 위시하여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겸손의 길과 순명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아, 저는 많은 젊은 성인⋅성녀들, 특히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고, 때때로 그분께서 깜짝 놀라게 우리에게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가까이 숨어있는” 성인성녀들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열정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는 살아계시며 여러분의 삶이시라고 외치는 것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길에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울러 여러분 자신을 버리고, 여러분의 확신을 포기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라는 요청을 느낄 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축제의 함성과 사나운 분노. 고난 가운데 예수님의 침묵이 응답하려는 유혹과 “중개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기시는 것은 인상적입니다. 암흑과 큰 고뇌의 순간에 그 침묵이 악의에 찬 침묵이 아니라 온유한 침묵이라면, 침묵하고 입을 다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온유한 침묵은 우리를 훨씬 더 연약하고, 훨씬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용기를 갖고 악마를 찾아내면 그 악마는 나갈 것입니다. “자리를 유지하되” 예수님의 태도와 똑같은 태도로, 침묵 안에서 악마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이 세상의 왕자 사이에서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손에 칼을 쥐라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신앙 안에서 확고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전쟁을 하러 내려오실 때, 그렇게 행하도록 놓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안전한 위치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망토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풍랑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는 동안(마르 4,37-41 참조), 기도 안에서 침묵의 증언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희망의 이유”(1베드 3,15 참조)를 제시합시다. 바로 이것이 약속에 대한 기억, 십자가 안에 존재하는 분노와 부활의 희망 사이의 거룩한 긴장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5]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놀라워해야 합니다”
번역 이창욱
매년 맞이하는 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는 우리 안에 놀라움의 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쁨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뵙는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이는 성주간 내내 우리를 동행할 내적 태도입니다. 그러니 이 놀라움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대하게 환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파스카를 맞아 강력한 해방자를 기다리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해 파스카를 이루시려고 오십니다. 사람들은 칼을 통해 로마인들을 압도하는 승리를 기념하기를 기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오십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하던 태도에서 불과 며칠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태도로 돌변한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슨 일일까요? 그 사람들은 실제 메시아보다 메시아의 이미지를 더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했지만, 그분을 보고 놀라워할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놀라움은 칭찬과 다릅니다. 칭찬은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과 자신의 기대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라움은 타인에게 열려 있고, 그의 새로움에 열려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하셨고, 사랑하셨고, 용서하셨고, 그분의 본보기가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입니다. (...) 그들은 예수님을 칭송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삶을 바꾸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칭송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고, 그분의 도전에 우리 자신을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칭송에서 놀라움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주님의 파스카에 대해 무엇이 가장 놀랍습니까? (놀라운 것은 바로) 그분께서 굴욕의 길을 통해 영광에 이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승리하십니다. 하지만, 칭찬과 성공에 굴복하는 우리는 (고통과 죽음을) 회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필리 2,7.8 참조)고 성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곧 전능하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축소되시는 모습을 보는 것. 모든 것을 아시는 말씀이신 분이 십자가의 교단에서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을 보는 것. 교수대를 왕좌로 삼으신 왕 중의 왕을 보는 것. 모든 것을 벗어버리신 우주의 하느님을 보는 것. 영광의 관 대신에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보는 것. 선하신 그분께서 모욕당하시고 짓밟히시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왜 이 모든 굴욕을 감내하셨습니까? 주님, 왜 당신께서는 이 모든 것을 행하도록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 인간 현실의 밑바닥까지 다다르시고, 우리의 온 존재를, 우리의 모든 악을 겪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를 고통과 죽음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낫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 속으로 내려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올라가십니다. 실패, 모든 이의 거부, 사랑하는 이의 배반, 하느님에 의한 버림받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영혼의 최악의 상태를 겪으셨습니다. 당신의 육신 안에서 가장 가슴 아픈 우리의 모순을 경험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그 모순을 구제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에 다가와, 우리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곳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상처에, 모든 두려움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어떤 악도, 그 어떤 죄도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승리하십니다. 그러나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성지, 聖枝)는 십자 나무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종려나무 가지와 십자가는 함께 갑니다.
놀라움의 은총을 청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놀라움이 없다면 잿빛이 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우리가 매일 놀라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어떻게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놀라움을 잃는다면 귀머거리가 됩니다. 더 이상 은총의 경이로움을 듣지 못하고, 더 이상 생명의 빵과 말씀의 맛을 느끼지 못하며, 더 이상 형제들의 아름다움과 창조의 선물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23장에서 단죄하신 것처럼, 율법주의와 성직주의,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 안으로 도피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놀라움의 은총을 받기 위해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면서, 그의 수사들이 울지 않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할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그분 앞에서 더 이상 놀라워할 줄 모릅니까?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타성에 의해 닳아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후회 속에 갇혀 우리의 불만족에 의해 마비가 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잃고, 심지어 우리가 틀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쩌면” 뒤에는 우리에게 놀라움의 은총을 주시는 성령의 선물에 우리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놀라움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예수님에 의해 놀라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삶의 위대함은 소유하고 평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을 발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위대함이란, 사랑받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위대함은 바로 사랑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에서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 버려진 존재가 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그리고 놀라움의 은총을 통해 우리는 버림받은 이를 받아들이고,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다가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소외된 이들 안에, 우리의 바리사이적 문화가 단죄하는 이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콘을 보여줍니다. 바로 백인대장에 관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그는 사랑에 놀라게 되도록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어떻게 봤습니까? 사랑하면서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봤고, 이것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셨고, 녹초가 되셨지만,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죽음조차 사랑으로 채울 줄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느낀 놀라움입니다. 이 유례없고 무상적인 사랑에서 이방인이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그의 말은 수난을 봉인합니다. 복음에서 백인대장 이전의 수많은 이들이 기적과 이적 때문에 예수님을 칭송하며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칭송에 그치고, 하느님을 막강하고 무서운 분으로 보며, 경배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신(神)이라는 생각에 그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십자가 아래에서는 더 이상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힘으로 다스리십니다. 사랑은 무장해제된 힘이자 무장해제시키는 힘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놀라게 하십니다. 이 놀라움이 우리에게 스며들도록 맡겨 드리고, 십자가에 못 박하신 분을 바라보며 우리도 이렇게 말씀드립시다.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주님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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