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처형 : 템페라, 85 x 52cm, 1500년경,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디오니시 작품,
[1]교황, 주님 수난 예식 거행... 칸탈라메사 추기경 “예수님의 죽음으로 삶은 절정에 달합니다”
Adriana Masotti / 번역 이정숙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7일 오후 5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날은 말씀 전례(제1독서 이사야서(52,13-53,12), 제2독서 히브리서(4,14-16; 5,7-9),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18,1-19,42)) 후에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교회 △모든 신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 △위정자들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린다. 제대 위 예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이, 강론은 교황청 강론 전담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이 담당했다. 약 4000명의 신자가 참례했다.
하느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2000년 동안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날을 선포하고 또 기념해 왔다”며 강론을 시작했다. 이어 “그러나 세속화된 서구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한 세기 반 동안 하느님의 또 다른 죽음이 선포돼 왔다”며 “우리는 이를 모른 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하느님의 또 다른 죽음을 “완벽하게 표현”한 인물로 프리드리히 니체를 지목하며, 그가 하느님의 종말을 도시에 선포한 “광인”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니체의 또 다른 글에서는 허공에서 방황하는 인물로 묘사된다고 말했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 우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이 땅을 태양의 사슬로부터 풀어 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이제 이 땅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헤매고 있지 않은가?”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니체가 하느님을 인간으로, “더 정확히 말해 ‘초인’, 곧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광인’은 허무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해 인간이 하느님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므로 ‘무한한 허무에서 헤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허무에서 방황하는 그러한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서양을 지배하는 상대주의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니체의 또 다른 “전투적 부르짖음”인 『선악의 저편』을 인용하면서 “선악의 저편에는 ‘권력에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로 이끄는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니체의 사유가 초래한 결과를 살펴보면서, 이른바 ‘후기 구조주의’로 점철된 서구 지성계에서는 주류가 될 정도로 하느님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가장 다양한 방식과 가장 다양한 이름으로” 무관심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모든 다양한 변화의 공통분모는 윤리, 언어, 철학, 예술, 물론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목격되는 총체적 상대주의입니다. 더 이상 견고한 것은 없으며 모두 액체이거나 심지어 기체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현재의 “허무주의”에서 “창세 이래 한 번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깜박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곧, 타인의 은총 안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정의 정신’, 아담과 하와 이래로 타인을 결부시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부정의 정신’이 그것이다.
허무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나자렛 예수님께서 우리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지만 “그분의 부활은 이 길이 패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준다”고 덧붙였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성금요일에 이 주제를 언급하는 목적과 관련해 “신자들이 영적 우주의 진정한 ‘블랙홀’인 허무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의 ‘천국’ 편에 나오는 시의적절한 조언을 예로 들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더 신중하게 행동하십시오. 모든 바람 앞의 깃털처럼 되지 말고, 모든 물이 그대들을 씻는다고 믿지 마십시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사제가 미사 때마다 선포하는 말씀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반복하자며 강론을 마쳤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을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2] 성금요일 강론… 십자가, 가장 낮은 자들의 얼굴
Emanuela Campanile / 번역 이정숙
그리스도의 수난 거행을 통해, 고통스러운 인간의 얼굴과 몸은 말씀으로 대체된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주님 수난 예식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 앞에서 이같이 강론하며 지금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묵상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나자렛 예수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 버려진 이들이 된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박탈당하고 ‘버려진’ 모든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원형이며 대표자와 같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정확한 신분을 관상하길 원합니다.”
단순히 고난의 순간에서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칸탈라메사 신부는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성전에 봉헌될 당시 그분의 부모는 양을 바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율법이 정해준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을 봉헌했다. 이어 칸탈라메사 신부는 예수님이 공생활 동안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다며 “노숙자”라고 설명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진정한 가난의 증명이었습니다.”
“자, 이 사람이오(Ecce homo)!”
가시나무 관, 어깨에 걸쳐진 망토, “그분 왕권에 대한 조소의 상징”인 갈대. 예수님은 병사들의 잔혹함 아래에 놓여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문당한 모든 이들이다.
“(예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이들을 상대로 전 일생 동안 쌓아온 분노와 잔인함을 표출하는 군인들과 불한당의 자비에 (운명이) 달려있는 쇠고랑 찬 사람들, 혼자인 사람들의 원형입니다. 그분은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에체 호모(Ecce homo)!’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라고, 빌라도는 곧바로 백성들에게 그분을 이렇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로 이 표현은 비방을 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고, 인간의 모든 존엄을 박탈당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했던 말일 수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 그 이중적 의미
나자렛 예수의 십자가는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표징, 곧 “굴욕과 모욕을 당한” 인류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그 상징보다) 더 나아가며 그것을 넘어선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복음 말씀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지 설명했다.
“실제로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복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패자는 승리자가, 심판 받은 자는 재판관이 되었으며,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사도 4,11 참조). 마지막 말씀은 불의와 억압이 아니었으며 결코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난한 이(박탈된 이)들의 ‘존엄’을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권력자들을 위한 메시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들의 승리자 역할에서 안정을 느끼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고 칸탈라메사 신부는 설명했다.
“이는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증오나 복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종국에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운명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약한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 힘 없는 사람이나 독재자나 모두가 동일한 법과 동일한 인간적 한계에 종속돼 있습니다. 죽음은 다모클레스의 검(la spada di Damocle, 권력을 탐하는 이에 대한 경고)과 같이 머리 위에 매달려 목숨을 위협합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최악, 곧 ‘전능함이라는 환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와 종교들
칸탈라메사 신부는 강론을 마무리하기 앞서 평화를 증진하는 일을 비롯해 교회의 사명과 종교의 과업을 설명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라는 창립자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것, 특히 교회의 최고 목자 안에서 교회가 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날 종교가 함께 맡아야 하는 두 번째 역사적인 과업은 (...) 모든 이들 앞에서 펼쳐진 ‘광경’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은 수세기를 산다 해도 소비할 수 없는 부를 소유하지만, 엄청난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종교도 (이 사실 앞에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의 하느님(혹은 신)께서는 이 모든 것 앞에서 무관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초대
“이 전례가 승리자에게 이름과 얼굴을 주게 될”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는 가운데 칸탈라메사 신부는 마지막으로 강론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찬양하는 설명으로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깨어 묵상하도록 초대했다.
“그는 제 고난 끝에 빛을 보고 (...)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12 참조).
조토, 애도(Lamentation), 프레스코화, 200X185cm, 1305~1306년경, 이탈리아 파도바 아레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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