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파스카 성야 성토요일]2024년 3월 30일

나뭇잎숨결 2024. 3. 23. 09:23

 

 

 

[1]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언젠가 저 위 천상에서 평화 속에 노래할 수 있도록 이 아래 지상에서 아직 걱정 가운데 있는 동안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땅 위에서의 인생은 시련에 가득 찬 생이 아닌가.”라는 말씀이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하는 말씀도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청하라고 명하는데도 그렇게도 유혹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매일 용서를 청하고 있지만 매일 용서받아야 할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매일 내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위험에서 구출될 도움을 청한다면 아무 걱정 없이 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거에 범한 죄를 생각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면 즉시 이어서 다가올 위험을 생각하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하고 덧붙입니다. 다른 신자들도 나와 함께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하는데 어떻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형제들이여, 우리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위험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또 다른 모든 이들도 다 함께 알렐루야를 노래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으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도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사람은 아직 죄인이지만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위의 성서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고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시고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시련을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시련에 빠지지 않도록 빠져나갈 길을 마련하십니다. 여러분은 옹기장이가 만드는 그릇처럼 말씀을 들음으로써 조형되고 환난의 불 속에서 단련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시련을 겪게 될 때 거기에서 빠져 나갈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은 신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나가거나 들어가거나 너를 지켜 주시리라.”

이 몸이 불멸의 것이 되고 썩지 않을 몸이 될 때 온갖 시련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때 이 지상의 몸이 참으로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생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화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죽은 것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서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영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몸은 육적 상태이지만 그때에는 영적 상태일 것입니다.

저 위 천상에서 부를 알렐루야의 함성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안전하며 또 얼마나 평화롭겠습니까! 저 위 천상에는 우리의 원수 되는 사람이 없고 친구를 잃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님께 바치는 찬미가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그 찬미가는 울려 퍼지지만 여기에서는 걱정 가운데 거기에서는 걱정 없는 평화 가운데, 여기에서는 죽어 가는 이들이 거기에서는 승리한 이들이, 여기에서는 희망 가운데 거기에서는 직접 보는 가운데, 여기에서는 영적 여정 중에 거기에서는 본향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노래합시다. 천상의 양식을 즐기기 위해서보다 우리 수고의 피곤을 풀기 위해서 노래합시다. 길가는 사람처럼 노래합시다. 노래하십시오. 그러나 계속 걸어가십시오. 노래함으로써 수고의 짐을 가벼이 하고 게으름에는 빠지지 마십시오. 노래하면서 발걸음을 계속하십시오. “발걸음을 계속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덕행에로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사도가 말하듯이 정진하기는 하지만 악행에로 정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진한다면 발걸음을 계속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덕행에로, 올바른 신앙에로, 거룩한 생활에로 정진하십시오. 노래하면서 걸음을 계속하십시오.

 

 

 

 

[2] 오늘의 묵상은 이날의 무덤 같은 침묵 속으로 더 잘 들어가기 위하여 다른 형식을 취합니다.

 

성토요일에 우리는 아들의 부활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셨던 복되신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침묵 속에서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고 의심하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듯이 부활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전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할 것임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고통받을 때 함께 고통받았지만, 죽음이 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에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신혼부부를 위해 하신 것처럼(요한 2,1-12 참조), 우리를 위해서도 예수님께 전구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은 신혼부부와 하객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에게 우리의 의심과 믿음의 부족을 굳센 믿음과 신뢰의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시도록 예수님께 빌어주시길 청합시다.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서 죽음을 이기신 당신 아드님의 능력을 믿으셨던 것처럼 저희도 믿을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하루의 성찰과 중재기도

하루를 되돌아봅니다.

다음의 오래된 성토요일 강론을 읽고 잠시 조용히 묵상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오늘은 거대한 침묵이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거대한 침묵과 고요. 임금께서 잠드셨기 때문에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육으로는 잠드셨고 오랜 세월 동안 잠자고 있던 이들을 일으켜 세우셨으므로 온 땅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고요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육 안에서 돌아가셨고 저승은 전율했습니다. 진실로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듯 우리의 원조元祖를 찾아가십니다. 그분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던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이시며 아담의 자손이신 그분께서

갇혀있던 아담과 하와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러 가십니다. 주님께서 승리의 무기인 십자가를 들고 그들에게 가십니다. 첫 인간인 아담이 그분을 보고는 두려움에 싸여 가슴을 치면서 모든 이에게 외칩니다."내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아담에게 대답하십니다. "또한 너의 영과 함께."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잠든 이여, 일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주실 것이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지만, 너를 위하여 너의 아들이 되었다. 너와 네 후손들을 위해 권위를 가지고 명령한다. 갇힌 이들은 나오너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은 빛을 받아라. 잠든 이들은 일어나라. 나는 너에게 명령한다. 잠자는 너는 잠에서 깨어나라. 나는 너를 저승의 포로로 잡혀있게 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나는 죽은 이들의 생명이다. 내 손의 작품이며 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너, 사람이여 일어나라. 일어나 여기서 나

가자. 너는 내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으니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너를 위해, 너의 하느님인 내가 너의 아들이 되었다. 너를 위해 주인인 내가 종인 너의 모습을 취했고, 너를 위해 하늘 위에 있는 내가 땅 위에 내려왔고 땅 아래까지 내려왔다. 너 사람을 위해 내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동산을 떠난 너를 위해 나는 동산에서 유다인들에게 넘겨졌고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너 때문에 내 얼굴에 뱉어진 침을 보아라. 그것은 창조 때에 불어넣은 거룩한 숨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였다. 내 뺨에 생긴 상처를 보아라. 너의 일그러진 모습을 내 모상대로 다시 만들기 위해 맞은 것이다. 내 등의 채찍 자국을 보아라. 그것은 네 등에 지고 있는 네 죄의 짐을 가볍게 하려고 받은 것이다. 선한 뜻으로 나무에 못 박힌 내 손을 보아라. 악한 뜻으로 나무에 손을 뻗친 너를 위해서다.

낙원에서 잠자는 동안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너를 위해 내가 십자가 위에서 잠들었고 내 옆구리는 창에 꿰뚫렸다. 내 옆구리가 네 옆구리의 고통을 치유했다. 내가 잠듦으로 너를 저승의 잠에서 풀어냈다. 나의 창이 너를 향한 창을 막아냈다.

그러니 일어나라. 여기서 나가자. 원수가 너를 낙원 밖으로 쫓아냈지만, 나는 너를 이제 낙원이 아니라 하늘의 왕좌에 앉히겠다. 나는 너에게 상징이었던 생명나무를 주지 않았지만, 이제 생명인 나 자신이 너와 하나가 되었다. 내가 너를 감독할 케루빔을 세웠지만, 이제 케루빔이 하느님을 섬기듯 너를 섬기게 하겠다.

케루빔이 호위하는 옥좌가 마련되었고 옥좌를 나르는 이들이 준비하고 기다린다. 신방이 차려졌고 음식도 장만되었으며 영원한 집과 방들이 마련되었다. 예물 상자도 열리고, 하늘나라가 모든 세대 앞에 준비되었다."

 

 

[3] 부활성야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1. 그 여자들은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커다란 돌이 무덤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여정이 헛된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그 여자들의 여정은 또한 우리 자신의 여정입니다. 그것은 오늘 밤 우리가 하는 구원의 여정과 닮아 있습니다. 때때로 모든 것이 돌에 대립해 있는 것 같습니다. 죄의 비극에 대립하는 창조의 아름다움. 계약에 대한 불충에 대립하는 종살이로부터의 해방. 백성의 무기력한 무관심에 대립하는 예언자의 약속. 그렇게 또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우리 자신 개인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걸은 걸음들이 결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너진 희망이 인생의 암울한 법칙이라고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우리의 여정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무덤의 돌에 대립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한 구절이 그 여자를 놀라게 하고 역사를 바꿉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복음 24,5) 어찌하여 모든 것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아무도 너 자신의 무덤의 돌을 치울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체념이나 실패에 굴복하느냐? 형제 여러분, 부활절은 치워진 무덤의 돌을, 이미 굴러져 있는 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에 충돌하는 가장 단단한 돌을 치워 주십니다. 죽음, 죄, 공포, 세속성. 인류 역사는 무덤의 돌 앞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그 인류 역사는 “살아 있는 돌” (베드로의 첫째 서간 2, 4 참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그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담하게 되고 우리 실패의 빛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조차도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려고 오시고 우리의 모든 실망을 뒤엎어 버리시려고 오십니다. 우리 각자는 오늘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마음의 돌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돌을 치우시는 한 분을 다시 발견하라고 부름 받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렇게 물읍시다. 내가 치워야 하는 돌은 무엇인가. 이 돌의 이름은 무엇인가?

 

자주 희망을 막는 것은 좌절이라는 돌입니다. 한번 우리가 모든 것이 나빠지고 있고 일들이 더 나빠질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낙담하고 죽음이 생명보다 강하다고 믿게 됩니다. 우리는 냉소적으로 되어가고 부정적이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돌 위에 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우리 자신의 불만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즉, 희망의 무덤. 인생은 불평의 연속이 되고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어 갑니다. 일종의 심리적 무덤이 점령합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다시 한번 듣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체념 속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분을 찾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오 복음 22,32). 희망을 묻어버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자주 닫은 채로 봉인하는 또 다른 돌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돌입니다. 죄는 유혹합니다. 그것은 빠르고 쉬운 것들을 약속하고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고 그러나 그리고 나서 고독과 죽음만은 뒤에 남겨 놓습니다. 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생명을 찾고 있고 사라져 가는 것들 안에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어찌하여 하느님의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네 마음의 입구 앞에 있는 돌 같은 저 죄를 버리기로 마음 먹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참빛(요한복음 1,9 참고)이신 예수님보다 반짝거리는 부와 성공과 자만과 쾌락을 더 좋아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더 이상 이 세상의 공허한 것들 것 아니라 생명이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하지 않느냐?

 

2.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그 여자들에게 돌아 갑시다. 그 여자들은 굴러져 치워진 돌 앞에서 당황하여 서 있었습니다. 천사들을 보면서 그들은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루카 복음 24,5). 그들은 올려다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우리가 같은 일을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결점들 앞에서 움츠려 있기를 더 좋아하고 두려움 안에서 웅크리고 있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인데 그러나 우리가 왜 이렇게 합니까? 주님께 우리 자신을 열기 보다는 우리 마음의 어둠 안에 홀로 머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고 침울하게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자신하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홀로 그분만이 우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한 시인은 한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일어나라고 부름 받을 때까지”(E. Dickinson). 주님께서 깨어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일어나라고, 올려다 보고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심해의 죽음이 아니라 높은 곳의 생명을 위해 깨달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분께서 보시는 대로 삶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억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의 핵심을 보기를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회복될 아들과 딸들을 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다시 태어날 형제 자매들을 죽음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다시 활력을 되찾을 마음들을 처참한 고독 안에서 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떠안기를 두려워할 때조차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부활절에 그분께서는 그분이 삶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당신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온전히 살아내시기까지, 피땀 흘리심을 겪으시기까지, 버려지심과 죽음과 저승을 겪으시기까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승리히신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신뢰를 나에게 두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비탄을 춤으로 (시편 30, 12 참고) 바꾸시는 것에 전문가이십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과 함께 파스카(a Pasch), 즉, 과월제(a Passover)-자기 중심에서 친교로, 고독함에서 위로로, 두려움에서 확신으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고 있지 맙시다. 그분의 눈길은 우리를 희망으로 채우십니다. 그 눈길은 우리가 틀림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우리가 아무리 많이 망쳐 버려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 없으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한가지 확신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내 삶에서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나는 무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계신 분을 찾고 있는가? 

 

3.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 여자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천사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복음 24,6).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그분의 부르심을 기억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희망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을 잃어 버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무덤을 보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항상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첫사랑과 그분의 부르심을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그분을 기억하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몸을 다하여 그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살아 있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신앙은 부활 신앙이 아니라 “박물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유명인사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살아 계신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역사 책을 통해서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삶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맨 처음 어떻게 부르셨는지, 그분께서 우리의 어둠, 우리의 저항, 우리의 죄를 어떻게 이기셨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말씀으로 어떻게 어루만지셨는지 오늘 기억합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갈릴래아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그 여자들은 무덤을 떠났습니다. 살아계신 분이신 그분을 만나러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름 받기에 믿는 이들은 무덤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고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내 삶 안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떄때로 우리는 많은 우리의 문제들만을 향해서 가고 오로지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께 갑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필요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또는 다시 우리가 한때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얼마나 자주 부활하신 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후회와 비난과 상처와 불만들을 파내면서 죽은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신 분을 모십시다. 우리 문제들의 바다, 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죄의 모래톱에 좌초되거나 좌절과 두려움의 암초에 부서지지 않도록 은총을 간구합시다. 그분을 찾읍시다. 우리 자신을 그분이 찾으실 수 있게 놓아 둡시다.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모든 것을 넘어서 그분을 찾읍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되살아날 것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420_omelia-vegliapasqual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