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정순택베드로대주교 2022 성탄 메시지

나뭇잎숨결 2022. 12. 18. 17:45

 

 

 

 

 

 

[서울대교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을 구원하시는 빛으로 오시기를 고대해 왔던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 성탄을 맞이하여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 또한 북녘 동포들과 전쟁의 참화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포함한 세상 온 누리에 주님 성탄의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여 년 전 유다 지방의 베들레헴이라는 다윗 고을, 산골 마을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다윗 가문의 메시아가 말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 아주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진 아기 예수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얼기설기 엮어진 마구간 지붕 사이로 밤하늘의 별들이 들어옵니다. 아기 예수님의 그 맑은 눈동자가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발밑만 보지 말고, 가끔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우리네 삶이 고달프고 팍팍하여 그저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품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극과 극으로 달려가며, 서로 대립하고 대치하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음을 사회 여러 분야에서 보게 됩니다. 기술 발전이 가져온 사회관계망(SNS)을 통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시공의 제약을 넘어 통교를 가능케 하는 고마운 기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내면까지 이어주는 인격적인 교류로 깊어지기보다는, 자기주장 또는 자기과시의 무대가 되거나 상대적인 박탈감과 소외감을 조장하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현대의 기술 문명이 외적이고 피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영향 때문인지 현대사회는 눈을 들어 멀리 보고, 높게 보는 법을 잊어버린 듯 보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아기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와 더 높은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발밑만 바라볼 때, 혹은 앞만 바라보고 달릴 때 옆 사람은 경쟁자로 보일 뿐이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향할 때, 서로는 길동무가 되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만나게 됨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하고 있는 배타와 배척, 대립과 대치를 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피상적인 가치, 물질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서로를 경쟁자로만 여겨 밀치기보다는 더 깊은 의미와 더 높은 가치를 볼 수 있을 때, 실은 우리 모두가 서로 이웃이고 함께 나아가는 길동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류 문화가 여러 면에서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어 자랑스럽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가치를 두고 추구하고 증거해야 할 궁극의 한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이 참된 평화를 건설하여 전쟁으로 갈라지고, 패권으로 갈라지고 있는 세계에 평화의 길을 보여주고 제시하는 그런 ‘새롭고도 선도적인 한류’입니다. 참된 평화는 그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경청하고 포용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눈을 들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봅시다. 눈앞의 가치, 피상적인 가치를 넘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라고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성탄의 기쁜 은총이 여러분과 가족들, 그리고 온 겨레와 세상 모든 이들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광주대교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겨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죽음이라는 암흑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의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정점이며, 우리에게 삶의 가장 완벽한 희망을 제시해 주는 새로운 존재 양식입니다. 새로운 존재 양식이란, 우리의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 방식이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 용서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기에 우리의 일상 안에서 찾아오는 십자가와 수난을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고 만들어가는 은총을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삶 안에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현실은 벌써 3년째 접어들고 있는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아직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하셨듯이, 우리는 이미 교통과 통신에서 지구촌이라고 불릴 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세계가 모두 힘을 모아 이 감염병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서로가 너무나 밀착된 우리의 삶이 육안으로도 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서로에 대한 배려 깊은 거리두기도 깊이 성찰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이 생겨났고,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질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과 서방세계의 팽팽한 힘겨루기 속에서 그사이에 끼어있는 우크라이나는, 이번 러시아의 침공으로 천 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백만에 이르는 난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강대국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생존권조차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림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기근이 더 심해지는 영향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더 나아가서 러시아와 서방의 협상이 잘 이루어져서 전쟁을 멈추고, 모두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평화의 여정이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겪고 있는 현실이 때로는 절망스럽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라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정한 죽음이 있어야 부활할 수 있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인 파스카를 경험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며 동시에 자유요 해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앞에 펼쳐진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재의 어려움이 무겁고 비극적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잘 이겨내시고 부활로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모든 어려움들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주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우리 광주대교구는 3개년 특별전교의 해를 지내며,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대화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외쳐야 하는 기쁨과 평화는 어떤 것인지 성찰하고, 또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기 위한 쇄신의 노력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구에서, 그리고 각 지구와 본당에서도 계속될 우리의 이런 노력이 세상을 향해서는 빛과 소금이 되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밝은 미래를 약속해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반포 5주년(2021년 3월 19일)을 맞이하여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성가정을 본받으며, 가족 단위의 교육적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초대하시면서 “가정의 가치란 희망의 지평을 열며 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사랑에 토대를 두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이 기도의 집이 될 때, 가족애가 진지하고 깊고 순수할 때, 용서가 불화를 지배할 때, 삶의 일상적인 쓰라림이 상호 간의 따뜻한 애정과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따름으로써 가라앉게 될 때, 가정 안에서 진정한 친교를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가정은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돌보며, 우리 교회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우리나라와 온 세상의 평화도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주시고, 모든 가정에 은총과 평화를 가득히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2022년 성탄절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

 

 

 

[대구대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 놀라운 신비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며 이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탄의 기쁨은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우리 신앙의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 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성자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구원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께서 위대한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시 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권력으로 남들을 억누르며 더 높아지려고 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 더 부유해지려고 합니다. 하 지만 구세주께서는 더 낮은 모습으로, 더 나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암울한 소식이 만연합니다. 올 한 해에도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 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많은 민간인이 죽음에 내몰리고 고향을 떠나 피난을 갔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전쟁의 공포 속에서 성탄을 맞고 있습니다. 감염병과 전쟁의 여파로 세계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겨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습니 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이태원 거리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로 많은 젊은이가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다친 사람들은 어느 해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성탄절을 맞을 것입니다. 여야 정치의 극한 대립과 경기 침체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서민들의 겨울나기도 갈수록 팍팍해지 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맞는 성탄절의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훤히 비추는 것처럼, 예수님의 성탄이 이 사회와 여러분의 마음을 더 욱 밝고 따스하게 해 주는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 안에 빛을 밝힙시다. 그 빛으로 세상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밝혀나가야 하겠습 니다. 그리하면 분명 우리는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친 교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로 우리 교구는 10년 장기 사목 계획의 여정에서 세 번째 해를 맞았습니다. 저는 ‘복 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큰 주제 아래 말씀, 친교, 전례, 이웃사랑, 선교 라는 다섯 가지 핵심 가치를 2년마다 하나씩 실천하며 살 것을 제안했습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우리는 ‘친교로 하나 되어’라는 주제로 친교의 영성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사목 교 서」에서 밝혔듯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향해, 서로 함께, 서로 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시고,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일치를 향해 나아가 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예수 성탄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가 가장 잘 드러난 사건입니다. 성자께서 사람 이 되셨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성부께서는 그러한 아들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 성 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구 원 역사가 시작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랑이신 하느님과 친교로 하나 되고, 이웃들 과 친교를 나누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 성탄을 기뻐한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님을 잘 받아들여서 공동 체가 친교를 나누며, 그 친교로 하나 되어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신앙인 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살고 이웃과 피조물과 친교를 나 누며, 친교의 영성을 익히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복음의 기쁨으로 이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 내어 친교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합시다.

2022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대전교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성탄을 축하드리며, 교구민 한분 한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탄생하시듯, 충만한 은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아주 긴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 후손인 다윗에게 구원자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주시고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긴 시간을 기다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의 기적적인 탈출과 황량한 광야에서 40년 힘든 여정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식을 베풀어주시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주변의 나라가 부러워할 만한 문화를 이루어주시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등을 돌리고 타락한 역사에 빠져 유배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 지난 긴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몸속 깊이 새겨져 있던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시절에도, 부유함을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잊고 살던 때에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서 눈을 돌린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유배의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 반성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해주신 약속 곧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다윗 가문에서 영원한 왕권을 세워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태어날 한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고 그 이름이 용맹한 하느님이요 평화의 군왕으로 불릴 것이라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고 예고합니다(이사 9,5-6).
  그런데 그 아기는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이를 낳는데,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아기는 말 구유에서 태어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낮추어 오신 주님은 그 태어나신 자리도 이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 보면,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이 땅에는 그분의 탄생을 겸손되이 받아들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한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말에 더할수 없이 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데 에서, 마리아가 평소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 탄생에 관해 목동들이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 할 수 있었습니다(루카 2,19.49-51).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처럼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한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리아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보내 주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착한 사람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인간의 선한 생각도 하느님의 뜻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기꺼이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통해 하실 일에 자신의 삶을 봉헌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도구로, 요셉은 이 일에 꼭 필요한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는 구원의 역사에서 마리아로 혹은 요셉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요셉과 같이 협력자로 살아가는 사람입 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님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사십니다. 그분에게 시선을 주십시오. 고해성사 안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에게 가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분에게 달려가십시오. 가난한 이웃 형제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의 손이 되어주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안에 주님께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전합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마산교구]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다.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루카 2,10)

 

 

교우 여러분,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올해 많이 힘드셨지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금년에 겪었던 숱한 사건 속에는 그분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만남 속에서도 그분의 개입은 분명 있었습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 앞에서 아팠던 사건과 쓰라렸던 만남 속에 숨어 있는 그분 메시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삶의 밝은 쪽으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실패도 은총입니다. 상처도 은총의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열정을 쏟았던 것들이 좌절로 바뀌었다면 아기 예수님께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사랑했던 이들의 시선이 차갑게만 느껴진다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기 예수님 앞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새로운 시간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2022년은 조용히 보내고 2023년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출발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진정 힘들었던 부분부터 새 출발을 결심한다면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에너지를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 탄생하셨을 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알렸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려 한다.’(루카 2,10) 천사의 외침이 우리 본당과 가정에도 울리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두려움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목동들은 양떼를 돌보다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동료와 이웃들에게 천사가 되어 구세주 탄생의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자고 외쳐야 합니다. 하느님은 벌주는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신 따뜻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청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기도해온 그 땅은 먼 곳이 아닙니다. 바로 내 몸입니다. 평생 같이 살고 있는 가족입니다. 매일 만나는 관계 속의 이웃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그분께 찬미를 드리며 필요한 은총을 청합시다. 지난날 우리도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와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많은 분들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삶의 에너지가 요구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분께 은총을 청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교우들의 가정에 아기 예수님의 축복과 평화가 가득하길 빕니다.

2022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마산교구 교구장 서리 신은근 바오로 신부

 

   

 

[부산교구]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를...

 

 

  작년(2021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럽연합 사무국이 종교 차별의 이유로 “크리스마스” 대신 “공휴일”(holiday)이라는 단어를 쓸 것을 권장한 데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강하게 질타하셨지요. 그 이후 이 권장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고, 며칠 만에 철회되는 소동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참 의미는 잊고 단순한 축제로만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탄을 2천년 전 이스라엘 한 지방,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성탄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목자들 역시 성탄이 오면 강론 준비 등 여러 일에 마음을 쏟다 보니 성탄의 참다운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교우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라지만 예년 같은 설렘과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대림절 4주가 지나고 드디어 성탄 대축일을 맞았다. 조심스레 성탄 밤 미사엘 가고, 오늘 성탄 낮 미사에 참례했다.” 어느 교우가 쓴 글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인 듯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님의 성탄을 한평생 자신의 화두로 삼고 사셨던 분입니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강조하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내 안에 잉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자렛 마리아가 그리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항상 낮은 곳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본능과 이기적 삶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불우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 안에 예수님은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잡하고, 소음이 가득 차고, 온갖 세상의 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탄생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낮은 자리에서 기도해보십시오. 그분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 “성탄을 일흔 번도 넘어”를 일부 인용합니다.

    성탄을 일흔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권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저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신
    그 무한한 당신의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들처럼
    순수한 환희로 조배할 줄 모르옵네.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어 가장 미천하게 오신 그 크신 사랑에 고개 숙여 경배드립시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도록 편안한 자리를 마련합시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 삼 석 요셉 주교

 

 

 

[수원교구]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의 탄생을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축합니다. 이 세상에 성령의 위대한 업적이 일어났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하고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세상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거처를 세상에 두신 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몇몇 개인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의 빛이 온 세상을 널리 비추도록 우리가 초대받았습니다. 우리의 소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오늘을 맞이합시다.

1.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작년 10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친교, 참여, 사명’이란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의 긴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번 세계주교시노드를 기존의 기간보다 더 늘리시고, 그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하여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교회, 곧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성삼위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하나 되어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것을 일컫습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6항 참조). 이러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 교구는 교회를 구성하는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새롭게 다가온 것도 있었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수많은 소리가 참된 성령의 소리인지를 식별해야 하고,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한마음으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시노달리타스 정신은 마치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데서 출발합니다.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자렛의 한 처녀를 통해 위대한 구원의 업적을 이루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 사회의 변두리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본당이나 교구에서 자기 역할을 찾으려고 애쓰는 작은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소리,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소리를 경청하며,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식별하고 그 일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의 삶 안에, 우리 사회 안에, 우리 지구촌 안에 개입하심을 믿고, 성모 마리아처럼 그분의 개입에 순종하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영적 쇄신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시대를 힘겹게 겪었습니다. 이 감염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한 시대에 맞춰 새로운 열정,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이 시급해 보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만물에 앞서 계셨고, 만물 안에 존속하시며, 만물 위에 계시면서 우리를 신적 생명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아기 예수님에게서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보는 우리의 눈은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을 새롭게 불러일으키십니다. 이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과거의 나쁜 습관과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합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신앙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청합시다. 그리고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는 사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이러한 영적 쇄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2023년은 수원교구 설정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빗대어 본다고 해도 그 의미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우리는 영적 쇄신과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대리구, 지구, 본당은 시노드 정신 안에서 각자의 영적 쇄신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 쇄신을 위한 여정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해야 합니다. 우리 교구의 모든 구성원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영적 쇄신에서 찾고 또 얻어야 합니다. 나아가 영적 쇄신으로 힘을 얻은 우리는 코로나19로 하느님과 잠시 멀어진 교우들과 청소년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팬데믹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바라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에 오시어, 우리의 삶에 빛을 밝혀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2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안동교구]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말씀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현존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나신 주님의 성탄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이 되고, 이로써 우리 주님의 성탄은 우리에게도 성탄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성탄 인사를 할 때, 이 인사는 주님의 성탄을 경축하는 의미도 되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자신의 성탄을 축하하는 의미도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에 주님의 성탄도 경축하고 우리 각자의 새로운 탄생, 곧 성탄도 축하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이 인사를 이러한 새로운 의미를 함께 담아서 서로 나눈다면 ‘성탄의 참된 의미’를 우리 각자 마음에 더 잘 되새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러한 의미의 성탄 인사를 제안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성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성탄 인사를 서로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요한 1,14)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시니 우리는 새로운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출발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버림받고 쫓겨난 운명을 한탄하며 주저앉아 있을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몸소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 길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요한 1,14) 오신 것입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 새로운 삶을 위해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요한 1,14) 오신 성탄의 새로운 의미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추한 마구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마구간은 죄로 물든 우리 자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러한 마구간 같은 우리 안에 태어나시려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구간 같은 보잘것없는 우리 안에 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십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던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성 대 레오 교황(400-461)께서 주님 성탄의 은총과 축복에 대해서 하신 말씀대로,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도 똑같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내 안에 아기로 태어나셨으니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시게 되면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정말로 놀랍게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성탄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출발하라는 고마운 초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탄 덕분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움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오늘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어려운 상황들이 우리의 앞길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두가 힘겨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함께 힘을 모으지 않으면, 함께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친히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오신 하느님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며 기도하고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새로운 삶에 초대하시는 주님 성탄의 축복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특별히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2년 12월 25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원주교구]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 찬미예수님,

올해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어둠을 비추는 빛이 필요합니다. 
동방박사들에게 비추었던 별 빛, 빛에서 난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태풍 힌남노, 이태원 참사, 물가상승 등등을 비롯하여 인재를 포함한 재앙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0.8%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더욱 어둡습니다. 
전문가들은 2050년에는 현재 인구의 절반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변화와 파장을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고민하고 있던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들도 꿈을 꿉니다. 
요셉의 꿈 이래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래도 희망합니다. 
우리들도 천사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듯이 천사의 메시지를 경청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요셉이 들었던 천사의 메시지, “임마누엘”, 목동들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함께하시는 그 하느님, “임마누엘”을 희망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의 핵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절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하고 참된 희망은 오로지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다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사랑하시는 하느님 뿐이십니다.”

올해 다시금 맞이하는 이 성탄절은 우리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 그리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시금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원주교구 교우, 수도자, 사제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2022년 12월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힘과 용기를 내어라.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겠다”(여호 1,9).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찬미를 드리며 의정부교구 형제자매님들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3년에 가까운 코로나 기간을 보내며 큰 어려움을 감내하신 여러분에게 이번 성탄이 더욱 큰 기쁨의 축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기쁨과 희망을 주러 오신 주님
금년 한해 전 세계와 우리 사회는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고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에 의해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는 최근 몇 달 사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이어지고 있고, 미․중 관계의 악화를 비롯해 긴장이 고조되는 주변 정세로 불안감은 커졌습니다. 국내외 경제 상황은 어려워져서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고통이 늘어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이태원 참사는 큰 슬픔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대결로만 치닫는 정쟁으로 국민의 고통은 외면받고 있으며,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실망스럽고 허탈할 뿐입니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우리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세주 오실 것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온 이사야의 노래가 마음에 다가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마치 광야와 사막이 우리 마음이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느껴지기에, 즐거워하고 꽃을 피우며 환성 올리는 날을 고대하였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이 사회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새로 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 자체이신 분입니다. 혼탁한 세상이기에, 그 희망과 위로는 더욱 밝고 찬란히 빛을 냅니다.
그런데 구세주의 빛과 찬란함이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인 약한 아기의 모습을 통해 드러났다니 참으로 엄청난 역설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은총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약한 이와 같아지신 모습, 아니 그보다 더 나약한 모습으로 누워계신 모습이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위로의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알려주신 산상수훈의 “참행복”(마태 5,1-12 참조)에서 그 의미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부유함만을 추구할 게 아니라 가난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는 혼란한 시대를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줍니다. 높은 데가 아닌 낮은 곳, 화려함이 아닌 소박함, 무분별한 외침이 아닌 겸손한 침묵. 바로 이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주님께서는 구유에 고요히 누우신 모습으로 말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셨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며 영원한 행복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이 나가야 할 길
우리의 시야를 흩트리고 하느님과 이웃 대신 자신에게만 향하게 하는 혼란한 시대에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최근 개봉한 영화 <탄생>을 관람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다룬 이 영화로 보고서 신부님의 서한들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나는 절대로 내 천주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내 교(敎)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 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 신인 만물의 조물주이시고 상선벌악 하시는 분이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공경을 드려야 하오. 관장님, 천주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게 해준 데 감사하오”(스무 번째 서한 중).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처럼 천주교 신자임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임을 감추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우리의 모습이 이웃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어려운 이웃을 환대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변 이웃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살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존재로 생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주변 이웃에게 다가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선교하는 작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교회가 모여 하나를 이루는 신앙 공동체라면,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서 어두운 이 시대에 성탄의 빛을 널리 밝히는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여호수아기의 말씀으로 성탄 인사를 드립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겠다”(1,9). 서로 일치하여 하나 된 공동체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의정부교구 모든 형제자매님에게 주님의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를 빕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가정에 성탄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인천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빛 안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이 넘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도 특별히 대림 시기를 지내며 차별, 대립과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실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 미사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렇게 성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 되십니다.”

이처럼 성탄의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공동번역성서 1요한 4,9)”(458항)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 빛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코로나19 감염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서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도와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연대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돌봄의 중요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전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은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교황님의 말씀처럼 형제애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코로나19와, 언제 다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사회지표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어렵게 합니다. 개인주의라는 편안함과, 나누지 않기에 유지되는 풍요로움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 대해 무관심을 키워갑니다.

또한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이익,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형제애가 아닌 무관심이 더욱 점철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안위나 소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극화의 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소통 부재로 인한 불만과 화만 가슴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차 우리는 이웃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닫으려 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슬퍼하지도 못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빛은 소수의 몇몇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 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모두와 함께 이 기쁨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그 빛이 주시는 희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탄을 통해 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깊이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이 성탄에 우리 모두 구세주의 사랑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형제애를 나누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이는 이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만나고 대화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빛의 자녀다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 한 형제로서 함께 기쁜 성탄을 보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 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전주교구]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천사는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온 누리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이 구세주의 탄생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전부터 간절히 기다려왔던 일입니다. 특히 짙은 어둠 속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을 때 더욱 간절히 바랐던 소망입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장차 태어날 구세주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렇게 간절했던 소망이 이제 실현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물 혹은 양심을 통해서만 더듬어 알 수 있는, 멀리 계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이는 나 자신에게도 관련됩니다. 나 역시 목자들처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루카2,15) 그리고 서둘러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목자들처럼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깨어 있음은 무엇일까요? 깨어 있음은 일차적으로 잠에서 깨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기 자신만의 특별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욕망과 관심과 생각에 갇히어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않고 자신만의 특별 세계에 머뭅니다. 이로부터 온갖 갈등과 싸움과 분열이 비롯되고, 진리에 반대하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마침내 우리가 크게 경계해야 할 극심한 개인주의, (집단)이기주의, 상대주의 등에 쉽게 빠집니다.
  깨어 있음은 그러한 특별 세계에서 벗어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관련된 공통의 현실로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진리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깨어있음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이 우리 세상에는 너무 많아서 하느님을 향한 감각을 기르는 것은 우리 시대에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듯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깨어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를 제대로 듣고, 아울러 탄생하신 구세주께 달려가 경배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구유에서 놀라운 표징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표징은 하느님의 겸손으로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작게 만드셨다는 것 곧 작은 아이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작은 아기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할”(루카 2,20) 것입니다.
  둘째,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하신 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전과 성경 안에서, 전례와 성사 안에서, 기도 안에서, 선교 활동과 사랑의 실천 안에서 하느님을 생생하게 만납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특히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셋째, 깨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둡니다. 주님 친히 우리 가운데 한 사람, 그것도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가 되시어 초라한 구유에 누워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마지막 넷째로 하느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서둘러”(루카 2,16) 떠났습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떠났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면, 하느님의 일을 그냥 지나치거나 미루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가장 우선되고,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집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자신만의 특별 세계에서 빠져나와 하느님께 돌아선다면,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을 것”(요한 1,16)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성탄절과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2022년 성탄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제주교구]

사랑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주님의 뜻: ‘성탄’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아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에도,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 본성을 취하여 한 아기로 이 세상에 강생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요,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인간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의 뜻 안에 무한한 사랑으로 쉼 없이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인류가 겪어온 전쟁의 비극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분쟁지역에서 발생하는 참혹한 일들을 바라보며, 과연 인류가 진화된 문명사회의 성숙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다른 나라로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한국사회 역시 지난 10월 말 이태원 참사를 비롯하여 불안한 남북관계에서 오는 긴장 상황, 정치권의 혼란 등과 함께 경제까지 위축되는 현실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서는 사회 취약계층이 소리 없이 스러져가고, 자식과 부모 간 인륜을 저버리는 사건이나 소중한 생명을 낙태시키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아픔과 고통 속에, 제주사회 역시 제2공항의 갈등 속에 생태환경의 파괴라는 위기와 마주하며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인 욕망이 빚어내는 불안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함께하는 ‘시노드의 여정’을 통해 이러한 시대적 징표들을 함께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그냥 놔두시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허무요, 고뇌의 바다일 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을 선포하셨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처지가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인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도,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사랑 충만한 성탄의 신비를 새롭게 살도록 다짐합시다. 

우리를 혼란케 하는 현실은 “진리”와 “선”이라는 기준이 흔들릴 때입니다. 세상은 개인이든 단체가 되었든, 자신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요 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은 곧 어둠의 세상입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성탄 밤 미사 복음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평화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참된 진리와 인류 공동선은,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선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유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진리나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와 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하고 진리인 것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진리이며 참으로 선한 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라도 선합니다. 비록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의 양식에 따라 차이가 있더라도 진리와 선은 모든 시대나 장소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단호히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며 살아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가운데 모든 인류의 가치와 공동선을 함께 공감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시금 일깨우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 가운데 포대기에 싸여 계신 아기 예수님을 진심 어린 눈길로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한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로 옮겨가도록 구체적으로 노력합시다. 다시 한번 주님의 성탄으로 여러분 가정에 은총이 충만하고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2022년 성탄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주교

 

 

 

[청주교구]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루카 2,1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탄을 경축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툼과 전쟁, 가난과 기아, 질병과 상실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이 풍성히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1. 우리의 위로이신 아기 예수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탄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사실보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모든 부요함을 내려놓으시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탄의 신비를 가리키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다’(1티토 2,11. 성탄 밤 미사 제2독서 참조)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격이 있다거나 그분의 법을 충실히 지킨 이들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너무도 크셔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요한 3,16 참조) 우리 모두에게 그 아기가 무상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며 위로와 희망을 얻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고을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로 베들레헴, 곧 “빵집”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빵으로 오셨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삶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유년기 100쪽 참조). 이처럼 성탄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가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2. 우리의 평화이신 아기 예수님
  성탄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함께 나눕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서두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루카 2,1 성탄 밤 미사 복음 참조). 당시 로마 제국은 무려 백 년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을 통해 세상의 평화를 구현했다고 자부하며 그것을 경축하였습니다. 복음서는 황제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함께 언급함으로써, 인간이 전쟁과 폭력을 통해 구축한 세상의 평화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참 평화를 대비시킵니다. 전쟁과 독식을 통해 평화를 이뤘다고 믿어온 제국의 평화는 당신 스스 로를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실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참 평화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힘과 권력을 좇아가며 더 소유하고 더 군림함으로써 쟁취하는 평화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처럼 더 낮아지고 더 내어줌으로써 얻게 되는 참 기쁨과 평화입니다. 구유 앞에서 우리는 생명을 유지시키고 살리는 것이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탐욕이 아니라 사랑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마주하는 괴로움, 어려움, 고통이 우리 각자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마르고 냉혹한 현실 한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우리 곁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참된 위로와 기쁨,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깊은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대림 3주일 삼종기도 훈화 참조, 2017년 12월 17일).
  형제자매여러분, 우리 민족의 분단의 상처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반목과 갈등의 아픔을 구유의 아기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시고 화해와 평화의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청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구유에 누워계신 평화의 아기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참 평화를 배우고 그 평화를 마음에 품으며 형제자매들의 손을 맞잡고 서로 격려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평화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의 평화를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3.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신 아기 예수님
  하느님께서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성탄의 신비 속에 씨앗처럼 담겨 있습니다. 성탄을 전하는 복음서의 말씀 가운데 마리아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는 대목을 떠올려 봅시다(루카 2,12 참조).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은 힘겹고 궁핍한 여건 속에서도 성모님과 성 요셉은 최선을 다해 태어난 아기에게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려 애썼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모범을 통해 우리 마음에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아기 예수님을 우리 일상에서 영접하고 돌보고 섬기는 삶의 양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우리에게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고 아기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는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표징입니다. 성탄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님처럼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권능을 세상에 드러내는 작은 표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겸손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품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홍승의, 초록물고기 40쪽 참조). 신자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께서 시작하시고 당신의 삶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묵묵히 일하며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려 오신 모든 신자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아기 예수님의 위로와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2022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춘천교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3)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라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은 구원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성령의 은총을 통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환희의 선물입니까? 해마다 맞는 성탄절은 우리가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모든 시련과 고통에 맞설 힘을 예수님 안에서 찾게 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멀리서 온 이방인을 위한 빈자리 하나가 없어 당신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는 지금 꿈을 잃어버린 이들, 가난하고 고립된 삶에 숨이 막히는 이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시어 모든 것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때문에 베들레헴의 구유를 잊고, 수많은 허영의 구유에 우리 자신을 내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가난해 보였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던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 구유는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분의 참된 힘과 진정한 자유는 약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을 당신의 가난과 겸손으로 선포하고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우리가 여기는 모든 상황에서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환대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들을 절대적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느님의 신비, 세상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하고 따뜻한 관계를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성탄은 불확실함과 두려움의 감정을 새로운 사랑의 힘으로 바꿀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사랑의 힘은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스스로 환대의 땅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도 변화합시다. 주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을 떨치고, 동참하고 연대하는 신앙인들로 거듭납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두 팔을 뻗어 아기 예수님을 들어 높이듯이, 병들고 헐벗고 목마르며 갇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품에 안읍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작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태한 무관심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귀를 열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든 이들 안에서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언제나 사랑과 기쁨이, 특별히 우리 안에 오신 큰 빛이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큰 빛으로 오신 주님 성탄 대축일에
춘천주교 김주영 시몬

 

 

  

[군종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9)

 

 

사랑하는 장병, 군 가족, 수도자, 사제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여, 먼저 국토방위에 수고하는 모든 장병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또한 군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종사제와 수도자, 군인 가족 그리고 군종교구에 아낌없는 사랑과 후원을 보내시는 신자 여러분들께도 성탄의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 2022년은 참으로 힘든 한해였습니다. 나라 안과 밖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 보건 이슈가 여전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세계 각국은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서로 간의 장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내부적으로도 이념 대립이 심각할 정도로 격화되고 있으며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경제 상황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인해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암울한 시기, 마치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암흑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구세주께서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올해도 우리 안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구원하시려 오늘 이 밤, 믿는 이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선교의 열매, 세례성사!”

저는 2023년 군종교구 사목표어를 “선교의 열매, 세례성사!”라고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사목방문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였던 각 본당의 상황은 병사, 간부, 군인 가족 가릴 것 없이 교회 공동체 안에 신자가 너무나도 줄어든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종교 활동에 많은 차질이 있던 기간에 군 안에 있는 인원들이 빠르게 교체되었습니다. 사실 군이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인해 군 성당의 신자들은 전입·전출이 엄청나게 잦은 데다가 심지어 전역을 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병사 신자는 1년 정도, 간부 신자는 10여 년 정도 지나면 교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종교구는 끊임없이 선교하고 세례를 베풀지 않으면 금방 공동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우리 군종교구는 2023년, 좀 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세례성사라는 많은 열매가 맺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동방박사들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교회의 전승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이방인이란 단순히 국적의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르지만, 별빛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별을 쫓아 이스라엘 땅에 잘 도착한 그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아기가 당연히 왕궁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헤로데 궁궐에 가서 아기의 탄생에 대하여 묻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던 아기 예수님은 왕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박사들이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은 왕궁이 아니라 그들을 이스라엘 고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구간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못 했습니다.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박식한 성서학자들도, 권력자였던 헤로데도, 이러한 모습의 메시아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10) 즉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정치적 힘도 아니고, 재력도 아니며, 다량의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 추구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도, 전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의 이방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것은 어둠 속에 빛나던 ‘작은 별’이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그 반짝임! 그 반짝임에 이끌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유아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어버이의 사랑 덕분에 주님께 인도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입교를 하신 분들 또한 자신이 선택하여 입교하였지만, 결국엔 다른 천주교인의 삶,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헌신적인 삶을 보고 인도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별처럼 빛나는 사랑의 인도로 하느님의 길을 찾게 되었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별빛을 따라왔다는 복음서의 말씀을 결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나도 예수님 같은 모습과 방식으로 빛이 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군 안에서, 군인과 이웃 사이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신앙을 전하는 역할에 충실해 주실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2023년 한 해 동안, 자신이 세례성사 때 받았던 하느님의 은총을 자주 상기하며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또 하나의 ‘신앙의 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분명 신앙의 별빛의 인도 속에 축복의 길을 걷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군대에 파견된 선교사로서 이웃을 주님 제단에로 인도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지닌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 개인과 각 가정, 그리고 부대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Merry Christmas!

202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낮미사) -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제1독서 이사 52,7-10 / 제2독서 히브 1,1-6 / 복음 요한 1,1-18

요한복음 주제 담은 ‘로고스 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주님의 빛
성탄의 신비 온 세상이 노래하네

가톨릭신문사 발행일2022-12-25 [제3324호, 19면]

 

 
                                             프란체스코 디 조르지오 마르티니 ‘탄생’ (1475년).

 

 

 

■ 산타가 되어버린 하느님

전례력의 그 어떤 축제도 성탄만큼 동심에 와 닿지 못할 것입니다. 수십 년 전 가난한 시절에도 거리에 울리는 캐럴과 반짝이는 장식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머리맡에 둔 양말짝까지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 많았지요. 성당에서 나눠주는 선물이나 성탄 공연 같은 추억은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도 요즘 사람들의 발길을 구유 앞으로 돌리기엔 부족한 모양입니다. 많은 이들이 동심어린 성탄 이미지와 대비되는 현실에 시선을 뺏깁니다. 어릴 적에는 몰랐던 인생의 일그러진 면들을 보고 세상의 각박함을 겪어내면서, 거룩함과 순수함 같은 단어와 현실 사이에 접점을 찾지 못합니다. 동정 성모의 출산도, 아기 예수의 거룩함도 순진무구한 시절에나 통할 전설로 여깁니다. 신앙은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적 공상이 되고, 하느님은 산타클로스 비슷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다 한번씩 생각은 나지만 평소에는 나와 관계없는 분, 행여 나를 찾아오실 때는 오직 선물만 주셔야 하는 분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평범한 일상이나 불안과 고통의 시간에 하느님을 찾을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탄 판공성사도 성가시기만 합니다. 성사를 보고 잠시 순수한 마음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고해소 밖의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세파에 찌든 자기도 바뀌지 않을 테니 성사를 봐서 뭐하냐는 겁니다.


■ 우리 가운데 계시는 말씀

그러나 주님 성탄 대축일에 듣는 하느님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탄 낮미사에 선포되는 복음(요한 1,1-18)은 일찍부터 ‘로고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대단히 시적이고 철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이 찬가는, 원래 요한의 공동체가 부르던 찬미 노래였으리라 추정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 말미에 왜 이 복음을 기록했는지 밝히지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이렇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 선포하는 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면, 로고스 찬가는 이 주제를 장엄하게 여는 서곡입니다. 여기서 단연 두드러지는 말은 ‘말씀’이라 번역된 그리스어 ‘로고스’(λογος) 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 신앙인들은 두 가지 문제에 답해야만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구약의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야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철학의 배경 하에 성장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해야 했습니다. 로고스는 그런 상황에서 대단히 유용한 말이었지요. 창세기 첫 구절을 연상시키는 ‘한처음에’(요한 1,1) 계셨던 로고스,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면서 창조를 실현하신 영원한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지 뛰어난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드님이란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라고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오직 하느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신앙인들이 직면했던 두 번째 문제는 신앙을 오로지 정신적이고 지성적인 활동 정도로 이해하는 영지주의적 경향이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아파트 옆 동에 사셨다’쯤 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는 사건은 영지주의가 말하듯 순수 지성의 공간이나, 구질구질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유토피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요한복음은 이렇게 복음이 집필되던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알립니다. 그런데 이 언어와 표현이 요즘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렵지요. 더욱이 하느님을 산타클로스 정도로 여기는 어린 믿음과 그분을 비루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분으로 보는 편견에 머무는 한, 성탄의 신비는 ‘제 생일도 챙겨먹기 힘든’ 사람들에게 너무 먼 ‘남의 생일’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분명히 전합니다. 몸도 마음도 무탈한 사람들만 비추는 빛이 아닙니다. 너무 순진해서 현실감각 떨어지는 사람들만 비추는 빛도 아닙니다. 요한 당시의 언어와 철학에 정통한 사람만 비추는 빛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신비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구유에 아기를 뉘여야 했던 가난한 부부에게도(요한 1장), 혼인을 치르면서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2장), 허기진 오천 명의 장정에게도(6장)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병마에 시달린 이(5장),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이(9장), 죽은 지 나흘이 된 라자로(11장)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급기야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이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어디서 뵐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탄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비춰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누추한 일상 안에 계시고,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 안에, 고통을 대물림하는 이들 안에, 죽음의 절망 앞에 선 이들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화답송 시편을 함께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합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