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 Already come and go again.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심장입니다” & "대림은 희망에 대한 끊임없는 호출"
- 프란치스코 교황 대림 미사 강론 중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29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전날 새로 서임된 추기경 11명과 함께 대림 제1주일 미사를 집전했다. 교종은 미사 강론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례력으로 새롭게 한 해가 시작되는 오늘, 기도하고 싶은 소망과 ‘그리스도인의 심장인 사랑’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주님과 더욱 가까이 다가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했다. 강론 내용.
오늘 복음과 독서의 중심에는 대림절의 두 가지 핵심 단어인 ‘친밀함’과 ‘경계심’과 함께 무관심의 어두움에서 깨워 달라는 하느님께 대한 탄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63,16ㄹ-17.19ㄷㄹ;64,2ㄴ-7)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오늘 복음(마르코 13,33-37)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십니다.
오늘 시작되는 대림절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 위해 내려오신 하느님의 친밀함을 기억하는 계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64,1)며 하느님의 강림을 간구합니다. 오늘 화답송(시편 80편)도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라며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신앙의 첫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하며 가까이 계셔야 한다고 하느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대림절과 전례의 해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함을 인식하고 그분께 “한 번 더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만 자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삶에 하느님을 초대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대림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가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을 상기시켜 주며 신자들에게 매일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소서)라는 전통기도를 우리 삶의 중요하거나 어려운 모든 순간과 집회, 공부, 일,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주 바치기를 촉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늘 깨어 있도록 훈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바로 “깨어라!”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깨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한 가지 큰 실수는 천 가지 일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헛된 일 때문에 필수적인 것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어둠과 피곤함 속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빛이 올 것입니다. 어두운 밤의 그림자가 쫓겨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분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낙담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희망 속에 사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기다린다면 왜 지상의 염려에 사로잡혀야 합니까? 왜 우리는 돈과 명성, 성공에 대해 염려해야합니까? 낮의 빛이 우리를 기다리는 밤에 대해 불평하며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깨어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밤에 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조차 여러 번 졸고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그분이 사형선고를 받을 때까지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같이 똑같은 졸음이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위험한 종류의 졸음이지만 그것은 평범한 졸음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잊고 무관심에 만족하며 문제 없는 존재만을 염려할 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평범함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열망과 변화하려는 대담한 노력, 사랑에 대한 용기, 끊임없는 발전입니다. 믿음은 불을 끄는 물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경계의 기도로’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더 높은 것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주님과 조율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독에서 해방시키고 희망을 줍니다. 기도는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관심과 잠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관심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두운 밤이 그들 마음속에 내리고 즉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불평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모두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느끼고 결국 모든 것에 대해 우울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길은 ‘자기애’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심장입니다. 심장 박동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랑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동정심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게 될 미래인 주님의 날을 이미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자비의 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기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당신은 빛입니다. 평범함의 잠에서 우리를 깨우십시오. 무관심의 어둠에서 우리를 깨우십시오. 마라나타! 주 예수님, 우리의 산만한 마음을 깨워 주십시오.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사랑할 필요를 우리 안에서 깨워 주십시오.”
"대림은 희망에 대한 끊임없는 호출"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29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새로 서임된 추기경들과 대림 첫 주일 미사를 집전하고 곧이어 성 베드로 광장 발코니에 나타나 광장에 모인 신자와 함께 주일 삼종기도를 바치고 가르침에서 대림절은 구세주 탄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시기라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오늘 대림 첫 주일은 교회의 새로운 전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 생애와 구원의 역사에서 주요 사건을 축하하는 시간의 흐름을 표시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모이신 교회는 우리 인간 존재의 길을 밝히고 우리의 일상을 지원하며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만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특히 오늘 대림 첫 주일은 우리가 기대와 희망의 시간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대림절의 첫 번째 '중요한 계절'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성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1코린 1,3-9)에서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에게도 세상의 끝에 오시고 매일 오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주의를 집중하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하느님은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역사상 정확한 순간에 오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요즘 우리들은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해 걱정하면서 비관주의와 폐쇄, 무관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의 도움이자 방패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 있게 주님을 기다리면 삶의 어두운 순간에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시작되는 대림절은 예수님 오심의 희망에 대한 끊임없는 요청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역사에 현존하여 궁극적인 목표와 충만함으로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사건을 통해 우리와 함께 여행의 의미, 일상생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우리가 위협을 받거나 고통을 받을 때 용기를 주도록 도와주십니다. 삶의 폭풍 속에서 하느님은 항상 손을 내밀어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최근 코로나19 대유행은 우리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특히 대림절 기간 동안 기도와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절제와 기도와 관심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한 더 큰 절제와 신중하고 존중심 있는 관심과 하루 몇 분이라도 간단한 가족기도 이 세 가지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분도 명상의 집에서
안강욱 호영베드로 신부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오기를 기다리다’는 뜻입니다. 라틴어로 대림은 ‘Adventus’입니다. ‘오다, 도착하다’는 뜻입니다. Adventus는 이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신이 자기 신도들을 만나러 자기 신전에 일년에 한번 찾아오는 것을 뜻하였다고 합니다. 이 단어가 그리스도교 용어로 바뀌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오심을 나타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대림인 Adventus는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 그리스도의 육화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재림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대림인 Adventus는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기다림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은 우리가 깨어 있게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기다림은 나를 정숙하게 가꾸어줍니다. 나를 정화시키는 회개를 하도록 합니다.
그러기에 대림인 Adventus는 나를 깨어 있게 하고, 나에게 희망을 가지게 하고, 나를 깨끗하게 준비하도록 회개하고 정화시켜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 기다리기를 촉구하시면서 노아 때의 홍수의 비유로 우리를 일깨워주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가 닥쳐 모두가 휩쓸려 갔다.’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장가들과 시집가는 것도 가장 중요한 인륜지대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일들을 하다가 왜 망하고 만다고 하셨을까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만 사람들이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는 것을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는 모르기 때문이다.’고 하십니다.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어제 복음에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고 하시면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고 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 성경말씀은 ‘깨어 기다리라’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깨어 기다리지 않을 때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것들에만 마음이 빼앗기고, 방탕하고 만취하며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흐트러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가시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마시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무디게 되면 이내 곧 그리스도를 떠난 일상에 파묻혀버리곤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면 이내 세상 일에 마음에 빼앗겨버리는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상 속에 매여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놓치고,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깨어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또다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경에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저 활자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좋은 말이구나 하는 고개 끄덕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이 되고, 내 삶의 기둥이 되어, 삶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없이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바벨탑을 여전히 쌓아올리고 싶은 욕망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기에 대림시기를 맞으면서 나를 다시 정화시켜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다시 나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내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다시 나의 정신을 깨어있게 만들어줍니다.
그러기에 이 대림시기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정화시키도록 합시다. 그리고 깨어 기다리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느님은 은총으로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을 준비하고, 재림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대림 시기로 한 해의 전례 주기를 시작하는데, 그 기간은 4주간이다.
[ 유 래 ]
교회 안에서 대림 시기의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4세기 말경에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6주간 동안 참회의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이때의 대림 시기는 전례와는 상관없이 성탄을 준비하기 위한 금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6세기 이후 로마와 라벤나에서 비로소 대림 시기가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으나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 4주간으로 고정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대림 시기가 한 해의 끝 무렵에 거행되었고, 그 의미도 때가 차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에 찬 시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차츰 다른 지역 교회의 영향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준비하는 금욕적 성격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 전 례 ]
예수가 승천한 후부터 다시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삶이라면 대림 시기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고 우리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확신하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림 시기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 전 4주 동안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완성될 마지막 날까지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도해 준다.
교황청의 전례 성사성은 1970년에 개정한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 (Normae universales de anno litrugico et novum calendarium romanum generale)에서 로마 전례가 지녀온 대림시기의 두 가지 성격을 보존하여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 사이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하여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영혼이 인도되는 시기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이와 같은 이중적 성격 때문에 대림 시기는 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39항).
이 지침에 따라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를 4주간으로 고정하고 전례의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별한다.
대림 첫 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반부는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고, 12월 17-24일의 후반부는 임박한 구세주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대림 시기의 각 주일의 주제도 이와 같은 전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대림 제 1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하고,
제 2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제 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제 4주일은 예수 탄생의 예고와 그분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대림 시기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문들은 주로 이사야 예언서와 세례자 요한의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 예언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쓰라린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메시아와 구원 시간의 도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의 시간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다.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림 시기는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와 구원 신비와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에, 오롯한 마음으로 성자를 기다리는 마리아는 오시는 구세주를 맞기 위하여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협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대림 시기 전례에서 잘 부각된다. 대림 시기에 거행되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은 대림 시기를 중단하는 축일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의 한 부분을 구현하는 축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된 마리아는 구원된 인류 중의 첫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의 결정적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을 대림 시기에 거행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또한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다.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는 성가를 도와 주기 위해서 사용하며 단독 연주는 피한다.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대림초를 켜는데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한다.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뜻하고 4개의 초는 구약의 4천 년을 의미한다. 구세주가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셨는지 알려 줌으로써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매주마다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켜간다. (처음으로)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지속적인 대림 시기를 살아야 하는 교회에 깊은 신학적 의미를 보여 주는 전례 시기이다.
* 구원 신비의 종말론적 차원이 강조되는 시기 :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세주가 되셨다. 이 부활하신 분이 시간이 다 찼을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그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임을 증언하는 것이 대림 시기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순례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과, 아울러 모든 신앙인 안에서 장차 실현되어야 할 구원과 마지막 날 구세주요 심판자로 다시 오시어 완료하실 구원 경륜의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산다. 대림 시기의 전례는 이와 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강조한다.
* 희망에 찬 기다림의 시기 : 대림 시기는 신앙인으로서 항상 지녀야 할 자세. 즉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영성의 학교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례는 신앙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깨어 기다리도독 강조한다. 첫 주부터 "야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시편 25편)라고 고백한다.
계시의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한 분이기에 약속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릴 때 신앙인 개개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교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드러난 실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구세주가 오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구원의 소식은 신앙인들에게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지금은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지만 어느 날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올 것이기에(1고린 13,12) 교회는 이 만남을 깨어 기다리며 기쁨 가운데 살아간다. 대림 시기에 교회가 드리는 기도문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는 기쁨에 차서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 회개의 시기 : 주님께로 향하는 회개 없이는 그분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삶을 정비하고 새롭게 주님께로 향하여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 시기의 영성이다. 가깝게는 임박한 성탄을,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에 오실 구세주를 만나 뵈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당신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다시 당신께로 향하도록 끊임없는 회개를 촉구한다.
대림 시기는 이렇게 회개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응답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는 참으로 대림 시기의 소리이다.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닦아, 오시는 그분을 영접하라고 재촉하는 외침이다.
* 대림절을 지내는 신앙인의 자세
대림시기는 바로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도와 극기, 회개( Metanoia)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며 " 당신은 하늘을 뚫고 내리 오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있다.
대림절 기간동안 교회는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기도, 단식, 자선의 행위를 적극 권면하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공식적으로 이 행위를 공동으로 실천하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우들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연대의식 속에 몸과 마음을 정리하여 주님을 기다리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즉 예수가 "복된 사람"이라고 선포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과 형제들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 마음의 순결 :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없이 태어나시고 동정녀로서 주님을 맞이하신 것을 본받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2. 겸손 : 마리아 막달레나의 겸손과 통회와 뉘우침의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의 자비와 전능에 대해 영광을 드리고 겸손되이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3. 신뢰심 : 우리가 약하다고 실망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메시아에 대한 유태인들의 신뢰심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을 온전히 믿고 바라야 한다.
4. 표현 :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꾸준히 기도와 희생을 하며 기쁨과 희생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 (처음으로)
[ 대림절의 풍습 ]
1) 축복의 예절
사람은 누구나 복되기를 바란다. 구원과 안전과 행복 그리고 자기 생명의 완성을 갈망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문안하며 축복의 말을 교환한다. 대림절이 되면 매일의 고유미사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주의 은총과 축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미사를 지낼수 있다, 이것은 대림절 신심미사로서 신자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이런 미사를 통해 어둠 속에 촛불이 되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밝히고 기도하며 미사의 은혜와 강복을 받은 후 밖에 나가 봉사와 희생등 사랑을 실천하는 사도직 활동에 신심미사와 축복의 참 뜻이 있다.
2) 대림환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에게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면 맨 먼저 대림환을 축복하는데 이것은 대림환을 바라볼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사명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대림환과 그 위의 촛불은 대림절의 중요한 표징으로, 그 빛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근심을 몰아내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즉 촛불의 빛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개의 촛불은 성탄시기의 절정인 빛을 향하여 단계적으로 밝아지는 광명을 나타낸다.
푸른 나무가지환은 생명과 공동체를 의미하며, 대림환은 어두움과 죽음대신 빛과 생명이 승리한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신앙의 상징이고 촛불이 희망의 상징이라면 대림환은 승리의 상징이다.
대림환 풍속은 종교개혁이후 생긴 것으로 전 그리스도 공동체의 상징의 하나가 되었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 대림환(待臨環)의 유래와 의미
대림환은 독일 기독교 선교사 비허(Wicher)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림환은 4개의 초를 푸른 나뭇가지로 엮어 둥근 모양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처럼 모양이 둥글다 하여 '환(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개의 초는 동서남북, 즉 온누리의 어둠을 밝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1주간마다 1개씩의 촛불을 켜게 된다. 따라서 대림 2주는 2개, 3주는 3개, 4주에는 4개의 초를 켜게 되며 한 주간마다 한개씩의 초를 더 켜는 것은 주님의 구원계획이 순리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림환에 사용되는 초는 원래 붉은색 2개, 노란색 1개, 흰색 1개였다. 여기서 붉은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를 상징하며, 노란색은 영혼과 육신의 생명력을, 흰색은 신적(神的) 영광,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의미했다.
요사이 대림환에는 자주, 연자주, 분홍, 흰색의 초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색상의 변화는 회개와 보속을 뜻하는 대림절의 자주색 제의(祭衣)에서 기인한 듯하며, 자주, 연자주, 분홍, 흰색의 밝은 색상으로의 변화는 어둠을 밝히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3) 숙소 찾기( 구일 기도)
"빈방이 있읍니까?" 안타깝고 절박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성 요셉과 마리아를 묵상하는 풍습인 숙소찾기는 마리아와 요셉을 들고 각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다. 성가를 부르면서 도착한 마리아와 요셉께 작은 제대를 봉헌하며 하루를 묵어 가시도록 해 드림으로써 마굿간에서 몸을 풀 수 밖에 없었던 성모님을 위로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4) 로라떼 미사 (Rorate Mass)
찬란한 밤(황금의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 해뜨기 전에 특별미사가 중앙유럽 여러 곳에서 거행되었다. 대림절에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신심미사를 "로라떼"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미사의 첫말에 기인된다. "로라떼 첼리 데수 베르( Rorate Coeli desuper )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리소서" 로마의 특별한 허락에 의해서 이 미사는 성탄 전 9일동안 새벽이 오기전에 매 아침마다 봉헌되었다.
5) 어린이들의 편지
이 풍습은 대림절의 오랜 관습으로서 유럽,카나다,남 아메리카에 널리 전파된 풍습이다. 어린이들이 성 니꼴라오 (12월 6일) 축일전에 자러 갈 때에 그들은 아기 예수에게 편지 쓴 것을 창문 위에 놓아둔다. 이 편지는 성탄선물을 원하는 목록을 적어둔 것으로 성 니꼴라오 또는 천사들이 천상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처음으로)
[ 참고 문헌 ]
1. <미사 경본의 총지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9/ 최윤환,
2. <하느님 백성의 축제>, 분도출판사, 1983/ 안문기,
3. <계절과 축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정대식,
4. <전례와 영성 생활>, 가톨릭출판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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