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인격, 탓을 떠맡는 현존재 이 은 주*외대 철학 1. 길을 나서며 - 물음에 관한 접근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접근할 때, 우리는 ‘무엇’에서 혹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가? 우리는 ‘우선’ ‘인격’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규정하는가? 좀 더 세세하게 물음하면 “인격은 인간을 근거짓는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근거인가?” 그리고 이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되돌려 놓을 때, 탐구할 수 있는 문제이다. 형이상학의 역사 안에서 이 물음은 지금까지도 줄곧 제기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에게 하는가?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자인가? 인간에 ‘대해’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인격은 무엇에 근거하여 규정되는가? 만일 인격을 규정하는 ‘무엇’이 있다면, 다시 우리는 인격을 근거짓는 ‘무엇’에서부터 물음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펼쳐보려 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물음이 출발하고 마침하는 그곳은 어디이며, 우리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인간을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인격을 가지고 있다”가 옳은가?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가 옳은가? “인간은 누구나 인격으로 있다(존재한다)”가 옳은가? “인간이 인격 ‘으로서’ ‘있다(존재한다)’”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격이다”가 옳은가? “인간에게 인격이란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인가?”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격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본디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인격이 사람마다 다르게 있다”라는 말인가? “인격은 인간이 갖추기도 하고 못 갖추기도 하는 ‘무엇’인가?” 더구나 “인격은 이런, 저런 인격으로 여러가지인가?” 만일 그렇다면, “인격이 갖추어지지 못한(혹은 않은) 인간은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한 물음과 이해를 과연 눈 앞에 놓여있는 실재로써, 아니면 보편적인 본질 개념 안에서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본질 개념은 인간 존재의 근거자체인가?” 그리고 이로부터 “인간의 존재방식은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다중적이다. 섣부르게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 누구도 그 존재성격상 오직 하나의 성격만을 갖지 않는다. 이 글이 맺음하고자 하는 결론을 빌어서 말한다면, 인간이 다중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는 한, ‘인격’을 규정하는 그 성질 또한 ‘나누어질 수 없는 실체로써의 하나’로 매김될 수 없다. 게다가 이후에 살펴보게 될 하이데거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근본적인 존재방식에서 ‘각자 자기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간이란 각자 자기로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이해되기 위해서, 전승된 형이상학적 보편개념 안에서 인식되는 인격이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저런 물음들을 잠시 난잡해진 생각의 골에서 접고, 세가지 정도 예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제시되고 있는 다음 예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예화 속의 주인공들은 비록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인격을 갖춘’, ‘인격적인’, 또는 ‘인격으로 있는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선 내가 문제삼고자하는 것은 인격이라는 ‘것’을 빌어서, ‘어떤 인간’을 표본적 모범자료로 등장시키고 있는 일상적인 설명 방식이다. 이 이야기들에는 소박하게 이야기할 거리들을 드문드문 숨겨놓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일상적인 생각의 틀 안에 있기 때문에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충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 자체의 깊이나 심각함을 놓쳐버릴 때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야기로 하면 누구나 그저그저 넘어갈 수 있는 내용들을 글로 씀으로써, 다시 생각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예사로운 일들을 예사롭지 않음으로, 그 사유가 벌어지는 곳이 깊던 혹은 깊지 않던, 그리할 수 있다면, 그곳에 바로 ‘철학함’의 첫째 의미를 새길 것이다. 나아가 나는, 예사롭다고 생각했던 삶의 이야기를 곱씹어봄을 통해 철학적인 문제제기를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철학함’의 또다른 의미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이야기들이 나와 다른 이들이 삶을 이루는 길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면, 바로 우리들이 누구나 ‘철학함의 길 위’에 있음을 깨닫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음들을 던져놓고 늘어놓은 것은, 인간이 스스로 물음을 발견하고 그 물음 안으로 스스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자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새삼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며, 이 글의 어느 곳에선가 분석될, 한 시대를 앞서 보낸 위대한 철학에 힘입은 것임을 읽는이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벼운 사례들을 통하여 인격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문제들을 살피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꾸며본 것이다. 2-1. 인선이의 일기 미희는 참 예쁘다. 그러나 미희는 예쁜 아이들이 늘 그러하듯, 예쁘다고 우쭐대지 않는다. 미희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친절하다. 게다가 미희네 집은 부자이다. 그러나 미희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예쁜 학용품도 나누어주고 가끔 떡볶이와 빵같은 간식거리도 사주며 같이 먹는다. 미희는 작고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키운다. 그 강아지는 미희를 정말 잘 따르기 때문에 미희가 그 강아지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미희는 동물을 많이 사랑하는 아이인 것 같다. 미희는 공부도 잘한다. 언제나 반에서 일등아니면 이등을 한다. 미희는 반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늘 꼼꼼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래서인지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남자애들도 미희를 참 좋아한다. 특히 우리반 여자애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진수도 미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진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잘 친하지 않은데, 미희하고는 친해보인다. 사실 진수는 조금 거만하다. 언제나 말도 없고 도시락도 친구들과 먹지 않는다. 그런데 진수는 참 잘 생겼다. 그리고 공부도 잘한다. 맨날 미희랑 진수랑 서로 일등과 이등을 나누어 한다. 진수가 말이 없고 친구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진수는 신비한 느낌을 준다. 언젠가 진수가 읽고 있는 책을 흘낏 옅보았는데, 나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겠다. 작고 빽빽한 글자가 박혀있어서 아마도 나같은 중학생은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진수에게 그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물을 수도 없다. 그건 굉장히 창피한 일이다. 그런데 어제는 미희하고 진수하고 그 책의 내용을 놓고 심각하게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굉장한 일이다. 역시 미희는 착하고 예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어려운 책도 읽고 공부도 잘하는 끝내주는 아이다. 나는 미희하고 친해지고 싶다. 물론 미희가 다른 반 아이들 모두에게 친절하듯이 나에게도 친절하지만 나는 미희하고 제일 친한 애가 나였으면 좋겠다. 미희는 내 우상같은 아이다. 정말 그 애는 완벽한 아이다. 미희는 인격도 좋고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집도 부자이고 동물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이다. 나는 내가 미희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나는 미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아이다. 그런데도 미희가 나에게 친하게 대해주고 잘해주는 것은 그만큼 미희가 좋은 아이이고, 나보다 훨씬 인격이 성숙한 아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진수도 좋아한다. 그 애는 늘 신비롭고 깍쟁이처럼 말도 잘 하지 않지만,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한다. 게다가 진수는 우리 또래 애들이 읽지 못하는 어려운 책도 읽는다. 그래서 진수는 참 어른스럽다. 진수가 가끔 귀에 꼽고 듣는 음악은 클래식음악이다. 진수는 다른 내 친구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친구들은 H.O.T.나 G.O.D. 혹은 멋있게 옷을 입고 춤 잘추는 그룹이나 가수를 좋아하는데, 진수는 고상한 클래식음악이나 재즈라는 음악을 즐겨 듣는다. 며칠 전에 나는 방과후에 진수가 창가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재즈음악을 들으면서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 그 아름다움이란.... 진수의 옆모습과 그 흔들거리는 고개짓은 정말 멋있었다. 진수가 다른 친구들과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말을 거는 애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 진수는 그런 애들한테 작고 낮은 목소리로 간단하게 대답을 해거나, 씨익 웃어주기도 한다. 진수는 학급 일에 나서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진수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건 결정적인 순간에 진수가 가끔 제안하는 의견에 대부분의 애들이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들은 진수가 시끄럽거나 설치지 않고 늘 조용히 있다가 다른 애들이 헤멜 때, 그걸 쉽게 정리해주기 때문에 진수를 대단한 애로 생각한다. 맨날 애들을 지 멋대로 휘어 잡으려고 하는 반장이나 부반장은 진수만큼 생각도 깊지 않다. 다른 애들이 진수의 말을 잘따르는 것은 아무래도 진수가 생각이 깊고 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진수는 공부도 잘하고 무언가 베일에 쌓인 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은 아이다. 진수네 부모님은 대학교수라고 한다. 역시 품위있는 집에서 커서 그런지 진수에게는 늘 기품있는 행동과 말, 그리고 표정이 있다. 나는 그런 진수를 좋아한다. 진수는 분명 인격이 훌륭할 것이다. 진수가 자란 가정 환경과 그애가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수는 ‘미안해’라던가 ‘고마와’라는 말을 잘해준다. 전번에는 진수가 미술시간에 붓을 가져오지 않아서 내가 빌려주었었다. 진수는 내가 붓을 빌려주겠다고 하자 ‘미안해’라고 했고 다 쓴 다음에는 고맙다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다른 애들 같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지가 쓴 붓도 씻어다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수는 일부러 화장실에 가서 자기가 빌려 쓴 붓을 아주 깨끗하게 씻어다 줬고 나에게는 다음 날 머리핀을 선물로 주었다. 이런 건 진수만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날 밤, 너무 좋아서 그 머리핀을 꼭껴안고 잠도 잘 못잤다. 이렇게 고마움을 알고 미안해 할 줄 아는 애는 인격적으로 고칠 것이 없을 것이다. 나도 진수처럼 인사를 잘하는 것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도 진수처럼 인격이 훌륭해지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속이 상하다. 내가 사랑하는 진수는 미희하고 얘기할 때는 눈부시게 웃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다른 애들과 같이 있을 때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미희도 부럽고 진수도 부럽다. 그리고 나는 미희가 같은 여자이지만 친구로서 좋아하고, 진수는 남자친구니까 다른 애들보다 더 나하고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미희는 진수하고 아주 친하다. 그리고 진수는 미희를 남다르게 대하는 것을 보면, 진수가 미희를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 훨씬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속상하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나고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못할까? 그리고 왜 우리집은 걔네들집보다 못살까? 나도 미희처럼 예쁜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 그러나 우리 엄마와 아빠는 동물을 우리집에서 키우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난리도 아니다.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갓난 아기부터 걸음마를 겨우 떼는 아기들을 모아다가 보살펴 주는 놀이방을 한다. 그래서 내가 자꾸 주장하니까 동물을 키우는 것은 안된다고 나한테 소리도 질렀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잔인한 사람들이다. 강아지가 얼마나 예쁜데....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이 나쁜 사람들이다. 미희네 엄마나 아빠는 분명 마음이 고운 분들일 것이다. 미희도 그러니까.... 진수네 아빠와 엄마는 대학교수라니까 분명 점쟎고 고상하고 훌륭한 분들일 것이다. 진수도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모양으로 태어났을까.... 속상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나를 낳았을까? 기왕 낳으려면 좀 제대로 낳을 것이지.... 그래도 내일 학교에 가면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진수도 만날 수 있고, 예쁘고 상냥한 미희와도 놀 수 있으니까 기분이 좋다. 그런데 진수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을까? 잠이 온다.... 2-2. 미희의 비밀일기 진수는 나에게 유난히 친절하다. 물론 나는 진수가 생각하기에 특별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수처럼 멋있는 남자애가 나 정도되는 여자애와 친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진수가 공부를 잘하고, 잘생기고 행동이 멋있기 때문에 다른 여자애들은 언제나 넋을 빼고 그 애를 바라본다. 나는 솔직히 그런 호박같은 여자애들과 똑같이 진수를 쳐다보고 싶지 않다, 왜냐면 진수에게는 진수에게 어울릴만한 여자친구가 오직 하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애들에게는 친절히 대하고 있지만, 진수에게는 조금 쌀쌀맞게 대하려 노력한다. 그래야만 다른 여자애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진수가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진수는 다른 여자애들하고는 잘 말도 하지 않지만 나한테는 말을 자주 건다. 이건 다 내가 진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상냥해보이면서도 다른 애들이 쉽게 달겨들지 못할만치는 도도하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친절히 자기네들을 대한다고 해서 나를 자기네들과 똑같은 부류로 인정하게 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는 일이다. 나는 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나는 애들에게 내가 예쁜 것을 잘알게 하는 것, 그래서 내 예쁨을 샘내면서도 자기네들이 나처럼 예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이 깨닫게 할 필요가 있다. 그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시기할 수는 있지만, 나처럼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누구나 예쁘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남들 몰래 노력하는지도 모르면서 길바닥에서 내가 꼽는 머리핀하고 비슷한 핀만 사다 꼽는다고 나처럼 예뻐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주제넘은 것들.... 지들 주제를 알아야지.... 자고로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의 성인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했다는데, 이건 정말 교훈적인 말이다. 주제들도 모르면서 흉내만 내려하는 인간들... 가만, 그런 것을 보고 베이컨이라는 철학자는 무슨무슨 ‘우상’이라고도 했다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얼마전에 진수가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을 흘낏보고, 나도 그 책을 사다가 밤을 새워서 공부한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 다음 날 진수한테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 진수를 놀라게 했었는데.... 그리고 다른 애들은 그 광경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데....벌써 다 까먹어버리다니.... 그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그래야 언젠가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아~~ 다른 애들과 다르게 폼나게 산다는 것은 때로 아주 힘들고 외롭다. 그러나 내가 다른 애들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 어떻게든 다른 애들이 나를 암만 흉내내려할지라도 따라올 수 없게 나는 나를 키워가야 한다. 사람들과 내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 그것을 다른 애들이 확실히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를 더욱 예쁘게 꾸밀 줄 알아야 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해야 되고 그래서 남들이 나를 존경할 수 있도록 인격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배가 고픈 것은 정말 못말린다. 나는 남들 앞에서는 늘 귀족이나 공주들처럼 조금만 먹기 때문에, 저녁때는 정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밤에 게걸스럽게 먹을 수도 없다. 그러면 분명 누구누구처럼 살이 뚱뚱하게 쪄버릴 것이다. 살찐 사람들은 미련해보이니까 나는 늘 날씬함을 유지해야 한다. 명심하자. 늘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도도하고, 도도하면서도 기품있고 지혜로우면서 아름다운 귀족의 품격을 지킬 것을..... 앗! 오늘은 그러고 보니 애들한테 떡볶이를 사주다가 보통 먹어야 하는 양을 넘어서 다섯개쯤 더 먹었다. 토해야 겠다. 위에서 소화되기 전에.... 요즘은 조금 먹는 것을 초과해서인지 자주 토한다. 역시 떡볶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뚱보 호박덩이들과 다정한 체 지낸다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나는 그애들의 여왕이니깐 여왕이 베풀어야지... 너그럽게... 만약 다른 애가 애들한테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 기집애를 증오할 것이다. 감히 나밖에 할 수 없는 것을 흉내내는 그런 버릇없는 것들은..... 오늘은 샤를르를 목욕시켰어야 했는데, 저놈의 개새끼는 목욕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맨날 나도 귀챦아 죽겠는데, 목욕시킬 때마다 온통 물을 튀겨서 내 옷을 다 젖게 한다. 하긴 내가 샤를르를 훈련시키는 것에 물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 개가 말을 잘 안들으면 나는 물에다가 쳐박아두면 되니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물통에 자물쇠를 다느라고 고생도 했지만... 개는 역시 사흘에 한번 패야지 말을 듣는다는 옛 교훈이 이해가 간다. 그래서 그 개를 목욕시키는 것은 고생스러워도 내가 직접한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식모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지만, 그것만은 안될 일이지... 샤를르가 내말을 잘 들어야 내가 데리고 산책을 가도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테니까... 샤를르는 프랑스 품종으로 털이 은빛으로 빛난다. 그래서 데리고 다니기에는 되게 품이 난다.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똥개랑은 다른 종자니까.... 그 만한 놈이어야 내가 데리고 다녀도 챙피하지 않을 것이다. 반 애들은 샤를르를 보고 다들 감탄하며 나를 부러워했다. 특히 어제는 향수까지 뿌려놓았더니 역시 애들이 뒤로 넘어갔다. 이름도 샤를르.... 귀족적이라고 하면서... 샤를르는 내가 손만 까딱해도 내 품으로 달려든다. 그럴때마다 반 애들은 꺅!꺅!!! 대었다. 귀여운 샤를르... 너는 어제도 내 체면을 잘 지켜주었다. 오늘 밤에는 상으로 목줄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고 끈을 조금 길게 매줘야지. 개한테 가끔 상을 주는 것은 기분좋다. 그러면 그 개는 정말 나에게 복종하며 나를 따른다.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까? 그나저나 진수에게도 샤를르의 품위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텐데.... 그렇다고 진수네 집 앞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체를 할 수도 없고.... 일단 내일 책을 한권 빌려서 돌려줄 때, 샤를르를 데리고 나가서 만날까? 배고픈 것도 참기에는 어렵지만, 졸린 것도 참기는 어렵다. 그래도 먹은 것은 토해버리면 되지만, 졸음이 오면 그건 정말 황당하다. 그래도 나는 밤 늦도록 잠을 자지 않는다. 공부를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해야 걔네들을 이길 수 있고, 그래야만 진수쯤 되는 아이와 일이등을 다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밤에는 클래식이라는 알다가도 모를 복잡한 음악을 듣는다. 아니 듣는다기 보다는 음악을 외운다. 그래야만 요즘 유행하는 가요에 미친 다른 애들한테 고상한 취미를 보여줄 수 있다. 솔직히 나는 H.O.T의 강타 오빠를 좋아한다. 오빠는 정말 멋있다. 그 차가운 눈매, 모두를 조롱하는 듯하게 오만한 몸짓... 그리고 멋진 춤.... 나는 가끔 꿈에서 강타오빠를 만난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언제나 밤새도록 틀어놓은 모짜르트인지 바하인지 하는 할아범들이 작곡한 졸린 음악만 귀에 들린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 음악에 유식해있어야 나는 여왕처럼,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은 애가 아니게 존재할 수 있다. 강타오빠는 늘 내 마음 속에 있으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강타오빠를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다른 애들처럼 꺅!꺅!대거나 울고불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야 강타오빠 눈에 띌 수 있나... 냉정하게 도도하게 그리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어야 그 난리를 치는 아이들 속에서 내가 구별될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만약 강타오빠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거만하게 악수를 하나...? 아니면 아예 관심없는 듯이 쌀쌀맞게 돌아서버릴까...? 음... 고민이 생겼다. 2-3. 진수의 보내지지 않는 편지 나는 오늘 또,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요즘은 학교 생활이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나는 내 울타리 안에 갇힌 듯한 느낌도 버릴 수가 없다. 학교는 늘 시끌거리는 아이들과 늘 야단만 치려고 달려드는 선생들, 그리고 날이 더워져가다보니 이곳저곳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들로 가득차 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늘 편하고 좋은데, 왜 내 또래 아이들은 학교라는 곳에 다녀야 한다고 어른들은 주장하는 것일까? 하긴 그 사람들도 그런 시기를 보냈고 자기들도 그 때가 지겨워서 일종의 보상심리로 우리들을 감옥같은 학교에 가두는 것이겠지. 아버지라는 사람은 조금아까까지도 나를 들들 볶으면서 좋은 대학, 좋은 과에 가야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한다. 허울좋은 직업과, 교수랍시고 자기 제자들을 노예처럼 마구 부려먹는 악한... 그런데 더 웃기는 건, 그 제자라는 인간들이 아버지한테 굽실굽실대며 아부를 떤다는 것이다. 제길... 새엄마는 오늘도 아침부터 고상한 귀부인처럼 차려입고 하루종일 놀러다니다가 저녁때 아버지가 집에 오기 직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집에 숨어들어왔다. 그 여자가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누구와 놀다가 들어오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내가 문을 열어주면서 조금 웃어줬더니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내게 아부를 떨었다는 것이다. 여자란 남자가 웃어주기만 하면, 그리고 무얼 사주면 그저 헬렐레한다. 며칠전에 인선이라는 이쁘장한 애가 나에게 붓을 빌려주었을 때도 내가 한번 씨익 웃어주었더니 괜히 좋아하더라. 그리고 다음날 내가 새엄마가 데려온 여자애가 가지고 있던 머리핀을 하나 집어다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인선이라는 애는 그런데로 이쁘장하고 꽤나 사람 눈치를 잘 살피는 아이인 것 같기도 하고 공부도 적당히 한다. 그래도 그렇지... 천하의 김진수가 그런 애 따위와 사귈 수는 없다. 다른 여자애들도 나한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인데... 나는 그런 애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다. 깊이있게 사귀기에는 걔네들이 나랑은 수준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우리 반에는 누가 나하고 그래도 어울릴까? 지숙이? 혜진이? 희선이? 서경이? 가연이? 이쁜 애들은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좀 하는 애들은 이쁘지 않다. 착한 애? 난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착한 게 눈에 보이나?... 착한 애들은 좀 미련하다. 걔네들은 곰처럼 둔하다. 그렇다면???? 그래도 미희가 제일 나은 것 같다. 미희는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고, 예쁘기도 하고, 다른 애들이 여왕처럼 떠받들기도 한다. 그래. 맞어.. 적어도 여왕같은 여자애... 천하의 김진수가 사귀는 애라면, 적어도 그런 애 쯤은 되어야지. 미희는 책을 많이 읽는다. 걔는 정말 유식하다. 얼마전에 내가 폼을 좀 잡아보려고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골때리는 책을 학교에서 펴놓고 있었는데, 미희가 그 책을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었다. 그러는 것을 보면, 미희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가 보다. 하긴 천하의 김진수한데 관심없는 여자애가 어딨을라구... 그리고 가끔 미희는 나한테 뭐라뭐라하는 서양 놈 이름을 대며 그 음악세계에 대해 말해보자고도 한다. 나는 사실 그 놈들이 작곡했다는 음악을 귀에 꼽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건 일종의 폼을 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파리가 조글조글대는 작은 소리로 다른 애들이 질러대는 시끄러운 소리를 막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미희는 그런 음악에 대해서 아주 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생각해보면, 쪽팔리는 일이다. 내가 감히 여자 따위에게 지다니.... 여자 따위가 나보다 잘나고 아는 것이 많다니... 그건 기분 드러워지는 일이다. 그런데 다행한 건, 그렇게 똑똑하고 예쁘고 여왕같은 미희가 좀 쌀쌀맞아서 재수없을 때도 있지만, 나한테는 고상하고 남들이 어려워서 피하는 문제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건 미희가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일 것이고, 미희가 보더래도 내가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잘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우리 반에서 일등, 이등은 나하고 미희하고 다 해먹으니까. 다른 애들이 보기에 미희랑 나랑은 어떻게 보일까? 분명 환상의 커플일 것이다. 다른 놈들이 미희를 아무리 탐내어도 미희는 어차피 내거다. 여왕의 환상적인 짝이라.... 결론은 이거다. 어느 왕국의 예쁜 공주와 멋진 왕자... 하하하... 하긴 다른 것들은 죄다 시종,시녀감이니까... 미희가 나한테 유난히 더 관심을 갖고, 내가 미희랑 친하게 지낸다는 건 생각할수록 기분좋다. 그런데 요즘 미희는 여자가 되어가는 것인지 가슴도 꽤 커졌다. 지난 봄만 하더라도 절벽이었는데, 요즘은 브라도 하는지 등 뒤에 끈도 보인다. 나는 가끔 턱에 손을 괴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을 하면서 미희의 가슴을 훔쳐보곤 한다. 여자들은 가슴크기에 따라서 A컵, B컵, C컵이 있다는데. 쟤는 무슨 컵을 할까? 생각만해도 짜릿하다. 아참, 그저께는 아침에 미희가 아랫배를 움켜쥐고 양호실을 갔다 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얼굴이 창백해져서 이를 앙물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주머니 안에 휴지로 돌돌 싸서 감춘 것을 넣어가지고 갔다. 그리고 미희가 스쳐지나갈 때 걔한테서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천하의 김진수가 모르는 것이 어디있겠냐? 새엄마가 데리고 온 그 여자애도 가끔 그랬다. 그건 아마 여자들의 생리라는 것일 것이다. 그건 한달에 한번 걸리는 병인지 가끔 그 여자애도 미희처럼 아랫배를 감싸쥐고 뒤뚱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얼굴이 샛노래져 있었다. 여자란 불결하다. 어떻게 한달에 한번씩 이상한 병에 걸려서 옷에 피를 묻히고 다닐까? 그건 보기에도 흉하고, 우선은 깨끗하지 않아서 나는 정말 싫다. 그런데 애들이 여왕처럼 떠받드는 미희도 그렇다니, 그 점에서 보면 미희도 잘날 것이 하나도 없다. 적어도 생리를 해야하는 여자라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그렇게보면, 여자란 자고로 남자보다 잘나서는 안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높아야 한다. 공부도 여자한테 진다는 것은 상상해서도 안된다. 사실 아버지가 지금껏 위세등등하게 살 수 있고 새엄마가 늘 아버지 눈치를 보는 것도 아버지가 남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새엄마가 대학교수였어도 제자라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노예처럼 일을 할 수 있을까? 돈을 줄 수 있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부리는 것은 남자들만의 권리다. 새엄마는 늘 아버지한데 돈을 받아 쓴다. 왜냐면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오기 때문이다. 새엄마는 아버지가 준 돈으로 옷도 사고 미용실도 가고, 요즘은 자동차도 짚차로 바꾸었다. 내참, 안방마님이 짚차는 어디에다 쓰려는지... 새엄마는 가끔만 요리도 하고 반찬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 그런 일쯤이야 파출부가 다 알어서 해주니까... 새엄마는 얼마전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요리를 한답시고 법석을 떨었지만 어디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부엌만 난장판으로 만들고 결국 음식은 파출부가 다 만들어버렸다. 여자란 남자가 갖다주는 돈으로 대체 무얼 하며 사는 것일까? 요리도 안하고 집안 청소도 제대로 안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아버지가 불쌍할 때도 있다. 늘 새엄마한데 돈을 주기만 하니까 그렇다. 나한테는 콩알만큼 용돈을 주면서도 새엄마한테는 수표도 턱턱 내준다. 그럴때면 나는 새엄마가 부럽기도 하다. 저 여자 같은 팔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너는 알까.... 내 주위에 널려 있는 이런 속물들이 나를 끊임없이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 집, 학교... 이 공기가 나를 질식시키고 있다. 나는 자유와 해방을 꿈꾼다. 언제나... 언제나... 나는 자유롭게 숨을 쉬며 살고 싶을 뿐이다. Freedom!!!! 3. 인격 -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물음 안에서 인격이라는 말이 이미 ‘인격(人格)’이라 말해질 수 있으려면, 그것이 내용으로 삼아낼 수 있는 영역은 이미 인간에게로 제한된다. 나는 여기에서 동물의 성질이나 사물의 성질, 혹은 신의 성질이라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다른 존재자에 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논의의 중추적인 내용은 우선 인간과 그 인간에게 이해되어온 한에서의 인격과 인격을 근거짓는 ‘무엇’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인격을 ‘인간의 인간 됨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대체 ‘무엇’이 그 자체로 인간 됨됨이를 규정짓는 ‘본질’인가 하는 물음이다. 일단 ‘인격’이라는 말에는 삼중의 의미가 있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인격이라는 말이 다른 어떤 존재자에 붙여질 수 있는 의미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만 부여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어떤 것, 그런데 그것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비교우위적인 높낮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들 전체와 각각의 인간 개별자들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본질적인 성질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인격을 우리 말로 풀어낸다면, 바로 인간을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을 인간이라고 지칭하게 하는 ‘인간의 인간 됨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를 빌어쓰는 우리말 인격은 서양용어 person을 번역한 말이다. 페르손(person)이라는 말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기원을 찾는다. 희랍어 prosopon(얼굴, 용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하는 라틴어 페르소나는 원래 어떤 인물을 연출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의 가면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역할이라는 것은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통해 일치시키려고 하는 한 인물에 대하여 묘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로부터 한 인물의 자유로운 자아 실현 또는 자아 설정이라는 의미가 암시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배우가 맡은 역할은 때로 달라질 수 있으며, 이에 그가 쓰는 가면도 달라진다. 배우는 달라진 역할에 따라 달라진 가면 안에서 그 가면에 부여된 역할을 충실하게 연출한다. 그는 때로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귀족이면서도 때로는 잔혹한 살인마로도 변할 수 있다. 역할 안에서 인간은 각기 다른 관계를 맺어가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와 같이 많은 역할, 관계,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자아의 통일성을 지닌다. “‘하나의 통일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셈하기의 요소들을 생각한다. ‘1+1+1+1+…’ 셈하기의 전제는 그 요소들이 그것들을 결합 가능하게 하는 어떤 공통적인 것을 갖는다는 것이며, 각각의 요소는 하나의 내적 폐쇄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과의 구분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다른 것과 연결선상에 놓여지든 그렇지 않든간에 관계없이 독립된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 이를 우리는 통일성이라고 의미지운다. 이 통일성이라는 말은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개별적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로 통합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인 개별자는 독립된 ‘하나’로서 전제로서의 ‘인간’에로 통합된다. 개별자들은 그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독립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독립성을 통합하는 통일성 안에서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통일성의 영역에서만 말해질 수 없다. 인간은 ‘셈하기의 구성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개별적 벽돌들이 하나의 벽돌 담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화의 가능성을 갖는다. 인간은 일단 신진대사를 통하여 성장을 하며, 스스로 관계의 부딛낌 안에서 이런저런 식으로 내적․외양적 변화를 한다. 물론 다른 존재자들도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임이라는, 그리고 시간․공간 안에서 변화를 겪고 있는 한 인간이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이 자기와 동일한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자신의 동일성(정체성, Identitaet)를 갖는다. 그리고 인간만이 그 스스로의 동일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어떤 역할에 따른 가면이라는 의미를 갖는 persona는 그 가면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내보임을 요청한다. 제시되어 드러낼 수 있는 역할과 그 역할에 따른 가면이란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동물이나 사물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역할을 수행함이 가능한 곳은 바로 ‘인간’이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로부터 인간에게 필연적인 본질은 무엇?이며, 이 본질 안에서 인격은 무엇?인가를 문제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본질로써의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 인격으로부터 인간의 역할에 대해 물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이며, 인격은 대체 무엇인가? 물음은 꼬리를 문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 인격개념은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인격 개념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인격 존재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인격 존재로부터 발전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본질을 실체개념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줄곧 전통 형이상학에 의해서 고수된다. 실체란 ‘스스로 있는 것’, 즉 ‘자기의 존립을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체개념은 스스로 완전성을 가져야 하므로, 이미 보에티우스에서 토마스로 그리고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지는 전승된 철학 안에서 공고히 되었듯이 나누어질 수 없는 정신의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분할 가능한 육체는 정신에 종속되고 정신은 로고스에 의해 작용되므로 이후 근대 철학의 역사에는 그 로고스의 담지자로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실체로 그리고 주체로 부각되기에 이르른다. 즉 전승된 철학의 사유 안에서 실체는 정신, 이성으로 표방되며, 그 정신과 이성은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필연적인 본질로써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나설 길은 달라진다. 전승된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본질은 근원적인 ‘무엇(Was)'에 의해 알려져 있다. 인간의 본질은 정신 혹은 이성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 정신과 이성이라는 본질이 인간을 인간 그 자체에서 물음하여 탐구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누어질 수 없는 완전성, 곧 신의 성질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승된 형이상학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그 ‘무엇’이 있음을 이미 규정하고 있다. 그 ‘무엇’이 바로 정신과 이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원적으로 인간을 신성(神性)에 의해 그리고 신성에로 유비시키고, 다른 동물이나 사물적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적 비교를 통해, 인간에게 고유한 근원적 본질로서 자리잡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본질과 다른 존재자들의 본질은 정신과 이성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인간의 존재적 우월로 구별되게된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유래한 신적 성질인 정신과 영혼을 부여받고 그 정신과 영혼을 작용하는 로고스를 갖는 이성적 존재자이므로 다른 모든 존재자에 비하여 고귀함을 갖는다는 인간에 관한 논의는 이제 그 인간적 본질로서 인격개념을 선택하게 된다. 근세 데까르트 철학의 제 1명제인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파악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인격적 요소로 ‘사유함’이라는 본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사유의 차원에 머무는 인간의 본질에, 그 다음 시대에 이르러 ‘행위’와 ‘실천, 그리고 그에 결부된 “…을 행해야만 한다”라는 명령을 실천함에로 향해 있는 의지의 능력인 이성이, 인격을 구성하는 필수 불가결의 요소로 대체되었다. 데까르트 이후, 인간은 단순한 사유의 세계, 가능의 세계, 정신적 본질의 세계에만 머물러 이성을 갖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 현실이 간직하고 있는 가능적 인식의 차원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실천적 의지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칸트는 ‘행위’를 작용 미침 일반에 대한 칭호로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는 ‘행위’를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격의 존재 방식으로써의 ‘실천(적 행위)’과 구분짓는다. 실천은 의지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행위이다. 의지는 “개념에 따라 작용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지란 실천의 의미에서의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지에는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것을 보편적으로 표상하는 표상작용이 속한다. 개념적 표상은 오성(Verstand)의 관할 사항이다. 그러나 표상된 것이 여기에서처럼 의지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기능하는 한, 즉 원칙으로 기능하는 한, 표상함에는 원칙에 관련시킬 수 있는 능력, 곧 이성(Vernunft)이 앞서 놓여 있다. 따라서 이성은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 칸트에 의하면, 필연적이며 실천적이다. 칸트가 이성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에는 도덕의 영역에서 인간에게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성-이 이미 선험적으로 깃들어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은 생명체임과 동시에 이성적 존재임으로 특징지워지며, 인간의 인격성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질 수 있음까지 고려된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인격은 책임이 전제된 도덕적 인격이다. 스스로에게 세워지는 입법은 이성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에 대한 ‘경의’가 비로소 인간 행위의 가능성을 구성한다. “너는 …을 해야한다”라는 형식적 표현으로 세워지는 입법의 명령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연유하며, 따라서 법 앞에서의 경의로서의 도덕적 느낌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아가 그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러한 결단을 내림이 바로 그 자신에게 속함, 그리고 스스로 그것에 예속될 수 있음으로 선택되어 있음, 즉 본질로서의 자유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실천의 영역이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할 때, 이는 구체적이고 체험될 수 있는 ‘나-세계 연관’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칸트에게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또한 동시에 자기 책임 능력이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인격개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때의 자기 책임성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규정짓는 존재함의 근본 양상으로서 탁월한 인간 행위, 즉 도덕적 실천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렇게 도덕적 실천에 방향잡혀 있는 자유의 개념을 칸트는 ‘실천적 자유’라고 칭한다. 그런데 칸트의 이 실천적 자유는 경험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자유의 입증은 가능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현실적․실천적 자유는 분명히 오직 경험 안에서 경험에서부터 결정되어야 할 것이어야 하는데, 칸트에게서 자유는 경험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에 대해 보편(개념)적으로 사유된 그것이 그의 무엇임의 내용에 상응하는 현존하는 개체에서 직접 표상되어 제시되는 ‘직관적 제시’가 성취되는 방식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러하다라 한다. 즉 칸트에게서 실천이성은 경험에 앞서서, 그리고 경험과 상관없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도덕적 이념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자유는 하나의 이념이다. 그리고 이념은 근본적으로 경험에 의해 직관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제 칸트의 도덕적 실천 행위와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이해로부터 그의 인격개념을 되집어 본다면, 칸트는 분명 인간의 본질을 도덕적 인격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더이상 정신과 순수한 이성을 본질로 삼은 인격개념에만 안주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실천하는 주체의 모습인 도덕적 인격에서 ‘실천’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통상 이해하고 있는 자연 혹은 세계 속에서의 인간 고유의 구체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을 뜻하지는 않는다. 즉 칸트에 있어서 실천이란 의지적 작용 미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칸트에게서의 인격은 주체로서의 보편적 인격, 곧 이성이 작용하는, 즉 이성적으로 사유하며 이념으로서의 자유를 의지하는 인격이다. 칸트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함에 있음으로, 즉 인간을 행위하는 주체개념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도덕적 실천이라는 존재 방식이 결국 경험의 세계를 배제시킴으로써 그의 도덕적 인격 개념에는 이미 본질로서의 이성의 영역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칸트의 인격개념에 기초한 이러한 이해는 인간을 이성이라는 본질로써 설명하고 인식하는 길을 택한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정립되는 인간 탐구의 핵심적 내용은 인간이 머무는 구체적인 세계-안에서 체험되는 저마다의 인간이 갖는 독특한 개별성으로부터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순수이성에서 확장되는 실천이성이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거부될 수 없는 정언명령의 형식을 부여하는 도덕적 인격의 차원-이미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로서의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에서 그 인식의 토대를 얻는다. 그러나 현대철학적 사유의 큰 기둥을 이루고 있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이러한 전승된 형이상학이 이어오고 있는 본질개념을 새로이 정립한다. 그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자에 있어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란 더이상 ‘무엇’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Wie)'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는 물음이다. 즉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 자체로부터, 즉 인간의 존재(있음) 자체에서 찾아야 하며, 이럴 때 비로소 인간의 본질은 신과의 유비를 통해서나 동물과의 존재적 비교에 의하여 규정되는 우월한 가치가 아니라, ’본래적 고귀함‘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을 동물로부터 규정하는 것이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을 입증되지 않은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규정이 나타나게 된 배경, 즉 사태 자체에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존재 자체로부터 선행된 전제없이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다. |
4. 하이데거의 인간개념 - ‘거기에(Da)-있음(Sein)’으로서의 인간 하이데거에게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질문하면서 동시에 질문되는 존재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 자체는 이미 그에게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적 차원에서 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자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사태로부터 가능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은 어떤 ‘무엇’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있는가(존재하는가)라는 차원에서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인간의 본질을 실체나 주체로 파악하려는 시도로부터 이제 ‘있는 것의 있음과의 관련성’에서 규정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을 더이상 이성적 실체 혹은 주체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자’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인간의 본질은 ‘거기에-있음(현-존재, Da-Sein)'이라 할 수 있으며, ‘거기에 있는 자’는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나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자’이고 ‘저마다 우리들 자신인 그러한 자’임이 드러난다. 거기에-있음(현-존재)으로써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개념의 본질은 그 존재자가 ‘각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의 본질은 그의 ‘존재해야 함에(in seinem Zu-sein)'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 있음’의 본질은 바로 그의 실존에 놓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 존재자에게 그의 존재에서 문제가 되는 그 존재는 각기 그 자신의 것이다. 각기 그 자신의 것으로서의 존재는 더이상 보편과 필연 안에서 강제되는 인간 본질, 즉 정신과 이성이라는 궁극적인 인격적 본질을 배제한다. 오히려 그 존재는 바로 ‘거기에-있음’으로서 그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삼을 수 있으며, ‘있음(존재)’자체의 문제를 문제로 물을 수 있는 존재자이다. 우리는 누구도 ‘나’를 인간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전승된 형이상학에서 주지되었듯이 이 인간이라는 틀이, 정신에 기초한 사유의 능력으로써의 이성으로서, 그리고 그 이성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벗어나 오로지 보편적 개념 안에 머물고 있는 의지의 자유를 행위하는 실천적 도덕 인격의 본질로서 파악된다면, 우리는 우리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아주 힘겨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인간에게 본질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 이미 거기에는 그 어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필연성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선 나자신에 대하여 이미 ‘나’와 관계맺고 있다. 그리고 관계맺고 있음은 나와 내 밖에 있는 어떤 것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가 세계라고 지칭하는 ‘그곳’에는 이렇게 나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모든 존재자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거기에-있음(현존재)’라고 달리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그 세계-안에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존재자와는 다른 존재구성틀을 갖는다는 것에 있다. ‘거기에-있음(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존재해야 함’에 있다. 이 말은 현존재가 그에게 열어 밝혀진 ‘있음(존재)’의 의미를 그때마다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존재 가능성, 즉 그의 ‘존재할 수 있음’에 있다. 나아가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가능성까지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현존재 안에서 ‘있는 것(존재하는 것)’의 ‘있음(존재)’이 이해되므로 그 자신의 있음(존재)을 있게 함을 우리는 실존이라 이름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본질은 바로 그의 실존에 놓여있게 되며, 실존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된다. 실존하는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문제 된다. 현존재에게 문제되고 있는 것은 그가 그의 존재가능성들을 각자 스스로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것이 되지 않는 모든 요소들은 나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현존재는 언제나 문제가 나에게 문제로 물어지는 저마다에게서의 나의 현존재이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성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누구에게나 관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능성이 물어지는 특이한 현존재에게만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이러한 존재가능성들을 그 자신의 존재가능성에서부터 발견하지만, 우선 그리고 대개 그가 관계맺고 있는 다른 존재자들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현존재에로 접근하는 길이 확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현존재를 자신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현존재는 자신이 우선 대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만나져야 하고 제시되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우선 대개 존재하는 방식을 평균적인 일상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평균적인 일상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저마다 각기 존재물음을 던지며 각자로서 스스로에게 존재의미를 수행하는 실존하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재에 앞서서 이미 세계를 틀잡고 있는 ‘그들(사람들, das Man)이다. 일상적인 세계는 나의 현존재가 그 세계 안에 내던져짐이라는 우연한 사건을 통해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열어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는 나의 현존재의 있음 이전부터 현존재라고 불릴 수 있는 ‘그들(사람들)’에 의해 이미 틀잡혀 있음으로 발견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가 ‘그들’과 다르게 있을 수 있음을 염려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위안과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 안에 있는 한,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평균적인 일상성 안에는 나의 현존재가 이리저리 개입하고 나대기 전에 삶이 이미 ‘그들’에 의해 방향잡혀지고 틀잡혀진 논리와 방식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들은 일상적 ‘그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흔들림을 겪음으로써 우리들은 그 스스로 ‘그들’ 안에 들어서며,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채워나간다. 아니,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는 ‘그들’의 존재방식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으며 거부하지 않는다. 일상적 현존재는 ‘그들’과 ‘더불어 있음(함께 있음)’에서 이미 안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그들’과의 키맞추기를 퉁해 ‘그들’ 안에 있는 평균성에 한 몫을 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이제 결코 존재물음을 오직 스스로에게서 문제삼지 않으며, 자립적이지 않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비본래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본래성을 이루고 있는 ‘그들’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와 같은 의미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에 대하여 ‘그들’이 ‘모자라는’ 존재나 ‘낮은 차원’의 존재등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도 ‘그들’에 속하고 있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 본래적이냐, 비본래적이냐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분석하기에,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런 또는 저런 존재함의 방식에서 나의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각기 나의 현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미 언제나 어떻게든 결정하고 있다.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에 이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자신을 ‘선택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으며, 반면 그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들’ 없이 그리고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존재는 늘 언제나 자기자신을 염려함과 동시에 타인들과 관계맺으면서 타인들을 심려한다. 그러나 ‘세계’안에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각자 고유함 안에서 수행하는 ‘본래적인 자기’로서 ‘나’가 아니다. 그것든 나 자신이 이미 속해 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우선 ‘그들’이고 대개 ‘그들’로 머물러 있다. 즉 일상성이 틀잡고 있는 비본래성 안에 있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비본래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존재 방식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존재 물음, 즉 각자 고유한 가능성 안에서 자기로 존재해야 함이라는 과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세계, 평균적인 삶 안에서 그 존재물음은 쉽게 ‘그들’에 의해서 획일화되고 평준화된다. 비본래성으로 가리워진 본래적 존재를 열어밝힐 수 있는 것은 바로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그 가능성을 결단할 수 있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존재하는 현존재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결단성에는 현존재의 전체 존재를 구성짓는 틀과 그가 각자 고유한 존재 가능성 안에서 존재를 수행한다는 의미에 대한 실존론적인 이해가 앞서있어야 한다. 결단성은 ‘그들’ 안에 빠져 있는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으로 그의 고유한 존재가능에로 불러내지는 실존방식이다. ‘실존론적 진리’로서의 ‘열어밝혀져 있음’은 결단성에 의해서 그 본래성을 획득한다. 결단성은 ‘열어밝혀져 있음’을 수행하며, ‘세계내부에 존재하는 존재자’ 들의 ‘이미 발견되어 있음’을 본래성의 양태로 바꾸어 놓는다. 본래적 진리로서의 결단성은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있다. 그러나 결단성은오직 ‘세계 안에 있음’으로서만 본래적이다. 이러한 결단성은 현존재 각자의 양심(Gewissen)의 부름에 의해서,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 의해서 불려질 수 있어야 한다. 양심은 ‘그들’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자신의 존재가능에로 불러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 의해서 ‘의지적’으로 계획되거나 준비된 것이 아니다. 양심의 부름은 ‘나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현존재 자신을 그의 ‘존재가능’에로 부른다. 따라서 현존재가 갖는 그 자신의 존재 가능을 이해하고 그 존재가능이 평균적 일상성에 빠짐으로써 망각될 때, 현존재를 다시금 그의 존재가능에로 불러냄이 양심이며, 이 양심의 부름에 의해 현존재는 그의 본래성을 회복한다. 양심의 부름이 가능할 수 있는 앞선 계기는 인간 현존재가 이미 존재자들의 세계에 ‘내던져져 있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내던져져 있’는 현존재 자신을 그의 실존 가능성 속으로 앞서 불러가며, 자신의 ‘내던져져 있음’을 자신의 실존의 근거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 현존재 자신을 다시 그의 ‘내던져져 있음’ 속으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인간 현존재는 ‘내던져져 있음’에 의해 규정되므로, 스스로 이 ‘내던져져 있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그 자신(존재가능)에로 결단함으로써 그때마다 자신의 근거일 수 있다. 이렇게 ‘내던져져 있음’으로 규정되어 실존하는 현존재는 ‘내던져짐’으로 일상과 ‘그들에’ 빠져있는 자기자신을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불러낸다. 이 불러냄은 자신의 ‘내던져져 있음’까지도 자신의 ‘탓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 속으로 앞서 불러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던져져 있음’을 존재가능의 근거로 삼는 한, 자신의 ‘내던져져 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불러옴’이다. ‘탓이 있음’에서 ‘탓’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 바로 ‘내게 탓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탓임’은 내가 반드시 책임지고 떠맡아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우리의 일상성 안에서는 이러한 ‘탓이 있음’이 숨어있다. 그렇다면 이제 현존재는 스스로 그 자신에게 그 ‘근원적 탓이 있음’을 일깨워야 한다. 양심은 현존재의 ‘탓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부름을 부른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 현존재는 애초에 그 내던져져있음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 내던져져 있음의 근거를 이루지 못한다. 현존재는 그 내던져져 있음을 떠맡으며, 떠맡음 안에서 시간의 양태를 이해하면서, 세계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 관계맺는다. 현존재는 시간성의 이해 안에서 ‘탓이 있음을 떠맡음’을 획득하며 염려의 구조 안에서 그의 존재가능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존재가능에로 향해 있는 현존재의 존재는 이제, 전승된 철학에서의 실재(existentia)와는 달리 ‘그때마다 각기 자기자신으로 실존한다’라는 존재성격 안에서 규정될 수 있게 된다. 실존이란 더이상 ‘그것이 그것일 수 있는 바로 그것’으로서의 본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인간현존재가 그 고유한 자기 존재가능성을 세계 안에서 ‘어떻게’ 열어밝혀가는가라는 물음 안에서 정립되게 된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그 스스로 그에게 그의 존재를 열어밝힌다. 자신에게 열어밝혀진 자로서 현존재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능성을 열어밝히고 존재자들을 발견한다. 즉 현존재의 스스로 열어밝힘과 발견함으로 세계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발견된다. 어떤 것이 밝힘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그 발견된 것에 대한 진위판단을 가할 수 있다. 판단은 발언을 통해 일어난다. 발언 안에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은 발언된 존재자 자체가 자신을 발언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우리들의 지각에로 내어 보일 때, 확증된다. 발견되어 있음이 그 존재자와 ‘동일한 것임’으로 발견된 존재자는 그 발견함을 간직한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가능성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열어밝혀져 있음’은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열어밝혀져 있고, 자신에게 열어밝혀진 자로서의 현존재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능성들을 열어밝히고 존재자들을 발견하고 있는 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진리 안에 있다” 진리는 ‘비은폐성’을 뜻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에 연유한다. 비은폐성은 ‘발견하면서-있음’으로써 ‘드러나 있음’, ‘숨겨져 있지 않음’ 등을 뜻한다. 발견된다는 것은 그에 앞서 그것을 발견하는 존재자가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발견하면서-있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는 현존재, 그리고 그와 함께 세계가 열어밝혀져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진리는 오직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그리고 있는 동안에만 (주어져) 있다. 존재자는 도대체 현존재가 있는 그때에만 발견되어 있고 그 동안에만 열어밝혀져 있다” 그런데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우선 대개 ‘그들-자신’에게서 길어온다. 즉 ‘그들-자신’의 평균적 일상성에서 그것을 열어밝히고 발견한다. 현존재가 “빠져있음”에 의해서 ‘닫혀져 있’고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이미 발견된 것들 조차 다시 가리워지고 닫히게 될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현존재와 더불어 각기 그때마다 이미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발견되어 있는 한, 그와 같은 존재자가 세계내부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으로써 가리워져(은폐되어) 있거나 위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이미 발견된 것도 가상과 위장을 거슬러서 분명히 자기 것으로 하여 발견되어 있음을 자기를 위해서 언제나 거듭 확보해야 한다. ‘자기 것으로 만듦’은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함”, 즉 ‘본래적 이해’를 뜻한다. 5. 여전히 길 위에 서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우선 우리가 별 물음 없이 받아들이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입되어 새겨지는 ‘인격’에 관한 내용이 실제로는 구체성이 없음에서 출발하였다. 사실 나는 ‘인격’이라는 주제는 '인간'과 '세계'로부터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다가’인격‘이라는 것이 결국 드러나는 상황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네 말 습관으로 ’인격‘이라는 문제 앞에는 늘 ‘인간다운’, 혹은 “인간적인” 이라는 서술어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낱말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그 낱말이 가지고 있는 요소이다. 설명하는 수식어는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것, 즉 그 설명이 머물러 멈춤할 수 있는 것에 부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을 무엇이다’ 또는 ‘무엇이 어떠하다’ 라고 지시하는 발언을 ‘그렇다’라고 하는 판단은 그 발언이 그 발언이 멈추는 곳, 즉 발언으로 지시되는 존재자에 일치할 때, 확증되는 것이다. 지시하는 발언은 일단 발언이 미치는 곳, 즉 구체적인 존재자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설명하는 말과 그 설명이 지시하고 있는 것의 관계는 서로에게 속하고 있다. 우리가 “저것은 꽃병이다”이라 말할 때, 도구로써 지시되는 ‘병’은 다른 도구 사용가능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많은 ‘병’ 중에서 ‘꽃병’은 ‘꽃을 ‘꽂아둘 수 있음’에 근거한다. ‘꽃을 꽂을 수 있으므로’ 하나의 병은 꽃병이 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것은, 그 구체적인 존재자의 발견됨은 이미 현존재가 그것의 도구적 사용가능성을 ‘앞서 발견하고 있음’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가능성을 갖는 도구는, 그것의 ‘눈 앞에 있음’을 이미 ‘무엇’으로써 갖는 본질에 의해 규정되기에 앞서, 이미 ‘앞서-발견하고 있음’에 놓여 있다. 칸트를 따르면, 이 본질은 사물적 객관적 실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간 이성에 있다. 우리는 어떤 꽃병을 가리키며 “저것은 예쁜 꽃병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쁜’이라는 말과 ‘꽃병’이라는 사물은 각기 다른 영역에 놓여있다. ‘꽃병’은 분명 꽃을 꽂아놓을 수 있는 사용가능성 안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꽃 병’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예쁨’은 도구적 사용가능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예쁨’은 우리의 개념 안에서 순수하게 추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쁨’과 ‘꽃병’이 함께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은 서술어 ‘예쁨’이 도구사물로 실재하는 어떤 ‘꽃을 꽂아두는 병’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때 가능한데, 이는 구체적인 ‘하나의 꽃병’을 ‘예쁨’이 지시할 때 그러하며, 지시된 ‘꽃 병’이 실제로 ‘예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러하다. 그런데 하나의 꽃병은 ‘예쁘기’도 하고 ‘예쁘지 않기’도 하다. 게다가 ’예쁨‘이라는 술어는 어떤 존재자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형용사적 서술어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공간을 두루 관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대와 공간에 따라 그 서술어가 발견되어 적용되는 기준은 흔들린다. 그렇다면 “저 것(자,者)은 인간이다”라거나 “저 것(자, 者)는 인간답다”는 우리에게 어떻게 지시되는가? 인간은 분명 어떤 도구적 존재자가 아니다. 다시 말하여 문제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와 ‘인간다움’이 도구나 사물처럼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실재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인격을 ‘인간의 인간다움’이라 옮기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그 개념은 ‘인간이 인간답다’와 ‘인간다운 인간의 본질’이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은 어디에 닿아있는가? 도대체 그것을 근거짓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다’라는 말이 정초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인간에 대한 모든 물음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에 대하여 ‘어떠함’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는 바로 그 ‘어떠함’과 ‘발견함’ 그리고 ‘발견됨’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대체 우리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어디로부터 발견하고 있는가? 인간들은 봄으로써 어떤 것에 대해 시야를 형성해나간다. 우리말에 “옆집 불 보듯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봄에는 눈에 잡히는 것을 아무 뜻없이 바라봄도 있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잡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볼 수 있음’은 무엇을 무엇으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봄이 미치는 ‘거기’는, 인간의 ‘발견할 수 있음’으로 발견되는 ‘발견하여-발견됨’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세계이다. 세계는 인간이 발견할 때, 비로소 어떠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세계는 또한 인간의 ‘봄’의 영역이 미치는 전부를 이룬다. 세계는 인간의 ‘발견함’으로 열리며, 인간의 ‘발견함’은 세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하여-발견되는’ 세계와 인간은 이미 그에 앞서 ‘있음(존재)’이 이해될 수 있을 때, 논구될 수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발견하여-발견되어-있음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발견하여-발견되어-있음의 사건에는 ‘발견하는’ 인간들이 ‘관계함’이 앞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계함은 우선 일상적으로 맺어진다. 따라서 ‘관계함’이 앞서 놓여있는 인간에 대한 본질규정 역시 ‘일상성’ 안에서 매김된다. 그런데 그 ‘발견되어-있음의 사건’은 ‘일상으로 발견하여-발견되어-있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발견되어-있음’에는 일상성 안에 머무는 ‘인간’들에 의해 벌어지는 조작과 위장도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사실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흔히 ‘사실성(reality)'이라 말하는 것은, 작용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실성(actulity)'으로만 이야기될 수 없으며, 그곳에는 잠재되어 있는 그 어떤 가능성(virtulity)의 영역이 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들인 한, 조작(당)할 수 있고, 사건 자체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고 감춘다는 의미에서 그 사건을 ‘은폐’(당)할 수도 있으며, 그만큼은 기만(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여지는 세계, 드러나는 세계, 게다가 대부분이라 지칭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는 세계가 우리들이 관계맺으며 존재하는 세계전체를 구성지을 수 없다. 일상적으로 발견되어 드러나는 세계는 인간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건 조작되고 위장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조작당할 수도, 기만당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가 일상성 안에 머무는 인간 존재방식으로부터 우선 발견되는 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일상성에 빠져있는 인간에 의하여 가해지는 조작과 위장이 덮어씌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제대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에 의해 위장되고 조작된 가짜의 것들이 우리를 주물주물거리며 우리의 눈을 낚아채어감으로써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들은 어떠함을 속이기도 하고, 동시에 어떠함에 속아넘어가기도 한다. 인간은 손 안에서 쓰임새를 갖도록 제작된 도구나, 우리 눈 앞에 그저 있음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달리 앞서 미리 구상된 모델에 따라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정해진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에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미리 규정되지 않은 채 내던져진 존재이며 각자로서의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끔 운명지워져 있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제기될 수 있는 초월은 바로 미래의 계획에 따라서 현재의 상황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즉 미래에 나아질 상황을 위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자유의 계기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으로써의 자유와 초월성을 갖는다. 인간의 실존은 철저히 세계-연관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세계와의 연관가능성 안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인간 실존에 있어서 말해질 수 있는 역사성은, 인간 실존의 특징이 자신의 목적을 향해서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 실존은 결정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그 가능성에로 나아가려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이다. 인간은 앞선 세대가 이룬 삶의 결실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그들 삶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즉 인간은 삶의 양식을 세대간에 전수하는 한편, 계승․발전시킨다. 즉 인간에게는 본래적으로 시간이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가능적 존재라는 사실은 이미 인간이 그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는 ‘시간의 의미’를 이해를 앞서서 요청한다. 이러한 인간 현존재에게 있어 그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는 실존이라는 존재방식은 늘 ‘탓’이 그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해하고, 그 이해로부터 세계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과 구체적인 관계맺음 안에 있다. 즉 ‘탓이 있음’을 떠맡음으로서 인간은 세계 안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자기로 실존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인간에 대한 논의는 전승된 형이상학(여기서는 칸트에 주목함)과는 그 길을 달리한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그의 말을 따르면,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책임있는 인격으로 마감된다. 이러한 칸트의 견해를 거꾸로 되집으면, 인간의 본질은 실천적인 도덕적 이성이며 이 실천적인 도덕적 이성은 도덕적 명령에 따름을 정언명법으로 받아들이는 의지적 인격을 규정한다. 그러나 실천적 이성은 개념 안에 있다. 칸트의 견해를 빌면, 앞서 약술했던 인간의 통일성과 동일성은 그것을 ‘앎’으로써 인간에게 획득된다. 그런데 이 ‘앎’은 ‘생각함’에서 근거하며 ‘생각함’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음’의 능력, 즉 ‘이성’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앎’에 앞서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근거로써 사유의 능력인 이성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칸트 철학의 맥락에서 절대적인 당위를 갖는다. 칸트에게서 보이는 도덕적 책임이 있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인격개념은 칸트철학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내 눈에는 실제로 그리고 구체적인 삶 안에 있는 인간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천상의 천사가 갖는 본질인양 느껴진다. 만일 책임을 지는 이성에 입각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이 인간에게 필연적이라면,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보편적 이성이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이며, 그 보편적 이성이 결국 추구하고 있는 것이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이라면,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에게 머리 숙여 인사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인간은 ‘그때마다’ 독특한 자기자신으로서 비본래적 일상 안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자기만의 본래적인 모습을 양심의 부름을 통해서 캐내어 가는, 실존하는 자이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인간을 ‘거기에-있음(현존재)라고 새로이 정립한다. 현존재는 일상 안에서 세계를 만나며, 세계를 구성한다. 하이데거를 따르자면, 일상 안에 있음은 비본래적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논의하였듯이 이 비본래성은 본래성에 비해 결코 낮은 등급이 아니다. 인간은 우선 대개 비본래적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비본래적 실존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에로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본래성과 본래성을 오가며 현존재는 부단히 자기 실존의 존재를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현존재가 내던져짐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자기 삶을 자기에게 ‘탓이 있음’으로 떠맡을, 가능해진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실존이다’라는 하이데거의 인간분석은 ‘무엇’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떻게’ 라는 문제 안에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물음하며, 스스로 그 물음 안에 뛰어들어 그 물음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적 존재, 곧 ‘실존’으로부터 밝혀진다. 실존은 ‘있음(존재)’으로 ‘발견하여-발견되는’ 세계 안에 있는(존재하는) 인간을 그의 ‘존재가능’으로 끌어내는 독특하고 탁월한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이제 자기 자신의 ‘있음(존재)’을 필연적인 보편개념이 아니라, 바로 그 ‘있을 수 있음(존재가능)’으로부터 규정하려 하는 하이데거의 인간 분석의 기초는, 모든 자기 ‘존재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탓이 내게 있음’을 떠맡는 실존에 놓여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책임지는 ‘도덕적 인격’으로 있고자 하는가? 혹은 나의 ‘있음(존재)’ 자체를 ‘탓’으로 떠맡는 현존재로 존재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로 결단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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