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영혼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

나뭇잎숨결 2022. 6. 9. 14:04

 

영혼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
- 존 힉의 경우 -

신 상 형(안동대)


[한글 요약]

본 논문은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 현대철학의 대답을 주기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 영국 경험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 힉은 인간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존재하며, 이것은 현재의 종교신앙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는 이 시도를 종교다원주의의 방법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체험은 매우 다른 것이라고 각 종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다양한 종교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같은 종교 안에서도 많은 모습이 다르다. 그러나 힉에 의하면, 경험되어지는 것은 사실상 동일한,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으로의 변화>이며, 이 정의를 기준으로 받아들여 본 과제의 분석을 시도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힉은 아주 자연스럽게 세 입장을 설정, 종교다원주의로 우리를 유도한다. 종교적 신앙 행태는 첫째, 배타주의 ― 다른 입장을 배척함 ―, 둘째, 포섭주의 ― 공통성을 인정함 ―, 셋째, 종교다원주의 ― 자기 종교의 내용이 다른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인정함 ―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위에서 말한 신앙의 개념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지기 위해서는 종교다원주의가 수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은 물리적 육신의 종말을 의미하나, 예술적이나 종교적 측면에서는 종국의 끝자락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경험이 물리적인 영역을 제외하더라도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질 다른 영역은 있는가? 그리고 육탈된 영혼은 저 혼자 존재하는가? 힉은 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적 설명을 시도한다. 우선, 꿈과 실제 삶과의 관계에서 보듯, 우리의 사후세계는 현실의 삶을 반영하는, 그러나 다른 체계를 가진 세계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성육신'과 같은 기독교적 개념도 인간의 삶에서 다차원적으로 체현되듯이 우리의 의식도 사후세계에서는 다양한 층위의 삶에로 연결된다고 본다.

힉의 영혼에 대한 가설과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통한 시도가 현실에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꿈의 비유를 통한 설명이나 불교의 인간 존재의 해명은 여전히, 삶의 모사와 삶의 연장의 구별을 불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그의 시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케 만든다.


주제분야 : 종교철학
주 제 어 : 존 힉, 종교다원주의, 영혼론, 사후세계



들어가는 말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인간은 영혼의 활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금수와 버러지의 수준을 능가하려면 육신의 삶의 구간을 벗어난 그 이전과 이후의 삶 ― 영혼 ― 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관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탐구 ― 신앙적이든 철학적이든지 간에 ― 를 해왔다. 플라톤의 주장처럼,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그의 육신과 분리되어 살아남는다고 믿는 이들도 있고, 유가에서처럼, 심지어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어왔다. 과연 영혼은 존재하는가? 만일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런 영혼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또 어떤 영혼이 한 특정인의 영혼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분리되는가? … 이렇듯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물음은 우리의 논의를 번쇄한 것으로 만든다. 논의의 편의와 최소한의 효율성을 위해, 여기서는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영혼은 존재한다는 가설과 더불어 이 논의를 진행시키려고 한다.

종교철학의 주제중에서 영혼론에 해당하는 본 논문은 구체적으로 현대의 종교철학자인 존 힉의 입장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힉은 자신의 사상적 배경인 기독교 신앙을 한 마디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사건에 대한 신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중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후반부이다. 즉 그는 종교활동에서 벌어지는 인간화의 모습에 착목하여 거기에 가치를 둠으로써 신앙의 교리 자체보다는 인간 삶의 종교적 의미 파악에 이르게 된다. 경험상 이종교간이나 같은 종교 내의 종파간에서도 괄목할만한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즉, 복잡한 교리나 신학적 체계를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몰라도, 외형상 신앙인들의 순수한 삶은 심지어 모든 종교에서 거의 유사한 행태를 띠고 드러난다. 힉은 이런 모습을 자신이 산 잉글랜드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에 사는 다민족 종교 교도들에게서 보고, 영혼의 모든 종교활동은 경험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의 상호 모순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각 종교는 진리에 있어서 대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과, 둘째로,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절대적 위치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판단자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청되는데, 힉은 그것을 도리어 드러난 종교생활의 체험으로 끌어내려 설명하는 혜안을 갖고 있다. 사실 영혼의 불멸은 우리가 쉽사리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육신의 오감을 통해 그 존재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므로, 그것은 사태를 통해, 더 정확히 말해 영혼과 육신의 관련성이 변화를 일으키는 죽음의 사태를 분석해 봄으로써 영혼의 존재와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면으로, 그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영혼을 탐구할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 논문은 죽음이라는 사태를 통해 영혼의 문제를 탐구하려는 시도로서, 죽음, 육탈된 영혼 및 부활 내지 환생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나, 뒤의 문제는 추후의 과제로 미루고 여기서는 육탈의 문제까지 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1. 방법론: 다원주의

존 힉의 종교철학적 방법론은 다원주의이다. 힉은 스미스 Wilfred Cantwell Smith의 다원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종교를 말한다. 즉, 지구에는 수많은 광범위한 긴 역사적 실재 내지 체계로서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있는데, 각각은 내부의 신념 골격 체계를 갖고 특정한 종교적 삶의 형식의 틀을 제공하면서, 다른 종교 및 세속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두꺼운 외피 조직으로 싸여 있다. 따라서 이들은 특정한 신조를 품고 있는 상반된 사회·종교적 실재들이며, 각 개별 종교는 상호 배타적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이런 경쟁적 종교 신념의 장치를 근거로 한 종교적 삶의 이해는 종교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즉 한 종교가 고백하는 신념들은 하나님이나 궁극 원인에 대한 신념이며,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인간구원이나 해방의 방법을 규정하고 따라서 영적 생사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세상의 종교들은 다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소지하고 있다는 경쟁적 주장들로 주어진다. 각 집단은 자기 자신의 복음이 진리이고, 다른 교리들은 자신들과 다른 만큼 거짓이라고 믿고 있다. 각각은 자기가 증거하는 구원의 방식이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인증된 길이자,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다양한 주장에 직면하면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은,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 이다.

그러나 여기서 힉은 그 질문을 약간 회피하면서 스미스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그 기준이나 방법이 모호하여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선 '종교'라는 개념을 지나친 기독교나 유대교 식이라고 보고, 대안 개념으로 '신앙' faith이라는 개념을 채택, 이것을 '생생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무엇' something of vital religious significance으로 부른다. 그는 이것을 사용하여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개인의 드러난 대응으로 구성된 영적 상태나 존재론적 조건을 지칭한다. 이 상태의 범위는 신적 현전에 맹목적인 자기 폐쇄적 의식의 부정적 대응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우리를 변형시켜 구원, 해방 혹은 계몽이라 불리는 신성에 대한 긍정적 개방에까지 이른다. 이 변형을 힉은 상이한 종교적 맥락에서도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이 변형을 공식적으로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으로의 변형' 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이것은 세계관의 변화로서 다양한 종교적 전통으로 얻어지는 궁극자에 대한 상이한 지각이기도 하다. 이것은 개인마다 문화마다 오랜 역사를 통해 누적적으로 다른 형식을 띠고 발전하였다. 이런 형식으로 힌두교도, 불교도, 유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가 다를 뿐더러,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역사적으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번쇄해진 교리와 복잡한 의식 그리고 다양해진 교파는 어느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소위 수 백 가지의 종교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지경에서 어떤 특정 종교의 주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형평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그런 시도 자체가 무리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데, 힉은 자신이 속한 기독교 입장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여 세 가지 선택지를 기술하고 있다.

우선, 배제주의 exclusivism가 있다. 이것은 자기의 종교 안에만 구원 혹은 해방이 있는 것으로 한정하면서 다른 집단은 그런 가능성에서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기독교 밖에는 구원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구원 교리, 즉 아담의 범죄로 빚어진 인간의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용서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고, 이럴 경우 구원은 당연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구원이 자기 삶을 자기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면, 이것이 꼭 어떤 한 역사적 전통, 즉 종교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사실 이런 변화는 수준이나 방법이 다르기는 해도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기독교의 배제주의는 이제 중심선에서는 사라지고 있다고 힉은 보고 있다.

두 번째 입장은 포섭주의 inclusivism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간 존재 개념의 변형인데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집행은 모든 인간적 죄를 망라하였으므로, 모든 인류는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열려 있고 심지어 기독교의 그리스도를 들어본 일이 없고 또 십자가의 죽음을 몰라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어디서 일어나건 간에 보편적인 신적 로고스, 거룩한 삼위일체의 2위로서 일 때 그러하다. 말하자면, 힌두교의 미지의 그리스도나 기독교의 미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구원 혹은 해방 및 누적적인 종교 전통 사이에 대한 다원주의 pluralism이다. 다원주의란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들의 맥락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이다. 기독교식으로는 신성한 계시의 다양성이 있어서 인간 구제 응답 형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 입장인 다원주의적 입장이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전통적 기독교가 포섭주의를 거쳐 다원주의로 옮아가는 데는 삼위일체 및 성육신의 교리가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로 만들게 하는 골간을 이루는 것으로 성자 예수는 성육화한 삼위일체의 2위격이라는 교리이다. 비록 이것이 세속적 지식으로는 비실재적이라 하더라도, 니케아 및 칼세도니아 회의에서 이를 기독교의 교리로 공인하고 또 모든 기독교가 이 기초 위에서 그 자격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배타적인 속성을 갖는 기독교리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라는 양자 선택의 교리 all-or- nothing Christologies 인데, 힉은 여기에서 등급 교리 degree Christologies를 제안함으로써 또 한번의 도약을 시도한다. 즉 양자 선택의 교리는 칼세도니아 정의에 따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두 가지 본성, 즉 그의 신성에 따른 성부와의 동질성 및 인성에 따른 우리와의 동질성으로 고백하는 교리이다. 실체는 논리적으로 a가 b와 동일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거나 아닌, 혹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거나 아니거나 라는 의미에서 양자 선택의 교리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그가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교리이다.

등급 교리에서는 '성육신'이라는 개념을 인간 삶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에 적용하여, 신성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한다. 이런 종류의 재해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열려 있고 또 반응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개인 안에 그리고 그를 통해 활동할 수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인간의 삶에 체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에서 드러나는 모순은 예수의 삶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반응에서 '다양한 등급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힉은 모든 현대의 등급 교리가 기독교의 종교 다원주의의 수용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이것이 해묵은 실체 교리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실체 교리에서 출발할 때 그리스도와 기독교 교회의 유일한 우월성이 선험적으로 보증되는데 반해, 등급 교리에서 출발할 때 그것들은 역사적 증거에 의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진술된 다원론은 위대한 세계적 신앙이 실재 혹은 궁극원인의 상이한 지각과 개념들 및 따라서 그것에 대한 상이한 대응들을 인간이 되는 다양한 주요 문화적 방법들 내에서 체현한다는 견해, 즉 각각의 방법 내에서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제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는, 인간적 관찰에 관한 한 동일한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활동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2.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해 자연주의적이거나 인간적인 수용이 틀림없이 있을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은 상이할 수 있으나 대부분 생물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수용한다. 이런 견지에서 죽음이란 개인의 발전 과정의 필요한 부분이라 보여진다. 인간을 포함한 어느 종이라도 죽음을 통한 지속적 손실로 균형을 맞추는 이런 징발 없이 새로운 구성원이 태어난다면, 지구는 곧 그들을 위한 공간과 자양분이 없어질 것이고, 그 종들은 그 결과 넘쳐 나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각 세대는 번갈아 가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생명의 시초로부터 이러한 종의 새로운 개체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계승이 있어왔다. 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력을 증진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은 각 세대에서 일어나는 작은 임의적 차이를 통해서이다. 자연적 죽음은 따라서 변화하는 조건에 순응할 수 없는 개체군의 제거로 간주된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 변화는 항상 도처에 널려 있어서, 어떤 한 종의 생물학적 효과는 자연스럽게 확증된다. 재생산과 순응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은 자연사에 의해 제거되고, 재생산과 적응에 효과적인 새로운 것들에 의해 대치된다. 한 인문학자는 자기 자신의 미래의 소멸을 계속되는 경주의 삶에 대한 기여로 신중하게 수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힉은 Crew를 인용해서 말한다. '나는 늙었으므로, 죽음이란 개별적인 것이요, 나의 종말이라는 생각을 군말 없이 수용한다… 과학자로서 내 활동의 몇 가지 업적은 내가 봉사하려고 시도한 그 과학의 피륙에 체현되었다' 이것은 모든 과학자가 희구하는 소위 그들의 영혼불멸이다. 인간은 단순히 동물로서, 다른 생물의 종들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의 의식과 개성은 절대적으로 하나의 총체인 두뇌와 육체가 죽을 때 두뇌의 기능에 좌우되고 존재하기를 멈춘다. 의식은 포유류의 신경체계의 일시적 부산물로서 일정 수준의 복잡성까지 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에서도 살아남는 의식적 개성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인문주의적 가설의 함의에 대해 버트란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은 도달해 가는 목적에 대해 전혀 예견을 갖지 못한 바인 그 원인의 산물이고, 자신의 기원, 자신의 성장, 자신의 희망과 공포,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신념은 단지 원자들의 우연적 배열의 산물일 따름이고, 아무 불, 영웅주의, 사고나 감정의 강렬함도 개인의 삶을 무덤 너머까지 보존시킬 수 없고, …'.

러셀이 여기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그리는 그림은 명백히 비관적인 것이다. 이 지구상의 삶은 조만간 끝나게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개발된 가치는 인간과 더불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무한히 광대한 시공간 속에서 덧없고 우연적인 현상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 우정, 충성과 선함, 자연세계와 인간의 예술적 창조의 끝없는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사상과 과학의 성취는 모두가 자기 정당화일 뿐 아니라, 그 가치는 인간의 궁극적 사태의 인문주의적 이해에 의해 축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 지구는 거주가 불가능하기 전에 인간이 태양계 내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류 종족이 불멸하고 계속되는 세대인 것이 판명되어 인간 존재의 가치를 끝없이 즐기도록 될는지 모른다.

이 정도가 되면 인문주의는 삶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인간적이고 특별히 나은 관점을 넘어서서 총체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검토해 보면, 그것의 가능성을 성취하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삶의 만족스러움에 대해 최대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잠재력은 공통된 원인을 가진 사람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및 협동, 그리고 자연 세계의 향유와 인간의 사상과 예술의 여러 측면의 감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잠재성은 사실 다만 극소수의 인간의 삶에서만 어느 정도까지 실현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지구 거주자들은 만성적 영양 실조, 기아의 위협 하에 살아가며,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압박, 착취, 노예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자신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절대 빈곤으로 고통 당하고 있으며, 삶의 조건들이 제약을 받아 출생 때부터 가진 인간 종의 잠재력 실현을 거부당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모든 삶이 고(苦)라고 하는 석가의 가르침을 부인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이 다음 단계로 종교들이 열반이건 절대심과의 일체의 실현이건 간에 인간적 성취의 본성에 대해 제공하는 관념에 도달해야 한다. 현재 힉이 주목하고자 하는 통찰력은 그런 성취가 단일한 세상의 삶에서는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에 도달했을 때, 그에 앞서 이미 수십만의 삶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세상 삶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도 우리가 인간 존재의 선한 목적을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한 한 세상의 삶의 공간 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삶 내에서 단지 몇 사람이 인간의 잠재력 성취를 향한 긴 여정을 가고, 대부분은 조금 진보하는데 비해, 상당수의 사람은 거의 진보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역행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잠재력은 통상 이 현재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삶은 계속적인 출생의 과정이다. 거의 모든 인간의 삶에서 비극이란 우리가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관념의 차이와 그들 각각의 장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 양쪽의 종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시각이다. 이것은 인간의 잠재력이 개인 남녀의 삶에서 성취된다면, 그들의 삶은 우리의 현존하는 육체의 존재 너머에까지 한계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되어야 할 자아는 동물적 유기체의 간단하고도 불안전한 진전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계속되는 인간의 사후 세계라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 후 마음의 형태는 어떠할까?


3. 육탈(肉脫)된 마음의 생존

육체가 없는 의식은 어떨까? 그 경우 인간은 무엇을 의식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각각 어떻게 식별될 것인가? 육탈된 마음의 생존 개념은 프라이스 H. H. Price에 의해 명료한 가설로 바뀌었다. 그는 세 단계로 자신의 이론을 펼친다. 그는 사후의 지각이 꿈에서의 지각과 똑같은 일반적인 종류가 될 것을 시사한다. 즉, 사후 지각들은 마음에 의존되는 것으로 사람의 육화된 삶의 기간 동안 획득된 심리적 상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가 보이는 그대로 자신과 주위의 물리적 환경에 감지되는 대로 갖는 상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시각에서 그 결과는 자기가 육체적 유로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세상의 지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의 현재 세상과는 우리의 꿈 가운데 있는 사건들의 진행과 배열이 깨어있는 삶의 그것과 차이 나기가 쉽다는 방식으로 다를 수 있다. 때때로 꿈에는 갑작스러운 일탈과 변형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법칙들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일텐데, 우리의 생존이 물리적 생존이기보다는 심리학적 생존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이스가 둘째로 말하는 것은, 우리의 꿈은 다른 사람들이 단지 독립된 의식 중심에 의해 활기가 불어넣어지지 않은 현상일 뿐인 사적 체험인 반면, 사후 세계는 이 삶 가운데 과외의 감각 지각으로 불리는 것으로 다른 마음과 상호 작용하고 실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텔레파시 활동이 있어서 시청각 이미지를 산출하므로, 나오는 체험은 다른 사람을 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매우 흡사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촉각, 미각 및 후각적 이미지들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거주할 일관성 있는 삼차원적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많은 상이한 사후세계 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미적 관점에서 보면 보다 고차적이고 저차적인 세계들이 있을 수 있다.

셋째로, 다음 세계는 우리의 욕구의 힘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이리하여 프라이스는 다가 올 세상의 가상적 거주자들에 대해, '그들의 기억과 욕망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를 결정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렇게 한다면, 그런 세상의 질료 또는 재료가 결국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오고 그것의 형식은 사람의 욕구로부터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소원 성취의 영역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즐겁다고 가장하는 것은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꿈들은 오류 없는 정확성을 갖고 우리 욕구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적 사고 유형과 관계를 가진 대안적 가능성으로서, 욕구는 궁극적으로 채워져서 죽고, 우리의 개별적 인간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라지고, 열반의 초인적 상태로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리하여 물리적 생존과 구별되는 심리적 생존의 기본적인 가설 내에서 프라이스는 두 가지 원리, 즉 첫째는 사후 세계의 심리 독립적 특성과, 둘째는 인간적 욕망의 힘에 의한 그들의 구성으로 작업을 한다. 이런 원리는 심리학적 생존의 가능 형식의 전 스펙트럼을 일으키며, 한 극단에서는 유아론적 해석에서부터, 다른 편으로는 심리 물리적 인간의 부활 내지 재구성이라는 전혀 상이한 개념에 분명히 경계를 두는 견해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프라이스 자신의 스펙트럼은 이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에 ― 사적 심리 세계 그림과 육체 부활의 그림 사이의 중간 ― 서 있다. 그러나 이론상 욕망의 힘에 의한 사후세계의 구성이라는 관념과, 그런 세상은 많은 마음들 사이에서 텔레파시 연결을 통해 공통되어 있다는 관념 사이에 갈등이 있다.

개인은 상식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환경 내에서 상관하고 있으며, 새롭고도 상이한 이미지들을 자기의 기억 창고에 덧붙이는 새로운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그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식을 갖고 있으나,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난 실재들과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깨어 있는 삶과 비교해 보면, 아주 생략된 생생한 의미에 이르는 정도이다. 만일 우리의 꿈이 심리적으로 결정된 사건이라면, 우리는 꿈의 삶 가운데서 자유 선택의 환각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꿈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면, 연장된 꿈속에서 우리는 윤리적 결정을 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성격의 발전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일관성 있는 가설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꿈속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꿈꾸는 사람은 그들이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모두를 요청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꿈꾸는 사람들을 독립적 의식 및 의지의 중심으로 간주해야 하고, 자기가 도덕적 선택을 하도록 요청 받은 상황들을 '실제적 삶'의 상황들로 간주해야만 한다. 이런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개인이 아무리 유아론적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신학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조건이 우리의 사후세계에 적용된다면, 그것의 거주자들은 사실 중대한 의미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하게 창조된 우주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반대하는 상황 내에는 환각과 속임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상관하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발전해 간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사후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환경은 비실제적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는 환각적이다. 이런 고려사항은 분명 어느 정도 적어도 이런 종류의 이론과는 역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그림에서 인간의 생존은 자기 자신의 유아론적 꿈을 실현하는 개인의 생존이다.

하나의 공통 세계라는 관념과 소원 성취의 주제 사이의 긴장을 주목해 보자. 소원 성취란 공적인 후의 삶보다는 유아론적 삶을 지시한다. 분명 사적 세계들의 다원성만이 각 개인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 욕망의 혼합에 적절한 사후 환경을 체험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 '각인의 정화는 다만 자기 자신의 욕망의 자동적 귀결일 것이다.' 따라서 사후 세계는 인간의 소원에 의해 창조되었다 라는 말과, 사후 세계는 수많은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결합시키기란 쉽지 않다. 욕망은 개인에게서 유래하고, 보통의 일상적 소원의 수준에서 두 개인의 욕망과 큰 집단의 욕망은 같은 사태에서 동일하게 성취되도록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실제로 상이한 사람들의 집단이 가진 욕구로 창출된 정합적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이한 개인들의 상이한 소원은 그들에게 맡겨 둘 때, 환경의 상이한 면모와 사태를 산출한다. 두 부부가 동일한 장소에 나란히 있으면서 각각 다른 소원을 가진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적이고 공적 세계의 그림 안에, 개선된 방식으로 소원 성취의 원리를 남겨 둘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각 개인의 소원이 자기 사후 환경의 창조에서 주제라는 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에 수많은 마음의 기억과 욕구들이 공통적 환경을 산출하기 위해 모이는 상황을 그려야 한다. 각각은 비록 이것이 예외적으로 어떤 한 개인의 기억에 바탕을 두거나 예외적으로 한 개인의 소원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사는 세상에 공헌할 것이다. 그 성격을 결정하는 욕구는 많은 개인의 욕구들의 폐기나 상호 강화에 의해 산출된 복합 결과를 대표하여, 감지할 수 있는 내용에서 그런 세계는 수많은 개인 사진의 겹치기 인화로 형성한 '총체적 그림'과 유사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 특성이 완전한 인간 종족의 감정, 욕구 및 기억의 합성인 죽음을 넘어서는 단일 세계라는 개념은 유명한 구약 성경의 주제 즉, 개인이 더 큰 사회 조직 안에서 세포로 존재하는 종족의 집합 공동체의 개념과 일치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더 개인주의적인 신약성경의 전망은, 상이한 영적(문화적이 아니라) 수준에 존재하는 천국의 위계라는 개념과 더 일치한다.

그러나 인간적 욕구로 형성된 사후 세계를 그려보는 이론들에 반대한 일반적인 신학적 고찰이 있다. 이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이론 스펙트럼의 유아론적 종말로부터 나아가 소원 성취의 원리 사용을 벗어나게 한다. 이 고찰은 주로 악에 대한 신학적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것은 2세기말의 이레니우스의 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상에 따르면, 우리의 세상적 존재의 목적은 인간이 도덕적, 영적으로 지각 있는 사회적 동물의 상태로부터 우리의 인간 본성의 완성을 대표하는 존재의 질을 향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은 성장이 이루어지는 환경이도록 의도되어진다. 세상이 우리 인간의 소원에 유연해서는 안되고 주어진 자연 질서를 그 자체의 확고한 특성과 법칙들을 구성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인간 만들기에서는 본질적이다. 인간의 지성과 성격이 발전한 것은 우리가 일부가 된 객관적 환경의 요구와 맞붙어, 우리에게 할 일, 풀 문제, 만날 난점, 견딜 장애물들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였다.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는 세상이, 값있는 질적 창조를 위한 장면으로서,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는 형성될 수 없고, 반대로 인간의 욕구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고정된 구조를 가져야 한다.

사람 만들기는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벌어지며, 죽음을 맞을 때까지 거의 완성되지 않는다. 만일 사람 만들기 과정이 성취되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 죽음 너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구성적 과정으로서 인간 삶의 실제적 지속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런 고찰은 프라이스를 통한 힉이 주창한 이론의 유형에 대해 결정적으로 반대되지는 않으나 차이는 있다. 그의 이론은 현재 삶과 미래 삶 사이의 중요한 구별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구별은 이레니우스의 그림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구별에 따르면, 현재의 삶이 우리의 개성이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갖고 객관적이고 변화하는 환경의 문제를 물고 늘어짐으로써 강화되는 반면, 어떤 미래의 삶도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하는 세상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조한 세상에 거주하면서, 우리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시작된 인간 만들기 과정을 지속할 수 있을까? 세상은 똑 같은 과정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한데, 환경이 인간의 욕구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고정된 특징을 가지는 것은 이것에 대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소원 성취의 세상이 특성을 형성 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기껏 이미 지구상에서 진척된 욕구와 경향의 세련과 순화밖에 없다. 이러므로 이런 특별한 신학적 관점에서 분출하는 고찰은 우리를 소원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분리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고찰들은 이것을 현상 세계가 그것을 의식하는 마음과 관련시켜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기만 하면, 심성 독립적 측면과 일치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힉을 통한 프라이스의 고찰을 살펴보았다. 그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이 개발한 실재의 이해는 현재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으나, 내세에 대해서는 참이 될 수 있는 이론을 말했다. 그런데 왜 이 세계는 원초적 성격에서 여느 다른 세상과 다른가? 두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통해 존재하며 동일한 사람 만들기 목표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하는 이레니우스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반대를 주장할 이유가 없는 한, 양자는 동일한 기본적 본성을 가질 것이다. 그 둘은 궁극적으로 천국, 열반,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그런 관념들로 상징화되며, 현세적이기보다는 영구히 극단적으로 다른 사태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죽음을 너머 더 직접적으로 놓여있는 무엇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우리의 현세와 형이상학적으로 유사한 상태를 가진다고 기대할 일차적 사례가 있다.

힉의 프라이스 해석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우리가 육탈된 마음의 사후 존재를 지각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이것은 결국 참된 육탈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 거주하는 물리적 몸이 전혀 없다면, 마음은 꿈의 세계에 거주하는 자기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만 하는데, 꿈은 꿈의 세계를 물리적 세계로 경험하는 자들에게는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지속적 인격의 동일성은 한정적 의식의 지속을 요구하며, 환경 내에 있는 특별한 전망에서 그 환경을 의식하며, 그 환경과 관련시켜 의지 작용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힉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종교 전통의 다양성을 관용하는 측면에서 배제주의나 포섭주의를 넘어서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들로서는 세계 종교 전통의 다양성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자기가 속한 종교의 일면을 절대시하여 타종교의 존재를 거부하는 배타성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포섭주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종교의 상대적 절대화의 오류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힉이 예로 들고 있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2위의 예는 타종교의 신관 혹은 신앙관을 용해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포섭주의를 넘어설 경우, 종교에 대한 이해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갖는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힉은 주장한다. 힉이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각종교가 나름의 체계와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신념체계이기 때문이다. 이것 각각을 '전부 아니면 전무' 라는 교리를 통해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며, 도리어 '정도'의 교리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힉은 하고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 삶의 종국적 끝자락이다.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람(의 직능)에 따라 비록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삶의 의미에 있어서 한 계기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 더욱이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이해한다면), 인간의 자연사적 죽음은 결코 (종교적) 인간의 영혼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새로운 각성에 이르는 누적적인 과업의 과정임과 동시에, 종교적 선업을 이룩하는 초월의 실현이다. 자연적 죽음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죽음을 통과하는 사람이 만나는/만난다고 가정하는 다음 단계가 육탈된 영혼이다. 힉에 따르면, 육탈된 영혼의 사후세계의 형태에 관해서는 개인 욕구의 소원이 성취된 모습과 자신의 순화된 변형 인격이 어느 차원에서 내용상 조합되느냐가 철학의 과제이다. 우리가 가정하는 세계가 심리적 형태를 띠든, 수학적 형식을 갖든, 아니면 가상 공간의 모양을 갖든지 간에, 현재의 우리의 신분과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의 모습을 영혼은 갖고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힉의 다원주의적 영혼의 설명은 많은 다른 역사와 형식을 갖고 있는 종교들로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섭취해서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힉의 종교 다원주의적 시도는 일정한 한계를 가진 듯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힉의 한계를 지적해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인성에 근거하여 이룩될 수 있는가? 역사적 증거가 종교 교리의 우월성이나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