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Raison suffisante)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pp. 79-109 [2004(원P.192, 번272)]
하늘의 평화 시대에서 지상의 평화. 그 지상의 긍정으로 다양한 모나드들의 긍정. 각 모나들이 각각 있을 이유가 있다. 벩송이 말하듯 하늘의 실재성이 갈릴레이의 빗금을 타고 지상에 내려왔다. 이 실재성은 자기의 독자성을 갖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우선 상층(천상)의 관념을 현실 속에서 두 종류로 나누고, 표면에서 둘 다 실재성이며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영혼과 신체(물체), 둘 다 실재성이라하여, 물체를 학문으로 다루는 길을 열었다. 그럼에서 현재의 신체(물체)의 내용을 부분 또는 세분하여 들어가는 길을 연 것을 라이프니츠이다. 지상에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그 신체(물체) 안에 그 만한 능력 또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그 미세 부분은 하늘(착한) 것만이 아니라 지하(나쁜) 것도 섞여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제 덩어(몸체)로서 등장하여 표현하는 모습을 최상(또는 최선)을 삼기 위해, 우주에는 선전제로서 조화를 먼저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아직도 데카르트이래로 우주의 총량이 불변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르라. 그 지상의 개체는 조화, 최상에 맞게 현실의 실재성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으리라. (53SKI)
라이프니츠가 충족(충분)이유를 자연에서 사물들에게 고유하게 내재하는 운동이며 성질들의 변화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즉 사물의 사물의 자기 고유한 변화의 힘이 있고, 자발성도 있으며,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힘(노력)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리라. 그럼에도 우주의 단자 속에 각각의 단자로서 유지 또는 조화를 생각한 것은, 그 시대의 통념이었던 우주의 총량의 불변을 선전제로 두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총체적이고 무한한 우주의 불변성은 영원성을 함의하고 있고, 우주의 주재자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체의 자율성, 힘, 자기 표현, 자기 유지(동일성) 등의 개념을 생각한 것은 데카르트적 시대를 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 과정은 라이프니츠가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려 하기보다 기존의 존재론과 현존론에서 현존의 삶이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신의 현존보다 개인의 현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명제(판단), 수학의 함수, 산술의 계산 방식, 기하의 인수분해 등에서 서로 내재적으로 포함하는 양태들의 유사성 또는 동질성들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이 유사성을 법칙 또는 원리로서 만들어보고자 하는 꿈이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시대의 한계로서 다음 세대의 프레게, 화이트헤드 등에게 넘겨야 했을 것이다. / 다른 한편 존재들이 아니라 현존들이라는 점에서, 고대철학이 천상에 머물렀던 것을 대재의 땅으로 내린 갈릴레이에 이어, 라이프니츠는 구체적인 사물들과 물체들을 땅위에서 실재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는 존재와 속성, 양태라는 존재론적 용어들 대신에 바로크 시대에 걸맞는 개념들을 수용하면서 실체는 내재성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실체들이 벩송에서 언어적으로 실사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실사들은 움직이고 변화하며, 그럼에도 실사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측면이 있어야 철학적 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실재성의 위상(덩어리)에서,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충분이유율은 실사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유형들일 것이다. 이 유형들은 과정의 일정한 길이의 단면(확률적이지만)을 표현하는 항들이며 용어들이며, 이리하여 개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심층과 표면의 안쪽을 파악하는 방식에서, 스피노자는 인성의 자기완성으로 나가는 길에 관심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사물들 또는 물체들도 자기완성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개체화의 길(확률적)과 개체로서 성립되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보았다(여기에는 다른 생명체들의 정도의 차를 인정하면서). 물체들의 현존과 현실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유물론의 또하나의 측면일 것이다. 즉 아페이론의 순수 자발성과 긍정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또는 아페이론이 전적으로 수동성이라고 하더라도, 제3의 체제 영역이 현실적으로 있으면서 모나드들이 최상을 이룰 수 있다는 관점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제3체제 영역을 우리는 소박한 유물론이라고 부르고 싶고, 아페이론의 자발성에 의한 자연의 자기 생성을 진솔한 유물론이라 부를 것이다. (53SKE)
이유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인과적 관계의 ‘원인’이 아니다. 이유는 자연의 자기 작동과 자기 활동을 의미한다. 이 이유의 근원적 물음을 이오니아 학파의 원질(archê)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박홍규는 이 아르케를 플라톤에서 원인(aitia)과 같은 의미로 보고, 아이티아는 이데아만이 아니라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도 있다고 한다. 즉 아페이론도 아이티아 이다. 그렇다면, 윤구병이 이데아를 1로 아페이론을 0으로 두고 그 사이에 제3자가 정도의 차이 또는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이 제3자의 다양성을 라이프니츠가 개체화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 개체화에서 개체들의 정도의 차이와 질적 차히에 상응하는 개체들은 각각이 이유를 갖는다고 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개체들 각각이 현존(존재가 아니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현존을 나타남 또는 현상으로 보았고, 현존하는 세상에서 현상들 각각이 자기 이유를 갖는다. 그러면 그 이유의 근원 또는 토대(깊이)는 무엇일까? - 플로티노스 용어로 일자(근원, 기원)은 무엇일까? 이런 사유의 방식에서 근원은 자연일 것이다. 이 자연을 이어받은 인성은 자연을 사유하는데 있다. 그러면 이데아란 무엇인가? 상상의 극한에서 있을 수 있는 가상성(벩송으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왜 이 가상성에 진리치를 두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이데아를 진리로 두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올라갔던 아페이론의 사다리를 버리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프라그마티즘(실용주의)가 프라그마타를 다루는 것이지 오노마타를 다루는 것이 아닐 진데, 프라그마티즘이 언어실증주의라는 이름과 연결하면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벩송이 프라그마티즘에서는 실재성을 다루고 있다고 했을 때는, 오노마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와 우주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우선 프라그마타이고 그리고 그것을 표상화 또는 용어화 하는 것이 논리분석에서 다루는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53SKD)
*목차
제1부 주름
1장 물질의 겹주름 / 2장 영혼 안의 주름 / 3장 바로크란 무엇인가
제2부 포함
제4장 충족 이유 79-109
*내용 ***
# 제4장 충족 이유 79-109 IV. Raison suffisante 55-
Evénements ou prédicats – Les quatre classes d’êtres, les genres de prédicats, la nature des sujets, les modes d’inclusion, les cas d’infini, les principes correspondants – Choses et substances – Les rapports internes – Le maniérisme de Leibniz – Le prédicat n’est pas un attribut – Les cinq critères de la subsatance –Manières et fond – Le jeu des principes // 사건들 또는 술어들 – 존재들의 네등급, 술어의 장르, 주어의 본성, 포함의 방식들, 무한의 경우들, 상응하는 원리들 – 사물들과 실체들 – 내적 연관들 – 라이프니츠와 마니에리슴 100 – 술어는 속성이 아니다. 98 - 실체의 다섯 가지 기준 103 – 양태들과 심연 105 – 원리들의 놀이 107
§4.1. 사건들 또는 술어들 79 - Evénements ou prédicats
“모든 것은 이유를 갖는다‥…” 널리 알려진 이 정식은 이미 이 원리의 감탄문적인 성격을, 이 원리의 외침의 동일성을, 가장 전형적인 “이유”의 외침을 암시한다. 모든 것은, 무엇이 일어나는 간에, 일어난 어떤 것이다. 일어난 모든 것은 이유를 갖는다. (79)
우리가 사물에 일어난 것을 사건(l‘événement)이라 부른다면, 그 사물이 사건을 겪는 것이든 아니면 사건을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든 간에, 충족 이유(la raison suffisante)란 사건을 사물의 술어들 중의 하나로서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개념, 또는 관념. “술어 또는 사건”이라고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55, 79)
그리고 여기서 주어 또는 사물의 본성은 사물의 관념, 개념이다. 바로크가 ‘콘체토(concetto)’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데, 하지만 이것은 바로크의 콘체도가 고전적인 개념(concept)과는 반대되는 한에서 그러하다. .. 데카르트가 앞서 창시한 바 있는 그러한 개념의 ‘고전적’ 개념화에 라이프니츠의 콘체토가 대립된다는 점은, 데카르트주의자인 드 볼데르(De Volder, 1643–1709)와의 서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56, 80)
그렇지만 이것은 모든 포함(inclusion)에 대해 참인가? 우리가 포함 도는 분석의 중요한 두 가지 유형의 구분에 직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이다. .. 라이프니츠는, 필연적 명제 또는 본질에 관환 진리(‘2 더하기 2는 4이다’)의 경우에는 술어가 관념 안에 명시적으로(expréssement) 포함되어 있는 반면, 우연적 현존(“아담이 죄를 짓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다”)의 경우에는 포함이 단지 함축적이거나 잠재적(implicite ou virtuelle)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츠가 종종 암시하듯이, 분석이 전자의 경우에는 유한하고(fini), 후자의 경우에는 무한정하다(indéfini)고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56, 80-81)
명시적인 포함의 경우(‘2 더하기 2는 4이다’)와 잠재적인 포함의 경우(‘모든 12의 배수는 6의 배수이다’)로 나뉘는 것은 필연적 명제들이다. 본질 명제는 명시적인 또는 함축적인 모든 종류의 분석에 맡겨지며, 반면 현존 명제는 극한에서 이로부터 벗어난다고 말 할 수 있을 듯하다. (57, 81) - [상층의 극한에서 (공리상, 정의상으로) 필연적 명제들이 있다.]
§4.2. 존재들의 네 등급, 술어의 장르, 주어의 본성, 포함의 방식들, 무한의 경우들, 상응하는 원리들 82 - Les quatre classes d’être, les genres de prédicats, la nature des sujets, les mode d’inclusion, les cas d’infini, les principes correspondants 57
§4.2.1 존재들의 네 등급 Les quatre classes d’être,
첫째 과제는 본질들을 정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의(定義, définition)가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데 따라서 우리는 이미 정의 가능한 본질들로부터, 이것들이 전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로 출발한다. (57, 82)
이러한 치환은 [정의에서] 상호적인 포함(l’inclusion réciproque)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나는 2와 1을 가지고 3을 정의한다. 첫째, 피정의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재적인 또는 발생적인 정의가 문제된다. .. 둘째, 이러한 정의는 단지 류(類)와 종차(種差)에 의해 작동하지 않으며, 개념의 내포도 외연도 요청하지도 않고, 게다가 유명론적 정의로 회귀하는 추상도 일반성도 요청하지도 않는다. 셋째, 논증은 정의의 연쇄로서, 즉 상호포함의 연쇄화로서 정의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해서 “2 더하기 2는 4다”라고 논증한다. ... 마지막으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앞에 옴’과 ‘뒤에 옴’이라고 말한 바 있던 – 비록 여기에는 시간의 순서가 없지만 – 선행(先行)이 복잡한 관념이라는 점을 우리는 예감한다. (57, 82)
이로부터 바로 상호 포함, 그리고 모든 시간 관계의 부재가 등장한다. (58, 82) [정의에는 시간성이 없다. 정의는 동시에 나열되어야하고, 그래서 치환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수분해를 생각해보자. (53SKD)]
그러므로 자명하게도 정의들에서 정의들로 비시간적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정의할 수 없는 것에, 그 마지막 이유들이면서 더 이상 정의될 수 없는 정의항들에 도달한다. 왜 무한정하게 진행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실재적인 정의들 사이에 놓이게 되자마자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무한정은 유명론적인 정의만을 제공하게 되며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58, 82-83)
라이프니츠는 동일성을 무한 속으로 운반한다: “동일자(le Identique)”는 무한의 자동 정립(une auto-position)이며, 이것이 없다면 동일성은 가언적으로 남으리라(만일 A가 있다면, 그러면 A는 A이다‥…)(58, 83) [이데아 = 동일자] .
§4.2.2. 술어의 장르, les genres de prédicats,
동일성의 이러한 특징(cette marque)은, 라이프니츠가 이 원리들로부터 매우 특별하고 정말 바로크적인 개념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1883-1955)는 이러한 관점에서 일련의 섬세한 주석을 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이 원리들을 좋아하며, 끊임없이 원리들을 발명해낸 거의 유일한 철학자일 것이며, 그는 기쁨과 열정으로 원리들을 발명하며, 무기처럼 이것들을 휘두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이 원리들을 가지고 유희하며, 이 원리들의 정식을 다양화하며(multiplier), 원리들 간의 연관들을 변화 시키고, 끊임없이 원리들을 [물리학적으로] ‘증명(prouver)’하고자 한다. 그가 원리들을 너무 좋아해서, 마치 이것들에 대한 존경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58, 83)
동일성의 원리는, 즉 정확히 말해 모순의 원리는,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우리에게 존재들이라는 등급(uen class d’êtres)을 즉 충만한 존재들인 동일자들의 등급을 알게 해준다. 동일성의 원리는 또는 오히려 모순의 원리는 동일자들의 외침(le cri)이며, 그것으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 그것은 신호(un signe)[상징]이다. 동일자들은 자체적으로 정의 불가능하며, 아마도 우리에게 인식불가능하다[플라톤의 직관]. 이것들은 그래도 기준(un critère)이나 원리이며, 이것이 우리를 인식하게 또는 이해하게 해준다. (59, 84)
§4.2.3. 주어들의 본성, la nature des sujets
마치 자신에 의해 무한한 것처럼 사유될 수 있는 모든 형상은 자기에게 동일하다. 또한 자기 자체에 의해서이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닌 무한에 직접적으로 상승될(올라갈) 수 있는 모든 형상은 - “마지막 정도가 허용될 수 있는 본성(nature)” - 자기에게 동일하다. 그러한 것이 기준(le critère)이다. (59, 84)
이 형상들이 전체도 아니면서 부분[타자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이것들은 ‘절대자들’ “가능한 일차적인 것들[소수(小數)들]”, “절대적으로 단순한 원초적 용어들”, A, B, C‥…이다. (59, 84)
형상들[이데아들] 모두는 – 존재론적으로 하나(un)이며 형상적으로 다양(divers)인- 유일하고 하나의 온존재(Etre)에 귀속된다. 거기에는 이미 실재적 구별이 분리가능성을 끌어내지 않는다. 이후 칸트(Kant, 1724-1804)가 말할 것인 것처럼, 존재론적 증명은 모든 가능성의 집합으로부터 필연적 존재 – 1/∞ -의 개체성으로 나아간다. (60, 85-86)
§4.2.4. 포함의 방식들, les mode d’inclusion
어떻게 “동일자들(les Identiques)”에서 “정의 가능한 것들(les Définissables)”로 나아가는가? 동일자들은 절대적으로 단순한 원초 용어들, A, B,‥…이며, 이것은 유일한 온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합성’한다(composer). AB‥…그러나 형이상학적 합성(la composition)과 논리적 파생은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정의 가능한 것들”은 파생된 용어들이다. (60, 86)
“조합(la Combinatoire)”이다: 수준 I은 원초적인 것들 또는 정의 불가능한 “동일적인 것들”을 포하하며, 수준II는 어떤 단순한 관계 하에 있는 두 원초적인 것들에 의해 정의된, 단순한 파생물들을 포함한다; 수준 III은 세 개의 원초적인 것, 또는 그 자체로 합성된 어떤 관계에 있는 단순한 하나의 원초적인 것과 하나의 파생물에 의해 정의되는 합성된 파생물을 포함한다‥… (60-61. 86-87)
따라서 소수들(素數, les nombres permiers)은 산술학에서 원초적인데, 왜냐하면 그 각각은 오직 자기 자신 아니면 단위(l’unité)[1, 일]에 의해서만 나누어지는 바, 자기-포함의 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는 기하학에서 정의 불가능한 공리들(예를들어 점, 공간, 매개하는)은 수준 I을 형성하며, 여기에서부터 매번 두 개의 원초적인 것의 조합을 통해 수준 II가 파생되고, 그 다음으로 수준 III이 파생된다(직선은 두 점 사이를 매개하는 공간이다). 아마도 신 자신이 절대적인 것 안에서 “동일적인 것들”로부터 “정으 가능한 것들”로의 이행을 보증할 것이다. (61, 87)
어떻게 연관이 비연관(non-rapport)을 일어나게 할 것인가? (61, 87)
§4.2.5. 무한의 경우들 87 les cas d’infini 61
확실히, 신의 지성 안에는 많은 영역들(régions)이 있다. 연관들은 더 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가능성과 관계하는 영역에서 솟아오른다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최소한 하나의 참조사항(une indication)이다. 문제는 어디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연관들이 솟아오르는가를 아는 것이다. (61, 87-88) [주체 신속에가 아니라, 구별된자들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라는 문제는 주어(주체)가 아니라 술어들 사이의 연관들을 묻게 될 것이다.]
바로크 사유는 사실 무한을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는 것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첫째로 만일 절대적 형상들이 전체와 부분들을 배제하는 자신에 의한 무한으로서 신을 구성한다면, 창조의 이념은 원인에 의한 둘째 무한을 지시한다. 더 큰 전체도 더 작은 부분도 없이, 전체들과 부분들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원인에 의한 무한이다(cet infini par la cause). (61-62, 88)
하지만 이보다 앞서 셋째 등급의 무한이 있다. 계속 마지막 항을 갖지 않는, 그러나 수렴하면서 극한을 향해가는 계열이 문제다. 이제 외연(extension)이 아니라 내포들(intentsions) 또는 강도성들(intensités)이, 연관들이 아니라 법칙들이, 조합(Combinatoire)이 아니라 특성(Carateristique)이, 물질이 아니라 외연을 채우고 있는 물질 안의 “실재적인” 어떤 것(물론 당연히, 어떤 ‘가능한’ 실재)이 문제가 된다. (63, 89)
이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이 자연 법칙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미분방정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가장 독창적인 점들 중 하나인 요건(requisit)의 용어는 더 이상 정의 항들을 지시하지 않고, 조건들, 극한들, 그리고 그 극한들 사이의 차이적 연관들을 지시하면서 이제 가장 엄밀한 자율적 의미를 얻게 된다. (63, 90)
예를 들어 금의 텍스처. “요건들”이 이렇게 “정의 가능한 것들”로부터 구분되는 한에서(비록 그것들이 정의를 제공할 수 있긴 하지만), 우리는 셋째 유형의 포함 앞에서 이번에는 상호적이지 않은, 일방적인(unilatérale) 것을 발견한다. 바로 여기에 충족이유는 원리가 된다. 계열상에 놓인 특징인 술어를 지닌 주어는 모두 실재적이다. (63-64, 90-91)
우리는 인식 대상의 관점에서 이 새로운 영역이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반면에 동시에 인식 자체의 관점에서 이것의 과도적인 역할을, 두 가지 의미를 염두에 두며 강조해야만 한다. (64, 91)
한편으로 사실상, 요건은 첫째 무한에서 직관적으로 상정된 본질도 아니고, 정의와 논증 안에서 둘째 무한의 정리적 본질도 아니다. 그것은 셋째 무한에 상응하며 문제를 만들어내는 본질이다. ... [다른 한편] 요건들과 공리들은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을 여전히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칸트식의 경험의 조건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경우에 사물이 상응하는 문제의 조건이다. (64, 91)
공리, 정의의 연쇄로서 논증은 삼단논법의 형식을 표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략삼단논법(enthymèmes)’을 통해서 진행해 나가는데, 이것은 삼단논법에만 적용되고 ‘내부적 제거’, 생략과 문제를 제거하는 응축을 통해 작동한다. 요컨대 만일 “조합”이 자긴의 꿈의 어떤 것을 실현한다면, 그것은 오직 “특성”을 통해서이다. (64-65, 91-92)
여기서 우리는 합리적 인식을 갖게 되며, 그리고 내적 특징이 정의에 대해, 극한으로서 계산이 증명에 대해, 그리고 삼단논법이 완전한 삼단논법에 대해, 이미 가치를 지님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이다. (65, 92)
그러므로 우리를 때로는 짐승들의 인식으로(ver la connaissace de bêtes) 내려가도록 만들고, 때로는 합리적, 정의적, 증명적 인식으로 올라가도록 만드는 것은 특징에 속하는 일이다. (65, 92)
§4.2.6. 상응하는 원리들 les principes correspondants
우리는 이렇게 세 유형의 포함을 갖는다. 자기-포함, 상호적 포함, 일방적인 그러나 극한으로 한정될 수 있는 포함. 여기에는 다음들이 상응한다: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들, ..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들, ... 제한적으로 단순한 것들. .. 이것은 각각 ‘알파벳(l‘Alphabet)’, ‘조합(la Combinatoire)’ ‘특성(Caractéristique)’이다. (65, 92-93) [77쪽 도표가 설명해줄 것이다.]
삼단논법 또는 정의 연쇄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직물(織物 tissu)인데, 그러나 “더 많이 합성된 무한히 많은 다른 직물”이, 우리에게 줄곧 유용한 생략 삼단논법이 그러한 것처럼 주름 잡힌 직물들이 있다. (65-66, 93)
필연적으로 시선점 또는 받침점을 함축하는 모나드들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들은 주름진 옷감(les drapés)와 유사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66, 93) [주름진 옷감들에 관하여 제9장에서 상세한 예들이 있다.]
§4.3. 사물들과 실체들 Choses et substances
우리는 넷째 종류의 용어들에 이른다. 개체적 용어 또는 모나드는 더 이상 가능한 사물이 아니라, 가능한 현존자들(des existants)(실체들substances)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목록(la table conplète)은 다음과 같다. 동일성들, 외연성들, 내포성들(강도), 개체성들; 형상들(formes)[이데아들], 크기들(grandeurs)[도형들], 사물들(choses), 실체들(substances). .. (66, 93)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참조하자.]
이런 이유로 개체는 본성상(par nature) 현실적으로 무한한 내포를 가지며, “무한을 포괄한다”.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개체적 개념, 모나드는 정확히 신의 역(l’invers)이다. 즉 역(逆)은 분자와 분모를 바꾸는 수라는 의미에서: 2, 즉 2/1은 역으로서 1/2을 갖는다. 그리고 신의 정식은 ∞/1이며, 신은 역으로 1/∞을 갖는다. 그러므로 과제는 모나드 안에서, 개체 안에서 수렴하는 무한한 계열이 내포와 수열과 같은 유형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경우, 다른 유형의 포함, 넷째 유형이 문제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66, 93-94)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전384-322)를 복원하며, 형상과 질료,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을 실체의 요건들로 만든다. 하지만 사물과 실체, 사물과 현존자 사이에는 못지않게 큰 차이들이 있다. 첫째 차이는 여러 내적 특징들, x, y‥…를 가진 사물이 그러므로 여러 계열들에 참여[분유]한다는 점이다. .. dy/dx 유형의 미분적 연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중복법(pléonasme)’이라고, 또는 사물들의 각 경우에 “우리는 하나의 같은 주어에 대해 하나 이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예를 들어 금의 무게나 전연성(malléabilité, 유연성)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6-67, 94)
왜냐하면, 각 모나드는 온 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갑작스런 고통은, 내가 비록 깨닫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가서 닿아 있는 계열의 이어짐일 뿐이며, 그리고 이것은 내 고통의 계열 안에서 지금 계속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수렴하는 계열들의 이어짐 또는 계속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공 가능성(compossibilité)”의 조건이다. (67, 94-95)
[넷째의 경우에서] 각 모나드가 온세계를 표현하는 것처럼, 주어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개념 이외에는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주어-모나드들은 이제 세계를 표현하는 그들의 내적 방식에 의해서만 구별될 것이다. 충족이유의 원리는 식별불가능자의 원리가 될 것이고, 유사한 두 주어는 없고 유사한 개체도 없다. (67-68, 95) [아페이론에서 모나드를 형성할 수 있는 특이성만이 실체이며 주체이다. - 라이프니츠에서 신체를 중요시하는 특이한 사고이다.]
§4.4. 내적 연관들 Les rapports internes
사실 모나드들이 유리하게 보이지 않는 둘째 차이가 있다. 자신의 텍스처 안에 있는 사물은 당연히 자신의 특징들이 들어 있는 계열의 법칙, 극한들 사이의 차이적 관계를 포함한다. 반면에 이런 저런 질서 안에 같은 세계를 포함하는, 자신의 주름 안에 모나드들은 이 무한한 계열들을 포함하지만, 이 유일한 계열의 법칙을 포함하진 않는다. (68, 95) [첫째 차이는 아페이론 상에서 논리적 외연적 차이라면, 둘째 차이는 아페이론 상에서 내포적 강도적 차이를 의미할 것이다. (53SKD)
모나드는 세계를 향해 있다: .. [위상적으로] 모든 계열이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이어지면서, 버칙 또는 이유는 초한수의 집합에서, 무한하게 무한한 계열의 집합, 즉 세계에서 밀려나 또한 극한들 또는 극한들 사이의 연관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인식하고 선택하는 신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부터 신 현존의 우주론적 증명이 등장하는데, 이 증명 계열에서 집합으로 그리고 집합에서 신으로 가는 것이다. (68, 95-96)
세계가 모나드 안으로 포함된 것은 물론 일방적인 것이지만, 정위(正位)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극한에 정위 가능하지 않은 데, 왜냐하면 극한은 모나드 밖에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무한이 있듯이, 네 가지의 포함이 있다. 원초적 형상들의 무한한 집합(= “온신”); 극한 없는 무한한 계열들; 내재적 극한을 가진 무한한 계열들; 외부적 극하을 가진 무한한 계열들, 그리고 이것은 무한 집합을 회복시킨다(= “온세계”). (96-97)
§4.5. 라이프니츠의 마니에리즘 97 Le maniérisme de Leibniz 69
이제 처음의 모호한 점들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로 왜 라이프니츠가 본질 진리들이 이것들을 “동일적인 것들”로 귀착시키는 유한 분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반면에 실존 진리들은 오로지 무한 분석을 지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동일적인 진리들로 환원될 수 없을” 것처럼 제시했을까? 그러나 이 두 가설은 틀렸다. (69, 97)
둘째로, 현존 분석은 잠재적이라고 말하고 반면 본질 분석은 오직 현실적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 모든 분석은 무한하며, 무한 안에, 분석 안에는 오직 현실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포함이 현존 명제 안에서 잠재적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즉 온 세계가 현존자 안에 포함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세계는 자신을 포함하는 실존자들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실존한다는 것 말이다. (69, 97)
언제나 이중의 선행(double antécédence)이 있다. 세계는 잠재적으로 우선하지만, 모나드는 현실적으로 우선한다. (69, 97) [현존이 이데아계(우주)를 앞선다]
“2, 2, 3을 곱한 배수(bino-binaire ternaire) 는 모두 2, 3을 곱한 배수(binaire-ternaire)이다” 포함은 잠재적이다. 라이프니츠가 명확하게 말하듯이 포함은 추출되어야 하며, 술어는 오직 “어떤 잠재태 하에서”만 주어로 포함괴기 때문이다. (69-70, 98)
우리는 항상 어떤 불확실성, 그러나 객관적인 불확실성을 재발견한다; 주름은 본질들(les essences)과 실존자들 사이로 지나가는가, 아니면 한편으로는 신과 여기에 뒤따르는 것의 본질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실존자들의 본질들 사이로 지나가는가? (70, 98).
§4.6. 술어는 속성이 아니다. 98 Le prédicat n’est pas un attribut 70
무한 형상들 또는 일차적 본질(quiddité)들의 경우에서 아니라면, 술어는 결코 속성이 아니다. 아니 이것은 차라리 신의 용어의 가능성의 조건, 가능한 모든 관계를 조건지을 비-연관(non-rapport)이다. 사실 다른 모든 경우에서 술어는 오로지 관계 또는 사건이다. 관계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며, 수학문제는 이미 고대에도 형태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정의된다. 사건도 일종의 관계이며, 이것은 현존과 시간에 연관있다. (70, 98-99)
라이프니츠는 주어-계사-속사[속성]라는 귀속작용의 도식(le schèma s’attribution)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je suis écrivant), 나는 여행하고 있다(je suis voyageant)‥… 그러나 아르노가 소중히 하는 “일반문법”의 도식은 포함에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긍정의 개념화와 구별의 이론을 함축한다. 라이프니츠의 포함은 주어-동사-보어라는 도식에 의존하며, 이 도식은 고대 이래로 귀속작용의 도식에 저항했다: 바로크 문법, 여기에서. 술어는 무엇보다 관계와 사건이지, 속성이 아니다. (71, 99)
라이프니츠가 속성의 모델로 사용할 때, 이것은 종과 류의 고전적 논리의 관점에 의한 것이지, 오로지 명목상의 요구사항에 따른 것이다. (71, 99-100)
술어는 바로 명제 자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여행한다”를 “나는 여행하고 있다”로 환원할 수 없듯이, “나는 생각한다”를 “나는 생각하고 있다”로 환원할 수 없다. 사유는 지속적인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넘어가는 부단한 이행으로서 술어이기 때문이다. (71, 100)
술어가 동사라는, 그리고 동사가 계사나 속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라이프니츠가 사건을 개념화하는 것의 기반이다. 첫째로 사건이 개념의 상태로 상승될 만하다고 판단되었다. 이것은 스토아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사건을 속성이나 질이 아니라, 명제의 주어의 비물체적 술어로 만들었다(“나무는 푸르다”가 아니라 “나무는 푸르러지다‥…”). 이로부터 그들은, 명제는 사물에 대하여 ‘존재방식’, ‘양상’을 말한다고 결론지었으며, 이것은 본질-우유(accident)라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이항 선택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있다[이다]라는 동사는 ‘뒤이어 일어나다’로 대체되고, 본질[사실]은 양태(la manière)[현존상태]로 대체된다. (71-72, 100) [사실과 상태의 구분은 벩송도 마찬가지이다. - 벩송에게 스토아 영향은 라베송일까?]
뒤이어 라이프니츠는 둘째 위대한 사건의 논리학을 작동시켰다. 세계 자체는 사건이며, 비물질적(=잠재적) 술어인 한에서 심연으로서 각 주어 안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72, 100-101)
라이프니츠는 이것으로 자신의 철학을 특징지었다. 스토아학파와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의 본질주의에 반(反)하는 마니레리슴을 발명한다. 바로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마니에리슴은 스토아의 마니에리슴으로부터 상속받아 이것을 우주로 확장한다. 이제 셋째 위대한 사건의 논리학은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와 더불어 올 것이다. (72, 101)
라이프니츠가 관계들(les relations)을 생각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을 러셀(Russell, 1872-1970)로부터 듣는 일은 그 만큼 더 이상하다(curieux). 어떤 방식에서는, 라이프니츠는 오직 그것만을, 관계를 사유하는 것밖에는 하지 않았으며, 러셀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유일한 어려움은, 술어가 내적 관계임을 보여주는 내속성의 명제를 문장에서 끌어내는 일이 상상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 내가 여기에 세 사람이 있다(voici trois hommes)라고 말할 때, 진짜 주어는 외연 3(une extension 3)이며 여기에서 이것은 오직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질적으로 규정되고, 세 부분에 의해 양적으로 규정된다. (72, 101-102)
이 확증(la confirmation)은 실체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이론에서 온다. 심지어는 그 이론 전부가 이 확증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원리상 일치하는 두 가지 명목상 특징 있다. 한편으로 실체는 구체적인 것, 결정된 것, 개체적인 것이다. .. 다른 한편으로 실체는 내속(d’inherence)과 포함(d’inclusion)의 주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유를 “실체 안에(dans)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데카르트가 실체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형상적으로 탁원하게 그 안에(dans laquelle) 현존하는 사물”이라고 말한 뜻에서 말이다. (73, 102)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속성은 우유처럼 주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에게서 긍정되는 것이며, 그 결과 속성은 둘째 실체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본질적 속성은 실체와 뒤섞여서, 개체들은 이제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속성의 양태들에 다름 아닌 것이 되기에 이른다. 귀속작용, 귀속작용을 통한 실체의 정의는 개체성과 포함을 확증하기는커녕 이것들을 재차 문제 삼는다. (73-74, 103)
§4.7. 실체의 다섯 가지 기준 103 Les cinq critières de la subsatance 74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의 첫째 기준, 그것은 단순함, 단순한 용어[관념]이다. 이것의 요소들은 오직 추상에 의해 또는 이유있는 판명(distinction de raison, 사고상의 구별)에 의해서서만 구별될 수 있을 뿐이다. (74, 103)
나에게는 통일성의 정도를 고려하는 ‘평범한 철학자들’이 있다고,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아이러니컬하게 라이프니츠는 대답한다. 라이프니츠는 운동에 내부적인 통일성, 또는 능동적인 변화의 통일성을 정확히 실체에 대해 주장하며, 그리고 이때 이것은 실체의 등급의 단순한 연장을 배제한다. (74, 103-104)
형성되는[이루어지는] 운동은 순간 안에 통일성과 내부의 통일성에 동시에 귀착한다. 전자에는 뒤따르는 상태가 “자연적 힘에 의해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후자에는 단위(통일성)의 지속 일체를 위해서 이다(실체의 자연학적 기준). 그리고 더욱 깊이있게 질적 변화가 순간의 상태를 이행하게 만드는 능동적 통일성에 귀착하며, 이행 전체를 보증한다(심리학적 기준, 지각과 욕구). .. 왜냐하면 실체는 속성의 주어가 아니라, 사건에 내부적인 통일성[신체]이며, [동시에] 변화의 능동적 통일성[영혼]이기 때문이다. (74, 104) - [신체는 순간을 규정할 수 있으나 영혼에는 순간을 잘라서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은 벩송에게도 있다. 신체의 잘린 순간이 (지각)이미지이고, 영혼의 잘린 측면이 추억이라고 하지만, 현재에서 영혼은 잘려진 측면을 규정할 수 없다. 영혼은 신체와 달리 운동과 변화의 본성이기 때문이리라.]
“단순한 것” 이외에 데카르트는 다른 기준, 즉 “완결된 것”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실재적 구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상의 구별(distinction de raison)만큼이나 개념(le concept) 이외의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75, 104)
우리는 보았듯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분리되었거나 분리 가능한 것도 아니며, 분리 불가능한 것도 실재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75, 105)
스토아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어떤 것도 분리 가능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실체들 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요건에 힘입어서 결탁한다. .. 왜냐하면 실체들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들 중 하나를 구성하는 요건들을 갖기 때문이다(인식론적 기준).
그러므로 실체에 대한 다섯 가지 기준이 있다: 형이상학적 기준, 존재의 통일성; 논리학적 기준, 술어가 주어 안에 포함됨; 자연학적 기준, 운동에 내적 통일성: 심리학적 기준, 변화의 능동적 통일성; 인식론적 기준, 분리불가능성의 요건들. 모든 것은 실체가 하나의 본질적 속성을 통해 정의 되는 것, 또는 술어작용이 귀속작용과 혼동되는 것을 배제한다. (75-76, 105)
§4.8. 양태들과 깊이(심층) 105 Manières et fond 76
본질주의(l’essentialisme)는 데카르트를 고전주의자로 만드는 반면,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깊은[심층] 마리에리슴(un profond maniérisme)처럼 나타난다. 고전주의(le classicisme)는 실체에 대해 견고하고 항구적인 하나의 속성을 필요로 하지만, 마니에리슴은 유동(fluide)이며, 여기에서 양태들의 자발성은 속성의 본질성을 대체한다. 스프를 먹는 동안 몽둥이로 맞는 개의 영혼 안에서, 또는 젖을 빨고 있는 동안 말벌에 쏘인 아기 시저의 영혼 안에서 고통은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맞거나 쏘인 것은 영혼이 아니다. (76, 105-106)
고통은 즐거움 뒤에 갑자기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미세 지각들, 발걸음 소리, 적의를 품은 사람의 냄새, 들어 올려지는 몽둥이의 인상, 요컨대 느낄 수 없은 “불안(inquiétude)”에 의해 준비되는데, 이 불안으로부터 “자발적으로(sua sponte)” 고통이 나올 것인다. 이 전체 과정은 마치 선행하는 변모들을 통합하는 자연적 힘에 의해서 진행되는 듯하다. (76, 106) - [고통 감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변모들(증상들)의 적분적(총체적) 총합에 의해 내재적 실재성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53SKE)]
영혼은 고통을 스스로에게 주는데(se donne), 이때 영혼의 심연[심층]에 묻혀있기 때문에, 영혼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련의 미세지각들을 이 고통은 의식으로 가져온다. 영혼의 심층, 어두운 심층은 라이프니츠를 사로잡고 있다: 실체들 또는 영혼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고유한 심층”에서 끌어낸다. 이것은 마니레리슴의 둘째 양상이며, 이것이 없다면 비어(vide)있는 체 있으리라. 첫째 측면은 속성의 본질성과 대립하는 양태의 자발성이다. 둘째 측면은 형상의 밝음[명석]과 대립되는 어두운 심층의 편재성(l’omniprésence)이며, 이것이 없다면 양태들(les manières)은 솟아나올 곳이 없게 된다. 실체들의 마니에리슴의 정식 전체는 “모든 것[개체들]은 실체들에게 그것들의 고유한 심층으로부터, 완전한 자발성을 통해서, 태어난다”는 것이다.(76-77, 106-107)
*도표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상층에서 연속적으로, 플로티노스의 것을 닮지 않았는가?]
[이 도표는 아페이론을 정도의 차이 또는 질적 차히를 위계적으로 또는 위상적으로 선분의 비유처럼 도식화할 수 있다. “존재들의 등급” 과 “원리”를 맞붙여서 보게 되면, 플라톤의 존재론 과 아리스토텔레스 논리론의 대비를 통해, 라이프니츠가 18세기 초(1700년대 초)에 사물(물체)들의 인식방식과 양태들을 설명하였다. 영혼의 위상을 심층에 두면서. (53SKE)]
§4.9. 원리들의 놀이 107 Le jeu des principes 77
원리들 중에서 원리들의 놀이에 대해, 무엇이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1883-1955)의 인상을 기초하는가? 그것은 이항들 대부분이 유동한다(glissants)는 데에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항들은 열들 안에(daas les colones) 고정되어 있는데, 항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을 펼친다. 이 항들은 한 구역 안에서(dans une zone) 자신을 펼치면서(en se pliant)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 항들은 이미 또는 여전히 앞의 것 안에 접혀져 있으며(현존하며), 또는 뒤의 것 안에 다시 접힌 채로 있다(현존한다). 이리하여 ‘충족이유(la Raison suffisante)’가 있는데: 이 이유는 사물들 안에서 자신을 향해(pour soi, 위해서) 나타나며, 바로 여기에서 내적 특징들을 연관을 맺고 사물의 이유를 부여하게 된다. (77, 107-108)
더 나아가, 모순의 원리 자체가 이미 동일한 것들의 고유한 원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충족이유의 원리로 양자택일을 형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반대로 비-모순이 이유로서 충분한 구역(우리가 모순 없이 무한까지 상승시킬 수 있는 것)에 자리잡고 있다. 모순원리는 이런 의미에서 충족이류의 한 경우이다. (78, 108)
원리들에 대한 이행과 변형의 놀이가 전체로 있는데, 충족이유는, 꾸뛰라가 보았듯이, 무모순과 상호 호환적(réciproque)이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이 표현되는 한, 식별불가능자의 원리는 충족이유율의 역(l’inverse)이다. (78, 108)
여기에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만 사람들이 발견하는 유일한 특징(un trait unique)이 있다: 원리에 대한 극단적 취향이, 칸막이치는 것을 선호하기는커녕, 이동하는 모든 칸막이 하에서 존재들, 사물들, 개념들의 이행을 주재한다. 원리들을 창조하는 특별한 철학적 활동에서, 원리들이 있다기보다 두 개의 극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8, 108-109)
그리고 “모든 것”은 정도에 따라 구별되고, “모든 것은 방식[양태]에 따라 다르다‥… 이것들은 원리들 중의 두 가지 원리이다. 어떠한 철학도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의 긍정, 그리고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또는 다양함의 긍정을 이토록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지 못했다. (78, 109) (6:12, 53RMH) (14:06, 53SKE) (14:17, 53SKI)
# 인명록 ------
384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e, 전384-322) 고대 그리스 철학자.
O
1226 둔스 스코투스(Jean Duns Scot, 1266-1308), Johannes Duns Scotus(« Docteur subtil», Doctor subtilis), 프란체스코파, 스코틀랜드 신학자, 철학, 스코틀랜드 학파 창설자.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1612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 성직자, 철학자, 신학자. 포르르와얄 학파. 쟝세니스트. La logique ou L'art de penser: contenant outre les règles communes, plusieurs observations nouvelles, propres à former le jugement. Paris : G. Desprez, 1683
1625 니꼴(Pierre Nicole, 1625-1695) 프랑스 신학자, 도덕론자, 논리학자. 쟝세니스트. Avec Antoine Arnauld, La Logique, ou l'art de penser, première édition anonyme Paris, 1662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유태계 네델란드 철학자.
1638 말브랑쉬(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 철학자, 오라트리오 신부, 신학자.
1643 드 볼데르(Burchard de Volder, 1643–1709) 네델란드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레이드(Leyde)대학 학장을 지냄. 라이프니츠와 편지교환.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sur la liberté de l'homme, 1670-1671; Méditations sur la connaissance, la vérité et les idées, 1684; Discours de métaphysique, 1686; L’origine radicale des choses, 1697; De la nature en elle-même(1698); Nouveaux essais, 1704; Monadologie, 1714; Essais de Théodicée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4;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 1714; )
1647 벨(Pierre Bayle, 1647-1706) 프랑스 철학자, 작가, 사전편찬자.
172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근대 계몽주의, 프로이센 철학자.
1848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 프랑스 철학자. Études de philosophie ancienne et de philosophie moderne, recueillies et précédées d'une introduction par Victor Delbos, Paris, F. Alcan, 1912.
1861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avec Bertrand Russell, ?Principia Mathematica, 1912?. ?과정과 실재성(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1929)?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철학자 논리학자, 러셀처럼 논리주의자. 라이프니츠 미발표 작품들 출간. ?La Logique de Leibniz : d'après des documents inédits, 1901?
1872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1876 브레이어(Émile Bréhier, 1876-1952) 프랑스 작가, 철학사, 역사가. 철학사의 작업으로 유명하다. La Théorie des incorporels dans l'ancien stoïcisme, 1907. Chrysippe (1910), La Philosophie de Plotin (1928)
1883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 스페인의 철학자. 니체 딜타이 쪽 실존주의 철학. L'Idée de principe chez Leibniz (1947) - L'Évolution de la théorie déductive. L'idée de principe chez Leibniz, trad. de jean-Paul Borel, Gallimard, collection NRF, Paris, 1970, 342 p.
1884 에티엔 질송(Étienne Henry Gilson, 1884-1978) 프랑스의 철학자, 철학사가. Jean Duns Scot, introduction à ses positions fondamentales, Vrin, 1952.
1885 바일(Hermann Weyl [vaɪl]), 1885-1955) 독일 수학자, 물리학자, 이론가
1907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의 소설가, 문학비평가, 철학자. “그는 일생 동안 전적으로 문학에 몸을 바쳤고 자신의 특질인 침묵에 전념했다.”
1922 로비네(André Robinet, 1922-201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브뤽셀 대학 교수. Architectonique disjonctive, automates systémiques et idéalité transcendantale dans l'œuvre de G. W. Leibniz, Paris, Vrin, 1986,
베꼬(Anne Becco, s.d.), Du simple selon G. W. Leibniz, 1975, :
(6:25, 53RMH) (15:17, 53SKE) (15:32, 53SKI)
제4장 충족 이유(IV Raison suffisante)에서 도표.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pp. 79-109 [2004(원P.192, 번272)]
§4.8. 방식들과 깊이(심층) 105 Manières et fond 76
*도표(77, 107) - [이것은 §4.2.의 설명을 도표화 한 것이다.]
§4.2. 존재들의 네 등급, 술어의 장르, 주어의 본성, 포함의 방식들, 무한의 경우들, 상응하는 원리들 82 - Les quatre classes d’être, les genres de prédicats, la nature des sujets, les mode d’inclusion, les cas d’infini, les principes correspondants 57
§4.2.1 존재들의 네 등급 Les quatre classes d’être,
§4.2.2. 술어들의 장르(류)들, les genres de prédicats,
§4.2.3. 주어들의 본성, la nature des sujets
§4.2.4. 포함의 방식들, les mode d’inclusion
§4.2.5. 무한의 경우들 87 les cas d’infini 61
§4.2.6. 상응하는 원리들 les principes correspondants
Classe d’êtres |
Prédicat | Sujet | Inclusion | Infini | Principe |
les Identiques (absolument -simple) |
Formes ou Attributs |
Dieu | Auto-inclusion | Infini par soi |
Principe de contradiction |
les Définissables (relativement -simple) |
Rapports (entre définissants) |
Extensions ou Grandeurs (touts et parties) |
Inclusion réciproque |
Infini par la cause |
Principe de similitude |
les Conditionnables (limitativement –simple) |
Requisits (leurs rapports ou lois) |
Intensions ou Chose (ce qui a des degrès et tend vers des limites) |
Inclusion unilatérale localisable |
Série infinie à limite interne |
Principe de raison suffisante |
les Individus (unairement -simple) |
Evénements ou Manières (rapports à l’existence) |
Existants ou Substances |
Inclusion unilatérale illocalisable |
Série infinie à limite externe |
Principe des indiscernables |
(번역 수정)
존재의 등급 | 술어 | 주어 | 포함 | 무한 | 원리 |
동일적인 것들 (절대적으로-단순한) |
형상들 또는 술어들 |
신 | 자기-포함 | 자신에 의한 무한 |
모순 원리 |
정의가능한 것 들 (상대적으로-단순한) |
연관들 (정의항들 사이) |
외연들 또는 크기 (전체들과 부분들) |
상호적 포함 | 원인에 의한 무한 |
닮음 원리 [시뮬라크르] |
조건화 가능한 것들 (극한적으로-단순한) |
요건들 (이것들의 연관들 또는 법칙들) |
내포들 또는 사물들 (정도차를 가지며 극한으로 향하는 것) |
위치 가능한 일방향의 포함 |
내적 극한에 이른 무한 계열 |
충분이유 원리 |
개체적인 것들 (단항적으로-단순한) |
사건들 또는 양태들 (현존과 연관들) |
현존자들 또는 실체들 |
위치 불가능한 일방향의 포함 |
외적 극한에 이른 무한 계열 |
식별불가능 원리 |
(53V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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