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실재론 논쟁의 구조와 외적 실재론의 가능성
주 동 률 (서울대 철학과 )
I. 머리말
본 논문에서 필자는 최근의 윤리적 실재론 논쟁에서 부곽된 세 입장의 기본 주장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실재론 논쟁의 구조를 통해 그 세 입장이 나뉘어지게 된 연유를 알아보고 그들 간의 차이점이 제시될 터인데, 이 차이점 부각과정에서 수반(supervenience)의 개념이 중요하게 기능할 것이다. 이 세 입장들 중에서 한 실재론의 유형인 외적 실재론(the externalist moral realism)이 필자의 마음을 끄는 입장이다.
외적 실재론에 의하면 윤리적 판단의 대상들(행위, 성격)은 윤리적 속성들을 소유하며, 그 속성들은 판단자의 심리상태(그의 신념이나 욕구, 태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외적 실재론자들은, 윤리적 대상에 대한 개별 판단자의 행위적 반응은 판단자의 특정 욕구하에서 그 대상이 소유한 윤리적 속성들(에 대한 판단자의 인식)이 그에게 야기시킨 결과이며, 그 반응이 윤리속성의 존재 혹은 부재를 결정하거나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윤리적 판단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의 윤리적 속성에 관한 인식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며, 이 판단과 차후의 정서적 혹은 행위적 반응 간에는 (전자에서 후자로 이어지려면 특정 욕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내적 혹은 필연적 관계가 아닌 외적 혹은 우연적 관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끌린다'는 표현에서 보여지듯이, 필자는 현 상태에서 외적 실재론의 우월성을 직접적으로 입증할 논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반실재론, 특히 Simon Blackburn의 반실재론인 Quasi-realism이 아직 실재론을 완전히 뒤엎을 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필자의 마음을 끈 이론과는 대립된 내적 실재론(the internalist moral realism)이 필자가 보기에 몇가지 중요한 난점들을 가진다는 점을 들어서 간접적으로나마 외적 실재론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II. 윤리실제의 실재론적인 성격
실재론 논쟁에서 실재론자들은 메타이론들의 세례를 받기 전의 일상적 윤리행위와 경험들은 실재론의 입장에서만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구석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들은 통상 우리자신의 윤리적 판단들에 깊이 연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 그 판단들을 남에게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한다. 또한 우리는 자주 윤리적 이슈들에 관해 공적으로 토론하기도 한다. 우리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알고자 원한다. 실재론자들은 묻는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개인적 윤리적 의견과 독립적인,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대답들이 없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윤리적 행태들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유없이 남을 해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나쁜 행위라고 판단을 내렸을 경우, 판단자는 (그가 알고 있는 바의) 그 행위에 관한 한 사실을 제시한 것이며, 그는 자신의 그 행위는 윤리적으로 나쁘다는 판단이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나쁘게 만든다고는 생각치 않으리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실재론자들은 일상적 윤리언사나 추론의 배후에는 강력한 실재론적 전제들(presumptions in favor of realism)이 있으며, 어떤 수정주의적인, 반실재론적인 이론적 논증들에 의해 전복당하지 않는 한, (실재론이 참이면 위의 윤리행위들이 쉽게 설명되므로) 윤리적 실재론은 우리의 윤리실제들을 뒷받침하는데 가장 알맞는 입장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실재론 논쟁에서 애초에 증명의 부담은 반실재론자들에게 있으며, 그들이 (반실재론자들이) 겉보기와는 달리 일상적, 전이론적 윤리직관들과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실재론이 완전히 이론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행위의 공적, 정당화관련적 차원과 윤리경험의 인식적 차원때문에 실재론자들이 이렇게 논쟁의 시초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생각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잘 보여진다:
실재론자는 [논쟁에서] 명확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방법론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들에 의하면 대상들은 우리가 그렇다고 경험하는 바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 ―다시말해 우리의 경험이 믿을 만하지 못하고, 우리를 오도한다고 보여주는, 이론적으로 무게 있는 근거들이 제시되어야만 전복될 수 있는 추정이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가치는 우리의 그것에 대한 신념이나 감정과 무관한 것으로, 다시말해 발견되기 위해서는 세심한 사고와 주목이 요구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로 그것에 관해 인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sensitive하게 되는] 윤리적 실재가 있다는 추정이 있다는 것이다......우리의 세계경험은 윤리적, 비윤리적 가치의 경험을 포함한다: 우리는 모짜르트 음악의 미를 듣는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개에 대한 잔인함을 본다; 우리는 테니스코트에서의 맥캔로의 무례함을 목격한다(McNaughton, Moral Vision, 40, 19).
III. 반실재론자들의 논증들: Mackie와 Harman
반실재론자들이 논쟁상의 우위점에 대한 실재론의 이러한 주장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심리적 속성이나 과학적 미립자들에 관한 반실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윤리적 반실재론자들은,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것들의 항목을 줄이는 데는 여우같은 전문가들이다.) 소위 실재론적 추정이라는 관념에 대해 대체로 두가지 유형의 반실재론적 반론들이 가능한 것 같다. 첫째로 어떤 반실재론자들은 소위 실재론의 전이론적 추정은 환상이며 '무게있는' 이론적 논증들이 있어 윤리적 속성이나 가치의 실재를 의심스럽게 만든다는 것이고, 두번째 대응에 의하면 실재론적으로 보이는 일상적 윤리행위들이 있지만, 그 실재론적 징표들은 섬세한 반실재론에 의해 포섭가능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입장에 따르면, 몇가지 윤리현상이나 윤리의 개념적 측면을 이론적으로 검토해보면 객관적 윤리적 속성의 외연은 공이라는 것이고, 두번째 입장에 의하면, 일견 실재론적 전제들은 사실상 우리를 어떠한 구체적인(substantial) 형이상학적 이론들 (예를 들면 윤리적 실재론이나 반실재론)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첫번째 입장부터 알아보자. 이모티비즘의 시대에는 주로 Moore의 Open Question 논증이 반실재론으로의 길이었다. 그 논증이 전제한 바 '의미동일에 의한 속성동일'(the synonymy criterion of property identity)이라는 논제에 의하면 , 윤리-자연술어들간의 의미가 다르므로 윤리속성은 어떤 자연적 속성과도 다르고 (Moore와 달리 자연적 세계에만 존재를 국한한다면) 윤리적 속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최근의 윤리적 실재론 논증에서는 이러한 윤리술어의 의미를 통한 존재론적 결론도출이 행해지지는 않는다. 객관적 윤리속성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적 윤리행태에 암시되어 있지만 그 외연이 공이라는 입장은 John Mackie에 의해 의해 대변된다. 실상 그가 제시한 두 논증은 현금의 실재론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Mackie의 첫째 논증은 낯익은 것이다. 소위 윤리적 이견으로부터의 논증(the argument from moral disagreements)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Mackie에 의하면 일견 해소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끈질긴 윤리적 이견들의 존재는, 윤리적 판단들이 (자연적으로 발견가능한) 실재 속성들에 관한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Mackie의 둘째 논증은 그가 the argument from queerness라고 부르는 것으로 실상은 윤리판단과 행위 (혹은 행위동기)와의 필연적 관계로부터의 논증이라고 부름직한 것이다. Mackie에 의하면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윤리적 속성이나 가치는 대상내에 내재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날 때 우리의 행위(혹은 최소한 행위하려는 동기)를 필연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객관적 좋음은 그것을 대면한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도 추구될 것이다. 이는 그 사람 혹은 모든 사람들이 그 [객관적 좋음이라는] 목적을 욕구하게 되어있다는 우연적 사실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목적이, 추구되어짐이라는 속성을 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to-be-pursuedness somehow built into it)" (Mackie, Ethics; Inventing Right and Wrong, 40). 그러나 Mackie가 보기에 대상내의 자연적인 속성으로서 이러한 필연적 동기유발능력(intrinsic/cate-gorical prescriptivity)을 가진 속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한 속성의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queer하다.) 즉 윤리판단에 의해 그것이 제대로 인식되기만 하면, 어떠한 욕구의 뒷받침없이도 판단자의 행위(동기)를 필연적으로 이끌어내는 대상내의 속성이 우리의 윤리개념의 일부이지만, 이러한 속성은 우리 자연세계의 일부(part of the fabric of the world)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Mackie는 자신의 입장을, 윤리판단이 대상내 속성에 관한 판단으로서 진리치를 지니지만(cognitivism), 그 속성의 부재를 들어 우리의 모든 윤리판단들은 거짓이라는 진리치를 가진다는 error theory로서 제시하였다.
이 두 논증들은 그 이후 많이 논의 되어왔고 필자는 그 논의들의 세부 사항을 이 논문에서 밝히려 하지는 않겠다. 단지 이견으로부터의 논증은 아직 반실재론의 확립에 이르지는 못했고, 행위(동기)와의 필연적 관련논증에 대해서는 실재론 측에서 두가지 대응들이 가능하다는 점만을 지적하기로 한다. 우선 이견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해서, 실재론자들은 반실재론이 쉽게 설명하지 못할 윤리적 합의내지 여러 윤리이설들간의 공유부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기도 하고, 윤리적 이견이라는 것이 그것에 포함된 많고도 복잡한 인간심리적-사회적 사실들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견의 존재 혹은 합의의 존재가 실재론 혹은 반실재론을 입증하는 논증이 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이런 논증들은 어떤 이론이 주어진 사실을 더 잘 설명하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최선설명으로의 논증(an argument to the best explanation)이고, 이점에서 필자에게는 아직 설명되어야 할 데이타(윤리적 이견 혹은 합의의 폭과 깊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즉 경험적 사실탐구가 규범윤리이론 혹은 메타윤리이론의 성패에 직방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최선설명으로의 논증상, 어느 만큼의 이견 혹은 합의가 윤리실제(실제 판단과 기준)내에 있는지의 파악이 매우 중요하며, 또 주어진 데이타에 대해 과연 어느 이론이 최선설명인지는 우리가 지닌 '최선설명'의 기준에도 많이 의존하므로 논의가 보기보다는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다만 실재론 측에서 보면 윤리현상의 복잡성에 비추어 우리의 인식수준에서 윤리판단상에 모호한(vague) 지점들이 존재한다거나, 여러 가치기준들간에 commensurable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반드시 실재론의 실패를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우리가 나중에 보듯이 어떤 실재론자들은 실재하는 가치들의 다원성을 넘어서서 보다 과감히 상대주의적 입장을 수용하기도 한다.)
윤리판단과 행위(동기)간의 필연적 관련논증에 대한 대응으로부터는 두가지 중요한 윤리적 실재론의 분파들이 가려진다. 첫째로 외적 실재론이라 불리는 입장은 정면으로 이 논증의 전제인 판단-행위(동기)간 필연적 연관의 존재를 (그리고 그러한 연관이 우리의 윤리관념의 일부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외적 실재론자들은 우리가 윤리판단을 내리는 것은 엄밀히 보아서 판단대상내의 속성들을 가리는 작업이며, 그 이후 판단자가 보이는 행위, 동기, 혹은 태도는 그가 지닌 욕구체계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윤리판단과 행위(동기) 사이에는 필연적 아닌 오직 우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한다. (물론 윤리속성과 판단의 개인내적 혹은 대사회적 중요성에 비추어, 아주 밀접한 우연적 관계가 존재할 것이다.)
반면에 내적 실재론자들은 Mackie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윤리적 속성은 대상내 존재하면서도 우리에게 인식될 경우 필연적으로 어떤 행위(동기) 혹은 호의적/부정적 태도를 유발하는 속성으로서 존재한다고 본다. 이들은 반실재론자들의 대부분 (Mackie 혹은 emotivist들)과 internalism(윤리판단과 행위/동기간에 내재적인―개념적인, 최소한 필연적인―관계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공유하면서도, 내재적 동기유발이 윤리적 속성의 실재와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들에 의하면 윤리판단은 판단자의 태도가 아닌 대상내 속성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지만, 그 속성이 제대로 인식되면 판단자 (혹은 특정의 조건을 만족한 판단자)의 행위에 어떤 효과를 필연적으로 미치는 그런 속성으로서 윤리속성은 존재한다. (이 두가지 실재론들은 본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Gilbert Harman은 그 자신의 상대주의 지지과정에서 Mackie류의 반실재론 논증들과 유사한 주장들 (윤리의 상대성현상과 윤리판단의 논리적 의미의 일부로서의 internalism)을 사용하였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윤리속성의 반실재를 유도해내는 다른 논증을 제시한 바 있다. 바로 인과적 설명력 부재논증이 그것이다. Harman에 의하면 어떤 행위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옳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판단행위(혹은 더 나아가 그 행위를 장려하거나 말리는 행위)는 행위의 자연적 속성이외에 따로 윤리적 속성을 그 행위에 귀속시키지 않고서도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그저 장난으로 고양이에 불을 붙였을 때 Harman에 의하면 그들의 행위가 '아무 이유없는 고통유발'이라는 자연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나쁘다고 규정짓도록 조건화되어 왔다는 것으로 우리의 판단행위는 설명된다. ('나쁨'이 지칭하는) 윤리속성이라는 또 다른 존재의 층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자연속성과 사회적 조건화로 윤리(판단)행위의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므로, 또 우리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 설명이 더 단순하므로, 윤리속성을 동원한 설명보다 낫다는 것이다 (Harman, The Nature of Morality, 1장).
이 논증에 대해서도 두 부류의 윤리적 실재론 양 측면에서 서로 다른 반응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첫째로 내적 실재론자들은 대개 인과적 설명에 동원되는 것만을 세계의 일부로 보는 것은 부당하게 자연과학적 속성에만 객관적 실재를 부여하는 편협된 입장이라는 것이다. 내적 실재론자들 중의 한 사람인 John McDowell에 의하면, 설령 색이라는 속성의 인과력이 대상표피의 물리적 구조의 인과력으로 해소된다고 해도 색이 하나의 객관적 실재를 가진다고 볼 때, 그것의 존재는 색이 (표피구조와 다른) 고유한 인과적 설명력을 가진다는 것보다 인간의 색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 "설명자가 그것의 [색의] 실재를 일관되게 부정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McDowell이 보기에 색과 가치 사이에는, 마치 색경험과 색 사이에서처럼 평가적 태도 혹은 의지의 상태가 윤리판단의 개념적 조건이라는 유사성이 있다. 더 나아가,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disanalogy)도 있는데,
그 차이점은, 예를 들어 어떤 virtue가 (마치 어떤 색이 단지 적절한appropriate 경험을 인과하는 그러한 것이라는 견해와 같이) 단지 특정한 '태도'를 유발 하는 그러한 것이라고 상정된다기 보다, 오히려 virtue가 그 태도를 당연한 반응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a virtue is conceived to be...such as to merit it[the appropriate attitude]). 이것은 가치경험의 인과적 설명들만이 가치에 대한 합당한 설명적 테스트인지 의심을 품게 만든다. 또한 더 나아가 관련된 가치의 실재를 부정하면서도 누가 그러한 설명들을 일관되게 제시할 수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우리는 그 질문을 다른 종류의 설명에 관해 물어야할 것처럼 보인다 (McDowell, "Values and Secondary Qualities," 175).
McDowell의 이 말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는 이 말에 두가지 주장이 있다고 본다. 첫째로 윤리적 속성이나 가치는 인간의 평가적 태도를 유발하지만 그 관계는 (자연적 속성과 태도의 관계가 순전히 인과적인데 비해) 다분히 개념적 측면을 포함한다. 즉 윤리적 속성과 그것에의 당연한 반응 사이의 관계는 합리적―인간을 합리적 존재자로 봐야만 이해가 가는―관계이다. 둘째로, 따라서 자연과학자들의 설명방식 (인과설명방식)에서 고유한 역할을 지니는가가 아니라, 세계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합리적 반응을 통틀어서 이해하려고할 때 윤리적 속성의 실재를 뺀 설명은 일관적으로 제시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합리적 존재자로서의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대면행위를 이해하는데 그의 윤리적 판단 혹은 평가행위와 그것이 당연한 반응으로 맞물려 있는 어떤 속성의 존재가 필수적이고, 그 관계 전체는 어떤 인과적 배후관계에 의존하지만, 각각의 윤리속성-반응관계는 특정 인과관계로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 모호하나마 필자가 이해하는 McDowell의 입장이다. 혹자는 내적 실재론자들의, 인과적 설명력 테스트를 제쳐 놓는 경향을 들어서 그들이 비자연적 속성으로서의 윤리속성의 실재를 주장한다고 보지만, 필자는 내적 실재론자들도 윤리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하거나 어떻든 얹혀 있지만, 그것의 실재는 자연적 속성의 실재처럼 인과력에 달려 있다기보다 인간행위의 총체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데 필수적이라는데에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낳겠다는 편이다. 현금의 윤리실재론 논쟁은 대체로 다른 '실재'의 기준을 가진 자연주의자들 사이에서의 논쟁이다.)
이에 반해서 외적 실재론자들은 주로 윤리적 자연주의의 보다 직접적인 후예들로서 윤리속성을 특정 양태의 자연적 속성들과 동일시한다. 윤리판단의 특정 대상내에서 그 대상의 자연적 속성 (자연과학적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개별적 대상의 속성)과 그 대상의 윤리속성이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그 대상의 자연속성에 수반하는 속성으로서 (즉 어떤 자연적 일반화에 포섭되기 때문에 귀속되는 속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macro 자연속성들 (화학적, 생물학적 속성들)이나 심리속성이 대상의 micro 자연속성에 수반하고 그때 그때 후자에 의해 구성되면서도 그 인과력이 최소한 우리의 macro 자연현상들의 인과설명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설명)에 동원되듯이 윤리속성의 인과력 또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Nicholas Sturgeon은 수반개념으로서 윤리속성의 인과력이 보장될 수 있다고 보는데, 그에 의하면 올바른 인과-설명적 테스트는 "만약 특정 전제가 어떤 사실의 설명에 완전히 무관하다면, 그 전제가 가설적으로 거짓이라 해도 사실은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그대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이다 (Sturgeon, "Moral Explanations," 245). 만약 우리가 윤리적 수반을 받아들인다면, 윤리속성은 이 테스트를 통과한다는 것이 Sturgeon의 주장이다. 즉 윤리-자연적 속성간 수반이 성립한다면, 이는 윤리적 변화는 그 수반기저인 자연적 속성의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 만약 한 행위의 자연적 속성이 변화하면 (예를 들어 아이들의 행위가 gratuitous cat-burning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해서 애초에 내렸던 윤리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로부터 Sturgeon은 애초의 윤리판단행위를 설명하는데 그 윤리판단의 참이 전제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주장은 그대로는 실재론의 변호에 미흡하며 외적 실재론자들 (혹른 실재론자들 일반)이 형식적 수반개념 이상으로 그들의 입장에 더해야할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우선 Sturgeon의 견해가 수반 이상으로 윤리-비윤리 속성들간의 더 밀접한 연관을 전제함은 명백하다. 즉 윤리판단의 변화는 그 수반기저인 자연 속성의 아무런 (미세한) 변화가 아니라, 특정 부분이 변화해야만 변할 것이다. 자연속성의 어떤 부분이 그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는 수반으로서만으로는 가려낼 수 없다. 윤리적 수반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 수반을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어떻게 윤리속성과 비윤리속성들이 상호 공변(covary)하는지에 대한 패턴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후자에 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규범적 윤리이론만이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원칙적으로 자연속성에 형식적으로 수반하는―후자가 변하기 전에는 변할 수 없는― 모든 속성들이 자연속성의 인과력을 이어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Sturgeon은 이 지점에서 Harman이 어떠한 윤리이론이나 규범적 윤리판단의 참 (그 이론이나 판단이 지칭하는 윤리속성의 존재)을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경우 이러한 전면적 회의론적 전제를 입증할 만한 독립적 논증을 제시하는 것은 그의 (Harman의) 부담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에게 과연 어떤 속성이 인과설명력을 가지는지의 여부와 그것의 실재는 너무도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즉 아무런 인과설명력을 지니지 않은 것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며,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그것에 어떤 상황에서의 인과설명력을 인정해야하므로) 윤리속성에 대해서 인과설명력을 전반적으로 거부하면서 그 부재를 논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Sturgeon의 말마따나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그의 대응에서 우리가 보아온 것은 외적 실재론자들이 전반적 자연주의자들로서 (즉 자연적인 것들만의 존재 혹은 인과력을 인정하려는 사람들로서) 동시에 윤리적 자연주의자들 (윤리적 속성은 바로 특정 유형의 자연속성들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려면 그들은 수반이상으로 윤리-비윤리속성간의 연결을 제시해야할 것이고 이 단계에서 그들은 윤리속성이 과연 자연속성의 어떤 부분에 수반하는지, 보다 정확히 말해 어떤 수반적 자연속성 (자연속성의 한 패턴)과 동일시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특정 윤리이론과 연합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외적 실재론자들의 거의 모두가 어떤 유형의 결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필자가 보기에 우연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실재론옹호의 결정적인 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본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이 실재론 논쟁과 특정 윤리이론의 연합이 논의될 것이다.)
IV. 윤리적 수반으로부터 반실재론으로의 논증: Blackburn
대체로 (외적) 실재론자들은 전이론적 윤리행태의 실재론적 성격을 그들 논의의 출발로 삼고, 수반개념을 윤리속성의 형이상학적 자격에 관한 의혹을 떨치는 무기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일견 수반이 두 종류의 속성들이 지닌 한 관계로서 (즉 수반의 기저속성의 변화없이 수반속성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관계로서) 이해될 경우, 수반을 받아들임은 이미 수반속성의 실재론에로 경도됨을 의미할 것이다. 믈론 반실재론자들은 이에 반발한다. 그들에 의해서 수반의 기본개념은 윤리적 속성이 아니라 윤리판단들을 내리고 윤리적 술어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의 한 제약으로 이해된다. 윤리판단행위는 비윤리적으로 동일한 대상들은 윤리적으로 동일하게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제약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윤리적 수반은 각 윤리언어 사용자의 (자신의) 윤리판단 체계내에서의 일관성요구(a consistency requirement)를 대변한다.
윤리적 수반을 이렇게 최소한으로 이해할 경우 극단적 윤리적 제거주의자(윤리술어들은 지금 당장 비윤리언어에 의해 대치되어야한다는 주장)나 극단적 니힐리스트(각 개인의 윤리언술내에서도 일관적인 윤리언어사용의 가능성과 의의를 무시하는 입장)를 제외하고서라면 누구도 윤리적 수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 최소한의 윤리적 수반이 어떤 윤리이론에 의해 설명되는가이며, 이것이 윤리적 실재론에서의 관건일 것이다.
많은 논문들을 통해 Simon Blackburn은 윤리적 수반에 관한 그 자신의 설명을 투사주의적(projectivist) 윤리적 반실재론으로의 한 전제로 사용해 왔다. 단순화시켜보면 그의 논증은 다음의 구조를 갖는다.
(i) 개념적 제약으로서의 수반: Blackburn은 윤리적 수반을 윤리적 용어들과 자연적 용어들간의 개념적 혹은 논리적 관계로 이해한다. 수반은 윤리적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의 일부이다. 윤리적 언술은 윤리언어 사용자 각각의 윤리언어 사용내에서의 일관성이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이는 윤리의 본질적 역할이 행위를 인도하는 데에 있고, 윤리술어들의 귀속에 있어서의 일관성이 이 역할의 수행에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관성의 고려는 윤리적 용어와 판단이 의미하는 것의 구성적 일부이다. 윤리적 수반을 위반하는 자는, 즉 자연적으로 동일한 대상들을 윤리적으로 다르게 취급하는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윤리적 용어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Blackburn의 윤리적 수반에 관한 설명이다. (이는 또한 그가 윤리적 수반에 개입된 필연성을 개념적 혹은 분석적 필연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i) 윤리용어들과 자연용어들간의 개념적 gap: 수반이 각 윤리언어 사용자들내에서의 개념적인 제약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윤리의 내용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자신들의 윤리판단들을 상이한 자연적 조건들에 근거지우는, 서로 다른 자격있는(competent) 윤리언어 사용자들을 상상할 수 있으므로―그들은 윤리용어의 수반을 준수한다는 측면에서 'competent'하다―, 윤리적 수반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특정의 한 윤리적 기준이 지정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들을 채택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윤리행태(moralizing)를 관장하는 개념적 제약들을 그들의 윤리행태에서 지켜나갈 수가 있으며, 자연적 사실들의 완전한 집합하에서 상이한 [윤리적] 판정들을 내리게 될수 있다." (66)
(iii) 투사주의적(projectivist) 결론: Blackburn에 의하면 (i)/(ii) 결합은 윤리적 실재론자들에게 '하나의 미스터리'를 제공한다. 만약에 실재론자들의 말대로 윤리속성들이 실재하고 그것들이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면, 이 속성수반에서의 양상적 효력(modal force)은 수반관계를 모든 가능세계들에서 동일하게 유지시킬 만큼 강해야 하지만, Blackburn의 주장은 이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i)/(ii) 결합가능성에 대한 Blackburn 자신의 설명은 어떤 이가 윤리적 술어들을 사용할 때 그는 어떤 실재하는 속성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태도 혹은 윤리판단의 대상에 관한 자신의 감수성(sensibilities)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윤리적 태도 혹은 감수성이 동등하게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Blackburn은 인정한다. 그는 이모티비스트들이나 Hare와 같은 prescriptivist의 윤리판단에 대한 태도론적 견해가 본질적으로 맞다고 보지만, 그는 또한 윤리판단의 단언적인(assertive) 혹은 지시적인(indicative) 외양과 윤리판단들에 관한 진리담지적 언술 (truth-talk)―실재론자들의 소외 윤리행태의 '전이론적 실재론적 성격'의 일부―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보며, 이는 이렇게 외양적으로 실재론적인 윤리판단의 문장형식들과 문법이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윤리적 실제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입장 (예를 들어 윤리적 실재론)을 함축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윤리적 속성들은 주관적 태도로부터 세계로의 투사결과이지만, Blackburn에 따르면 수반이나 일관성과 같은 최소한의 제약들과 부합하는 '향상된 감수성'(improved moral sensitivity)을 지닌 태도, 그리고 사회적 협동을 증진하는데 효과적인 태도들은 그 실재론의 외양을 보존할 수 있다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earn the right to use) 본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반실재론을 '의사-실재론'quasi-realism이라 부르는 연유이다.)
Blackburn의 투사이론 자체가 지닌 문제점들은 여러가지로 지적되었고 논의되어 왔다. 예를 들어 그의 투사이론은 가정적 문장들내에 포함된 윤리용어들의 의미가 단언적 윤리문장들에서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점을 해명하지 못한다거나―적어도 가정적 윤리문장들은 화자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의 '고차 태도' 혹은 '향상된 감수성'같은 개념들이 그의 이론을 이모티비즘과 같은 환원적 주관주의에 비해 (일상적 윤리관념이 포함한 원칙적 비판가능성과 같은 실재론적 성격을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보다 향상된 이론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위에서 소개된 수반으로부터의 반실재론논증에 관해서라면, 필자는 이 논증의 실제적인 관건은 (그의 윤리적 수반설명과 관련된 첫째 전제가 아니라) 두번째 전제에 있다고 보며, 이는 우리에게 이제 친숙한 윤리적 이견들로부터의 논증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Blackburn은 윤리적 수반의 양상적 측면(modality)에 관해 가능세계관련적 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 세계내에서도 동일 행위에 대해 상이한 윤리적 판단을 지지하는 다른 규범적 윤리이론들이 존재하며, 각 이론은 개념적 제약으로서의 수반을 견지하고자할 것이다. 즉 이론들이 상이한 자연적 조건들에 '좋음'이라던지 '옳음'과 같은 용어들을 적용하겠지만, 각각의 이론내에서라면, 최소한의 일관성제약으로서 수반은 지켜질 것이다. 윤리적 이견으로부터의 논증이 실재론 옹호에 껄끄러운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나,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아직 그 논증의 타당성에는 많은 논의가 가능하며, 만약에 Blackburn의 논증에 관한 필자의 해석이 맞다면 그의 수반논증은 실재론자에게 (이견으로부터의 논증과 다른) 또하나의 개별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Blackburn은 윤리적 수반의 설명으로서 그것은 윤리개념상―윤리개념과 자연개념간의 관계상―의 참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Blackburn은 속성들간의 수반을 인정할 수 없는 까닭에 개념들간의 관계만으로 윤리적 수반을 본다. 그의 반실재론은 이러한 개념적 참으로서의 수반에다가 특정 자연조건으로부터 윤리판단에로의 개념적 함축의 부재를 더할 때 얻어진 결과였다.) 즉 개개인의 윤리판단 체계내에서의 일관성의 조건으로 수반을 설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렇게 이해된 수반개념을 실재론자가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최소의 수반개념은 누구에게라도 (물론 윤리적 제거주의자나 니힐리스트가 아니라면) 받아들여져 마땅하다. 모든 윤리언어를 이해한 사용자는 최소한 그 자신의 윤리언어 사용체계내에서 수반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수반 (James Klagge가 '분배적 수반' distributive supervenience이라 부른 것)을 넘어서서 '집합적 수반'(collective supervenience)을 인정하려할 것이다. 다시말해 (적어도 외적) 실재론자는 어떤 윤리속성이 특정의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이것은 문제의 윤리속성에 관한 판단들의 수반기저로서 모든 사람에게 기능한다고 볼 것이다. 물론 실재론자들은 이 단계에서 수반을 넘어서서 어떤 비주관주의적인―주관적 태도의존적이 아닌― 윤리속성과 판단에 관한 1차이론의 합당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반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접근을 거부할 것이지만 만약 그들의 논거가 윤리에서 집합적 수반은 블가능하고 이는 윤리판단이 본질직으로 판단자의 태도 혹은 여하의 주관적 반응을 반영하는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들이(반실재론자들이) 논쟁의 이단계에서 결정적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한 셈이다.
V. 윤리적 수반의 설명
Blackburn의 윤리적 수반논증이 실재론에 독립적 위협을 주지는 못했지만 실재론 논쟁에 있어서 수반의 위치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반은 설명되어야할 과제이며, 그 자체로서는 수반속성(수반개념이 지칭한다고 추정되는 속성)의 형이상학적 자격이나 성질에 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김재권교수의, 심적 수반만으로는 심신관계에 대한 설명적 이론을 구성할 수 없고, 오히려 수반은 설명을 요구하는 데이타라는 주장과 맥이 닿는 시사점이다:
수반 그 자체는 설명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깊이있는" 형이상학적 관계라기보다는 속성공변(covariation)의 한 패턴을 보고하는 "표피적" 관계일 뿐이어서 그 관계를 설명해 줄 어떤 흥미있는 의존관계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데 지나지 않는다...그것은 그 자체로서 심신관계의 설명적 해명이 아니며 그러한 해명이 우리에게 이해시켜야할 데이타의 보고일 뿐이다 (Kim, "Postscript on Supervenience," 167-68).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수반에 대한 설명요구는 세 차원들 혹은 세가지 관련된, 하지만 상이한 질문들을 포함한다고 보이며 이것들이 최근의 (윤리적) 수반설명 논제에서 자주 혼동되어 있는 것 같다: "윤리적 속성일반은 왜 전체적으로 자연적 속성에 수반하는가?" "왜 윤리적 속성은 수반이라는 형태로 자연속성에 (혹은 여타의 기저속성에) 의존하는가?" "왜 어떤 윤리속성은 (다른 자연적 속성들이 아니고) 특정의 자연적 속성에 수반하는가?"
윤리적 속성은 왜 전체적으로 자연적 속성에 수반 혹은 의존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김재권과 Klagge는 비슷한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들에 의하면 윤리적 영역의 자연적 영역에로의 수반은 윤리판단에서 우리의 증거를 대는 행위(evidential practice) 혹은 이유를 제공하는 행위(reason-giving activity) 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유일한 (혹은 가장 합당한) 윤리판단의 정당화는 대상의 어떤 (비윤리적) 자연적 속성을 지칭함에 의해 행해진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윤리판단은 기술적 혹은 자연적 근거를 요구한다. 이러한 정당화행위는 누가 윤리적 가치판단을 내릴 때마다 개념적으로 요구되는 것의 일부이며 이것이 윤리적 (속성의 자연속성으로의) 수반에 대한 신념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설명은 윤리적 수반의 개념적 차원의 해명으로서 실재론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다.
둘째 질문은 왜 윤리적 속성이 수반이라는 형태로, 즉 윤리판단이 내려질 때마다 대상내의 어떤 비윤리적 속성들(기저속성들)이 있고, 그것들이 고정되면 필연적으로 윤리속성 (혹은 판단)도 고정되어야 한다는 형태로 기저속성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도대체 왜 윤리적 속성은 두 대상들이 모든 다른 속성들을 공유한다면 그것도 공유해야 하는, 그러한 속성인가? 필자가 보기에 이 질문은 윤리판단 (혹은 그 판단이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속성)의 개념의 일부로서 더 이상의 설명의 구석이 있지 않은 것 같다. 다시말해 우리의 윤리판단행위 자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전제들 혹은 commitment들 중 하나로서 Blackburn뿐 아니라 실재론 논증에 참여한 어떤 사람도 (첫째 질문이나 마지막 질문이 아닌) 이 사실에 대해 설명하거나, 그 질문 자체로부터 어떤 입장을 유도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 질문은 왜 어떤 윤리적 속성이 특정의 자연속성에 수반하는가인데 이는 당연히 여러 규범적 윤리이론들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이다. 규범적 윤리이론들은 한 윤리속성, 예를 들어 좋음이나 옳음이 여러 다른 자연적 속성들에 의해 구현될 때 그것들간의 유사성을 기술해 주며 그 유사성이 과거와 현재의 우리가 의심없이 맞다고 볼 만한 윤리판단들에 비추어 확인되며 향후의 판단들을 인도해 줄 만하다고 제시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단계에서의 윤리적 수반의 설명은 메타논쟁으로서의 실재론 논쟁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규범적 이론들 (혹은 그것들간의 선택)이 해야할 몫이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 수반의 기저인 자연적 속성들간의 유사성이 지적되는가에 따라 실재론, 반실재론 혹은 어떤 유형의 실재론이 가능한 지가 가늠되기 때문이다. 반실재론자라면 개인의 (주관적 혹은 '향상된' 주관적) 태도에 포섭되는가가 수반의 기저속성들간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할 것이다. 실재론자라면 이러한 협소한 분배적 수반을 넘어서서 판단자의 태도와 무관하면서도 순수 자연적 관점에서라면 (순수 자연과학적 용어로서라면) 의미있는 공통성이 잘 파악되지 않을 만큼의 다양한 자연적 속성들이 그룹을 지우면서 한 윤리속성(에 대한 판단)에 기저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번 지적되었둣이 (그리고 이 점이 본 논문의 한 논지인데) 이 단계에서는 과연 이러한 규범적 이론이 존재하고 규범적 이론으로서 다른 이론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나가면서 실재론과 연합될 때만이 윤리적 실재론은 메타이론으로서 지지가 가능하게 된다.
VI. 외적 실재론 vs. 내적 실재론
외적 실재론자들은 이 지점에서 대개 특정유형의 결과주의 (혹은 공리주의)로 눈을 돌린다. 그들은 결과주의라면 집합적 수반 혹은 실재론적 수반을 뒷받침할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이다. 결과주의에 의하면 과연 어떤 행위가 어떤 자연적 결과를 낳았는지는 판단자의 태도와 (그 태도가 행위결과에 의해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무관하며, 인간의 삶과 관련되어 동일한 결과를 주는 행위들 간에는 (개별 판단자의 태도관련적이 아닌 인간관련적 관점을 떠나서라면) 어떤 순전히 자연적 측면에서 의미있는 공유점이란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결과주의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고, 위의 두 조건이 만족되어도 선택된 결과주의가 규범윤리이론으로 합당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론 논쟁의 구조상 보자면 필자의 생각에 대개의 외적 실재론자들의 실재론에의 연루는 일상적 윤리행태의 실재론적 성격에의 믿음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결과주의에 대한 윤리적 경도가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결과주의가 맞다고 보이고, 그 이론이 지칭하는 속성이 수반속성일 뿐 아니라 분배적 수반을 넘어서는 속성이므로, 실재론이 지탱될 수 있다는 경로를 취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외적 실재론자들의 실재론에 도달하게된 경로에 대한 필자의 이러한 견해는 오해일 수도 있으나, 거의 모든 외적 실재론자들이 결과주의자라는 점, 그리고 마르크시즘에도 호의적인 R. Boyd나 P. Railton조차 마르크시즘을 윤리이론으로서는 결과주의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필자에게 떠올려진 짐작이다. 개인적 고백이지만, 필자자신의 실재론으로의 이끌림 또한 그것의 메타이론적 매력보다는 필자의 행위를 인도하는 규범적 이론이 결과주의 언저리라는 체험에 보다 강하게 동기지워진 것이 사실이다.)
David Brink는 말하기를 그가 지지하는 객관적 결과주의 는 '윤리학에서의 실재론적 견해에 하나의 합당한(plausible) 프로그램'을 혹은 '실재론적 메타윤리학이 지지할 만한 종류의 윤리이론의 한 그럴듯한 모델'을 제공한다고 한다. (Moral Realism and the Foundations of Ethics, 11, 213) 그는 자연주의적 윤리적 실재론의, 다른 실재론, 반실재론적 라이벌들에 대한 우위성은 규범이론적 고려들과는 독립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고 보며, 객관적 결과주의와 같은 이론이 1차 윤리이론으로서 지지가능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그의 메타윤리학적 견해에 하나의 간접적 지원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자연주의적 메타윤리학의 참 혹은 합당성은, 그것대로 객관적 결과주의를 지지하게 하는 하나의 동기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관련된 1차 윤리이론의 존재는 메타이론적 논쟁에서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 1차이론의 규범이론으로서의 가능성과 경쟁능력은 그것의 메타윤리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연루보다 그것이 우리의 윤리실제들을 인도하는 능력에 더 무겁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필자의 견해는 Brad Hooker가 "최선이론 자연주의(Best Theory Naturalism)이라 부르는 견해와 유사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윤리적) 가치속성들은 우리가 지닌 최선의 규범이론들이 가리키는 바의 자연적 속성이다. 물론 자연주의가 여기서 주어진 제약이지만, 자연주의라는 제약만으로 최선의 규범이론의 성격이 규정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최선 윤리이론이 확인하는 것이 대상내의 실재 속성이 아니라 주관들내의 (자연적) 속성들 (즉 욕구, 태도, 행위하려는 성향)이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상정한 자연주의는 자연적 속성과 그것에 수반한 속성들만이 실재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단지 자연속성에 수반한다는 (수반하는 형태로 판단된다는) 사실만으로 그 속성의 실재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재적 수반에 관한 더 많은 제약들을 첨가해야만 할 것이다.)
외적 실재론과 연합한 결과주의 자체의 변호를 겨냥하는 것은 본 논문의 한계내에서나 필자의 현 상태내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외적 실재론이 단지 필자의 마음을 끄는 이론으로서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의 일부이다.) 단지 최근의 결과주의의 부활에서 드러난 바, 결과주의가 지닐 수 있는 몇가지 유연성들에 비추어 그것에 대한 지지가능성의 폭이 그리 좁지만은 않다는 것만을 암시하기로 하자. 통상 결과주의 (혹은 공리주의)는 그것이 윤리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너무 막대하다던지 혹은 특수한 개인적, 가족관련적 의무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비판되어 왔다. (물론 이것들이 그 이론에 대한 비판의 전부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 외적 실재론의 대개의 파트너격인 객관적 결과주의 혹은 objective list theory에 의하면, 최종 선으로서 이 list에 낄 수 있는 항목들은 우리의 심리적-사회적 탐구가 늘어남에 따라, 개인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항목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진전함에 따라, 변경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몇가지 개인적, 가족/우정관련적 요소들이 반영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외적 실재론-결과주의자들은 대개 의사결정이론으로서의 결과주의(the consequentialist mode of decision making)와 윤리적 판단기준으로서의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as the criterion of the rightness of an act or a course of action)를 구분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결과주의적 행위판단기준이 맞다고 해서, 행위자가 언제나 결과주의에 의존해서 행위선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결과주의 아닌 방식으로 행위선택을 할 때 (개인적 프로젝트나 가족-친구의 처지에 관한 감수성과 자발성을 높이게 되면) 결과주의적 기준에서 보면 올바른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내적 실재론자들은 이 지점에서 어떤 자세를 보일 것인가? 다시말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때 그때 한 윤리속성의 기저속성으로서 등장하는 자연적 조건들간에 공통점을 제시할 것인가? 잠시 내적 실재론의 기조를 다시 점검해보자. 내적 윤리실재론자들은, 실재론자들이기 때문에, 윤리판단을 내리는 행위는 인식적 행위라는 주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내적 실재론자들로서 그들은 또한 윤리적 사실의 인지가 '내적으로' (개념적으로 혹은 최소한 필연적으로) 어떤 반응들에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윤리적 속성들이나 가치들은 바로 이러한, 동시에 인지적이면서도 동기유발적인 심리상태에 의해 탐지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적 윤리실재론내에서 가치는 항용 '합당한(merited) 반응'을 유발하는 성향 (McDowell)이나, 특정 방식으로 행위하려는 성향이 그것에 대해 올바른 반응인 세계의 '두드러진(salient)' 측면 ('사람들이 신경쓰는 것이 올바른' 측면 a feature 'which people are right to mind about; Dancy, Moral Reasons, 140)이라고 성격지워진다. 물론 모든 반응이 '합당하다거나' '올바른' 가치-탐지적 반응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여기서 McDowell은 완전하게 덕있는 사람(a perfectly virtuous person)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념에 의존하고, Dancy는 아무 사람이라도, 만약 그의 상황에 대한 감수성이, 그 자신의 관점에서 특정 행위를 이끌어내야하는 측면들('salient' details and structures)을 간파할 만큼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올바른 반응을 보인 것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이렇게 내적 실재론자들의 글들에서 공통되게 자주 떠오르는 한 모티브는, 그때 그때 자신의 상황에 합당하게 위치한 개인의 반응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윤리적 성찰에서 기댈 만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내적 실재론자들은 이상적인, 혹은 적합한 개인의 반응이 가치를 실현하는 수반의 기저속성들간의 공통점에 관한 유일한 혹은 최선의 제약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러한 개인의 반응을 인도해 줄만한 다른 반응-독립적 제약이 (어떤 규범적 이론의 형태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바로 그 제약이 시사하는 속성이 가치일 것이며, 이상적인 혹은 민감한 개인의 반응은 바로 그 속성을 가려내는 믿을 만한 탐지기의 역할만을 지니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McDowell과 Dancy 공히 그때 그때 특수한 개인의 반응을 통하는 것이 윤리속성으로의 유일한 접근루트이며 그 이상의 일반화된 윤리이론은 없다는 particularism으로 기울고 있다. Dancy는 (필자가 보기에 올바르게 판단하기를) particularism이 그의 내적 윤리실재론으로부터 엄격히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양자는 '내적 정합성'(internal coherence)의 관계에 있으며 그 둘은 '최선의 이론간 package'를 구성한다고 한다. (Moral Reasons, 57, 250) 필자가 보기에 이점은 윤리적 실재론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점으로서, 만약 particularism이 거짓으로 혹은 합당하지 못한 윤리이론으로 판가름난다면, 다시말해 (공리주의와 같은) 일반화적인(generalist) 1차 윤리이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난다면, 내적 윤리실재론은, 그로인해 거짓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최대의 특수한 매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Dancy는 이를 염두에 둔 듯이 그의 내적 실재론의 체계적 옹호인 최근 저작에서 윤리학에서의 generalism 일반을 반박하는 데에 두 장(chapter)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외적 실재론-결과주의 연합을 겨냥한 듯) 마지막 네 장은 결과주의에 대한 지속된 공략으로 바쳐져 있다. 그 부분의 그의 프로젝트의 성패와 무관하게, 이는 윤리적 속성의 본성에 관한 메타이론적인 논쟁들이 최선의 1차 이론의 성격에 중요하게 의존한다는, 이 논문에서 필자가 지적하려는 방법론적 측면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적 실재론, 그리고 그것과 particularism 연합에 대한 세밀한 비판은 이 자리에서 힘들겠지만 그것에 대해 필자가 가진 몇가지 불만들을 간추리는 것으로, 외적 실재론의 위상을 약간이나마 부각시키려는 본 논문을 끝맺기로 하자.
첫째로 내적 실재론이 함축하는 바 신념으로서의 윤리판단과 행위성향 (혹은 욕구)간의 개념적내지 필연적 연관이(또는 동시에 믿음이자 욕구인 심리상태의 존재가) Hume이 우리에게 물려준, belief-desire 사이의 필연적 연관없음이라는 이설의 부정을 뜻하는 바, 이것이 대부분이 이 분야에서 Humean들인 자연주의자들의 불만을 사곤 한다. 이것은 윤리학을 넘어선 커다란 철학적 문제이고 최근에 중요한 철학적 이슈로 부각되었으므로, 필자의 입장이 뭐라고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논평을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단지 그러한 특수한 연관 혹은 심리상태의 존재의 증명부담이 내적 실재론자들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외적 실재론자가 그러한 연관 혹은 심리상태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론적 요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을 밝힌다. (Dancy등의 논의에 의해 필자 자신이 최근에 신념이자 행위동기가능한 심리상태의 존재에 대해 보다 호의적이 되었는데, 외적 실재론자들은 윤리판단이 그러한 심리상태의 일부라는 것, 하지만 어떤 배경조건들이 성립할 경우에만 그것의 동기유발적 기능이 작동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두번째의 내적 실재론의 이론적인 취약성: McDowell과 Dancy의 particularism은 그들이 보기에 윤리적 속성의 기저인 다양한 자연적 조건들 사이에 특정 윤리적 속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배제하고서라면, 순수 자연적 관점에서라면, 어떤 공통점 혹은 shape의 구성이 어렵다는 주장 ('a natural shapelessness' 혹은 the shapelessness of the supervenience base)에 근거한다. (Moral Reasons, 77, 85) 그러나 이는 또한 외적 실재론자들도 수용하는 주장이다. 외적 실재론하에서도 윤리적 관점―인간의 삶의 향상과 관련된 관점―을 빼고서라면, 좋은 혹은 옳은 행위들간에 미립자적 기술로서 포착가능한 의미있는 공통점은 없을 것이다. 단지 여기서의 양 입장간의 차이점은, particularist들이 순수 자연과학적―미립자적― 기술과 윤리적 기술('좋은', '옳은')의 두 층만을 용인한 반면, 외적 실재론/결과주의자들은 그것들 사이에 특정 유형으로서의, 다시 강조하지만 판단자의 관심아닌 인간의 관심관련적인 (자연)속성이 그룹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과 윤리속성과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내적 실재론자들의 윤리언술, 윤리행태의 파악은 너무 양 극단의 (미립자적) 자연용어-윤리용어 구분에만 치우쳐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수반의 층들을 간과한 듯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만약에 윤리속성의 존재가 그것에 걸린, 특수한 개인의 반응을 규정함에 있어서 어떤 개인의 어떤 반응을 말함인가에 따라 내적 실재론내에서도 다양한 분파들이 가능할 터이다. 우선 반응의 속성에 대해서는, 실제 행위로부터 행위욕구, 행위하려는 성향의 가짐...에서 단지 대상행위가 옳다는 (혹은 좋다는) 판단내림 등등이 제안으로 떠오른다. 만약 우리가 가끔이나마 그 특수한 개인의 위치에서 올바른 윤리판단을 내린다고 본다면 행위자체가 필연적으로 그 판단에 뒤따른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관련 반응이 단지 또 다른 윤리판단이라면 내적 실재론 (혹은 반응-의존적 가치이론전반)은 순환론적이된다. 그 사이 중간쯤에 적정한 지점이 선택되어야할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것이 어떤 지점인지 짐작이 잘 가질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으로, 도대체 어떤 개인의 판단(겸 반응)이 윤리적 속성을 규정할 수 있는가? 대체로 McDowell류의 이상화(idealization)경향과 Dancy와 같이 보다 일상적으로 민감한 개인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전자라면 50년대의 이상적 윤리적 관찰자이론(ideal moral observer theory)이 지닌 모든 취약점들이 이번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이상화된 개인의 판단이나 행위성향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왜 그것을 규범으로서 좇아야 하는가? 더구나 순환론을 피하기 위해 그 이상화된 개인으로부터 윤리적 인식이나 윤리이론적 인식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경험많고, 인정많고, 공평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행위나 판단을 참조하고 따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상화되었다거나,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에 관련되는 대상의 측면들을 알고 있다고 우리가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약에 그 특수한 개인이 윤리-관련적 지식만을 알 필요가 있다면, 바로 그 관련성을 가려내기 위해 애초에 특수한 개인에 의지하고자 했으므로 다시 순환적 규정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에 비해 Dancy와 같이 그 특수한 개인을 그저 자신의 처지에서 행위를 요구할 만한 상황내의 측면들에 대해 민감한 개인 정도로 규정한다면, 당연히 다른 개인들에 의해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파악과 다른 행위에의 주목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Dancy의 표현대로라면 윤리적 관점에서, 다시말해 행위로서 어떻게 세계에 반응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문학적 예술작품과도 같은 서술적narrative 구조를 지니며, 마치 작품해석과도 같이 다른 해석/판단자들은 동일한 상황에 상이한 여러 서술구조 내지 이야기들을 귀속시킬 수 있다: Moral Reasons, 117, 162.) 이는 내적 실재론이 상대주의에로 과감히 문을 연 대목이다. 상대주의화했다는 점이 그 자체 Dancy의 이론에의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더우기 Dancy와 같은 의미에서 상대주의와 실재론 연합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상이한 (욕구, 성향을 지닌) 인간들에게 상이하게 개방되는 (상이한 행위의 장력을 던지는) 것이 세계가 구성된 방식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필자의 불만은 단지 상대화되었다는 사실보다, Dancy의 이론내에서 (우리의 윤리적 전이론적 직관으로 보아) 아주 비윤리적이고 극악한 상황파악과 행위선택을 제어할 이론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비윤리적이고 극악한 개인도 그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커다란 대목과 세심한 부분들을 위주로 하나의 완결된, 상황에 대한 서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Dancy 자신은 말하기를 상황의 이러한 윤리적-서술적 이해에 있어서 서술적 이야기구성의 "올바른 출발점과 그릇된 출발점이 있다. 사실상 많은 그릇된 출발점들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상황에 대한 이야기(story)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서술은 상황이 지닌 형태(shape)를 좇아야 한다." (112: 필자강조) 이러한 대목들이 Dancy를 실재론자로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의 극단적인 particularism내에서 비윤리적이고 극악한 서술자들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릇된' 서술자들로 배제할 구석은 없는 것 같다. Dancy는 자신의 책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particularism과 (개인적 상황파악 외부적인) 윤리적 제약(constraint)들의 조화가 자신의 최대 난점이었으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윤리적 제약들을 희생하고 싶다고 말한다. (250) 이러한 주장이 내적 실재론의 필연적 귀결은 아니겠지만 어느정도 그것의 최선의 규범이론이 함축하는 바라고 한다면, 필자에게는 내적 실재론 자체의 reductio로서 밖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최소한 필자에게는 외적 실재론의 주된 파트너인 객관적 결과주의가 규범적 이론으로서 갖는 문제점들이 particularism의 문제점들보다는 심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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