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십자가(수난,고통, 죽음)에 오직 사랑만이 답하게 하라!"
5세기부터 부활 전 주일을 수난주일로 정해 ‘수난복음’을 봉독했는데, 9세기에 와서 이 두 가지 전통이 합쳐져 ‘주님 수난 성지주일’로 정착됐습니다. 성지는 원래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나 올리브나무 가지를 사용했지만, 기후여건이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사철 푸른 나뭇가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측백나무나 향나무 가지를 사용합니다. 이 나뭇가지는 일 년 동안 보관했다가 이듬해 사순시기 직전에 태워, 사순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미사 때 신자들의 이마에 바릅니다. 축복한 나뭇가지를 들고 들어가는 것은 예수가 군중의 환호 속에 수난과 영광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입성했음을 기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행사가 아니라 그 내면적 의미, 즉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로 들어가고 수난을 통해 부활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시작된 성주간(聖週間)은 성삼일을 지내면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흔히 성삼일을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성금요일과 성토요일, 예수 부활대축일입니다. 전례력으로는 성목요일 저녁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돼 부활 대축일 저녁 기도로 종료됩니다. 앞서 성목요일 오전에는 모든 사제가 한데 모여 봉헌하는 성유 축성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제직을 세우신 것을 기념합니다. 이어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성금요일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새기며, 성토요일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묻히신 것을 묵상하면서 부활을 기다립니다. 성주간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수난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장 큰 고통인 십자가 수난과 가장 큰 기쁨인 부활을 함께 묵상하는 기간이 바로 성주간이 주는 양면적 축복을 의미입니다. 고통과 죽음마저도 사랑으로 이길 수 있다는 이 축복의 메시지는 다음 문장으로 모아집니다. "모든 십자가에 오직 사랑이 답하게 하라!"
[강론1]교황 프란치스코(2022)
갈보리에서는 두 가지 사고 방식이 충돌합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말씀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들의 말씀과 반대됩니다. 그들은 자제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 "너 자신을 구해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택함받은 자라면 네 자신을 구원하라"(루카 23,35)고 말합니다. 군인들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네 자신을 구원하라"(37절)고 되풀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들었던 악을 행하는 자들 중 한 사람조차도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너 자신을 구해줘!" (39 참조) 자신을 구하고,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건강, 자신의 성공, 자신의 이익에만 해당됩니다. 갖고, 힘을 얻고, 외모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구하라: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인류의 후렴구입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자아의 정신력은 하나님의 정신력과 반대된다. 보호자 자신은 자신을 바치는 구주와 충돌합니다. 오늘 갈보리에 관한 복음서에서 예수 또한 그의 반대자들처럼 세 번 말씀하십니다(34, 43, 46절 참조).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심지어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고 선한 도둑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특히 그의 표현 중 하나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과 관련된 차이점을 나타냅니다 :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십시오"(34 절).
이 말씀에 머물자.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언제 말씀하시는가? 특정 시간 :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동안, 손톱이 손목과 발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때. 이것이 야기 한 극심한 고통을 상상해 봅시다. 그곳에서, 수난의 가장 심각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신다. 그 순간 사람은 모든 사람의 분노와 고통을 외칠 뿐이었다. 대신 예수 말한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다른 순교자들과는 달리(2마대 7,18-19 참조), 그는 사형집행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형벌을 위협하지 않고 악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굴욕의 발판에 부착되면 선물의 강도가 증가하여 선물이됩니다.
형제 여러분,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으로 그에게 고통을 줄 때, 그분은 고통을 겪으시며 오직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살펴보자. 그것은 그의 상처에서, 우리의 손톱으로 인한 고통의 구멍에서 용서가 솟아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을 바라보며 더 좋은 말씀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십자가 위예수을 바라보며 이보다 더 부드럽고 동정심 많은 표정을 받은 적이 없음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예수을 바라보고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포옹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보면서 "예수 감사합니다: 저를 사랑하시고 항상 용서해 주시고, 제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기가 어려울 때에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합시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가장 어려운 순간에 예수 가장 어려운 계명,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우리를 해치고, 우리를 불쾌하게하고, 실망시킨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좋은 본보기가 아닌 사람에게. 누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멈추는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삶 또는 역사에 가한 상처를 핥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오늘날 우리에게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반응하라고 가르칩니다. 악과 후회의 악순환을 깨뜨리는 것. 사랑으로 삶의 못에 반응하고, 용서의 애무로 증오의 타격에 반응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주(主)나 우리의 험난한 본능을 따르는가?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 우리는 주를 따르는가, 아니면 우리의 거친 본능을 따르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자.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나 모든 사람이 하시는 것처럼 반응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응답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가 내 친구라면 나는 너의 친구이다.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내가 너를 도울 거야." 아니,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과 자비,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서 어린아이를 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선과 악, 친구와 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며, 그것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분께 있어서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자녀들이며, 그분께서 포옹하고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결혼식 연회에 대한 초대에서, 신사는 그의 종들을 거리의 교차로로 보내고 말한다 : "모든 사람, 백인, 흑인, 선과 악, 모두, 건강한, 병들, 모두를 가져 오십시오 ..." (마태 22,9-10 참조) 예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위한 것이며, 여기에는 특권이 없습니다. 모두. 우리 각자의 특권은 사랑받고 용서받는 것입니다.
아버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복음서예수이 이것을 "말"하셨다"(34절)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그것을 단번에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입술과 가슴에 이 말씀을 전하며 십자가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는 것에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하지만,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에 지치지 않으시고, 용서를 구하는 것에 지치지 않으시는 분은 우리이지만, 용서에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가 유혹을 받듯이 어떤 지점까지 일어 서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 – 누가복음이 가르치는 – 우리 죄의 용서를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루카 1,77 참조), 결국 그분은 우리에게 정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전파하라(루카 24,47 참조).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에 지치지 맙시다: 우리 사제들은 용서를 집행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를 받고 그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지치지 맙시다.
아버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한 가지 더 주목해 봅시다. 예수 용서를 구걸할 뿐만 아니라 그 이유를 말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하라. 그런데 어떻게? 그의 십자가자들은 그의 살해를 미리 계획했고, 그의 체포와 재판을 조직했으며, 이제 갈보리에서 그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사람들을 정당화하십니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와 함께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 그는 우리의 옹호자가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에 맞서 싸우십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주장은 흥미롭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인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의 무지. 폭력이 사용될 때, 아버지이신 하나님, 심지어 형제이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당신이 세상에 있는지 잊어 버리고 터무니없는 잔인 함을 저지르게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돌아가는 전쟁의 어리석음에서 그것을 봅니다. 예,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자녀들의 부당한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들 안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폭탄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것은 죽기 위해 홀로 남겨진 노인들, 미래를 박탈당한 젊은이들, 형제들을 죽이기 위해 파견 된 병사들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됩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전례 없는 이 구절을 듣는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그녀를 환영합니다. 그는 예수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힌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가 그분 안에서 마지막 소망을 불러일으켰고, "예수아, 나를 기억하라"(루카 23,42)라는 말을 발음하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두가 나를 잊어버렸지만, 너희는 또한 너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생각한다. 너와 함께라면, 나를위한 공간도 있습니다. " 선한 도둑은 생명이 막 끝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환영하고 그의 생명이 다시 시작됩니다. 세상의 지옥에서 그는 천국이 열리는 것을 본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다"(43절). 이것이 바로 사형 선고를 받은 자의 마지막 요청을 역사상 첫 번째 정경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환영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고, 모든 거리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모든 부르짖음을 춤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시 30:12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확신; 예수로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당신은 항상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용기, 용서와 함께 부활절을 향해 걸어갑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아버지와 함께 중보하시고(히브 7,25 참조), 우리의 폭력적인 세상, 상처 입은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결코 반복하는 것에 지치지 않으시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으로, 침묵 속에서 – 반복하는 것을 지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강론2]교황 프란치스코(2021)
매년 이 전례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예수를 환영하는 기쁨에서 벗어나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보는 슬픔으로 넘어간다. 그 내면의 놀라움은 성주간 내내 우리와 함께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처음부터 예수는 우리를 놀라게합니다. 그의 백성은 그에게 엄숙한 환영을 주지만, 그는 비천한 콜트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그의 백성들은 유월절에 강력한 해방자를 기대하지만, 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유월절을 성취하기 위해 온다. 그의 백성들은 칼로 로마인들을 이기기를 바라고 있지만,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온다. 며칠 만에 "호산나"를 외치며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메시아보다는 메시아에 대한 관념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 존경했지만, 그분께 놀라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은 감탄과 같지 않습니다. 감탄은 자신의 취향과 기대를 따르기 때문에 세속적 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놀라움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가져 오는 새로움에 열려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그는 아름다운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찼습니다. 그의 모범은 역사를 바꿔 놓았고, ... 등등. 그들은 그분을 존경하지만,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며, 그분께 도전을 받게 해야 합니다. 감탄에서 놀라움으로 넘어갑니다.
주님과 그분의 유월절에 대해 가장 놀라운 점은 무엇입니까? 그가 굴욕을 통해 영광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고통과 죽음, 우리가 감탄과 성공을 추구할 때 오히려 피하고자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승리하십니다. 예수 - 성 바오로가 우리에게 말했듯이 - "자신을 비웠다 ... 그는 자신을 낮추셨다"(빌 2:7.8).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전능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줄어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말씀을 보는 것은 십자가의 높이로부터 침묵 속에서 우리를 가르칩니다. 왕들의 왕이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주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벗기고 영광 대신 가시로 면류관을 씌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하신 분이 인격화되고, 모욕당하고, 매를 맞으시는 분을 보는 것입니다. 왜이 모든 굴욕? 주님, 왜 이 모든 것을 견디기를 원하셨습니까?
예수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인간 경험, 우리의 전체 존재, 우리의 모든 악의 깊이를 떨어 뜨리기 위해 그것을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우리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고통의 심연으로 내려 가기 위해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는 실패, 모든 것의 상실, 친구에 의한 배신, 심지어 하나님에 의한 포기와 같은 우리의 가장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육신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투쟁과 갈등을 경험하심으로써, 그분은 그들을 구속하시고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로 그 것들에 닿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모든 고난과 모든 두려움 속에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어떤 악도, 어떤 죄도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승리하시지만, 승리의 손바닥은 십자가의 나무를 통과합니다. 손바닥과 십자가는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놀라기를 간구합시다. 놀라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칙칙하고 황량해집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에게 용서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사랑에 놀라고 예수에게 놀라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만나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신앙이 더 이상 놀라움을 경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둔해진다: 그것은 은혜의 경이로움에 눈이 멀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의 빵을 맛볼 수 없고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형제자매들의 아름다움과 창조의 선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성직자,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이 모든 일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거룩한 주간 동안, 놀라움의 은총을 받기 위해 십자가에 눈을 들어 봅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생각했을 때, 그는 그의 수사관들이 울지 않는 것에 놀랐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께 놀란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왜? 어쩌면 우리의 신앙은 습관에서 둔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후회에 갇혀 있고 실망으로 인해 불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신뢰를 잃었거나 심지어 쓸모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이 모든 "어쩌면"뒤에는 우리가 놀라움의 은혜를주는 성령의 선물에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놀라움부터 시작합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을 바라보며 그분께 "주님,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나이까! 내가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가 다시 살기 시작할 수 있도록 예수에 놀란다, 왜냐하면 삶의 웅장함은 소유물과 승진에 있지 않고,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의 웅장함입니다 : 우리가 사랑 받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웅장함은 정확하게 사랑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굴욕을 당하시고, 전능자가 해고되고 버림받은 것을 봅니다. 그리고 놀라움의 은총으로 우리는 해고당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환영하면서, 삶에 의해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예수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형제 자매들 중 가장 작은 자, 거부당하고 버림받은 자들, 우리의 독선적인 문화가 정죄하는 자들 안에서, 그분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이 죽은 직후에 우리에게 놀라움의 화려한 아이콘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이 죽은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예수의 아들이었다!" (마르 15:39) 그는 사랑에 놀랐습니다. 그는 예수이 죽는 것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그가 사랑으로 죽는 것을 보았고, 이것은 그를 놀라게했습니다. 예수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죽음까지도 사랑으로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놀란 것입니다. 그 무상하고 전례 없는 사랑 속에서 이교도 백부장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의 말씀 -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 열정 이야기를 "봉인"하십시오. 복음서들은 그의 앞에 놓인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기적과 방대한 업적에 대해 예수를 존경했으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침묵시키셨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능력으로 인해 흠모받고 두려워할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 대해 세속적인 감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밑바닥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고, 오직 무장해제되고 무장해제하는 사랑의 능력으로만 다스리신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놀라움으로 채우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합시다. 우리도 이렇게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강론3] 교황 프란치스코(2020)
예수 "종의 형상을 취하여 자기를 비우셨[습니다]"(빌 2:7).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우리를 이 거룩한 날로 인도하도록 허용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제하듯 예수을 종으로 제시합니다: 거룩한 목요일에,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종으로 묘사됩니다. 성 금요일에, 그는 고통받고 승리하는 종으로 제시된다(이사 52,13 참조); 내일 우리는 이사야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지하는 나의 종을 보라"(사 42:1). 하나님은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분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로 자유롭게 선택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기가 어렵고 그 대가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섬김을 받지 못하게 한다면 섬기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 단 한 가지 질문으로-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섬기셨는가? 우리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우리는 그분께 소중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Foligno의 성 안젤라 (Saint Angela)는 예수가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농담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한 번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하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도록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모든 형벌을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종의 겸손과 인내와 순종으로, 그리고 순전히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봉사하는 예수을 지지하셨다. 그는 자신을 짓밟은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고통 속에서 그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의 악이 선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 즉 배신과 버림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배신. 예수 자신을 팔아넘긴 제자와 그를 부인한 제자에 의해 배신을 당했다. 그는 호산나를 그에게 노래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마 27:22) 그는 부당하게 그를 비난하는 종교 기관과 그의 손을 씻은 정치 기관에 의해 배신당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겪었던 모든 작거나 큰 배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굳건히 자리 잡은 신뢰가 배신당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실망이 솟아올라 삶을 무의미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발생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에게 충성스럽고 가까이 있다고 약속 한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륜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 위선과 이중성! 얼마나 많은 선한 의도가 배신당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깨진 약속들! 얼마나 많은 결의안이 성취되지 않은 채로 남았습니까!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단호한지, 우리가 몇 번이나 넘어지는지, 일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어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도우러 오셔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불신앙함을 치유하겠다. 내가 그들을 깊이 사랑하리라"(호 14:5). 그분은 우리의 불륜을 짊어지고 우리의 배신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심으로써 우리를 치유하셨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낙담하는 대신,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포옹을 느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나의 불륜이 있나니, 너는 그것을 네 자신에게 예수 가져갔느니라. 당신은 나에게 팔을 벌리고, 당신은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섬기며, 당신은 나를 계속 지원합니다 ... 그래서 나는 계속 압박 할 것이다. "
포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 십자가에서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을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이것들은 강력한 단어입니다. 예수 도망친 자신의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위해 남아 계셨다. 이제 고독의 심연에서 처음으로 그는 그를 일반적인 이름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그는 "왜?", 가장 극심한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 "왜 나를 너무 버렸습니까?". 이 말씀은 사실 시편의 말씀입니다(22,2 참조). 그들은 예수 또한 그의 기도에 극도의 황폐함의 체험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 황폐함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그는 최대한의 포기를 경험했으며, 복음서들은 그의 바로 그 말을 인용함으로써 증언합니다.
왜이 모든 일이 일어 났습니까? 다시 한번, 그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섬기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벽에 등을 돌릴 때, 빛도없고 탈출 할 방법도없는 막 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하나님 자신이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예수 모든 일에서 우리와 하나가되기 위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너와 항상 가까워지기 위해 너의 모든 황폐함을 경험했다." 그것이 예수가 우리를 섬긴 정도입니다 : 그는 우리의 가장 쓰라린 고통의 심연으로 내려 갔고, 배신과 포기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오늘날, 전염병의 비극 속에서, 지금 무너진 많은 거짓 증권에 직면하여, 배신당한 수많은 희망에 직면하여, 우리의 마음에 무게를주는 포기의 의미에서, 예수는 우리 각자에게 말한다 : "용기, 내 사랑에 마음을 열어라. 당신은 당신을 지탱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지경까지 우리를 섬기신 하나님과 비교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창조 된 그분을 배반하는 것을 거부 할 수 있으며,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배치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이것 만 남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비극은 우리에게 심각한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덜 중요한 것들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재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랑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날에, 우리 가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앞에 서자―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라!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충만한 척도, 그리고 그분의 생명을 주실 때까지 우리를 섬기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시고, 섬기기 위해 살아야 할 은혜를 간구합시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염려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지하는 나의 종을 보라. 그분의 수난에서 예수을 지탱해 주시는 아버지께서는 또한 봉사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우리를 지지하신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가정과 사회에서 :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아 십자가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의 길은 우리가 구원받은 승리와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저는 특히 삼십오 년 동안 그들에게 헌신해 온 이 날에 젊은이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요즘 빛을 발하는 진정한 영웅들을 살펴보십시오 : 그들은 유명하고 부유하며 성공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삶을 선상에 올려 놓기 위해 자신을 부르십시오. 당신의 삶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불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릴 때에만 받는 선물이며, 우리의 가장 깊은 기쁨은 만약과 엉덩이 없이 사랑에 예라고 말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라고 말하는 것, ifs와 buts없이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한 것처럼.
[강론4]교황 프란치스코(2019)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자 기쁜 찬사와 굴욕감이 뒤따랐다. 축제의 울부짖음은 잔인한 고문으로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신비는 매년 성주간에 들어가는 우리의 입장과 함께, 오늘 축하의 두 가지 특징적인 순간, 즉 야자수 가지가있는 초기 행렬과 수난의 엄숙한 독서에 반영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운동에 들어가 개회 기도에서 우리가 구했던 은혜를 얻도록, 즉 우리 구주의 겸손의 모범을 믿음으로 따르고, 참을성 있는 고통에 대한 그분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서 악령에 대한 그분의 승리에 한 몫을 차지하도록 합시다.
예수 우리 마음 속에 분리나 초인간적 무감각이 아니라 생명과 자비를 베푸는 그분의 구원 뜻에 대한 자신감 있는 포기를 보존함으로써 어려움의 순간과 가장 교활한 유혹에 직면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그는 지상에서 성역을 베푸는 모든 시점에서,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려는 유혹을 자극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포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막에서의 사십 일의 체험으로부터 그의 수난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예수 아버지에 대한 순종적인 신뢰로 이 유혹을 거부하신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서, 악마, 이 세상의 왕자는 그의 소매에 카드, 즉 승리주의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길, 즉 겸손의 길을 굳게 붙잡으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승리주의는 지름길과 잘못된 타협으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승자의 마차에 뛰어 들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가니에서 위조되지 않은 몸짓과 말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끊임없이 열등하고, 원하고, 실패한다고 판단함으로써 자랍니다 ... 승리주의의 미묘한 형태 중 하나는 영적 세속성이며, 이는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가장 위험한 유혹 (De Lubac)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의 열정에 의해 승리주의를 파괴했다.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외치며 그분을 왕과 메시야로 칭송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백성들과 함께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의 열정과 흥분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추악한 비난에 대해 꾸짖으라고 요청한 바리새인들에게 "만일 이것들이 침묵하면 바로 그 돌들이 부르짖을 것이다"(루카 19,40)고 대답하셨습니다. 겸손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은 정말로 메시아, 왕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핵심은 또 다른 길, 즉 "하나님의 형상"에서 "종의 형상"으로 인도하는 길, 순종으로 태어난 자기 비하의 길, 즉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기까지"(빌 2:6-8)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벗기고, 스스로 비우는 것임을 알고 있다. 침묵을 지키고, 기도하고,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협상하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예수 자기 비하로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시고 그 길에서 우리보다 앞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그를 가장 먼저 따라간 사람은 첫 번째 제자인 어머니 마리아였다. 복되신 동정녀와 성도들은 믿음의 길을 걷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삶의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에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은 "특별한 마음의 무거움"을 수반한다( Redemptoris Mater, 17 참조). 믿음의 밤. 그러나 그날 밤부터야 우리는 부활의 새벽이 솟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아들에 대해 말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는 위대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의 보좌를 그에게 주실 것이요, 그가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요, 그의 나라에는 끝이 없으리라"(루카 1,32-33). 골고다에서 마리아는 그 약속을 완전히 부인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녀의 아들은 범죄자처럼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예수의 지하실에 의해 파괴 된 승리주의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파괴되었습니다. 둘 다 침묵을 지켰다.
마리아의 발자취에서 수많은 거룩한 남녀들이 겸손과 순종의 길에서 예수을 따라왔습니다. 오늘, 세계 청소년의 날, 저는 모든 젊은 성도들, 특히 하나님께만 알려진 우리에게 "옆집"의 성도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그는 그들과 함께 우리를 놀라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열정을 보여주고, 그분이 살아 계시며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이심을 외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의 길에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너희에게 너희 자신을 버리고, 모든 안전을 빼앗기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너희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기뻐하고 기뻐하라!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길에 있습니다.
축제 찬사와 잔인한 고문; 그의 수난을 통해 예수의 침묵은 심오하게 인상적입니다. 그는 또한 대답하고 "슈퍼 스타"처럼 행동하려는 유혹을 극복합니다. 어둠과 큰 환난의 순간에, 우리는 침묵이 온유하고 분노로 가득 차 있지 않은 한, 말하지 않을 용기를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합니다. 침묵의 온유함은 우리를 더욱 약하고 겸손하게 보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악마는 용기를 내어 열린 곳으로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를 저항해야하지만, 예수와 같은 태도로 그를 대적해야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왕자 사이의 싸움이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을 칼에 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굳건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싸우러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이 인계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한 장소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의 맨틀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기를 기다릴 때(마태 4,37-41 참조), 기도로 침묵하는 증거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한 설명"(벧전 3,15)을 드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약속한 것에 대한 기억, 십자가 안에 있는 고통, 부활의 소망 사이의 성스러운 긴장 속에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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