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주의

나뭇잎숨결 2024. 5. 26. 12:17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주의*

노양진 (전남대․철학)






1 머리말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상대주의라는 주제는 그 출발부터 복합적인 논의를 예고한다. 먼저 ‘상대주의’의 이론적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상대주의에 관한 논의는 지성사의 모퉁이마다 망령처럼 되살아나지만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상대주의라고 정형화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하자면 상대주의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는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술을 통해 상대주의를 직접적인 논의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철학적 태도를 상대주의라는 문제를 따라 다시 추적해야만 한다.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기의 객관주의적 의미 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체계의 다원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단순히 상대주의로 규정할 수 없다는 데 논의의 복합성이 있다. 오늘날 상대주의 문제는 상대적 변이를 인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믿음들에 대한 평가가 불가능한 허무주의를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중심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과연 이러한 우려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많은 비평가들은 오히려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드러나는 상대주의적 함의들을 사소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자체로 해소시키거나 또는 그것을 어떤 객관적 지반으로 흡수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이려는 것처럼 이러한 시도들은 상대주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서도 부적절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드러내는 철학적 관점이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아닌, 일종의 ‘완화된 상대주의’(modified relativism)의 한 유형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필자는 선행 연구를 통해 ‘신체화된 개념체계’(embodied conceptual system)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객관주의와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동시에 거부하면서도 상대성을 인정하는 ‘완화된 상대주의’라는 철학적 관점이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주의 문제의 핵을 이루고 있는 ‘삶의 형식’이 이러한 개념체계 모형에 의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완화된 상대주의’는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탐구를 이끌어 가는 일종의 철학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의 철학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철학적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철학적 탐구의 초점을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대한 관찰과 기술로 옮겨가고 있으며, 이러한 전환을 통해 완화된 상대주의가 훨씬 더 적절한 철학적 탐구의 시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2 의미의 다원성과 상대주의의 문제

상대주의는 흔히 객관주의에 대립되는 견해로 이해된다. 20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제기된 도전 속에서 전통적인 객관주의는 이제 지배적인 지적 주류의 자리를 잃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모든 지적 탐구에서 하나의 단일한 척도나 기준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객관주의를 거부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다수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기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런 기준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적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것을 진지한 철학적 대안으로 간주하는 철학자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준을 거부하려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다수의 기준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시각을 흔히 ‘다원주의’(pluralism)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에서 후기에로의 철학적 이행, 특히 의미 문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시각은 객관주의에서 다원주의에로의 전환이다. 판(K. T. Fann)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전환을 “분석을 통해 유사성들(similarities)을 찾는 대신에 …… 구분에 의해 차이점들(differences)을 드러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러한 다원주의가 적절한 제약을 설정하지 못했을 때 원리적으로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허용하게 된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을 극단적인 상대주의자가 아닌, 건강한 다원주의자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드러내는 상대주의적 전향이 어느 지점에서 제약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논리 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언어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언어는 ‘세계의 논리적 그림’으로 이해되며, 이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의미 이론을 흔히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언어의 기능은 우리의 언어와 독립된 외부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며, 이 반영이 가능한 것은 언어와 세계가 ‘대응’이라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밖에 있는 객관적 세계와의 관계에 의해 확정되며, 따라서 의미는 ‘객관적’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객관주의적 의미 이론과 진리 이론을 유지하는 기본적 틀로 작용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대변하는 ?철학적 탐구?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의미 이론은 ?논고?에서의 의미 이론과는 화해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환을 이룬다. 전기에서 의미의 소재를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다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구도 자체를 버리고 의미의 소재를 언어와 언어 사용자인 인간의 관계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즉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 방식으로부터 의미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탐구?에서 제안된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이론을 흔히 ‘사용 이론’(use theory)이라고 부른다. 언어의 의미가 자신이 ?논고?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사용자에 앞서 고정된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적 상황 안에서 언어의 실제적 사용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이라는 독특한 은유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언어게임이란 어떤 말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조건들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언어적 상황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을 적극적으로 정의하는 대신에 그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탐구?: 23절). 이 사례들은 언어의 다양한 목적이나 용도 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들을 단일한 척도로 수렴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도 변화한다”고 말한다. 마치 장기에서의 말 또는 한 수가 전체적인 장기 게임이라는 일련의 규칙에 의해서만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어떤 단어나 문장도 한 언어게임 안에서만 특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언어게임들을 사용하며, 따라서 언어의 의미 또한 이러한 다수의 언어게임들 속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한 단어 또는 문장의 의미를 결정하는 다수의 체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은 우선 한 단어 또는 문장의 의미가 단일하게 고정된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의미 결정의 방식이 다원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며, 그것은 그만큼 ‘상대주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아무런 단서 없이 단순히 ‘상대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주의는 흔히 다수의 체계들이 존재하며, 이 체계들 사이에 아무런 객관적 평가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쿤(T. S. Kuhn)의 용어를 빌면 체계들간의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언어게임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 해석은 리오타르(J.-F. Lyotard)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리오타르는 언어게임들 사이에 공약 불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공통의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다수의 담론 상황을 인정한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우호적인 대부분의 비평가들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집중된다. 예를 들면, 크라우츠(M. Krausz)는 다양한 의미 체계를 허용하는 것이 그 자체로 반드시 상대주의를 야기하지는 않는다는 독특한 주장을 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체계의 다양성은 객관주의와도 상대주의와도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체계의 다양성은 왜, 또 어떤 방식으로 평가의 기준이 소멸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빈번히 이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욱 확장된 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히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보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변은 우선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다양한 체계는 우리로서는 그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원초적 다양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본능이 먼저이며 추론은 그 다음이다. 언어게임이 생길 때까지 근거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게임이 우리가 흔히 ‘이성적’이라고 부르는 정신 활동의 최종적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추론의 정당성은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언어게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드러나는 상대주의는 크라우츠가 원하는 것처럼 ‘여전히 열려 있는 하나의 기준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단일한 평가 척도의 가능성에 대한 거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언어게임을 포괄하는 하나의 척도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인정하는 상대적 변이들의 존재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공통적인 지반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가 부적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대주의가 단순히 허무주의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여전히 그러한 상대적 변이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변이들에 대한 제약을 설정할 수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이 상대주의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번(G. Bearne)의 대답은 동시에 긍정이며 부정이다. 데이빗슨(D. Davidson)의 반상대주의 논의의 두 핵심적 축은 한편으로는 ‘자비의 원리’를 수용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실재의 구분이라는 ‘경험주의의 제3의 도그마’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이 두 축을 근거로 상대주의에 대해 강력한 반론으로 나아가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축을 공유하면서도 여전히 ‘온건한 상대주의’(moderate relativism)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퍼트남(H. Putnam)은 비트겐슈타인의 ?확실성?에서의 몇몇 언급을 들어 언어게임들 사이에 명백한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때 퍼트남이 말하는 상대주의가 허무주의를 함축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상대주의라는 점이다. 퍼트남은 다양한 평가 체계들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모든 평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퍼트남의 견해는 일종의 ‘완화된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난점은 그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이 체계들간의 평가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선언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 그것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어떤 지점에서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한 체계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사람은 없으며, 또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상대주의적 태도가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안에서 그러한 상대적 분기가 어떻게 제약될 수 있는지를 보여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떻게 쿤이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제기하는 ‘공약 불가능성’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체계들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이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적어도 이 문제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3 삶의 형식과 다원성의 제약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허무주의로 전락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제약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어느 지점에서 가능한지를 보여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것이 ‘삶의 형식’(form of life)이다. ‘삶의 형식’이라는 말 자체는 ?탐구? 안에서 모두 다섯 번밖에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언급도 파편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삶의 형식의 전반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삶의 형식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해석하는 것은 상대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먼저 삶의 형식의 본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 언급들을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탐구?: 19)

그리고 언어 안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다.(?탐구?: 241)

내가 논거들을 다 소진하면 나는 암반에 도달하게 되고 나의 삽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그저 이렇게 하고 있어”.(?탐구?: 217)

우리의 모든 믿음에 대한 논거는 어디에서인가 멈춘다. 여기에서 우리의 삽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지점, 즉 우리의 논거가 소진되는 그 지점이 바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즉 주어진 것’(?탐구?: 336쪽)으로서 삶의 형식이다. 우리가 하나의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지반이 바로 삶의 형식이다. 적어도 ?탐구?에서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토대로 우리는 삶의 형식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① 삶의 형식은 다양한 언어게임들의 작동 조건이다.
② 삶의 형식은 실제적 논거들의 궁극적 지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삶의 형식의 외형적 성격에 관한 언급일 뿐 과연 삶의 형식이 내용과 구조에 관한 구체적 설명은 아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비평가들 사이에 지나치리 만큼 복잡한 논의와 해석이 오고간다. 그러나 상대주의 문제와 관련된 논의에서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이 하나인가 다수인가 하는 물음이다. 만약 논거의 궁극적 지반으로 작용하는 삶의 형식이 다수라면 그것은 분명히 공약 불가능한 척도들을 인정하는 것이 되며, 그 경우 비트겐슈타인이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삶의 형식이 하나뿐이라면 삶의 형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대적 변이들의 공통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대적 변이들은 사실상 표피적이거나 사소한 것으로 해소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 가버(N. Garver)와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간이라는 종(種)에 삶의 형식이 하나뿐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삶의 형식을 단순히 자연적 조건들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이 유사한 자연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이 자연적 조건들만의 집합이며, 따라서 삶의 형식이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삶의 형식이 자연적 차원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형식이 문화적 차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버의 상세한 논의는 삶의 형식이 하나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입증하기보다는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다수의 삶의 형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만으로는 확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가버의 복합적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이라는 말의 사용이 의도적이면서도 해결 불가능하게 모호하다는 주장으로 집약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연적 조건들만으로 구성된 하나의 삶의 형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가버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에 의해 지지되기보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시각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삶의 형식은 어떤 구조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선 삶의 형식이 가질 수 있는 중층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명현은 삶의 형식이 포괄하고 있는 원초적 국면과 문화적 국면의 대립적 긴장을 매우 선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두 층위의 중층적 공존을 인정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이명현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실재론적 객관주의와 문화론적 상대주의 사이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삶의 형식의 이러한 중층적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 그 자체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상대주의 문제를 해소해 주거나 해결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드러나게 되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상대주의 문제와 관련해 진전된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교두보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삶의 형식의 중층성을 수용하는 또 다른 전향적 해석의 가능성은 썰(J. Searle)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썰은 의미의 구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네트워크’(Network)와 ‘배경’(Background)이라는 색다른 개념을 소개한다. 네트워크가 한 믿음의 충족 조건을 결정하는 믿음들의 체계라면, 배경을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일련의 능력들 또는 조건들의 집합이다. 썰은 여기에서 이 배경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과 유사한 것임을 직접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배경을 ‘심층(deep) 배경’과 ‘국지(local) 배경’의 두 층위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심층 배경은 대부분 우리의 생물학적 조건 등을 가리키며, 국지 배경은 문화적으로 고착된 다양한 관행을 가리킨다. 이러한 배경이 네트워크 구성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지만, 적어도 썰의 논의를 통해 삶의 형식이 어떤 방식으로 두 층위를 포괄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진전된 해명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썰의 경우도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대부분 객관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삶의 형식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객관주의적 지반으로 간주하거나 다수의 삶의 형식을 인정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져드는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삶의 형식의 중층성에 대한 적절한 해명을 통해 우리는 다수의 삶의 형식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개념체계로서의 삶의 형식

삶의 형식의 중층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삶의 형식이 포함하고 있는 문화적 층위의 성격이다. ?탐구?에서 보이는 삶의 형식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들만으로는 이 부분을 해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의 형식을 다루는 데 있어서 흔히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일상적 논거의 궁극적 지반으로서의 삶의 형식과 확실성 문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과의 긴밀한 상관성이다. 필자는 이러한 상관성에 주목함으로써 확실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이 삶의 형식에 대한 보완적 해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탐구?의 다음 구절을 보자.

우리는 어떤 사람에 관해서, 그는 우리에게 투명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완전한 수수께끼일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고찰을 위해 중요하다. 이 점을 우리는 완전히 낯선 전통을 가지고 있는 어떤 외국에 갈 때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나라의 언어에 통달해 있는 경우에조차도 경험한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익숙해질 수가 없다.(?탐구?, 331-32쪽)

우리가 낯선 전통을 가진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낯선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극적인 이해 불가능성을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나라의 언어에 통달해 있는 경우에조차도 경험하게 되는 이해 불가능성이 단순히 언어게임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물론 아닐 것이다. 그 낯선 원주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탐구? 23절에서 제시되었던 다양한 언어게임들 중의 어떤 낯선 하나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과 우리가 상이한 자연적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가버는 여전히 이러한 이해 불가능성에 대해 “그 관행들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것들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즉 이 구절이 삶의 형식의 다수성을 확정적으로 함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버의 이러한 주장은 삶의 형식이 다수라는 주장이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 그 자체로 어떤 적극적인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가버의 이러한 해석은 풀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수수께끼를 불러온다. 가버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확실성의 지반이 학습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학습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이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가버는 이렇게 학습된 부분을 삶의 형식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렇다면 가버의 주장처럼 자연적 조건으로만 구성된 삶의 형식과 확실성의 궁극적 지반이 되는 이 문화적 부분은 어떻게 화해될 수 있을까? 가버의 주장을 따른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적 조건으로만 구성된 삶의 형식 외에도 또 다른 문화적 층위의 확실성의 지반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결과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론적 곤경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된다.
유사한 태도는 커크(R. Kirk)에게서도 드러난다. 커크는 콰인의 번역의 비결정성 이론의 핵심이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담겨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탐구? 206절에 근거해서 삶의 형식을 객관적 번역의 근거로 해석한다.

당신에게 전혀 낯선 어떤 언어를 가진 미지의 나라에 당신이 조사자로서 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 당신은 그 사람들이 명령을 하며, 명령을 이해하며, 따르며, 명령에 반항하는 따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인간의 공통적인 행동 방식은 우리가 우리에게 낯선 어떤 하나의 언어를 해석할 때 의거하는 준거 틀이다(?탐구?: 206).

커크는 이 구절을 통해 콰인과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간다. 즉 커크는 비트겐슈타인이 이 구절을 통해 “삶의 형식과 부분적 실천이 의미와 번역을 결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커크는 ‘공통적인 행동 양식’을 ‘삶의 형식’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객관적 번역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커크는 하나의 삶의 형식과 확정적 번역의 가능성을 향한 성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원초적 번역 상황에서 ‘공통적인 행동 방식’이 번역을 위한 충분한 자료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자료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삶의 형식이 단순히 자연적 조건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이 다루고 있는 확실성이 ?탐구?에서 언급된 삶의 형식의 기본적 성격, 즉 일상적 논거의 궁극적 지반이라는 사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확실성이라고 강조하는 지점들이 바로 우리의 논거가 멈추는 지점들, 즉 삶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탐구?에서 삶의 형식에 관한 언급들의 모호성은 ?확실성?과 ?제텔?(Zettel)에서의 언급들을 통해 대부분 제거된다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확실성이 어떤 이성적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과 설득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어떤 하나의 가정에 대한 모든 검사, 모든 확증과 반증은 이미 어떤 하나의 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이 체계는 우리의 모든 논증들을 위한 다소 자의적이고 의심쩍은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논증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에 속한다. 그 체계는 논증들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논증들의 생명소이다(?확실성?: 104).

어린아이는 수많은 것들을 믿는 일을 배운다. 즉 아니는 예컨대 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걸 배운다. 아이가 믿는 것들의 체계가 조금씩 조금씩 형성되어 나타나며, 그 속에서 어떤 것들은 움직일 수 없게 확고하고 어떤 것들은 다소간 움직일 수 있다. 확고한 것이 확고한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명백하거나 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에 의해서 그것이 꽉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확실성?: 145).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리고 자연을 보는 우리의 방식이 전체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렇게 믿을 것이다(?확실성?: 291).

확실성과 관련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생각들이 수렴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확실성, 좀더 구체적으로는 근세의 인식론이 추구했던 종류의 필연적 확실성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 하는 것은 우리의 앎의 정당화는 어디에선가 멈출 수밖에 없으며, 그 지점은 결코 우리가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설정한 추상적 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지식이 실제적 근거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것이 멈추는 지점을 우리의 경험적 세계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의 확실성이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확실성의 지반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즉 주어진 것”(?탐구?: 336쪽)으로서의 삶의 형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확실성의 궁극적 지반이 교육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생각은 ?제텔?에서도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즉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계상(picture of the world)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상의 차이는 물론 단순히 구체적인 개념들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를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이러한 포괄적인 세계상이란 삶의 형식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을까?

우리와 매우 다른 교육은 매우 다른 개념들의 기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제텔?: 387)

왜냐하면 여기에서 삶은 다르게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그들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개념들은 더 이상 상상 불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이것이 다른 개념들이 상상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방식이다.(?제텔?: 388)

우리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자라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예를 들면 지구는 50년 전에 발생했다―을 배우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구가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고 그를 가르칠 수도 있다. 그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세계상(picture of the world)을 그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설득을 통해서 가능하다.(?확실성?: 262)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세계상이 교육과 설득을 통해 주어지며, 또 부분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들 또는 그것에 근거한 믿음들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탐구?에서 기술하려고 했던 삶의 형식의 핵심적 일부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우리의 실제적 확실성의 지반을 이루는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만약 문화적인 것들이 삶의 형식의 일부가 아니라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삶의 형식과는 분리된 문화적 확실성의 지반을 따로 설정해야만 하는데,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또 다른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될 것이다.
삶의 형식에서 자연적 층위와 문화적 층위가 문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객관주의 또는 상대주의를 규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 안에서 이해되어 왔다. 상대주의가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구도 안에서 허무주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객관주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 상대적 변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적 우려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될까?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는 이 물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체험주의는 주로 인지과학이 제공하는 경험적 증거들을 토대로 우리의 경험의 구조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제공한다. 체험주의의 핵심적 기여는 우리 경험을 물리적․신체적 층위와 추상적․정신적 층위로 구분하고 우리의 모든 경험이 물리적 층위의 경험에 근거해서 점차 추상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러한 확장은 대부분 은유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출발했던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슨(M. Johnson)은 이러한 확장을 설명하기 위해 ‘영상도식’(image schema)과 ‘은유적 투사’(metaphorical projection)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한다. 즉 우리의 신체적 활동으로부터 직접 발생되는 소수의 영상도식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은유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추상적 경험이 모두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두 신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몸은 우리의 모든 경험의 원천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경험을 제약한다.
체험주의의 이러한 시각은 개념체계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명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우리가 일상적 판단의 궁극적 논거로 사용할 수 있는 배경적 조건들로서의 개념체계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경험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경험과 행동의 안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삶의 형식은 물리적 차원의 조건은 물론 그것으로부터 확장된 추상적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필자는 체험주의적 시각을 빌어 이처럼 중층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체계의 모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pqBrs

여기에서 각각 다른 개념체계들은 C1 = B + p, C2 = B + q, C3 = B + r, C4 = B + s로 표시되는데 각각의 개념체계들은 B라는 공통 지반, 즉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경험 영역을 공유하면서도 소문자로 표시된 상대적 변이의 영역을 포함한다. 즉 모든 개념체계들은 신체적․물리적 차원에서의 보편적 요소와 정신적․추상적 차원에서의 변이라는 두 차원을 포괄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추상적 차원은 물리적 차원으로부터 확장되어 나타나며, 이 때문에 항상 물리적 차원에 근거하면서도 물리적 차원에 의해 제약된다. 이러한 모형은 개념체계를 평면적인 개념들의 도식적 집합체로 간주함으로써 우리를 객관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딜레마에 묶어 두려는 데이빗슨의 주장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형을 ‘신체화된 개념체계’(embodied conceptual system)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완화된 상대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정당화의 궁극적 지반으로 제시하는 삶의 형식을 이러한 모형에 따라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형은 적어도 삶의 형식이 자연적 조건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평면적인 개념체계 개념에 묶여 있는 주장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이 모형은 왜 삶의 형식이 믿음의 궁극적 지반으로 작용하면서도 여전히 다수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모든 삶의 형식들은 유사한 물리적 차원을 공유하지만 그것들의 추상적 차원으로의 확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모형에 따르면 상대적 변이들은 물리적 층위에 접근할수록 감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형은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을 물리적 층위, 즉 ‘인간의 자연사’ 부분으로 국한시키려는 시도와는 매우 다른 방향을 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중층적 구조를 한데 묶어 ‘삶의 형식’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은 문화적 변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삶의 형식의 이러한 중층성은 전통적인 객관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 부적절한 견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말하자면 우리 경험은 객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의 모형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실상 ‘완화된 상대주의’(modified relativism)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각에 의해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이 두 견해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두 차원이 공존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이러한 시각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해명하는 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전통적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모두 우리의 극단적 이상화의 산물일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말고 보라!”(?탐구?: 66)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객관주의로 묶을 수 있는 과거의 철학적 이론들이 ‘철학적 열망’에 사로잡힌 것이며, 이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적 경험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 부적절한 것임을 보이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관찰과 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이론들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 부적절한 관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의 삶의 구조에 관해 과거의 이론들이 불러왔던 혼동을 걷어내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객관주의 또는 상대주의(나아가 허무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이론적 구도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을 ‘완화된 상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철학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5 완화된 상대주의의 길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의 철학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자가 아니라 강력한 해체론자다. 비트겐슈타인을 해체론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철학 비판이 특정한 과거의 몇몇 이론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철학적 가정들에 대한 근원적 거부라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론에 매우 가깝게 근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체가 “철학적 무책임”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해체가 궁극적으로 복귀해야 할 지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복귀하려고 애썼던 지점은 우리 삶의 ‘일상성’이다. 말하자면 그는 파리통에 갇힌 파리를 해방시키려고 했으며 그 해방이란 조건 없는 해방이 아니라 파리통에 갇히기 전의 일상적인 상태에로의 복귀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적 물음에 빠진 철학자들이 ‘언어에 의한 지성의 미혹’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해체는 사상누각을 무너뜨림으로써 그 터전을 좀더 굳건히 다지려는 시도다.(?탐구?: 118)
그렇다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의 위협은 어떠한가? ‘일상성’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대안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일상성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상대주의적 위협으로부터 막아 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한다. 앞서 논의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성은 특정한 삶의 형식 안에서의 일상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성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의 자연적 조건을 들 수 있으며, 그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우리의 ‘신체화’(embodiment)다. 즉 몸은 우리의 존재 가능성의 터전으로서 신체적 활동의 주체인 동시에 물리적 세계와의 직접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출발점이다. 이러한 신체성은 물리적 세계만큼이나 경험의 ‘공공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공공성이 ‘정초주의적’(foundationalist) 객관주의자가 가정하는 인식의 정초는 물론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듀이를 따라 이러한 신체성이 그것을 토대로 한 정신적 활동과 엄밀한 방식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상호작용 관계에 있다는 ‘연속성의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해명은 우리의 삶에 객관주의적 이상화를 촉발시키는 공공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상대적 변이를 허용하는 중층적 구조를 드러내 준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바로 우리 경험의 이러한 중층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객관주의에 의해서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에 의해서도 적절하게 해명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탐구를 통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으며, 우리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철학적 시각―하나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을 ‘완화된 상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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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지]: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주의」. ?철학?, 제75집 (2003 여름) (게재 예정)



【주제분류】언어철학, 철학방법론
【주요어】비트겐슈타인, 완화된 상대주의, 신체화된 개념체계, 삶의 형식
【요약문】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완화된 상대주의’의 한 유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언어게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이론이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우호적인 철학자들은 그것이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위해서 핵심적으로 선결되어야 할 것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려는 상대적 변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약되는지를 해명하는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난제의 실마리가 ‘삶의 형식’을 적절히 해석하는 데 있다고 보며, 이러한 목적으로 삶의 형식이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제시된 ‘신체화된 개념체계’ 모형에 합치된다는 것을 보였다. 즉 삶의 형식은 자연적 층위와 문화적 층위의 중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중층성은 자연적 층위로부터 발생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제약되는 상대적 변이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철학적 시각을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아니고 허무주의적인 상대주의도 아닌, 일종의 ‘완화된 상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