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의 미래

나뭇잎숨결 2024. 5. 26. 12:17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의 미래

 

 

 

 

노양진 (전남대・철학)






1 머리말

철학사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철학사라는 커다란 흐름에서 하나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절은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을 관통해서 드러나는 ‘철학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독특한 철학 개념에서 비롯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이론화’라는 목표를 포기해야 하며, 대신에 우리의 그릇된 사고 방식에 대한 자기 비판으로서 전통적인 철학적 방법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활동’(activit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철학적 이론들에 의한 혼동이 마치 질병처럼 과거의 철학자들을 사로잡고 있었으며, 이제 새로운 철학자는 마치 의사처럼 언어에 의해 발생한 그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철학 개념을 우리는 흔히 ‘치유적 철학’(therapeutic philosophy)이라고 부른다.
전통 철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불신과 회의는 철학적 방법에 대한 금세기의 반성적 논의에 심중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철학이 더 이상 이론화를 목표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히 급진적이며, 이러한 철학 개념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의 철학적 탐구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에 관해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치유’ 개념이 담고 있는 문제 의식을 ‘이론의 크기’라는 맥락에서 해명하고, 나아가 철학적 탐구의 방향과 관련된 그의 제안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철학적 환상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적 ‘그림’을 제시하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 철학이 추구했던 환상들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에 의해 가려졌던 ‘일상성’이라는 우리의 지반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가 제안하는 전환의 요체는 우리의 지반으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 철학을 다시 우리 곁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적 복귀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조건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철학적 환상과 치유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보는 철학의 역사는 ‘혼동’의 역사다. 그 ‘혼동’의 내용과 방식은 그의 전기와 후기 사상에서 상이한 형태로 설명된다. ?논리 철학 논고?에서 이 혼동의 핵심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후기의 ?철학적 탐구?에서는 오히려 ?논고?가 제시하는 대안적 언어관을 포함한 ‘철학적 열망’이 혼동의 주된 원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적어도 철학의 역할이 이러한 혼동의 교정을 위한 활동이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전기와 후기 사상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전통적으로 제기된 철학적 물음들이 언어적 오해의 산물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논고?: 서문)를 해소시키려는 노력이라고 규정한다. ?논고?의 중심적 주제의 하나인 의미/무의미 구분의 주된 목표는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로 표현됨으로써 초래되는 오해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언어적 표현에 의한 논리적 구조의 은폐를 본성적인 현상으로 보며, 이것을 마치 발성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지를 모르면서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성하는 것에 비유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언어에 은폐된 논리적 구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본다.(?논고?: 4.002) 철학자는 바로 이러한 숨겨진 언어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오해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논고?: 4.002)

일상적 언어의 문법적 구조가 그 근저에 놓여 있는 논리적 구조를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B. Russell)로부터 배운 것이다. 러셀은 “모든 철학적 문제는 필연적 분석과 정화를 거치면 전혀 참된 철학적 문제도 ······ 논리적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연구실 한가운데에 책상이 있다”와 “초월적 세계에 절대자가 있다”라는 두 주장은 ‘있다’라는 동일한 말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문장이 둘 다 참이라 하더라도 과연 책상과 절대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방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가 이러한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러셀과 함께 이러한 생각을 철학적 사유의 계기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적 결론에 있어서 그들은 방향을 달리 하게 된다. 말하자면 러셀은 논리적 원자론자로서 여전히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세계의 기본 구조를 해명하는 체계적 작업의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체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탐구를 하나의 ‘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명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논리적 구조 또는 그 무엇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철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체계 건설도 이론 구성도 지식 획득도 아니다. 철학은 다만 언어가 숨기고 있는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논리적 명료화’라는 하나의 활동일 뿐이다. 그리고 그 활동의 내용은 ‘언어 비판’(?논고?: 4.0031)이다.
?논고?와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해결해야 할 철학적 문제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철학을 떠났다. 그는 ?논고?를 통해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은둔기를 통해 ?논고?에서의 자신을 포함한 철학자들의 문제들을 새롭게 다루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해소’를 위해 그가 건설했던 것들이 또 하나의 철학적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철학적 사색의 계기를 언어적 혼동에서 비롯되는 ‘당혹’(puzzlement)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는 철학적 문제들을 일종의 질병에 비유한다.(?탐구?: 255)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언어의 본성은 무엇일까? 그는 언어를 우리의 삶의 중심적 도구로 간주한다. 따라서 언어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삶의 연관 속에서만 그 본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사용’(use)이다.(?탐구?: 43) 즉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다양한 맥락에서 구체적 용도를 가질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얻는다. 그것은 ?논고?가 추구했던 것처럼 언어가 정교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해명될 수 있는 추상적 실재들의 구성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실적 도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가 삶의 구체적 사실들의 지반을 떠나 헛돌고 있을 때 불필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불러온다.(?탐구?: 38, 132)
철학적 문제라는 질병의 징후는 당혹과 혼동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병의 원인으로 철학자들의 ‘일반성에의 열망’(craving for generality)을 든다. 이러한 열망에 의해 철학자들은 세계, 존재, 선, 진리, 옳음 등의 철학적 문제들을 하나의 기준에 의한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론들이 단순히 ‘일반성’을 추구한다는 점이 아니라 ‘열망’에 의해 구성된 이론을 낳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열망의 산물은 ‘이상들’(ideals)이다. 이상은 물론 그 자체로 유용성을 갖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삶의 척도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러한 본성을 넘어서 우리에게 부과될 때 하나의 혼동을 초래한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의 것’의 혼동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열망’을 표출하는 이론이 그 본성을 넘어서 하나의 독단으로 자리잡고, 나아가 그것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기술’하는 이론을 자임하게 되면서부터 오히려 우리 자신을 왜곡하고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그 혼동의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언어의 사용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언어를 통한 우리의 본성의 발현도 그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의해 가려진 혼동이라는 함정들을 보았으며, 그러한 함정들을 드러내는 것이 철학자의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철학적 이론의 본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진단은 분명히 진지하게 경청할 만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종종 철학적 문제들 앞에서 경험하는 답답하고 혼미한 ‘사유의 체증’의 소재를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철학이 더 이상 이론화의 작업이 아니며,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는 그의 급진적 주장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작업의 핵심적 줄기로 이해되어 왔던 ‘비판’과 ‘대안적 이론 건설’이라는 이중적 목표의 하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손에 의해 철학의 미래는 박탈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그가 우리에게 남겨 둔 것은 무엇인가?


3 일상성과 이론의 크기

이제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철학적 열망의 산물들인 ‘이론들’은 제거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긍정 또는 부정의 답을 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이 물음과 관련해서 좀더 신중하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열망을 우리의 조건으로부터 비롯되는 본성의 하나라고 간주하는 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이론화라는 본성이 아니라, 그 산물인 철학적 이론들이 제시하는 ‘환영’들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단어들을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일상적 사용으로 되돌리려는 것”(?탐구?: 116)일 뿐이다. 즉 그는 철학적 이론화에 의해 오염된 우리의 언어를 본래 고향인 언어 게임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에게 ‘모든 이론화의 거부’라는 급진적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추방하려는 이론은 우리를 넘어서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적 언어 게임을 벗어난 초월적 이론들이다. 그래서 ?탐구?에로의 전환과 함께 철학은 우리와 전적으로 독립된 대상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철학의 ‘자기 유배’를 벗어나 우리 삶의 일상적 양상들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우리가 복귀해야 할 ‘일상성’은 어디쯤이며, 그곳에서 우리의 철학적 작업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이론도 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고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 기술은 그것의 빛, 즉 그것의 목적을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받는다. 그것들은 물론 경험적 문제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 언어의 작용을 살펴봄으로써, 나아가 그 작용을 오해하려는 충동에 대항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작용을 인식하게 하는 방식에 의해서 풀린다. 이러한 문제들은 새로운 정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들을 정돈함으로써 풀린다. 철학은 언어에 의한 우리의 지성(知性)에 미혹에 대한 투쟁이다.(?탐구?: 109, 고딕은 원문의 강조).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철학은 우리의 지적 작업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선결적 활동이며, 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의 기술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일 뿐이며 우리는 그것들이 서 있는 언어의 대지를 청소하고 있다”(?탐구?: 118)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마도 그릇된 허상의 건물들을 무너뜨림으로써 말끔하게 청소된 대지를 보여 주는 것이 철학자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페어스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새로운 철학은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사막으로부터 돌아 왔다. 낯익은 것들을 바르게 기술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더 이상 우리를 넘어선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표는 단일한 ‘그림’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주어진 채로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아마도 체계적일 수 있으며, 이론의 형태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이론들과 다른 점은 우리 앞에 놓인 것들을 우리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기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탐구?: 124)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하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은 듀이적인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이며, 동시에 메를로 퐁티적인 의미에서 현상학적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제안을 ‘이론의 크기’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1) 이론의 크기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크기는 무한정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도형을 쪼개 나누는 방법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개념들의 크기는 곧 그 개념들을 포함하는 이론의 크기를 결정한다. 나는 내가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꽃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한데 묶어 ‘책병’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 무등산이 보이는 찻집에 앉은 여자의 코와 무등산을 한데 묶어 ‘무등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강과 산[江山]을 묶으며, 때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하늘과 땅[天地]을 함께 묶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반대로 일상적으로 하나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을 더 작은 대상으로 나누는 것도 항상 가능하다. 우리가 신체의 부분들을 손톱, 손가락, 손마디, 손등, 손바닥, 손목 등으로 나누어 부르든 한꺼번에 묶어 ‘손’이라고 부르든 어느 쪽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책병’이나 ‘무등코’는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개념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의 모든 개념화는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대상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명명식’(baptism) 단계에서 이름은 ‘자의적 기호’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적으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대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로 ‘대상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념의 크기는 그것을 포함하는 이론의 크기를 결정한다. 앞서의 개념화 방식이 가능하다면 나는 아주 쉽게 세계에 관한 단일한 기술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단어가 필요하다. 그것을 ‘전물’(全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전물이 존재하는 모든 방식을 한데 묶어 ‘전재(全在)하다’라는 동사를 만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가능하다.

① 전물이 전재한다.

이제 ①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폭넓은 기술이 된다. “한국의 대통령은 표준말을 못한다”, “담배는 마약이다”, “철학은 활동이다”와 같은 무수히 많은 문장들의 주장 내용이 사실은 ①의 주장 내용의 부분 집합에 불과하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 세계 전부에 관해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일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논리적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이론적으로 동등하게 가능한 개념화들 중에 실제적으로 어떤 개념화는 수용되는 반면 어떤 개념화는 거부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선택에 논리적 분석을 넘어서는, 또는 논리적 분석을 거부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명료성’(clarity)을 살펴보자.(?탐구?: 329/영어본 221) 즉 “갓난아이는 이빨이 없다”, “거위는 이빨이 없다”, “장미는 이빨이 없다”라는 문장들은 모두 참이다. 마지막 문장은 사실상 앞의 어느 것보다도 더 명백한 참일 수 있지만 그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 이 모든 문장은 문법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가능하다. 그러나 이 문장이 의미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구체적 상황이 어떤 것일지가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경험적 삶의 조건 안에서는 장미는 이빨이 없으며, ‘이빨이 있는 장미’를 상상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장 자체보다는 그 문장 내용의 배경에 해당되는 부분이 우리의 의미 결정에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나아가 기술(記述)은 본성적으로 무엇인가를 ‘부각’(highlighting)시키며, 이러한 부각은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은폐’(hiding)되는 배경적인 요소들과 항상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어떤 기술의 의미는 금세기의 분석 철학자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문장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언어 표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경적 요소들을 은폐하고 있으며, 이것이 언어의 본성의 하나이기도 하다. 철학적 문제는 바로 언어의 이러한 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 철학적 탐구를 사로잡은 문제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일상성 안에서의 구체적 사용’이라는 기준으로 대처한다. 말하자면 앞의 문장들은 우리의 일상적 사용을 벗어나는 것들이며, 따라서 그만큼 의미의 계기를 잃고 있다. 다이아몬드(C. Diamond)의 표현을 빌면 이러한 문장들은 ‘우리 자신과의 합치’(agreement with ourselves)를 벗어난 것들이다.
아마도 앞의 문장 ①은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따른다면 ‘철학적 열망들’의 추동력에 의해 쉽사리 고양(高揚)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열망에 의한 그러한 상승은 항상 우리의 일상성으로부터의 그만큼의 거리를 의미한다. ?논고?(6.54)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의 비유는 이제 새로운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상승을 시도했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했던 사다리를 던져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출발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의미 있게 선택할 수 있는 크기의 개념과 이론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그러한 크기를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철학적 혼동’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우리의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는 우리의 기본적 조건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언어는 본성적으로 그러한 괴리를 은폐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언어의 무비판적 사용은 우리를 혼동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적 철학 이론들이 낳은 질병들이다.

2) 인간의 조건

이론의 크기는 인간의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크기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인간의 조건에 대한 반성적 탐구는 불가결한 과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원초적’(primitive) 조건들에 관심을 돌린다. 인간은 분명히 신체적인 유기체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체의 존재 방식에는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원초적’이라고 간주할 만한 요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그 자체로 ‘철학적’이 아니며, 매우 소박한 삶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개념과 사고는 이러한 지반 위에서 이해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그 지반을 떠나 버린 개념과 이론들은 마치 실이 끊긴 연처럼 아무런 제약도 없이 허공을 자유롭게 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연이 아니다. 가장 높이 나는 화려한 연이 우월한 연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느다란 한오라기라 할지라도 연실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연’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가 걷기 위해서는 마찰이 있는 거친 땅이 필요하다.(?탐구?: 107)
아마도 이러한 지반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크기’에 관해 좀더 실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반의 중요한 부분은 우리 자신의 원초적 조건이다. 말하자면 시・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신체화되어 있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조건에 속하며, 우리의 모든 개념과 사고는 이러한 지반 위에서만 그 ‘의미’를 얻는다. 즉 우리 자신의 크기는 우리가 현재 주어진 대로의 조건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당벌레나 지렁이 또는 망치머리 박쥐가 우리와 동일한 크기의 사물을 갖는다―즉 개념화한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그것들과 우리가 갖는 원초적 조건의 차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처럼 원초적 조건의 유사성이 전혀 낯선 언어를 동화하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다면(?탐구?: 206), 그것은 동시에 언어의 상이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준거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의주의, 특히 ‘보편적 회의주의’(global scepticism)라고 불리는 철학적 괴물은 성공적으로 논파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론의 크기라는 관점에서 적절하게 대처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보편적 회의주의자는 항상 ‘앎’의 기준인 확실성을 우리를 넘어선 지점에 설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원천적으로 그 회의주의에 대한 답변의 가능성을 봉쇄 당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회의주의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회의주의자가 설정하는 기준을 거부함으로써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처에 핵심이 되는 것은 그 회의주의자의 기준이 ‘우리의 크기’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퍼트남이 제기한 ‘통 속의 두뇌’(Brains in a Vat)라는 사고 실험을 살펴보자. 통 속에 두뇌가 있고 이 두뇌는 통 밖의 슈퍼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 컴퓨터로부터 모든 자극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그 두뇌는 마치 자신이 실제 글을 쓰고 식사를 하는 것 같은 환각을 갖는다. 퍼트남의 이 사고 실험은 물론 회의주의 문제를 다룰 목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의 ‘사악한 사탄’ 논증을 연상하게 한다. 이제 물음을 바꾸어 그 두뇌가 갖는 ‘의미 있는 경험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묻기로 하자.
퍼트남의 사고 실험의 전제 조건은 그 두뇌가 통 속에만 있어야 하며, 따라서 그 두뇌가 근원적으로 통 밖의 슈퍼컴퓨터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어떤 경로로든 그 두뇌가 슈퍼컴퓨터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처음 출발했던 구도 안에서의 두뇌가 아니다. 회의주의의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 인간의 위치가 마치 통 속의 두뇌와 같은 처지라면 우리는 우선 우리의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서 슈퍼컴퓨터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즉 우리가 통 속의 두뇌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슈퍼컴퓨터’와 ‘통’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위치를 가져야 하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관점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을 설정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 사고 실험의 조건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이 마치 통 속의 두뇌와 같은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슈퍼컴퓨터와 연결된 통 속의 두뇌’ 이야기는 ‘우리’의 조건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관점을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러한 관점을 거부하고 우리의 세계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인 우리에게 온당한 일이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카벨(S. Cavell)은 회의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인간성(humanity)을 부인하려는, 또는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서도 그것을 주장하려는 희망처럼 인간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회의주의가 수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논박’을 통해서는 대처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모두에게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갓난아이가 규범성의 근원에 대해 탐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 아기가 그처럼 고차원적 사고를 한다면 오히려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더구나 붉은 점박이 무당벌레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아르케’(arche)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아가 이러한 ‘신적 관점’(God's-Eye view)의 추구와 하찮은 딱정벌레의 관점의 추구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왜 철학자들은 신의 관점을 추구하면서도 딱정벌레의 관점을 추구하지 않으며, 딱정벌레의 관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해서 한 점의 의심도 갖지 않을 많은 사람들이 신적 관점은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이론적 설명보다도 우리 자신의 원초적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 욕구와 열망에 의해서만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한계와 조건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즉 우리는 ‘제한된 존재’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확실성이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넘어서서 설정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조건은 ‘받아들여져야 할 것, 주어진 것’(?탐구?: p. 336/226)으로서 ‘삶의 형식들’(forms of life)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나의 논거들이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암반이다.(?탐구?: 217) 삶의 형식은 우리의 언어의 한계이며 동시에 의미의 한계다. 바꾸어 말하면 삶의 형식은 우리의 의미, 즉 의미 있는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포괄적 지반이며,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만약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탐구?: p. 332/223)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삶의 형식이 공유되지 않는 우리와 사자 사이에는 동일한 기호의 의미가 적절하게 교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서 사자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의 의미 지반인 삶의 조건이 적절히 공유되지 않았을 때 그 말의 사용은 사자에게 쓸모가 없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념화의 크기’는 바로 이러한 삶의 형식 안에서의 쓸모라는 측면에서 적절하게 해명되어야 하며, 또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적정한 크기의 이론들, 즉 우리에게 구체적인 의미 산출이 가능한 크기의 개념들과 이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크기는 단일한 방식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 방식에 의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다시 특정한 관점에 의해 영향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순환성’이라는 난점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적절한’ 이해라는 말이 또 다른 해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극복할 수 없는 순환성이 우리 모두의 철학적 탐구의 계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순환성을 피하는 확고한 방법은 절대적 기준을 찾아내는 일이며, 그것을 위해 과거의 철학은 우리를 경험 영역을 넘어서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 순환성을 피하기 위해 우리를 넘어선 절대적 기준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순환성과 공존하는 더 나은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에 훨씬 부합할 것이다. 절대적 기준을 선택하기에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의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도록 권고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진의일 것이다.


4 해체에서 재건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전통 철학에 의해 제기된 일련의 문제들이 마치 ‘거짓 감옥’(false prison)처럼 철학자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철학적 문제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파리병에 갇힌 파리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방법을 통해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그는 철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견고해 보이는 감옥이 사실상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거짓 감옥의 허상을 드러내 줄 뿐, 그 자리에 새로운 감옥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치유적 활동을 자신의 주된 작업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개념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일단의 급진적 철학자들에 의해 극적인 형태로 수용되거나 확장되어 나타난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개념에는 분명히 해체적 요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급진적인 ‘해체론자들’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치유를 통해 분명히 복귀해야 할 지반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지반은 치유 이후에 새롭게 제시되는 대안적 구성물이 아니라 치유 이전부터 우리에게 엄존하는 우리의 기본적 조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조건을 ‘일상성’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에게 이러한 지반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귀에 필요한 것은 퍼트남이 말하는 ‘의도적 순수성’(deliberate naiveté)일 것이다. 그 지반은 미흡하고 거친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과도한 이론에 물들지 않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소유하는 삶의 본래적 터전이다.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지반을 보게 하려고 한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급진적인 철학 개념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라는 철학적 태도와 몇몇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서구 지성사를 통해 굳건하게 자리잡아 온 ‘존재’, ‘진리’, ‘옳음’ 등이 사실상 ‘은유’(metaphor)를 통해 형성된 이성 중심주의적 사유의 허구라고 본다. 철학적 은유는 감성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의 것을 넘어서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지를 망각하고 새로운 집에 안주하게 된 역사다. 그래서 데리다는 철학이 “스스로를 잃어버린 은유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고유성을 가장한 철학적 개념들이 은유의 산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쉽사리 해체될 수 있다고 본다.
데리다의 은유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의미 있게 물을 수 있으며 또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은유를 가능하게 해 주는 우리의 인식의 구조가 무엇인지이다. 은유가 이론화될 수 없는, 다만 자의적이고 무법칙적인 자유로운 환상의 유영이라면 우리는 데리다와 함께 다만 해체에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해체의 이유로 삼았던 은유는 실제의 우리의 삶과 사고와 행위에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여기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 즉 그 은유들이 왜 우리에게 불가피한지, 그리고 은유에 의해 건설된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의 물음이 그것이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겨 둔다. 말하자면 되돌아와야 할 지점으로서 ‘일상성’은 허상처럼 벗겨지는 은유들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그 출발점에 대한 탐구의 방향을 강력하게 제안한다. 데리다의 지적처럼 ‘형이상학’은 그 제약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제거하려는 이유를 갖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고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주르’(usure)라는 단어의 분석이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처럼 동전은 스스로의 출처를 마모시키고 지워 버림으로써 골동품이라는 중요성을 얻게 된다. 형이상학은 마치 동전과 같은 본성을 갖는다. 나아가 데리다는 니체(F. Nietzsche)의 말을 빌어 모든 표면이 지워져 버린 동전은 한낱 쇠붙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다. 형이상학은 그러한 위험성을 안고서도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우리를 이끌어 간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는 철학적 이론의 이러한 본성을 함께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사한 통찰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철학적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의도적이든 아니든 데리다는 그의 해체 이후에 철학자가 되돌아가야 할 지점에 대해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는 급진적이다. 그는 단순히 특정한 개념, 특정한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개념화 방식, 즉 사유의 지반 자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사실상 그가 해체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들일 뿐이다. 그의 해체가 아무리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는 우리의 개념들을 부수고 있는 것일 뿐이며 우리의 자연적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신체화된 우리 자신을 해체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데리다의 해체에 의해 완전히 깨뜨려지는 것은 라일(G. Ryle)이 ‘기계 속의 유령’(ghost in the machine)이라고 불렀던 ‘데카르트적 인간’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 속의 유령’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물리적 세계와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유기체다. 비트겐슈타인은 해체에 의해 깨어지지 않는 삶의 원초적 지반의 중요성과 근원성에 우리의 탐구의 관심을 돌리려고 시도하는 반면, 데리다는 이 문제에 관해 아무런 중요한 제안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퍼트남은 이러한 데리다의 해체가 허무주의에로의 전향이라고 보며, 그의 난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듀이와 비트겐슈타인은 각각 최선을 다해 어떻게 전적으로 진실한 철학적 성찰이 진리 자체 또는 세계 자체의 ‘해체’라는 화려한 주장 없이도 우리의 편견과 집착적(pet) 신념들과 우리의 맹점들을 와해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만약 모든 것이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이 해체의 교훈이라면 해체에는 아무런 교훈도 없다.

여기에서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이 듀이와 함께 ‘자연주의’(naturalism)를 공유함으로써 해체라는 딜레마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를 넘어선 초월적 관점을 설정하지 않고서도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해 적절한 이론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이 과거의 이론들과의 결별을 통해 도달될 수 있는 철학적 성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성’에의 복귀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는 바로 우리를 넘어선 과도한 이론들이 초래했던 오해와 왜곡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은 듀이의 ‘자연주의적 형이상학’(naturalistic metaphysics)과 합일점을 이루는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초월과 당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을 현실적 바탕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과 당위의 근거를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함으로써 인간성의 고양의 가능성을 우리 안에서 찾으려는 ‘인간주의적’(humanistic) 태도다.
아마도 자연주의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오해의 하나는 그것이 ‘과학주의’(scientism) 또는 ‘물리주의’(physicalism)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모든 것이 과학적 지식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없다. 그는 오히려 과학과 구별되어야 할 철학적 사고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그 출발점이 되는 터전이 우리의 일상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필자는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권고하는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본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지 말고 보라!”(?탐구?: 66)고 당부했던 그것은 사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그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벗어나 있었던 일상성의 세계다.(?탐구?: 415)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제 우리의 철학적 탐구는 이 익숙한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심을 따라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비판은 급진적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이러한 급진성은 아마도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와 방법에 의해 정향(定向)되지 않았던 그의 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론화’라는 전통적 철학의 목표를 거부하고 언어에 의해 초래된 지적 질병의 치료가 철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철학의 본령이 자기 비판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체계적 이론 건설의 일부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활동이라고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철학의 주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는 것일까? 그는 이러한 철학적 활동의 출발점과 회귀점을 ‘일상성’에서 찾는다. 그는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삶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철학 비판은 이러한 상태로의 복귀를 제안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해체적 비판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지 않은 부분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의 철학자들이 건설하려고 헸던 ‘이론들’이 아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을 따른다면 우리의 철학사는 ‘이론들’ 대신에 철학자들의 ‘활동의 증언록’이라는 관점에서 씌어질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일상성’은 모든 철학적 여행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회귀점이다. 그는 길을 잃은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되돌아가야 할 길을 일러준다. 과거의 여행자들은 ‘철학적 이론’이라는 일정표를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자신의 출발지로 되돌아옴으로써 비로소 그 출발지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것을 넘어선 새롭고 풍성한 ‘기술’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그 출발지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항상 서 있으며 또한 항상 대면하고 있는 바로 우리의 세계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우리는 하나의 철학사적 단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 탐구’의 종결이 아니라 ‘철학적 시각’의 전환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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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의 미래」. ?현대철학의 정체성과 한국철학의 정립?(?철학연구? 별책).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2: 9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