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확실성: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1)
박 병 철
1. 들어가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저작물인 ꡔ확실성에 관하여ꡕ2)는 ꡔ철학적 탐구ꡕ3)와 더불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무척 중요한 자료이다. 철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ꡔ확실성ꡕ은 마치 일기처럼 내용을 작성한 날짜들이 적혀있으며, 마지막으로 표시된 날짜는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으로 되어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이 ꡔ탐구ꡕ 이래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갔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고민한 철학적 주제를 통해 그의 가장 성숙한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연구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식과 확실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저작에 대한 연구는 좁게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입장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넓게는 그러한 인식론적 입장이 ꡔ탐구ꡕ로 대표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체 맥락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조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ꡔ확실성ꡕ이 지닌 이러한 중요성과 최근까지 쏟아져 나온 비트겐슈타인 연구서의 양적 풍부성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 자체, 또는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비트겐슈타인 연구가 근본적으로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나뉘어져서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각각 대표하는 ꡔ논리-철학 논고ꡕ4)와 ꡔ탐구ꡕ에 대한 연구는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그 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유고(Nachlass)가 속속들이 공개되고 출판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그림이론과 언어게임이론만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한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저작과 ꡔ탐구ꡕ 이후의 저작물에 대한 연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ꡔ확실성ꡕ에서 다루고 있는 지식과 확실성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인식론적 입장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인식론적 입장에 대한 이해가 그의 철학의 전반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지식과 확실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어떠한 배경에서 생겨난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그러한 관심이 어떠한 철학적 해결점으로 발전되었는가에 이르기까지를 명료하게 해명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2. 1인칭 vs. 3인칭 사례
ꡔ확실성ꡕ은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맥락을 따라가면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스타일로 씌어져 있다. ꡔ탐구ꡕ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 혹은 가상의 대화상대에게 특정한 입장에 대한 질문과 반문을 유도하면서 논의가 전개되어 때로는 원래 질문시의 입장이 반전되거나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해서 정작 비트겐슈타인의 진짜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는 내용이 확실성, 의심(회의), 지식과 관련된 문제들을 맴돌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그러한 관심의 배경에 무어(G.E. Moore)의 입장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ꡔ확실성ꡕ은 첫 문장부터 “여기 내 손이 있다”는 무어의 문장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상식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외적 대상에 대한 증명을 꾀했던 무어의 입장에 대한 언급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에 대해서 반응하게 된 계기는 무어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에서 온 것이 아니라 1940년대 후반에 자신의 제자 맬컴(Norman Malcolm)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한 시기에 맬컴이 무어를 비판한 논문을 읽게 되면서 촉발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5) 하지만 어떤 계기에 의해서였건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의 입장을 때로는 자신의 철학적 주제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은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단순히 무어에 동조하거나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어의 문장에 대한 논의에서 매우 독창적인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그저 무어의 상식적 논증을 비판하면서 회의주의의 문제를 논의했다거나, 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적 입장을 취했다거나, 또 반대로 무어를 옹호하면서 일상언어와 그 토대를 인정한 토대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는 식으로 단층적으로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ꡔ확실성ꡕ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가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저작에서 유사한 관심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ꡔ탐구ꡕ 이후의 언어게임의 아이디어와 더불어 논의의 전면에 재등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에만 주목하여 ꡔ확실성ꡕ에 대한 이해를 꾀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체 맥락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ꡔ확실성ꡕ이 지닌 지식과 확실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가 그의 철학 전반에 있어서 어떠한 배경과 맥락을 통해 주요 논제로 떠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먼저 필요하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은 (1)“나는 여기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과 (2)“나는 당신이 나의 팔의 어느 부분을 만졌는지를 안다”라는 문장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6) 바로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3)“나는 내가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과 (4)“나는 그가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의 문법적 차이에 대해서 논했던 중기 저작에서의 문제점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기 철학의 이러한 문제점은 내적 경험과 유아론의 문제로서 ꡔ청색책과 갈색책ꡕ7), ꡔ철학적 언명ꡕ8) 등의 저작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위의 예에서 (1)과 (3)은 1인칭 사례로서 무의미한 것이고 (2)와 (4)는 3인칭 사례로서 유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다루고 있는 지식과 확실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의 변화를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중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3)은 (어순 등 외형적인 면에서) 문법적으로는 (4)와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4)는 유의미한 반면 (3)은 무의미한 표현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3)과 같은 1인칭 사례의 경우 “안다”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는 그것이 검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을 느낄 때, 그 고통은 나의 내적 경험으로 나에게는 직접적이고 가장 확실하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4)와 같은 3인칭 사례의 경우 내가 ‘그의’ 내적 경험을 대신할 수 없으므로 그가 진정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한 공적인 판단기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ꡔ확실성ꡕ에 등장하는 (1), (2)의 경우 중기의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기 저작의 경우와 달리 ꡔ확실성ꡕ의 경우 그러한 검증 가능성 여부에 덧붙여서 언어게임의 문제가 배경에 깔려있다. 일상적인 언어게임에서 우리는 1인칭 사례에 대해서 “안다”는 표현을 덧붙이지 않는데(즉, 강조를 위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내게 치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단순히 “나는 치통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언어게임이 그러한 필요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1인칭 사례가 확실성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고, 3인칭 사례는 지식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는 새로운 논의로 발전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1인칭 사례가 가지는 경험의 직접성에 관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1차적 경험에 관한 한 경험자인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언어와 세계가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인 것이다. 즉 특정한 검증을 통해서 그 문장의 진리성이 정당화되거나 유의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언어게임 자체가 그러한 문장이 의미 있게 통용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3. 주관적 확실성 vs. 객관적 확실성
ꡔ확실성ꡕ의 앞부분에서 한동안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의 문제를 ‘주관적 확실성’(subjective certainty)과 ‘객관적 확실성’(objective certainty)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확실성의 문제에 접근하는 그의 문제의식의 초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주관적 확실성의 경우를 보자.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나는 나에게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문장에서 “나는 안다”(I know)라는 표현은 “내가 무엇을 안다”의 일반적인 경우의 ‘안다’와는 달리 “나는 확신한다”(I am certain)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 ‘안다’라는 표현은 결국 인식적으로 무엇을 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안다”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나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모두 무의미한 표현이 된다고 한다(OC, 8, 57, 58절).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경우에 ‘내가 확신하는 것’(즉 ‘나에게 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다고 하며, 바로 이러한 유형에 대해서 ‘주관적 확실성’ 혹은 그저 ‘확실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OC, 30절). 그는 실수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실수이도록 해주는 기초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즉 규칙을 잘 따르는 것은 실수가 아니고 규칙을 따르는데 실패한 것이 실수라고 할 때, 실수의 기초는 이미 잘 작용하고 있는 규칙(적 행동)인 것이다(74절). 그와 마찬가지로 의심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의심의 기초가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의심이라는 게임 자체는 확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115절). 따라서 의심보다 확실성이 선행하는 것이며, 확실성은 의심이 가능해지는 기초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보장해주는 또 다른 정당화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에 대한 정당화는 불필요하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이 객관적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확실성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그에게 치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안다”라는 표현은 분명 ‘내가 잘못 안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이 경우에 이 문장의 확실성에 대한 의심이 가능한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유형을 ‘확실성’이라는 표현 대신 ‘지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확실성, 곧 지식에서는 그 확실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 근거는 내가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나 정당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OC, 270-271절). 물론 이러한 증거나 정당화의 아이디어는 비트겐슈타인이 중기 저작에서 발전시킨 검증 개념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확실성에 대한 두 카테고리의 구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주된 관심사는 객관적 확실성(지식)보다는 주관적 확실성(확실성)에 더 무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논의가 객관적 확실성은 검증 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인데, 그러한 지식이 가능하기 이전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주관적 확실성이 있다는 식으로 발전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 확실성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적 구분의 도입과 더불어 비트겐슈타인은 논의 전개를 통하여 두 확실성의 구분이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님을 암시함으로써 확실성의 개념에 대한 그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식에 있어서의 회의주의는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형태의 논의를 편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정당화될 수 있는 확실성이 있고, 정당화가 불필요한 확실성이 있다는 논의를 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당화가 불필요한 확실성의 기초는 과연 무엇인가, 혹은 그러한 기초를 포기한 것은 아닌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5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 장에서는 그가 이러한 확실성의 카테고리를 구분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4. ‘안다’는 것의 의미
앞의 2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중기 저작에서부터 1인칭 사례와 3인칭 사례의 구분에 주목했다는 것을 논의했다. 이러한 구분의 근거로서 내적 경험의 확실성은 경험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적 지위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내적인 것’(the inner)과 ‘외적인 것’(the outer)의 구분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서 ꡔ탐구ꡕ 이후의 저작에서 의문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어서 ꡔ확실성ꡕ에서 확실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내적 경험에 대해서 말할 때, 일반적으로 1인칭의 경우 확실성이 보장되지만 3인칭의 경우에는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도식적 이해에 대해 1948-49년에 씌어진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내적인 무엇이 있어서 외적인 것으로부터 오직 비결정적(inconclusively)으로만 추론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고 무엇이 이 그림을 정당화하는 지는 명백하다. 1인칭의 외견상의 확실성과 3인칭의 불확실성.9)
위의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내적 경험에 대한 1인칭의 확실성과 3인칭의 불확실성이라는 지금까지의 생각(picture)이 본질적인 이해인지를 되묻고 있지만, 이렇다할 결론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불만족한 상황은 1949년 이후에 씌어진 저작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내적인 것에는 통증이나 아픈척하기 등이 있다. 외적으로는 신호(행위)들이 있는데 통증이나 아픈척하기 중 어느 것도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외적인 신호들은 때로는 애매하지 않게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확실하게 의미하기도 한다: 통증, 아픈척하기와 여러 다른 경우들에서.10)
가상의 대화자의 목소리에 대한 반론을 통하여 비트겐슈타인은 통증이 수반하는 찡그림과 같이 내적인 경험에 대한 외적인 신호가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의 언어게임의 실행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상대방의 내적 경험에 대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입장은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심스럽기는 하나 좀더 단호한 어조로 발전하고 있다.
‘내적인 것’은 환상이다. 즉, 이 단어에 의해 언급되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들 전체는 마치 실제 단어를 사용하는 장면 앞에 드리워진 색칠된 커튼과 같다.
만약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가 화가 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누군가가 화가 났다는 것을 믿거나 추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11)
위의 첫 문단에서 보듯이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내적인 것’을 환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내적인 것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고, 외적인 것은 감각기관을 이용해 확인 가능한 것으로 중기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서는 검증 개념에 의해 유의미성이 확보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상적으로 완숙한 비트겐슈타인의 눈에는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론적 실체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위 인용문의 둘째 문단에서 그러한 이유로서 타인의 내적 경험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을 믿거나 추측할 수조차 없다는 것과 같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가 확실성 또는 불확실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심리적 개념일 뿐이라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인용문과 같이 ‘내적인 것’에 대해서 확실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외적인 것’에 대해서 확실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인 것에 대한 불확실성은 외적인 무엇에 대한 불확실성이다.12)
일반적으로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금발이다”와 같은 문장은 확실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치통이 있다”와 같은 문장은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그녀는 금발이다”라는 문장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그는 치통이 있다”와 같은 경우도 의심하지 않는 상황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을 가질 수 없다면, 그야말로 “그녀는 금발이다”와 같은 문장의 경우도 확실성은 보장될 수 없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의도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가 이어서 하고 있는 말을 보도록 하자.
만약 “나는 . . .을 안다”가 나는 만약 누군가가 나의 증거를 믿는다면 그가 확신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학적 명제의 진리에 대한 것만큼 그의 기분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분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옳지 않다. (그러나 아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과 다른 심적 상태라고 말하는 것도 여전히 옳지 않다. (나는 L.W.와 다르다.))
즉, ‘안다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 ‘확신하는 것’, ‘믿는 것’, ‘추정하는 것’ 등과 다른 종류의 심리적 개념이다. 안다는 것의 증거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13)
위에서 수학적 명제를 ‘외적인 것’, 그의 기분을 ‘내적인 것’이라고 할 때, 분명 비트겐슈타인은 지식에 해당하는 ‘안다’는 표현은 수학적 명제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그의 기분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이 내가 그의 기분에 대해 불확실하게 인지하는 상황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기분을 수학적 명제를 아는 것처럼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수학적 명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기분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때때로 그의 기분을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매우 좋은 성격의 소유자여서 모임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을 경우 실제로는 기분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행동할 수 있다. 그 경우 나는 그의 기분을 오해하여 그가 기분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의 기분이 수학적 명제와 다른 성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반문하는 바는 내가 그의 기분을 오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해 없이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내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내적 상태’를 오해할 수 있다는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외적인 것’에 대해 아는 것(지식)과 ‘내적인 것’에 대해 아는 것(확실성)이 상이한 심적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그 둘의 차이는 그저 상이한 심리적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위 인용문 첫째 문단의 괄호 속의 문장을 통해서 그러한 차이가 “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다르다”에서 ‘나’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나’라는 단어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단어의 차이는 곧 한 사람에 대한 1인칭적 이해와 3인칭적 이해의 차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실로 그의 중기 저작에서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한 바 있다. 이를테면, ‘나’, ‘이것’, ‘저것’, ‘여기’, ‘지금’과 같은 표현들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책상’, ‘칠판’, ‘강의실’, ‘6시 10분’과 같은 표현들과 대비될 수 있는데, 이른바 지시사(demonstratives)라고도 불리는 앞의 표현들의 특징은 그러한 표현을 발화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확실하고 참일 수밖에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확실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뒤의 표현들은 화자나 청자 모두에게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유의미하게 소통이 가능한 단어들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앞의 표현들은 1인칭 화자에게만 의미 있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아론적인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고, 뒤의 표현들은 의사소통에 있어서 공적인 기준을 갖춘--그래서 검증가능한--표현이라고 보았다. 다음의 예를 보자.
(5) “해가 지는 시각은 6시 10분이다.”
(6) “지금 해가 지고 있다.”
누군가 6시 10분에 (6)을 발화했다면 위의 두 표현 모두 동일한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5)의 ‘6시 10분’이라는 표현이 (6)에서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었는데, 이러한 차이는 청자나 독자로 하여금 (5)의 의미는 잘 알 수 있는 반면 (6)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금’이라는 표현은 ‘6시 10분’뿐 아니라 ‘6시 30분’, ‘7시 10’ 할 것 없이 어느 시각에든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5)와 (6)이 다른 사실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비트겐슈타인이 두 예를 비교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5)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고, (6)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표현의 차이는 그들이 말하는 사실에 있지 않고, 말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이제 성숙한 비트겐슈타인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전반에 대해서 이러한 차이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이해인 ‘주관적 확실성(확실성)’과 ‘객관적 확실성(지식)’의 경우도 사실은 둘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상태뿐 아니라 내적 상태에 대해서 의미 있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외적 상태에 대한 진술이 객관적으로 더 확실하고, 내적 상태에 대한 진술은 덜 확실하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이해에 실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첫째로 이러한 논의가 ꡔ탐구ꡕ에서 이른바 사적언어논의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으며, 둘째로는 앞서 3절에서 논한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 확실성’의 구분이 궁극적으로는 느슨해지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사적언어에 관한 문제는 이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자세히 논의하지 않기로 하고14), 다음절에서 바로 둘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5. 확실성과 언어게임의 기초
위의 2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주목한 1인칭 사례와 3인칭 사례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했고, 3절에서는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 확실성의 구분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그리고 4절에서 바로 1인칭 사례와 3인칭 사례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보였다. 이제는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ꡔ확실성ꡕ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 확실성의 구분 역시 예리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구분이었음에 대해 논하면서 그러한 입장이 언어게임이라는 개념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3절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나에게 두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와 같이 의심이 일어날 수 없는 명제에 대해서 우리가 주관적 확실성(확실성)이라 하였고, “나는 그에게 치통이 있다”와 같이 의심을 하거나 잘못 알 수 있는 명제에 대해서는 객관적 확실성(지식)으로 구분했다고 했다. 그리고 두 명제의 차이를 1인칭과 3인칭 사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중기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입장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 그러한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언급들이 ꡔ확실성ꡕ의 전개와 더불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나에게 손이 있다”와 같은 문장뿐 아니라 “세계는 존재한다”나 “지구는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다”와 같은 통상적으로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문장들에 대해서도 확실성이 보장되는 명제들로 보고 있다. 심지어는 “물은 100˚C에서 끓는다”(OC, 292절), “지구는 둥글다”(299절)와 같은 문장들도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 명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회의하거나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든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입증된 사실로서 최초에 그것이 밝혀졌을 때는 엄격한 증거와 정당화를 필요로 했음에 틀림없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근대 이후로 철학자들은 그러한 명제들을 사실에 대한 명제들로서 우연적 명제 혹은 종합명제라는 명칭으로 분류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이러한 명제들은 분명 경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판단에 있어서 의심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308절).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상식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무어가 제시한 논증처럼 소박한 논의는 아니다. 무어의 입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테면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손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를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사고로 한쪽 손을 잃은 사람이 대화에 참여한다 해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손을 잃은 사람 역시 원래는 두 손이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언어사용을 습득했을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 개념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학교의 역사와 과학 시간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학생이 그 점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학생에게는 수업시간에 교사가 가르치는 어떤 내용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먼저 지구가 존재했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요구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 해도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생이 의심을 거두고 “지구는 과거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왔다”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교사는 그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나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학생에게도 유사한 이유로 과학을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학생은 바로 그러한 명제들을 의심함으로써 역사 혹은 과학 전체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그 학생은 역사 혹은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게임) 전체를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손이 있다”라든가 “세계는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들에 대해서는 회의하는 것이나 그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 모두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명제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어게임을 실행하기 위해서 이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제들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은 그런 명제들이 유의미하게 사용되고 있는 언어게임 전체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명제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그들이 속한 언어게임 전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시도는 분명 그러한 명제들이 사용되고 있는 언어게임 외부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입장은 언어게임이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기초를 가지지 않는다는 이상한 입장처럼 보인다. 우리가 의심할 수 있는 지식은 언어게임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회의나 정당화가 가능한 것이고, 의심이 불가능한 확실성은 언어게임 이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통해 직접 이 점에 대해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지식이 가능해지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실수가 가능한 상황과 불가능한 상황을 나눈 뒤, 실수는 그 기초(ground)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지식과 짝지어지는 개념이라고 한다(OC, 67, 74절). 이 말은 곧 실수라는 것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언어게임이 실행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156절), 지식은 곧 그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증거와 관련된 개념이라는 뜻이다(504절). 결국 ‘안다’는 것은 언어게임의 실행이나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일차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무엇을 ‘알기’ 이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믿음’이 가능할 때만 ‘아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137, 160절).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한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명제들의 전체 체계 혹은 구조라고 말한다(102, 105, 225절.)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의심이나 정당화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기초가 없는 믿음이다(166절).
실로 의심이라는 것도 확실성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OC, 115절). 무엇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데(354절), 그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 곧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즉 의심은 믿음 다음에 온다는 것이다(160절).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어떠한 의심이나 정당화의 문제가 제기될 수 없고, 제기되지도 않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확실성의 영역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영역은 두 개의 특이성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이러한 영역은 경험적 지식을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화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의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곳에 위치한다. 물론 일부 해석처럼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선천적 종합(synthetic a priori)명제를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이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의 정당성을 인정한 상황에서 제3의 명제인 선천적 종합명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이 그가 ꡔ논고ꡕ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날카롭게 나누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즉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를 나누는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OC, 309, 319절). 근대 이후의 인식론의 경향은 “2+3=5”와 같은 분석적 판단이 우리의 지식 체계에서 “지구는 둥글다”는 종합적 판단보다 더 기초적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경향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1인칭 사례와 3인칭 사례, 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구분지음에 따른 확실성의 차이가 무의미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분석명제가 종합명제보다 더 기초적이라는 생각도 재고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확실성의 영역이 가진 또 하나의 특이성은 그가 그러한 영역이 우리의 인식 체계에 있어서 모종의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일반적인 의미의 인식의 기초나 토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한 영역을 우리 사고의 지지대(OC, 211절)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기초벽(foundation-wall)이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하며, 때로는 경첩(341, 343절)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하여 나타내기도 한다. 그가 ‘기초’나 ‘토대’와 같은 기존의 용어 대신 다소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입장이 종래의 기초주의나 토대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가장 확실한 데카르트 식의 기초가 아니라 의심이나 정당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영역을 비트겐슈타인은 ‘기초’라는 말 대신 다른 용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듯 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경험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의심이나 정당화가 필요 없는 그러한 영역의 위치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ꡔ확실성ꡕ의 마지막 부분으로 나아가면서 펀더멘탈(the fundamental)이라는 또 다른 용어를 등장시키면서 그러한 기초에 해당하는 영역을 ꡔ논고ꡕ 이래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사용되어 온 논리와 결부시켜 논의하고 있다.
6. 펀더멘탈과 논리
비트겐슈타인은 고민 끝에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어게임의 본질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에게는 두 손이 있다”와 같이 경험적인 명제이지만 의심이나 정당화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 이유를 언어게임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 온 오랜 세월동안 사용한 언어게임을 실행한 결과가 바로 그러한 명제에 대해서 되물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무수히 많은 문장들 중에서 일부는 확실성을 지니게 되며, 그러한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곧 언어게임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라는 것이다(OC, 370절).
이제 이렇게 끊임없이 실행되고 있는 언어게임의 부산물인 확실성의 영역을 펀더멘탈이라 부르면서 비트겐슈타인은 펀더멘탈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펀더멘탈이 의심을 넘어서는 일종의 규칙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OC, 519절). 이때의 규칙이란 논리학의 명제와 같은 것이다(319절). 그리고 그러한 규칙 또는 논리학의 명제와 경험적 명제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이 없다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비친다.
하지만 논리학의 명제와 경험적 명제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뚜렷함의 결여는 규칙과 경험적 명제 사이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OC, 319절)
경험적으로 알려지는 명제이지만 그러한 명제가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할 때 분명 논리학의 명제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하겠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경험적 사실들이 언어게임의 기초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한다(OC, 558절). 그래서 펀더멘탈에 대한 의문은 모든 판단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한다(559절).
반복되어 온 경험적 사실들이 언어게임의 기초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때, 이는 새로운 사실이 새로운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이를테면 ꡔ확실성ꡕ에서 “사람이 달 표면을 걷는 것은 불가능하다”와 같은 문장을 펀더멘탈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문장은 더 이상 참이 아니며, “사람은 달 표면을 걷는 것이 가능하다”는 문장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이것은 1969년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가 달 위를 걸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사람이 달 표면을 걷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문장이 펀더멘탈의 일부를 이루는 인식 체계와 언어게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식 체계와 언어게임을 만들게 한 실례가 된다고 하겠다. 즉 사실이 언어게임의 가능성을 조건 지운다는 것이다(OC, 617-620절).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으로부터 면제되는 이러한 펀더멘탈에 속하는 명제들이 언어게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라고 말한다(OC, 628절). 여기서 기술이란 설명(explanation)과 대비되는 용어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중기 저작 이래로 대비해 온 용어다. 즉 과학의 특징은 가설과 정당화 등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고, 철학의 특징은 가설이나 정당화를 배제한 기술인데 바로 설명이 멈추는 곳에서 기술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ꡔ확실성ꡕ에서도 어김없이 이러한 구분이 등장한다. 경험명제에 대한 검증 혹은 정당화가 끝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설명에서 기술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OC, 163-164, 189절). 바로 그러한 지점이야말로 지금까지 말한 펀더멘탈이 위치한 지점이며, 따라서 펀더멘탈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로지 펀더멘탈에 대한 기술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언어게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에 대해서 우리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ꡔ탐구ꡕ에서도 언어게임에 대한 변변한 정의나 설명을 찾을 수 없으며, 그러한 특성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펀더멘탈에 대해 기술만 가능하다는 것은 언어게임의 본질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며, 결국은 언어게임 자체에 대한 이해도 기술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ꡔ확실성ꡕ에서의 논의는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명제들에 관한 탐구였는데, 결국 그러한 영역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방향으로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 결국 우리의 지식, 우리의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해주는 확실한 하나의 기초 또는 절대불변의 기초와 같은 것은 없으며,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실행해 온 언어게임을 통해 받아들여 온 믿음의 체계로서의 펀더멘탈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펀더멘탈은 통상적인 의미의 기초나 토대는 아니며,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실행하는 언어게임에 의해 의미 있게 되는 거부할 수도 정당화할 수도 없는 그런 성격을 가졌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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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ll, Avrum. Moore and Wittgenstein on Certain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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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Ludwig. Last Writings on the Philsophy of Psychology, vol. I. Oxford: Basil Blackwell. 1982.
Wittgenstein, Ludwig. Last Writings on the Philsophy of Psychology, vol. II. Oxford: Basil Blackwell.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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