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11
-고정희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은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갈 것입니다
- 지리산의 봄 / 문학과지성사 19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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