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여수의 사랑/서효인

나뭇잎숨결 2020. 9. 1. 19:41

여수의 사랑

 

-서효인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갔다. 몇 번의 선잠을 왕복하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여수는 있었다.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졌었고,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여수를 향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전화 통화 끝에 우리는 충동적으로 이별을 고했다. 함께 보낸 세월에 대한 예의에서 한참 벗어난 짓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헤어질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이별의 순간은 이보다는 진지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실제 이별은 허무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여수의 초입에서 터미널까지는 꽤 긴 거리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둔 2차선 도로를 지나면 경사가 완만한 언덕이 나오고, 언덕을 지나면 다시 구불구불한 길이 나온다. 눈을 뜨자, 아무렇지도 않은 지방 소도시의 언덕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풍경이 애인의 표정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눈이 부신 길을 다시 보긴 힘들 것이다. 나는 네 어린 시절을 자주 물었다. 교복은 마음에 들었는지, 좋아하는 친구들은 어땠는지, 어떤 가수를 좋아했는지, 김동률을 좋아했는지 이적을 좋아했는지, 수학 점수는 몇 점이었는지…… 여수의 낡은 학교들이 보였다. 너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후에 나를 만났고, 지금 다시 이곳에서 살고 있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네 삶의 흔적이 이 도시 곳곳에 스미어 있겠지. 여기서 작은 등에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처음 학교를 다녔을 것이고, 그리고 교복을 입었을 것이며, 역시나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왔겠지. 그리고 지금 이 길을 거꾸로 거슬러 너와 내가 만났던, 낯선 고장에 왔을 것이다. 시간은 왕복이 불가능하고, 나는 이미 여수에 도착해 있었다.

헤어지고 며칠은 괜찮았다. 다른 여자도 만났다. 괜찮았다. 그녀에게서 오래 사귄 그 친구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예의에 어긋난 인간이 된 셈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사람이 미어터지는 지하철에서 서서, 몸보다 훨씬 심하게 미어지고 있는 심정을 모른 체했다. 밤까지 일을 하고 녹초가 되어 술을 마시고 반지하 월세 집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누웠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행복하지 않았다. 잘 지내지 못했다. 이렇게 약하고 무르고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너를 끝까지 붙잡고 있을 권리는 없었다. 나는 전화하지 않았고 흔한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악무한 속에 몸을 밀어 넣고 시간을 보냈다. 곧 여름이 왔고, 다시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왔다. 너는 유난히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데……. 생각하자 하늘에서 다소곳이 눈이 떨어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거기에 네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래, 우리 어떻게 헤어졌더라. 그것이 옳은 방법이었던가.

나는 애인의 심통 가득한 표정을 유독 사랑했다. 일부러 이런저런 식으로 놀리고는 했었다. 결국 눈물을 비출 때까지 장난을 치고 내가 사랑하는 네 표정을 보고 속으로는 흐뭇해하며 입으로는 미안해, 사과를 하고 곧 다시 간지럼을 태웠다. 애인은 웃는 듯 우는 표정으로 방학이면 집에서 동생들과 꼭 이렇게 놀고는 한다고 했다. 어린 동생들도 너를 사랑하는 것이로구나. 여수의 구석에 있는 애인의 동네에 도착하면 내가 엄청나게 사랑했던 여자가 심통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우리의 이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그래야만 했다. 나는 나와 다른 인생을 내 인생의 하나로 편입시킬 자격이 없다.

화학공장은 흰 연기를 하늘로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무연히,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연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구나. 옆자리의 노인이 힐끗거리며 어지러운 표정의 청년을 살폈다. 쭉 뻗었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은 백사장의 모래처럼 쉽게 바수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온 도시를 나는 결국 사랑하게 되었구나. 그리하여 너와 헤어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구나. 버스에서 내렸다. 너의 볼 같았다. 여수에 내 살이 닿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고, 그날로 다시 더 깊게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여자다.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잘 지내지 못했다고 대답하길 바랐다.

네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를 처음 보는 아이의 심장이 된다. 사실 그날 우리가 나눈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구불구불한 언덕길과, 멀리 보이는 바다와 공장의 매연이다. 아름다울 것 하나 없는 그것이 미치도록, 슬프도록, 못 견디도록 아름다웠다. 잠시 아찔하였다. 현기증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래, 거기는 여수였으니까.

새로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