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생명(生命)의 서(書) /유치환

나뭇잎숨결 2020. 7. 30. 09:37

생명(生命)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ㅎ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의 모든 아침/김안  (0) 2020.08.02
누란(樓蘭) /김춘수  (0) 2020.07.30
눈물은 왜 짠가/함민복  (0) 2020.07.30
뼈아픈 후회/ 황지우  (0) 2020.07.30
보리수 나무 아래로 /김승희  (0) 20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