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나뭇잎숨결 2020. 3. 13. 10:00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 안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안의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철학적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다. 세계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다시 말해서 언어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헛소리다.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예술 등은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철학자,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러나 회의(懷疑)와 분석 그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지성의 혼돈과 미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철학적 고투가 그의 삶이었다. 20세기의 전설적 철학자이자 철학적 전설로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며칠 전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갔다고 믿는다면, 나는 그가 그것에 관해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이런 경우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마취되어 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은가? 내가 마취되어 있다면, 그리고 마취가 내 의식을 앗아가 버린다면, 이제 나는 실제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진지하게 가정할 수 없다. “나는 꿈꾸고 있다”고 꿈을 꾸면서 말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그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한다 해도 옳지가 않다. 이는 실제로 비가 오는 동안 그가 꿈속에서 “비가 온다”고 말하더라도 그는 옳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의 꿈이 억수 같은 빗소리와 실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확실성에 관하여> 675, 676절, 이영철 옮김, 책세상)

 

1951년 1월 29일 비트겐슈타인은 옥스퍼드에서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언 집행인과 문헌 관리자들을 지정했다. 1949년 10월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주치의 에드워드 베반 박사의 집에서 색채의 문제와 확실성의 문제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데 전념했다. 4월 27일에 위와 같은 확실성에 관한 글을 쓰고 다음 날 저녁 의식을 잃었다. 결국 이 글은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 되었다. 1951년 4월 29일 아침 62세를 일기로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전해진다. “멋진 삶을 살았노라 전해주시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의 ‘멋진 삶’은 1889년 4월 26일 저녁 8시30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노이발덱에서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어머니 레오폴디네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시작되어 빈의 알레가세 16번지(오늘날 아르겐티니어 슈트라세)를 무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유대계 가문이었지만 부계는 개신교,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철강 재벌,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비트겐슈타인의 집을 드나들었고 비트겐슈타인의 부모는 쇤베르크, 파블로 카잘스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은 피아니스트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오른 팔을 잃었고,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파울을 위해 작곡됐다. 비트겐슈타인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교향곡 전체를 휘파람으로 불어 동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비트겐슈타인가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막내 누나 마르가레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예술가 후원 자금으로 10만 크로네를 기부했고,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 가운데 2만 크로네를 지원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정교사들에게 지도 받다가 1903년 린츠 국립실업학교에 입학했지만(히틀러는 1904년에 입학)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친구들과 잘 사귀지도 못했다. 재벌가 ‘도련님’으로 말을 더듬고 벌레를 심하게 무서워하는데다가 ‘당신’, ‘그대’와 같은 격식 차린 표현을 쓰는 비트겐슈타인을 동급생들은 공공연히 따돌렸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의 불행을 겪는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집을 나간 맏형 한스가 1902년 미국에서 실종됐고(자살로 추정), 셋째 형 루돌프는 1904년 베를린에서 청산염을 마시고 자살했다. (둘째 형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자살)

 

 

 

 


1906년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기술전문대학에 등록하고(오늘날 베를린 공대의 전신) 이듬해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기계공학부 연구생으로 등록해 항공 엔진과 프로펠러 제작을 연구했다. 이 시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근본에 관한 문제, 수학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만났다. 다음은 러셀의 회고다. “처음에 그는 기술자가 될 생각으로 맨체스터로 갔다. 수학 책을 읽다가 수학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 분야에 누가 있는지 맨체스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로 짐을 싸 들고 왔다. 그는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12년 가을 학기부터 그가 어떤 자세로 철학에 임했는지, 그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베토벤의 방문 앞에서, 그가 새 곡을 놓고 저주하며 신음하고 노래하는 것을 들은 한 친구가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베토벤이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치 악마와 싸웠던 사람 같았고, 그의 격노를 피해 요리사와 하녀가 떠났기 때문에 36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케임브리지에서 러셀을 통해 G. E. 무어, 경제학자 케인즈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철학에 몰두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노르웨이의 협만 근처 시골 마을에 칩거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 입대하여 포병으로 동부 전선과 남부 티롤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11월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됐다. 전쟁터에서도 그는 수첩에 자신의 철학을 부지런히 메모했다. <논리철학논고>가 사실상 완성된 것도 1918년 8월의 일이다. (독영 대역본이 1922년에 출간됨)

 

1919년 그는 빈에서 교사 양성 교육을 받고 빈 근처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로 일하다가 1920년 오스트리아 동북부 시골마을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후 하스바흐, 푸흐트베르크 등에서 1926년까지 교사로 일했다가 사임했다. (학생 체벌 문제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잠시 수도원의 정원사로 일했고, 빈의 막내 누나 마르게레테를 위한 집을 설계, 건축하여 1928년 가을에 완공했다.

 

 

 

1929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논리철학논고>를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이 됐다. 당시를 회고하는 제자 노먼 맬컴의 말이다. “그것은 강의라기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 그 자체였다. 그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의 대답에 다시 반응했지만, 때때로 어떤 생각을 짜내려 할 때는 학생들의 말을 멈추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간헐적인 중얼거림과 좌중의 숨죽인 시선이 이어지는 긴 침묵. 그는 극도로 긴장되어 눈은 한 곳을 응시했고 표정은 준엄했으되 얼굴에 생명감이 넘쳤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자신이 고도로 심각하게 몰입되고 지적인 힘이 충만하게 된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30년대 전반 그는 강의와 연구에 몰두했다. 1935년에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그는 철학교수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소련을 방문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왔다. 1936년 봄 연구원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르웨이의 협만 오두막에 칩거했다. <철학적 탐구>의 제1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193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1939년에는 G. E. 무어의 후임으로 철학과에 임용됐지만,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수취임을 하지 않고 런던의 가이 병원 약국의 배달 사원으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왕립진료소 임상연구 실험실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1947년에 사임했다. 그는 철학 교수로서의 삶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묘사했다. 케임브리지를 떠난 그는 잠시 아일랜드에서 살았다. 골웨이 해변 오두막에서 지내는 그를 주변 어부들은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새들이 그의 어깨와 팔에 앉곤 했다는 것이다. 1949년 코넬대학의 노먼 맬컴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 잠시 머물고 돌아온 뒤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이른바 ‘전기(前期) 비트겐슈타인’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시켰다고 여겼다. “철학적 저술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들이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걸 입증할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에 따른다면 언어의 기능은 세계를 묘사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실 또는 실재가 있는가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또는 실재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 안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안의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철학적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다. 세계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다시 말해서 언어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헛소리다.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예술 등은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철학과 결별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러나 철학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후기(後期)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전환에 관해서는 그 연속성과 단절성, 그리고 전후기의 관계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다) 식료품점 점원에게 ‘다섯 개의 빨간 사과’라고 적은 쪽지를 주었다고 해보자. 쪽지를 받은 점원은 쪽지의 내용대로 빨간 사과 다섯 개를 골라 줄 것이다. 쪽지에 적힌 내용에 대한 점원의 이해 여부는 그가 그 내용대로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빨강’과 ‘사과’의 지시 대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에 ‘다섯’이라는 말도 마치 그것의 지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다섯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문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 말의 의미에 관한 <논리철학논고>의 협소한 생각에서 벗어났다. “명령하고 명령을 따르는 것, 한 대상의 모양을 기술하거나 측정하는 것, 한 대상을 설명에 따라 구성하는 것, 사건을 보고하는 것, 사건에 관해 숙고하는 것, 가설을 형성하고 검증하는 것,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읽는 것, 연극하기 위한 것, 돌림 노래를 하는 것, 수수께끼를 푸는 것, 농담을 지어내고 하는 것,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 울음, 감사, 저주, 인사, 기도 등을 하는 것.” (<철학적 탐구> 23)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서양철학의 이른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를 주도한 철학자, 영미(英美)권의 언어분석철학 전통을 기초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얼굴은 여럿이다. 실존주의나 생철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여지도 충분하며 종교적 측면도 다분하다. 그는 철학을 ‘연구했다’기보다 철학을 ‘살았던’ 인물이다. 요컨대 논리적 논변, 이론적 체계, 생각의 기술을 다듬는 사고(思考) 기술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니라, 삶의 궁극적 문제, 인류의 문제를 치열하게 숙고하는 현인(賢人)으로서의 철학자에 가까웠다.


“철학을 공부하여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 등에 관해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일상 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여느 기자들보다 우리를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 잘 생각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기 마련이지.” (제자 노먼 맬컴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문화과학사)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전기다. 좋은 전기들이 예의 그렇듯 광범위한 관련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철학자 전기는 철학자의 삶과 철학을 두루 다뤄야 하는 난점, 그것들을 연결 지어야 하는 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그 난점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비트겐슈타인>(요아힘 슐테 지음, 김현정 옮김, 인물과 사상사)은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앞의 책이 분량 측면에서 버겁게 느껴진다면 대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생애, 작품, 영향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 데, 특히 생애 부분이 ‘자세하면서도 간결’하여 매우 유익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K. T. 판 지음, 황경식, 이운형 옮김, 서광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비교적 쉽게’(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해설한다. 국내외 학자들의 비트겐슈타인 연구서 단행본들이 제법 나와 있지만, 어디까지나 연구서들이다. 이 책은 연구서와 소개서의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