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 조영훈 옮김, 한마당, 1994(개정판). 헌책방에 가끔 들를 때마다 다양한 판본으로 자주 눈에 들어오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이제 누구도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거기에 답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는 헌책방에서 사르트르의 이 책을 만날 때마다, 받고는 한다. 사회가 미분화되면 될수록, 지식인의 전통적인 역할, 즉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대변자의 역할은 엘리트주의자의 시혜적 행위로 치부 당하고, 그런 지식 계급 자체의 정체성과 토대조차 와해되는 것 같다. 누구도 지식인에게 특정 '상황(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면)' 속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특수자 자신이 상황에 맞서 보편적인 것, 혹은 윤리적인 책임에 대한 물음을 지식인을 대신하여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도 아니다. 보편성과 보편적 행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이미 추문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에 보편적 사유와 행동을 대변한다는 지식인 자체에 대한 물음은 이제 변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것자체로 그냥 끝나버린 듯 하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이 책에서 늘 강조하듯, 지식인은 불안정한 정체성, 즉 자신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에서 그 상황의 위기를 돌파할 보편성을 찾아내려는 지속적인 노력 때문에 언제나 그 자신은 위기에 처해 있음을 감지한다면, 우리 시대는 바로 이러한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끌어내려는 노력 자체를 더 이상 행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사르트르가 1965년에 전공투 투쟁이 한창이던 일본에서 행한 강연은 바로 이러한 곤경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이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대처였다. 사르트르는 우선 자신이 정의하려는 지식인의 닮은꼴들, 그가 "실용적 지식인", 또는 "지식 전문가", 더 간단히 "전문가"라고 부른 자들과 근본적으로 구별한다. 사르트르의 설명을 요약하면, 전문가들은 항상 "위에서" 즉 그 자신을 고용하는 지배계급에 속하면서 그 자신이 그런 전문가가 되고 고용되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특수성과 좁은 선택 그 자체에 종속되며, 나중에는 그런 지배계급을 재생산하는 "상부구조의 관리"(31쪽)가 된다. 물론 그런 전문가가 언제나 자신을 맨 처음 고용하고 그 안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하는 지배계급에 언제나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전문가란 지배계급에게 발탁되기 전부터 이미 피고용자(산업 예비군)라는 지배계급에 대한 예외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때 이 예외의 가능성은 지배계급의 고용과 발탁에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응하면서 자동적으로 저버리거나 은폐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발생할 때, 즉 지배계급내부로 완전히 동화되지 않는 피고용자 지식인이 모순을 체감하며 자신의 예외성을 서서히 느낄 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처해있던 상황의 자연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그때 "전문가는 괴물, 다시 말해서 <자기와 관계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외적으로는 자기 삶을 인도해 가는 원리들에 대해, 또 내적으로는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관심을 갖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44쪽)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관심을 갖는 자, 이런 지식인의 특성은, 나중에 문학비평가이자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적극 개입하며 그들을 대변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인은 특수한 위치만을 고집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열려있는 '아마추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아마추어이다. 한편, 지배계급의 피고용인이라는 전문가의 위치의 예외성은, 따라서 그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식인을 산출하기 위한 가능성으로 뒤바뀐다. 이때, 예외성이란 언제나 보편성의 토대를 위한 근본적 물음의 시작이지만, 지식인은 많은 경우 이런 예외성,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런 예외성을 지식인이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소외, 즉 지배계급의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축출과 소외의 가능성 때문에 언제나 고통받는다.
사르트르가 보편과 특수로 설명하는 것처럼, 이제 지식인은 자신이 전문적으로 배운 지식에 내재한 추상적 방법(혹은 추상적 보편성)의 특수화(혹은 개별화)를 요구한다. 관점의 끊임없는 전환, 그리고 그 전환 속에서의 두 순간, 즉 "외면성의 내재화와 내면성의 외재화"(55쪽)라는 변증법적 계기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매순간마다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변증법적 방법이란 그 자체로 주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로지 지식인의 지속적인 탐구의 대상, 즉 자신의 물적 기반과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합될 수도 있는 지식의 추상적 보편성의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인식과 실천의 전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추상적 보편성의 형태는 언제나 그에 대해 사유와 회의와 관점의 전환의 끈을 놓자마자 지식인에겐 한낱 개별적 특수자로 회귀하기 때문에, 변증법적 인식과 방법은 그 대상과 이중적으로 대결해야만 주어지고, 그런 한에서만, 길러진다. 헤겔이『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근대란 그것을 살아가는 근대인에게 언제나 보편성이 미리 전제되거나 주어진 시대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단적으로 '자유'와 '평등' 따위의 이념이 바로 그런 미리-주어진 보편성의 예이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별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의심해 보라! 사실 근대인은 그런 보편성이야말로 지양해야 할 특수성의 계기로 주어진 것이라는 통찰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르트르는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 인간이란 <이루어 나가야 할> 존재"(59쪽)라고 말한다. 지식인, 보편적 인간, 언제나 어떤 상황에 처한 그는 그에게 매순간 새롭게 도전해오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불화를 일으키는데, 그때 그런 지배 이데올로기란 항상 사건의 은폐라는 '형식', 그리고 은폐된 사건이라는 '내용'의 이중성으로 그를 옭아맨다. 일견 사회의 모순을 체감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점진적 개혁론으로 대응하자는 개혁론자들의 입장에 대한 사르트르의 '급진적(radical)' 비판은 바로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의 이중성에 사로잡히는 지식인의 보편적 곤경이 가져다주는 곤란에서 비롯된다. 그때, 지식인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체현하는 사건의 은폐의 형식과 그에 따라 은폐된 내용을 모두 거부해야 하기에, 언제나 그 자신은 '근본적(radical)'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이런 지식인의 근본적 위치를 2차 대전 후의 알제리 독립 운동에 대한 사이비 지식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의 모순을 지적해냄으로써 드러낸다. 이때의 사이비 지식인의 명단 속에는 프랑스 공산당과 (유감스럽게도!) 알베르 카뮈와 같은 알제리 출신의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르트르의 말을 들어보자. [알제리 독립운동에 대한-인용자 첨가] 사이비 지식인의 요구는 억눌린 자들이 무력을 통해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사태가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피식민자들의 대중적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식민 본국 내에 그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조직된 세력이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식민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이비 지식인들이 피식민자들에게 점진적 개혁의 환상을 심어 줌으로써 반항할 생각을 못하게 해주는 것은 그들 식민자의 입장에서 하나도 거북스러울 게 없는 것이다.(66-7쪽) 사르트르가 알제리의 정신과의사이자 해방운동가인 프란츠 파농의 저서,『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피지배자들의 지배자들에 대한 폭력은 "억눌린 분노의 탈출구"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서는 안된다는 평화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피식민자의 무저항과 순응을 획책한다는 데서 언제나 식민지 지배자의 의도와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피식민자들의 폭력적 저항, 혹은 저항적 폭력, 테러는 바로 이런 무저항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순응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바로, 억눌린 자들의 폭력에 대한 반대를 획책하는 것은 언제라도 억눌린 자들의 저항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식민 지배자들이 개혁과 문화적 선도라는 이름으로 피식민자들에게 내놓는 이데올로기적 당근의 채찍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그런 평화주의자의 지배세력과의 이데올로기적 타협과 공모를 거부하는 지식인, 그는 사회에서 볼 때, 타인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는 괴물과 같은 잉여적 존재가 되어간다. 그는 테러와 폭력의 불법적 옹호자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다. 바로, 이런 괴물이 보편성의 다른 이름이라니! 지식인의 존재, 그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계몽주의의 보편적 주체라고 자임하는 부르조아적 보편성(사이비 보편성)을 내부로부터 잠식해 들어간다. 사르트르가 그의 책에서 지식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이론을 빌린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보다 더 나아간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부르조아적 보편성이란 바로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자의 착취와 폭력의 일반성에 다름 아니다라는 강력한 통찰이다. 사르트르 자신은 그런 의미에서 유럽형 지식인의 '바깥'에 섬으로써 그 내부의 허위와 한계를 들여다보았던 드문 유럽 지식인이다. 사회에서 괴물적 존재로 낙인찍히고 소외의 이중구속을 강요하는 사르트르적 지식인에게 그 자신과 더불어 억눌린 자들의 자유와 해방의 문제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사르트르는 개별과 보편 사이의 찢김과 분열이라는 헤겔적 "불행한 의식"으로 지식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인은 고독하다."(70쪽) 누구도 그에게 지식인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 그 역할을 떠맡는 그의 자유와 해방의 문제는 단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만 답을 가져올 수 있다. 지식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고는 스스로도 해방될 수 없게 되어 있다."(같은 쪽) 해방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어떻게?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72쪽) 이때 지식인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바로 "쁘띠 부르조아적 지식인"이라는 모순된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물음.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처럼 "쁘띠 부르조아는 <결코 지식인이서는 안되는 것>"(76쪽)이지만, 일단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한다. 쁘띠 부르조아 지식인은 가령 노동계급 내부에서 자생한 유기적 지식인도 아니고, 그 스스로는 노동 계급에 속해 있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대결해야 할 자신의 지식이 가진 추상적 보편성과 더 이상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한다면, 스스로 배신을 하고 지배 계급내부로 들어가 부르조아적 기능적 지식인,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자다. 그가 그렇게 한다면, 잘 해야 그는, 사르트르가 그의 친구 폴 니장의 글을 빌어 말한 것처럼, 발레리나 베르그송과 같이 자신의 시적, 철학적 사유를 위해 적대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끝내 접어두고 "집 지키는 개"(63쪽)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집 지키는 개"라고 말한 기능적 지식인의 모델은 사르트르와 같은 지식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대학의 연구진이나 강단으로 포섭된 오늘날에는 대단히 일반화된 지식인의 모델이 아닌가, 하고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이 사르트르의 지식인에 대한 정의와 역할을 폐기시킬 수는 없다. 사르트르가 물음을 던진 지식인의 책무와 그의 위치의 보편성의 문제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더라도 언제나 철학적(본질적) 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지식인은 사회의 최하층인 노동 계층을 대변하고 그들과 함께 일한다 하더라도 그런 실천이 자신의 소임을 과연 다한 것인지에 대해 던진 물음에 여전히 회의적인 답을 도출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그런 회의와 모순이 밝혀지더라도 끝끝내 의문일 수밖에 없는 그런 회의와 모순의 구현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보편성이 보편성임을 구현하는 예외적 조건이라는 점, 즉 자신이 예외임을 자각하고 그에 대해 끝까지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실천에 다름 아니다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자유와 해방의 문제는 보편성에 대한 물음('보편적인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을 동반한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에 대한 정의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언제나 예외라고 생각되는 특수한 상황, 즉 사르트르의 시대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이 그 예외의 시대가 아닐까 라고 물음을 던질 때조차도 그 물음이 예외에 대한 물음을 포함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얼마든지 보편적일 수 있다. 헤겔을 빌려 말하면, 보편자는 예외가 언제나 '그 자신으로 반영되는' 한에서만 보편자이며,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면, 보편자는 언제나 예외를 사유하는 한다는 점에서만 보편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소적인 우리 시대, 비판이 일반화되었지만 누구도 그 비판에서 안전한 거리를 스스로 획득한 시대, 즉 비판이 무효화되어 버린 시대, 지식인의 책무와 비판적 역할이 사회의 원자적 개인이 가진 상대주의적 관점으로까지 축소되어버린 시대에 사르트르의 지식인의 정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르트르의 책은 그런 지식인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만 읽을 수 없다. 지식인이 된다라는 것에 내재한 보편성에 대한 물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보편성의 정립과 탐구가 더욱 더 의심받는 현재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책과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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