ꡔ논리,철학 논고ꡕ에 나타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박 병 철
(1) 머리말
ꡔ논리,철학 논고ꡕ1)는 출판된지 70여년이 흘렀으나 그 해석에는 아직 정설(定說)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단지 유력한 해석들만 몇가지가 난립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ꡔ논고ꡕ 자체의 단순하면서도 축약적인 경구적 표현양식에 그 첫째 원인을 돌릴 수도 있겠으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논고가 쓰여진 철학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몇몇 비트겐슈타인 연구가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 19세기말 비엔나라는 문화적, 사상적 중심지의 독특한 성격, 또는 그곳에서 발아된 철학적, 자연과학적 맥락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했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2)
전기적(傳記的) 측면에서 볼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모태를 비엔나적, 또는 넓게 보아 대륙철학적 배경에서 찿는 데는 일리가 있다고 본다. 사춘기의 비트겐슈타인이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자살한 바이닝거 (Otto Weininger)의 ꡔ성(性)과 성격ꡕ을 탐독하면서 자살 충동을 키워 왔다든지, 또는 쇼펜하우어의 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ꡕ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비엔나에서 활약한 물리학자 마하 (Ernst Mach)나 볼츠만 (Ludwig Boltzmann)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던 점 등은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형성에 대한 비엔나적 혹은 대륙사상적 영향을 암시하는 대목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뿌리를 대륙에서 찿으려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 간과되어 온 점은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수업을 받았던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영향에 관한 부분이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 수업의 전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 (Bertrand Russell)로 부터 받은 1년여의 것 뿐이다. 러셀이 그의 정부 오토라인 모렐 (Ottoline Morrell)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강의실 안팎으로 쫓아 다니며 질문을 하는등 귀찮게 하더니, 결국은 러셀이 자신의 후계자 또는 양자로 삼고 싶어 할 정도의 깊은 관계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3)
케임브리지에서의 1년여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무어 (G. E. Moore), 존슨 (W. E. Johnson), 브로드 (C. D. Broad) 등의 여타 철학자들과도 접촉하게 된다. 특히 무어와의 관계는 절연과 화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날때 까지 계속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원고 중의 하나인 ꡔ확실성에 대하여ꡕ(On Certainty)의 논지가 무어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무어가 어떤 식으로든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ꡔ논고ꡕ가 나오기 까지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1910년대 초반의 러셀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어 왔으나, 러셀 사후 그의 유고들이 편집되고 출판되는 과정에서 러셀 자신의 철학적 전환은 물론 러셀과 비트겐슈타인과의 관계를 극명히 드러내는 문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실로 비트겐슈타인의 ꡔ논고ꡕ를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 (theory of acquaintance)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되어 나온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 밑에서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아간 것은 1911년 가을로서 당시 러셀은 모든 경험의 대상을 직접지의 대상 (object of acquaintance)으로 환원하고, 다시 이러한 직접경험 (immediate experience)이 가져다 주는 가장 확실한 개개인의 감각소여 (sense-data)으로 부터 외적, 물리적 세계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려는 ꡔ프린키피아ꡕ (Principia Mathematica) 이래의 방대한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러셀의 이러한 계획은 1912년 출판된 ꡔ철학의 제문제ꡕ (The Problems of Philosophy)와 1914년 출간된 ꡔ외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ꡕ (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1918년 발표된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 부터는 방향전환을 보이게 되는데, 본고의 목적은 바로 1910-14년 사이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간의 철학적 상호관계를 살피고, 이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후일 ꡔ논고ꡕ로 나타나게 되는 철학의 틀을 발전시켜 나가는 가를 보임으로써 궁극적으로 ꡔ논고ꡕ에 나타난 논리의 의미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2)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 (theory of acquaintance)
ꡔ논고ꡕ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대상 (object)이라는 말이 제시는 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결여되어 있다. 그로인해,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이라는 말을 통해서 무엇을 의미했느냐 하는 것은 주석가들 사이에 가장 골치 아픈 논쟁 거리가 되어 왔다. 이들 여러 해석 가운데, 일부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특정한 실재적(實在的)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내세우고 있는 의미론적 필요에 의해서 도입된 비실재적(非實在的) 개념이라는 견해를 주장해왔다. 즉, 대상이란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비언어적(非言語的)이거나 또는 물리적인 실재가 아니라, 언어의 사용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이름의 지시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실재론적 대상 개념은 이시구로 (Hide Ishiguro)4)와 맥기네스 (Brian McGuinness)4)에 의해서 대표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프레게 (Gotlob Frege)의 명제논리적 입장을 비트겐슈타인이 계승했다고 보는 견해로서 이름의 지시체가 그 이름이 속해 있는 명제의 진리조건에 따라 부수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는 논의에 입각하고 있다. 즉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름의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제의 차원에서 결정된다는 명제논리적 기반 위에서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 개념은 비실재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의 기본적인 논지는 이러한 비실재적 대상 개념은 잘못된 근거에서 기인한다는 것으로서,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은 오히려 러셀이 말하는 직접경험 (immediate experience)의 대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점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 (theory of acquaintance)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특정인의 마음에 현재 (presented)하거나, 또는 그가 그 대상에 대한 직접지 (direct awareness)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의 진리주장을 수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참, 거짓을 알지 않고서도 직면 자체로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러셀은 이러한 직접지의 대상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가 대상과 직접적인 인지관계를 가질때, 즉 내가 대상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지할때, 내가 대상을 직접 경험한다고 하겠다.5)
어떤 추론과정이나 참, 거짓에 대한 지식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할때, 우리는 그 대상을
직접 경험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책상의 나타남과 더불어 나는 그
책상의 현상 (appearance)을 구성하는 감각여건 (sense-data)--
즉 색채, 모양, 견고성, 유연성 등등 -- 을 직접 경험한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내가 그 책상을 보고 만지고 할때 직접적으로 의식
하는 것들이다.6)
러셀에게 있아서 ‘직접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지’ 또는 ‘무매개적(無媒价的)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지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한 직접지에 대해 참, 거짓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러셀이 직접적인 인지 자체를 가장 확실하게 보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한 색채의 경우를 볼때 그것이 ‘노랑’이건 ‘빨강’이건 간에, 그 경험된 색채 자체는 그것이 우리의 의식 또는 시각 경험에 주어질때 그러한 주어짐 자체만으로 완전한 지식을 구성하는 직접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러셀의 직접지의 대상은 바로 우리의 직접경험에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무매개적으로 직접 경험된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 (this) 또는 ‘저것’ (that)과 같은 논리적 고유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러셀에게 있어서 직접지의 대상을 이름하는 방법은 그것이 직접경험에 주어질때 실제로 그것을 지적하면서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대상에 적용되는 (논리적) 고유명으로서, 이 경우 그 지시체, 즉 대상 자체는 나의 직접경험에 주어진 것이며, 그렇게 지칭되기 위해서는 나의 주관적 의식 상태와 독립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즉 러셀이 직접지의 대상의 대표적 예로 꼽고 있는 감각소여는 록크 (Locke)나 버클리 (Berkeley)등 근대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말하는 관념 (idea)과 유사한 개념이기는 하나, 주관적 의식 상태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실제로 러셀은 이러한 감각소여를 물리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다.7) 직접경험의 대상은 정의되거나 기술될 수 없으며, ‘이것’ 또는 ‘저것’과 같은 고유명을 이용 직접적으로 지칭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외부세계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나의 의식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ꡔ논고ꡕ 이전에 작성된 ꡔ노트북: 1914-1916ꡕ8)에 이미 이런 연결의 고리가 보인다.
우리에게 아 프리오리하게 주어진 것은 대상의 개념과 동일한
이것이라는 개념이다.9)
위의 인용구는 러셀과 비트겐슈타인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대상이 논리적 고유명인 ‘이것’에 의해서 지칭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실로 이러한 점은 ꡔ논고ꡕ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이름 (name)에 대한 설명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ꡔ논고ꡕ에서 이름은 어떤 분석에 의해 정의될 수 없으며, 그 지시체는 대상이라고 하고 있다.
3.26 이름은 정의에 의해 더 분해될 수 없다. 이름은 원초적
기호다.
3.261 이름은 정의에 의해 분해될 수 없다.
3.203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 대상이 이름의 지시체다.
이들 ꡔ논고ꡕ의 언명들은 앞서 논한 러셀의 견해, 즉 이름은 정의되거나 기술될 수 없는, 그 자체로 대상의 의미라고 한 구절을 연상케 하는데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때 비트겐슈타인이 대상과 이름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한 것이 러셀의 직접지 (knowledge by acquaintance)와 기술지 (knowledge by description)의 구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도 대상은 주어진 것의 영역이며 (TLP, 2.0124, 4.12721, 5.524) 이름에 의해서 지칭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동시에 러셀로 부터 멀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양자가 논리형식 (logical form)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러셀의 ꡔ1913원고-지식의 이론ꡕ
러셀은 1913년 5월 부터 ꡔ지식의 이론ꡕ10)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어떤 논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직접지의 대상의 영역에 논리형식 (logical form)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논리형식을 추상적 실재 (abstract entity)로 보고, 논리적 판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논리형식 자체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 책의 원고가 진행됨에 따라 그 내용을 당시 아들 처럼 여기던 비트겐슈타인에게 보여 주었는데,이를 읽은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러셀을 심하게 비판하자, 러셀은 크게 낙담 그 원고의 계속적인 집필 및 출판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1984년 소위 ꡔ1913원고-지식의 이론ꡕ이 출판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바로 그동안 완전하게 납득이 되지 않고 있던 문제인 러셀이 플라톤적 실재론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동기를 적절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의 영향 아래 그 자신의 독특한 논리 개념을 발전시키고, 또 동시에 그러한 개념을 통해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의 구성에 영향을 주게 되는가 하는 점을 보여 준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간의 견해 차이를 구체적으로 알아 보도록 하자.11)
러셀의 입장에 따르면, 단순 관계 명제 aRb를 주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a, b와 같은 개별자의 이름, R 과 같은 관계의 이름은 물론 aRb 라는 명제의 순수형식을 나타내 주는 논리형식 xχy 라는 논리형식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러셀은 직면대상으로 감각여건과 같은 개별자 (particular) 외에도 관계 (relation) 및 속성 (property) 은 물론 논리형식 (logical form) 까지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a, R, b 외에 xχy 라는 논리형식도 직접경험의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만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이전에 태어났다” 의 경우와 같이 관계 R이 비대칭적 관계일때 우리가 bRa 대신 aRb로,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태어났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이전에 태어났다”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논리적 개념을 포함하는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제의 논리형식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형식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논리형식을 직접지로 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러셀이 말하는 직접지라는 개념은 바로 기술 (description) 에 의존하는 구성된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여길 수 있는 직접경험의 영역에서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논리형식이 직접지의 대상이라는 주장은 논리가 선험적 (a priori)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로 러셀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현재로서 나는 ‘논리적 경험’ (logical experience) 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논리적 경험’이란 일종의 직접지로
서 판단과는 다른 것인데, 바로 우리로 하여금 논리적 언사를
이해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다. . . . 분명 우리는 논리적
언사를 이해하는데, 이점은 바로 논리적 언사를 이해하는 사람
들이 ‘논리적 대상’ (logical object)을 직접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12)
나는 논리에 관한 사고가 시작되기 이전에, 또는 우리가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마자, 논리형식에의 직접 경험이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13)
이러한 러셀의 사뭇 놀라운 언명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논리적 경험을 먼저 (아니면 명제를 이해함과 거의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논리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이다. 더우기 그는 xχy 와 같은 단순 논리형식14) 외에 분자적 명제를 구성하는데 관계하는 논리적 대상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선언 (or), 부정 (not), 전칭 (all), 특칭 (some) 등을 나타내는 논리적 기호들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논리형식이 관계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이러한 논리사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그런 논리사의 배후에 있는 논리형식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곧 직접지의 대상으로 대표되는 경험적 지식의 기반이 감각소여과 같은 개별자, 관계와 같은 보편개념은 물론 지극히 플라톤적 요소인 (단순 및 복합적) 논리형식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서, 단초적인 논리적 경험이 없이는 어떠한 논리적 사유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판단의 이론 (theory of judgment)이 포함하고 있는 논리형식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직접지의 이론의 일부를 수정, ꡔ논고ꡕ의 기초가 되는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내세우게 된다. 러셀이 1913 원고를 비트겐슈타인에게 보여 주었을때 비트겐슈타인이 보인 반응은 두 사람 간의 입장 차이를 잘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인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13년 6월에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선생님의 판단의 이론에 대한 저의 반론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A가 a는 b에 대해 R의 관계에 있다고
판단한다“라는 명제는 정확히 분석하면, 그로부터 다른
전제의 도입 없이 “aRb.v.¬aRb" 라는 명제가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론으로는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15)
즉, 위의 추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논리형식과 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실재를 부가적 전제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데이빗 페어스 (David Pears)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16) 비트겐슈타인은 ꡔ노트북ꡕ과 ꡔ논고ꡕ에서 “논리는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17) 바로 이점은 러셀의 논리에 내재된 플라톤적 요소인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에 반대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의사표시라 할 수 있다.
(4) 비트겐슈타인의 대안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에 있어서 다른 부가적 전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러셀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 말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대상과 이름의 관계에 있어서는 러셀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논리형식의 독립적 실재성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적 요소를 견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대안은 다음과 같다. 즉 대상이 주어질때 동시에 대상의 논리형식도 주어진다는 것으로, 논리형식이 대상에 심어져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18) ꡔ논고ꡕ에 나타난 이와 관계된 언명을 보도록 하자.
2.012 논리에서 우연적인 것은 없다: 대상이 원자적 사실
(state of affair) 내에서 성립할 수 있으면, 원자적 사실의
가능성은 그 자체 내에 쓰여져 있어야 한다.
2.0124 모든 대상이 주어지면, 동시에 모든 가능한 원자적
사실도 또한 주어진다.
2.014 대상은 모든 사태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2.0141 원자적 사실 내에서 대상의 성립 가능성이 대상의
형식이다.
따라서, 러셀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우리가 논리형식을 직접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형식은 대상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기만 하면, 동시에 논리형식도 주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직접경험에 주어진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능력도 논리적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논리형식이 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주어진다는 것은 분명 러셀의 경우 처럼 논리형식을 따로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경험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도 분명 논리적 사고능력은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 논리형식을 경험하는 방식은 다르다는 것이다. 러셀의 경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논리형식이 대상에 내재하므로 대상을 경험함으로써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을 직접 경험하기만 하면 된다는 매우 독특한 견해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직접경험에 외부적 대상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상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 바꾸어 말해 결국 ‘대상이 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 또는 논리가 시작되기 이전에 구비되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에, ‘대상이 존재한다’ 또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상의 유무 자체는 인간의 논리에 선행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하여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ꡔ논고ꡕ에 이름에 관한 언급은 비교적 자주 나오는 반면 이름과 짝을 이루는 대상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논리에 선행하는 대상의 존재 여부에 관한 표현 불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단, 일단 주어진 대상을 경험하는 순간 부터는 모든 논리적 사고는, 러셀이 말하는 논리적 경험과는 다르지만, 일종의 경험에 기초한다고 보아야 한다. 대상을 경험함으로써 논리형식도 동시에 경험되기 때문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적인 논리의 플라톤적 실재 개념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지만,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논리가 (대상의) 경험에 근거한다는 경험과 논리간의 독특한 관계를 주장하고 말았다. 이점은 바로 힌티카와 힌티카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ꡔ논고ꡕ 5.552에 잘 나타나 있다.19)
5.552 논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경험’은 어떤 것 또는
다른 것이 어떤 상태의 것이라는 의미의 경험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다는 의미의 경험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이
아니다.
논리는 모든 경험 -- 즉 어떤 것이 어떠하다는 의미의
경험 -- 에 선행한다.
논리는 “어떻게?”라는 물음에 선행하지만, “무엇?”
이라는 물음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은 무척 난해해 보이지만, 대상이 직접경험에 주어져야만 인간의 사고가 (또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는 앞의 논지를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쉽게 납득이 가는 문장이다. 러셀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논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경험은 논리형식 또는 논리적 경험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논리형식이라는 것이 대상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의 논리형식에 대한 경험은 러셀이 말하는 의미의 논리형식에 대한 경험은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대상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주어진 대상을 경험하는 것, 즉 대상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상의 경험과 동시에 주어지는 논리형식의 조합에 의해 ‘어떤 것이 어떠 어떠 하다’ 또는 ‘대상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다’ 등이 규정되는 것이다. 즉 논리는 대상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의 문제에는 선행하지만, 어떤 대상이 있는가의 문제에는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ꡔ논고ꡕ의 5.552는 러셀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언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비트겐슈타인적 대안의 발전과정
이러한 러셀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는 여러 군데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그 최초의 논지는 ꡔ노트 북ꡕ 앞부분에서 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일례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의 논리형식은 그 구성요소들의 형식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20)라고 하고 있는데, ꡔ논고ꡕ에서 명제의 구성요소는 이름 (TLP, 4.22)이고 이름은대상을 지시한다 (3.203)라고 한 점을 미루어 볼때, 결국 ꡔ노트 북ꡕ의 언명은 “명제의 논리형식은 그 대상의 형식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 즉 이것은 대상의 논리형식이 대상들 간에 서로 조합하여 사태를 이루는 가능성을 규정한다는 말과 같다. 이는 이미 1914년 초에 비트겐슈타인이 후일 ꡔ논고ꡕ에 나타나는 핵심적 철학 체계의 일부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ꡔ노트 북ꡕ은 다음과 같은 언명들로 계속되고 있다.
대표 관계에 대한 지식은 사태의 구성요소에 대한 지식에
기초해서만 형성되어야 한다.21)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대상을 대표하고, 다른 이름은 다른
대상을 대표하며, 이들 이름 자체로 연결된다. 이렇게 해서
-- 극적 장면 (tableau vivant) 처럼 -- 전체는 사태를
반영한다.22)
즉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이름과 대상 간의 대응 관계에 대한 개념과 원자명제의 구성방식이 대상의 논리형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개념을 정립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ꡔ노트 북ꡕ에서 그림이론으로 발전할 이름과 대상 간의 대응관계, 명제와 사실 간의 반영관계는 이미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 개념의 배제와 더불어 체계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4년에 이미 모든 러셀적인 논리형식의 개념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셀은 ꡔ1913년 원고ꡕ에서 논리형식에는 원자적 논리형식 (atomic complex)과 분자적 논리형식 (molecular complex)이 있다고 했는데,23) 지금까지 논의된 것은 원자적 논리형식으로 1914년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그에 대한 입장이 확고했다. 그러나 원자적 명제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분자적 논리형식, 즉 연언 또는 선언, 그리고 전칭과 특칭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대상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었음이 다음과 같은 언명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어떤 명제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논리적 상항 (logical constant)이 지시체를 가져야만
한다.24)
즉 1914년 10월 까지만 해도 비트겐슈타인은 복합명제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상항에 대응하는 지시체가 (사실의 세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논리형식을 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하는것 까지는 좋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단순대상의 논리형식 만으로 다시 가장 복잡한 명제의 논리형식 까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아이디어는 가장 단순한 논리형식 만으로 가장 복잡한 명제의 논리형식까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전에는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ꡔ논고ꡕ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모두 제거된 듯,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논리형식은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일 뿐이며, 어떠한 논리상항도 사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근본적인 생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4.0312 나의 근본적인 생각 (my fundamental idea)은
‘논리적 상항’은 무엇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논리의 대표자는 없다는 것이다.
4.441 ‘논리적 대상’은 없다.
5.4 여기에서 (프레게적이고 러셀적인 의미에서)
‘논리적 대상’이나 ‘논리적 상항’은 없다는 것이 현시
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인간의 사고에 필요한 조건은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상의 논리형식이 러셀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적 대상이 수행했던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러셀의 논리상항은 일례로 원자명제들을 짝지어 분자명제를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논리적 복합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을 강조하면서 모든 논리형식을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서는 논리 자체가 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되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언어에서 사용하는 명제는 세계에서의 사실과 대응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해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기 때문에 모든 논리가 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된다는 말은 결국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도 결국 직접경험의 대상으로 환원된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개념적 사고가 구성하는 세계는 결국 개인의 직접경험의 대상으로 부터 구성되며, 그 구성의 근거, 즉 대상이 어떻게 배열되어 사태를 이루고, 사태가 어떻게 모여 복합적 사실을 이루고, 그에 따라 세계가 구성되는가 하는 것은 모두가 대상의 논리형식의 조합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전체 개념사고의 체계를 직접경험의 내용에서 파악이 가능하다고 본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이러한 논지를 뒷받침 해 줄 비트겐슈타인의 언명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6) 뒷받침 해 줄 만한 증거들
비트겐슈타인은 ꡔ논고ꡕ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1 세계는 경우인 것의 총체이다.
2 경우인 것 -- 사실 -- 은 사태의 성립이다.
2.01 사태는 대상들의 조합이다.
2.0124 모든 대상이 주어지면, 동시에 모든 가능한
사태도 주어진다.
이는 실로 세계는 가능한 모든 사태 (원자적 사실)들로 이루어 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모든 가능한 대상의 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대상의 논리형식이 언어에서 어떻게 운용되는가를 이해함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대상은 그 논리형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대상의 성격에 대한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이 ꡔ논고ꡕ에서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그의 중기 이후의 저작에서 자신의 전기사상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쓴 내용이나, 학문적으로 친분을 유지했던 동료 철학자들과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볼때 위에 제시한 해석, 즉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은 직접경험에 주어진 대상이라는 점은 다음과 같이 뒷받침 되고 있다.
비엔나 써클 (Vienna Circle)의 일원이었던 바이스만 (Friedrich Waismann)은 1930년대 초반에 비트겐슈타인의 ꡔ논고ꡕ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돕기 위해 “테제”(Theses)라는 글을 썼다. 바이스만은 1920년대 후반 부터 슐릭 (Moritz Schlick), 카르납 (Rudolf Carnap) 등과 더불어 비트겐슈타인과의 모임을 통해 비트겐슈타인과 토론한 내용을 비엔나 써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비트겐슈타인이 카르납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비엔나 써클에 전달하는 유일한 전달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ꡔ논고ꡕ에 대한 개설서인 ꡔ논리, 언어, 철학ꡕ (Logik, Sprach, Philosophie)의 저술을 비트겐슈타인의 동의 하에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있었을 정도로 비트겐슈타인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의 “테제”라는 글은 ꡔ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ꡕ25)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책의 편자서문에 의하면 “테제”가 ꡔ논리, 언어, 철학ꡕ의 일부분으로 계획된 글이라고 한다.26) 결국 바이스만의 “테제”는 비트겐슈타인의 ꡔ논고ꡕ에 실린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바이스만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을 해석하는데 간접적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원자적 명제에 나타나는 기호를 원초적 기호 (원자적
기호)라 부른다.
원초적 기호는 정의에 의해 분석될 수 없다.
원초적 기호의 의미는 지적함 (pointing)으로써 만이
지시가 가능하다.27)
여기서 원초적 기호란 의심할 여지 없이 원자적 명제에서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더우기 바이스만은 이러한 ꡔ논고ꡕ의 이름이 러셀의 논리적 고유명과 같이 대상을 직접 지시함으로써 만이 보여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러셀의 직접지의 대상에 대한 단적인 예는 바로 대상이 직접경험에 주어졌을 때 손으로 지적하면서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논리적 고유명에 의해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이스만의 이러한 지적은 바로 ꡔ논고ꡕ의 주요 내용이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바이스만의 기록은 이름과 명제가 나타내는 내용이 직접경험이라는 점도 증언해 주고 있다.
현상(경험)은 원자명제가 기술하는 바이다.28)
원자명제는 우리의 경험의 내용을 기술한다. 다른 모든
명제는 그러한 내용의 확장에 불과하다.29)
즉 원자명제는 직접경험에 주어진 내용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이름은 원자명제의 구성요소이고, 또 이름은 언어의 모든 논리를 규정하는 논리형식을 내재한 대상을 지시하므로 원자명제가 경험의 내용을 기술한다는 말은 곧 이름이 경험의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과 같다.30)
ꡔ논고ꡕ에 나타난 이름이 실제로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논리적 고유명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는 또다른 증거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중기 이후의 저작에 비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ꡔ청색책과 갈색책ꡕ31)에서 이미 언어게임에 대한 체계화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의 전기 철학에서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위험은 우리가 ‘이것’과 ‘저것’에게,
예를 들어 A와 B같은 이름의 측면을 부여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32)
물론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이것’ 또는 ‘저것’과 같은 지시사를 언어게임의 맥락 하에서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언어의 직시적 용법으로 발전시키게 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보여주는 바는 확실히 그가 ꡔ논고ꡕ에서 ‘이것’과 ‘저것’을 대상을 직접 지시하는 관계에 있는 논리적 고유명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이 러셀의 대상과 유사한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또다른 증거는 ꡔ철학적 탐구ꡕ33)에서도 나타난다. 플라톤의 ꡔ테아이테투스ꡕ를 인용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 . 그러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다른 여타 규정
없이 이름지워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어떠한 원초적
요소에 대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원초적 요소에 대해서는
순수한 이름 외에는 주어질 수가 없으며, 이름은 그것이
가지는 전부이다. . .“ 러셀의 ‘개별자’와 나의 ‘대상’은
(ꡔ논고ꡕ) 그러한 원초적 대상이었다.34)
즉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대상 개념을 러셀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증거들을 종합해 볼때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은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서 직접경험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우리에게 그 최소단위인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과, 그러한 외적 실재의 세계를 반영하는 언어에 있어서의 의미의 기초로서, 즉 모든 언어의 문장이 이해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이름이 상정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지는 결국 우리의 전체 개념 구조를 일종의 논리적 원자 (언어의 측면에서는 논리형식, 실재의 측면에서는 대상)의 도입에 의해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기반을 경험에 두고 있다는데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7) ꡔ논고ꡕ에 대한 부가적 해석
ꡔ논고ꡕ에 나타난 대상 개념을 이와 같이 해석할 때, ꡔ논고ꡕ 후반부에 등장하는 일부 난해한 언명들이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일례로 명제 5.6에서 비트겐슈타인은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라고 하는 신비적이기 조차한 언명을 던지고 있는데, 이때 세계를 나의 경험에 주어진 대상들의 가능한 전 조합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와 일치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언어는 의미의 원자적 요소인 논리형식을 갖추고 있는 대상이 직접경험에 주어지지 않는 한 시작될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에서의 의미의 원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에 주어진 대상에 심어져 있는 논리형식이 바로 의미의 원자 구실을 하면서 우리 언어의 모든 명제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대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사실들의 총체인 세계와 이름들의 결합의 소산인 명제들의 총체인 언어의 한계가 일치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5.61에서 5.6을 다음과 같이 부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5.61 논리는 세계에 스며들어 있다: 세계의 한계는
바로 논리의 한계이다.
만약 대상과 논리의 성격을 앞서 논한 바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5.61의 언명은 쉽게 설명하기 어렵게 될것이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을 그 안에 논리형식을 포함하면서 우리 언어의 모든 논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역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5.61은 그러한 논리로 부터 도출된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궁극적으로 경험에 주어진 대상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사실들로 구성되며, 그 기반에서 대상의 논리형식이 가능한 모든 대상의 조합과 사실들의 배열 방식을 규정 세계를 이루게 되므로, 논리가 세계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외로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ꡔ논고ꡕ의 언명들로서는 이보다 몇줄 아래 적혀 있는 5.621과 5.63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들 언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대상이 감각에 주어지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거나, 그 성질상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받거나 의존하는 버클리(Berkeley)적 관념 (idea)과 같은 것이라면, 위의 언명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관념론적이거나 현상론(phenomenalism)적 교설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인간의 마음으로 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우리의 경험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전 개념체계를 감각적으로 주어졌지만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으로 부터 나의 전 경험의 영역과 동일시되는 세계에로 구성하겠다는 비트겐슈타인 전기(前期) 철학의 대전제인 것이다. 이런 구성 과정에서의 벽돌과 같은 구성의 최소 단위로서 대상이 요청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러셀과 마찬가지로 직접경험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과 함께 주어지는 논리형식은 나의 언어에서의 의미의 논리적 원자가 되며, 그로 인해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를 동일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대상이 경험의 내용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ꡔ논고ꡕ를 통해서 일관적으로 암시되고 있는 직접경험에 주의하여 개념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논지는 후에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고 있다.
감각소여(sense-data)는 우리의 개념의 근원(source)이다:
감각소여는 개념에서 기인하지 않는다.35)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감각소여의 세계이다.36)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였던 데스먼드 리 (Desmond Lee)의 필기 노트에 적혀있는 위의 말들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인 것이다. 러셀의 경우 감각소여는 직접지의 대상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감각소여라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는 더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위의 인용문에서는 그가 감각소여를 직접지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 즉 앞서 논의한 요점인 ‘직접지의 대상으로 부터 세계를 구성한다’는 내용과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감각소여의 세계이다’는 내용은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간에 뜻이 잘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감각경험에 주어진 대상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의 역할을 하며, 대상과 함께 주어진 논리형식은 언어의 논리적 원자의 구실을 하면서, 인간의 개념 체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감각소여의 근원이 아니라, 반대로 감각소여가 개념을 낳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고 및 개념 체계에서 유의미한 모든 것은 결국 직접경험으로 부터 온다는 것이다.
(8) 논리형식과 그림이론 (picture theory)의 확장
지금까지 모든 언어의 명제들이 감각경험에 주어진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된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어 ꡔ논고ꡕ의 일부를 해석해 보았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ꡔ논고ꡕ에 나타난 내용의 전체에 대한 해석으로는 불완전 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언어의 구성요소를 대상의 논리형식으로 환원했지만, 이렇게 환원된 논리적 원자로 부터 가장 복잡하게 이루어진 언어의 복합명제 까지로의 확장 과정도 또한 설명해야 했다. 즉 러셀이 직접지의 이론으로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장 확실한 감각소여로 일단 환원한 후에 다시 기술의 이론 (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직접지의 대상의 의미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명제로 확장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이러한 환원과 확장의 이중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놀랍게도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확장 과정은 진리함수론 (truth-function theory)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다.
ꡔ논고ꡕ에 나타난 진리함수론의 역할은 한마디로 복합명제가 어떻게 독립적인 논리형식이나 논리적 상항 없이 사실의 그림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림이론의 요체는 원자적 명제는 그에 대응하는 원자적 사실과 동일한 모사 (copy)를 통해서 실재의 모델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 관계는 원자명제와 원자적 사실 간에 성립하는 것이지만 이들 간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단순대상에 의해 제공된다. 그것은 원자명제의 논리형식이 바로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즉 원자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직접경험에서 대상을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경우 원자명제의 경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원자적 논리형식 (atomic complex)을 경험함으로써, 분자 명제의 경우 역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분자적 논리형식 (molecular complex)을 경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논리와 언어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어려운 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논리형식이라고는 단순대상에 주어진 것 밖에는 없으므로 우리가 복합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순대상의 논리형식을 확장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원자명제가 원자적 사실의 그림이 되는 방법은 단순대상을 지시하는 이름들이 대상에 내재된 논리형식의 지배를 받아 결합함으로써 원자명제가 되면서 사실의 그림이 되는 방법이다. 즉 그것은 직접지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이름간의 연쇄에 의한 것이다(TLP, 4.22). 다음으로 원자명제 이외의 다른 모든 명제가 사실의 그림이 되는 방법은 원자명제의 진리함수적 조합에 의해서이다. 이점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ꡔ논고ꡕ의 명제 5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5 명제는 원자적 명제의 진리함수이다.
명제 5는 구체적으로 조합이 얻어지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명제 6과 결부시켜 설명될 때에 그 의미가 완연히 이해될 수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6에서 모든 진리함수는 주어진 원자명제에 대한 부정 (negation)의 연언 (conjunction)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부정과 연언을 이용한 셰퍼 기호37)의 반복적인 적용이다. 다른 논리사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논리사와 양화기호(量化記號)를 배제하고 가장 단순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 논리사는 부정과 연언을 이용한 셰퍼 기호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셰퍼 기호의 적용만으로 원자명제가 가진 그림의 성격을 전 명제에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먼저 논리적 상항은 어떤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그의 ‘근본적인 생각’(ꡔ몸고ꡕ 4.0312)에 의거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논리적 상항들을 셰퍼 기호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들어 선언 ‘v’ 은 셰퍼 기호 ‘∣’ 에 의해서 대치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pvq’ 대신 셰퍼 기호만을 사용하여 ‘(p∣q)∣(p∣q)’ 라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셰퍼 기호만으로 다른 모든 논리상항들을 대치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떠한 논리 연산도 ‘연언’과 ‘부정’만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셰퍼 기호를 이용한 문장 p∣q 는 ¬p‧¬q 라는 부정의 연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은 ꡔ논고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5.5 모든 진리함수는 원자 명제들에 대해
‘(-----T)(ξ, ....)’
라는 연산을 연속적으로 적용시켜 얻은 결과이다.
이 연산은 오른쪽 괄호에 해당하는 모든 명제를
부정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이 명제들의 부정이라고
부르겠다.
위의 두 괄호는 명제 5.101에 의거하여 (FFFT)(p,q) 로 다시 쓰여질 수 있는데, 이는 바로 p∣q 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더 단순한 기호 N(ξ) 로 표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바로 명제 5.502에서 보여지듯이 ¬p‧¬q‧¬r‧...과 같이 주어진 원자명제들의 집합에 대한 전체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논리 상항을 비대표적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채용하고 있는 최소한의 논리연산인 ‘연언’과 ‘부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연언과 부정은 그 스스로 사실을 대표하는 그림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원자명제가 가지는 그림의 성격을 다른 명제에로 확장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원자명제의 그림적 성격이 어떻게 해서 연언과 부정이라는 연산을 통해서 보존되는가 하는 점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두 원자명제의 연언이 하나의 복합명제가 되면서 하나의 복합사실의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부정이 원래 문장이 가진 그림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양극성을 이미 주장한 바, 이 난점이 극복되고 있다. 즉 원자명제의 부정은 그 의미는 원래명제와 반대가 되지만 동일한 사실 (또는 그림)을 대표하게 된다는 것이다.
ꡔ논고ꡕ 4.0621에 이러한 의미의 양극성이 제시되어 있다.
4.0621 명제 p 와 ¬p 는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 두
명제에 하나의 동일한 실재가 대응한다.38)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명제의 의미(sense)라고 하는 것은 명제의 사실과의 일치, 불일치의 여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실이 존재할때 명제가 말하는 것이 그 사실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 부르며, 불일치한다면 거짓이라 부른다. (ꡔ논고ꡕ 2.21, 2.212) 그래서 p 와 ¬p 는 반대되는 의미(sense)를 가지게 되지만 그들이 대응하는 사실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명제 p 에 부정 기호 ¬ 를 덧붙인다 해서 p 에 대응하는 사실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p 는 긍정적 사실을 대표하고 ¬p 는 부정적 사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p 와 ¬p 는 동일한 사실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ꡔ노트 북ꡕ에서 말하고 있듯이 어떤 명제를 이해할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명제가 참일때 어떤 경우인가 하는 것과 명제가 거짓일때 어떤 경우인가 하는 것”이다. (ꡔ노트 북ꡕ p. 89, ꡔ논고ꡕ 5.5151 참고)
이와같이 부정은 그림의 성격을 보존해 주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뒷받침될 수 있다. 강한 의미에서 해석해 본다면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모든 논리상항과 더불어 부정 조차도 논리상항의 영역에서 제거해 버린 것이다. 다만 셰퍼 기호의 의미를 지탱해 주는 요소로서 부정은 연언과 더불어 논리라는 강을 건너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확실히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6이 명제 5와 더불어 원자명제의 그림적 성격이 어떻게 다른 모든 명제에로 확장 가능한가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의 경우에서 처럼 복합명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복합 논리형식이나 논리상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복합명제는 원자명제의 논리함수적 연산의 결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점은 이제 명제 5와 명제 6 사이의 언명들을 통해서 뒷받침 되고 있다.
5.234 원자명제들의 진리함수는 원자명제들을 기초로 한
연산 (opeartion)의 결과이다. (나는 이러한 연산을 진리연산
[truth-operation]이라 칭한다.)
5.3 모든 명제는 원자명제에 대한 진리연산의 결과이다.
진리연산은 원자명제들로 부터 진리함수가 만들어져
나오는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 또는 논리상항 없이 언어의 모든 명제가 세계의 그림이 될 수 있는가를 보이려 했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인용한 언명 4.0312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생각’, 즉 ‘논리상항’은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인 것이다. 언명 4.441과 5.4에서도 각각 제시되고 있는 그와 유사한 언급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대상들을 세계의 구성원에서 제외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대상 안에 갖추어진 논리형식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변형된 직접지의 이론과 더불어 그의 논리 개념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9) 비트겐슈타인의 논리(論理) 또는 무논리(無論理)
반복해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복합명제의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논리상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프레게의 논리와 같은 복합명제의 논리가 아니라 세계와 언어의 원자적 기초가 되는 단순대상과 이름의 논리이다. 대상은 논리형식과 더불어 경험에 직접 주어져야 한다. 일단 대상이 주어지면, 주어진 대상들 간에서 원자적 사실의 결합 조차도 단순대상의 논리형식 자체의 규정에 따라 일어나게 된다. 원자적 사실을 만들기 위한 모든 대상의 가능한 조합은 이미 대상의 논리형식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는 힌티카 (Jaakko Hintikka)의 지적대로 “육면체를 끈끈이나 풀과 같은 사면체 이외의 요소로 붙여주는 식의 결합이 아니라, 그림 퍼즐 (jigsaw puzzle)과 같이 하나의 퍼즐 조각이 다른 조각들과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가 이미 퍼즐 조각의 형태 (form)에 주어진 그림 퍼즐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39)
ꡔ논고ꡕ의 2.03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은 원자적 사실에서 체인의 고리와 같이 맞물린다”고 한 비유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는 대상들을 결합하기 위해서 논리 외적인 요소로서의 풀이나 끈끈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직접 경험하기만 하면 되고, 그 외로 다른 논리적인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저 그림의 성격을 확장시켜 주는 진리함수론 뿐이라는 것이다. 진리함수론은 원자명제의 그림적 성격을 모든 명제로 확장시켜줄 뿐 아니라, 동시에 아무리 복잡한 명제라도 그 저변에는 우리의 직접경험에서 주어진 직접지의 대상이 기초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단초적으로 주어진 것은 대상과 그에 대한 이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전체 언어와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것도 또한 이들 이름의 결합의 총체와 대상의 결합의 총체일 뿐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그림 퍼즐 논리의 여파는 곧 대상의 직접경험에 근거한 전체 개념 구조를 이상언어로 코드화 (codification)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개념적 사고언어 (Begriffschrift)를 구성하는 논리라고 해야겠다.
이와같이 볼때, 진리함수론은 그림이론과 완전히 독립된 이론은 아니다. 복합명제가 사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이유는 진리함수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진리함수론은 그림이론의 한 요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거나, 대상의 직면성과 진리함수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전부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는 다른 어떤 요소도 없고, 대상의 직접경험과 진리함수론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상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대상의 논리형식은 진리함수론을 통해 우리의 모든 언어의 논리형식에로 확장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한 논리가 보여주는 바는 바로 직접지의 대상과 진리함수를 통해 우리는 사실과 대응하는 그림 (모델)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ꡔ논고ꡕ에 있어서 사실과 그림의 관계는 따라서 정적으로 비교 가능한 관계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확실히 그의 논리는 보통 프레게 이후에 체계화되기 시작한 형식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논리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ꡔ논고ꡕ에 나타난 논리는 논리적 원자인 대상의 논리형식이 직접경험에 주어지는 현상의 대상에 내재된 논리이므로 현상논리(phenomeno-logic), 또는 논리적 연산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함수를 통해 일어나므로 진리함수적 논리 (truth-functional logic)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직접경험에 주의함으로써 전 개념 체계의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분석 (logical analysis)은 우리의 언어에 있어서의 개념 분석 (conceptual analysis)이나 다름이 없으며, 이점에서 그러한 개념, 또는 논리와 경험 간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그의 전기 철학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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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리철학논고에 나타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박병철|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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