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이준규, 나는 "그냥' 쓴다 (현대시학 2016.9)

나뭇잎숨결 2016. 9. 26. 19:49
나는 "그냥' 쓴다 (현대시학 2016.9) TEXT

2016.09.0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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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의 시를 어떻게 쓰는가. 나는 나의 시를 어찌 발생시키는가. 나의 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 지면은 그런 것을 쓰는 자리 같고 그러니 그런 것들에 대해 써보겠다. 나는 그냥 쓴다. 나는 내 멋대로 쓴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데, 쓸 수 있는 대로 쓴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냥’ 쓰는지 설명해 보겠다. 그 전에 발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발생은 요즘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니까. 나는 요즘 시쓰기는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를 쓰는 일은 시를 발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발생하게 하는 일 같다. 나는 확정할 수 없는 분열된 복수체이기에, - 설명해 보자. 나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그렇다고 정신불열증을 겪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특히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분열된 존재는 더 분열된다. 언어가 없다면 어쩌면 이런 분열된 감각, 아니 분열의 감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잠자는 나와 시를 쓰는 나는 다르다. 조금 구체적인(문학적인)예를 들자면, 문장(시)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매번 처음 쓰려던 것에서 벗어나 내가 쓴 문장에 끌려 다니고 있는 나를 느끼는데, 그럴 때면 쓰기 이전의 나와 문장을 따라 헤매고 있는(모험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다른 ‘나’ 같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 평소의 나와 쓰는 나는 다르고, 쓰면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생시키고 있는 셈이다. 나는 철학서나 다른 이론적인 책에서보다 문학에서 더 많은 생각거리를 얻고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다. 쓰려면 많은 생각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쓰면서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나의 글쓰기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쓰인 문학 작품을 읽을 때면 나의 뇌는 활발해지는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것 같다. 읽고 있지만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나는 그 순간 무언가를 쓰게 된다. 이 말은, 그 텍스트가 수준이 낮거나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쓴 것과 유사할 뿐 내가 쓴 것이 아니기에 내가 쓴 것이 내게 줄 수 있는 만족감을 그것은 주지 못한다. 아니다. 내가 쓴 것은 내게 어떤 만족도 주지 않는다. 찰나를 빼면. 나는 쓰면서 만족하는 것이지 쓴 것에 대해서는 이제 무관심하다. 물론 타인들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무튼, 내가 시를 쓰는 행위는 ‘나’를 발생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고정되는 일이 아니어서, 계속 하게(쓰게)된다. 어떤 사람들은 시를 지면에 고정시키고자 한다. 기껏해야 울림이니 뉘앙스니 상징이니 비유니 지평이니 이미지니 하는 말들로 그 고정된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하고자 하지만 정지된 텍스트라는 면에서 해석에는(받아들임에는)한계가 있다. 시의 해석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시 한 편이 줄 수 있는 느낌이 한정적이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방식은 그것과 다르다. 나는 무언가를(나를 포함해)발생시키고 그 발생된 것이 자동적으로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요동치고 폭발하기를 바라므로(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시의 시작을 마련할 수 있지 그 다음은 거의 자동적이다. 물론 이 자동이라는 것도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꿈이나 무의식을 핑계로 삼는 저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것에 매력을 느껴본 일도 없다) ......

했다. 그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하다 보니 별 재미도 매력도 보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쓰다 보니, 쓰면서 새롭게 생성하고(발생하고)있는 ‘나’가 있을 뿐이었지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시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시처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강 말하면, 감상적이고 낭만적이고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에 반응해 그런 느낌을 세련되거나 투박하게 비교적 짧게 쓰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람들이 시라고 느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금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내 시가 너무 시 같지 않다고 느낄 때는 상투적인 슬픔과 아름다움을 내 글에 끼어 넣기도 한다. 이제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다. 그러고 싶다면 그러면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아름다움에 무감하다. 나는 이제 시적인 자라기보다는 산문적인 자인 것 같다. 하지만 나보다 더 시인 같은 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써서 시라고 발표하고 그럴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시인에서 벗어날 일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암묵적(관습적) 약속에서 이제 벗어나고자 한다. 내가 시인이라면, 내가 쓰는 것은 다 시이어야 한다. 내가 만약 시라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저 그 형식의 완고함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한 셈이고 크게 좌절할 것이며 모든 글쓰기를 중단할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무언가를 걸고 있다. 그러니까 내기 중인데,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와 같다. 내겐 글쓰기가 전부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소박한 예술이나 음풍농월이나 여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시인에게 무당과 같은 이미지를 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시를 사유의 한 형태, 그것도 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이 근사한 생각이기를 바란다. 나는 보통 매일 쓴다. 매일 ‘시적’으로 되지는 않음에도 매일 쓴다. 시에 대한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발생시켜야 하기에, 나를 매일 생각하는 자로, 매일 미지의 것을 느끼는 자로 전환시켜야 하기에, 나는 매일 쓴다. 비가 오는 날도 쓰고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쓴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 라는 문장을 쓰면서 그 문장을 쓴 나와 그 문장이 무언가 새로운 두 번째 문장을 발생시키기를 바라면서 비가 온다, 라고 일단 쓴다. 그러면 무엇이든 쓰게 돼 있다.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쓰는데 어찌 잘 쓸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느끼는 것, 떠올리는 것, 이미 쓴 문장이 느끼는 것(이 문장은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문장들도 느낀다.)을 계속 쓴다. 그러니, 쓰자, 라고 생각하면 쓸 수 있다. 늘. 나는 계속 쓸 수 있다. ‘그냥’ 쓰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쓰레기’에 가깝고 어떤 것은 몹시 ‘아름답’다. 하지만 내게는 같다. 쓰는 것이 중요하고 한 단어라도 내게 의미 있는 무엇이 발생했다면 나는 순간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를 쓰면 이제 모종의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다시 읽어보고 최근 발표한 시 한 편을 보여주고 그 시의 발생 과정을 대강 설명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내 시를 내가 설명하는 것은 좀 이상한데,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발생’에 관한 생각이 내 시와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것이다. 시인의 시와 생각은 일치하지 않는다. 보통. 그것이 일치한 시인이 있으면 누가 그 시인의 이름을 알려주길 바란다. 내가 아는 시인 중에 그런 자는 없다. 나는 연습 중이다. 나는 쓰는 것을 통해 어떤 사유를 발생시키고 있고 그 사유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하지 않는 나 역시 나라는 점에서, 갈 길은 멀고 희망은 없다. 아까는 글쓰기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한 것 같은데, 솔직히 나의 인생은 허망하다. 나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시는 알다가도 모르겠고 나는 쓰는 어떤 나일 뿐이다. 시든 무엇이든. 최근 시를 보자. 제목은 ‘여름이고 가을이다’이다.

 

 

  여름이고 가을이다. 너는 같은 곳에 앉아 있다. 네가 떠올리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지금 네가 떠올리는 것을 솔직하게 쓸 생각은 없다. 너는 같은 곳에 앉아 있다. 너는 무언가를, 그러니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그것이 시적인 이미지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잠시 생각한다. 모든 이미지가 시적인 이미지는 아닌데, 너는 시에는 시적인 이미지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시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한다. 그것은 잠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는 모종의 말장난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쓸 생각이 없다. 너는 같은 곳에 앉아 있다. 너는 에어컨의 소음을 듣고 있다. 너는 담배를 피우며 커피나무를 보기도 하고 배롱나무를 보기도 하고 식당으로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하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가거나 편의점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나 다리나 허벅지나 얼굴의 한 면을 보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나오는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어떤 자들과 인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너는 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시와 시를 쓰려는 사람과 이미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읽지 않는 사람과 시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과 시에 가끔 관심을 가지는 사람과 시에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지만 소설 생각도 하고 날씨 생각도 하고 너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너의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가끔 세상 생각도 한다. 너는 펜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면서 만드는 소리를 듣고 있다. 너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데, 그것을 형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표현할 수는 있는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지는 정하지 못한다. 너는 어느 날 무대 위로 올라간다. 너는 조금 비스듬히 서서 너의 시를 읽는데 고개를 들지는 않는다. 가끔 텍스트에서 눈을 들어 천장을 보기도 한다. 천장에는 디스코볼이 매달려 있고 디스코볼은 돌아가는 것이고 그 디스코볼은 무한한 돎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디스코볼은 미러볼과 거의 같은 것이다. 아니 같은 것이다. 시대와 장소와 관점에 따라 미러볼은 디스코볼이 되기도 한다. 너는 디스코 음악을 좋아한다. 너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너는 명연주 명음반인지 명음반 명연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낮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어떤 날은 참을 수 없어 발작적으로 일어나 라디오를 끈 적이 있다. 너는 때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거나 강가의 자전거 도로에서 낚시하는 노인들이 낚시하러 가는 자전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가장 좋게 여겨질 때가 있다. 너는 낚시하기 위해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가며 선장이 틀어놓은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음악은 뱃고동 소리처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음악을 몇 시간 들어본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 음악을 그렇게 오래 듣는 것은 그렇게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기보다 지금 문장을 쓰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너는. 너는 이 글이 시에서 한없이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렇다면 소설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대로 계속 쓰고 있다. 너는 한 편의 시에 관심이 없고 한 권의 책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에도 관심이 없고 네가 평생 쓸 책에 관심을 둔다. 너는 이런 글을 평생 쓰다가 죽을 것인데, 어쩌면 대단한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있다. 너는 이런 글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생각해 보는데, 별 생각이 없다. 다시. 너는 늘 다시 시작하는 것을 어떤 동력으로 삼는다. 그것이 너의 모터이자 고동이다. 너는 메타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있다. 너는 다른 것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만 쓰고 싶다면 너는 이런 것만 쓸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어떤 상투적이기까지 한 낭만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독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네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라고 느낀다는 것인데, 그것이 습관인지 아니면 너의 타고난 소심함인지 확정할 수 없다. 너는 이 글이 여기서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더 쓴다. 너는 오늘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제2호 태풍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밤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해가 빨리 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노을을 보며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더 빨리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네게 문학은 여전히 심각한 것이고 시는 여전히 추상적이다. 너는 네가 처음에 떠올린 이미지를 기억하려고 한다. 너는 아마, 늘 떠올리는 이미지들 중 하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누추한 골목인데, 누추한 골목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모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누추한 골목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니 토하지 마라, 라는 뜻의 글이 씌어 있을 수도 있는,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바른 벽이 있는 골목. 너는 그런 골목을 떠올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려다 만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일 수도 있고 치명적인 기억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 글과 별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글과 상관하는 이미지는 무엇일 수 있을까. 너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언덕을 오르며 너를 막는 것들을 지나 너는 계속 가고 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너는 장애물을 하나 둘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모종의 들판을 만날 수 있다. 들판이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너는 모종이라는 단어를 쓴다. 주체는 영원히 하염없는 것이다. 너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확언하는데, 그러니 잠시 기분이 좋다. 너는 차라리 하나의 관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 하는데, 사실 이미 너는 하나의 관념이다. 네가 눈을 감으면 세계는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사라진다. 네가 눈을 뜨면, 네 앞에 전개하는 것이 너의 유일한 우주다. 이런 사유는 결정적으로 답답하다. 너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움직이는데, 너의 이 모든 짓은 너의 작은 세계로 수렴하여 무한이 된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의 관념이다. 웃고, 울기도 하는. 너는 언덕을 그리고 있다. 너는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을 계속 가고 있다. 너는 같은 곳에 있다. 여름이고 가을이다.

 

 

 

  나는 이 시를 쉽게 썼다. 어떤 강의실에 앉아 있었고 그 강의실에서 이 시를 썼다. 나는 무언가를 보았고 본 것을 쓰면서 생각나는 것을 썼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 말이 만드는 생각을 또 썼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을 썼다. 이 시의 발생은 단순하다. 쓰고 싶다는 느낌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처음에 어떤 문장이든 쓴다. 그러면 시작된다. 나는 이제 ‘아름다운’ 문장을 찾지 않기에, 편하게 쓸 수 있다. 나는 ‘시’를 망치고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이 시는 그래도 비교적 시 같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모종의 균형을 노린 것이다. 균형이 생기면 시 같고 슬픈 느낌마저 생긴다. 요즘의 내 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시 같지 않다. 이것은 상당히 ‘시’에 가깝다.

 

  더 쉽게 설명하고 싶었으나 역부족이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나를 실험하고 있다. 시가 아니라. 나는 나를 발생시키고자 한다. 시로.

 
 
     
 
어느 날의 시론(계간 파란 2016 여름) TEXT

2016.08.1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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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시론>

 

 

 

시를 생각하는 순간, 시는 사라진다. 그것을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그것이 아닌 것이 된다.

 

시는 언어의 한계와 싸우려는 속성이 있다. 시는 언어와 싸운다기보다 말과 싸운다. 시는, 사과는 과일이다, 라는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모름을 통해 언어의 지평을 다르게 하려고 한다. 시는 난해해 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는 멀어지고 있다. 온 사방으로. 시가 시를 꿈꾼다면, 시는 온 사방으로 멀어지며 편재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시가 시를 쓰는 상태를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니다. 이미 시가 시를 쓰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시가 시를 쓴다기보다 문장이 문장을 쓰고 있다. 하나의 문장이 출현하면 다음 문장은 자동이다. 이것은 자동 기술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꿈이나 환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이다. 언어의 구조와 속성은 의외로 단순할 것이다.

 

삶은 늘 타협의 연속일 수밖에 없지만 문장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문장도 내적으로는 역시 타협이다. 노이즈의 문장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것을 주장할 수는 있다. 또, 노이즈 역시 음악일 뿐이다. 음악은 타협의 산물이다. 달리 말하면 미적 조작이다.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정리하려는 순간, 어떤 절망감을 느낀다. 그 절망감은 정리에 대한 두려움 일 수 있다. 정리를 하려는 순간, 마치 내 생각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불안.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것. 다른 것이 되어 더 좋은 것이 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일 텐데 그렇게 만들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나의 시에 대한 생각은 그래서 정리가 안 된 것 같다. 그럴듯하지 않더라도 언어화 작업을 할 필요를 느낀다. 이제.

 

나는 어떤 식으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이런 시와 저런 시를 구분하는 것일까. 또, 나는 어떻게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시와 산문을 구분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는 그것을 구분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것을 일관된 슬픔의 장치의 유무로 구분했다. 며칠 전에는 리듬의 유무로 구분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시는 문장과 문장을 통해 발생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산문의 꼴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실험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실험은 사유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정신의 실험이 부재하는 문장의 실험은 아이들 낙서에 가깝다. 그것이 주는 미적 기쁨은 사소할 뿐만 아니라 코드의 교환일 뿐이다. 가령, 속어나 은어의 경우처럼.

 

나는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변한 것이다.

 

시가 일상과 마주칠 때, 시는 흩어진다. 시가 영성을 느낄 때, 시는 부재한다. 그렇다고 그 중간 어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의 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엇에 있을 뿐이다. 시의 정치성은 늘 그 너머에 있다. 말장난 같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기교는 단순하지 않다. 잘 된 시라는 것은 당대의 습관일 뿐인 경우가 많다.

 

시는 사유의 하나이다.

 

시는 광기로만 이루어 질 수도 없고 논리로만 이루어질 수도 없다. 시는 수학이 아닌데, 어떤 수학이 필요하다.

 

지금, 어떤 시도 사전과 문법을 극복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시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가 지금까지의 새로움이라면, 앞으로의 새로움은 인식 틀을 뒤흔드는, 그리하여 문법이 아니라 사고를 재창조하는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발생하면, 시라는 이름을 버려도 좋을 것이다.

 

나는 시에 지나친 의무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시가 되려고 하는 자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비주의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시의 의미는 전무하다.

 

무의미한 언어는 없다. 그러니 무의미한 시도 없다.

 

시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시에 가장 큰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날이미지론은 애니미즘에 가까운 생각이다. 그 생각은 슬프고 감동적이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용하다.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유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대상은 오브제를 무작위로 이동 시키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비누는 비누이고 비누가 아니다. 시는 시가 아니고 시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이 아니다. 사유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일을 실재의 차원에서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비대상의 본래 목표일 것이다.

 

언젠간 시가 지면에서 깨어나 움직일 것이다. 그 세계가 무섭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미지는 사기다. 하지만 그 이미지의 영향은 크다. 나는 내 시에서 이미지를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포기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고 이제 생각한다. 그러면 사기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나 자체가 사기이기는 힘들다. 잊힐 수는 있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나에게 시론이 필요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도 시론이 필요하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속 더 쓸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시는 시인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시인이 시인 전부는 아니다. 한 번 발생한 시는 계속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도 사라진다. 나는 그런 곳이 어떤 곳일지 상상할 수는 없다.

 

시의 지옥도 있을 것이다.

 

시라는 이름은 사라져도 된다.

 

텍스트는 하나의 세계이다. 내가 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텍스트라는 단어를 쓸 때는, 정신보다 물질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나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끝없이 사용하고 싶다.

 

시의 정신성은 병적인 무엇에 가깝다. 아름다움 역시 병적인 것이다. 선함은 시와 거리를 둔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시에 이르려고 하는 자이다. 그것은 조롱 받을 만한 짓이다. 나에게 백지와 글자로 가득한 책은 본질적으로 같다. 나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화가에 가까운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나는 이제 텍스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의 대상에 관해 쓰기 시작할 때, 그 대상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발생해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텍스트 차원에서 그 대상은 다른 대상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는 극단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시에 자유가 없으면, 사유도 국한된다. 사유가 국한 되어도 좋은 경우는 정치와 수학뿐이다, 라고 말해 본다. 그럴 리는 없지만.

 

자유는 언어를 벗어난 곳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자유는 사람에게 없다. 언어를 벗어난 자는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언어를 벗어나 있는 자다. 나는 그런 자들이 어떤 정교하고 복잡한 사유의 틀을 자꾸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라고 본다. 그들 역시 망상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망상에서 벗어난 자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망상을 바라보고 망상을 생산하고 망상과 함께 노는 자일 것이다. 시는 망상에 가깝다. 비어 있고 작동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는 치매 상태의 시다. 이 생각은 틀린 생각일 수 있다. 때론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단순하고 짧은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의 시는 모종의 슬픔을 유발하는데,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슬픔이 없는 시. 나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혐오스러운 언어가 아니라면, 문장은 보통 슬픈 것이다.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이미지와 비유를 멀리해 왔는데, 만약 그것을 다시 사용하고 싶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시를 배반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을 배반하는 일보다 나를 배반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

 

나는 시를 사유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의 한계가 있다면, 시는 언어와의 싸움에서 별 승산이 없다는 점이다. ‘실패’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소진’의 언어가 시의 길도 아닐 것이다. 시는 생성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소진으로 파악한다면, 소진에 숨겨진 은밀한 꿈이 있을 것이다.

 

시가 부질없음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시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나조차도 위로하지 못한다.

 

시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시는 나와 어떤 독자를 다른 것으로 계속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하나라면,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을 그런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내 시론은 모순된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순이 나를 계속 쓰게 한다. 쓰는 것 역시 사유의 형태이다. 시는 사유의 몸이다. 언어는 한정적이고 시는 그 한정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내가 계속 쓰려고 하는 이유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텍스트는 죽음과 거의 같다.

 
 
     
 
무제 (시로여는세상 58) TEXT

2016.06.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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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는 시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여럿이다. 장소는 겹쳐 있다. 나는 그것을 ‘겹곳’이라고 부르고 싶다. 장소에는 참도 거짓도 없다. 내가 참일 때, 그 장소는 참이다. 내가 거짓일 때, 그 장소는 거짓이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다. 나는 세계에 섞여 있다. 나는 분리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나다. 나는 홀로 있다. 나는 이미 섞여 있고 나 자신도 겹이고 내가 보는 모든 것은 겹이다. 반복되고, 돌아가고, 움직인다. 나는 ‘그것’을 겨우 쓴다. 아무 생각 없이 쓰려고 한다. 불가능하다. 생각과 문장은 하나의 뚜렷한 장애물이다. 나는 그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가는 곳까지 간다. 그러고 죽을 것이다. 죽음이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거침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길 위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산문으로는 거의 할 말이 없다. 장소는,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문자화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래도 써 본다. 다음부터는 산문 청탁을 수락하는 데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소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이제 내게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곳. 그것을 어찌 쓸 수 있을까. 적당히. 아마도. 그런데 좋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나고 보면, 많은 것들이 시들해지고 취향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들도 수시로 변한다. 나는 좋아하는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어떤 특이한 감정을 만드는 장소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으로 원고지 30매를 쓰는 일은 내겐 역부족. 그러니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우선 짧게나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두고 잡담을 늘어놓겠다.

 

  나를 자극하는 장소는 보통 홀로 있을 때 만나게 된다. 내가 혼자 길을 걸을 때, 내가 어떤 곳에 혼자 있을 때 발생하는 일. 그럴 때, 어떤 틈이나 균열 같은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대상과 장소 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분열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혼돈과 혼란을 경험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순간에 모종의 슬픔과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대강 시적으로 느낀다는 말인데, 시적인 것은 대부분 슬픔과 함께 나타난다. 요즘은 그 시적인 슬픔을 지나 어떤 이질감, 다른 곳에 있는 느낌, 세계에서 제외된 느낌(이 느낌은 소외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망상에 가까운 감정인데, 그 감정은 나를 슬프게도 하지만 묘한 우월감 따위를 주기도 한다.)을 겪는다. 보통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느끼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시인에게 일어난 지극히 바람직한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는 힘든 상태이지만, 시인으로서는 축복에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나 같은 시인들은 꽤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제 너무 자주 그런 상태가 되고,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보는 모든 것, 내가 있는 모든 곳은 특별한 것이 되고 곳이 된다. 특징적인 현상은, 그런 경험이 모두 겹쳐 드러난다는 점이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이 창밖을 걸어가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그 사람은 나다. 그 사람은 과거의 나이고 미래의 나이고 다른 곳의 나이다. 모든 순간은 단 한 번뿐이지만, 나는 이런 경험을 이미 했고 앞으로 다시 할 것 같다. 뭐 이런 것. 얼핏 흔한 감정일 수 있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기시감 따위의 말로 그냥 지나칠 감정이 아닌 것이, 나는 이런 감정에,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고,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장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어떤 길을 걷는다. 특징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을 이미 걸은 일이 있다. 처음 걷는 곳이 분명한데 그런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가진다. 그러면, 전에는 그것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있다. 이런 식이다. 다행히 이런 나의 심리 상태를 쓸 수 있어 미쳤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다. 겨우. 하지만, 미치면 좀 어떤가.

 

  나는 지금 내가 특별한 상황에 이르렀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의 정신이 이 지경이 되었더라도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종의 분열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가령, 세계는 어떤 덩어리다. 그러니까 이것과 저것, 그때와 지금, 이곳과 저곳으로 분리되지 않는 덩어리다. 그것은 늘 겹쳐 있다. 이 세계를 바라보면 볼수록, 이 세계는 확정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그러니까 문장과 문장을 이어나가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늘 부족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 생각은 단일한 것일 수 없기에, 문장화 할 수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로 향하게 된다. 시는 문장이지만, 말이 아니다. 시는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사실 없는데, 그러기에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잘 노출한다. 시는 어쩌면 언어는 불가능하다, 라는 점을 말하는 장르일 수 있다.

 

  써 보자. 밥 되는 소리가 들린다.

 

  우선 나는 언덕을 좋아한다. 나는 숲길을 좋아하는데, 가파르지 않은 숲길을 좋아한다. 그런 숲길을 만나면 그저 그곳에 머물고 싶다. 나는 산과 강과 벌판을 몹시 좋아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늘 돌아갈 장소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어디든 가도 환영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내겐 일정하게 돌아갈 장소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언덕들. 포은로의 언덕. 방울내로에서 포은로에 막 들어섰을 때의 언덕. 그 언덕은 호두커피에서 다시 내리막이 된다. 나는 자주 길을 가지고 싶어 했다. 어떤 길을 내 마음에 들게 만들고 싶었다. 함부로 사용할 부와 권력이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서도 안 되고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대신 거리를 보는 눈, 건물을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바꾸려고 한다. 쓰레기도 보는 눈에 따라 아름답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편애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략, 나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큰 것들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비어 있는 곳도 좋아한다. 공터. 서울에 점점 공터가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러나 모든 것에 쉽게 적응하는 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전경 버스도 예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전경 버스를 두려워했다.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기고자 그것을 달리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박정희 디자인’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이제는. 나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중요한 얘기를 한 직후에, 나는 그 말이 엉터리라고 보통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언덕을 좋아한다. 제주도의 오름들. 경주의 무덤들. 그런 것들은 몹시 좋다. 중림동. 중림동의 그 언덕들. 그러나 이제 그곳에도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아현동의 산동네, 독립문 옆의 산동네들, 옥수동, 금호동, 사당동... 그런 동네들은 지금 다 어찌 되었는지. 아, 사직동.

 

  언덕도 좋지만 들판도 좋다. 들판. 서울에는 흔치 않다. 없나? 모르겠다. 나는 텅 빈 운동장을 좋아한다. 특히 텅 빈 축구장.

 

  나는 평상이니 편의점 앞의 테이블 같은 곳을 좋아한다. 호텔 커피숍도 좋다. 나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어울리는 공간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나는 이제 순진한 자가 아니다. 순진했을 때는 파티니 하는 것들이 몹시 싫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진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상에 반응할 뿐이다. 끝없이 생각하지만, 나의 회의는 나의 예상보다 크다.

 

  세상에 멋지고 아름답고 쾌적하고 은밀한 장소는 많다. 그곳들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싫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기분과 생각에 달려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동네를 걸어본다. 그곳을 아름답다고 느껴도 되는 것일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외양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들은 여러 문화적 인간 행동들의 축적으로 인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사진, 영화,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을 착하게 산다고 선전하는 문학들, 기타 등등) 이럴 때 나는 나의 미적 판단의 비참함을 느낀다. 가난이 아름답다? 아니다.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지만, 끔찍한 장소도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 세상과 사람에 대한 생각을 버린다면 말이다. 가령, 핵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데, 자기만 착하다고 생각한다. 웃긴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야 하고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어떤 특정 장소를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거기에 철학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전에는 안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다.

 

  내가 꿈꾸는 작업실의 모습. 책상, 소파, 작은 책꽂이. 더는 필요 없다. 나는 사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영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술과 담배와 커피와 텅 빈 공간이다. 그 공간을 걸어가는 일.

 

  나에겐 약간의 책이 늘 필요하다. 외국어로 된 책도 필요하고 한문으로 된 책도 필요하다. 나는 책을 작은 방의 책상에서 읽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나는 일찍이, 세상과 담을 쌓은 자였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내 시를 읽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세상과 나를 분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데, 어찌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혁명을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이 있을 것이다. 나의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거의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장실과 소파를 좋아한다. 나는 여러 종류의 화장실과 소파를 경험하고 싶다. 그것은 언덕과 들판을 좋아하는 것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그렇다.

 

  나는 이제 나의 것, 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 나는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다. 나에게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나를 누구나 좀 그냥 두기를 바란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쨌든 시만 쓰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내 생각을 단상의 형식으로 꾸준히 써 볼 생각이다.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빈다. 진심이다.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앞으로는 쓸 수 없는 글을 억지로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겹곳’이라는 조어를 잘 설명하고 싶다. 생각해야 한다.

 
 
 
     
 
송승언 시인과의 대담 (2016, 5 시사사) TEXT

2016.05.3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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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가능성, 가능성의 일기

 

 

 

 

송승언: 시답잖게 근황을 묻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겨울 간 잘 지내셨는지요. 겨울 간 행보를 들려주세요.

 

이준규: 그냥 멍했어. 글도 못 썼어. 가령 시를 못 쓰면 일기라도 썼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못 썼어. 시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서가 아닌, 그냥 한 단어도 쓸 수 없는 상태를 처음 경험한 것 같아.

 

송승언: <7> 발간 이후로 많이 못 쓰셨다는 말씀이죠?

 

이준규: 응. <7> 나오고 조금 더 쓴 뒤로는 안 썼다고 봐야지. <7> 발간 당시에는 다음 책에 대한 기분 좋은 기획 같은 게 있었거든. 그런데 쓰다 보니까 그 기획의 실행이 바로 되지를 않더라고. <7>이랑 똑같은 것밖에 할 수 없었어. 그러면서 못 쓰게 된 것일 수도 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리고 이상하게 글을 안 쓰면 술도 잘 안 마시게 되는 것 같고. 그밖에 근황이라면 백현진이랑 좀 친해진 것 같아.

 

송승언: 얼마 전에 백현진 씨 개인전도 있었죠?

 

이준규: 응. 그 전시 팸플릿의 소개글을 내가 시로 썼지. 최근에 이인성 선생이 시작하신 문학실험실에서 지방으로 순회 낭독을 다녔는데, 그때 현진이도 거의 동행했어. 문인들이 시나 소설을 낭독할 때 음악 연주를 해주고, 본인도 노래를 했지. 술도 밤새 마셨고. 원래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더 친해진 것 같아.

 

송승언: 망원동에 온 지 3년쯤 되었잖아요. 일상에서 망원동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떠한 것들인지.

 

이준규: 내가 버는 돈이 없어서 그런지, 압구정동에 살 때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어. 강가 산책은 좋았지만 그 외에는 나갈 일이 없었어. 나가면 다 돈이니까. 하다못해 찻값도 비쌌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몰고 다니는 사람들 보는 게 유쾌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 압구정동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그곳은 정이 안 가더라. 그런데 여기 오니까 되게 빨리 적응이 돼. 행동하기가 훨씬 더 편해. 망원동이 좋긴 하지만 이곳에도 불만은 있지. 동선이 되게 애매해.

 

송승언: 동선이라면, 산책 동선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준규: 응. 내가 워낙 걸으니까. 걷기 좋은 동네는 아닌 것 같아.

 

송승언: 요즘 망원동도 계속 변화하고 있잖아요? 계속 뭔가 사라지고 또 새로 생기는 중인데, 사라진 곳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간이 있나요?

 

이준규: 유수지 부근에 있던, 아주 옛날에 만든 영세한 연립주택. 망원동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연립주택일 텐데, 그게 헐려서 안타까워. 그냥 깨끗하게 유지 보수만 하면 되잖아.

 

오래된 건물의 철거가 아쉬운 게 향수 때문은 아니야. 내가 원주민도 아닌데 추억이 있을 리는 없잖아? 가령 김소연 시인이나 심보선 시인은 유년을 여기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그 시인들이 망원동에 대해 느끼는 거랑 내가 망원동에 대해 느끼는 건 전혀 다르겠지. 추억에 대해서라면 나는 거의 할 말이 없지.

 

송승언: 말씀 그대로 망원동에 대한 추억도 딱히 없으실 텐데, 그렇다면 그 말씀은 오래된 건물은 가능한 유지시켜야 한다는 건가요?

 

이준규: 응. ‘근대화 초기의 건축물로서의 가치’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형태의 건축물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것 때문이야.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안정감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런 건물들을 보존하면서 공용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건물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겠지. 건물 자체의 소박함 속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하고 안정적인 공간. 하다못해 그런 건물을 보수해 유치원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어?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생각이겠지만 나는 불가능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까.

 

송승언: 도서관 같은 걸로 고쳐도 괜찮을 텐데요.

 

이준규: 그래. 과시적인 체육센터를 새로 짓는 것보다 말이지. 그런 것들 생각하면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지고 산 게 너무나 짜증이 나는 거지.

 

송승언: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시인은 작년 말 울리포프레스에서 <7>을 냈습니다. 그전에는 e북 출판사인 기린과숲에서 <당신>(허남준 공저)이라는 사진시집을 냈지요. 근작 두 권 모두 작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문단의 반응은 어땠나요. 정식으로 리뷰를 다룬 문예지가 있었는지요? <당신>은 거의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7>도 그랬나요?

 

이준규: <7> 역시 사적인 자리에서나 이야기되었지, 다뤄준 잡지는 못 본 것 같아. 그게 너무 짜증이 나. 개인적인 짜증이라기보다, 예를 들어 한유주라는 작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중요한 작가라면, 한유주가 1인 출판사를 차린 사실에 대해 <문학과 사회>와 같은 계간지에서 다뤄야 한다고 봐. 하다못해 트위터에서라도 울리포의 모든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줘야 해.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이해가 안 돼.

 

송승언: 어쨌든 이준규 하면 문단에서 누구나 아는 시인이잖아요? 그런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대다수 문예지들은 이름 난 작가라고 다뤄주는 게 아니라 이름 난 출판사, 또는 이해관계에 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상품이라야 다뤄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준규: ‘그렇게 하지 않아야 된다’라는 입장을 유지한다는 출판사마저 그러면, 무슨 맛으로 메이저 출판사를 상대해?

 

송승언: 문단 안팎에서 문단 문제 이야기를 할 때 ‘출판사에 종속되려 하는 작가’ 문제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준규 시인을 비롯한 여러 전례들을 살펴보면 작가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아요. 문예지를 가진 출판사나 편집위원들의 문제가 더 큰 것 아닐까요?

 

이준규: 가령 메이저 출판사에서 판매고가 높은 작가들 있잖아? 나는 그런 작가들이 인생을 상업적으로 살고자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라고 봐. 각자가 자기 문학을 하는 건데, 그게 많이 팔리는 거겠지. 많이 팔 수 있다면 많이 팔면 좋겠지만, 어떤 출판사들은 상업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잖아. 그렇게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한쪽으론 그런 판매가 잘 되는 작가들만 챙기는 일은 꼴불견이라는 생각을 해.

 

예를 들면 자기 출판사에서 책을 낼 예정이든 아니든 신인 중에서 개성이 뚜렷한 작가가 있다면 그 친구들을 특집으로 다뤄줘야 해. 스타 작가나 원로들만 챙길 게 아니라. 대표적인 문학 출판사들은 벌써부터 원로들 챙기기에 바쁜 것 같아. 한국문학의 역사는 아직 짧아. 그러니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계속 찾아 다녀야 해. 옛날처럼 발로 뛰어야 한다고. 그런데 폼 잡고 앉아가지고 애들 기나 죽이고 있지. 젊은 사람들이 더 건방져져야해. 선배들 무시하고.

 

송승언: 그러면 때리거나 전화로 협박하는 선배도 있고 그러잖아요. (웃음)

 

이준규: 같이 때려. 요즘 인디 이런 거 많잖아. (웃음)

 

송승언: 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죠. <당신>은 이준규 시인의 시와 허남준 작가의 사진(과 표지 그림) 작업이 함께 맞물려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7>은 울리포프레스 웹페이지에 수개월 간 연재한 시를 묶은 것이고요. 말하자면 그 두 책에 실린 글들은 시작부터 다른 플랫폼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작품들인 셈인데요. 이준규 본인에게 있어 시를 쓰는 게 중요하고 플랫폼은 무엇이 됐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꾸준히 다른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이준규: 일단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당연히 어떠한 플랫폼으로든 발표가 되어야 해. 발표하기 위해서 쓰는 거니까. 나는 책을 자주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어렸을 때는 좋은 출판사에서만 책을 내고 싶었어. 그런데 그게 별로 상관이 없어지니까 다양한 곳에서 책을 내는 거지. 요즘 1인 출판사도 많은데, 내가 작은 출판사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기보다는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야. 젊은 사람들이 좋고 새로운 걸 하고, 그것들이 내가 참여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라면 같이하고 싶어. 늙은 사람들이 하는 게 재미있어 보이면 그것도 같이하고 싶고. 이상하게 동년배들은 나랑 잘 안 놀아. 술친구는 많지만, 나랑 뭘 하려고 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동인을 하긴 했었구나.)

 

내가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개인 잡지도 해보고 싶고 출판사도 해보고 싶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욕망이 컸어. 서점도 하고 싶었고. 다 돈이 드는 거지만 개인 잡지는 그렇게 돈 드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회적 상황이 바뀐 거겠지. 그래서 나는 승일이가 부러운 면도 있어. 자기 출판사를 만들고 <1월의 책> 같은 책도 냈잖아. 내가 하고 싶었던 시도였기에 훌륭하게 보는 거지.

 

송승언: 이어 <7> 이야기를 해볼까요? <7>은 이준규의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7> 제작에 관련된 이들 중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7>에는 관례적으로 책의 갈래를 설명하는 단어가 없어요. 가령 ‘시집’이니 ‘산문집’이니 ‘에세이’니 하는 것 말이죠. 때문에 산문집인 줄 알고 있는 독자들도 많더군요. (한편 그렇기에 7은 시집도 산문집도 아니고, <7>은 <7>인 거겠죠.) <7>을 그저 <7>로 두는 것은 시인의 의도였나요?

 

이준규: 내 의도였어. 이런 게 유럽의 경우는 흔한 거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이런 생각을 했어. 우리나라에도 산문시를 쓴다거나, 시와 소설이 결합된 장르를 새롭게 시작한다거나 하는 시도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잖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걸 장르로 규정하는 이름을 새로 만들려고 했다는 거야. 가령 시소설, 산문시 따위(산문시라는 말은 보들레르 때부터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최근에 김혜순 시인이 장시집을 낸다고 하는데 그것의 장르를 ‘시산문’이라고 칭하더라고. 그런 식으로 뭔가에 자꾸 이름을 붙이는 게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이름, 어떤 타이틀을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물질적으로 자꾸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에 내가 <7>, <8>, <9>, <10> 이런 식으로 계속하고 이걸 독자들이 시적인 작업이라고 느낀다면, 그게 내가 목표한 바인 거지. 말하자면 시적인 것을 ‘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거야. 다른 작가 중에서도 특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뭔가를 하는 이들이 있잖아? 시라고 할 수도, 소설이나 일기라고 할 수도 없는 이런 것.

 

송승언: 시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자는 말씀이죠?

 

이준규: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시는 굉장히 넓은 거니까. 뭐 이런 말이 있잖아. “펑크는 음악 장르가 아니고 정신이다” 또는 “스타일이다” 등등. 시도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예술에 전문성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장르적으로 특정화되면 될수록 말하자면 부유층의 향수 대상이 된다는 거야. 예컨대 장인이 만든 자개의 기술적 가치와 시나 그림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가 구분이 되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 구분을 하려면 오히려 장르적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시조라든지 혹은 정형시 등에서 벗어나는 건 당연한 건데, 오랫동안 그것들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최근 계간 <시인수첩>에 원로들이 모여서 요즘 젊은 시인들 시가 난해하다는 둥 비판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는 거야. 젊은 시인들이 원로 시인들보다 훨씬 잘 써. 훨씬 더 테크니션이야. 젊은 사람들한테 테크닉을 좀 배우라고 그래. 요즘 젊은 시들 보면 분명히 발전한 부분이 있는데 기교가 아주 자유로워. 선수들이야. 좋은 현상이지. 기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기교를 자기가 쓰냐 안 쓰냐 하는 건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일단 기교가 많으면 나쁠 게 뭐야?

 

송승언: <7> 이야기를 계속 들어볼까요. <7>은 웹상에서 읽을 때와 책으로 읽을 때의 느낌이 꽤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하루 정도 짬을 내어 교정 작업을 도왔지만, 보면서도 제가 웹에서 보던 원고랑 같은 원고인가 싶었거든요. 작가 본인으로선 어떤가요? 혹시 다르게 느껴졌다면 작가 본인으로서는 어떤 지점에서 유다르게 느껴졌는지요?

 

이준규: 나도 아마 너랑 거의 비슷하게 느꼈을 거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웹상에서 볼 때에는 성의도 없고, 시라는 장르가 특유하게 가지고 있는 어떤 슬픔의 뉘앙스, 어쩔 수 없는 낭만성, 이런 것들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을 했어. 너무 일기 같고. 그런데 책으로 묶은 뒤에 보니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냥 어떤 텍스트를 웹으로 볼 때보다 책으로 볼 때 내가 훨씬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동물적으로 말이야. 너도 그렇지 않을까?

 

송승언: 저 역시 그런 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종이-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준규: 만약에 웹이나 텔레비전 같은 게 더 지배적인 상황이 되면 문학의 형태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송승언: 웹진이나 e북 등의 형태로 인터넷 상에도 꾸준히 문학 텍스트들이 출몰하고는 있지만, 아직 종이-문학의 연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요.

 

이준규: 나는 이런 생각도 드는데 뭐냐면, 나는 내가 언어의 무의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바보 같은 의미를 찾는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거든? 말하자면 실험적이고 전위적이고 내적으로는 혁명적인 부분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인데, 이런 나 같은 사람이 오히려 문학의 종말을 앞당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 같은 자가 문학을 없애는 자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며칠 전에.

 

송승언: 작가들의 절필이 문학을 돕는 길일 수도 있죠. (웃음)

 

이준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전혀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아. (웃음) 덧붙이자면 문학이 사소해진다, 이런 말을 하잖아. 그런데 문학이 사소해지는 건 시인 때문이 아니야. 사회 탓이야. 시인은 사회를 이끌어나가려고 했던 존재들이 처음부터 아니야. 플라톤 이야기 많이 하잖아.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 시인들은 추방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시인이 사회가 싫어하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어. 비꼬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게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속으로는 무시하면서 적당히 대접해주는 척하지 말고. 돈도 안 주면서.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이 사회에서 내가 시 써서 어떻게 먹고 살아?

 

송승언: 그 사소함에 대한 이야기가 곧 ‘일기’ 이야기로 이어질 수도 있겠군요. 이준규 시인은 트위터나 블로그 등을 통해 꾸준히 일기라고 부르는 유사한 형식의 글들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일기로 쓴 시(즉 ‘일기시’)들과 시 같은 일기들을 구분하고 있어요. 제게는 그것이 텍스트가 발생하는 환경과 과정이 유사하더라도 ‘그 순간을 쓰는 그 순간’ 시인이 어떠한 결정,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어요. 아니,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글을 쓰는 순간 그 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시인의 작업이라고요.

 

이준규: 그 질문은 내가 오래전부터 감추고 싶었던 부분과도 이어지는 것 같아. 가령 내가 서정시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끔 발언할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도 서정성이라든지, 습관화된 한국시의 형태에 젖어 있는 부분들이 있거든.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나는 내가 그런 것들에서 열심히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 시를 내가 읽어도 그렇고, 동료들이 읽어도 그렇고 결국 좋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낭만적인 부분들이더란 말이야. 그런 부분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일기, 시, 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무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 솜씨가 부족한 거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거지. <7>을 지나가면서 그 자신감을 내가 얻을 줄 알았어.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못 얻었지. 하지만 다시 자신감이 생기고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없앨 거야, 정말로. 일기, 트위터, 블로그, 시 이런 걸 구분하지 않고 쓸 거야. 때문에 산문집도 아마 안 내게 될 것 같아. 굳이 출판사에서 내자고 한다면 <7> 같은 걸 내겠지.

 

송승언: 질문의 연장일 수도 있겠어요. 저도 이준규 시인 본인이 ‘수첩시’나 ‘일기시’라고 칭한 작업들 이후로 돌아올 수 없는 큰 강을 건너버렸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시에 있어서 형식이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렇기에 저에게 있어 시의 형식이라는 것은 여전히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돼요.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준규 시인은 지금의 한국시가 받아들일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지난 몇 년간 시인이 쓴 것들이 시인의 문학을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이준규: 자화자찬은 아니고, 나정도 되면 기본적인 테크닉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어떤 시의 형식을, 폼을 갖출 수 있는 감각, 그 시적인 자질과 테크닉만 있으면 나머지는 주관적인 부분인 것 같아. 어렸을 때보다 더 심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내가 봐서 좋으면 좋다라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승언이를 좋아하면 승언이 시가 좋아 보이는 거고, 내가 승언이를 싫어하면 뭘 해도 안 좋게 보이는 거. 흔히 이런 말들 하잖아? “야, 그 사람이 사람은 별로지만 시는 좋아.” 그런 생각이 없어져버린 거지.

 

송승언: 인간과 시가 같이 가는 거네요.

 

이준규: 그런 거지. 내가 쓴 것이 내 눈에 시로 보이면 시로 발표하는 거야. 내 컨디션이 저조하면 내가 아무리 잘 쓰고 누가 그 글을 보고 잘 썼다고 해도 쓰레기로 보이는 거고. 오히려 그렇게 싱거운 결론이 나버렸어. 힘 빠지지만 말이야. 나는 그러니까 사람이 시를 잘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시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한 인간이 사람으로서 살려면 사유, 시선, 감각 이런 걸 개발해야지, 시는 어떤 선에서 그만 써도 되는 것 같아. “나는 쓸 만큼 썼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잖아? 그게 시집을 많이 냈다는 말도, 시를 잘 쓴다는 말도 아니고, 어떤 선을 넘어버리면 그 장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야.

 

송승언: 저도 최근 장르의 한계를 (벌써부터!) 많이 느끼고 있긴 합니다. 하여튼 일기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요. <7> 안에서도 일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일기시를 쓰고 있다. 그것은 바람직한 장르라고 여겨진다. 처음 한 생각이다. 생각은 처음으로 하는 것이 좋다.”(p41) 뭐, 이런 대목도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일기나 에세이는 시, 소설 등속에 비해 낮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예컨대 어떤 작가의 전기, 혹은 작가론의 완성을 위한 사료나 흥밋거리 정도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학의 시점이 작가 개인에 대한 문제로 좀 더 집중된 후로 일기에 대한 생각 또한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말한 김승일 시인의 <1월의 책>이나 <6월의 책> 등도 가까운 예로 들 수 있겠고, 페소아 같은 작가도 근래에 와서 주목을 받았죠. 그런 흐름에 따라 자연히 일기라는 장르에 대한 세간의 인식(사료에 그치거나 아마추어 예술가의 작업일 뿐이라는)도 변화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준규 시인은 어떤 연유로 ‘일기시’가 바람직한 장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이준규: 대단히 길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짧게 해볼게. 우선 글쓰기의 시작은 일기나 편지일 텐데 단지 그것 때문에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고. 일기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시나 소설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한국적인 상황인 것 같아. 그러니까 절대로 일기 문학이나 에세이 문학이 서양에서 저급 문학으로 평가받진 않거든.

 

송승언: <좋은생각> 등의 잡지를 통해 대중적 교양 활동으로서 널리 퍼진 수필에 대한 인식이 그러한 특수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까도 생각되고요.

 

이준규: 하여튼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권처럼 문체 장르가 다양했던 문화도 없을 텐데, 그런 게 다 없어진 마당에 장르에 대한 태도가 서양만큼도 열려 있지 않다는 건 참 답답할 노릇이지. 장르적으로 열려야 돼. 자꾸 장르적으로 보수화되려는 건 아주 창피한 일이야. 어쨌든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야지. 나 같은 경우는 소설이나 일기가 조금만 옆길로 새면 얼마든지 언제나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좋은 소설, 좋은 일기를 읽을 때 느꼈으니까. 쉽게 예를 들자면 요즘 유행하는 키냐르 같은 작가만 읽어봐도 어떤 부분은 완벽하게 시잖아? 그러면 그 완벽하게 시적인 부분을 축으로 두고 읽는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에게 파스칼 키냐르는 시인일 거 아니야. ‘시적인 구절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얼핏 보면 에세이나 일기나 소설로 보이지만 결국 이 자가 하려고 했던 것은 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것을 나는 의도적으로 하고 싶은 거야.

 

송승언: ‘소설시’도 쓴다고 하셨는데, 그 또한 같은 맥락이신 거죠?

 

이준규: 그렇지. 소설이라고 하면 차마 읽기 싫고 지겹지만, 시라고 하면 독자의 자세로는 일단 받아들이게 되거든. 그런데, 시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장점 있잖아? 짧다, 책의 크기가 안 크다, 낭만적이다 등등. 이런 특징에 의존하던 독자라면 읽을 수 없겠지. 귀찮아서. 어려워서가 아니야. 나는 내 문학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기본적으로 아무 이야기도 하고 있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어려울 게 없지.

 

송승언: 이준규 시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인데, 일단 이준규 시에 드러나 있는 특징 중 하나라면 주로 구조적으로 반복되며 무의미를 발생시키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시적’이라고 부를 만한 텅 빈 문장들과 더불어 의미로 가득 찬 문장, 즉 비시적인 문장이 작품 안에 병치된다는 점이에요. 특히나 이준규에게 있어 의미로 가득 찬 문장들은 주로 시론에 대한 말들이 많아요. 시론은 주로 산문이나 대담 등을 통해 따로 논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죠. 특히 이러한 경향은 최근 이준규 시인의 시가 시인의 일상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도드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까닭에 대해서 여쭙고 싶네요.

 

이준규: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첫째는 어떤 것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능력 부족 때문에 그런 버릇이 생겼을 수 있어. 둘째로, 그것들이 분리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 장르적인 규정을 지키는 걸 재미있어 하는 예술가들이 있고, 규정이 없는 걸 더 재미있어 하는 예술가들이 있을 텐데, 나는 후자인 셈이지.

 

송승언: 저는 그런 이준규 시의 방법들이 노골적인, 빙빙 돌아가지 않는 직선형이라 호쾌하다는 느낌도 받았었어요. 어쨌든 그러한 경향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 시집들에서 좀 더 두드러진 면이 있는 듯해요. 무게추가 시 작품에서 시인 개인으로 더 옮겨간 느낌이랄까.

 

이준규: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쓸쓸하고 슬픈 뉘앙스를 좋아하는 지점과 선언적이고 정치적인 문장들을 좋아하는 지점 들을 아주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거든? 어떻게 보면 그런 성향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거지. 그걸 일부러 감추지도 않고 쓰고 싶은 대로 쓴 거지. 방법 이야기를 하자면 좀 병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아. 일단 같은 말을 또 하는 것에 굉장히 쾌감을 느껴. 동물적으로.

 

송승언: 물론 이준규 시의 반복이나 현재형 문장 같은 것들이 주는 효과도 흥미롭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과거 한국시가 시선, 관찰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최근 10년 안팎으로 더 많은 작가들이 지금, 여기의 체험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현재형 서술, 주어 바꾸기, 반복을 통한 주술 효과 등이 그와 관련된 기술들일 텐데 이준규 시에는 그러한 특징들이 모두 드러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준규 시인은 최근 젊은 시인들에게서 자주 공유되는 시적 맥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준규: 글쎄. 별로 그런 것들을 파악하려고 안 하는 것 같아. 내가 시를 읽는 방식은 예전과 변한 게 없는 듯해. 아까 내가 요즘 젊은 시인들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했잖아? 그 말대로 시가 달라졌다면 시를 읽는 방법도 달라져야 해. 그런데 나는 윗세대의 시선으로 그걸 바라본다는 거지. 그러니까 알 수가 없는 거지. 그렇다고 노력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이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 기준에서 보기에 잘 쓰는 것 같다, 그러면 무조건 칭찬하고 보는 거야. 그게 중요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너희 시대가 되겠지. 선배들은 너희들 시 몰라. 그게 중요해.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야. 몰라, 진짜.

 

송승언: 그러면 동세대 시인의 시는 동세대만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이준규: 일단 그런 세세한 것까지 파악할 의욕이 생기지를 않아. 어느 선까지만 알게 되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을 몰랐어. 그러니까 어떤 시인들은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안 그러지만.) “아 요즘 시는 너무 길어서 쳐다보기도 싫어.” 이런 이야기를 우리 세대가 선배들한테 많이 들었어. 결국 자기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거야. 시인들은 대부분 자기한테만 관심 있잖아. 어쨌든 나는 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이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거지. 예컨대 내가 “그 시인 괜찮은 것 같더라.”하고 이야기를 할 때도 있잖아? 그게 어떻게 괜찮은 건지 이야기하려면 내가 더 생각하고 말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거지. 그건 우리 세대가 선배들한테도 똑같이 받은 경험이야. “얘는 진짜인 거 같아.” “얘는 엉터리야.” 그게 무슨 이야기야? 얼핏 봤다는 이야기야.

 

송승언: 그러면 후배들 말고 선배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공공연하게 이승훈 시인을 좋아한다고(특히 후기작을) 언급하시는데, 이승훈 시인의 어떤 면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준규: 농담식으로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느낌이 많이 바뀌기도 하는데, 어쨌든 나는 뭐랄까, 옛날의 이성복이라고 할까? 그의 솜씨 있잖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시는 막 휘갈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이승훈의 존재를 알긴 했어도 ‘아, 이건 아니다, 너무 갔다’라고 생각하던 어린 시인이었거든? 내가 네 또래일 때 말이야. 그런데 내 입장이 바뀐 거야. 지금은 이승훈이 맞다고 보는 거야. 오히려 이성복처럼 쓰는 게 의미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야. 만약 이승훈 시인이 나보다 어떤 점에서 못한 것 같으면 지지를 안 할 거야. 나보다 못한 선생을 칭찬한다는 건 아주 건방진 거잖아? 그런데 노골적으로 이승훈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굉장히 잘 쓰기 때문이야. 언뜻 봤을 때는 잘 쓰는지 못 쓰는지 관심 없었는데, 한번 자세히 보니까 ‘어떻게 이렇게 썼지?’ 이런 게 너무 많더라고. 선생님한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이승훈 시를 ‘치매시’라고 생각해. 치매인데 어떻게 시를 쓰겠어? 한마디로 ‘치매일 때도 시를 쓰는 사람’, 그런 폼을 잡고 계신 것 같아. 나중에 그보다 더 잘 쓰고 싶어. 지금은 그를 위해 연습 중인 것 같아.

 

이승훈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 왜냐하면 시 쓰는 젊은 친구들이든 동료이든 선배이든 맨날 독특함 이야기를 하잖아?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 같고. 독특함 중요하지. 중요한데, 이미 있었던 것을 또 해서 그걸 넘어서려는 것은 독특함보다 더 큰 욕심이고 배짱이거든? 다들 그런 걸 너무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오규원 후기, 김춘수의 <처용단장>, 이승훈이 요즘 쓰는 시, 이런 걸 한꺼번에 끌고 가고 싶은 욕망이 있어. 이성복에는 관심 없고. 그렇지만 신경은 쓰여. 나오면 계속 읽게 돼. 혹시 끝내주게 좋은 걸 쓰실까 싶어서.

 

송승언: 보너스 1. 선거철이니 공연한 질문을 던져볼게요. 사회에 대한 문학의 영향력이 이제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대부분 잘 알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노골적으로 ‘사회 현상’에 언급하거나 기대지 않고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이란 있을까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는 문학이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라고 보는지요?

 

이준규: 나는 어쨌든 문학의 역할은 어떤 감각을, 감수성은 아니고 감각을 바꾸는 거라고 봐. 구호나 언어는 단지 이용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문학의 정치적 이용에는 절대 반대. 그런데 만약에 문인이 사회적으로 아직도 존경심을 받고 있다면, 그런 문인이 나서서 힘을 실어준다면? 예를 들어 어떤 문인이 매체에 나와서 “세월호 재조사해야 된다”라고 강력하게 말한다면, 어떤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송경동 시인과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극히 보수적인 위치에 있는 늙은 문인이 나와서 “세월호 재조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사회적인 힘이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건 좋은 것 같아. 젊은 문인들도 계속해서 늙은 사람들이 겁을 느낄 정도로 뭔가 화가 나 있다는 걸 보여준다거나. 이런 건 좋은 것 같아. 말하자면 테크니컬한 부분인데, 문인이라는 타이틀을 이용하는 거지. 처음에는 그런 이용도 싫었는데, 지금은 이용을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왜냐면 나도 이제는 너무 화가 났어. 어쨌든 문학 자체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봐. 문인이라는 명함이 이용 가치가 있지, 문학은 없어.

 

송승언: 보너스 2. 최근 인공지능이 유행이니 인공지능과 관련된 쓸데없는 이야기도 보태볼게요. 작품은 남고 예술가는 사라질까요? 만약 먼 미래에도 예술가라는 개념이 여전히 존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이건 곧 예술가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인 셈이죠.

 

이준규: 나는 예술이 없어질 것 같아.

 

송승언: 작품이 사라진다는 말씀인가요?

 

이준규: 아니. 작품은 다 있지만 작품이 예술이 아니게 되는 거지. 미래엔 지배구조가 확장되고 계급 격차도 심해지겠지. 노예도 생길 거고. 아주 절망적일 거야.

 

송승언: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게 예술이라는 말씀인가요?

 

이준규: 지배구조가 너무 강해지면 예술은 그저 인테리어 같은 것이 되겠지.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면 어떠한 저항도 없을 테니까, 그러면 아름다움도 없을 거고. 지배가 이미 끝났는데 아름다움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겠어?

 

송승언: 말씀인즉슨, 예술을 저항의 아름다움과 같은 선상에 놓고 계시다는 것 같네요.

 

이준규: 그렇네. 그런데 저항이란 표피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깊이, 저류에서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해. 길게 보고, 꾸준히 세대와 세대를 이어서 가지 않는 한 안 되겠지. 정신 차리고, 혁명을 하려면 진짜로 할 생각을 하고. 짧게 십 년 안에 정권을 교체한다, 이런 거 말고, 완전히 박살낸다, 철저하게, 이래야 한다는 거지.

 

송승언: 우리 세대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이준규: 응.

 

 

그는 <7>에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들의 미와 서정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나는 등을 돌리고 나의 앞으로 전개하는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당신의 한숨은 불안하고 나의 텍스트는 계속한다. 시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완전히 시인인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시가 제 스스로 걸어갈 가능성과, 문학에 아직 잔존하는 가능성이 써나갈 일기의 엇갈림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다. 시는 제 스스로 걸어갈 것이고, 이준규는 다시 자신의 가능성들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시는 시대로, 이준규는 이준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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