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시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여럿이다. 장소는 겹쳐 있다. 나는 그것을 ‘겹곳’이라고 부르고 싶다. 장소에는 참도 거짓도 없다. 내가 참일 때, 그 장소는 참이다. 내가 거짓일 때, 그 장소는 거짓이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다. 나는 세계에 섞여 있다. 나는 분리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나다. 나는 홀로 있다. 나는 이미 섞여 있고 나 자신도 겹이고 내가 보는 모든 것은 겹이다. 반복되고, 돌아가고, 움직인다. 나는 ‘그것’을 겨우 쓴다. 아무 생각 없이 쓰려고 한다. 불가능하다. 생각과 문장은 하나의 뚜렷한 장애물이다. 나는 그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가는 곳까지 간다. 그러고 죽을 것이다. 죽음이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거침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길 위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산문으로는 거의 할 말이 없다. 장소는,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문자화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래도 써 본다. 다음부터는 산문 청탁을 수락하는 데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소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이제 내게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곳. 그것을 어찌 쓸 수 있을까. 적당히. 아마도. 그런데 좋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나고 보면, 많은 것들이 시들해지고 취향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들도 수시로 변한다. 나는 좋아하는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어떤 특이한 감정을 만드는 장소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으로 원고지 30매를 쓰는 일은 내겐 역부족. 그러니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우선 짧게나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두고 잡담을 늘어놓겠다.
나를 자극하는 장소는 보통 홀로 있을 때 만나게 된다. 내가 혼자 길을 걸을 때, 내가 어떤 곳에 혼자 있을 때 발생하는 일. 그럴 때, 어떤 틈이나 균열 같은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대상과 장소 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분열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혼돈과 혼란을 경험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순간에 모종의 슬픔과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대강 시적으로 느낀다는 말인데, 시적인 것은 대부분 슬픔과 함께 나타난다. 요즘은 그 시적인 슬픔을 지나 어떤 이질감, 다른 곳에 있는 느낌, 세계에서 제외된 느낌(이 느낌은 소외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망상에 가까운 감정인데, 그 감정은 나를 슬프게도 하지만 묘한 우월감 따위를 주기도 한다.)을 겪는다. 보통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느끼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시인에게 일어난 지극히 바람직한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는 힘든 상태이지만, 시인으로서는 축복에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나 같은 시인들은 꽤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제 너무 자주 그런 상태가 되고,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보는 모든 것, 내가 있는 모든 곳은 특별한 것이 되고 곳이 된다. 특징적인 현상은, 그런 경험이 모두 겹쳐 드러난다는 점이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이 창밖을 걸어가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그 사람은 나다. 그 사람은 과거의 나이고 미래의 나이고 다른 곳의 나이다. 모든 순간은 단 한 번뿐이지만, 나는 이런 경험을 이미 했고 앞으로 다시 할 것 같다. 뭐 이런 것. 얼핏 흔한 감정일 수 있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기시감 따위의 말로 그냥 지나칠 감정이 아닌 것이, 나는 이런 감정에,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고,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장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어떤 길을 걷는다. 특징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을 이미 걸은 일이 있다. 처음 걷는 곳이 분명한데 그런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가진다. 그러면, 전에는 그것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있다. 이런 식이다. 다행히 이런 나의 심리 상태를 쓸 수 있어 미쳤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다. 겨우. 하지만, 미치면 좀 어떤가.
나는 지금 내가 특별한 상황에 이르렀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의 정신이 이 지경이 되었더라도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종의 분열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가령, 세계는 어떤 덩어리다. 그러니까 이것과 저것, 그때와 지금, 이곳과 저곳으로 분리되지 않는 덩어리다. 그것은 늘 겹쳐 있다. 이 세계를 바라보면 볼수록, 이 세계는 확정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그러니까 문장과 문장을 이어나가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늘 부족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 생각은 단일한 것일 수 없기에, 문장화 할 수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로 향하게 된다. 시는 문장이지만, 말이 아니다. 시는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사실 없는데, 그러기에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잘 노출한다. 시는 어쩌면 언어는 불가능하다, 라는 점을 말하는 장르일 수 있다.
써 보자. 밥 되는 소리가 들린다.
우선 나는 언덕을 좋아한다. 나는 숲길을 좋아하는데, 가파르지 않은 숲길을 좋아한다. 그런 숲길을 만나면 그저 그곳에 머물고 싶다. 나는 산과 강과 벌판을 몹시 좋아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늘 돌아갈 장소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어디든 가도 환영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내겐 일정하게 돌아갈 장소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언덕들. 포은로의 언덕. 방울내로에서 포은로에 막 들어섰을 때의 언덕. 그 언덕은 호두커피에서 다시 내리막이 된다. 나는 자주 길을 가지고 싶어 했다. 어떤 길을 내 마음에 들게 만들고 싶었다. 함부로 사용할 부와 권력이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서도 안 되고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대신 거리를 보는 눈, 건물을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바꾸려고 한다. 쓰레기도 보는 눈에 따라 아름답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편애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략, 나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큰 것들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비어 있는 곳도 좋아한다. 공터. 서울에 점점 공터가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러나 모든 것에 쉽게 적응하는 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전경 버스도 예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전경 버스를 두려워했다.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기고자 그것을 달리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박정희 디자인’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이제는. 나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중요한 얘기를 한 직후에, 나는 그 말이 엉터리라고 보통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언덕을 좋아한다. 제주도의 오름들. 경주의 무덤들. 그런 것들은 몹시 좋다. 중림동. 중림동의 그 언덕들. 그러나 이제 그곳에도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아현동의 산동네, 독립문 옆의 산동네들, 옥수동, 금호동, 사당동... 그런 동네들은 지금 다 어찌 되었는지. 아, 사직동.
언덕도 좋지만 들판도 좋다. 들판. 서울에는 흔치 않다. 없나? 모르겠다. 나는 텅 빈 운동장을 좋아한다. 특히 텅 빈 축구장.
나는 평상이니 편의점 앞의 테이블 같은 곳을 좋아한다. 호텔 커피숍도 좋다. 나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어울리는 공간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나는 이제 순진한 자가 아니다. 순진했을 때는 파티니 하는 것들이 몹시 싫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진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상에 반응할 뿐이다. 끝없이 생각하지만, 나의 회의는 나의 예상보다 크다.
세상에 멋지고 아름답고 쾌적하고 은밀한 장소는 많다. 그곳들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싫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기분과 생각에 달려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동네를 걸어본다. 그곳을 아름답다고 느껴도 되는 것일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외양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들은 여러 문화적 인간 행동들의 축적으로 인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사진, 영화,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을 착하게 산다고 선전하는 문학들, 기타 등등) 이럴 때 나는 나의 미적 판단의 비참함을 느낀다. 가난이 아름답다? 아니다.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지만, 끔찍한 장소도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 세상과 사람에 대한 생각을 버린다면 말이다. 가령, 핵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데, 자기만 착하다고 생각한다. 웃긴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야 하고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어떤 특정 장소를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거기에 철학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전에는 안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다.
내가 꿈꾸는 작업실의 모습. 책상, 소파, 작은 책꽂이. 더는 필요 없다. 나는 사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영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술과 담배와 커피와 텅 빈 공간이다. 그 공간을 걸어가는 일.
나에겐 약간의 책이 늘 필요하다. 외국어로 된 책도 필요하고 한문으로 된 책도 필요하다. 나는 책을 작은 방의 책상에서 읽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나는 일찍이, 세상과 담을 쌓은 자였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내 시를 읽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세상과 나를 분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데, 어찌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혁명을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이 있을 것이다. 나의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거의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장실과 소파를 좋아한다. 나는 여러 종류의 화장실과 소파를 경험하고 싶다. 그것은 언덕과 들판을 좋아하는 것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그렇다.
나는 이제 나의 것, 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 나는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다. 나에게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나를 누구나 좀 그냥 두기를 바란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쨌든 시만 쓰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내 생각을 단상의 형식으로 꾸준히 써 볼 생각이다.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빈다. 진심이다.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앞으로는 쓸 수 없는 글을 억지로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겹곳’이라는 조어를 잘 설명하고 싶다. 생각해야 한다.
|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준규, 어느 날의 시론 (0) | 2016.08.11 |
---|---|
이준규의 단어 사용법 (0) | 2016.07.26 |
채호기, 너의 등 (0) | 2016.06.09 |
이준규, 나의 시를 말하다 (0) | 2016.06.08 |
복효근, 마늘 촛불 (0) | 201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