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시론(계간 파란 2016 여름) TEXT
2016.08.1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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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시론>
시를 생각하는 순간, 시는 사라진다. 그것을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그것이 아닌 것이 된다.
시는 언어의 한계와 싸우려는 속성이 있다. 시는 언어와 싸운다기보다 말과 싸운다. 시는, 사과는 과일이다, 라는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모름을 통해 언어의 지평을 다르게 하려고 한다. 시는 난해해 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는 멀어지고 있다. 온 사방으로. 시가 시를 꿈꾼다면, 시는 온 사방으로 멀어지며 편재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시가 시를 쓰는 상태를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니다. 이미 시가 시를 쓰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시가 시를 쓴다기보다 문장이 문장을 쓰고 있다. 하나의 문장이 출현하면 다음 문장은 자동이다. 이것은 자동 기술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꿈이나 환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이다. 언어의 구조와 속성은 의외로 단순할 것이다.
삶은 늘 타협의 연속일 수밖에 없지만 문장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문장도 내적으로는 역시 타협이다. 노이즈의 문장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것을 주장할 수는 있다. 또, 노이즈 역시 음악일 뿐이다. 음악은 타협의 산물이다. 달리 말하면 미적 조작이다.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정리하려는 순간, 어떤 절망감을 느낀다. 그 절망감은 정리에 대한 두려움 일 수 있다. 정리를 하려는 순간, 마치 내 생각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불안.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것. 다른 것이 되어 더 좋은 것이 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일 텐데 그렇게 만들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나의 시에 대한 생각은 그래서 정리가 안 된 것 같다. 그럴듯하지 않더라도 언어화 작업을 할 필요를 느낀다. 이제.
나는 어떤 식으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이런 시와 저런 시를 구분하는 것일까. 또, 나는 어떻게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시와 산문을 구분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는 그것을 구분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것을 일관된 슬픔의 장치의 유무로 구분했다. 며칠 전에는 리듬의 유무로 구분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시는 문장과 문장을 통해 발생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산문의 꼴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실험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실험은 사유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정신의 실험이 부재하는 문장의 실험은 아이들 낙서에 가깝다. 그것이 주는 미적 기쁨은 사소할 뿐만 아니라 코드의 교환일 뿐이다. 가령, 속어나 은어의 경우처럼.
나는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변한 것이다.
시가 일상과 마주칠 때, 시는 흩어진다. 시가 영성을 느낄 때, 시는 부재한다. 그렇다고 그 중간 어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의 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엇에 있을 뿐이다. 시의 정치성은 늘 그 너머에 있다. 말장난 같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기교는 단순하지 않다. 잘 된 시라는 것은 당대의 습관일 뿐인 경우가 많다.
시는 사유의 하나이다.
시는 광기로만 이루어 질 수도 없고 논리로만 이루어질 수도 없다. 시는 수학이 아닌데, 어떤 수학이 필요하다.
지금, 어떤 시도 사전과 문법을 극복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시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가 지금까지의 새로움이라면, 앞으로의 새로움은 인식 틀을 뒤흔드는, 그리하여 문법이 아니라 사고를 재창조하는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발생하면, 시라는 이름을 버려도 좋을 것이다.
나는 시에 지나친 의무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시가 되려고 하는 자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비주의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시의 의미는 전무하다.
무의미한 언어는 없다. 그러니 무의미한 시도 없다.
시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시에 가장 큰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날이미지론은 애니미즘에 가까운 생각이다. 그 생각은 슬프고 감동적이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용하다.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유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대상은 오브제를 무작위로 이동 시키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비누는 비누이고 비누가 아니다. 시는 시가 아니고 시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이 아니다. 사유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일을 실재의 차원에서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비대상의 본래 목표일 것이다.
언젠간 시가 지면에서 깨어나 움직일 것이다. 그 세계가 무섭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미지는 사기다. 하지만 그 이미지의 영향은 크다. 나는 내 시에서 이미지를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포기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고 이제 생각한다. 그러면 사기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나 자체가 사기이기는 힘들다. 잊힐 수는 있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나에게 시론이 필요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도 시론이 필요하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속 더 쓸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시는 시인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시인이 시인 전부는 아니다. 한 번 발생한 시는 계속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도 사라진다. 나는 그런 곳이 어떤 곳일지 상상할 수는 없다.
시의 지옥도 있을 것이다.
시라는 이름은 사라져도 된다.
텍스트는 하나의 세계이다. 내가 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텍스트라는 단어를 쓸 때는, 정신보다 물질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나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끝없이 사용하고 싶다.
시의 정신성은 병적인 무엇에 가깝다. 아름다움 역시 병적인 것이다. 선함은 시와 거리를 둔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시에 이르려고 하는 자이다. 그것은 조롱 받을 만한 짓이다. 나에게 백지와 글자로 가득한 책은 본질적으로 같다. 나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화가에 가까운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나는 이제 텍스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의 대상에 관해 쓰기 시작할 때, 그 대상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발생해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텍스트 차원에서 그 대상은 다른 대상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는 극단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시에 자유가 없으면, 사유도 국한된다. 사유가 국한 되어도 좋은 경우는 정치와 수학뿐이다, 라고 말해 본다. 그럴 리는 없지만.
자유는 언어를 벗어난 곳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자유는 사람에게 없다. 언어를 벗어난 자는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언어를 벗어나 있는 자다. 나는 그런 자들이 어떤 정교하고 복잡한 사유의 틀을 자꾸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라고 본다. 그들 역시 망상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망상에서 벗어난 자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망상을 바라보고 망상을 생산하고 망상과 함께 노는 자일 것이다. 시는 망상에 가깝다. 비어 있고 작동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는 치매 상태의 시다. 이 생각은 틀린 생각일 수 있다. 때론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단순하고 짧은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의 시는 모종의 슬픔을 유발하는데,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슬픔이 없는 시. 나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혐오스러운 언어가 아니라면, 문장은 보통 슬픈 것이다.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이미지와 비유를 멀리해 왔는데, 만약 그것을 다시 사용하고 싶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시를 배반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을 배반하는 일보다 나를 배반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
나는 시를 사유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의 한계가 있다면, 시는 언어와의 싸움에서 별 승산이 없다는 점이다. ‘실패’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소진’의 언어가 시의 길도 아닐 것이다. 시는 생성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소진으로 파악한다면, 소진에 숨겨진 은밀한 꿈이 있을 것이다.
시가 부질없음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시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나조차도 위로하지 못한다.
시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시는 나와 어떤 독자를 다른 것으로 계속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하나라면,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을 그런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내 시론은 모순된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순이 나를 계속 쓰게 한다. 쓰는 것 역시 사유의 형태이다. 시는 사유의 몸이다. 언어는 한정적이고 시는 그 한정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내가 계속 쓰려고 하는 이유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텍스트는 죽음과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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