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유형진, 허니밀크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

나뭇잎숨결 2015. 12. 2. 20:55

「허니밀크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

 

 

-유형진

 

 

그녀는 사랑이 깨지는 순간을 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을

그녀는 자주 목도[目擊]한다

사랑이 어떻게 깨지는지

깨진 사랑이 어떻게 가루가 되는지

가루가 된 사랑이 어떻게 녹는지

녹은 사랑이 어떻게 질척해지는지

그 질척한 사랑이 그리는 마블링을

목도한다

녹아도 녹지 않고

깨져도 깨지지 않는

어떤 알갱이들이 만들어주는

그 오묘한 무늬를

체크무늬 코끼리

그녀는 본다

사랑의 마블링을 볼 줄 아는 그녀는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데

정작 그녀를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세계의 비극

하지만 이 세계의 비극은 이것 말고도

몇 개는 더 있는데

더 큰 비극은 그 비극을 이야기하기에 시간은

산장에 사는 검은 고양이의 털 만큼

셀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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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킨트*
ㅡeyeless.jpg

불지마 꺼질 것 같아
건드리지마 다칠 것 같아
상처 옆에 눈이 내린다 창문을 두드린다
한밤중에 일어나 눈동자를 열고 모니터를 꺼낸다
붉고 싱싱한 잘 익은 놈으로
너에게 줄게 아무것도 먹지마
이것만 있으면 모니터 속 아이리스
보라색 꽃잎 가장자리 휘어진 엷게 눈웃음치는
이슬보다 영롱한 0과1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녹지도 않고
나의 모니터 속에 쌓인다
눈보다 차가운 아이리스 눈이 없는 꽃
천 만 개쯤 되는 눈들을 달고
늘 살아야 되는 꽃
수미산 꼭대기에 피어나고 싶어
불지마, 거봐 날아가잖아
* '아스팔트킨트'는 아스팔트만 밟고 자란 도시아이, ‘모니터킨트’는 아스팔트조차도 제대로 밟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자라는 아이.



식판 공장의 프레스기계들과
언니의 검은 란제리를 위한 노래

물오른찔레나무새순을꺾어/나무의맑은피를손톱에칠하고
새로자란토끼풀꽃들을뜯어/시계랑반지를만들어끼웠어

시간은째깍째깍시들어가고/기타도베이스도드럼도없이
굶주린거미같은올겐만으로/잊혀져가는낮의변주를했어

언니는우물가시멘트바닥에앉아/검은란제리를빨고있었어
쭈그러진노란세숫대야에/란제리는불은미역같았어

노을이가지색으로멍들어가는/식판공장기계들이춤추는저녁
사람들에게식판은늘모자랐기에/밤새도록기계들은춤을추었어

아기잃고젖몸살을앓는언니가/구름을불러달을덮어주었어
그믐달이자고있는우물속으로/죽은별처럼눈물이떨어졌어

꽃시계는드디어멈춰버렸고/파란철길위로막차가지나갔어

물고기보다투명한손톱들이/메마른건반위로떨어졌어
건전지가다된전자올겐은/비오는날버려진고양이처럼울었어

공장마당엔발목잘린비둘기들이/깃털빠진늙은비둘기들이
마지막기차의장화를신고/아주먼곳으로가고싶어했어

쿵덕쿵덕프레스기계소리/철벅철벅두레박올리는소리
철길을지우는안개와함께/기차의꼬리에붙어따라가고

하얀빨래비누는불어가는데/익사체의살처럼뭉그러지는데
식판공장프레스기계들은/공장문이닫혀도춤을추는데
숲처럼검은란제리를빨던/언니는영영오지않는데


정전중인 지구에 화성인들이 방문하면

큐브스내셔널마스그래픽스(Cubes National Mars Graphics)에서 전갈이 왔다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하는 주사위 속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난 정오. 바깥은 비가 올 것처럼 깜깜하다 어항 속은 고요하고 아침 뉴스를 하던 TV는 정오뉴스를 하고 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서울우유삼각폴리팩의 커피우유를 마신다 빈속에 생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물고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작용하는 것들이 잠시 정전 된다 자전만 하는 주사위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전만하는 주사위 속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사위와 주사위들 간에 정전협정이 맺어 진다 작용과 반작용의 반복. 사라진 물고기들은 어디로 갔죠? 왜 오전에는 악몽만 꾸게 되지요? 정오뉴스를 하던 TV는 저녁뉴스를 하고 있다 CNMG에서 보낸 화성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정전중인 지구에 화성인들이 도착하자 사라진 물고기들의 무덤이 하수구에서 발견 된다 지구엔 커피 맛 우유의 비가 내린다


피터래빗 저격사건
ㅡ목격자

그날 밤 달은 딸기빛이었고 구름은 없었어요 달 주위로 파르스름한 달무리가 지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황구인지 백구인지는 모르죠 젖은 풀밭엔 여치가 울고 있었고요 그는 파란 벨벳조끼에 장식 없는 가죽 신을 신고 있었는데요 벨벳조끼엔 세 개의 주머니가 있었죠 한 개의 주머니엔 회중시계가 들어있었고 다른 한 개의 주머니엔 동그란 보안경이 꽂혀있었고 나머지 주머니엔 담배가 들어있었죠 소지품들은 각각 제자리에 언제나 들어있는 것처럼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시계를 보고 안경을 꺼내어 쓰고 담배를 물었어요 그 일련의 움직임들은 백년쯤 반복된 습관처럼 바라보는 나조차 하나의 박물관 붙박이 신발장처럼 만들어버렸어요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라고 처음 말을 떼었을 때 나는 할말이 없었어요 그는 시계를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는데 9시 53분이었어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그의 안경을 나에게 씌워주고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여주었죠 그러자 그의 시계는 9시 50분을 향해 가고 있었지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안부를 묻는 그와 박하향의 담배를 나누어 피우곤 우린 곧 헤어졌어요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나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지나갈 때 내 발엔 여치가 밟혀 죽어가고 있었어요 죽은 여치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달무리 진 보름달이 밤하늘에 총구처럼 놓여있었죠


피터래빗 저격사건
ㅡ저격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팝콘을 막 전자렌지에 넣어 돌리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옥수수알이 굉장한 폭발음을 내며 터지고 있을 때 알래스카의 빙벽이 녹아 흐르는 듯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내 귀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자 버터냄새로 가득 채워졌던 내방이 어느새 툰드라의 숲처럼 차갑고 눅눅히 젖기 시작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옥수수 시체는 쓰레기통에 쏟아 버리고 대신에 ‘거인’이란 이름의 캔을 땄습니다 젖은 옥수수 알갱이들을 밥숟가락으로 퍼 먹으며 그렇다면 과연 이 일엔 어떤 총기가 어울릴 것인가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총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썩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일은 산 채로 죽어 있는 것들, 더 이상 이어갈 생은 없지만 두고두고 살아야 하는 것들에 대한 묵념 같은 것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피스톨에 숨겨져 있다가 팝콘 터지듯 아무생각 없이 터져나가는 탄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기 발가락 같이 통통한 옥수수알이 입안에서 터지고 있을 때 캔 포장의 푸른 거인이 손을 들어 가리켰습니다 창밖으로 서서히 달이 차오르는 것 이었습니다


피터래빗 저격사건
ㅡ의뢰인

나에겐 고향이 없지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그를 만난건 내가 Time Seller Inc. 라는 회사에서 일할 때였지 그곳은 시간이 없는 자들에게 시간을 파는 일을 해 그것은 불법이지 그곳의 시간들은 대부분 훔친 것들이거든 나는 시간의 장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시간을 사줄 수 없겠냐고 문의를 해왔어 그는 오자마자 고향 이야기를 꺼냈어 그의 고향은 남쪽의 바닷가 마을 이었는데 고향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시간을 팔고 싶다고 했어 들어보니 사줄 가치도 없는 흔해빠진 시간을 들고 와선 아주 비싼 가격을 부르더군 그는 벨벳정장 차림에 고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깊었어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그런 시간 한개 쯤 사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 혹시 팔리지 않는다면 내가 써볼 생각이었지 그래서 그의 시간을 헐값에 샀어 아무도 사가지 않은 그의 시간을 쓰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 졌지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호등을 기다리다가도 깜박깜박 잠이 들었어 끝내는 눈을 뜨고 꿈을 꾸며 걷게 되었지 꿈꾸며 걷는 길가엔 은갈치 떼가 몰려다니고 해초들이 발목을 감싸서 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예전의 고향 없는 내가 그리워 졌어 그때의 평화로움은 다시는 나를 찾아와주질 않았지 구입한 시간은 되 팔수 없었어 그것이 이 일의 룰이거든 그를 찾으면 꼭 보름의 달무리 진 풀밭으로 데려 가야해 그가 판 유년의 시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그곳에서 부탁해.


에버뉴 b*
ㅡ주유소의 개

에버뉴 b에는 급성인후염을 앓고 있는 개 한 마리가 주유소에 산다 급성인후염이라 여간해선 짖지 않는다 주유소에는 두바이산 고급 휘발유를 넣는 세단과 시커먼 매연만 듬뿍 내뿜는 경유를 넣어야만 하는 고물 지프차와 꽃기름을 넣어 달리는 앞바퀴가 큰 오토바이가 온다 꽃기름 주유는 비공개 주유라 각종 세단과 툴툴거리는 디젤차들은 그 존재자체도 모른다 급성인후염인 개는 목이 아파 요즘 금연중인데 가끔 GPS까지 풀옵션으로 단 세단이 개집의 금을 밟을 때는 사정없이 짖어댄다 개집의 금은 졸리운 오후, 어슬렁 집에서 나와 기지개 할 장소를 정확히 알려주는 일자형 금이다 5년 전 오토바이를 타고와 꽃기름을 주유하러온 소년이 은색 라커스프레이로 칠해준 것이다 소년은 이제 군 입대를 하였거나 재수생 일 테지만 주유소 개집의 은색 라커스프레이 금은 여전히 은색으로 빛난다 그만큼 주유소 개가 관리를 잘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주유소 개는 소년을 사랑했던 건지 모른다 사랑은 가끔 존재를 미치게 하여 엉뚱한 짓거리를 하게 만들므로 그 덕에 고급세단의 주인은 미친개에게 물릴 뻔 한 주유소를 다신 찾지 않을 테지만, 에버뉴 b의 주유소에 실질적 수입은 꽃기름 주유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므로 상관없는 일이다.

*Avenue B. Iggy pop의 노래 제목.



가정식 ‘밤의 은빛 머플러’를 위한 레시피

<재료>
유기농 라벤더비누 1개 , 소다수 2병, 가오리(생물일 경우 6마리, 마른 것일 경우 5마리), 낡은 우주선 1척, 칫솔 1개

<순서>
① 두 시간 동안 유기농 라벤더비누를 소다수에 담가 충분한 거품을 일게 한다
② 가오리는 꼬리를 손질해 1캐럿의 다이아몬드 형으로 잘라놓는다
③ 낡은 우주선의 우주인들은 모두 내리도록 한다 (하차를 거부하는 우주인은 1인 까지는 그냥 태운다)
④ 충분한 거품이 인 비누로 잘라놓은 가오리를 칫솔을 사용하여 코팅한다
⑤ 우주인들이 모두 내린(하지만 고집쟁이 우주인은 남아있을지 모를)우주선에 비누코팅 된 가오리를 태운다 - 코팅이 제대로 되었다면 빛을 내며 스스로 우주선으로 올라타는 가오리 조각들을 볼 수 있다
⑥ 가오리조각들의 탑승 작업이 끝난 우주선에 시동을 건다
⑦ 우주선을 날게 한다

※‘밤의 은빛 머플러’의 효과 및 효능:
수험생을 둔 가정. 가족 중 불면으로 고생하는 하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는 가정. 실연, 사업실패, 이혼, 고시 낙방 등으로 인한 경미한 혹은, 경중한 우울증 환자가 한사람이라도 있는 가정.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 또는, 부모, 조부모의 장례식후 아침 식사 시간에 가족 끼리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 가정에 사소한 유머를 되찾아줌.

※주의사항
‘밤의 은빛 머플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 가오리를 정확하게 1캐럿의 다이아몬드형으로 자르지 않고 그냥 마구 다져놓았을 경우, 고집쟁이 우주인이 발을 안 씻은 지 30일이 넘었을 경우, 비누의 전처리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하얀 앙고라털이 섞인 스웨터를 짜 줄게

애인들에게 겨울은 까망. 너와 함께 건넌 은하수
담배가 떨어진 아침, 그리고 낯선 바다에 불시착한 우리

하얀 앙고라털이 섞인 스웨터를 짜 줄게
나하고 너하고 그리고 이 세계의 추운 애인들에게

발밑에서 개구리가 죽어있는 어느 여름날의 입맞춤
너무 많은 것을 먹어치우다가 생활을 망치고 말겠지

추운 애인들이 태어난 해의 별자리는 용서 없이 반짝,
헤드라이트 한쪽이?깨진 스쿠터를 타고 마중 나온 너

있잖아, 더 이상 학교엔 가지 않겠어
주판을 들고 복도에서 깜빡깜빡, 착해지는 별

추운 애인들에게 겨울은 까망. 너와 함께 건넌 절망의 화덕
담배가 떨어진 아침, 낯선 사막에 불시착한 우리

레이디피쉬*와 못**의 음악을 들으며
하얀 앙고라털이 섞인 스웨터를 짜 줄게?

*Lady fish. 뉴에이지락밴드
**MOT. 락밴드



화성인 2인조

모리스프라파라하와 하라파라프스리모(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고 다만 내 귀에 이렇게 들렸기에 잊어버리기 전에 켜져 있는 컴퓨터메모장에 급히 쳐 둔 것이다). 그들이 내 창을 찾아온 건 어느 가을, 자정 무렵이었다. 그들은 비행접시를 타고 온 것이 아니었다. 3년 전 아침, 정오, 저녁뉴스에 대대적인 방송을 하며 지구에 방문한 CNMG(Cubes National Mars Graphics)에서 보낸 화성인들하고는 전혀 다른 경로로 왔음이 분명하였다. 그렇다고 어린왕자처럼 철새의 이동경로를 통해 왔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 지구의 철새들은 독감에 걸려있어 외계에서 온 이들을 옮겨주기엔 정서적으로 쌀쌀맞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정이 넘도록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서 그 무렵 벌어 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익숙해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모리스프라파라하와 하라파라프스리모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이 화성인 2인조는 너무 생소하였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 하필이면 왜 나에게 왔는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모리스프라파라하 하라파라프스리모라며 거듭 자신들의 이름을 알려줄 뿐이다.(어쩌면 그것도 그들의 이름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절실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외쳐대는 것 이었다!) 아무래도 이름을 잃고 심한 공포에 시달린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내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창밖은 꽤 쌀쌀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즐기는 인스턴트커피 두 잔을, 제일 아끼는 겐조의 2인조 찻잔세트에 내왔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더니 지구말을 하였다. 향이 좋네요? 코가 없는 그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커피를 다 마시자 다시는 지구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커피를 끓여주기 위해 자리에서 잠깐 일어났는데 그사이 사라져 버렸다. 식은 커피 자국이 묻은 겐조의 2인조 찻잔만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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