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황인찬

나뭇잎숨결 2015. 10. 9. 09:32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아득하여라. 정서의 파동은 우리를 아름다움 쪽으로 길게 이끌어 간다. 조명도 울림도 없는 방에 있는 단 하나의 백자.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어서 관념적이지만 이상하게 신비하다. 게다가 백자는 속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어떠한 핵심과 실체도 없는 무(無)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백색의 존재감. 주체의 호명을 거치면서 백자는 “수많은 여름”이 되었다가 다시 “단 하나의 여름”으로 변모한다. 빛이 가장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여름. 여름의 하얗고 눈부신 빛. 산란하는, 그러나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여름의 텅 빈 실감들. 이 무한한 여름이 배자로 수렴될 때, 이제 외부의 침범도 없는 순결한 방 안에서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빛나는 “단 하나의 백자”는, ……어쩐지 유일한 동시에 무한한 신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박상수 시집 해설)
 
그렇겠다. 어쩌면 시는 침묵의 언어이자 빛의 언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의 몸의 통로를 통해 들락거리는 언어 감각이겠다. 이런 사물의 흔적들은 정신의 추상과 맞물려 구조화된다. 행간 읽기에서 중요한 테제는 발화자의 말투, 낯선 이미지의 배합, 전체 주제와의 일관성, 호흡과 리듬, 놀라운 개성 등이 선험적 기억의 창조로 재탄생될 때, 시는 완결성을 갖는다. 황인찬의 첫 시집『구관조 씻기기』(2012, 민음사)는 제31회〈김수영 문학상〉수상집이다.『구관조 씻기기』는 “언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예술적인 다양한 ‘방법론’을 지워 버리는 ‘방법론’을 지닌 희귀한 시인이다. ‘그냥’ 말하겠다는 것이 미적 망각이 아니라 의지일 때, 그의 시학은 우리의 눈을 씻긴다. 그를 따라서 “놀라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놀랐다”. 그에게 ‘낯설게하기’는 기법이 아니라 세계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물의 침묵이 인간적인 목소리 너머에서 깨어나고 있다. 나는 ‘시’라고 말하고서, ‘시’라고 말한 것이 놀랍고 ‘시’가 놀랍다. 김수영의 말대로 “침묵의 한 걸음 앞의 시, 이것이 성실한 시”라면, 황인찬의 시를 두고 성실한 시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김행숙)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시집『구관조 씻기기』)은, ‘백자 달항아리’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보이는 대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곡선의 분위기를 읽어낼 때, 이 시에 접속된다. 달 항아리는 불과 물, 흙과 도공의 혼이 빚은 한국 조형 미학의 극치이다. 꾸밈없는 소박한 그 둥근 맛은 풍만한 여인의 허리 곡선의 은유이자, 눈(雪)빛을 닮은 순백의 미다. 비대칭의 균형감으로 인해, 오히려 비례미의 감탄을 자아낸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단 하나의 백자”를 고요히 쳐다보면, ‘무기교의 기교미’가 눈부시다. 하얗고 둥근 그것은, 흡사 빛을 빨아들이는 침묵처럼 보인다. 주체의 언술을 통해 여러 겹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이런 다층적 열거는 언어의 모호성과 추상적 이미지의 배합을 만든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은 분명해지듯,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 둥근 달 항아리 속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으면,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 방에서”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하게 된다. 1인칭 어조의 주관성은 오히려 ‘달 항아리’와 심리적 거리를 두어 신비롭게 연출된다. 하여, 행간의 비약과 언어의 여백은 줄곧 침묵의 기미와 기척으로 공간화 한다. “사라지면서 /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 믿을 수 없는 일은 /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 마음”으로 서 있다는 점이다. 마치, 달 항아리와 말과 침묵은, 천지 창조 때부터 그 방에 있었던 것처럼 ‘적요’ 하다. 하여, ‘나’는 여름이 지나가면서 사라진다. 아니,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달 항아리 속으로 사라진다. 어쩜, 달 항아리 속에는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시신詩神’이 숨어 사는 지도 모른다. 그 불확실한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황인찬은 ‘달 항아리’를 통해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지혜를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고, 도리어 서툰 것이 곡선 미학으로 살아나는, 그 ‘흰 빛’의 넉넉함을, 대상과 화자 사이에서 겹의 은유로 독시자(讀詩者)들을 유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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