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
- 채호기
나는 내 안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심장 소리가 거세게 고막을 두드렸다.
그곳은 언젠가 와본 것 같은 계곡이었다.
평범하고 흔해서 기시감을 주는
그곳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공기에 흩어진 채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숨을 들이마실 때 코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내가 되었다.
내 발은 돌을 밟고 있다.
돌의 요철에 따라 종아리 근육이 긴장하고 있다.
나는 비스듬히 짝다리 짚고 흰 나무에 기댄다.
은사시? 자작? 나무 이름을 잠시 생각해본다.
잎이 잔털 보숭한 뒷면을 보이며 말한다.
듣지 못하는 나는, 바람이 부는구나, 생각한다.
나는, 한 그루 나무라면 좋겠다, 생각하며
나무 우듬지를 바라본다.
거기 바다 같은 하늘이 있다.
양쪽 산이 가파르게 솟은 계곡이라
여기는 바다 속 우물 같다.
나는 그곳에 오래 서 있다.
언제부터 서 있었고 언제까지 서 있을지
생각해본 적 없다. 다만
나는 나의 내부에 있을 뿐.
내부는 육체의 내부도 정신도
흔히 말하는 영혼이라는 내부도 아니다.
시간도 공간도 물리도 이 세상 같지 않은
다른 곳일 뿐.
한숨에 섞여 바깥으로 나갔을 수도 있다.
구름, 새파란 것에 대항하는 흰 구름.
새파란 하늘은 내려다볼 때의 흰자위일 수도 있다.
구름이 눈동자에서 시작하여 머리 부근을 덮었다.
숨겼다.
나의 바깥은 나무인가?
계곡일 수도,
여러 번 겹쳐진 하늘의 푸름일 수도 있다.
—《시인수첩》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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