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글쓰기에 대한 고찰 그리고 순환과 증식

나뭇잎숨결 2013. 1. 29. 10:05

 

글쓰기에 대한 고찰 그리고 순환과 증식

:박일문의 『달은 도둑놈이다』와 보르헤스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도 혜 옥(한국외대)

 

1. 들어가는 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 하나는 “작가는 죽었다” 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글쓰기의 ‘모방’이야 말로 새로운 창작 방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과 메타픽션(metafictio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이론 중 매우 특징적이며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새로운 기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대 문학 이론에서 지칭하는 텍스트 이론, 상호텍스트성, 양피지 이론, 고갈의 문학 등은 바로 글에 대한 글쓰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시 쓰기’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작품의 특징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이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독창은 결국은 모방이라는 극단적인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책은 다른 책들에게서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고, 그 근원은 이미 존재했던 여타 무수한 작품들과 상호 관계가 있다. 철학이나 문학 또는 예술 등의 모든 사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탄생시킨 그의 소설 속에는 상호텍스트성과 메타픽션을 이용한 환상성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가 창조한 픽션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보르헤스의 특이한 작법은 이미 정평이 나 있고 그의 이름을 빼놓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보르헤스의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명사격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산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보다 상상적이고 환상적인 꿈의 소산인 문학 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언어로 구축된 세계야말로 진정한 리얼리티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 속에서 개별자인 ‘나’를 지우는 작업과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는 개인의 역사와 보편적인 역사와 삶, 새로운 글쓰기, 글읽기와 재창조의 위대성 그리고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에 대한 생각을 펼쳤고 이러한 혁신적인 발상은 세계의 여러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미 한국 문학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국내 작가들에도 보르헤스 및 여타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박일문 작가의 장편 소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보여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글쓰기에 대한 고찰과 상호텍스트성 또는 메타픽션적인 요소를 살펴보겠다. 메타픽션을 사용함에 있어 창조되는 환상성을 보르헤스와 박일문은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그리고 본 소설에서 보여지는 소설 기법 가운데 보르헤스와 유사성과 차별성을 찾으며 『달은 도둑놈이다』와 보르헤스의 작품들과 비교 연구해 보겠다.

 

2. 『달은 도둑놈이다』의 상호텍스트성

 

박일문의 『달은 도둑놈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이 매우 농후한 작품이다. 작가는 글쓰기와 소설의 독창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작품 전체에 드러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 상호텍스트성에 관한 논의를 끌어내고 있다. 이 작품은 ‘과연 완벽한 독창성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물음과 등장 인물들과 텍스트의 증식과 복제를 글쓰기를 통해 보여준다.

『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나)은 아내와 3년째 별거 중이다. 그는 생에 대한 고독과 공허감 그리고 무기력에 빠진 40대의 작가이며 아내의 부하직원으로 교재와 실용서를 출판하는 일을 하지만 자신이 소속된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하지 못하고 완벽함을 꿈꾸며 전업 소설가를 꿈꾸는 인물이다. 그는 컴퓨터 통신으로 알게된 한란이라는 여인과 3년 동안 연락을 하고 지냈다. 주인공은 그녀의 초청으로 제주도에서 지내게 된다. 한란은 주인공의 작품을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이 매우 닮았다고 생각한다. 한란은 주인공이 쓴 소설 속의 인물(여자 주인공)처럼 매일 술을 마셨고 불쑥불쑥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녀는 삶의 무게와 상처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한란을 보며 주인공은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는 죽었다』라는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자신이 쓰는 글을 통해 ‘부재’가 아닌 자신의 ‘현존’, 즉 자신의 존재감을 문장을 통해 느낀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인도에 가있다. 인도에 가면 그가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그러나 항상 바래왔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학생 시절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던 중 갑자기 징집되어 군대에 간 주인공은 혹독한 군 생활 동안 자기파괴의 글을 쓰며 견디어 냈다. 그는 부대 앞 삼거리 여보 다방에서 일하는 순이를 알게된다. 그가 군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 두 가지 중 하나는 글쓰기였고 다른 하나는 순이를 통해서였던 기억을 떠올린다. 주인공은 제주도에서 장 감독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장 감독은 몇 년 전 휴가 차 내려왔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인 어린 소녀를 만났고 그녀와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었다. 장 감독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고 말했고,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장 감독의 여인이 한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주인공은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장 감독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십오 년 동안 조금씩 써온 소설을 혹시 나중에 자신의 영화에 쓸 수도 있으니 한 부 복사해 읽어보겠다는 장 감독의 청을 허락한다. 공항으로 가던 중 택시를 세워 마지막으로 한란에게 전화를 걸고 주인공은 바다로 들어가며 죽음을 택한다. 주인공이 죽은 다음날 장 감독은 서울로 갔고 십오 년 걸쳐 쓴 주인공의 작품을 단 한 시간만에 완벽히 바꾸어 자신의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한란도 서울로 가서 모델이 되었으나 일을 그만두게 된 후 그녀는 독서에 열중했고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나)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은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고찰이다. “과연 문학에 있어, 소설의 창작에 있어 독창성이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계속 던지고 있는데, 이는 작품 내에서 문제로 삼는 ‘독창성이란 없다’는 점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자각성을 말한다.

상호텍스트성의 도출을 위해서는 메타픽션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메타픽션이란 픽션과 리얼리티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가공물로서의 그 위상에 자의식적인 관심을 갖는 글쓰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글쓰기들은 구성을 이루어 나가는 자신의 방법들을 비판하면서, 서사소설 (narrative fiction)의 근본적인 구조들을 검토할 뿐만 아니라 허구적인 문학 텍스트 외부에 존재 가능한 세계의 허구성도 탐구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메타픽션을 그의 소설에 즐겨 사용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론적으로 메타픽션은 모든 작품들이 상호 암시적인 의존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스토리의 허구적인 내용을 텍스트라는 형식적인 내용에 계속해서 반영하고 그러한 텍스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여지없는 리얼리티로 가정하게 만들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라는 인식론적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보르헤스는 글쓰기라는 현실의 행위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렇게 탄생된 글쓰기는 또 다른 글쓰기의 형태를 창조해 현실로 이끌었다. 즉 그가 이끌어낸 창작 행위가 소설을 이루는 글쓰기가 되고 다시 이 허구는 작가의 현실이 되며 글과 현실의 경계가 와해되는 것이 바로 메타픽션이다. 메타픽션적 소설에서 ‘작가’란 단지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문학적, 사회적, 역사적 텍스트들을 통해 생겨진 개념들의 조합자일 뿐이다. 또한 메타픽션의 글쓰기에 대한 관점으로 소설은 독립적으로 창작되어지는 산물로 간주되기보다는 다른 글쓰기와 연관되어 생성된 것이며, 그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여진 일종의 편집 작업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현실 또한 소설과 반영적인 관계가 아니라 언어로 된 텍스트, 즉 글쓰기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닌다고 보겠다.

메타픽션의 가정은 해체론의 글쓰기 개념을 반영한다. 해체론은 텍스트 외부에 또 다른 텍스트가 존재하며 그런 상호텍스트성은 무한히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소설은 독립된 구조물로서 외부와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와 끊임없이 경계를 뒤섞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닌다 말할 수 있겠다. 본 작품에서 작가는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고려해 말한다. ‘작가는 모방자이며 그들은 창작자가 아니라 뻔뻔한 도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단지 기존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반복하고 모방하는 사람이며, ‘문자화된 텍스트를 구성하는 그 모든 흔적을 하나에 모아 놓는 사람’이다. 그들의 작업은 기존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반복하고, 모방하거나 언급할 뿐이다.

『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의 아내 이경은 더 이상 작가에 의한 창작의 행위란 없으며 작가란 단지 조립자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녀의 말은 정확하게 상호텍스트성을 지적하고 있다.

 

“작가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몰라요? 작가란 여러 문화에서 온 텍스트를 조립하는 조립자일 뿐이에요.

남의 글을 인용하고 필사하는 필사자일 뿐이라고요. 컴퓨터 키 하나로 정보의 바다를

넘나들며 기존의 텍스트를 이리저리 편집하고 시뮬레이션할 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작가가 쓴 책이란 과거의 고전들을 다시 세련되게 편집한 시뮬레이션일 뿐이죠. 우린

이미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데 작가의 오리지낼러티나 퍼스낼러티가 무슨 소용이 있

으며 무슨 의미가 있어요?”

편집과 짜깁기와 응용에 능한 출판업자인 그녀는 바흐친과 바르트의 말을 빌려 말할

것이다. 그리고 판관처럼 선고할 것이다. 책도 죽었고 저자도 죽었다. 시니피에도 죽

었고 로고스도 죽었다.

 

이경은 글쓰기에 진정한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녀뿐이 아니라 주인공이 제주도에서 만난 장 감독이란 사람도 이 세상에 독창성이란 없다고 믿는 인물이다. 장 감독이야말로 영화와 시나리오 짜깁기의 실력자이며 자신의 행위가 창작이 아닌 모방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장 감독은 태양 아래 그 어느 곳에도 새로운 것은 없고 심지어 사람의 인생마저도 패러디라 주장한다.

 

“어느 누가 감히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논란거리는 있겠지만, 나도 세상에 고유한 자기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시는 다른 시들로부터 만들어지며 소설은 다른 소설로부터 만들어진다. 삶이

삶을 모방하듯, 문학은 기존의 문학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텍스트끼리의

상호 관련성을 시적 영향이라고 하지 않던가. 즉 <영향에의 불안>은 창작품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작가라면 기존에 생존했던 위대한 작품들의 아우라로부터 자신의 상상

력이 해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표현은 모든 텍스트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결 고리를 의식한 부분이다.

『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자신의 문장을 통해 ‘부재’가 아닌 ‘현존’을 느낀다. 그는 끊임없이 글을 써나간다. 그의 글쓰기는 증식에 증식을 더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에게 있어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미 다른 존재에게 부여되었던 것을, 다른 작품에 존재했던 것을 빌어 창작을 한다는 작가는 도둑놈일 뿐이다.

 

<달은 도둑놈이다. 달의 창백한 빛은 태양에서 훔쳐왔으니까.>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도둑놈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달과 태양, 빛과 어둠, 공기와

바람, 그름과 폭풍에서 훔쳐왔으니까.>

그래서 죽은 붓다와 사라진 보르헤스가 말했다.

<책은 책을 비춘다. 인타라망경의 유리 구슬처럼 사물이 사물을 반영하듯 인간이

인간을 반영하듯, 책은 책을 반영한다.>

 

그리고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본 작품에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사물, 사상, 철학, 예술 작품 심지어는 영혼까지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세월을 달리하며 모습만 바뀌어 증식되고 순환되어 가는 윤회, 순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범주를 책, 문학, 소설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문학 작품 또한 창작이라기 보다는 읽고, 쓰고, 그리고 다시 읽고 다시 쓰여지고 또 다시 읽고 쓰여지는 것이 된다.

 

이제 그토록 내 삶을 불태웠던 글쓰기란 것도 과거의 추억, 혹은 환시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 증식해 가듯, 텍스트도 결국에는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는 욕망들 아닌가.

플라톤의 말처럼 현실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예술은 모방의 모방일 뿐이다.

 

3. 양피지 글쓰기와 창조적 글읽기

 

『달은 도둑놈이다』의 작가와 주인공이 주장하는 것처럼 작가는 백지 위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자국들이 남아 있는 자취 또는 기호를 복원할 뿐이다. 그것은 이미 읽은 텍스트를 흡수하고 축적된 지식을 통해 새롭게 복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이 바로 팔림세스트 (Palimpsest), 즉 양피지 이론이다. 이렇게 베끼기는 패러디로 이어진다.

보르헤스의 작품 『허구집 (Ficciones. 1944)』에 수록된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에서 20세기의 프랑스 사람인 피에르 메나르가 17세기의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똑같이 쓰겠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는 부분에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말하는 양피지 이론을 엿볼 수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에서 프랑스 사람인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재치있는 기사양반 돈키호테 데 라 만챠』를 새로 쓸 작정을 한다. 글자 하나,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쓰는 작업이지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며 원작을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와 문장은 비록 같을 지라도 전혀 다른 해석을 가지기 때문이다. 일치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가 다시 쓰기를 한 것처럼『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이 15년에 걸쳐 쓴 소설을 장 감독은 1시간만에 다시 고쳐 썼다. 「나는 죽었다」라는 제목도 「나는 죽었다, 너도 죽을래?」로 바꾸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이제 이 작품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내가 조금 고쳐서 발표한다고 해서

누가 알 것인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장 감독은 원고를 들고 너무나 감격해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단 한 시간 만에 심오 년에 걸쳐 쓴 내 소설을 완벽히 다른 소설로 만들었다.

장 감독은 내가 쓴 <나는 죽었다>란 제목을 <나는 죽었다. 너도 죽을래?>로

고쳤다.

 

장 감독은 주인공의 텍스트, 즉 이전에 존재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를 해냈다. 옛 것을 가지고 새 것을 만들어낸 피조물은 완벽한 독창물보다 더욱 달콤하고 더욱 복잡하고 보다 섬세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피조물의 기능은 옛 것 위에 겹쳐지게 된다. 양피지 위에 지워져버린 텍스트의 흔적은 새로운 텍스트로 가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욱 섬세한 새 것이 창조되어진다. 장 감독의 텍스트는 주인공(나)의 소설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희미하게 주인공의 소설이 드러나 보일 뿐이다. 장 감독의 작품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주인공의 원작 소설을 능가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피에르 메나르가 자신의 작품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으로 여기는 것처럼 장 감독의 새로운 그러나 그다지 새롭지 않은 시나리오 역시 대성공을 누리고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까지 수상했다. 메나르는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말한다. 돈키호테 안에 존재하는 원작자가 아닌 세르반테스는 작품을 재구성하였을 뿐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메나르가 선택하고 창작한 돈키호테는 글에 대한 글쓰기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나는 이 「돈키호테」<마지막 결정판>을 일종의 양피지사본으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양피지사본 안에서는 우리들의 친구가 썼다 지운 글의 흔적들이

- 희미하기는 하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 어렴풋이 들여다보일 것이다.

 

메나르의 행위는 잊혀진 17세기의 양피지 위에 희미하게 남겨진 기억의 흔적을 따라 텍스트를 재구성,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독서 행위에 의해 쌓인 지식과 기억이 작가의 창작 과정에서 재생산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른 작품들을 떠나 독자적인 창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이전의 흔적에 따라 존재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개념은 『허구집』에 수록된 「바벨의 도서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과거로부터의 기록이 소장되어 있는 끝없는 도서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록들을 해독하고 거기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dhcmrlchidj>라고 도저히 알 수 없는 글자의 조합도 이미 신성한 도서관에 예비 되어 있으며 보르헤스 자신이 쓰고 있는 글조차도 수없이 많은 책 중 어느 한 권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말하는 독창성의 문제와 보르헤스가 말하는 양피지는 모든 텍스트는 상호 관계가 있다는 상호텍스트성의 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박일문의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글쓰기 중심의 관점으로 작가의 작업을 강조한 것과 달리 보르헤스는 글쓰기의 중요성 이상으로 독자의 읽기와 해석 작업이 더욱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보르헤스는 문학작품의 해석을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지며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에 있는 것도 아니며 독자의 해석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창조적인 독서는 일종의 오독이며 이로 인해 문학작품의 의미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이와 더불어 문학작품의 생명력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유지된다는 점을 중요시한다. 헤롤드 블룸은 상호텍스트성은 오독을 생성해내고 이에 대한 정당성을 도출한다고 했다. 모든 독서 행위는 오독이 되며 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오독이라는 말은 흥미 있는 오독으로 보여질 수 있는 또 다른 텍스트를 생산하는

읽기, 즉 또 다른 텍스트를 생성하게 만드는 텍스트를 뜻한다.

 

독서는 무한한 관성을 가지고 운동하는 물체와도 같다. 또다시 생산에 생산, 그리고 재생산에 재생산을 해낸다. 독창적 문학과 창조의 어려움 그리고 모든 창작 행위는 결국 모방이며 앞서 쓰여진 글자의 흔적이라는 부분은 두 작가 사이의 공통 분모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글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해체적 글읽기와 해석하기의 중요성에 우위에 두고 있다.

 

4. 메타픽션과 텍스트의 존재론적 전복

 

『달은 도둑놈이다』와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기법으로 메타픽션을 들 수 있다. 이미 보르헤스는 메타픽션을 즐겨 사용하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특징적인 기법으로 메타픽션을 이용해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망설임을 유발시킨다. 독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움에 빠져 독서를 하게된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보여지는 메타픽션적 기법과 보르헤스의 기법을 살펴보자.

『허구집』에 수록된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에서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I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는 의미 있는 작품을 쓴다. 보르헤스는 상호텍스트성 또한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9장과 22장 그리고 38장을 골랐다. 돈키호테의 9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아랍인 원작자 이야기를 하는데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의 원본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인 것과 마찬가지로 돈키호테의 원본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이며, 20세기의 프랑스인인 피에르 메나르가 17세기의 스페인어로 된 돈키호테를 창작하듯 세르반테스는 아랍어로 씌어진 돈키호테를 이야기한다.

 

어느 날 내가 똘레도의 알까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몇 권의 책과 잡기장과

종이뭉텅이를 팔겠다고 비단 상인에게 가지고 왔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의 성품이

설령 길바닥에 떨어진 종이쪽지라도 주워서 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때도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펼쳐보았다. 그것은 나도 분명히 아라비아 글자라고 알

수 있는 글씨로 씌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

이 잡기장에는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적혀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첫 부분을 읽어달라고 했다 그는 아라비아 말을 까스띠야 말로 번역해서 아라비아의

역사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에 의해 기록된 돈키호테 데 라 만챠의 이야기라고 씌어

있다고 말해주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I부의 9장에서 돈키호테의 원작자와 원본은 따로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22장에서는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를 언급함과 동시에 ‘살기 좋은 공화국’의 이야기를 하며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린다. 그가 말하는 이상향의 세계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 1516)』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충분히 메타픽션적이고 상호텍스트적이다. 세르반테스가 또 다른 작가가 있음을 독자들에게 시사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혼동을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혼동을 메나르가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메나르의 허구적 이야기를 보르헤스가 말한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한란은 주인공의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주인공의 소설은 한란을 닮았다. 마치 그녀를 모델 삼아 쓴 것처럼 그녀와 주인공이 쓴 소설 속의 여인은 한 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선생님이 쓴 소설 줄거리는 마치 제 이야기 같았어요. 제 인생이 소설 속에서 재현

되는 기분이었어요. 아니면 소설이 제 인생에서 재현되고 있거나. 선생님 소설에 등장

하는 제주도 여자가 매일 새벽에 소설 쓰는 남자를 찾아오잖아요. 원래 그 여자는 상처

때문에 자살을 꿈꾸는 여자였어요. 죽어야 할 그 여자는 살아서 소설가가 되고 소설

가가 결국 죽게 되죠. 끊임없는 욕망의 증식, 글쓰기의 증식, 저자라는 싸움꾼의 숱한

증식, 그걸 부고 저도 살아야겠다는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그 소설로 절 구원했어요.

 

한란의 인생은 주인공의 소설 속으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한란의 인생으로 전이된다. 한란은 제주도 여자다. 주인공이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밤 술에 취해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겁탈 당한 적이 있었고 그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우유에 약을 타 먹었기 때문에 살아났다. 또한 주인공이 죽은 뒤 한란은 책 속의 여자처럼 소설가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하게 되고 한란이 쓴 소설은 주인공의 소설의 증식물이 된다. 한란은 자신의 기억에 남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웠고 주인공에게서 들은 군대 이야기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란은 이젠 자신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한란은 어느새 끝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세헤라자데의 운명이 되어 있었다. 한란은 죽은

나의 영혼, 글쓰는 자기의 영혼과 욕망이 어느새 자신 안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란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우선

삼인칭 시점에다 화자를 남성으로 정했다. 한란은 삼 년 동안 나에게 들은 군대

이야기를 되살리고자 했다.

 

한란은 주인공의 소설 속의 여인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고 죽은 주인공의 기억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그녀가 주인공의 빈자리를 이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주인공의 기억이 한란의 작품 속에서 재생된 것일까? 한란의 상상물의 소산이 주인공은 아닐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당연히 주인공과 한란이 보낸 시간과 공간을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비현실이 될 수 있다.

 

한란은 성산포 바닷가를 거닐며 좀더 구체적인 구상에 들어갔다.

소설 쓰는 남자가 일단 비행기에서 내리는 걸로 시작한다. 하늘에서 제주도란 땅에

내린 남자. 제주는 가상의 공간이며 소설의 공간이다. 그리고 한란은 신들린 듯이

소설을 써나갔다. 단 이 주일 만이었다.

 

여기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주인공(나)은 하부소설인 한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된다. 보르헤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인물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소설의 ‘단어’ 또는 ‘텍스트’이고 ‘존재’가 아니라 기억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행위’의 묶음이다. 결국 “나”는 또 하나의 소설이다. 상상물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그들은 누가 현실인지 누가 허구인지 알 수 없다. 보르헤스의 『허구집』에 수록된 「원형의 폐허들」에서 이와 흡사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세상과 단절된 어느 폐허가 된 사원에 들어와 꿈을 꾼다. 그가 꿈꾸는 목적은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를 꿈꾸어 그 꿈속의 인물을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결국 꿈으로 만든 자는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꿈꾸어진 자는 꿈꾸는 자를 떠나 다른 사원의 폐허로 가야만 한다. 꿈꾸는 자는 점점 권태 속에서 늙어간다. 그는 항상 자신의 꿈의 소산인 자가 실재가 아닌 환영이란 것이 알려질까 걱정한다. 꿈으로 만들어진 자는 불에 타지 않기 때문에 오직 불만이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한다. 어느 날 꿈꾸는 자가 있던 곳에 불이 난다. 그는 자신의 힘든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불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 또한 꿈으로 만들어진 존재, 즉 다른 이의 환영과 꿈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러나 불길은 그의 살갗 속을 파고 들지 못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

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도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

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은 「원형의 폐허」의 꿈꾸는 자와 같이 다른 이의 상상물이다. 그러나 꿈의 소산인 자 또한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다른 이를 꿈꾼다. 꿈과 꿈이 맞물려 결국 어느 것이 꿈인지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주인공과 한란은 서로를 꿈꾼다. 그리고 이들은 소설가(박일문)가 자신들을 창조해낸 것과 같이, 주인공과 한란, 이들은 서로를 창조하였고 상대방의 작품 속에 존재한다. 자리바꿈을 하고 기억 나눔과 글쓰기를 통한 상호작용을 하고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 증식을 한다. 그들의 글쓰기를 통한 시간의 결절을 이어가는 작업이 계속 이어진다. 한란은 글쓰기와 대화를 통해, 장 감독은 시나리오를 통해 또 다른 존재를 증식시킨다. 장 감독은 주인공이 만들어낸 텍스트를 증식시키고, 한란은 이미 텍스트화 되어버린 주인공의 인생을 증식시킨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가 15년에 걸쳐 써온 소설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서사의 운명이며 생명의 힘인 것이다. ... 내가 사라진다 해도 내가 사라진 시간

을 대신할 누군가가 또 나타날 것이다.

 

내가 사라진 시간이 한란을 불러내는 소리를 들었다. 한란은 내가 데리고 사라진 그

시간을 불러내어 자신 앞에 놓여진 현 시간과 연결시켰다. 그것은 시간의 주술사의

일이다. 사라진 과거라는 시간을 불러내는 주술사는 소설가이다.

 

주인공이 지나온 시간은 한란의 미래였다. 한란에게는 미래이지만 주인공에겐 잃어버린 시간이 된다. 그들의 시간은 하나의 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 순환 고리는 개별자로서의 시간이 이어주는 것이 아니다. 개별자가 가졌던 특정의 삶과 역할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 또한 순환하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의 단편집인 『창조자 (El Hacedor), 1960』에 수록된 「함정 (La Trama)」은 짧고 분명한 구도로 보르헤스의 생각을 확연히 드러낸다.

 

동료들의 초조해하는 단도에 의해 쫒겨 한 석상이 발치까지 밀려간 시저는 경악에

경악이 겹친 격으로 사람들의 얼굴과 무기들 사이에서 자신의 후계자, 마치 <아들>

같았던 브루투스를 보았다. 이미 방어할 여력을 잃은 그가 탄식했다. “아들아, 너까

지도!” 셰익스피어와 께베도는 이 비장한 외침을 자신의 작품 안에 삽입했다.

운명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병립하기도 하면서 계속 확장된다. 19세기의 시간이 지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방의 남부에서 한 가우초가 다른 가우초들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그는 쓰러지면서 그들 중에서 자신의 양아들을 발견한다. 그는 은근한 경외심과

아련한 놀라움 속에서 그에게 말한다. “아니, 넌!” 그들은 그를 죽인다. 그는 하나의

장면이 되풀이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와 같은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 『창조자』에 수록된 「케네디를 추모하며」에서도 인물과 사건은 반복 순환된다. 1898년 아레돈도라는 청년이 우루과이 대통령에게 총을 쏘고, 링컨이 총탄에 살해당했다. 이전에 총탄의 역할은 다른 물건들이 대신했었다. 동방에서의 비단 오랏줄이었고, 알라모 요새를 방어하던 수비대원들을 몰살시켰던 소총과 총검이었으며, 한 여왕의 목을 갈랐던 단도였고, 2000년 전의 유대 지방에서는 구세주의 몸을 관통했던 못과 십자가였고, 카르타헤나의 장수가 쇠반지 속에 숨겨두었던 독약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였다. 또한 그것은 태초에 카인이 아벨에게 던졌던 돌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돌고 도는 끊임없는 관성을 가지고 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히 총탄과 못과 독배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현실만이 남을 뿐이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 소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들을 볼 때 박일문의 작품은 확실히 보르헤스와 유사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달은 도둑놈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논점 중 하나인 독창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보이고 이에 따른 양피지 이론을 소설의 플롯에 삽입하여 전개하였다. 이는 보르헤스의 작품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와 비교될 수 있었다. 또한 메타픽션적 요소로 주인공과 한란의 현실과 환상이 중첩되는 부분을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의 꿈꾸는 자와 꿈꾸어지는 자와 비교해 유사함을 찾을 수 있었다. 글쓰기 중심의 관점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박일문의 입장과 달리 보르헤스는 작가의 글쓰기보다 글읽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독자의 오독에 의한 새로운 재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 두 작가 사이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보다 눈에 띄는 부분으로 현실이 픽션으로 그리고 픽션이 현실로 들어가 서로를 창조해 냈다는 환상성을 보이는 점은 이 두 작가들 사이의 공통적인 설정이었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함정」과 같은 작품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개별자의 삶이 보편자의 삶으로의 순환된다는 그의 생각은 『달은 도둑놈이다』의 주인공, 한란 그리고 장 감독 사이에 그대로 적용된다.

『달은 도둑놈이다』의 소설 안에서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저 ‘나’일 뿐이다. 누가 작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작품이 정지되지도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어져 가고 또 다른 시간이 흐르게 된다. 작가라는 하나의 삶을 작품 속에서 나(주인공), 한란 그리고 장 감독 이렇게 세 사람이 살아간다. 해와 달,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해와 달은 모두 존재하고 각자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실을 닮은 작품은 남지만 작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한란이 될 수도 장 감독이 될 수도 있으며 한란은 주인공이나 장 감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삶이 한란의 삶으로 스며들었고 한란의 삶에 주인공의 작품이 또한 한란의 작품에서 주인공의 인생이 재생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는 한란이며 주인공이다. 또한 장 감독이고, 장 감독을 도와 시나리오를 같이 제작한 여러 명의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인 것이다. 이렇듯 여러 명의 작가는 곧 작가가 없음, 즉 작가의 죽음을 말한다. 이는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는 모두이고 모두는 결국 아무도 아니다’. 그들의 삶과 소명은 거울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반복과 증식을 더해간다. 서로를 비추며 수없이 많은 복제물을 만들어내고 그 허상들 속에서 진상을 구분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 진다. 그들의 삶은 누구의 삶이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다. 현실과 환상이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이되었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 진짜 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환상에 의한 현실의 오염. 그러나 환상은 현실이 아니다. 또한 현실도 환상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려는 모호한 노력을 해왔다. 현실과 환상은 공존한다.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거부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환상과 현실의 중첩, 환상에서 또 다른 환상으로 전이됨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우리의 주위엔 언제나 환상이 존재한다. 그것이 진정한 현실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나의 존재가 환상일수도 혹은 다른 이의 꿈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한란의 주인공처럼 또는 주인공의 한란처럼, 박일문의 장 감독처럼, 보르헤스의 꿈꾸는 자처럼 혹은 나에 의해 꿈꾸어진 보르헤스처럼 말이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삶과 글쓰기는 하나의 원을 그리듯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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