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와 현대의 인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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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걸고 “주님 Herr”에게 내기를 제안한 “천상의 서곡”은 『파우스트』의 줄거리 틀과 그 형이상학적 의미 구조가 결정되는 곳으로서 작품 전체를 통해 가장 유명하고 또 논란이 되는 장면이다. 막이 열리면서 라파엘, 가브리엘, 미하엘의 세 대천사가 등장하여 신의 천지 창조를 찬양한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메피스토는 바로 이 신의 창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창조는 천사들이 찬양한 것처럼,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창조주의 실패작”일 따름이다. 그가 특히 의문시한 피조물은 인간이었다. 그는 이 실패작 인간의 실패의 근본 원인을 신성과 야수성이라는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서 찾는 바, 그에게는 이 이중적 본성으로 인해 고통 받고 방황하는 인간의 상징적 존재가 바로 파우스트이다. 그가 악마의 말대로 “하늘로부터는 가장 아름다운 별들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는 모든 지고의 쾌락을 요구하며,/ 모든 가까운 것과 모든 먼 것이/ 그의 깊이 들끓고 있는 가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V. 304ff.)것은 파우스트의 내면에 인간의 이중성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성은 그에게 그때마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성을 획득할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하여 그의 야수성은 그를 동물적 존재에 얽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이러한 상황을 “바보”의 “미친 짓”으로 규정하지만(V. 301, 303), 신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다:
비록 그가 지금은 오로지 혼란 속에서 나를 섬기고 있으나,
나는 그를 곧 밝음으로 인도하리라.
나무가 푸르러 지면 정원사는 아는 법,
꽃과 열매가 앞으로 올 계절을 장식하리라는 것을.(V. 308ff.)
악마와 신의 이런 상이한 견해는 메피스토가 철저하게 현재의 상황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는 반면, 신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같이 고려하고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은 창조의 현재적 상황에 대한 메피스토의 비판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신 역시 지금의 상황, 특히 인간의 현 상태가 완전한 것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묵시적으로 동의한다. 그러기에 신은 파우스트에 대한 언급 중, 그가 “지금은 혼란 속에서” 신을 섬기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신은 파우스트를 ‘미래’에 “밝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표시한다. 지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불완전함은 앞으로 완전함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된 세계의 전반적인 상태, 특히 인간의 현 상황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신과 악마간의 근원적 차이는 악마의 시선이 현재의 실재 상황에 고착되어 있는 반면에 신의 시선은 ‘미래’로 향하여 있고, 그래서 ‘가능성’과 ‘발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판단에 따르면 창조는 완전한 것도, 그리고 완결된 것도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무한한 형성의 과정, 즉“영원히 작용하고 생동하는 되어가는 것”(V. 346)이다. 신, 창조, 영원한 “되어감 Werden”은 하나인 것이다.
왜 신성(神性)이 현재의 완전성이 아니라 미래로의 발전의 가능성에 내재해야 하는지, 왜 창조의 현재 상황이 불완전해서 악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어야 하는지? 이러한 물음은 오래 전부터 신학과 철학의 커다란 화두였다. 프리드리히 니체(Fr. Nietzsche)는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궁극적 완결성에, 다시 말하면, 창조의 더할 수 없는 완전함에 지루함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악을 만들어 내었노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었고, 이 완전함에 싫증이 난 신은 마지막 날의 작업 끝에 “스스로 뱀이 되어 인식의 나무 Baum der Erkenntnis 밑에 똬리를 틀었다”는 것이다. 즉 “악마는 그저 그 일곱 번째 날의 신의 권태스러움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완결된 것은 더 이상의 보완 작업이 필요 없기에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절대적인 정체(停滯)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완결된 것은 미래가 없으며 역사도 가질 수 없다. 신이 창조한 최초의 파라다이스는 따라서 “역사의 부정이며 신의 무료함의 상징”인 것이다. 악이 생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말하면 창조가 ‘불완전’해진 다음에야 ‘미래’에서의 ‘완성’을 위한 움직임이 가능해지고, 세계는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신은 다시금 할 일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괴테가 창조와 악의 근원에 대해 니체처럼 냉소적으로 생각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괴테 역시 모든 완성된 것의 필연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가졌고, 악이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동인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823년 2월 13일의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괴테는
신성은 그러나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에서 활동한다. 신성은 되어진 것과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 변화해 가는 것에 내재하는 것이다
라고 역설한 바 있다. “하나와 모두 Eins und Alles”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괴테는 끊임없는 형성과 영원한 변화를 우주의 근원적 법칙으로 묘사 한다:
그리고 창조된 것을 다르게 다시 창조하노니,
그 무엇도 굳어짐으로 향하지 않도록,
영원한 생동하는 행위가 활동을 한다.
없었던 것, 그것은 앞으로 되려고 한다,
순수한 태양으로, 형형색색의 땅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
[...]
그럴것이 모든 것이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니,
오로지 존재 안에서만 머물려 한다면.
“천상의 서곡”에서의 신과 악마가 파우스트를 두고 한 내기는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본성으로서의 ‘되어감’의 가능성 여부에 대한 내기이다. 그런데 이 내기에서 유의해야할 사실은 신도 악마도 행위의 주체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파우스트, 또는 그로 대변되는 인간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지상에서의 인간과 악마의 관계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신의 선언에서 극명하게 실체화 된다. “당신이 허락만 하면/ 그를 나의 길로 천천히 끌어 내리리다!”(V. 313f.)라는 악마의 자신에 찬 제의에 신은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그것은 네게 금지되어있지 않도다”(V. 315f.)라는 대답으로 이 세상에서의 악마와 인간의 싸움에 인간의 편에 설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신은 이러한 지상적 세계로부터의 은퇴선언을 충실히 실행했다. “천상의 서곡” 이후 신은 전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파우스트는 이제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악마의 유혹에 대항해야 하며, 신의 은혜와 자비 없이 선과 악을 구분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파우스트와 그가 대변하는 인간은 싫든 좋든 신의 후견에서 벗어난 ‘성숙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은 더 이상 “주님 Herr”, 즉 “주인님”이 아니며, 그가 “나의 머슴 mein Knecht”라 부른 파우스트는 더 이상 그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이제 파우스트는 스스로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다함은 그가 더 이상 신에 의해 결정 지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신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위치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비록 그의 세계가 지상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이 지상의 세계에서만은 인간은 더 이상 수동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성을 실현해 나가는 능동적인 ‘창조주’이며, 창조는 이제 신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과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영원한 ‘되어감’은 신화적 본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영역에 들어서서 인간 의 ‘역사’로 탈바꿈한다. 이제 인간이 “역사의 행위자”로서,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서 역사를 발전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신에서 인간으로의 “주인”의 교체는 큰 의미를 가진 성공작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천상의 서곡”은 중세적 ‘신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더 할 수 없이 극명한 현대적 ‘인본주의’의 선언인 것이다.
인본주의가 이처럼 인간의 현세적 삶에 대한 신의 불간여를 의미한다면, 인간이 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가 죽음 후 ‘저 세상 Jenseits’에서의 영혼의 구원 등등의 종교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즉 철두철미한 인본주의자에게는 신과 그의 영역인 저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 하에서는 파우스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이다. 그럴것이 그의 모든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의 성취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직전까지도 파우스트는 저 세상의 실체를 강하게 부정 한다:
이 지상의 세계를 나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저 위편을 향한 조망은 우리에게 가로 막혀 있도다;
눈을 껌벅이며 시선을 그 곳으로 향한 체
구름 위에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상상하는 자는 바보로다!
이 곳에 굳건히 서서 주위를 둘러볼 지이니;
유능한 자에게 이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맨단 말인가! (V. 11441-11447)
위에 인용된 대사에서 파우스트는 인간의 삶이 비록 이 지상의 세계에 제한되어 있으나, 이 지상이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영역이며, 창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유능한 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이 세상’이 인간의 삶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까지 펼칠 수 있는 곳이기에, 그저 ‘소망’이나 ‘믿음’일 수밖에 없는 영원한 삶, 다시 말해 우리의 “조망”이 미칠 수 없기에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저 세상에서의 영생 등에 홀려서 이 지상의 ‘현실적’ 삶을 소홀히 함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내세에서의 영혼 불멸을 내세우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현세에서의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부정이다. 니체는 이 인본주의적 신의 부정을 “신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하였다.
신의 죽음, 즉 그때까지 유럽이라는 세계의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기독교의 몰락이 이 세계의 총체적 개편을 초래함은 필연적 귀결이다. 니체의 표현대로 “이 믿음이 몰락해 버린 이제, 모든 것이 붕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 믿음위에 세워졌고, 이 믿음에 의지하며, 그리고 그 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유럽의 모든 도덕”도 이 몰락해야 하는 것들에 속함은 물론이다.
“주님” 대신에 ‘주인’이 되어야 할 파우스트가 우선적으로 행한 것도 바로 이 기독교적 신앙에 의거한 세계의 파괴였다. 그가 이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머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피스토와의 내기 계약 전, 그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만이 극한에 달했을 때, 파우스트는 가정, 재산, 명예 등등 그의 자유로운 의지를 구속하고 자아실현을 가로 막는 모든 것을 저주한다. 그러나 그가 가장 격정적으로 거부한 것은 “사랑”, “희망”, “믿음” 등 기독교의 근원을 이루는 덕성이었다:
저주하노라, 저 지고한 사랑의 은총을!
저주하노라, 희망을! 저주하노라, 믿음을!
그리고 저주하노라, 무엇보다도 인내를! (V. 1604-1606)
위의 인용문에서 “지고한 사랑의 은총” 앞에 “저 Jener”라는 지시대명사가 붙어 있는 것은 파우스트 대사의 앞부분과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파우스트가 아직은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즐거웠던 시절”, 그 때의 “어린 아이의 마음”(V. 1585-86))으로 믿었던 초월적 존재와, 또 이 존재가 인간에게 보내준다는 이른바 “은총”으로서의 “지고한 사랑”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파우스트에게는 이 것들은 그저 “인간의 영혼을 옭아매는” “유혹이자 속임 수”(V. 1587f.)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믿음”과 “사랑의 은총”은 저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희망”에 대한 저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럴것이 이 “희망”은 현재를 외면하고 미래만을 바라볼 것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인일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 대신 신이 약속한 저 세상에서의 삶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내”가 저주의 표적인 것은, 이 것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지금’과 ‘이 곳’에서의 삶을, 즉 이 지상에서의 자아실현의 욕구을 억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저주”는 그가 무지에서 깨어났음을, 그의 “기독교로부터의 이탈”이 궁극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저주는 “신의 살해”이자 동시에 이 신에 의거한 세계의 총체적 파괴를 의미한다. 파우스트의 “저주”에 대해 “정령들의 합창 Geister-Chor”이
슬프다! 슬프다!
그대 억센 주먹으로
이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해 버렸으니;
세계가 무너진다, 세계가 붕괴된다!
반신(半神) 하나 이 세계를 때려 부쉈구나!
우리는 나른다,
부서진 조각들을 허무 속으로,
그리고 한탄한다,
그 사라진 아름다움을. (V. 1607-16)
하며 한탄한 것은 유럽을 여태껏 하나의 동질적 공동체로서 감싸 안았던 기독교와 기독교 교회의 몰락을, 그리고 이와 함께 유럽의 중세라는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시대가 그들이 이룬 모든 정신적 문화적 업적과 함께 최종적으로 붕괴되었음을 탄식하고 있음이다. 파우스트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가 지금껏 가졌던 가장 성스럽고, 가장 강대한 것”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여명기의 인본주의의 대두와 이로 인한 “신의 죽음”이 오로지 “일련의 해체, 파괴, 몰락, 붕괴”만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낡은 세계의 몰락은 이 세계가 신과 교회의 이름으로, 절대 선과 도덕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금제의 해체를 의미하기에, 계율과 제한으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인간들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미지의 바다를 향한 모험의 항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이 몰락해야 되고, 새로운 창조는 옛 것의 폐허 위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파우스트의 저주로 인한 낡은 유럽의 파괴를 한탄하고, 이 세계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슬퍼하던 “정령”들이 그에게 새로운 세계, “더 찬란한” 세계의 건설을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지상의 아들들 중
강한 자여,
더 찬란하게
세계를 다시 세우시오,
그대 가슴 속에 일으켜 세우시오!
밝은 의식으로
새로운 삶의 행로를
시작하시오,
그러면 새로운 노래
그 위에 울려 퍼지리라! (V. 1617-1626)
“정령들의 합창”이 비가에서 찬가로 바뀐 것은 이 같은 파괴와 창조의 아이러니칼한 변증법적 전환의 표현이다. 파우스트의 “새로운 삶의 행로”가 이처럼 신의 후견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의 미지의 바다로의 모험의 항해를 의미하기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류의 드라마”이자, 푸쉬킨(Aleksandr Sergejewitsch Puschkin)의 표현대로, “현대적 삶의 일리아스”인 것이다.
그럼 이 모험의 항해는 어떤 결실을 거둘까? 스스로 주인이 된 현대인들은 그들이 파괴해버린 낡은 세계보다 더 좋은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을까? 그들이 버린 기독교라는 모항보다 더 이상적인 항구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모험의 항해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방랑하는 화란인 Der fliegende Holländer처럼, 결코 상륙할 수 있는 항구를 찾지 못하는 “영원한 항해”가 될까?
2
인간이 인본주의적 모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세계의 역사를 끝없는 발전의 과정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의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는 그 어떤 것에 안주하거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어떠한 제한이라도 뛰어 넘어 끊임없이 “앞으로 돌진 vorwärts dringen”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음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이러한 본성으로 인해 파우스트의 삶이 멈춤이나 정착이 철저하게 배제된 움직임 그 자체이며, 그의 존재를 특징짓는 불안정도 이 움직임의 본성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런데 이 파우스트적 움직임은 자신의 태생의 조건에서 파생한 몇 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움직임의 첫 번째 본성은 “의지 Wille”이다.
“의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자아 결정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자아결정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일 때에만 가능하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하는 “머슴”은 따라서 “의지”를 가질 수 없다. 그의 행동의 동기가 자신의 의사가 아닌 타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하겠다 ich will’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저 ‘나는 해야 한다 ich soll’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악마와의 계약 직전 파우스트는 ‘전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신 안에 결집시키고, 자신의 자아를 전 인류의 자아로 확대 하겠다’라는, 즉 신과 같은 인간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에 메피스토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러한 완전한 총체성을 이룰 수 없다고 충고 하자 파우스트는 “그러나 나는 하겠다 Allein ich will”(V. 1784)라고 한마디로 잘라 답한다.
“그러나 나는 하겠다”, 이 짤막한 답변은 아마도 그의 존재의 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라는 접두어는 파우스트의 의지가 오로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의지는, 그것이 종교적 계율이든 도덕적 질서이든, 사회적 관습이든 법률적 제도이든, 아니면 인간 능력의 한계이든 간에, 이 의지에 제한을 가하려는 어떠한 타율적 간섭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결정의 자유가 그의 자아를 절대적인 주체로 만들며, 역으로 이러한 주체의 절대성이 그의 의지의 절대적 자율성의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다시 말하면 파우스트적 의지의 절대적 자율성은 모든 한계의 돌파라는 파우스트적 본성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파우스트적 문화”를 “의지의 문화 Willenskultur”로, “파우스트적 윤리”를 “솟아오름 Empor”으로 규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파우스트적 의지가 절대적이라 함은 이 의지가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이 의지에는 ‘실행’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움직임, 그의 “끊임없는 앞으로의 돌진”은 따라서 그 무엇을 향한 추구이고, 이를 이루려는 노력이자 행동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무릇 남자라면 오로지 끊임없이 행동해야 한다”(V. 1759), 또는 “행동이 모든 것이다, 명성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V. 10188)등등의 파우스트의 발언들은 그가 행동을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삶과 행동의 파우스트적 동일화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메피스토와의 내기 조건이다. 파우스트는 그가 무엇인가에 만족하여 더 이상 추구하거나 행동하지 않게 되면, 그래서 “멈추어라, 너 너무 아름답구나!”(V. 1700) 라고 말하게 되면 자신이 내기에 진 것이며, 그 때는 그의 영혼을 메피스토가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한다. 삶 즉 행동, 이것은 파우스트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존재의 원칙이었다.
그럼 이러한 파우스트적 행동은 어떠한 맥락에서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파우스트의 성서(요한 복음 창세기 편) 번역은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번역에서 그가 인간의 행동이 진리의 실천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여 있도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여기서 벌써 막히는구나! 누가 나를 도와 앞으로 나아가게 할까?
나는 말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없다,
[...]
이렇게 쓰여 있도다: 태초에 뜻이 있었다
첫 행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네 붓이 서둘러 나가지 않도록!
모든 것을 행하고 창조하는 것이 뜻이란 말인가?
이렇게 쓰여져야 한다: 태초에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써내려가는 동안에 이미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무엇인가 내게 경고하는 구나.
정신이 나를 돕는다! 홀연히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
편안한 마음으로 적노니: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V. 1224 - 37)
파우스트가 그리스어인 “로고스 logos”를 “말 Wort”, “뜻 Sinn”, “힘 Kraft”을 거쳐 마침내는 “행동 Tat”으로 번역한 것은 “행동”만이 올바른 번역이며 “말”과 “뜻” 그리고 “힘”은 이 단어의 잘못된 번역이란 의미는 물론 아니다. 파우스트는 이 4개의 번역을 종합해야만 비로소 “로고스”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말”은 가르침, 즉 진리의 언어적 현현(顯現)이며 “뜻”은 물론 이 “가르침”안에 들어 있는 깊은 의미, 즉 그 내용이다. 추상적 이념인 “뜻”은 “말” 없이는 나타날 수 없으며, 반면에 “뜻”이 없는 “말”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힘”은 이 언어화 된 진리가 실현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현실에서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담한 노력을 할 힘을 느낀다” (V. 10184), 또는 “[...]나는 새로운 힘을 느낀다,/ 가슴이 위대한 일을 향하여 활짝 펼쳐진다” (V. 6281f.) 등의 파우스트의 발언은 “힘”이 “행동”의 기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행동”은 진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이 실천적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진리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하는 한갓 구호에 그칠 것이다. 파우스트가 “logos”에서 단계적으로 여러 의미를 도출해내고 이를 최종적으로 “행동”이란 개념에서 종합한 것은 따라서 “번역”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념은 행동이 되어야하고 말은 육신이 되어야 한다. 이 믿음은 독일 이상주의자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기독교의 교리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교회가 행사하던 절대적 권위의 후견에서 벗어난 시점에서 인간은 이제 그 어떤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나 자비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만의 힘으로, 파괴된 낡은 진리를 대신할 새로운 참된 가르침을 찾아내어 이 진리의 뜻을 실행하고, 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의 삶을 더 좋게 만들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인간은 역사의 주체가 될 것이며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인간의 창조물이 될 것이다. “천상의 서곡”에서 신이 우주의 근본 법칙으로 내세운 영원한 형성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파우스트 구원의 장면에서 천사들이 “항시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을,/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V. 11936-37)라고 노래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노력”과 “행동”만이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진리를 실현시킬 수 있으며, 이 거대한 ‘프로젝트 현대’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파우스트의 성서 번역은 작가 괴테의 인본주의적 신념이 그대로 표출된, 그리고 “신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낡은 기독교적 진리의 붕괴 후 현대 인간이 선택해야할 길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문제는 파우스트가 자신의 자아를 절대화한 극도의 자아중심적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극한적 자아 집중으로 인해 파우스트는 그 나름의 ‘보편적’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도 그의 ‘주관적’ 세계 해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바, 이는 그가 찾아낸 진리가 독단적 도그마나 자의적 이데올로기가 될 위험성이 상존함을 의미한다.
괴테는 어느 대화에서
인간 예수를 흠모하며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 내 본성에 맞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물론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도덕성의 지고한 원칙의 신적 계시로서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태양을 경배하는 것이 내 본성에 맞느냐고 누군가가 묻는 다면 나는 다시금 물론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도 마찬가지로 가장 지고한 것의 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아마 우리 인간들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계시일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 예수가 도덕성의 지고한 원칙의 간접적인 나타남이지 이 원칙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비록 “신적”이라는 형용사로 수식되고 있지만 괴테의 관점에서는 예수는 도덕성이라는 원칙의 육체적 담지자일 뿐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괴테는 태양을 “가장 지고한 것의 한 계시”로 표현하고 있다. 태양은 “가장 강한 계시”일 수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계시일 뿐이다. 이는 이 “가장 지고한 것”이 “태양”이 아닌 다른 것, 예를 들면 ‘달’이나 ‘별’ 등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나타난’ 진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진리라는 사실이다. 이를 파우스트의 성서 번역의 맥락에서 설명하자면 절대적 진리로서의 “뜻”은 여러 가지 “말”로서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극도로 혼란한 사회에서는 ‘질서’가 진리로서 나타날 것이고, 모든 것이 통제되고 철저하게 집단화된 사회에서는 ‘자유’가 진리로서 나타날 것이다. 또는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는 ‘평화’가, 폭력에 의한 불의와 독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정의’가 절대적 진리로 추구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 진리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이는 ‘질서’도 ‘자유’도, ‘평화’도 ‘정의’도 상대적 “말”임을, 즉 이들이 마지막 진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시대가, 아니면 어느 단체나 개인이 자신들의 “말”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래서 그들의 “말”을 “뜻”의 조금도 훼손되거나 제한되지 않은 완전한 나타남으로 절대화 한다면, 그리고 이 절대적 진리로서 절대화된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려 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생겨날까? 이는, 괴테의 발언을 빌어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태양”의 뒤편에 숨어 있는 “가장 지고한 것”에 대한 성찰이나 의식 없이 “태양” 그 자체만을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태양 숭배에서는 태양이 “가장 지고한 것”이 되어야 하기에 원래의 “가장 지고한 것”은 부정되거나 망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말”의 절대화 배후에 역시 절대화된 주체가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럴것이 자신을 상대적인 존재로 객관화하는 사람이 그가 찾아내고 체계화한 이론을 절대적 진리로 맹신함은 불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대적 “말”의 문제는 “전능한 자아”로 자신을 절대화한 주체, 즉 파우스트적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파우스트가 말하는 이른바 창조적 행동, 즉 진리를 찾아서 이를 언어화 하고 이 “말”이 된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서 역사를 무한한 발전의 과정으로 만들어간다는 이 창조적 행동은 그 근본에 있어서는 파우스트의 자아 절대화의 행위이며 그의 오로지 ‘주관적’ 의지의 실현일 따름이다.
파우스트 행동의 구조적 문제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주관적 견해를 보편적인 것으로 절대화하여 이를 맹목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명령’만이 그의 언어이다. 그는 결코 ‘타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자비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즉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의 의지 실현의 대상이자 도구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무조건적인 것을 향한 열정은, 괴테의 말대로, “이 제한된 세계에 등장한 모든 절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파멸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행복에 대한 추구가 불행을 초래하고, 좀 더 좋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욕구가 엉뚱한 파괴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괴테는『파우스트』에서 바로 이러한 행동의 일탈을 “Irren”이라는 말로 총칭하고 있다. 이 동사는 “잘못하다” 또는 “길을 잃고 방황하다”의 의미인 바, 괴테는 이 단어를 행동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계시킴으로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파우스트적 인간상은 필연적으로 잘못을 범하거나 제 길을 잃고 방황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V. 317)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된 이 행동과 방황의 변증법은 『파우스트』를 “하나의 비극”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럴것이 행동이 없으면 창조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고 역사는 발전의 과정으로서의 진행을 멈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행동하는 인간의 “방황”은 완성으로 향하는 발전의 필연적 단계로서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잘못”과 “방황”은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완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방황”이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고통과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의 불행과 파멸위에서 이루어진 발전이 과연 진정한 발전일까? 파우스트가 “밝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3
파우스트의 간척 사업, 바다를 막아서 거주할 땅을 얻고 이 위에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사업은 파우스트적 행동과 방황간의 모순이 더 할 수없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의 이상주의적 신념이 순수하게 표출된 죽음 직전의 마지막 모놀로그를 통해 이 문제를 조망해 보기로 한다.
저 산줄기에 늪지대 하나 뻗어 있어
이미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 썩은 웅덩이의 물 마저 빼내는 것,
이 마지막 일이 지고의 성취가 되리라.
나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니,
비록 안전치는 않으나 활동하며-자유롭게 살수 있는 땅을.
들은 푸르고 비옥하니, 사람과 가축이
곧 안락하게 이 새로운 땅에,
대담하고-근면한 사람들이 쌓아올린
언덕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정주 하리라.
밖에서는 파도가 미친 듯 제방 언저리까지 밀어 닥쳐도,
여기 이 안에는 천국 같은 땅이 되리니,
거세게 뚫고 들어오려는 파도가 제방을 갉아먹으면
갈라진 틈을 매 우려 모두가 서둘러 달려나올 것이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어야 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위험에 둘러싸여 이렇게
아이, 어른, 노인 모두가 값진 나날을 보낼 것이니.
이러한 붐빔을 지켜보며 나는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도다.
그러한 순간을 향해 나는 말할 수 있으리:
멈추어라, 너 그렇게 아름답구나! 라고.
내 이 세상에서의 삶의 흔적은
영겁의 시간 안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 지고의 순간을 향유하노라. (V. 11559ff.)
파우스트의 모놀로그에서 미래의 비전으로 나타나는 공동체는 모든 것이 주어진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니다. 밖으로는 이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려는 바다라는 원초적 자연의 위험이 상존해 있고, 안으로는 이들은 생존을 위해 땀흘려 일해야 한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 공동체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제방을 수리하고 보완해야 하며, 먹고살기 위해서는 “비옥한” “들”을 경작하고 “가축”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공동체의 유토피아적 완전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만들어져 나가야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완전한 공동체의 창조를 위한 노력이 “활동”, 즉 “행동”의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하기 위한 행동의 필연성은 이 공동체가 완전한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부정적인 요인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험과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면서 이들은 나 아닌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는 삶을 배울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사회적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생존 조건은 이들의 삶을 향락과 나태와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지켜 주는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 공동체의 ‘불완전성’이야말로 ‘완전성’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럴 것이 주어지지 않은 ‘완전성’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이 ‘완전성’을 가능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지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의 의미에서 이 공동체 본성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자유”의 구체적 내용이 유추될 수 있다. 이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결핍 Mangel”이나 “곤궁 Not”, 또는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죄 Schuld”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바다의 파괴적 위험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공동의 노력은 외부적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오는 바, 이 자유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모든 외부 세력에 의한 지배로부터의 자유, 즉 국가적 자유와 독립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의 행위와 노력의 소산인 공동체적 의식은 무정부적 상태나 카오스로부터의 자유, 즉 질서와 규율의 확립을 가능하게 하는 바, 이 질서는 공동체와 구성원 사이 및 개개 구성원간의 관계를 규정해 줌으로서 공동체 안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낸다. 말하자면 독일 고전주의의 지고의 이상인 조화와 균형이 이 새로운 사회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 미래 사회가 향유하는 자유의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평등”이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 새로운 땅에 “평등하게 gleich”(V. 11567), 다시 말하면 모두가 균등하게 토지를 배분 받아서 이주해 왔다. 이는 봉건적인 경제의 축인 지주(영주) - 소작인(농부, 또는 농노)의 전통적인 주종 관계가 이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음을, 이 공동체가 봉건주의 체제의 근간인 신분제도를 타파했음도 말해 준다. 그럴 것이 외부의 위협에는 공동으로 대처하며, 또한 각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하는 사회에서는, 파우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모두가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어야 하는”(V. 11576) 사회에서는 남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 특권층 귀족도 그리고 착취당하는 평민 등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노력과 행동, 그리고 이 행동의 결실로서의 여러 가지 이상적인 ‘자유’의 내용들, 그리고 이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성립,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하여 파우스트의 모놀로그는, 비록 환상 속의 것이기는 하나, 현실의 구체적 묘사에서 추상적인 결론으로 넘어간다. 말하자면 파우스트는 미래 사회의 이상적인 실체에서 하나의 이념을, 시대와 지역의 제약을 뛰어 넘는 하나의 초월적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어야 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V. 11573ff.)
파우스트가 추론한 ‘진리’의 핵은 모든 사람은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어야” 하며, 또 그러한 사람만이 이를 향유할 자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삶이 단순한 자연적 물리적 생존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서는, 그래서 존재의 정당성과 도덕적인 존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이 행동이 타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을 펼쳐 나가기 위한 것이기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율적인 의지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현대적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된 노동도 아니며 또 봉건사회에서의 부역, 즉 강제 노역도 아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한 자신의 삶의 자유로운 형성은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상, 즉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인간 소외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할 사항은 이 이상적 공동체가 신(神)이나 자연 같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주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행동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표현에 따르자면 “순수한 인간의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 이상향은 극한적인 인본주의적 사유를 이념적 기저로 삼고 있는 것이다.
4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보인 파우스트의 행동은 결코 이상적이거나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의 행동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업주의 전형적인 비인간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바,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서 들어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제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희들 머슴들아, 모조리!
내가 대담하게 구상한 것을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놀려라!
맡은 일은 즉시 해치워야 한다.
엄격한 규칙대로 열심히 일하면
비할 데 없이 좋은 보수를 받으리라.
이 위대한 일을 완성하는 데는
수천의 손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V. 11501ff.)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난 사업주 파우스트와 그의 노동자들인 “머슴” (Knecht)의 관계는 그의 미래의 비전에서 나타나는 “자유로운 땅의 자유로운 사람들”간의 상호관계와는 전혀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다. 우선 이들은 간척 사업이라는 창조적 행위의 공동 주체가 결코 아니다. 이 주체는 “주인(Herr)”, “하나의 정신(ein Geist)” 등으로 스스로를 묘사한 사업주 파우스트 한 사람이고, 이 머슴들은 동원된 노동력일 뿐이다. 그것도 엄격한 규율에 얽매이고, 보상이라는 미끼를 통해 철저하게 노동력을 수탈당하는, 파우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그에게 “부역(frönen)하는 무리”일 따름이다(V.11540). 말하자면 이 “머슴”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삽이나 곡괭이처럼, 사업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왜 불려 나왔는지,/ 그만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V. 11521f.)라는 레무르(Lemur)들의 말은 이들의 소외된 삶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다. 이 “머슴들”은 그들의 행동이 왜, 무엇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모르고 있으며, 오로지 감독관(메피스토)의 지시에 어떠한 물음이나 거부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이 레무르들이 “합창”이나 “무리”로서만 등장하는 사실 역시 이들이 어떠한 인간적 의식이나 개성을 갖지 못한, 집단화되고 획일화된 현대의 산업 노동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파우스트는 또 자신의 사업에 지장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거성 앞 언덕 위에서 목가적 삶을 살아가는 선량하기 짝이 없는 필레몬(Philemon)과 바우치스(Baucis)라는 노인 부부를 살해한다. 이 노부부의 살해와 그들의 집과 교회에 대한 방화는 현대적 사업가 파우스트가 저지른 가장 커다란 죄악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 이 노인들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파우스트와는 달리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살며, 토지의 생산력을 극대화하려는 파우스트와는 달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생산해 내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우스트처럼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목적에 동원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이들과의 평화적 공존을 찾는다. 이들이 난파한 선원을 구출해준 일, 그리고 괴테가 이 난파 선원을 “방랑자(Wanderer)”로 부른 사실은 이 노부부의 삶의 양식에서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상호 배타적인 두개의 세계, 즉 목가(Idylle)로 대변되는 정주된 세계와, 정착되지 못하고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방랑자적 세계간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함을 시사해 준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과 전혀 다른 이들의 존재 양식이 참을 수 없는 도전이었고 이들의 소박한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 노부부의 집과 땅이 그의 사업에 직접적인 방해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파우스트가 이 곳을 강점하려 한 이유, 그리고 노부부의 언덕 위에 있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가 거의 광적으로 분노에 빠진 이유는 이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삶이 가진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도착된 양심의 가책일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려 하기에 그의 삶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는 인간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으로서,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인간성도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해 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에, 그리고 사업의 끝없는 확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기에 삶의 여유도, 스스로를 바라볼 비판적 능력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언덕 위로부터의 종소리는 그에게는 이 모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상기의 강요이었을 것이다.
물론 18,9세기 유럽의 사회적 상황에서 자연 속의 목가적 삶이나, 필요한 만큼만 수확하는 낡은 농업 경제가 현실적 문제나 발전의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목가(Idylle)’라는 문학형식이 18,9세기의 문학에 자주 등장한 배경에는 이러한 삶의 형태가 지향되어야 할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대두되기 시작한 현대적 문명사회의 모순점들과 문제들을 대비를 통해 더욱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즉 목가는 현대 문명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반영수단(Reflexiondmedium)”일 따름이다. 시민사회가 발전되고 산업화가 시작 된 즈음에, 그래서 “자연과 의식이 돌이킬 수 없이 상극을 이룬” 시점에서의 아르카디아(arcadia)에 대한 동경은 그저 문명 이전의 시대에 대한 문명인의 향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부부의 죽음을 따라서 역사적 진행 과정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낡은 시대와 사회의 몰락으로 보는 견해는 설득력을 가진다. 노부부가 자식을 두지 못해 대가 끊기게 된 것 역시 이들의 사회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빌헬름 엠리히(W. Emrich)는 노부부의 살해를 개인 파우스트의 죄가 아니라 개개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인간적 운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살인 행위가 설명될 수 있다고 해서 납득되고 수긍되고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것이 인간을 살해하고 억압하는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발전이, 생산이 인간보다 상위의 가치 카테고리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은 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 관점에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삽질 소리를 수로 작업을 하는 소리로 착각하고 기쁨에 겨워 미래의 유토피아적 환영을 보면서 자신의 지고의 순간을 맛보는 파우스트의 모습이야말로 괴테적 아이러니의 극치일 것이다. 이 환영은, 이 위대한 미래의 비전은 한 눈먼 노인의 환각이며, 그의 열정적 환상의 순간, 모든 것이 완성된 “지고의 순간”(V. 11586)은 메피스토의 냉철한 현실주의적 눈에는 단지 “공허한 순간”(V. 11589)일 따름인 것이다.
파우스트적 “지고의 순간”과 메피스토적 “공허한 순간“은 매개가 가능할까? 그래서 ”지고의 순간“에 대한 이상주의적 신념과 열정이 이 순간이 하시라도 공허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성찰이나 자기비판과 연계될 수 있을까? 이러한 매개와 중재가 가능하다면 인본주의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아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 시사도 주지 않는다. 이 매개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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