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만과 셸러의 인격에 관한 연구
김 용 섭
Ⅰ. 머리말
하르트만 윤리학의 중심 개념은 가치와 당위성 이외에 인격적 존재란 개념이 있다. 현실적 존재당위의 문제에 있어서 이법적 권역에서 실재적 권역에로의 가치의 초출(hinausgreifen)은 주관의 작용에 달려 있다. "모든 실재적 존재(reales Wesen) 중에서 매개능력을 가진 것은 주관뿐이다."1) 의식, 인식-세계 및 가치의 인식-, 능동성, 의지, 자기규정, 목적활동(이것에는 예견과 예정이 포함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이 지닌 바 이 매개능력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관은 주관 이상의 것 즉 인격이다."2) 주관은 이러한 작용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뿐만 아니라 다시 이들의 작용에 그리고 이들의 작용에만 첨가되는 특수한 가치·반가치 성격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하르트만이 여기서 말한 인격의 특징은 윤리현상에서만 규정한 것이지 사변적으로 부가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3) 인간만을 도덕적 존재자로서 또한 인격적 현실성으로서 인정하는 하르트만의 입장에서, 인간만이 인격적 정신을 지니고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 세계의 의미는 인간에 의해서만 그리고 인간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4)
현대에 와서 윤리적 인격설의 큼직한 예는 가치연구에 위대한 공적을 세운 셸러의 윤리학이다. 셸러의 "인격은 연속적인 작용성(Aktualität) 순수한 작용성"5)인데 "작용중심 작용의 수행자이기도 하고 그 작용의 수행의 경우에만 현존한다"6) 는 것이다. 그의 인격은 작용중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총계, 집합 혹은 평면적인 통일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적 작용의 동적, 전체적 통일체이고 변이하는 작용들간에 있어서 질적 방향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보유한다. 이 인격의 질적 동일성은 인격의 가치지향성에 정초하는데, 그것은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 것과 같다.
똑같이 인격주의의 입장이면서 칸트에 있어서의 인격은 "이성인격(Vernuftperson)"7)이며 셸러에 있어서는 개별인격이다. 이러한 상반된 인격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근거는 개별인격 개념은 칸트적 입장에서 보면 사실 형용사의 모습이다. "동격인 어떠한 것을 가지고서도 결코 치환할 수 없는 것"8), 어떠한 동격자의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 존엄성을 가지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도덕성에 유지될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만이 존엄성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9)라고 할 때 여기에서는 이미 개별인격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 그런데 셸러에 의하면 "이성인격이란 반드시 인격이 이성적인 즉 저 이법적인 법칙에 따르는 작용활동의 그 때 그 때의 논리적 주체(logisches Subject)이외의 어떠한 것도 전혀 없다고 하는 형식주의의 실질적인 요청이다. 다시 요약하면 여기에서 인격은 무엇인가의 이성활동의 X이고 그러한 까닭에 도덕적 인격은 도덕적 법칙에 적합한 의지활동의 X이다."10) 이러한 X는 사유의 단순한 추상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현상학적 사실로서 개별인격 존재는 추상화되고 보편화되어 퇴색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셸러가 최후의 결론으로서 "인격은 지향적 작용의 수행에 있어서만 실존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본질상 대상은 아니라고 한다."11) 이 점에 대하여 하르트만은 작용과 인격이 대상으로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윤리학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윤리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능동적인 초월작용(정조, 의지, 행위)이 곧 가치판단의 대상이다. 여기에서는 셸러가 그 대상성을 부정한 것이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12)
그런데 하르트만에 의하면 사람은 이중의 관계를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물의 세계에 대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의 세계에 대립한다. 전자에 있어서는 사람은 비아(非我)에 대립하는 아(我)이고, 후자에 있어서는 너(Du)에 대립하는 나(Ich)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대립이고 후자는 순전히 윤리적 대립이다.13)
하지만 셸러처럼 인격의 본질과 주관의 본질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더욱 심한 잘못이라고 하르트만은 평하고 있다. 인격이란 나와 너의 상관에서 떼어 놓여지고 보면 벌써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14) "신은 인격일 수 있다. 그러나 나(Ich)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너(Du)도 외계도 없으니까"15)라고 셸러는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는 자이며 자기에게 대립하는 제2의 인격도 또한 사물의 세계도 허락하지 않는 그러한 인격적 존재자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인격성이 주관성 위에 있음은 주관성이 생명의 위에 있고, 생명이 모든 자연법칙성의 위에 있음과 똑같다. 이 범주적 순위는 뒤집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상위의 것이 하위의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6)
Ⅱ. 가치와 인간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당위(當爲)(tunsollen)가 무엇인가? Kant가 말한바와 같이 당위가 행동의 형식이라면 우리가 묻는 것은 행동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실질적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그것이 다름 아니라 셸러나 헤센이 말하는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있는 일을 해야 하고 가치없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당위에 앞서는 것이며 당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가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본인의 졸고(하르트만 가치론 「철학회지」 제 21집(97. 8) 영남대철학과)를 통해서 이미 해명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이 가치를 어떻게 우리의 생활에 실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면 가치는 어떻게 해서 인간 생활에 실현되는 것인가?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첫째, 행동의 목적으로 정립(setzen)되어야 한다. 물론 가치는 본래 이법적 자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에 의해서 정립될 필요가 없지만 주체에 의해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파악된 가치가 실현되기 위하여서는 어떤 실제적인 주체에 의하여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립이라는 말은 실현과정의 앞에 놓는 것, 따라서 가치가 실현의 목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적인 주체의 행동권내에 들어오는 목적은 이법적 자체적 존재인 가치인 것이다. 물론 모든 가치가 목적 정립의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모든 가치가 현실적인 당위의 목표점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목적이라는 것은 실천주체에 의한 가치의 정립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천주체만이 감수하고 직관한 가치를 자기의 의지의 목적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의식이 목적정립의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주체는 자기가 가치있다고 의식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정립하고 추구하는 일은 전연 없다. 이리 하여 가치가 실현되기 위하여서는 첫째, 주체의 가치 의식에 올라야 하고, 그 다음에 주체의 목적으로 정립되어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이법적인 가치를 의식하고 이것을 목적으로 정립하는 주체를 떠나서 가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Ⅲ. 주체와 객체의 있어서 인격
하르트만은 이법적 당위인 가치를 실재적인 방향으로 전화(轉化)시킬 수 있는 실재적 존재가 주체(Subjekt)라고 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실재의 세계에 있어서의 가치의 유일한 거점(angelpunkt)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적 세계에 있어서 오직 주체만이 가치의 이법적인 힘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이외의 모든 존재자는 이법적인 것의 호소를 알아들을 능력이 없는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주체는 존재자가 제 자신을 반성하는 존재의 거울인 이론적 주관이 아니라 존재적 세계에 있어서 가치를 관리하는 실천적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가치를 이론적 세계에로 끌어들이는 데에 실천적 주체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모든 실천적 존재 중에서 오직 이 주체만이 매개의 능력을 가졌거니와 이 능력 중에는 의식, 인식, 행동, 의지, 자기결정, 목적 활동 기타 등등이 있다. 따라서 실천적 주체란 단순한 주관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를 실현하는 실천적 주체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독특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그 무엇을 인격이라고 부르고 그 가치를 인격가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치는 그 본질로부터 본다면 감득할 의식의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17) 가치의 전 영역에 특유한 질서는 어떤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도 보다 높은 혹은 보다 낮다고 하는 단계질서를 가치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18) 이 가치의 단계질서도 또한 가치와 똑같이 결코 주관의 산물은 아니다. 이 가치의 단계질서는 가치의 적극적-소극적 구별과 같이 가치 자신의 본질의 특질이고 결코 다만 우리에게 주지되어 있는 가치에 대해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19)가치의 이 객관적인 단계질서도 또한 가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단계질서>20)이고 선-악의 도덕적 가치는 의욕과 이 객관적 단계질서에 있는 가치의 실현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21) 이 가치의 단계질서는 셸러의 실질적 가치윤리학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가치의 단계질서에는 다음의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치의 본질적인 담지자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 자신의 성질에 의한 것이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라고 이야기 된다.22)형식적인 가치의 단계질서로부터 보면 인격가치는 사물가치 보다도 높고23) 지향적인 것의 가치는 그 결과인 상태의 가치보다도 높다.24) 따라서 인격가치, 사물가치, 상태가치라는 단계질서로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가치는 가치의 단계질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다. 가치성질로부터 본다면 감성적 가치(쾌적-불쾌적), 생명가치(고귀-비속), 정신적 가치(미-추,정-부정, 순수한 진리가치), 종교적 가치(聖-불성)의 단계질서가 있다.25) 종교적 가치는 그 본질적인 담지자는 인격이고 종교적 가치 이외의 가치의 담지자는 재(財)이다.
이미 위에서 밝혔듯이 셸러의 <인격주의의 새로운 시도>는 모든 가치를 인격가치 아래에 위치지우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형식의 공동체를 위한 모든 배려를 각자 자신의 생생한 개별인격의 중심에도 관계시키기 때문에 인격의 가치를 근원적 게다가 본질적으로 인격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공동체나 재의 세계에 대한 인격의 관계에 의존시키기도 하고, 인격가치를 이러한 관계 중에 해소시키기조차 하는 모든 경향의 Ethos를 더없이 예리하고 아니 더없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격 가치가 모든 사물=조직=공동체 등의 가치보다도 훨씬 높다고 하는 명제26)는 명백한 증명27)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셸러의 가장 본질적이고 또한 중요한 명제는 이 우주 전체의 궁극의 의의나 가치가 예측되는 것은 결국 가장 풍부한 실질과 그 가장 완전한 전개, 그 가장 순수한 미와 내적인 조화 등에 있어서의 제인격의 순수한 존재-업적이 아니고-와 그 가능한 한 완전한 선인 것에 의해서 이다. 셸러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사람은 고립한 인격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神과 맺어져 있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서 세계에 향하여 정신적 전세계와 인류전체에 연대적으로 하나로 되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인격이다.28) 즉 셸러의 인격주의의 새로운 시도는 한편에서는 개별적으로 또한 객관적으로 타당한 선이나 각 인격의 개별적인 도덕적 사명29)을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 시대의 사회주의적 풍조와 대결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각 인격이 모든 인격의 왕국전체의 도덕적 구제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공동책임을 지는30)(연대성의 원리)것에 의해서 소위 개인주의의 모든 것과도 대립한다. 가장 깊은 곳을 보는 사람은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셸러의 인격개념은 최고가치자로서 개별인격임과 동시에 근원적으로는 신 앞의 사랑의 공동체로서 연대책임을 짊어진 생생한 인격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일체의 실질적 윤리학은 인격을 인격자체의 상태나 인격에는 관계없는 財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고 형식적 윤리학만이 인격의 존엄을 나타내고 기초지을 수 있다31)고 하는 명제의 정당성은 다시 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모든 실질적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재윤리학이나 목적윤리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32). 모든 실질적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단지 경험적으로 귀납적 또한 후천적인 타당성을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33)고 하는 칸트 형식주의의 전제로 되고 있는 이들 명제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다시 하르트만으로 돌아가서 인격을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하르트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주체와 인격과는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주체는 객체와는 반대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체는 객체의 주체요, 객체는 주체의 객체인 것이다. 따라서 객체가 없이 주체가 있을 수 없고 주체가 없이 객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은 사물과 반대되는 것이지 객체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격도 다른 인격에 대해서는 객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물은 물론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객체는 인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주체고 사물은 객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주체는 단순히 어떤 객체와 대립하는 일종의 실재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제 자신의 고유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지만 인격은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격가치라는 일종의 고유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이념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한편으로는 사물의 세계에 대한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의 세계에 대한 관계라는 이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셋째, 주체는 인격의 전제이며, 인격은 주체에 제약되는 것이다. 인격은 주체성을 떠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주체성이 없는 인격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인격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인격은 주체를 전제하고 바꾸어 말하면 토대로 하고 성립하는 것이므로 토대관계에 있어서 주체의 상위에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격은 주체의 상위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와 인격과의 관계는 토대와 성층과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약의 법칙에 의하여 토대가 되는 주체는 강하고 이 토대 위에 형성되는 인격은 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4) 그러나 새로움의 법칙에 의해서 인격은 주체에 없는 새로운 그 무엇을 갖는다. 그것이 다름 아닌 가치이다. 주체는 그 자체가 가치는 아니나 인격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가치관계를 떠나서도 존립하나 인격은 가치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체성이 없는 인격이란 한낱 공허한 추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가치를 의식하고 또 의식 할 뿐만 아니라 실현하는 주체가 진정한 인격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센이 가치를 인격 형성의 힘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그 자체가 자기를 실현시킬 힘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가치의 무력함을 말할 수 있다.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주체적이고 인격적인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의 무력(無力)은 그 반면에 인간의 유력(有力)을 말하는 것이다. 가치를 의식하고 이것을 자기의 행동으로써 실현시키는 동시에 현실을 규제하는 원리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시에 두 세계의 시민 또는 2개의 이질적인 규정력의 싸움터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35)
하르트만과 셸러의 인격에 관한 일고찰(김용섭) 105
114 人間과 思想(第11輯)
Ⅳ. 인격과 가치의 실현
그렇다면 이 세계에 가치가 실현되고 못되고는 오로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치의 실현은 인간의 권능인 동시에 책임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의 지위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선 인간의 능력분석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능력은 무엇인가? 첫째, 예견의 능력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무한지성을 가진 신이 아닌 만큼 모든 것을 달관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하더라도 다소의 경험을 통하여 어느 정도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그러한 능력이 전연 없다면 인간은 아무런 의욕도 가질 수 없으며 앞으로 닥쳐올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대책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의욕하지 않기 대문이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도덕적 가치는 인격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는 그 담지자가 인격이나 작용, 태도, 심정이고 그런 한에서 도덕적 가치는 인격가치이며 작용가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만이 자유를 지니고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인격이 그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의욕과 노력을 통해서 자유를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의 의욕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미래는 우리가 행동으로 어느 정도 규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며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아무리 한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생활에 대하여는 본질적인 것이다. 두 번째 예정의 능력인데, 예정이라는 것은 본래 진행하던 대로와는 달리 진행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며, 목적 활동이다. 왜냐하면 목적 활동이라는 것은 이것을 분석하면 목적정립과 정립된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의 선택과 이 수단에 의한 목적 실현이라는 세 가지 계기가 발견되는 것인데 예정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말한 목적정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견에서는 예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예정을 떠난 예견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견딜 수 없는 고통도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유의 능력을 들 수 있다. 인간이 만일 무엇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결단의 자유가 없다면 예견이나 예정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외적이거나 내적인 상황의 자연 필연성에 규정되기만 하는게 아니라 자유결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유는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도덕적 인격적 주체가 되기 위하여서 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넷째로 인간에게는 가치선별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기관이 무엇인가? 칸트는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고 셸러는 감정이라고 한다. 가치실현에 대한 권능과 책임의 소재인 인간의 제 능력을 살펴보았는데 이 모든 능력을 가진 것은 본래 신적 속성이지만 불완전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소우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Ⅴ. 셸러의 인격과 가치
가치는 그 본질로부터 본다면 감득할 의식의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36) 가치의 전 영역에 특유한 질서는 어떤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도 보다 높은 혹은 보다 낮다고 하는 단계질서를 서로 관계하는 가치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37) 이 가치의 단계질서도 또한 가치와 똑같이 결코 주관의 산물은 아니다. 이 가치의 단계질서는 가치의 적극적-소극적 구별과 같이 가치자신의 본질의 특질이고 결코 다만 우리에게 주지되어 있는 가치에 대해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38)가치의 이 객관적인 단계질서도 또한 가치와똑같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단계질서39)이고 선-악의 도덕적 가치는 의욕과 이 객관적 단계질서에 있는 가치의 실현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40) 이 가치의 단계질서는 셸러의 실질적 가치윤리학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셸러에 의하면 칸트 이후의 모든 윤리학은 구체적인 특수한 도덕적 가치의 해명이나 구체적인 도덕적 생활의 제관계의 분석 등에 있어서는, 가령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해도 이들의 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칸트의 업적의 위대함, 견고함 및 완결성은 더더욱 찬연하고 또한 두드러진 배경이 될 수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41)고 한다. 또한 셸러에 있어서 칸트의 형식주의는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런저런 약간의 점에 있어서 비평, 정정, 보충에는 적절한 것이 있기는 해도 그 밑바탕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칸트적 전제에 서는 한칸트 형식주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칸트 형식주의의 전제 그 자체의 문제성에 이르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셸러는 칸트 형식주의의 공허한 숭고함에 현혹되는 결과로도 되는 내재적 비판의 입장42)을 떠나서 칸트 형식주의의 발상 그 자체의 전제에 대해서 초월적인 비판의 입장을 취한다. 이 입장으로부터 시도된 것이 셸러의 인격주의이다.
인격주의의 입장이면서 칸트에 있어서의 인격은 이성인격(Vernunftperson)43)이고 셸러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개별인격이다. 이러한 상반적인 인격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개별인격 개념은 칸트적 입장에서 보면 정말 형용 모순(Contradictio in adjecto)이다. 동격인 다른 어떠한 것을 가지고서도 치환44)할 수 없는 것, 어떠한 동격자의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 존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45) 이렇게 해서 도덕성에 유지될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만이 존엄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46)라고 할 때, 여기에서는 이미 개별인격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 그런데 셸러에 의하면이성인격이란 인격이 이성적인 즉 저 이법적인 법칙에 따르는 작용활동의 그 때 그 때의 논리적 주체(Logische Subjeckt)이외의 어떠한 것도 전혀 없다고 하는 형식주의의 실질적 요청이다. 다시 요약하면 여기에서는 인격은 무엇인가의 이성활동의 X이고 그러한 까닭에 도덕적 인격은 도덕적 법칙에 적합한 의지활동의 X이다.47) 이러한 X는 사유의 단순한 추상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현상학적 사실로서의 개별인격존재는 추상화되고 보편화되어 퇴색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주체가 가령 스스로의 입법에 따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理律(Logo=nomie)이기는 해도 自律(Auto=nomie)의 존립의 여지는 전혀 없고 결국 이러한 이율은 가장 극단적인 他律(hetro=nomie)과 다른 것은 어떠한것도 없을 것이다.48)이 활동의 중심이 곧 인격이고, 따라서 인격은 생물학적 개념은 아니다.
셸러의 인격은 한편에서는 다만 논리적인 것-이성인격-과 구별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적인 것과도 구별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이념, 사고와 동시에 또한 일정종류의 직관, 즉 근본현상이나 본질 내용의 직관, 다시 더욱 특색있는 일정한 계급의 정서적 또한 의지적인 제작용-가령 선, 사랑, 후회, 외경, 정신적인 경이, 至福과 절망, 자유로운 결단등-도 함께 포함하는 정신이다. 칸트는 그의 선험적 통각론 중에서 "나는 생각한다에서 의미되어 있는 자아는 대상의 통일을 위해서 추가되는 상관자는 아니고 자아의 통일과 동일성과는 대상의 통일과 동일성과의 조건이다."49)라고 하여 의식작용(Cogitare)의 새로운 통일성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해서 칸트가 비로소 정신을 프시케(Psyche)이상으로 높이고 정신이 소위 영혼실체의 한 무리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작용의 통일로서의 정신의 완전히 부당한 物化는 이 영혼 실체라고 하는 허구한 요청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셸러는 칸트가 그 당시의 합리주의 심리학의 영혼실체설을 거부한 것은 정당하다라고 하여 그 공적을 인정한다. "우리는 그 당시의 합리주의의 심리학에 대한 칸트의 거부-이것이 순수하게 소극적인 한--에 대해서 우리의 입장으로부터도 또한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한다."50)라고 하면서도 인격존재를 물적존재나 실체존재로서 파악하는 것이 가령 아무리 잘못돼 있다고 하지만 어떤 법칙에 대한 이성활동의 단순한 X라고 하는 칸트도 또한 똑같이 잘못하고 있다.51)는 것이다. 그러면 셸러의 인격존재란 어떠한 것인가.
추상적 본질성으로부터 구체적 본질성으로 향할 때 비로소 인격존재의 실제적 파악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작용이 구체적인 한 작용은 이미 그 구체적인 중심에 의해서 침투되고 그 지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인격은 작용의 중심임과 동시에 작용의 수행자로서 이해될 수 있겠다. "인격은 본래(본래 그러한 까닭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닌)본질적인 모든 작용분화-특히 또한 외부지각과 내부지각, 외부적 의욕과 내부적 의욕 내외의 감득이나 사랑-미움 등등 모든 이러한 것의 분화-에 선행하여 다른 종류의 본질을 가진 작용의 그 자체 본질적인 구체적 존재통일이다."52)이 경우 다른 종류라고 하는 것은 작용의 측면에서 본 작용 상호간의 것이고 인격에 침투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 보면, 즉 선행하는 인격존재로부터 보면 인격의 작용으로서 오히려 같은 색조의 작용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이라고 해도 그것이 소속되는 각각 개별적인 인격의 색조를 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방식, 의욕의 방법, 느끼는 방법 등은 모두 많던 적던 개성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의 표현이기조차 하다. 그런데 작용의 수행자로서의 인격존재의 규정에는 의혹이 붙어 다닌다. 그것은 앞에서 거부된 인격의 실체론적 견해가 또 다시 몰래 혼입되어 있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적 견해의 잠입은 셸러의 인격론에 있어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셸러가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는 칸트의 형식주의에 있어서 더욱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것은 앞에서 밝혔듯이 인격의 실체적 파악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기 때문에, "인격은 연속적인 작용성(Kontinuierlicher Aktualitat)"53) "순수한 작용성(Pure Aktualitat)"인데 작용중심 작용의 수행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실현하는 (본질적으로 일정한) 작용의 질서있는 구조(Ordnungs Gefuge)"54) 로서만 스스로를 체험하고 "그 작용의 수행의 경우에만 현존한다."55) 인격은 "그 작용의 경우에만 또 그 작용을 통해서만" 즉 "그 작용의 자유로운 실현의 경우에만 존재한다. 경우에(in)나 통하여(durch)의 작용과 그 인격과의 관계는 시간적 관계에서의 동시나 선후의 관계가 아니고 일종의 특유한 체험관계이다. 작용의 경우에 실현되는 한― 작용 중에 있으면서 작용을 통해서 실현되는 한― 동시에 작용 이상인 곳에 이 체험 관계의 특질이 있다. 평면적인 인과관계나 논리적 관계에 대해서 입체적인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격이 오로지 그 작용의 경우에 현존한다고 하면, 즉 단순한 작용의 연속성에 끝난다고 하면 인격의 책임은 어떻게 생각되어질 수 있어야만 하겠는가. 책임이라고 하게 되면 그 귀책의 가능성이 보증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또한 무엇인가의 지속적 존재가 가능해야만 한다. 실체화의 빠짐이 없이 인격의 동일성은 어디에서 구해져야만 하겠는가. 신의 이념의 빛 아래에 있어서만 분명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인격)은 자기 초월이었다. 이러한 것은 신을 향한 자기 초월에서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Ⅵ. 맺는말
하르트만에 있어서 가치는 원리이다. 그것은 제한적으로이기는 하나 존재범주와 동렬에 선다. 따라서 가치는 분석될 수 있는 일정한 범주적 구조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가치는 그 구조가 보다 낮은 구조 위에 구축된 더 높은 원리이므로 그 속에는 낮은 구조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 있어서 정말 <제일 능동자>이다. 창조하는 에네르기, 생산 형성, 실현이 가치에서 나온다. 가치는 당연존재의 역동 속에 숨어 있는 힘이다. 가치원리에 있어서 존재자는 그 평형을 잃고 운동을 시작하여 자기를 넘어 나가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가치는 말하자면 인력의 중심이고, 그 운동의 <제일 엔테레키>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의미성취를 구한다. 인격은 자기의식에서 자기의 의미를 성취할 수는 없다. 순전한 도덕적 존재이지 그 가치의식이 아닌 바의 인격의 본질에 대하여 자기의식은 도리어 모순된 것이다. 따라서 인격은 반드시, 그를 <위해서> 자기가 있을 수 있는 자를 구하게 된다. 이 동경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타인의 인격뿐이다. 이 타인격만이 인격의 의미성취에 대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주는 독특한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거울이다.
인격은 자유이고, 도덕적 가치의 부대자임이 인격의 근본요소이다. 양자가 합해서 인격의 통일된 형이상학적 근본성질을 이룬다. 양자가 다같이 가치의 이법적 당연존재를 전제하므로 당연성의 형이상학은 동시에 인격의 형이상학이다.
가치가 결정하는 힘으로서 행위의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주관이 도덕적인 인격으로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이법적 결정성과 실재적 결정성과의 경계선에서만 인격적 본질은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상호충돌, 대립 및 일치의 무대로서만 가능하단 마링다. 두 개의 세계, 즉 존재학적 세계와 가치론적 세계와의 결합점으로서 양 세계의 어느 한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중간위치에 있으면서 양 세계에 관여하는 바로 거기에 인격이 성립하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셸러의 인격은 도덕적 가치를 근원적으로 담지한다. 우리가 원초적으로 선 혹은 악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격 그 자체의 존재 뿐이다. 여기서 인격은 그 작용중심으로서의 심정과 덕의 근원적 원리로서 타당하다. 셸러에 의하면 인격의 도덕적 가치가 인간의 의지생활을 결정한다. 그리하여 셸러는 도덕적 이상을 인간적 주체 즉 인간적 소질과 힘의 조직 속에 거주하는 궁극성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절대적 영역에 있어서 정초한다. 여기에 인격주의의 참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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