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자율적 예술과 가상(최문규)

나뭇잎숨결 2013. 1. 17. 02:33

자율적 예술과 가상
- 헤겔 미학에서의 “가상” 개념에 관한 연구 -*

최 문 규(연세대)

I. 서론

“현대성”에 관한 복잡한 논의에서 예술(문학)과 관련된 “현대성”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사회적 분화 과정 속에서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예술의 독자적인 가치 획득 현상에 대해서는 바로 1797년에 쓰여진 프리드리히 쉴레겔의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단편에서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문학은 공화국과도 같은 담론이다. 그것은 자신의 법과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지닌 담론이며, 거기서는 모든 부분들이 자유로운 시민이며 동시에 공동 결정을 내려도 좋은 담론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단편도 예술의 자율성을 암시하고 있다. “작은 예술작품과도 비슷하게 단편Fragment은 하나의 고슴도치처럼 주변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며 스스로 완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문학이나 “단편적 글쓰기”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은유적인 표현들(“공화국과도 같은 담론” 혹은 “하나의 고슴도치”)은 일차적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시민 사회의 성립과 함께 싹튼 개인의 자유)과 평행선상에서 이해되지만, 그 단편들은 동시에 독자적이고도 자율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 세계의 성립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고슴도치”라는 은유는 여타 사회적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예술작품의 독자적인 특성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사회 속에서 독자성을 지니게 되는 예술은 단순히 현실도피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미학이론 이후 시민 사회에서 제기되었던 예술의 자율성은 메타차원에서 혹은 우회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도덕적인 기능 혹은 현실치유적인 “기능”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순수한 시적 세계에 대한 동경은 다름 아닌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소망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고 파악되고 있다. 물론 “기능”에 대한 의미론적 분석은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매우 애매한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에 관해 논의는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 “기능”이라는 언어 자체는 이미 예술의 자율성을 전제하면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은 예술의 자율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이 바로 “가상Schein”이라는 것이다. 현대성의 태동과 함께 싹튼 예술의 자율성과 이를 묵시적으로 나타내 주는 심미성, 가상, 형상 등은 따라서 예술은 ‘철학의 시녀’이거나 혹은 형상은 ‘개념의 치장물’이라는 식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예술의 자율성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심미성, 가상, 형상)들은 오히려 그 정반대의 개념들(철학, 진리, 본질, 개념)과 대립적이고도 모순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다름 아닌 예술의 자율성을 나타내 주는 “가상”이라는 개념이 18~19세기의 미학적 사유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 말 이후 관념론적 미학에서는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자율성이라는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고찰되었으며, 따라서 가상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 내에서 부정적으로 파악되었던 의미(“현혹적인”, “본질적이 아닌”)를 더 이상 지니지 않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도 가상 개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가상을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은폐라는 차원에서 읽으려는 유물론적 시각은 그 개념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적 시각 자체도 내적으로는 상당히 수정되었으며, 가령 아도르노, 블로흐, 마르쿠제 등과 같은 비판이론적 시각은 - 비록 가상이 허위적 현실을 은폐하려는 예술의 특성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 사회적 물화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의 필연적인 기본 특성으로 다시금 “가상”을 끌어들인 바 있다. 그러한 수정된 시각은 아도르노 사후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며, 그 결과 ‘예술은 가상이다’는 테제는 현재의 미학 이론 내에서는 예술의 자율적 특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일종의 “전제 조건”으로 설정되곤 한다. 가상에 접근하려는 본 연구는 가상을 참된 존재와는 대립되는 거짓된 사회적 삶의 현상으로 파악하는 일반적인 논의보다는 예술의 특성 자체로 제한시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II. “가상”의 철학적 의미론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가상은 주로 본질Wesen, 존재Sein와는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며, 특히 그러한 가상은 매우 부정적인 특성을 띤다. 우선 참된 존재를 중심 개념으로 설정하고 가상을 철저히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던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그는 최고의 참되고도 진실한 존재로 이데아(에이도스)를 설정하면서 다양한 모방자를 분류한다. 그 이데아에 따라 구체적인 물건을 생산해 내는 수공업자는 이차적인 모방자들로 간주되며, 그 이차적인 모방자들이 생산해 낸 물건들을 다시금 모방해 내는 사람들로서 세 번째 모방자(가령 화가)가 언급된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따라 물건을 생산해 내는 이차적인 모방자들을 다시 모방하는 이들 세 번째 모방자들을 이데아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진 채 “허깨비”, “그림자”만을 생산해 낸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허깨비 혹은 그림자만을 만들어 내는 화가들의 작업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바로 “가상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에 따라 실제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제작자보다 그 사물들을 더욱 빠르게 만드는 방식을 둘러싼 질문과 대답에서 그 개념은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그건 어렵지 않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장 할 수 있네. 특히 빠른 방법은 자네가 거울을 손에 들고 이리 저리 돌려보면 되네. 그렇게 하면 자넨 곧 태양도 하늘에 있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또한 당장 땅과 자네 자신이나 다른 생물체, 가구, 식물들 그리고 지금 말한 모든 것을 만들어 낼 걸세’ 라고 나는 말했다.
‘예, 가상적으로scheinbar 만들겠죠. 하지만 정말로 존재하는 것seiend은 아니죠’ 라고 그가 말하더군.”

실제의 침상이나 식탁 혹은 주변의 사물들은 비록 이데아 자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데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들을 손쉽게 다시 만들어 내는 방법은 “거울”로 사물들을 비추는 방법이며, 플라톤은 이러한 거울에 비추어진 상을 “가상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울에 비추어진 상은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 사물이나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사물보다도 더욱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 거울에 비추어진 상은 일종의 모방의 모방이라는 배가적 특성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참된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이데아로부터 더욱 동떨어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계속되는 대화에서 거울을 들고 다니며 이런 저런 상을 비추어 내는 작업, 즉 “가상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바로 화가들이 언급되고 있다.

“‘가령 내 생각으로는 자넨 화가란 자신이 만드는 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걸세. 어떤 방식으로든 화가 또한 침상을 만들어 냄에도 말이야. 아닌가?’
‘물론 그렇지요, 그는 가상적인 침상ein scheinbares을 만들어 내지요’ 라고 그는 말하더군.”

화가(즉 예술가)는 결코 참되지 않은 것,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가상적인 것”을 생산해 내는 부정적인 자들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은 이데아를 모방하여 사물을 만들어 내는 제작자들의 작업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들 대화자들은 화가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타나 보이는 것을 나타나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즉, 현상의 모방인가 진리의 모방인가?”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해 화가들이란 “현상의 모방”을 꾀한다고 답한다. 이데아를 모방하여 제작된 사물의 외적인 현상만을 그려내는 예술은 단순히 “부분적으로 그때그때 나타난 현상의 모방”이라고 정의되는 가운데 우리는 현대에서도 종종 관찰되는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근원을 플라톤에게서 엿볼 수 있게 된다. 즉 예술은 참된 본질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현상”만을 모방해 낸다는 것이다.
“가상”이라는 개념 하에 예술을 비판적으로 파악하였던 플라톤의 시각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즉 예술을 세계(신, 자연, 자아 등)의 참된 반영으로 파악함으로써 예술에 과도한 짐을 부여하려는 본질론적인 시각과는 정 반대로 플라톤은 -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 예술의 탈본질론적 특성을 최초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탈본질론적인 의미를 지닌 “가상” 개념은 예술이 진리와 도덕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동시에 자율적인 예술의 특성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플라톤이 제시한 가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전복될 수 있는데, 이러한 뒤집기는 “가상의 가상”이라는 테제를 내세운 바 있는 니체의 예술관에서 엿볼 수 있다. 본질론적인 시각을 거부하였던 니체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과 세계는 가상이며 그와 같은 가상으로서의 현실 속에서 생산된 예술작품은 일종의 “가상의 가상”이라는 배가적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플라톤을 뒤집은 니체의 시각은 오늘날 가상에 대한 학술적 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어쨌든 최고의 진리, 이데아, 참된 존재를 그 중심으로 설정하고 예술적인 가상을 부정적으로 폄하시킨 플라톤의 시각은 하나의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의 보편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제 현대성의 길목에 서 있던 칸트는 가상 개념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다른 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칸트가 가상 개념을 세분화하여 “논리적인 가상”과 “선험적인 판단의 가상”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험적 변증법은 선험적 판단의 가상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 가상이 속임수로 작용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선험적인 변증법은 (논리적 가상처럼) 가상이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또한 가상이 존재하지 않게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환상, 즉 주관적인 원칙들에 근거하고 그 주관적인 원칙들을 객관적인 것으로 밀어 넣으려는 환상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속임수가 섞인 추론들을 해체하는 가운데 논리적인 가상은 근본 원칙들의 준수에서 나타나는 오류나 혹은 근본 원칙의 모방에서 나타나는 기교적인 가상과 관련을 맺고 있다.”

여기서 논리적인 가상과 소위 선험적 판단의 가상이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논리적인 가상은 참된 근본 원칙이 실현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오류나 기교적인 측면을 뜻하며, 그러한 가상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가상이다. 반면에 선험적인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선험적인 판단의 가상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환상Illusion이다. 즉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환상과 관계하는 선험적인 판단의 “가상”과 오류나 모방에서 나타나는 “기교적인 가상”이 어떻게 서로 구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만 칸트는 “가상” 개념을 “환상” 개념과 등치시키면서 인식론의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있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이제 전통적인 철학과 현재의 미학적 시각 사이에 놓여 있는 관념론적 미학이 더욱 심도 있게 검토될 수 있다. 이 관념론적 미학에서의 “가상” 개념은 현대 예술의 자기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쉴러와 헤겔의 시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III. “진리는 현혹 속에서 생존한다” - 진리와 가상의 아포리

?소박문학과 성찰문학?에서 “주관적인 성찰”을 현대 문학의 핵심적인 동인으로 제시하였던 쉴러는 ?미적 교육에 관하여?에서 현대 미학의 핵심 개념인 예술의 가상 특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 글을 통해 쉴러가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테마는 인간을 심미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유희충동”, “심미적 상태”, “미적 국가” 등이 이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제 26번째 편지의 경우 자율적인 예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중요한 단초로 작용할 수 있는 “가상”의 독자성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특히 정신을 토대로 예술의 가상을 강조하였던 헤겔의 시각을 고찰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쉴러는 예술의 특성을 “가상”에서 찾으면서 이러한 예술을 “미적 가상ästhetischer Schein” 혹은 “아름다운 가상schöner Schein”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몇 가지 역사철학적이고도 인간학적인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첫 번째로 가상은 문명의 발전 논리 내에서 설명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동물적인 상태의 노예 단계에서 벗어난 모든 민족들에게는 동일한 점이 있습니다. 즉 가상을 즐기는 것, 장식과 유희를 선호하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문화 혹은 문명 상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바로 “가상”, “장식”, “유희”의 등장이며, 이러한 점은 후에 문화의 태동을 “유희”에서 설명한 후이징가J. Huizinga에 의해서도 재확인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가상, 장식, 유희라는 특징을 지닌 문화는 곧 “인위적인 특성”을 지니며, 따라서 “가상에 대한 관심”은 바로 자연적인 힘의 극복, 즉 “문명적인 인위성”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사물의 현실은 그 사물 자체의 행위입니다. 사물의 가상은 인간의 행위이며, 가상에 즐거워하는 마음은 그 마음이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행한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물의 현실”과 “사물의 가상”이 구분되고 있으며, 특히 사물의 가상은 “능동적인 것”,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의 가상은 더 이상 자연적인 사물 자체와는 관련이 없으며, 그것은 후에 아도르노가 말하고 있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잉여성Das von Menschen gemachte Mehr”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름다움을 자연미에서 찾았던 칸트보다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인공적인 것, 즉 정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한 헤겔의 사유와도 일치한다.
가상이 일반적인 철학적 차원에서처럼 본질이나 사물 자체의 자연적인 외적 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화의 특성,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가상의 중요한 첫 번째 특징이 언급되었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바로 사물의 가상,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현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며, 이러한 특징도 마찬가지로 문명 발전의 핵심을 이룬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가상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진정한 확장이며 문명으로 나아가는 단호한 걸음입니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쉴러가 미의 특징을 이해관심사에서 벗어난 만족에서 찾았던 칸트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은 미적 가상과 논리적 가상의 차이를 나타내 주는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과 진리와 혼동되는 논리적인 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과는 구분되는 심미적 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 집니다. 즉 가상이 좀더 나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라 가상이 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논리적 가상은 기만Betrug이며, 오로지 심미적 가상만이 유희입니다.”

칸트가 논리적 가상과 선험적 판단의 가상을 구분한 바 있다면, 쉴러는 논리적인 가상과 미적 가상을 구분하고 있다. 쉴러에게서의 미적 가상은 현실과 진리와의 영향 관계 속에서 기만이나 거짓으로 드러나고 마는 논리적인 가상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이러한 미적 가상의 특성은 사실 “유희”라는 개념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희 자체가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구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유희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미적 가상을 인식론적 차원이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논리적 가상과 구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쉴러는 가상 이면에 숨어 있는 그 어떤 본질보다는 “가상” 자체를 예술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가상을 가능케 하는 두 가지 구체적인 힘이 요청된다. 그 하나는 예술 내적인 힘, 즉 소재와 감각을 종합해 내는 힘으로서 이미 14번째 편지에서 상세하게 서술된 바 있었던 “유희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힘으로서 일종의 형성충동Bildungstrieb이다.

“가상에 대해 즐거워하는 유희 충동이 움직이면서 동시에 모방적인 형성 충동이 그 뒤를 따르게 되며, 이 형성충동은 가상을 독자적인 것으로 다루게 됩니다. 인간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형식과 물체를 구분하게 되면, 그는 물체에서 형식을 분리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즉 그는 물체와 형식을 구분해 냄으로써 이미 분리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모방하는 예술에 대한 능력은 따라서 형식 능력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상 자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데, 그것은 일종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형식에 대한 즐거움이 유희 충동이며, 이에 뒤따르는 형성충동은 가상과 현실, 형식과 물질을 구분해 내는(차이를 생산해 내는) 능력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질료가 아닌 형식이며, 그 형식이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 바로 형성 충동(차이의 시각)이 요구된다. 즉 형성 충동 없이는 예술이 현실이나 진리와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방은 질료의 단순한 재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분, 분리 및 형식화의 능력을 뜻한다. 이처럼 형성 충동에 의해서 가상(형식)으로서의 예술이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상 자체도 나름대로 두 가지 특성을 지닐 때 비로소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가상이 솔직할 경우(즉 현실에 대한 모든 요청으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그리고 가상이 독자적일 경우(현실로부터 그 어떤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에만 그 가상은 심미적인 것입니다.” 솔직성과 독자성이라는 인간학적이고도 도덕적인 범주의 특성이 “가상” 개념에 부여되고 있으며 그 결과 역사철학적인 함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예술이 암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심미적인 가상”은 철저히 자율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현실과는 분리된 가상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쉴러의 시각은 계몽주의적 시학에서 요청된 예술과 도덕 간의 긴밀한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통해 더욱 강화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가상은 도덕적 세계에서 어느 정도로 존재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즉 심미적 가상인 한에서, 다시 말해서 현실을 대표하지도 않으려고 또한 현실에 의해 대표될 필요도 없는 가상인 한에서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심미적 가상은 윤리적인 진리를 결코 위협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그러한 가상은 심미적인 가상이 아니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드러날 것이다.”

“현실”과 “도덕적 진리”는 다름 아닌 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며, 바로 이러한 삶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존재함으로써 심미적 가상은 그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심미적 가상에 대한 이와 같은 쉴러의 역설은 후에 선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존재를 심미적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니체의 시각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도덕적인 세계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지도 않고 동시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도 않는 가상은 철저히 자율적인 상태를 확보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요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모순을 형성하게 되며, 이러한 점이 쉴러 미학의 풀리지 않는 아포리로 남게 된다. 가령 “감각적인 인간을 이성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를 심미적으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고 강조됨으로써 심미적인 가상은 궁극적으로 다시금 이성에 봉사하는 듯이 암시되어 있다. 혹은 “인류는 자신의 품위를 상실하였지만 예술이 그것을 구원하였으며 의미 있는 돌 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진리는 현혹 속에서 생존하며 모조물에서 원형이 회복될 것입니다”라는 구절의 경우 진리는 “현혹”(가상)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실체 없는 영역”으로서의 가상이 사실은 이미 진리와 “실체”의 구현에 깊이 관여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도 제기된다. 이 밖에도 “아름다운 전달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성에 관계하기 때문에 사회를 통합합니다”라는 구절이나 “심미적 가상의 제국 속에서 바로 몽상가들이 그 본질에 따라 기꺼이 실현되기를 원했던 평등의 이상이 실현됩니다”라는 구절에서도 지금까지 그 상호 연결고리가 끊긴 것처럼 보였던 현실(혹은 도덕적 진리)과 심미적 가상이 다시금 재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즉 진리 및 현실과 거리를 둔 예술이 어떻게 다시금 진리 및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무관한 예술이 어떻게 현실 개선에 의미심장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러한 현실(혹은 도덕적 진리)과 심미적 가상의 재결합은 답변되기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되며, 그로 인해 오늘날의 연구에 있어서도 쉴러 미학은 한편으로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 자율적인 미학 차원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물론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 쉴러에게서 가상과 현실의 대립은 결코 “변증법적 대립”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풀기 위해 쉴러의 도덕 담론을 단순히 “은유적 토포스”로 간주하거나 혹은 “예언자와도 같은 톤”에 바탕을 둔 구절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제시되고 있지만, 이러한 답변은 일종의 해석일 뿐 텍스트는 그와 같은 답변의 가능성에 함구하고 있다.
18세기 말 매우 다양하게 인식되었던 예술과 현실(진리, 실체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쉴러 미학은 매우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다. 쉴러 미학은 한편으로 “예술 철학은 아름다운 것의 독자성, 즉 아름다운 것은 진리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과는 분리되어 있으며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로 시작될 수 있다”는 쉴레겔의 요청과 일맥상통한 것처럼 보이며, 다른 한편 여전히 미를 진과 선의 맥락에서 파악하였던 횔덜린/헤겔/쉘링의 요청(“확신하건대 모든 관념들을 포함하는 이성의 가장 지고한 행위는 바로 심미적인 행위이며 또한 진과 선은 미 속에서만 서로 형제 관계를 맺는다”)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매우 상이한 두 입장의 중간에 쉴러의 미학이 놓여 있는 것이다. 심미적 가상을 도덕 담론과 결합시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것과의 재결합을 소망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6번째 편지는 예술의 자율적 특성을 “가상”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다음에 살펴보게 될 헤겔 미학에서는 가상과 현실(진리)의 관계가 또 다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다.


IV. “가상 자체는 본질에 본질적이다” - 자율성 미학의 지양

쉴러 미학에서 엿볼 수 있었던 심미적 가상과 현실(도덕적 진리) 간의 아포리는 헤겔 미학의 경우 가상의 지양을 통해서 해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결의 결과는 쉴러 미학을 후퇴시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즉 정신, 진리, 이념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헤겔의 철학적 관심사는 심미적 가상의 자기 전개를 제한시키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현실 및 도덕적 요청과 연결될 수 없는 심미적 가상이 쉴러에게서는 예술적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매우 애매한 차원에서 다시금 현실 및 도덕적 진리와 결합되고 있다면, 헤겔의 경우 심미적 가상은 쉴러와 마찬가지로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 혹은 이념의 현현을 위해 매우 확고한 차원에서 그 자율적인 특성이 “지양되고” 만다. 즉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헤겔에게서 “들어 올려졌다가 철회되고 마는” 길을 걷게 된다.
헤겔 미학은 쉴러 미학과 상당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예술에 대한 헤겔의 시각은 자연미보다는 인공미를 더욱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인위적으로 만드는 행위를 중시했던 쉴러와 비슷하게 출발하고 있다. “「...」 우선적으로 예술미는 자연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술미는 정신에서 태어났고 또한 정신에서 다시 태어나는 미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헤겔은 자연(예: 태양)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사물로서 나타날지라도 “그 자체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자연미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이와 반면에 아주 나쁜 착상일지라도 그 인위적인 착상은 자연물보다 지고한 것으로 해석되는 데, 그것은 바로 그 나쁜 착상에는 “정신성과 자유가 현존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성과 자유, 이것은 인간의 생산적 활동성produktive Tätigkeit, 즉 정신적인 “배가Verdopplung”에 그 핵심적인 특징을 두고 있다.

“자연물은 단지 직접적이고 일회적인 반면,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배가시킨다. 즉 그는 우선 자연물처럼 존재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을 관조하고 자신을 표상하고 사유하며 오로지 활동적인 대자적 존재를 통해서만 정신인 것이다.”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객체로까지 삼을 수 있으며 동시에 대상 속에서도 자신을 재발견해 낼 정도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러한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는 상태를 벗어나 자유로운 문명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된다. “산업 활동에서 인간은 그 스스로 목적이며 자연을 자신에 종속된 것으로 다루며, 이러한 것에 인간은 자기 활동의 봉인을 찍는다. 오성적 사유야말로 용기 있는 태도이며, 자연적인 용기보다 민활함이 더욱 훌륭하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민족들이 자연의 공포와 자연에 노예처럼 봉사하는 일에서 해방된 것을 보게 된다.” 헤겔이 자연물을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강조한 까닭은 바로 자연미를 중시했던 칸트 미학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연의 맹목적인 힘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독자적인 생산 능력에서 출발하는 헤겔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계몽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 즉 내적, 외적 세계를 대상으로 파악하고 그 대상 속에서 항상 “고유한 자기 자신sein eigenes Selbst”만을 찾아내는 정신적인 인간만을 강조함으로써 타자(자연, 무의식, 신, 예술 등)를 주관화하고 더 나아가 그 타자를 착취대상으로 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여기서 정신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계몽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하여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으며, 단지 강조될 수 있는 점은 헤겔 미학은 일차적으로 정신, 이성, 자유에서 예술을 파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신의 주관화 논리에 의해 예술이 철학적으로 점유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신의 주관화 논리는 특히 가상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에도 여지없이 작동되고 있다.
헤겔 미학과 쉴러 미학이 그 출발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맥락을 자세하게 분석할 경우 가상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쉴러와 헤겔의 시각은 서로 차이점을 보이며 또한 헤겔의 논리 전개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과 관련하여 헤겔은 그것이 학문적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과 예술은 다정스런 수호신처럼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 놓여 있으며 모든 외적 내적 환경을 밝게 치장해 주며”, 따라서 그것은 자칫하면 “정신의 퇴조와 이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적, 내적 환경을 밝게 치장해 준다”는 의미에서 미적 수단으로 전락되는 예술은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이러한 경우를 나타내기 위해 헤겔은 “가상” 혹은 “현혹”과 같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일차적으로 가상과 현혹을 동일시하면서 그 개념들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가상은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의 형식과 다름없다고 밝힌다.

“이와 같은 수단의 형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예술이 설혹 정말로 더욱 진지한 목적에 예속되고 좀더 진지한 영향력을 생산해 낼지라도 그 예술을 통해 사용된 수단은 결국 현혹Täuschung이며, 이것은 분명 단점인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아름다운 것은 가상 속에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 진실한 궁극적인 목적은 현혹을 통해 작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게 된다.”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아름다운 것은 가상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구절은 분명 쉴러에서 엿볼 수 있었던 구절, 즉 “진리는 현혹 속에서 생존한다”라는 구절을 상기시키며, 그러한 개념 사용을 통해 헤겔은 일단 “가상” 개념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가상과 현혹이 아니라 진실한 것만이 진실한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구절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렇다면, 헤겔은 가상 개념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일까? 사실 가상 개념에 대한 헤겔의 적대적인 입장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지 결코 그렇지 않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헤겔은 예술의 경우 오히려 가상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가상도 어쨌든 자연미보다는 지고한 것인데, 그것은 - 이미 언급된 것처럼 - “정신성”과 “자유” 속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겔은 특정 목적에 봉사하는 가상에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가상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단순한 가상bloßer Schein”과 “아름다운 가상schöner Schein”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특정한 목적에 기인하고 그 자체 자유롭지 못한 “봉사하는 예술dienende Kunst”과 특정 목적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freie Kunst”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읽어 낼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하려는 것은 그 자신의 목적이나 수단에 있어서 자유로운 예술이다”는 언급에 바로 헤겔의 주된 관심사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헤겔이 또 다른 맥락에서 가상 개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상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차원에서의 현혹이라는 의미를 지녔다면, 감각적인 경험 현실도 이제 진실한 세계와 비교해 볼 때 “가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경험적인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전체 영역은 진실한 현실성의 세계가 아니며 또한 예술보다 더욱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단순한 가상이며 심한 현혹이라고 불릴 수 있다.” “단순한 가상” 혹은 “심한 현혹”으로서의 경험적 세계는 후에 마르크스나 아도르노 등에 의해 부정되었던 허위적인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사회적 현존재를 뜻하며, 이러한 사회적 현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마르크스 또한 “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이제 가상으로 명명된 감성적인 경험 현실에 직면하여 예술은 그러한 가상을 벗겨 낸다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발견된다.

“본질은 일상적인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감각적인 것이 지닌 직접성과 상황, 사건, 특성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자의성을 통해서 위축되어 우연성으로 가득 찬 혼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때 예술은 현상들의 진실한 모습으로부터 그 저열하고 일시적인 세계의 가상과 현혹을 떼어 내며 그 현상들에 더욱 고귀하고도 정신적으로 태어난 현실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단순한 가상과는 거리가 먼 예술적 현상들에는 일반적인 현실과는 대립되어 더욱 고귀한 실재성과 진정한 현존성이 부여된다.”

여기서 매우 복잡한 헤겔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헤겔은 예술적 현상들도 마찬가지로 “가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적 가상과 경험적이고도 직접적인 현실로서의 가상이 서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가상은 “저열하고 일시적인 세계의 가상과 현혹”과는 구분되며, 이 두 가지 가상의 대립 관계에 있어서 예술적 가상이 현실 세계의 가상을 벗겨 낸다고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겔 미학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볼 때, 예술적 가상에 의해 경험적 현실의 가상이 벗겨지고 마침내 진실한 현실성 혹은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유는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그 유명한 예술에 관한 정의와 유사한 맥락 속에서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예술과 경험 현실의 관계를 단순히 현실치유적인 관계로 파악하려는 해석자는 커다란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헤겔이 예술의 현실치유적인 기능에 앞서서 오히려 예술 자체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은 허위적인 이데올로기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가상도 아니고 또한 특정 목적에 종사하는 단순한 가상도 아니라 그 나름대로 자유롭고도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며, 이러한 특성이 바로 “가상”으로 명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가상에 대한 일반적인 부정적인 시각을 비판하면서 가상 자체의 자율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반전의 의미를 지닌 구절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이 지니고 있는 가상과 현혹이라는 무자격성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가상을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 그러한 이의 제기는 타당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상 자체는 본질에 본질적이다. 진리가 빛나지 않거나 현상화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리가 하나의 통일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뿐만 아니라 정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은 “가상”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초로 작용한다. 특히 “가상은 본질적”이라는 구절은 가상 자체의 독자적인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헤겔은 가상을 본질의 외면이나 혹은 본질의 도구로서만 파악하였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시각에서 벗어나 가상 자체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현대 미학에서 예술의 중요한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는 가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가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헤겔의 시각은 비슷한 맥락에서 “현상”이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그의 시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입증될 수 있다. 즉 헤겔은 “현상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진리이며 존재보다도 더욱 풍부한 규정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분법을 중시하는 헤겔 이전의 형이상학의 경우 일반적으로 현상은 본질의 외면 정도로 이해되었지만, 헤겔은 일단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거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시각을 토대로 헤겔은 마찬가지로 예술의 “가상”까지도 새롭게 평가해 줌으로써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상의 독자성에 대한 언급은 이제 다음의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감성적이고 직접적인 현존재의 가상과 역사 서술의 가상과 비교하여 예술의 가상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지닌다. 즉 예술의 가상 자체는 자신을 통해서 가리키며 자신을 통해서 표상되어야 하는 정신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지시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와 반면에 직접적인 현상은 자신을 현혹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제적이고 진실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진실한 것은 그와 같은 직접적인 감각성에 의해 더럽혀지고 은폐되고 만다.”

위에서 언급된 외적 환경을 치장해 주는 단순한 가상이나 허위적 이데올로기의 존재로서의 가상 이외에도 헤겔이 서로 다른 세 종류의 가상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감성적이고 직접적인 존재의 가상”은 자연적인 사물의 현상과 관계된 것이며, 이것은 헤겔 철학의 구도 내에서 인위적인 것, 정신적인 것, 매개된 것의 속성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판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 서술의 가상”도,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특정 목적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비판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가상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못한 채 비자율적이고도 도구적인 특성만을 갖는다면, “예술의 가상”은 완전히 다른 특성, 즉 “자기 자신”이라는 자율적인 특성을 지닌다. “가상의 자율성”에 대한 단초를 읽어 내려는 헤겔 연구가들은 위에 인용된 대목에서 그와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즉 예술의 가상 자체는 “자신을 통해서”만이 다른 것(즉 정신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의 관계성”을 지닌 가상으로 해석되며, 이를 통해 현대 미학에서 중시되는 “자율적인 예술”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헤겔의 논리학과 미학에서 각기 구분되어 사용되는 “현상학적 가상der phänomenologische Schein”과 “아름다운 가상” 간의 차이점도 제시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전자는 의식이 자신의 경험구조를 알게 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작용하는 가상으로서 진리 매개의 구조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혹은 본질 속에서 지양되는 특성을 지닌다. 즉 현상학적 가상은 일종의 개념적인 인식을 위한 수단이라면, “아름다운 가상”은 일단 그 자체 가상으로서의 자율성을 지니게 됨으로써 단순한 수단의 특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 무엇과의 관계는 가상의 자기 지시를 토대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진리와의 관계는 가상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가상은 자율적인 가상이며, 특히 진리 관계가 가상의 자기 관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물론 헤겔 연구가들은 여기서 자기 준거성을 획득한 가상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 준거성”을 지닌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다시금 이념, 진리를 위해 “지양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예술의 아름다운 가상은 진실한 실상에 대한 직접적인 현혹일 수 없으며 또한 현실적인 진리의 현상도 아니다. 현상학적인 가상과 비교해 볼 때 예술의 아름다운 가상은 현혹의 지양과 더불어 현혹과 동시에 진리를 지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매우 난해하고도 어려운 문제점이 야기된다. 위에서 헤겔은 한편으로 경험적 현실은 예술적 힘(즉 예술적 가상)에 의해서 그 가상을 벗어 던지고 마침내 진실한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다른 한편 헤겔은 예술적 가상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상반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즉 헤겔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예술의 독자적인 특성을 “가상”에서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상 자체가 사실은 독자적인 가상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 진실한 것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간주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점을 풀어 보기 위해 예술의 가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 더욱 근본적인 틀, 즉 헤겔이 제시하고 있는 예술(혹은 예술작품)의 구조적 특성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헤겔은 예술작품의 구조적 특성을 제시하기 위해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자연물의 직접적인 현존재와 비교해 볼 때 예술작품에서의 감각적인 것은 단순한 가상으로 고양되며, 예술작품은 직접적인 감각과 이념적인 사유의 중간에 있다. 예술작품은 아직은 순수한 사유가 아니며 그 감각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돌, 식물, 유기적인 생명체들처럼 단순한 물질적인 현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예술작품에서의 감각적인 것은 그 자체 이념적인 것이며, 이것은 사유의 이념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감각적인 것의 가상은, 정신이 대상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그 대상의 본질적인 내면으로 내려가지 않으면서 「...」 외부를 향해 형태, 외양 혹은 사물의 울림으로서 그 정신을 위해서 나타난다.”

이 대목을 정확하게 읽어 볼 경우, 지금까지 언급된 예술에서의 “가상”은 다름 아닌 예술작품 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측면과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의 가상 자체는 자신을 통해서 가리키며 자신을 통해서 표상되어야 하는 정신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지시한다”는 이미 언급된 구절에서 제시된 예술의 가상 특성은 예술 자체의 특성보다는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측면에만 관계된 것이며, 이 감각적인 것의 가상은 반드시 “정신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지시할 경우에만”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고 추론될 수 있다. 요컨대, “정신적인 것”을 지시하지 않는 감각적인 것은 결코 가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감각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감각적인 것의 가상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 “가상적인” 것일까? 헤겔은 예술작품을 감각과 사유 사이의 중간 특성을 지닌 것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러한 감각과 사유의 중간 특성을 지닌 예술작품은, 아직은 이념이 아닌 것noch nicht과 더 이상 물질이 아닌 것nicht mehr이라는 서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마치 미결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상적으로 읽을 경우, 예술작품의 사유적인 것이 “아직은 순수한 사유”가 아닌 까닭은 거기에는 감각적인 것이 여전히 작용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것이 “더 이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까닭은 거기에는 이미 사유적인 것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미결정적인 것으로 언급된 그와 같은 예술작품의 중간적인 특성은 - “schein(en)”이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에 적합하게 - 단지 “그런 것처럼 보일scheinen”뿐, 엄격하게 보면 “감각적인 것”은 더 이상 감각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이미 이념적인 것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인 것의 “가상” 특성은 그 나름대로의 자율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율성을 상실한 채 이미 사유적인 것에 의해서 점유당하고 있다. 사유적인 것에 종속당하고 있는 감각적인 것의 운명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감각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위해 존재할 때만 그 감각적인 것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구절과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예술작품에서의 감각적인 것은 그 자체 이념적인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가상은 그 자체 이념적인 것”이라고 추론해 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헤겔 미학이 지닌 결정적인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 헤겔 자신에 의해 분명히 언급되었듯이 - 가상은 감각적인 것 자체의 특성이라고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가상은 감각적인 것의 특성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념적인 것의 의미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감각적인 것의 가상”은 단지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의 자율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헤겔 연구자의 시각뿐만 아니라 헤겔 미학의 전반적인 틀에 대해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헤겔 미학은 정말로 “가상”이라는 특성을 통해 예술의 자율성을 인정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 설정과 함께 우리는 헤겔 스스로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분석해 봄으로써 양가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바, 그것은 텍스트는 자신이 구성하고자 했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가상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 미학에 내재해 있는 자기 창출과 자기 파괴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가상 개념은 자율성 미학을 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계기는 거기서 사용된 개념 자체에 의해 처음부터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과 부정의 양가적 가능성은 다름 아닌 “가상Schein”이라는 개념에서 야기된다. 헤겔은 “Schein”이라는 개념을 일차적으로는 “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그 개념은 “가상” 자체의 의미보다는 “빛남”(혹은 현현)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를 강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이 사용한 “Schein” 개념은 모든 목적과 수단으로부터 벗어난 아름다운 “가상”보다는 아름다운 “빛남”(현현)의 의미를 지니며, 이 “빛남”은 다름 아닌 정신(혹은 진리, 이념)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 독서를 뒷받침해 주는 계기는 가령 “현상Erscheinung”을 설명하는 곳에서 헤겔이 그 개념을 “Scheinen” 개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빛남은 하나의 규정이며 이를 통해 본질은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구절에서나 혹은 여기 미학에서처럼 “진리가 빛나지 않거나 현상화되지 않는다면wenn sie nicht schiene und erschiene”이라는 표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진리는 다름 아닌 “빛나다”는 의미를 지닌 “scheinen”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리가 빛나지 않는다면”이라는 구절은 진리 스스로가 빛을 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디에서”라는 공간과 관련된 질문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공간에 대한 질문은 다름 아닌 “예술에서”라는 사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예술은 곧 “이념의 감각적 현현das sinnliche Scheinen der Idee”이라는 정의가 완벽하게 가능해 진다. 이제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것은 “가상”이라기보다는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읽혀지며, 그 결과 진리의 빛과 예술의 빛은 서로 동일한 맥락을 구성하게 된다. 더 나아가 “진리가 빛나지 않는다면 「...」 그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헤겔 미학자들이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헤겔 미학 전체의 구도를 볼 때 “매개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헤겔 미학이 예술 자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장한 미학이라기보다는 진리 중심적 사유를 위해 예술이 매개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을 강조하는 미학임을 뜻한다.
헤겔 자신이 감각적인 것을 “가상”이라고 명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상”이 본래의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테제에 대한 또 다른 간접증거는 바로 헤겔의 동일성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감각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을 논할 때 헤겔은 그 양자의 차이성을 인정했다기보다는 그 이면에 동일성의 원리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바로 개념과 이념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 스촌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 바 있다. “이념은 개념과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헤겔 자신의 언어 이해에서처럼, 개념은 진실한 개념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지양시킨다. 즉 보다 숭고한 단계에서 이념으로서 자신을 완전히 실현시키기 위해 개념은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일성, 즉 거기서 나타나는 개념과 실재의 통일 속에서 개념은 지배적인 것이 되는데, 그 까닭은 개념은 이미 그 자체, 자신의 특성에 따라, 이미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 논리를 토대로 개념의 자기 파괴, 즉 자기 지양이 나타나게 되며, 이러한 논리는 미학에도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즉 가상으로서의 감각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지양시켜 사유적인 것이라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때 감각적인 것은 이미 사유적인 것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동일성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가령 “이러한 방식으로 감각적인 것은 예술에서 정신화되는데, 그 까닭은 정신적인 것이 예술 속에서는 감각화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는 구절을 통해서 혹은 “감각적인 것의 가상은 「...」 정신을 위해서 나타난다”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결국 헤겔 미학에서 예술은 자율적인 가상 혹은 감각적인 것의 자기 준거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아가멤논에 의해 희생양으로 바다에 던져지고 마는 이피게니에의 운명처럼, 그 감각적인 것은 이미 처음부터 “진리”와 “정신”의 바다 속에 내던져지게 될 운명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차이성보다는 동일성의 논리가 작동함으로써 일종의 내밀한 억압의 메커니즘이 나타나는 바, 즉 감각적인 측면에 대한 억압이 그것이다. 헤겔이 “정신은 자기 자신에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생산하며, 이 예술작품은 외적이고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것과 순수한 사유를 융화시키는 첫 번째 매개체, 즉 자연 및 유한한 현실과 인식해 내는 사유의 무한한 자유를 융화시키는 최초의 매개체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예술작품의 이상적인 종합 상태를 제시하고 있을 때, 그것은 결코 분열과 차이를 인정하는 논리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동일성 논리의 결과인 바, 즉 정신의 자기 동일성을 중심으로 설정하면서 예술작품을 파악하려는 사유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종합이란 감각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에 포함시키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여기서 헤겔 미학의 사유를 기호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예술작품을 구성해 주고 있는 감각적인 기호(가상의 특성)는 항상 초감각적인 의미화(정신화)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사유는 - 아도르노의 “비동일성” 테제나 혹은 현존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 다름 아닌 확고한 의미 혹은 자신의 의도 속에서 항상 현존하는 주체(정신)를 이미 우월한 것으로 설정하는 사유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 혹은 예술작품의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은 결코 자율적인 예술의 특성과 연결될 수 없으며 오히려 단지 “가상적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정신, 진리, 이념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 예술작품과 관련하여 사유하는 정신은 “소외된 것을 사유로 변화시키고 또한 스스로에게로 복귀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타자in seinem Anderen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험적인 주관철학을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자신 자신의 타자를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는 절대적인 주관성의 순수한 자기 준거성으로 상승될 수 있는 정신”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중간 특성을 갖는 예술작품 자체의 구조에는 이미 정신적인 것에 의해 감각적인 것이 지배당하는 현상이 담겨 있으며, 엄격한 의미에서 이것은 가상으로서의 자율적 예술과는 무관한 것이다. 사실 헤겔 미학이 자율적인 예술(즉 가상)을 인정해 주는 미학이었더라면, 헤겔은 낭만주의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비판을 전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정신적인 이념이 현현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헤겔은 낭만주의 미학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이런 연유로 헤겔은 “예술 철학은 아름다운 것의 독자성, 즉 아름다운 것은 진리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과는 분리되어 있으며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로 시작될 수 있다”는 요청을 통해 예술을 진리와 윤리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던 쉴레겔의 현대적인 시각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헤겔이 “가상”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미 그 의미로는 “빛”의 의미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낭만주의 예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Ironie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거기서 그는 낭만주의의 아이러니를 “자아의 주관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에게서 엿보이는 주관적 존재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가상”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헤겔은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에는 “진실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내용, 윤리, 진리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진실한 진지함”(이것은 바로 정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있었다. 이는 헤겔 미학이 감각적인 것, 유희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결코 예술적 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성, 정신성, 진리 등의 이름 하에 감각적인 것의 독특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객관성”, “정신적인 것”, “진실한 진지함”에 대한 헤겔의 예찬은 - 후에 아도르노가 지적한 바 있듯이 - 소위 현실 상태의 객관성을 옹호했던 야만적인 파시즘에 본의 아니게 그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V. 헤겔 미학의 “가상”의 문제점

플라톤과는 달리 헤겔은 이념의 모방이라는 기준 하에서 아름다운 것(예술)을 파악하지는 않았으며 그 대신 가상이라는 특성을 통해 “언뜻 보기에” 예술의 자율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가상은 결국 해체되고 만다. 즉 헤겔 미학에서 예술은 심미적 가상으로 남는다기보다는 절대적 이념의 빛에 의해서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술은 “현상들의 진실한 모습으로부터 그 저열하고 일시적인 세계의 가상과 현혹을 떼어 내며 그 현상들에 더욱 고귀하고도 정신적으로 태어난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식으로 언급되었고, 따라서 “좋지 않은 경험적 세계 - 심미적 가상 - 진정으로 실재하는 세계(순수한 현실, 절대적인 이념)”라는 틀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긍정적으로 고찰될 수 있지만, 그러한 매개 가능성에 앞서서 몇 가지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예술이 오로지 절대적인 이념 혹은 순수한 현실에만 정향된 것으로서 파악되거나 혹은 그러한 것에 의해서 그 존재의 타당성이 결정될 경우, 그것은 진리정향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강도 높은 실험성을 바탕으로 전개해 왔던 현대 예술의 심미적 발전 과정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닌다. 18세기 이후 예술은 진리와 이념의 요청에 의해 결코 지양되지 않았으며, 특히 “생활 세계의 실천” - 이 “생활 세계”라는 개념은 헤겔의 “이념”이라는 개념과 등가적인 의미를 갖는데 - 속에서 예술의 지양을 꾀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운동조차도 그 자율적 예술을 지양시키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와 같은 운동 이후에도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그 자율적 공간을 계속 확보해 왔다. 이런 연유에서 예술적 현상을 진리와 연결시키지 않고 오로지 가상 자체로만 파악하려는 관점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와 관련하여 헤겔 미학은 한계를 지닌다. 사실 헤겔은 진리나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대 예술의 경향을 이미 당시에 정확하게 진단해 낸 바 있다. “우리에게 예술은 더 이상 진리가 존재를 획득하는 지고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 누구나 예술이 점점 더 상승되고 완성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 형식은 정신의 지고한 욕구로 존재하는 것을 중지하고 말았다.” 진리나 정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예술은 이미 과거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현재의 예술은 더 이상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헤겔의 요지이다. 여기서 그에게 부정적으로 비친 소위 “아름답지 못한” 예술은 다름 아닌 “부분성das Partikuläre”의 특징인 성찰적 사유만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주관적인 예술을 말하며, 아이러니컬하게도 헤겔이 부정적으로 파악하였던 그와 같은 예술은 헤겔 이후의 현대 예술에서 주된 경향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진리와 정신적인 것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가상”이 그 중심을 향해 있다는 식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현대 예술의 발전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로 더 이상 작용할 수 없다.
헤겔 미학의 또 다른 문제점은 감각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헤겔 미학은 이념을 감각적으로 직접 모방해야 한다는 예술철학을 비판하고 있으며 또한 개인적인 취향에서 출발하는 계몽주의적 미학과도 구분된다. 현대성이 바로 재현 이론이 붕괴되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헤겔 미학도 감각과 이념의 직접적인 관계의 불가능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요청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지시”는 직접적인 재현과는 다른 언어이다. 그런데 감각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헤겔 미학과 관련하여 뷔르거는 구조주의 기호학의 용어인 기표와 기의라는 개념쌍을 대비시키면서 기호학적 사유와 예술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뷔르거의 논리에 의하면, 기호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하나의 확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예술의 경우 그러한 “하나의 확고한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감각적인 기표는 하나의 기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 심미적 대상 사이에서 생산되는 의미(즉 기의)를 “지시한다”고 보면서 뷔르거는 예술작품의 감각적인 것을 가상으로 파악한 헤겔의 사유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엄격한 말의 의미에서 예술작품이 하나의 기호라면, 그것은 언어기호처럼 하나의 확고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예술작품들은 의미를 지시하며, 이 의미는 무엇보다도 수용자와 심미적 대상의 대립 속에서 비로소 정립된다. 「...」 예술작품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심미적 대상에 적절히 반응하려는 수용자는 다시금 감각적인 측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기호의 경우 감각적인 것은 종속된 것으로 평가절하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감각적인 것은 ‘가상으로 고양되어야 한다’라는 헤겔의 논리는 결국 예술작품에서 감각적인 것의 위가를 이론적으로 다시 찾으려는 시도로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테제와는 정반대의 시각이 나타난다. 즉 뷔르거는 헤겔의 가상 개념을 “감각적인 것의 위가Stellenwert를 다시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뷔르거는 “진리” 개념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로서 파악하였던 헤겔을 비판하면서 그와 같은 통일보다는 모순 자체를 진리로 인식할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는 감각적인 것을 가상으로 파악하였던 헤겔의 테제에서 이론적 장점을 찾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즉 과연 가상으로서의 감각적인 것이 정말로 다양한 의미 지시 가능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헤겔에게 있어서 감각적인 것은 결국 “정신적인 것의 타자”일 수밖에 없고 또한 헤겔 미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 “정신적인 것”(의미)이란 대체로 특정한 의미(역사적이고도 시대적으로 제한된 것)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게 되며, 이것은 곧 가상으로서의 감각적인 것까지도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점은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 즉 비현실적인 것 내지는 초현실적인 것과도 연결될 수 있는 낭만주의의 감각적인 형상화 작업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요컨대, 헤겔은 감각적인 것의 위가를 고양시켰다기보다는 그것을 정신적인 것에로 귀속시킴으로써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자의성과 상대성에서 찾으려 했던 소쉬르의 기호 이론보다 훨씬 더 그 감각적인 것의 자기 전개를 제한시키고 말았다(다시 한 번 강조한다면, 사악한 현상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해 냈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예술의 자기 전개를 제한시키려 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마지막으로 헤겔 미학과는 다른 차원에서 예술의 가상 이론을 정립한 또 하나의 시각이 있으며, 이 시각과 관련하여 우리는 헤겔 미학이 남긴 문제점이나 한계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도르노 및 니체의 시각이다. 가령 정신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을 도출해 내는 헤겔 사유를 비판한 바 있는 아도르노의 경우,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동일성보다는 그 양자의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모순”의 미학이 나타나며, 니체의 경우 헤겔이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던 개념 혹은 이념적인 사유가 다름 아닌 “은유적 가상”으로 파악되면서 가상의 미학이 성립하게 된다. 특히 아도르노의 경우 “가상” 개념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성된 예술작품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된다. “예술작품이 생산해 내는 환상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가 심미적 가상이다.” 헤겔 미학과는 달리 아도르노는 정신적인 본질이나 혹은 “잘못된 의식의 존재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예술적 가상을 오로지 예술작품의 내재적 특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리가 예술 속에서 직접 나타난다는 본질론적 요청에도 대항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은 마법인 바, 즉 진리이어야 한다는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마법”이라는 간결한 명제를 내세우고 있으며, 이러한 마법이 곧 “가상”으로 환원되고 있다. “예술작품은 현존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가상일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스스로 원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도 가상이다.” 예술작품이 결코 경험 현실(현존재)과 동일시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예술작품의 가상적 특성 때문이며, 이처럼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상의 자율적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아도르노는 헤겔의 시각과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가상적 특성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의 가상 특성은 그 작품의 고유한 객관성을 통해서 내재적으로 매개된다”고 밝힘으로써 작품 밖에서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정신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론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화해Versöhnung 및 구원Rettung과 같은 역사철학적인 모멘트를 지니지만, 그것은 불로흐E. Bloch의 “다가오는 화해의 출현”의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화해적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비현실적인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준거될 뿐이다. 이처럼 가상과 진리의 직접적인 연결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고 또한 단지 “모순적인 차원”에서만 그 연결 가능성을 파악하였던 아도르노의 미학을 고려해 볼 때, 단순한 지시 관계 차원에서 정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는 헤겔 미학은 한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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