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 비동일적 자아의 탐색

나뭇잎숨결 2013. 1. 16. 12:05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 비동일적 자아의 탐색

 

 

 

   

Gustav Klimt. Apple Tree I - Olga's Gallery

http://www.abcgallery.com/K/klimt/klimt78.html @olgasgallery 에서

 

 

 

 



- 노 성 숙(이화여대)

 

 



【주요어】아도르노, 카프카, 오딧세우스, 사이렌, 비동일적 자아

 【요약문】본 논문은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아’에 대한 물음과 이해가 철저하게 성별적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오딧세이』신화에서 특히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만남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위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과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논의한다.


자아의 원초적인 역사 속에 나타난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의 상징성을 비교 고찰함을 통해서 본 논문은 신화 안에 이미 전제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자아의 이해에 나타난 성별상징성과 남성중심성을 비판․해체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사이렌들에게 감추어진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상징성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 자아에 대한 새로운 함축성들을 탐색한다. 그리하여 자아이해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을 토대로 여성들의 대안적 자아, 즉 ‘비동일적 자아’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본다.

1. 들어가는 말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미래의 삶을 기획하게 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물론 세계와의 의미연관성을 새롭게 하는 데에 매우 긴요하다고 하겠다. 이미 4세기말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은 내면적 성찰로부터 매우 현대적인 ‘자아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는 본래적인 자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유한 내면성에로의 ‘회귀’(conversio)와 현재에 대한 집요한 주의집중을 요구하는 ‘기억’(memoria)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자아이해가 놀랍게도 현대 철학과 심리학에 매우 근접해 있기는 하지만, 자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근세 철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서 자아의 본질이 연장적 실체인 육체가 아니라 사유적 실체인 정신임을 명시했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원론(dualism)의 각인, 즉 근세의 인식론적인 주-객도식과 그 주체성의 확립은 특히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비판에 부딪히게 되었다. 또한 데카르트에게서 자아는 외적, 객관적 세계와 분리된 의식 내면에 밀폐된 자아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유아론(solipsism)의 자아 역시 그 동안 상실해왔던 타자, 주변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여성주의(Feminism)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자아, 즉 이원론적이고 유아론적인 자아를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정신에는 확실성을 그리고 육체에는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이러한 육체에 대한 불신은 ‘정신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고,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라는 성별상징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고립되고 추상적인 자아와 정신에 우선성을 부여한 것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남성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아’에 대한 물음과 이해가 철저하게 성별적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오딧세이』신화에서 특히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만남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과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서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신화시대로부터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최초로 성립되었는지, 즉 자아에 대한 원초적인 역사를 밝혀내고 있으며, 후자는 기존의 신화와 신화분석에서 당연시되었던 오딧세우스 중심적인 시각을 벗어나서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로의 이동을 선취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원사(Urgeschichte) 속에 나타난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의 상징성을 비교 고찰함을 통해서 본 논문은 신화 안에 이미 전제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자아의 이해에 나타난 성별상징성과 남성중심성을 비판․해체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사이렌들에게 감추어진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상징성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발견해내고 재조명함으로써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들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 자아에 대한 새로운 함축성들을 탐색해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이해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을 토대로 여성들의 대안적 자아에 대한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보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2.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노래


1) 『오딧세이』에서 자아의 원사


자아는 과연 애초에 어떻게 성립된 것일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딧세이』를 유럽문명의 근본 텍스트로 보고, 그 안에서 서양문명의 자기 파괴적 경향을 예감해주는 알레고리들을 읽어내고 있다. 그들은 특히 주인공 오딧세우스를 “시민적 개인의 원형”(DA 61)으로 간주하고, 그에게서 자아의 원사를 밝혀내고 있다. 오딧세우스는 신화와 계몽의 극단적인 대립성 속에서 살아남은 개인적 자아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적 모험의 다양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딧세우스에게 “트로이로부터 이타카에 이르는 표류는 자연의 폭력에 대비해서 육체적으로 매우 약한 그리고 자기의식 속에서 이제 막 형성되는 자아가 신화들을 거쳐나가는 길”(DA 64)이다.
오딧세우스는 숱한 신화적 위험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위험을 이겨냄으로써 강인한 자아를 갖게 되는데, 이 때 자아는 “오로지 통일성을 부정하는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 즉 그(이러한 모험들에 대한) 대립에 의해 비로소 그 자신의 경직성 속에서 형성되는 것”(DA 65)이다. 이로써 ‘성숙’한 인간으로서 오딧세우스는 신화 속에 있는 거짓들을 알아차리고 신화적 인물들의 속임수에 빠지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목표인, “고향과 확고한 소유에로의 귀의라는 자기보존”(DA 64)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딧세우스가 ‘자기보존’(Selbsterhaltung)이라는 목표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어떻게 신화에 대립하여 자아의 개념을 획득해 나가는지, 거기에서 드러나는 최초의 계몽적․합리적 요소는 무엇인지를 분석한다. 오딧세우스가 겪는 모험의 궁극 목표는 자신이 소유했던 지위와 재산을 다시금 획득하기 위해 이타카의 왕으로서 그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모로 ‘책략’(List)들을 쓰게 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지장으로서 영리한 오딧세우스가 자연신들과 신화적인 인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책략의 메카니즘에 주목한다. 그의 책략은 희생을 요구하는 신에게 선물을 바치는 ‘교환행위’에 사용되는데, 이는 실제로는 좀더 합리적 계획에 따라 자연신을 지배하기 위한 희생행위이며 그 안에는 기만적인 요소가 감추어져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바로 그 희생의 ‘기만’이라는 계기에서 오딧세우스적인 책략의 원형을 발견해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편으로 그 기만을 통해서 신들을 이겨내고 ‘동일적’ 자아가 성립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책략 속에서 드러나는 희생의 합리성은 이미 비합리성의 싹을 품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딧세우스는 신화적 인물들이나, 자연신으로 대변되고 있는 막강한 자연에 맞서서 책략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기만하고 탈출하게 되는데, 그 기만적 희생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그는 한편으로 이타카의 왕으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을 보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합리적’ 자아가 더 이상 주술적이거나 신화적인 힘을 믿지 않고 ‘눈먼 자연’(blinde Natur)에로 되돌아가지 않고자 아무리 애를 쓴다고는 하더라도 다시금 자연이 요구하는 희생에 빠져들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략 속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신화적 위력들을 이겨낸 자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연관성을 끊어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요로 되는 것은 인간 외적인 자연과 타인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 “인간 안에 있는 자연에 대한 부정”(Verleugnung der Natur im Menschen)(DA 72)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도 역시 이미 살아있는 유기체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과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연관성을 끊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한 부분을 희생함으로써만 인간은 강인한 동일성의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자아는 인간 스스로의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에 근거를 두고 성립하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희생의 내면화’, ‘체념’ 그 자체가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위해서 보존되고 유지해가야 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 자아에 의해 억압되고 해체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자신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성별 상징성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딧세이』의 12장에서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만남을 ‘신화, 지배, 노동의 뒤얽힘’으로 주제화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딧세우스는 키르케의 예언대로 사이렌들의 섬을 지나게 된다. 사이렌들은 풀밭에 앉아서 아주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그 유혹이 매우 강력해서 그 노랫소리를 들은 자들은 그 섬에 남아있고자 하며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 곁을 지나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미리 키르케의 충고에 힘입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항해를 계속한다. 사이렌들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인데, 첫째로 자신의 선원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아 사이렌들의 유혹적인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하고 무조건 노를 저어서 앞으로 돌진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 자신은 돛대에 밧줄로 묶어서 그 노래를 듣지만 사이렌들의 유혹에 빠져서 그 섬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오딧세우스는 사이렌들의 노래가 주는 유혹 때문에 자신이 몸부림치기 시작하면 더욱 세게 자신을 끈으로 묶어달라고 부하에게 당부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 장면에서 사이렌들의 유혹이 그 얼마나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딧세우스가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했는지, 그리하여 그가 어떻게 그 자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신화적인 위력에서 벗어나고 이를 통해 외적인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해석에서 과연 오딧세우스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으며 그 신화적 상대역인 사이렌들은 또한 어떤 존재로 파악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오딧세우스는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강력한 유혹의 노래를 들었으면서도 살아남은 존재, 즉 막강한 신화적인 인물과 그 상황을 이겨낸 지적인 영웅이자 서구문명의 이성적인 주체를 상징한다. 그는 사이렌들의 아름다운 노래가 담고 있는 ‘과거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유혹을 겪어내었으며 고통 속에서 성숙하게 된 영웅’(DA 49)이다. 그의 자아는 사이렌들의 노래가사처럼 달콤한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의 확고한 질서 속에서 원시적인 과거의 신화적 힘을 벗어남으로써 형성되었다. 더욱이 사이렌들의 그 막강한 해체의 위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오딧세우스는 인내심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를 계획적으로 강력하게 억압해야만 했다. 이러한 오딧세우스의 모습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유년기에 자아가 형성되기 위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읽어내고 있다: “동일하고, 목적조준적이고, 남성적인 인간성의 성격, 즉 자아가 만들어질 때까지 인간은 매우 끔찍한 것들을 그 스스로에게 강요해야만 했다.”(DA 50) 여기서 우리는 오딧세우스를 통해 보여진 인간의 원초적 자아가 ‘동일하고, 목적조준적이고, 남성적인’(identisch, zweckgerichtet, männlich) 성격이라는 것과 그러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자행되는 억압과 훈련의 가혹함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주목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오딧세우스가 만난 사이렌들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에게 단지 유혹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로만 묘사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노래를 들은 자는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닌 “위험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요부(femme fatale)”로 그려지고 있다. 즉 자아 및 주체의 형성을 방해하고, 그 맹아를 해체하고자 하는 위험을 지닌 존재이다. 사이렌들의 노래가사는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누린 과거에 대한 행복의 약속(Glücksversprechen)인데, 이 약속은 오딧세우스에게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의 경계를 없애는 불안 그리고 죽음과 해체 앞에서의 두려움과 짝을 이룬다.(DA 51) 따라서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노래의 ‘위험’이 오딧세우스에게는 관건이 되고 만다.


더욱이 사이렌은 온전한 의미의 여성적 상징도 아니다. 위의 반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아래의 반은 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군집으로 몰려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은 아직 인간도 아닌 신화적 존재, 즉 자아가 아니며, 그들과 대항하여 이겨냄으로써 오딧세우스만이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렌의 목소리 역시 인간의 목소리도 아니면서 인간의 자아형성에 방해가 되는 소리, 즉 강력하게 위험한 ‘소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이렌의 존재와 그들의 노래는 오딧세우스와 그 오딧세우스를 해석하고 있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모두 신화적인 자연, 야만의 상징임과 동시에 동일적 자아에 대한 방해요소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즉 사이렌들은 위협적이거나 위험한 존재이자 낯설고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동일적 자아의 형성과정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3) 동일적 자아에 대한 자기비판의 남성중심성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이렌들의 종말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다. 즉 호머의 서사시는 “배가 떠나간 후에 그 노래부르던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DA 78)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사이렌들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곧바로 그들의 노래 그 자체, 즉 음악에 대한 것에로 옮겨가고 있다. 이로써 서구문명 속에서 “과거를 살아있는 것으로서 구원할 수 있는 충동”, 즉 예술만이 충족시킬 수 있었던 충동은 억압되었고 예술은 병들게 되었으며, 오딧세우스가 그저 묶인 채로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었듯이 예술은 향유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아의 원사를 해석하면서 동일적 자아가 합리적이고 목적-수단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남성적 성격으로 형성되었고 그 자신에 대한 억압을 전제로 하는 비합리성을 지닌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아의 원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성별적인 상징성을 밝혀 볼 경우, 우리는 시민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가 결국에는 남성적 영웅들의 성격이고, 그들의 강인한 자아가 성립되고 보존되기 위해서는 사이렌들의 상징성에 비추어진 여성들과의 적대적인 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극복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해석으로부터 보여지는 성별적인 상징성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 즉 남성적 자아가 전제로 하고 있는 인간은 누구를 의미하며, 인간성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남성적 시민의 자아와 여성적 자아는 동일시되는 것일까? 만일 동일시 될 수 없다면, 그 나머지반의 인간성, 즉 여성적 자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쿨케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쓰여진 것 이외의 다른 인간적 발전가능성을 허용하지 않고 관계를 총체화 했기 때문에 그들의 해석은 여성에게 그대로 옮겨질 수 없는 남성적인 동일성(männliche Identität)에 불과하며, 이러한 남성적 동일성의 모델이 문화적으로 우세해 왔다고 지적한다. 또한 펠스키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서 “남성적인” 합리화와 “여성적인” 쾌락은 단지 일면적인 지배논리의 양 측면일 뿐이며, 이러한 논리로부터는 보다 생산적인 담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여성적 자아와 여성적 주체성은 이러한 남성적인 동일성에 대립하여 단지 부정적으로만 규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성적 자아에 대한 생산적인 언급에 앞서서 우선 남성중심적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롭게 신화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앞서 논의 한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만남의 장면을 돌이켜 볼 경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동일적 자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오딧세우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동일적 자아에 대한 자기비판에 머물고 있으며 다른 존재인 사이렌들에게는 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동일적 자아로 환원될 수 없는 여성적 자아를 탐색해 감에 있어서 사이렌에게 눈을 돌려서 다시금 그 장면을 분석해볼 필요성이 생겨나는데, 여기서 우리는 독특하고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다시 써내려 간 카프카를 만날 수 있다.

3. 사이렌들의 침묵과 오딧세우스


1) 동일적 자아의 해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개념을 한편으로 계몽의 예비단계로 이해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계몽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정적인 의미, 즉 폭력성이나 부자유와 연결된 뜻으로 사용한다. 특히 후자에서 “신화는 비합리적이고 비진리인 것을 의미하며,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의 이념에 위배․모순되는 내재적 반복의 압박, 자연의 폐쇄적 회로일 뿐이다.”


이와 달리 카프카는 현대와의 교감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력으로 신화를 바라봄으로써 신화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는 신화를 새로 쓰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신화는 더 이상 반복과 운명의 법칙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탈신화화되고 그리하여 오늘날 다시금 새로운 텍스트로 활성화된다. 따라서 카프카의 신화개작은 그 자체로 ‘신화비평’이자 신화를 다시금 교정할 수 있는 생산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화개념을 토대로 쓰여진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은 앞서 논의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동일적 자아와는 다른 관점에로의 전환을 성취해내고 있다. 이 글은 “불충분하고, 유치한 수단도 구원에 기여할 수 있음의 증거”에 대한 언급에서 출발하는데, 호머의 본래 텍스트와 달리 오딧세우스 자신도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돛대에 묶게 했다는 설정을 한다. 여기서 오딧세우스가 사이렌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은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의 사슬인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그러한 수단이 ‘불충분하고’(unzulänglich), ‘유치한’(kindisch)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로써 이미 오딧세우스가 사이렌들을 이겨내는 데에 사용했던 수단들, 즉 소위 최초의 ‘합리성’을 표현하고 있던 수단들을 매우 의문시하면서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의 만남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로 돌입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카프카가 이 만남의 장면에서 성취하고 있는 더욱 큰 반전은 사이렌들이 그들의 노래보다도 더욱 강력한 ‘침묵’(das Schweigen)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아무리 오딧세우스가 사이렌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다른 수단들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노래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에 사이렌의 침묵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예의주시했던 ‘동일적 자아의 책략’이 카프카에게는 ‘불충분하고, 유치한 수단’에 불과해지고 오히려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가 예상하고 있었던 틀을 깨고 나오는, 즉 노래보다 더 강력한 ‘침묵’의 무기를 지닌 자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오딧세우스가 지녔던 지적인 영웅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릴 뿐 아니라 해체되고, 그 영웅에 대한 적대자이자 그 항해의 방해자인 사이렌들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인 오딧세우스는 자신의 영리함이 자신을 살려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렇게 살아남은 오딧세우스의 영리함에 근거한 책략이 신화적인 인물들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적용된 최초의 합리성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은 화자로서의 오딧세우스 자신의 주장과는 다른 상황을 설정한다. 즉 최초의 합리성에 근거를 둔 ‘동일적’ 자아를 형성함으로써 오딧세우스가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인 사이렌들의 침묵에 의해서 오딧세우스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살려낸 사이렌들의 침묵과 그것에 대한 오딧세우스의 오해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2) 사이렌들의 침묵과 오딧세우스의 오해


사이렌이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사이렌에 관한 상징성을 해체하는 시작점일 뿐 아니라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의 오해와 허상을 보여주게 된다. 카프카는 사이렌을 노래하는 존재로서 일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노래보다 ‘더욱 끔찍한 무기’인 ‘침묵’을 지닌 존재로 본다. 그리고 이 침묵은 오딧세우스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오딧세우스의 교만 보다 실은 더 강력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이렌들은 왜 침묵한 것일까? 카프카는 가능하리라 생각되는 두 가지 이유를 덧붙인다. 한가지는 오딧세우스라는 적대자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침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한가지는 밀랍과 사슬이라는 수단을 전적으로 믿고 있으며 이미 기대하고 있는 노래의 황홀함에 빠져 있는 오딧세우스의 얼굴을 본 순간, 사이렌들은 그들 자신의 모든 노래를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렌의 침묵을 오딧세우스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사이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이 실제로는 오해임에 분명한 데에도 오딧세우스는 자기 홀로 그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이렌들의 침묵을 둘러싼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의 만남이 “쌍방간의 오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즉 오딧세우스는 밀랍과 사슬의 보호수단 때문에 노래에 대해 안전하다고 믿었고, 사이렌은 그의 얼굴에 가득 찬 행복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고 그래서 침묵을 지킨 것일까? 그리하여 “오딧세우스는 그 침묵을 오해했고, (...) 사이렌은 오딧세우스의 오해를 오해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쌍방간의 오해라고 해석하기에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딧세우스의 오해는 선명하게 드러난 반면에 사이렌들의 오해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딧세우스가 사이렌의 침묵을 왜 그리고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 지를 물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사이렌들의 침묵이 오딧세우스에게는 도대체 왜 노래가 된 것일까? 그에게 사이렌은 이미 전해들은 정형화된 인물로 강력한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 그 이외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즉 정반대로 침묵할 수 있는 사이렌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오딧세우스는 사이렌들의 침묵을 결코 들을 수 없는 존재이며, 사이렌의 침묵조차도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기대했던 그대로 노래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오딧세우스가 그 침묵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으며 어떤 노래로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의 오해가 어떻게 완성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딧세우스에게 사이렌의 노래는 자신의 동일적 자아를 매우 강력하게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는 이 장애물을 이겨냄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지켜갈 수 있었다. 그가 이러한 동일적 자아를 보존한 데에는 타자의 역할을 고정시킴으로써 타자를 전적으로 배제할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전적인 ‘무지’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딧세우스의 폐쇄적이며 일방적인 관계방식은 사이렌들의 침묵을 노래로 오해하면서 황홀경에 빠져서 탐닉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절정을 이룬다. 동일적 자아는 사이렌이라는 타자의 존재를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기만에 빠져 있을 뿐인 것이다.


이와 달리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의 오해를 다시금 오해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오해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렌들은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노래하는’ 사이렌이라는 역할, 즉 신화적인 인물에게 부여된 운명의 역할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에게서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를 이겨낼 수 있는 적극적인 무기로서든 오딧세우스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든 상대인 오딧세우스를 향해있으면서도, 그의 기대수준에 맡겨진 자신의 신화적 역할을 역행할 수 있는, 즉 오딧세우스의 동일시와 다르게 행위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는 비록 그가 사이렌들의 반쯤 열린 입과 눈물맺힌 눈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로서의 사이렌들의 침묵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즉 타자에로 열린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이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반면에 사이렌들은 타자인 오딧세우스의 활홀경에 빠진 얼굴을 바라보고 그에 관계해서 자신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비록 그와의 만남이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맞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를 살려 낸 것이다. 화자인 오딧세우스는 자신의 동일적 자아의 형성에 방해요소인 사이렌을 이겨냄으로써 살아남았다고 신화에 남겨 놓았지만, 카프카에 의하면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의 규정성에서 어긋나있는 비동일적 존재들인 사이렌들이 오히려 그를 살아남게 해준 것이다.

4. 사이렌들의 침묵과 노래: ‘비동일적’ 자아의 내러티브


1)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오딧세이』에 대한 분석에서 오딧세우스는 최초의 계몽적 시민의 원형인 반면에 그가 만나는 여성들은 거의 모두 신화적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사이렌들도 역시 계몽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자연에 가까운 존재이다. 사이렌들의 전형적인 모습에서조차 반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이러한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가 살아서 지나간 다음에 그 힘이 약해져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아래의 반쪽이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뀌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한 무력화된 여성으로서의 ‘인어 이미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표적으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


사이렌들이 지닌 여성적 상징성이 비록 불분명하고 또한 지나온 역사 속에서 남성적 권력에 대한 종속을 뒷받침해 주는 여성의 이미지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로 그 남성중심적 시각에서는 보지 못하고 간과했던 여성성의 독특함을 보다 적극적으로 읽어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이렌의 상징성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사이렌을 단순히 신화적 자연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대안적 의미에서의 여성적 ‘자아’로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사이렌들을 통해서 읽어내고자 하는 여성이 가부장적 역사를 관통해왔던 동일적 자아가 아니라면 과연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자아인가?


우선적으로 사이렌들의 자아는 오딧세우스를 통해 보여진 인간의 원초적 자아, 즉 “동일적이고, 목적조준적이고, 남성적인” 자아가 아닌 ‘비동일적인’ 것이다. 그들은 남성적 진리의 관점에서는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없는 존재로 치부되거나 존재가 있다고 하여도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범주에 동일시 될 수 없기 때문에 덜 진화된 자연의 상징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사이렌들 역시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머지 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이렌들을 동일성사고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는 이차적인 존재로서 자연의 의미에 가까운 여성들이며, 독립된 개체로서의 시민이 되기에는 자의식이 없는, 개별자로 분화되지 않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여 사이렌들이 지닌 이러한 ‘비동일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규명해볼 수는 없을까?


사이렌들이 남성적 동일성의 기준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는 ‘비동일자’라고 할 경우, 이들은 자아와 적대시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에서도 잠시 묘사된 바처럼 오딧세우스를 살리기 위해서 ‘침묵할 수도 있는 존재’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카프카는 기존의 신화와 그 해석에서 사이렌들을 노래부르는 신화적인 존재로 고정시켜버렸던 틀을 깨고 사이렌들에게 ‘침묵’이라는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동일적 자아의 틀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사이렌들의 비동일적인 특성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영웅적 탈신화화는 사이렌들의 침묵을 동원하여 동일적 자아의 해체에까지는 도달했지만, 이러한 비동일적 존재로서의 사이렌들이 의식을 지니지 않았다고 봄으로써 한계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카프카는 “만일 사이렌들이 의식을 지녔다면 그들은 그 당시 절멸되었을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과연 사이렌들은 카프카의 말대로 의식이 없는 존재였을까? 오히려 사이렌들은 남성적인 동일성 의식과는 다른 의식을 지닌 존재, 즉 다른 의미의 ‘자아’가 아니었을까?


필자는 카프카와 달리 사이렌들의 침묵이 매우 ‘의식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들의 의식이 동일성이 아닌 ‘비동일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동일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자아는 ‘비동일적 자아’인 것이다. 비록 기존의 신화와 역사는 모두 자신의 ‘합리적’ 능력에 의지해 매우 힘든 난관들을 이겨낸 오딧세우스라는 인물의 자기주장에 근거해서 일면적으로 쓰여져 있지만, 그러한 동일적 자아의 자기보존은 그 자아의 생존을 말없이, 즉 침묵으로 지켜준 ‘비동일적 자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자아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고 있는 ‘비’-동일성’(Nicht-Identität)은 단지 동일성에 대한 파생적 개념이 아니라 ‘비’(Nicht)에 대한 강조, 즉 동일성에 대한 강압으로부터의 벗어남과 이를 통한 새로운 인간적 관계성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동일성의 반대쪽으로서의 다른 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에 대한 적극적 비판․해체와 동시에 기존의 사고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사태를 실제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이렌들의 새로운 상징적 토대인 비동일성과 그 비동일성에 근거하고 있는 비동일적 자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2) 체화된 목소리로 노래하는 자아


우선적으로 호머가 전하는 『오딧세이』 12장으로 되돌아가서 사이렌들의 ‘노래’에 주목하면서, 사이렌이라는 비동일적 자아가 자기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녀들의 노래에 따르면, 그녀들은 오딧세우스가 자신들의 섬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노래를 귀담아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또한 그녀들은 오딧세우스에게 이미 그가 트로야에서 겪었던 고통을 알고 있고, 이 지상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들도 다 알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사이렌들의 노래가 과거의 즐거움을 약속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즐거움은 그 자신의 자아를 포기할 때에만 해당되는, 즉 ‘가부장적 질서의 위협’(DA 50)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사이렌이 약속하고 있는 행복이란 과거의 행복에 대한 것이며, 이는 자아를 상실할 것 같은 불안과 더 나아가 자아가 정지되는 죽음과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딧세우스는 사이렌들이 들려주는 유혹이 클수록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묶도록 만들었으며, 이로써 행복에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욱 행복에 내맡기지 않도록 저항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오딧세우스와 사이렌의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만남 이후로 모든 노래가 병들었으며 모든 서양 음악이 문명 속에서의 노래가 지닌 모순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예술의 한 장르로서 노래가 병들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은 과거를 생생하게 구원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예술의 수용에 있어서도 그 노래를 감상하는 자들이 오딧세우스와 같이 콘서트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향유와 노동’의 분리(DA 52)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도르노는 여전히 예술만이 사회의 총체적인 거짓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며, 비동일성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러한 저항성과 비동일성을 사이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와 달리 필자는 사이렌들의 노래가 이미 아도르노가 말하고 있는 예술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래가 ‘동일적 자아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보존함으로써’ 예술적인 ‘미메시스’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사이렌들의 노래의 내용에서 ‘생생한 기억’을 통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비동일적 자아의 자기인식’의 독특함을 발견할 수 있다.


사이렌들의 노래에서 약속하고 있는 행복은 육체적인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녀들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 역시 그녀들의 육체적 현존과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이는 비동일적 자아가 자신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론적인 토대를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처럼 육체에 대한 정신적 우위에 의해서, 즉 자신의 자연적 부분을 억압하고 절단함으로써 자아를 획득하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육체나 육체적 욕망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존재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인식하며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렌들의 노래는 삶의 체험과 기억을 단순히 정신적 작용으로서가 아닌 그 육체적 뿌리와 불가분으로 연관시킴으로써 ‘살아있는 자아’로서 비동일적 자아를 재현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래의 힘은 단순히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성적 대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렌들 자신의 욕망이 체화된 목소리(embodied voice)로 부르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사이렌들의 개념적인 인식이 아닌 몸을 구심점으로 삼는 자아에 대한 경험적 이해는 이원론적으로 새겨진 몸에 대한 사회적이고도 문화적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자기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사이렌들의 “깊고 힘있는 알토의 목소리가 (...) 지금까지는 익숙하지 않은 가능성 앞에 드리워진 막을 걷어올릴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3) 관계적 자아의 미메시스: 타인과 관계맺는 비동일적 자아


사이렌들의 이러한 자기인식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이제 사이렌들의 노래와 침묵에서 그녀들이 취하고 있는 타인에 대한 인식과 그 관계방식을 오딧세우스와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오딧세우스에게 사이렌들은 낯선 존재이고, 그의 귀향길을 방해하고 있는 존재이자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천만한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의 목표인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절대로 사이렌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되며, 만일 관계를 맺고자 할 경우에는, 자신에게 미리 ‘안전장치’를 해놓아야만 한다. 결국 사이렌들의 섬을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된 오딧세우스는 책략을 통해서 사이렌이라는 이 위험한 타인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돛대에 자신을 사슬로 묶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딧세우스와 사이렌들이 각각 타인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하는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우선 오딧세우스에게 사이렌이라는 타인의 존재는 단지 모든 관계의 중심인 자신, 즉 자아의 목표와 연관해서만 의미가 있는 주변적이고 수단적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더욱이 그 타인이 자신의 목표를 위협할 때, 그의 삶에서 타인은 항상 자기보존에 적대적인 방해자가 되고 만다. 그에게는 이러한 방해자가 주는 위험과의 투쟁에서 자신만을 믿고 의지해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며, 이를 통해 결단성 있고 독립적 자아로서 그의 동일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딧세우스는 ‘자기를 보존하고 살아남았지만 화석화되었고,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는 하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자기 자신의 사슬 안에 갇힌 채 타인을 바라보았을 뿐 그 타인을 실제로 만날 수는 없었다.


이와 달리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에게 타인은 낯선자가 아니다. 오딧세우스를 만났을 때에도 그녀들은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다가간다. 사이렌들은 오딧세우스를 받아들일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 경우에 관계의 중심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해있고, 오히려 그 타인에 대한 미메시스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오딧세우스와 같이 타인을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수단화하는 교환상대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돕고자 하며, 사랑하면서 유혹하고 싶은 배려와 함께 그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이해심과 감정적 끌림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이렌들의 타인에 대한 이해와 그 관계방식은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에서 아주 잘 찾아 볼 수 있다. 즉 오딧세우스는 사이렌들의 한숨어리고 눈물맺힌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자신의 합리적 틀에 따라 타인을 고정시키고 판단함으로써 그들이 노래부르고 있다고 오해하고 말았지만, 그러한 오해조차도 사이렌들은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마침내 그를 살려내고자 침묵한 것이다.


한편 호머의 텍스트에서도 사이렌들은 그가 겪은 과거의 일들에 대해서 이미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노래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줄 것에 대해 약속한다. 그러나 오딧세우스가 원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도구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즉 교환적이고 계산적인 지식의 입장에서 볼 때에 행복에 대한 사이렌들의 약속은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합리적 자아에게는 죽음과 같이 매우 두렵고 위험한 것이었다. 이와 달리 사이렌들이 오딧세우스와 함께 누리고자 하는 행복과 그들이 지닌 타인에 대한 이해는 육체적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욕망을 파트너인 오딧세우스와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는 각자의 육체적인 개별성과 욕망을 인정하되 그것을 상호적인 관계에서 즐기려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성립되며, 타인에 대해 적극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를 타인과 ‘관계적 자아의 미메시스’로 해석함에 있어서 ‘관계적 자아’(relational self)가 지닌 양면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여성들의 관계적 자아와 그 태도가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를 뒷받침하고 유지시켜왔으며, 그 가운데 여성들의 목소리의 결핍과 이에 따른 거짓된 자아의 형성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사이렌들의 상징성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관계적 자아는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여성들의 관계적 자아가 지니는 근본적인 의미와 그 가능성을 되집어 보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사이렌들의 자아를 ‘관계적 자아’로 해석할 때에 그 관계성은 독자성과 상호의존성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삶과 경험의 주체로서 몸을 느끼고 수용하며, 또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변화들을 다면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수용하면서 자기를 개방하는 자아이다. 이러한 관계적 자아의 독자성과 상호 대등적 가치가 새로이 조명되기 위해서는 오딧세우스가 원형적으로 보여준 바와 같은 동일적 자아의 일의적인 진리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비판이 필요하며 그리하여 사이렌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다중적 진리들에 대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떼지어 함께 비상하는 자아들의 은하수


기존의 신화나 그 해석에서 사이렌들은 단수로서의 한 남성, 즉 오딧세우스를 중심에 두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복수적 존재들이자 낯설고 위험한 방해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의 만남에서 사이렌들의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를 ‘비동일적 자아’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볼 경우, 우리는 여성들의 ‘비동일적 자아’가 지닌 ‘진리의 복수성’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로 그려진 사이렌들과 독립적 개인의 원형을 보여주는 오딧세우스의 대립구도에서 ‘동일적 자아’는 단수 남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복수 여성들의 주변화라는 성별 상징성에 근거해 있지만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는 단일한 범주로 묶어지는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진리의 복수성을 자각하고 있는 데리다는 서구의 형이상학이 지녀온 이분법적인 구분들, 즉 정신/육체, 저자/독자, 서양/ 동양 등에서 드러난 전자들의 후자에 대한 위계질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하나의 동일적 진리의 절대성과 중심․근원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데리다의 『다른 곶』은 유럽의 문화적 동일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일깨우고 오늘날의 ‘다른 곶’, 즉 타자의 곶들에 대해 상기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또 다른 곶과 특히 타자의 곶에 도달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곶의 다른 쪽(l'autre du cap), 다시 말해서 더 이상 곶의 형식․기호, 혹은 논리에 따르지 않는, 심지어 반대편 곶(anti-cap), 혹은 탈곶화(décapitation)의 형식․기호, 혹은 논리에도 따르지 않는 타자와의 어떤 동일성 관계에까지 도달”하는 해체적 작업을 하고자 한다.


또한 그는 『에쁘롱』에서 이러한 다른 곶의 타자들이 다름 아닌 ‘여성들’이라고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니체적 여성들을 ‘에쁘롱들’(éperons)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표현하면서, 가부장적인 문화를 탈중심화 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작업과 연관해 볼 때에 우리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적인 대립항에서 전자가 항상 우선권을 지니고 후자를 억압해 옴으로써 ‘유일한 곶’으로서 해석되어온 오딧세우스 중심의 진리를 ‘탈곶화’하고, 다른 곶들, 즉 타자들로서의 사이렌들의 진리에 도달함과 동시에 곶의 다른 쪽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데리다는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서 ‘나의 진리들’(meine Wahrheiten sind)이라는 표현을 여성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진리 그 자체는 없으며, 더욱이 나를 위해서조차 나의 진리는 복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니체 읽기로부터 우리는 타자로서 사이렌들의 복수적 진리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성적 차이의 진리, 남성이나 여성에 관한 진리 그 자체는 없다”고 단언함으로써 성차 그 자체를 뛰어넘어 버리고자 한다. 물론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비결정성’이 동일적 자아에 대한 비판으로서 동일적 자아의 전적인 해체를 겨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해체적 전략의 급진성은 ‘텍스트’에 국한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텍스트를 열린 텍스트로 만들고 해독불가능한 상태로 남겨두기 위해서 그가 도달한 진리의 심연에는 더 이상 ‘성차’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데리다의 입장을 따라 오딧세우스의 동일적 자아가 지닌 진리를 비판하고,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와 그녀들의 복수적 진리에 도달하고 나서 결국 그 성차까지도 해체해버렸을 경우에, 과연 실제의 삶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성차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부장적인 신화의 텍스트를 아무리 언어적으로 해체한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의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불평등의 성차는 그저 열린 텍스트로, 비결정성 속에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사이렌들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복수성을 ‘존재론적인 성차’에 입각하여 해석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라이도티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성차가 작동하는 세 가지 층위들, 즉 남성과 대문자 여성간의 차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들 그리고 각 여성 내부의 차이들을 나누어서 매우 생산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성차의 차원에서 보면 사이렌들의 비동일적 자아가 지니는 진리의 복수성은 단순히 단수인 오딧세우스라는 남성과 차이나는 복수 여성들의 진리를 의미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사이렌들 안에서도 여성은 하나로 환원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며, 각 여성개인의 자아에 관해서도, 즉 나 자신의 진리조차도 복수적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문자 여성으로 묶일 수 있는 자아들은 복수적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여성 개별자들 안에서도 자아는 하나의 동일적 진리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사이렌들은 단수로서의 여성이 아닌 떼를 지어 나는 복수여성들의 무리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해 볼 때에 비동일적 자아가 지닌 진리의 복수성이라는 상징성을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여성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동일성에 근거해 있는 보편 주체로서 그저 ‘남성이 아닌 존재’인 것이 아니라, 각자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작은 차이들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비로소 그 다층적인 구조를 인식함으로써 ‘여성주체가 되어’ 비상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성차화된 주체성의 인식은 역사적인 맥락에 기반을 둔, 정황적이고 성별화된 주체(the situated and gendered subject)로서의 나를 자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다양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좀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오딧세이』 신화에서 ‘사이렌들과 오딧세우스’의 만남의 장면에 국한하여 남성중심적인 자아의 원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로부터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흔적을 새로이 이끌어 내고 재해석해 보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시민적 개인의 원형인 ‘오딧세우스’에게서 ‘동일적 자아’의 발생을 역사철학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이 여전히 오딧세우스라는 남성중심적인 인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은 성별상징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카프카가 새로 쓴 신화적 텍스트인 「사이렌의 침묵」에서는 오딧세우스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기존의 신화에서 부재했던, 즉 침묵하고 있던 사이렌들에게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오딧세우스로부터 ‘비동일적’ 존재인 사이렌들에게로 새로운 시각의 전환을 매우 탁월한 방식으로 성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텍스트에서 사이렌들은 아직 의식을 지닌 ‘자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이렌들에게 드러난 여성들의 상징성을 자아와 연관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생겨났다. 따라서 본 논문의 마지막 장에서는 그 자아를 ‘비동일적 자아’로 규정하고,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해 보았다.


이처럼 지나온 역사와 기존의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을 통과함으로써 ‘자아를 위치지우는 작업’(situating the Self)은 단지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동일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전의 남성중심적인 자아에 대한 해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그 자신과 타자가 처해있는 ‘현실적’ 맥락과 상황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며 새로운 여성들의 ‘가능적’ 자아를 찾아 해석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사이렌들의 신화에 드러난 상징성에서 여성들의 자서전적인 기억을 되살려 그들 자신의 자아를 ‘비동일적 자아’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여성들의 새로운 자아의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비판함과 동시에 억압으로 인해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동일성에 대한 타자의 저항”으로서 여성들의 노래가 지니는 고유한 힘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각의 여성들 주체가 힘찬 아리아를 부르며 떼지어 함께 비상하는 사이렌들이 될 때에 쏟아질 듯한 그들의 은하수는 계속 새로운 별자리들을 만들어 낼 것이며 어두운 밤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