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와 사용의 관계
하 상 필(부산대)
[한글 요약]
본고는 낱말의 지시와 낱말의 의미의 관계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다루었다. 전반부에서는 '지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낱말의 지시가 그것의 사용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낱말의 문법을 설명해 주는 지시적 정의도 오직 낱말의 사용 방식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다음에는 낱말의 '지시'를 정신적 활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고 방식이 전통적 철학에 편만했다 그런 생각은 '그림'에 불과한 것임을 밝힌다. 그 그림이 실제로 뜻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낱말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그 낱말의 사용 방식이 보여준다'는 것뿐임이 드러날 것이다.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사용'에 초점을 맞추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사용'에 대한 빈번한 오해를 제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먼저 '사용'을 '의미 사용론'으로 보는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다음에 '사용'이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지를 보이고자 했다. 이 사용 개념의 영역은 지시 개념의 영역을 그 속에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용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타나게 된 그렐링의 비트겐슈타인 비판을 앞에서 설명한 방식에 따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사용 개념의 건전성과 유용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1. 머리말
이 주제와 관련된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체로 비트겐슈타인이 지시적 의미론을 폐기하고 사용으로서의 의미론을 제창하였다고 하는 주장과, 비트겐슈타인은 지시적 의미론을 폐기하면서 의미론 자체도 폐기하였고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만을 살펴보라고 충고했다고 하는 주장의 두 가지 흐름으로 크게 나뉜다. 양자의 차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고 물론 자신의 철학적 고찰이 거기에 부합하리라는 것을 함축하는 말일 것이다 하는, 전통적 철학관에 따라 쉽게 이해되기 힘든, 새로운 철학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아니면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철학관에 동의하고,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사용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낱말의 '사용'을 낱말의 '지시'에 대립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사용'을 부각시키는 반면 '지시'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 같다. 낱말의 사용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지시'라는 낱말의 사용을 잘 고찰해보면 그것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함축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제로 그런 고찰을 통해 '지시'에 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 주었다. 그가 '지시'와 관련된 문제들에 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는 {탐구}의 첫머리 부분에서 보여준 것들 예컨대 '지시'가 도대체 무엇인지, 즉 어디에 성립하는지,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온 '지시'가 왜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을 생산했는지, 그것들은 어떻게 풀릴 수 있는지, 그리고 '지시'와 '사용'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 은 양자의 대립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양자의 밀접한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여기 언급된 내용들이 바로 본고가 조명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본고는 먼저 낱말의 지시가 낱말의 사용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새로이 발견했음을 지적할 것이다. 이 지적은 '지시'와 '사용'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점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 뒤에는 낱말의 문법을 설명해 주는 지시적 정의도 오직 낱말의 사용 방식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내용이 뒤따를 것이다. 다음에는 정신적 활동으로 생각되는 낱말의 '지시'가 이런 사고 방식이 전통적 철학에 편만했다 '그림'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그 그림이 실제로 뜻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낱말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그 낱말의 사용 방식이 보여준다'는 것뿐임을 논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시'의 이런 측면들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 동안 별로 주목되지 못한 것 같다. 이상이 본고의 전반부를 구성할 것이다.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사용'에 초점을 맞추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사용'에 대한 빈번한 오해를 제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먼저 '사용'을 '의미 사용론'으로 보는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다음에 '사용'이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지를 보이고자 했다. 이 사용 개념의 영역은 지시 개념의 영역을 그 속에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논의를 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의 포괄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개념이 일부에 한정되는 개념인 듯이 그리고 '지시' 개념과 경쟁적일 수 있는 듯이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마지막 부분에 그런 오해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었다. 그것은 그렐링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용 개념을 비판한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빝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 기반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앞서 설명한 방식에 따라서만 그것에 대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므로 본고는 지시와 사용의 관계를 밝히고, 비트겐슈타인의 '사용' 개념이 전통적인 지시 개념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는 양자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자 했기 때문에 '사용'에 관한 본격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에 관한 설명은 그 자체로 비중 있는 독립된 논문을 요구할 것이다.
2. 지시의 가능 근거로서의 사용
1) 지시와 사용
빝이 "지시"에 대해 하는 말들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낱말들의 지시는 오직 그것들의 사용방식에서만 성립한다. 2의 언어 놀이를 더 확장한 하나의 언어놀이를 통해 이것을 설명해 보자.
언어 2의 어떤 한 확장을 관찰하자. "벽돌", "기둥" 등의 4가지 낱말 외에 그것은 1에서의 상인이 숫자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용되는 일련의 낱말들을 포함한다고 하자. (그것은 알파벳 문자들의 열(列일)수 있다. 그리고 또한 두 개의 낱말이 포함된다고 하자. 그것은 "여기에"와 "이것"이라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그 목적을 대략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낱말은 뭔가를 가리키는 손동작과 결합해서 사용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색 견본들이 포함된다. A는 "d-석판-저기에"라는 종류의 어떤 한 명령을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조수로 하여금 색 견본을 보도록 한다. 그리고 "저기에"라는 말을 할 때 그는 건축 현장의 어떤 한 장소를 가리킨다. B는 비축된 석판들로부터 "d"까지의 알파벳 문자 각각에 대해 견본 색깔의 석판을 하나씩 집어서, 그것들을 A가 가리키는 장소에 가져간다. 다른 경우들에는 A는 "이것-저기에"라는 명령을 한다. "이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어떤 하나의 석재를 가리킨다. 등등( 8).
우리는 이 언어의 낱말들에 대한 지시적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벽돌", "기둥", "석판", "들보" 등의 낱말들을 가르칠 때: 선생은 어떤 하나의 물건을 가리키면서 "벽돌"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물건을 가리키면서는 "기둥"이라고 말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따라 말하도록 한다. "석판"이나 "들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한다. 이때 선생은 하나의 정해진 물건에 대해서는 언제나 같은 낱말을 말한다.
2) "a", "b", "c", "d" 등의 낱말들을 가르칠 때: 선생은 어떤 물건을 가리키면서 "a"라고 말하고 다음 물건을 가리키면서는 "b"라고, 그 다음 물건을 가리키면서 "c"를, 그 다음 물건을 가리키면서는 "d"를 말한다. 이때 선생은 언제나 "a", "b", "c", "d" 의 순서에 따라 낱말들을 말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반복하게 한다. 1)의 낱말군의 경우에는, 물건들의 형태에 따라 말하는 낱말이 달라졌지만, 여기서는 같은 물건들이 여러 개 놓여 있을 때나 서로 다른 물건들이 놓여있을 때를 가리지 않고 낱말들이 순서대로 말해진다.
3) "여기에"와 "저기에"를 가르칠 때: 선생은 가까운 장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에"라고 말하고, 먼 장소를 손으로 가리킬 때는 "저기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르칠 때: 선생은 가까운 물건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라고 말하고, 멀리 있는 물건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것"이라고 말한다.
4) 비트겐슈타인은 위 인용문에서, 색견본을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설명의 필요상 몇 가지 색이름도 지시적으로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빨강", "노랑", "파랑" 등의 낱말들을 가르칠 때: 선생은 어떤 물건을 가리키면서 "빨강"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물건을 가리키면서는 "노랑"이라고, 또 다른 물건을 가리키면서는 "파랑"이라고 말하면서 학생들이 따라 말하게 한다. 여기서 이 모든 낱말들은 지시적으로, 예컨대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가르쳐진다.
그런데 이런 지시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도 충분히 생각될 수 있다. 그 오해는 낱말의 지시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가르쳐줄 것이다.
① 예컨대 어떤 학생은 "벽돌", "기둥", "들보"라고 말해야 할 곳에서, "벽돌", "기둥", "c" 등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물론 이 학생의 문제는 "벽돌", "기둥" 등과 같은 낱말군이 사용되는 방식과 "a", "b", "c", "d" 등의 낱말군이 사용되는 방식을 아직 터득하지, 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 학생이 헷갈린 이유는 예컨대 선생이 한번은 "들보"라고 말할 때 가리켰던 물건을 또 한번은 "c"라고 말하면서 가리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학생이 낱말군의 서로 다른 사용방식에 아직 숙달되지 않은 한, 이 낱말들로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낱말들의 지시는 낱말들의 사용방식의 터득 속에서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② 어떤 학생이 선생이 가리키는 순서에 따라 "a", "b", "c", "d" 등의 낱말을 말해야 하는데, 그것들을 순서대로 말하지 않고 벽돌에 대해서는 항상 "a"를, 기둥에 대해서는 항상 "b"를 말한다고 해보자. 그 학생은 아직 "a", "b", "c", "d" 등의 낱말군의 사용법을 익히지 못하고 그것을 "벽돌", "기둥" 등의 낱말군의 사용법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이 낱말들의 사용법을 아직 익히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이들이 이 낱말들로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③ "여기에", "저기에" 등의 낱말군이나, "이것", "저것" 등의 낱말군을 말해야 하는 놀이에서 "a", "b"를 말한다거나, "벽돌", "기둥"을 말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 학생이 "여기에", "저기에"의 낱말군 및 "이것", "저것"의 낱말군의 사용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이 낱말들의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으므로, 그 낱말들로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④"빨강", "노랑", "파랑" 등의 낱말군을 말해야 하는 놀이에서, 노랑 색을 띤 기둥에 대해"노랑"이라고 말하는 대신 "기둥"이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그 학생이 낱말군의 사용법을 혼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낱말들의 사용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그들은 이 낱말들을 가지고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학생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아직 말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거나 이 언어에 숙달하지 못했다고, 또는 이 언어를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그들이 아직 낱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곧 그들이 낱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낱말들의 가리킴이(지시가) 오직 그것들의 사용방식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사용 방식을 떠난 낱말의 지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2) 지시적 정의와 사용
그런데 혹 다음과 같은 이의가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오직 그 낱말이 어떤 상위 개념에 속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벽돌"이란 낱말은 예컨대 대상의 '이름' 개념에 속하지, 대상의 '색'이나 '수'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이의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지가 다음에서 암시될 수 있다.
2와 8에는 이름을 묻는 물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과 그 상관물인 지시적 설명은 하나의 고유한 언어놀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실은, 우리는 "이것은 이름이 뭐지요?" 하고 묻도록 교육, 훈련받았으며, 그러면 이에 대해 이름을 주는 일이 뒤이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 어떤 하나의 이름을 발명한다고 하는 언어놀이도 또한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것의 이름은 …이다"라고 말하고는 그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는 언어놀이( 27).
자, 과연 "석판"이란 낱말의 사용에 대한 기술은, 이 낱말은 이 대상을 가리킨다고 하는 말로 단축될 수 있다. 이는 예컨대, "석판"이라는 낱말이 우리가 사실은 "벽돌"이라고 부르는 석재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오해를 제거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그러나 이러한 '관련'의 방식, 즉 그 밖의 점에서의 그 낱말들의 사용은 알려져 있는 경우에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a", "b"등의 기호들은 수(數)들을 가리킨다고 말해질 수 있다; 만일 이것이 가령 "a", "b", "c"는 그 언어에서 "벽돌", "석판", "기둥"이 실제 행하고 있는 역할을 행한다는 오해를 고친다면. 그리고 또한 "c"는 저 수가 아니라 이 수를 가리킨다고도 말해질 수 있다; 만일 이에 의해서 가령 그 문자들은 a, b, c, d 등의 순서로 사용되어야지, a, b, d, c 등의 순서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설명된다면( 10).
지시적 정의에서 오해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문제되는 이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특정하여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이 수는 '둘'이라고 한다", "이 색은 '빨강'이라고 한다", "이 길이는 1 미터라고 한다"와 같이. 여기서 "수", "색", "길이"와 같은 낱말들은 사람들이 "둘", "빨강", "1 미터"와 같은 낱말들을 언어의 어떤 자리에, 문법의 어떤 자리에 놓는지를 보여준다( 28). 그런데 이렇게 등장한 "수", "색", "길이"와 같은 낱말들은 그냥 척척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우리는 미리 "이것은 이름이 뭐지요?"라고 한 가지 방식으로만 묻는 대신, "이 수는 뭐예요?", "이 색은 뭐예요?", "이 길이는 뭐예요?"와 같은 더 많은 물음을 묻는 것을 미리 가르쳐야 할 것이다. 즉 이 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가 미리 가르쳐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둘'의 지시적 정의를 위해서는 "수"라는 낱말이, '빨강'의 지시적 정의를 위해서는 "색"이라는 낱말이, '1 미터'의 지시적 정의를 위해서는 "길이"라는 낱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후자의 낱말들이 필요한가 여부는 이러한 낱말 없이는 학생이 그 정의를 선생이 원하는 것과 다르게 파악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수'라는 낱말 없어도 '둘'의 지시적 정의를 잘 이해하는 학생은 이미, 관련된 숫자들의 사용에 통달해 있다. 마찬가지로 '색'이라는 낱말 없어도 '빨강'의 지시적 정의를 잘 이해하는 학생은 이미 색이름의 사용에 통달해 있고, '길이'라는 낱말 없어도 '1 미터'의 지시적 정의를 잘 이해하는 학생 또한 이미 그 길이 단위의 사용에 통달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오직 그 낱말이 어떤 상위 개념에 속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이 뜻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낱말의 사용에 통달해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 말을 예컨대 '둘'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수'라는 낱말을 먼저 배워두어야 한다거나 또는 그 낱말을 먼저 배울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정신 속에 그 개념이 선재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색'의 개념이나 '길이' 개념이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특정한 색깔의 분별도 특정한 길이에 대한 인식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낱말이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이미 명료하다면, 지시적 정의는 낱말의 사용 의미 을 설명한다"( 30). 지시적 정의는 어떤 낱말이 언어에서 어떤 자리에, 즉 어떤 문법의 자리에 놓여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것이 곧 의미의 설명이다. 그리고 의미의 설명은 곧 사용의 설명이다. 그런데 그 일은 오직 낱말의 역할이 명료해질 때 또는 낱말의 사용방식을 터득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낱말의 사용방식을 터득하는 일 또는 어떤 하나의 언어놀이에 통달하는 것이야말로, 지시적 정의를 통해 낱말의 문법을 설명하고 그런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기초가 된다.
그런데 이 의미의 설명 또는 사용의 설명은, 당연한 말이지만 지시의 설명도 제공한다. 어떤 낱말이 무엇을 지시하는가는 오직 낱말의 사용 방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의 이 말은 다음을 함축한다. "낱말이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이미 명료하다면, 지시적 정의는 낱말의 지시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지시적 정의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낱말의 지시가 오직 낱말의 사용방식에 기초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그림으로서의 '지시'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시 즉 가리킴이란 가리키는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낱말의 가리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론 우리는 '낱말의 가리킴'을 가지고 낱말이 신비한 가리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낱말의 가리킴'이란 '낱말을 가지고 우리가 가리킴'을 달리 말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가리킴에는 가리키는 행동을 적시할 수가 없다. 어떤 사물을 가리키면서 "벽돌"이라고 할 때와, 같은 것을 가리키면서 "빨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명 같은 사물을 가리켰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낱말들로 우리가 다른 것을 가리켰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다름을 나타내는 것은 가리키는 행동의 차이가 아니다. 한번은 형태를 가리키고 한번은 색깔을 가리킬 때 분명 서로 다른 가리킴인데 그 서로 다른 가리킴은 어디에 성립하는 것일까?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하게 되는 하나의 이야기 방식을 언급한다.
… 우리는 (예컨대 색깔과 대조적으로) 형태를 가리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어떤 하나의 육체적 행동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에는 어떤 하나의 정신적 활동이 대응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하나의 육체를 추측하도록 만드는데 육체는 없는 곳, 거기에는 어떤 하나의 정신이 있다고 우리는 말하고 싶어한다( 36).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철학에서 그토록 지배적이었던 정신 작용으로서의 지시와 관계된 것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낱말의 지시 또는 우리가 낱말로 지시하는 것을 정신적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 하나의 그림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낱말의 지시를 그림이 아닌 실재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길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그것을 제시했다. 그의 답은 낱말의 지시를 정신의 활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한번은 어떤 물건의 형태가 아니라 색깔을 가리키고, 또 한번은 어떤 물건의 색깔이 아니라 그것의 형태를 가리킨다는 것이 어떤 육체적, 정신적 주의집중이 아니라 상황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가령 형태를 가리킴에 대한 "특징적 체험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가리킬 적에 손가락으로 또는 시선으로 윤곽을 뒤쫓는 것. 그러나 이런 것이 내가 '형태를 뜻하는' 모든 경우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다른 그 어떤 특징적인 과정이 그 모든 경우에 일어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비록 그런 것이 그 모든 경우에 되풀이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색깔이 아니라 형태를 가리켰다"고 우리가 말하게 될지 여부는 좌우간 상황에 즉 그 가리킴 전후에 일어나는 달릴 것이다"( 35). 그것은 다음과 같이 장기의 비유를 통해 보다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의 한 수라는 것이 단지 어떤 하나의 말이 판 위에서 이러이러하게 옮겨진다고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또한 그 수를 두었을 때의 그 사람에게 동반되는 사고와 느낌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장기 시합을 하다", "장기 문제를 풀다" 등등으로 우리가 부르는 상황들에 놓여 있는 것처럼"( 34).
사실 낱말의 가리킴 즉 지시가 상황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지 무슨 정신적 지시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미 낱말을 배우는 과정을 상기해 봄으로써 충분히 암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형태를 가리킨다", "형태를 뜻한다" 하는 따위의 말들은 "(저 책이 아니라) 이 책을 가리킨다", "책상이 아니라 의자를 가리킨다" 하는 따위의 이런 말들처럼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는 그저 우리가 "이 사물을 가리키다", "저 사물을 가리키다"란 말들과, 또 한편으로 "형태가 아니라 색깔을 가리키다", "색깔을 뜻하다" 등등과 같은 말들의 사용을 얼마나 다르게 배우는지를 생각해 보라"( 35).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낱말의 지시적 사용과 지시적 설명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낱말의 지시가 어떤 정신적 비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들에 크게 의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비록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거나 가리키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다양한 상황들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다. 이 상황들의 차이가 어떤 경우에는 형태를 가리키는 낱말을, 또 어떤 경우에는 색깔을 가리키는 낱말을, 또 다른 때는 크기, 강도, 어떤 특정한 상태, 위치, 시간, 등 어떤 낱말 종류가 사용되어야 할지를 알려준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낱말들이 등장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좁게 한정된 낱말만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들의 다양성에 낱말 사용의 다양성이 덧붙여진다. 낱말 사용의 다양성은 상황들의 다양성보다 훨씬 크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하나의 상황에서 어떤 낱말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매우 다양할 수 있고,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성이 일목요연하게 조망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지시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다. 온갖 상황에서 펼쳐지는 쉽게 조망될 수 없는 그야말로 다양한 낱말 사용 방식을 더듬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에 그 단서가 있다. 우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얻고자 한다. 그림은 거기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 복잡성과 다양성이 어렵지 않게 파악될 수 있다면 거기서 그림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복잡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일이 오리무중으로 파악하기 힘들 때는 거기에서 그림이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림이라는 것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 그림은 실재의 묘사보다도 더 강하게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지시라는 사고 방식도 바로 이런 것으로 보인다.
이제 '지시는 정신적 활동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림을 사용한 말이라는 것과 그것이 뜻할 수 있는 것은 '지시는 낱말 사용 방식에 있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난 것 같다. 사실 전자의 말하기 방식은 지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무슨 정신적 활동을 살펴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후자는 그런 암시와 모순되어 보인다. 이와 같이 그림은 종종 실재의 묘사와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림으로 보지 않을 때 우리가 풀기 힘든 모순에 빠져들곤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언어가 그림이라고 할 때 그가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는 비중 있는 그림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내보인다. 그리고 우리 안에 확고히 뿌리박힌 그림에 대해서도 그것이 존중받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하는 일이 없는 그림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다( 291).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요구될 것이다.
3. 사용으로서의 의미
1) 의미 사용론이 아님
많은 사람들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사용으로 정의하는 의미 사용론을 주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근거로 보통 거론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43). 그런데 이 구절이 독립적으로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전체 생각을 완전하게 대변해 주고 있으며, 그 생각은 곧 "의미는 사용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이 구절은 다음 단평 속에 들어 있다.
"의미"란 낱말을 이용하는 경우의 많은 부류에 대해서- 비록 그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 우리는 이 "의미"란 낱말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즉: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이 단평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의미란 낱말을 이용하는 경우의 많은 부류에 대해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란 낱말을 이용하는 무수한 경우들을 분류하여 다수의 부류들로 나눠볼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 많은 부류에 대해서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란 낱말의 정의가 아니다. 여기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미"를 정의하는 일을 중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별 쓸모 없는 일로 보았다는 것은, 그가 왜 의미에 관한 탐구를 중시하고 있는지 그 이유 또는 목적을 이해할 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가 의미를 탐구하는 목적과 탐구 방법은 보다 넓게는 철학적 탐구의 목적과 방법에 종속되는 것이므로, 먼저 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목적이 무슨 이론을 세우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 주로 언어의 논리를, 언어의 문법을, 즉 언어의 사용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보았다. 언어의 사용 방식에 대한 오해는 주로 다음의 방식들로 일어난다. 우선 어떤 언어의 다양한 사용(또는 이해) 방식 가운데 그 언어를 어떤 주어진 방식으로 사용해야 할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또한 어떤 언어의 문법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상이한 문법도 가지고 있는 다른 언어가 있을 때, 한 언어를 다른 언어와 문법이 다른 영역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이해)함으로써.
그런데 언어의 여러 사용 방식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는 것들은 사람들이 쉽게 떠날 수 없는 그림으로 자리잡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은 자기 자리를 넘어 다른 언어의 문법도 마땅히 그것을 따라야 하는 원형처럼 보이기도 하여, 사람들은 그 원형에 따라 일반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유혹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주 언급하는, 근거를 묻는 것이 무의미한 언어 사용 규칙의 문제에 대해 근거를 물음으로써 미궁에 빠지는 경우나, 문법의 문제를 사실의 문제로 보아 새로운 고찰 방식을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오해하는 경우 등도 모두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언어의 사용 방식을 오해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은,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방법을 통해 풀어낼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탈출구 없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따라 심오함의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철학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바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들은 "나는 길을 잘 모르겠다"는 형식을 갖는다( 123). 그러나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문법적 농담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111).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더 이상 언어 수단에 미혹되지 않는 명료한 이해와 봄을 제공하는 것을 진정으로 바람직한 철학의 목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얻고자 애쓰는 명료성은 물론 완전한 명료성이지만, 그러나 이는 단지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일 뿐"( 133)이다. 이것은 언어 사용을 오해하는 질병의 치유로서의 철학이라는 치유적 철학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33, 255).
그가 이 목적을 수행하는 길로 삼고 있는 것은 언어 놀이의 기술이다. 문제가 언어의 사용 또는 문법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사용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를 또는 문법이 어떠한가를 바로 기술하기만 하면 문제는 당연히 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 사용법은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 속에 펼쳐져 드러나 있다. 어떤 낱말의 용법이 어떠한가, 얼마나 다양한가, 그리고 서로 다른 낱말들 사이의 용법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그 낱말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봄으로써 공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물론 문제의 언어에 통달해 있는 자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탐험을 하거나 특정한 사실을 관찰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공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비밀스런 언어 사용법이라는 것은 여기서 문제되는 언어 사용법과 문법을 기술함에 있어서 아무 관심도 끌 이유가 없다( 126). 언어놀이의 기술을 위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라고는 오직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뿐이다( 127).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는다면, 언어 놀이 기술의 작업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고찰의 방법으로 말하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순해 보이는 이면에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언어 놀이를 기술함에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놀이들간의 일반성을 추구하거나 언어 놀이 현상들을 설명하려 하거나 근거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서로 다른 언어 놀이를 융화시키고자 하는 일은 언어 놀이의 왜곡일 뿐이다.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또한 그것의 기초를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24). 우리의 언어는 또는 언어 사용은 합리성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적 설명과 추론과 근거짓기는 그렇게 다만 존재할 뿐인 언어 놀이를 토대로 하여 가능한 부차적인 놀이들이다. 그러므로 언어 사용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그것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또는 근거지워져야 한다는 생각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철학은 그저 모든 것을 벌거벗겨 내놓을 뿐, 아무 것도 설명하고 추론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드러나 거기 놓여 있으므로, 설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도 하다"( 126).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놀이 기술의 작업은 언어의 혼란 속에 발생한 역설이나 모순 등을 푸는 데에도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런 꼬임을 풀고자 하는 많은 철학들은 보통 새로운 언어 규칙을 정립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 규칙의 새로운 정립은 왜 기존 언어 규칙에 입각해서 역설이나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들이 어떤 역설을 풀었다고 말한다해도, 그것이 기껏 의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제의 낱말을 가지고 역설이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낱말 사용 규칙 또는 역할을 확립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존의 역설에 대해서는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을 정의하는 일이 그것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별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본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역설을 야기하는 낱말들의 실제 사용에 있어서의 역할이지 역설을 일으키지 않게 고안된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태도는 낱말의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낱말들의) 역할이 우리가 철학적 역설들을 풀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정의는 그것을 위해 충분하지가 않다. 그리고 낱말은 '정의 불가능'하다는 규정은 더더구나 그러하다"( 182). 낱말들은 실제 사용상의 의미가 이러하다고 또는 저러하다고 정의될 수 있고, 그 정의가 정확할 수도 있다. 마치 계획 도시의 구획들은 그 구조를 조망하기가 쉽듯이, 비교적 최근에 과학적 작업에서 사용되기 위해 등장한 낱말들은 대체로 정확한 정의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사를 통해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쓰여온 낱말들은 마치 오래된 도시의 본래의 중심부와도 같이 정의를 통해 조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5 참고). 비트겐슈타인이 일반적으로 정의에 기대는 일이 충분하지 않다고 한 말은 "들어맞다(걸맞다)", "할 수 있다", "이해하다" 등의 낱말에 대한 단평들에 속해 있다. 이 말이 "의미"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많은 철학자들의 습관처럼 "의미"에 대한 정의를 주려 했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사용론"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바로 이에 대한 오해에 기초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새로운 의미론을 제공했으리라는 생각은 머리말에서 맨 처음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도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1에 있는 예를 고찰한다면, 아마 우리는 낱말의 의미라는 일반적 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언어의 기능을 안개로 둘러싸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명료하게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를 짐작할 것이다."
2) 사용으로서의 의미 개념의 광역성
비트겐슈타인은 1의 후반부에서 "다섯 개의 빨강 사과"란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기술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다섯"이란 낱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여기서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여기서 이야기된 것은 단지, "다섯"이란 낱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섯 개의 빨강 사과"에서 "사과"에 대해서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과 대답이 통용되고 있지만 "다섯"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통용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5에서 그는 이 사례와 관련하여 "낱말의 의미라는 일반적 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언어의 기능을 안개로 둘러싸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명료하게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이 실제로 통용되고 있지 않은 낱말에 대해서까지 그 낱말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일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방식은 낱말의 실제 사용 방식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모종의 요구에 불과할 것이다( 107 참고). 여기서 우리는 "다섯"이란 낱말이 사용되고는 있으되 그 '의미'는 부정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40∼ 42에서 우리는 그와 대조적으로 보이는, 낱말이 사용되는 한 그것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논증을 발견한다.
먼저 40에서 비트겐슈타인은 1에서 언급한 이른바 지시적 의미라는 개념 즉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그 의미라는 말에 대한 정면 비판을 하고 있다. 요지는 그 개념이 언어 사용 방식 즉 어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먼저, 낱말에 아무 것도 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이런 사고 과정의 주안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자. 만일 우리가 "의미"라는 낱말로써 그 낱말에 '대응하는'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 낱말은 어법에 어긋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어떤 하나의 이름의 의미를 그 이름의 담지자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개 씨가 죽는다면, 우리는 그 이름의 담지자가 죽는다고 말하지, 그 이름의 의미가 죽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의미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이름이 의미를 가지기를 중지한다면,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뜻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1의 전반부에서는 어떤 기호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 기호에 대한 약정된 사용 방식을 적용할 수 없는 어떤 돌발적인 경우에 그 기호는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8의 언어 놀이에 고유 명사(여기서는 "N"을 예로 듦)들이 도입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N"이란 이름을 지닌 도구가 사라져 버렸거나 부서져 있고 A는 그것을 모른 채 B에게 "N"을 말한다. B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거나 A에게 그 부서진 조각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여기서 "N"은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오직 이제 우리의 언어놀이 속에는 기호 "N"을 위한 사용이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N"은 또한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건간에 그 도구에 어떤 다른 명칭을 주고 기호 "N"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로 하고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에도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오직 이 언어놀이 속에 기호 "N"을 위한 사용이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41의 후반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기호를 지닌 어떤 도구가 실제로 있건 없건간에 그 기호가 사용되기만 하면 그 기호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음을 예증한다. 예컨대 어떤 도구가 사라져 보이지 않거나 부서졌을 때 A가 그 기호를 준다면 B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고개를 흔들기로 하는 하나의 약정을 생각해볼 수 있고, 이런 약정이 있다면 우리는 기호 "N"이 이 경우에도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낱말의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무관함이 입증된다. 42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가령 어떤 하나의 도구를 위해 결코 사용된 적이 없는 이름들도 역시 그 놀이에서 의미를 가지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그 기호도 마찬가지로 그 언어 놀이 속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B가 그 기호에 대해서도 역시 고개를 흔듦으로써 대답하는 경우. 기호 "N"이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언어놀이에서 사용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며, 그것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언어놀이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그것을 그 두 사람의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오락적 언어 사용에서 사용되는 기호도 그것이 사용되는 것인 한 그것이 의미를 상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락적 언어놀이에서 사용되던 기호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선가 그 기호를 더 이상 오락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락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언어가 사용되는 한 그것이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용되지 않는 경우 그것이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모든 낱말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지 않은가?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두에 인용한 저 유명한 43 속의 말, 즉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1에서 그는 실제로 사용되는 낱말 "다섯"에 대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대해 답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양자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비트겐슈타인이 우리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왜 그처럼 중시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의미"를 둘러싼 온갖 분분한 이론적 논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1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다섯 개의 빨강 사과"의 언어놀이를 기술한 후 거기에서 '"다섯"이란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전혀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는 '"다섯"이란 낱말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도출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양자는 서로 다른 말이다. 그가 말한 것은, 모든 낱말 각각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의미로 갖는다는 이른바 지시적 의미론의 사고 방식에 따를 때 우리는 무슨 낱말에 대해서나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해 아무 문제 없이 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낱말에 대해서나 그렇게 묻고 답할 수 있어야 인정될 수 있는 지시적 의미 개념은, 그가 보기에 2의 원초적 언어놀이를 우리 언어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지시적 의미의 틀에 맞지 않으며 그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의 언어 놀이를 기술해 보니 "다섯"이란 낱말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해 아무 어려움 없이 답할 수 있는 것은 지시적 설명이 가능한 낱말뿐이다. 지시적 설명 또는 지시적 정의가 가능한 낱말의 범위에 관해서는 지시적 설명 및 정의를 어떻게 뜻하느냐에 따라 다소간에 차이가 날 것이지만, 대체로 어떤 대상을 가리키면서 하나의 낱말을 말할 수 있는 범위로 그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때의 범위는 오직 대상을 가리키면서 말할 수 있는 이름들, 또는 명사들의 영역들에 제한되지 않고 그 경우에 쓸 수 있는 다른 형용사들이나 부사어 등도 이에 속할 수 있다. 이 낱말들의 영역은 매우 넓다고 인정될 수 있지만, 모든 낱말들이 이에 속할 수는 없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실제로 사용되는 모든 낱말에 대해 그것이 "의미 있다"고 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낱말에 대하여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와 "낱말의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는 일은 모두 "의미"에 관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 영역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의 적용 영역을 지시적 의미의 영역이라 하고 후자의 영역을 사용으로서의 의미의 영역이라 한다면, 후자가 당연히 전자를 포함한다. 그리고 낱말의 지시라는 것은 낱말의 사용에 의해서만 뜻 있게 됨은 물론이다.
3) 그렐링의 반박과 그에 대한 응답
그런데 그렐링은 다음과 같이 의미와 사용이 상관없다는 주장을 폈다.
어떤 뜻에서 그런 (낱말 사용의) 설명들은 의미의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어떤 낱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나를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만일 내가 그것이 효과적으로 또는 무례하게, 또는 사려깊게 사용되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의 의미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낱말이 무엇을 위해 쓰일 수 있는지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만일 내가 그것이 모욕하기 위해, 달래기 위해, 격려하기 위해 쓰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여전히 그것의 의미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비판은 의미와 사용간의 연관이, 비트겐슈타인의 언명들이 때때로 암시한 것처럼 아주 밀접한 것도 아니고 아주 명백한 것도 아님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 구절의 완전히 표준적인 뜻에서, 우리가 한 낱말의 사용을 알지 못하고도 그 낱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보여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도 그 사용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라틴 낱말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을, 그것을 문장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지 못하고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으로 우리는 'amen'과 'QED'란 표현을, 그것들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많은 낱말들이 의미 없이도 사용을 갖는다 - 사람의 이름들, 전치사들, 접속사들과 이와 유사한 것들이 중요한 경우들이다.
그렐링의 주장은 이른바 언어학의 "의미론"이나 전통적인 의미론의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반면 그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이 중시하고 새로이 열어보여준 세계에 대한 완전한 무시 또는 무지로 가득차 있다. 그의 논의 순서에 따라가면서 이런 비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 보도록 하자.
첫째, 여기서 그렐링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모든 비판의 전제로 완전히 표준적인 뜻에서의 "의미"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뜻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언어 과학 및 철학으로서의 의미론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설정된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에 관해 기존의 이론에서 사용하는 용법에 국한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사는 "의미"라는 낱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낱말의 사용 방식까지 상기해 내서 언어의 일반화에 맞서 투쟁하고자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위 인용문의 첫 단락의 문제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위 인용문의 첫 단락에서 그렐링은 낱말의 사용 방식을 알아도 그 의미를 아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낱말의 의미가 낱말 사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불변적으로 남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의미"를 그렇게 말하는 방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 방식은 없는가? 먼저 "배고파"라는 낱말을 가지고 이 낱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해서 보겠다.
1)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 배고프던 참에 "배고파" 했는데, 옆 사람이 마침 잘 됐다고 해 함께 식사하러 간 경우.
2) 무례하게: 아이가 집에서 엄마에게 짜증스레 "배고파" 한 경우.
3) 사려깊게: 자신의 삶의 문제를 말해보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에 대한 답으로 "배고파" 한 경우.
위의 경우들에서 만일 우리가 "그 말들의 의미는(또는 뜻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면 잘못일까: 1)에 대해서는, '밥먹으러 가자'는 의미라고, 2)에 대해서는 '빨리 밥 줘'의 의미라고, 3)에 대해서는, '끼니걱정을 해야 할 만큼 궁핍하다'는 의미라고? 명백히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일상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다.
낱말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의 문제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멋지군"이라는 낱말을 다음과 같이 사용한 경우를 살펴보자.
1) 모욕하기 위해 사용된 예: 최악의 시험 결과에 대해 선생이 비꼬는 어조로, "멋지군" 이라고 말한 경우.
2) 달래기 위해: 옷이 안 좋다는 말을 듣고 징징대는 어린 동생에게 언니가 그 옷 좋다며 "멋지군" 이라고 말한 경우.
3) 격려하기 위해: 선생이 학생의 시원찮은 피아노 연주를 듣고, 즐거이 연습할 수 있게 하려고, "멋지군" 이라고 말한 경우.
이 경우들에서도 우리는 각각의 "멋지군" 이라는 낱말의 의미에 대해, 1)은 모욕적 의미를, 2)는 달램의 의미를, 3)은 격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낱말은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라는 사용 방식의 설명이 곧 "이 낱말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의 설명도 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낱말의 의미는 낱말 사용의 다양성과 달리 불변적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낱말 사용이 달라짐에 따라 낱말의 의미도 달라진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도 고쳐 말할 수 있다. "멋지군"이라는 낱말은 위에서 말한 각각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이 사실은 "이 낱말은 이러이러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 곧 "이 낱말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는 이처럼 '…의미로의 사용'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적어도 그렐링이 추천한 경우들에 따르면, 낱말이 어떻게 또는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를 말하는 것은 낱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해준다.
이와 유사한 고찰이 {탐구}에도 있다. 그것도 시작부분에. 2에서, "벽돌"이란 낱말을 사용한 방식은 오늘날 우리 언어에서 "나에게 벽돌을 하나 가져 오라"라는 문장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방식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은 같은 뜻을(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0). 만일 건축 자재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벽돌"이란 말을 하였다면 이제 그 낱말은 우리 언어의 "저 벽돌을 치워라"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의미"란 낱말의 일률적이고 이상적인, 여기서 말한 바로는 '완전히 표준적인' 의미에 사로잡힌 그렐링은 이 단순명료한 고찰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둘째, 그렐링은 우리가 그 사용을 알지 못하고도 의미를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도 그 사용을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말에 전제되어 있는 "의미"는 "그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련된 것이지, "그 표현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 전자는 지시적 의미 개념과 관계된 물음이고, 후자는 사용으로서의 의미 개념에 관련된 물음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개념에 입각하지 않고 전자의 개념에 입각한 그렐링의 비판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되지 못한다.
예컨대 그는 '라틴 낱말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을, 그것을 문장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지 못하고도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은 그 라틴 낱말이 우리말의 '배고픈'과 같은 사용을 갖는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2의 원초적 언어놀이에 등장하는 "석판"이 우리 언어의 "나에게 석판을 하나 가져 오라"와 같은 뜻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가 그것들의 같은 사용에 놓여 있다( 20)고 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여기서 20의 이야기는 완결된 문장에 관한 것이고 그렐링이 제시한 문제는 문장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낱말에 관한 것이므로 양자는 서로 다른 문제라는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어 낱말을 어떻게 배우는지, 또는 외국어 낱말의 의미를 어떻게 배우는지, 즉 '라틴 낱말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배우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을 배우는 놀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용방식의 확립이다. 그러므로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은 오직 사용방식에 놓여 있다. 이것은 2의 2)에서 '낱말들의 지시는 오직 그것들의 사용방식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지시' 대신 지시적 '의미'를 가지고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해서, 우리말 '배고픈'의 사용 방식은 우리에게 그 낱말의 문법적 자리를 이해시킴으로써 그것의 지시적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다. 그 후 외국어 낱말을 배우는 놀이를 하게 될 때, 각각의 외국어 낱말들은 단순히 모국어의 어떤 문법적 자리에 놓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훈육을 통해 문법적 자리를 새로 마련할 수도 있다. 이때 '라틴 낱말 'jejenus'가 '배고픈'을 뜻한다는 것은 전자가 후자의 문법적 자리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는 의미(뜻)와 사용의 무관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amen'과 'QED'란 표현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도,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할 때도 그렐링은 "그 낱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관계된 의미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지, "그 낱말은 의미를 갖는가"와 관계된 의미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후자의 의미 개념 하에서는 'amen'과 'QED'란 표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있다는 것 자체로 그 표현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사실 이것은 "의미"란 낱말을 사용하는, 아무 문제 없는, 하나의 일상적 방식이다. 그렐링이 말하는 것도 "의미"란 낱말을 사용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의미"란 낱말을 오직 그렇게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 점에 있어서 그 낱말의 다양한 사용 방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렐링은 사람의 이름들, 전치사들, 접속사들과 이와 유사한 것들이 의미 없이도 사용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미"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련된, 지시로서의 의미 개념에 입각해 있다. 비트겐슈타인을 비판하려면 "그 표현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관련된, 사용으로서의 의미 개념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물론 41-42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따랐던 우리의 일상적 말하기 방식을 따라, 사람의 이름들, 전치사들, 접속사들이 언어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그 낱말들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사용' 개념에 대한 그렐링의 비판은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사용' 개념이 일상적으로 쓰일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충분히 상기해내지 못하고, 그 개념을 전통적인 의미론의 과학과 철학적 전통에서 주되게 사용하는 방식의 울타리 내에서만 끄집어낸 데서 기인한 잘못된 비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이란 낱말을 사용한 방식은 아무 문제도 없다. 이 사실은 그의 '사용'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낱말들이 사용되는 모든 영역에 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이 '사용' 개념 속에 전통적 의미론을 구성하는 저 핵심적인 '지시' 개념도 속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4. 맺는 말
본고의 제목인 '지시와 사용의 관계'에 관한 설명은 사실, 전통적으로 낱말의 의미를 말해준다고 주되게 믿어져왔던 지시가 낱말의 사용 방식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 데서 그 핵심이 모두 드러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을 보여준 것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사상을 한 가지 설명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 철학의 중요 주제 하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공했다는 데서도 의미있는 일로 생각된다. 그 논증이 옳다면, 사용 개념이 지시 개념을 포함하는 광역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나 그에 도전한 비판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한편 필자는 의미 문제에 대한 '지시' 진영과 '사용' 진영의 싸움보다,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어 왔고 또 실재 모습을 반영하리라고 여겨져 온 '지시' 개념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매우 당황스럽게도, '그림'이라고 판정한 것에 주의를 끌고자 했다. 그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지시'라는 개념은 그림이 아닌 언어로 번역될 수 있었는데, 그 번역어는 역시 '사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기서 '지시'와 '사용'의 관계는 '그림'과 '실재' 물론 이 '실재'라는 개념은 언어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로 다시 나타났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들을 문법적 문제들이라고 본 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문법적 문제들이라 함은 곧 말하는 방식의 문제라고도 이야기될 수 있다. 말하기 방식의 문제는 질병의 다양성과 같이 그야말로 다양한 문제들로 분지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양한 문제들에 거의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어떤 말하기 방식이 마치 다른 관련된 것들의 원형인 듯이 보이는 현상이다. 물론 그 현상은 우리의 이해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의 경향이긴 하다. 우리는 말하자면 '그림'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그것과 관련된 것들에 관해 생각하고 말한다. 그와 관련된 생각과 말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 그림을 그림으로 인식하기 힘들어진다. 그 그림은 실재의 묘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어떤 말하기 방식이 그림에 입각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분별해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바로 철학적 문제들 밑에 깔려 있는 그림을 식별해 내고 그 그림이 어떤 것인가를 밝혀주는 작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사고는 이런 작업에 대해,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한 실재의 모습을 그림을 걷어낸 보여주기 위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경향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우리 언어에서 그림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으며, 그런 일이 항상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그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은 숙고해볼 가치가 매우 큰 내용들이지만 그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연구는 본고의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
[출처] 지시와 사용의 관계-하상필|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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