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은유와 해석 (이승종)

나뭇잎숨결 2012. 11. 16. 11:13

은유와 해석



뉴턴 가버(Newton Garver)/ 이 승종



그들은 어떤 사람의 사지를 각각 말들에 묶었다.

놀란 말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가자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그의 몸이 갈갈이 찢겨졌다.

그들은 은유에 의존하지 않았다.


-V.B, 쿨리(Cooley) -


1. 은유의 문제


은유는 하나의 사물에 그것과는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은유에 정통하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성의 징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은유는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에 대한 직관적 지각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은유는 언어현상이며,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방금 논의한 불가사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은유가 일반적으로 언어 규칙에 통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의 문제, 규칙이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며 은유야말로 다른 언어 현상을 포용하는 원초적 언어 현상인지의 문제. 혹은 은유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정말로 진정한 언어 규칙을 초월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언어 및 그 쓰임에 속하는 근원적 구분의 설정이나 인식을 요하는 현상을 구성하는지의 문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모두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들의 논의는 특히 구조주의에 관한 서로 간의 차이와 유사성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

언어는 오랜 시간을 거쳐 존재하고 인간 공동체에 의해 공유된다는 점에서 구조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다라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처럼 언어를 철학의 기초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구조주의”적이게 된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하나의 강령으로서 정확히 정의된 적이 없으며 철학에서 보다는 문학비평이나 사회과학에서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특히 데리다는 처음에 구조주의가 지배하던 지적 분위기 속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령 피터 커스나 아이리스 머독 등에 의해 종종 구조주의자로 간주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모두 구조주의를 표방하기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빈번히 구조적 언어 현상을 주목한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장단점에 관한 논의는 은유, 철학, 문학 이론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에 관한 논의의 단초를 마련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커스는 최근의 저서에서 (협의의)구조주의를 옹호하는 강력한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구조주의를 “인문, 사회과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실체적이기 보다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적 견해”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 종류의 실재에만 적용될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지적 세계가 물질적 세계를 본뜸으로써 만들어질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에서 출현하였다. 물질적 세계는 서로 관계 맺는 사물들로 구성된다. 지적 세계는 사물을 설명할 수 있는 관계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 정의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유용한 것처럼 보일뿐더러 추천할 만한 점이 많은 정의이다. 물론 커스가 의존하고 있는 이원론이 부란이기는 하지만 이는 곡 구조주의 자체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다. 구조주의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실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커스의 정의는 ‘지성의 기술’의 출현을 보다 역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로서 적절하게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구조주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어떻게 거짓 명제가 가능한지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음소의 기술 방식에 관한 소쉬르의 주목할 만한 발견의 일반화로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설명은 이 도전에 대한 언급을 요하며, 두 번째 설명은 구조주의와 결정론의 비교를 포함한다. 이러한 설명은 대체로 평가적 비판 없이 전개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은유의 도전 밑 구조주의가 원칙적으로 이 도전을 극복할 수 없는 이유- 비록 이 실패가 결코 구조적 현상을 배격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를 설명할 것이다.


2, 거짓명제의 도전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모두가 알고 또 이용하고 있듯이, 건전한 의미에서의 실재론이 곧 진퇴양난에 빠지는 경우는 철학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실재론은 단 한 종류의 실재, 즉 우리의 언어와 연관되는 일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언어가 지칭하는 이러한 하나의 실재는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결정해야 하며, 그것의 사실은 또한 참,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만일 언어가, 그것을 참이게 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것을 의미 있게 하는 세계와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서양 철학의 많은 문제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듯이 처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딜레마에 주목하게 한 장본인은 플라톤이다. 그는 이를 자신의 대화록 ‘크라틸러스’편에서 흥미롭고도 놀라울 정도로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자세히 논하고 있다.

거짓된 표현이 있을 구 없음을 명백히 주장한 철학자는 거의 없다. 한 예외가 크라틸러스인데, 플라톤에 따르면, 그는 어떠한 거짓된 이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크라틸러스는 이름이 표현하는 것이 그에 대응하는 대상이라는 그럴듯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이 전제로부터,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기호는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고 -따라서 결코 이름이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크라틸러스는 또한 이 복합적 표현만이 복합적 이름임을 , 즉 그것만이 이름이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가지는 표현임을 주장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의 말을 이러한 방식으로 일반화해서 이해한다면, 그의 견해는 한 표현은 그것이 의미를 가질 경우 참이어야 하며, 어떠한 거짓된 표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표현’을 소리나 표식의 의미 있는 결합으로 받아들인다.)

크라틸러스의 견해가 결코 많은 추종자를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게는 때때로 문장이 복합적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거짓인 명제에 관한 논의를 예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플라톤이 크라틸러스에 대해 제기한 것과 같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가 아주 정당하게 거짓 명제의 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언어 이론이 셋 더 있다. 라이프니쯔의 이상 언어이론(그의 characteristica universalis), 인과적 혹은 경험주의적 의미론, 진리정합설이 그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과학이 완성된 이후에 새로운 언어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기호의 가능한 결합이 사물의 과학적 가능한 결합에 대응하는 그런 언어였다. 최초의 기호들이 가능한 사물 및 실제적 사물을 지칭하며, 규칙이 결정론적이라고 가장할 경우, 구성될 수 있을 진술이나 공식은 참이어야 할 것이다. 그 난점보다는 이점을 보다 분명히 파악한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불일치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는 전망에 반가워했다. 왜냐하면 계산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의미 있는 논쟁도 쉽사리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적 의미론 역시 거짓의 문제에 걸린다. 기호의 의미가 의미를 야기하는 어떤 것, 혹은 의미가 야기하는 어떤 것이라면, 의미 있는 기호가 실제세계에서 대응물을 결여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이론에 따를 경우 하나의 기호가 의미 있는 동시에 거짓일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은 야기되는 동시에 야기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경험적 의미론은 이 둘째 부류 안에, 혹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이는 의미를 대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인상으로부터 경험적으로 유도된 것으로 본다.

셋째로, 문장과 사실 사이의 대응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회피하는 진리 정합설이 있다. 그러한 이론은 진리를 문장들 자체 내의 일관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거짓 명제를 일관성이 없거나 모순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생각은 라이프니츠 이론의 일부지만 그 외에도 19세기 말에 이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모순된 명제가 이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긴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거짓 명제와 무의미한 명제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와 진리의 구분이 붕괴될 위협에 직면한다.

버트란트 러셀은 거짓 명제의 도전을 그의 대명사인 명쾌한 표현으로 다시금 제기하고 있다. 분명 그의 도전은 크라틸러스나 라이프니츠보다는 주로 경험주의자 및 (브래들리와 같은) 영국 헤겔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 결국 전통적인 관념론적 형이상학은, 그것이 플라톤 류의 고대 판이건 마이농 류의 현대판이건, 의미의 정초에 이바지할 수 있은 무한한 이상적(비사실적, 비실재적) 존재의 영역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러셀은 이 도전이외에도 여러 비판을 가할 것이다. 특히 러셀의 경우 그 도전은 자신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예컨대 브래들리), 자연주의자, 경험주의자(즉 자신과 유사한 노선을 걷는 사람, 흄과 밀의 추종자)를 겨냥한 것이다. 이들의 이론이야말로 그가 반박하거나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와 경험주의의 경우, 의미가 경험적 현상이고, 표현과 실재 간의 상관관계에 의해, 혹은 표현의 의미를 구성하는 경험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매우 그럴듯한 생각은 러셀이 경고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도전의 매력은 그것이 도전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진가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명쾌한 제기에 있다. 거짓 명제의 도전은 의미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 사이의 일종의 첨예한 구분을 지적해 내고 있지만 이 기준의 분질이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제안된 해결책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구조주의자의 제안 및 그것의 엄청난 매력을 검초하기 전에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인 자신의 <논리철학논고>에서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세계가 대상이 아니라 사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명제의 참, 거짓을 결정한다. 다른 한편, 그가 세계의 부분이 아니라 세계의 “실체”라고 주장하는 대상은 기호의 의미를 결정한다. 그래서 만일 정식화된 문장이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 유일한 까닭은 그것을 구성하는 기호 중 어느 하나의 의미 즉 그에 상관되는 대상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문제는 따라서 경험적 문제이다. 반면 힌티카가 올바로 논의하고 있듯이 의미의 문제는 선험적 문제이다.

단지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을 요약해 보기만 해도 우리는 러셀의 도전이 얼마나 도전적인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이원론은 거짓 명제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애초의 질문만큼이나 당혹스러운 문제를 형이상학을 끌어들여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철학자들의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이 단순하고 우아한 이원론을 추종하거나 수용하지는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든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하려 하겠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적 견해는 자연주의이다. 즉 의미는 자연세계, 단 하나의 세계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의 기준과 참의 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새로운 자연주의의 고전이다. 오늘날 그 강력한 옹호자는 콰인, 데이빗슨과 같은 미국 철학자들이다.1)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의미와 진리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의미의 결정력, 그리고 진리의 결정력, 이렇게 최소한 두 종류의 내용을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각각“규칙”과 “사실”로 부르는데 이 모두 문제가 없지 않다. ‘사실’이라는 용어의 문제는, 비록 모든 사람이 명제를 참이게 하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그 인정된 원이를 악순환으로부터 지켜 줄, ‘사실’에 관한 만족스러운 정의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접어두기로 하자.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규칙’이라는 용어에도 문제가 여러 층 산재해 있다. 은유의 도전을 이해하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첫 번째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표준적인 해결책은 구조주의의 해결로서, 이것은 음소에 관한 소쉬르의 독창적이고도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 기술(記述)방식을 일반화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해결책은 은유의 도전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를 포함해 보다 심층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환경을 설정한다.

규칙에 관한 첫 번째 문제는 해석 기하학의 정리에 의해 분명히 예시될 수 있다. 해석 기하학은 도형(모양)을 공식(규칙)으로 연계시킨다. 예컨대 정사각형의 공식이 존재하며, 그 일부는 직각에 관한 공식일 것이다. 등등. 정리는 어떠한 도형에 관해서든 규칙이나 공식이 존재하며, 더 나아가 주어진 하나의 도형에 대해 무수히 많은 공식이 존재함을 진술한다. 이러한 공식 중 어떤 것은 극도로 복잡하다. 그러나 복잡하가 해서 그것이 진정한 규칙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각의 도형에 대해 하나의 공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각각의 음운론적 계열에 대해 하나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어떠한 소리군도 독특하게 규칙에 지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사고를 또 다른 문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의 역설”이라 명명한 이 구절은 이제 고전으로 꼽힌다.


우리의 역설은 이것이었다. 모든 행위 방식이 하나의 규칙과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규칙은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정할 수 없다.


어떤 소리군은 의미가 있고 어떤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차이를 설명해 주는 규칙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규칙은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추상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어디에나 있는 것이기에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할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의 해결은 - 우리가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제의 규칙들이 실제로 준수되고 존중된다는 사실에서 주로 찾아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관습과 제도에 고유한 것이고, 관습과 제도가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실행되는 사실이라는 이 혼성 범주와 연관해 분명 어떤 미묘한 문제가 제기된다. 순환의 문제, 기원의 문제, 우선성과 제일성의 문제, 새로움과 창조성의 문제, 배움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시기에 논의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출발점이 될 단순한 사실 자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규칙을 따른다는 사실, 이 사실을 파악하는 것으로 가장 잘 기술되는 관습과 실행이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이에 관한 경험적 인지 등이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자연주의적, 내지는 과학적 설명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행위패턴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사람의 의도나 습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인과적 설명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행위패턴이 규칙적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규칙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든 없든) 관습,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의 예이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을 기술하는데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 수단은 언어에 대한 탐구와의 연관 하에 발견되었다.

우리는 지금 실행이 규칙에 의해 기술되거나 규칙이 관습에서 구현됨을 좀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준이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러한 표현을 확신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애초에 많은 저항을 극복해야 했으며, 낱말의 일상적 의미처럼 보이던 것을 폐기시키고 새로운 지적 교두보를 마련해야 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의미에서 기술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반면에 규칙은 준수되거나 위반된다. 따라서 규칙이 기술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의미론적 범주를 위반하는 몽상으로 들린다. 이는 ‘문법의 규칙’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느끼는 친숙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표현에서 자주 접하는 학교 수업의 문맥에서 규칙은 일반적으로 기술적으로보다 규정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음소와 음소론


규칙에 관한 철학과 논리학의 논의가 겉보기에 역설적인 이러한 표현을 우리가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 한 몫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분야의 선두 주자는 언어학이었다. 금세기 초, 언어 현상 기술에 탁월한 새 방법의 기틀을 마련한 소쉬르의 작업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이루어졌다. 그 이후로 많은 언어학자들이 그의 언어학을 상세히 정성 들여 다듬고 확증하는 방대한 작업에 참여하였다. 지금까지의 발전사를 이해하는데 에드워드 사피어와 케넷 파이크의 저작이 아주 유익한 길잡이이다. 당분간 우리는 이에 토대하여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언어학의 역사에서 중심에 자리하는 사실은 음소의 발견이었다. 음소는 소리의 단위이므로 언어학자들은 분명 언어를 주로 쓰려진 것보다는 말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언어학의 중심ㄴ 문제는 언어가 말해질 때 나오는 소리를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가령 입과 혀, 그리고 성대가 어떻게 해서 다양한 소리를 내게끔 기능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있다.― 그것은 언어와 국적을 떠나 거의 동일함이 판명되었다. 또는 소리의 물리학적 차원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 분야는 (소리를 3차원에서의 시각적 이미지나 스펙트럼, 혹은 “구성소음”으로 분해하는) 음성 스펙트럼 분석기와 같은 도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연구의 양상이 보다 복잡해진 반면 그 결과는 얻기 쉽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결과 역시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항상적인 것이었다. 말소리 패턴에 대한 이러한 두 연구, 즉 조음 음성학과 음향학적 음성학은 말소리를 어느 언어에서나 동일한 단음이라 알려진 단위에 의해 기술한다. 이러한 방법은 여러 종류의 비교 연구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음성학이라는 과학은 각각의 언어가 제한된 수의 고유한 의미 있는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잘 어울릴 수 없다. 이러한 소리가 음소이다. 음소는 문화의 차이와 상관이 있다. 언어마다 음소의 집합은 다르다. 음소와 단음의 관계는 엄청나게 복잡하며 단일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 음소는 분명 단음의 집합이라 할 수 없다. 동일한 음소가 언제나 동일한 다음인 것도 아니고 동일한 단음군이 언제나 동일한 음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언어를 말할 때 나오는 소리를 분석하는 세 번째 방식이 있게 되는데 이는 즉 음소에 의한 분석방법이다. 문제는 음소를 어떻게 확정하는가이다. 소쉬르는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음성학에 대해 음운론이라는 대안적 형태의 음소론을 창조하였다.

음소는 특정 언어에서 의미 있는 소리이다. 그것은 언어 내에서 그리고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에 대해 실재성을 가지지만, 물리학이나 음성학에서는 정의될 수 없다. 한 언어 내에서 음소의 실재성은 주로 그것이 그 언어의 다른 음소와 대조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영어에서 음소/p/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화자 개인간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pine', 'spine,' 'ropper,' 'ripe'에서 /p/의 발음에도 규칙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p/가 나오는 곳에서 그것은 언제나 /t/와 /k/뿐 아니라 /b/와 /m/과도 대조된다. 즉 만일 이러한 음소중의 어느 하나가 이 낱말들, 혹은 다른 낱말들에서 /p/를 대체한다면,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모두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낱말을 듣게 될 것이다. - 특별한 제한이 적용되는 경우(가령 영어에서 /sb/나 /zb/ 의 조합이 어두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를 제외하고는. 영어에서 /p/의 다양한 음성학적 표현들에서와 같은 대조가 부재할 경우에는 동일성이 존재하게 된다. 즉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별되지 않지만 음성학적으로는 구별되는 소리는 동일한 음소의 이음(異音, allophones)이라 부른다.

대조와 대조 아닌 것의 패턴의 세부적인 사항은 종종 형식화가 어려우며, 때로 (영어의 모음에서와 같이)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처리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언어는 20개에서 50개 사이의 음소를 가진다.2) 그래서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인간의 음성은 각각의 언어에 의해- 언어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서- 극소수의 뚜렷한 개별적 소리에로 환원된다. 음소는 인간 언어의 “논리적 원자”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 음성의 엄청난 혼란을 소수의 원소의 패턴에로 환원시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작업이어서 아브라함 몰은 다소 장난기 어린 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조주의는 원자론의 개념을 사회과학에 적용시킨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이것이 구조주의의 강점이기도 하다.



음소는 주로 서로간의 대조에 의해 “확정”된다. 음소 분석의 이 중요한 특징에서 우리는 곧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방법론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차이성이 동일성보다 더 근원적이다. 음소론의 근본적 현상은 대조의 현상이다. 소쉬르는 다음의 유명한 구절에서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언어 그 자체에는 오직 차이성만이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차이성이 그것을 매개로 하는 규정항을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에는 단지 차이성만 있고 아무런 규정항도 없다는 사실이다. 기의이건 기표이건 상관없이 언어는 언어 체계에 선행하는 관념이나 소리를 포함하지 않으며 다만 그 체계로부터 비롯되는 개념적, 음성적 차이성만을 포함한다. 하나의 소리가 갖는 개념이나 음성적 실체보다는 그 소리의 주위의 있는 다른 기호들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이후의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는 대조적으로 음송의 다양한 출현에 있어서 동일성은 근본적이기 보다는 일탈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대조가 발견되지 않을 때 남는 잔여에 해당한다.

둘째, 음소는 소쉬르의 말처럼- “긍정적 실재성이 아니라 부정적 실재성을 갖는다.”- 경험적 실재성이 아니라 변증법적 실재성을 갖는다. 이는 물론 여기에서의 설명보다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난 다소 불가사의한 주장이지만, 그 핵심은 그것이 궁극에 가서 설명되어야 한다 해도 물리학을 통해 알려지는 실재와는 다른 제2의 실재의 영역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어떠한 음소도 그것이 속해 있은 체계와 동떨어져 개별적으로 기술되거나 확정될 수 없다. 음소가 비록 한 언어 안에서 의미 있는 개별적인 소리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 언어의 소리의 모든 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음소 분석이 가정하고 있는 원자론은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구성요소는 전체론을 전제하고 있고 또 체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소 분석의 방법은 원자론이 아니라 전체론에 토대해 있다. 여기에 다시 한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매우 중요한 유사성이 놓여있다. 더 나아가 실제로 체계는 완전한 혹은 폐쇄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그것이 완전히 알려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추가된 어떠한 음소도 동일한 체계에 동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음소의 추가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대조의 패턴이 변하고, 이는 다시 필연적으로 기존의 음소 값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연관해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에서 강력한 구조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그는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제는 논리적 공간 속의 한 장소만을 결정하겠지만, 그럼에도 논리적 공간 전체가 이미 그 명제에 의하여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는 ‘탐구’에서도 아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한다.


한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작품에서의 다른 구절, 즉 “본질은 문법에 의해 표현된다.”는 쉽게 구조주의의 표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소쉬르를 읽었다는 증거는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언어의 다른 측면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언어학적 요소가 오로지 그것을 포섭하는 포괄적 체계에 관한 참조에 의해서 의미를 얻는다는 원리에 대한 동의의 발견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비교 연구가 좀더 많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점에서 로이 해리스의 최근 저작은 매우 반가운 것이다. 우리가 음소와 의미의 밀접한 유사성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비교의 중요성은 분명해진다.

음소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한 언어에 있어서 의미 있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소쉬르의 방법을 낱말에로, -가령 버나드 해리슨의 작업-그리고 마찬가지로 의미에로 확장하는 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한 낱말이 동일한 문맥에 나올 수 있는 다른 낱말과의 대조에 의해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이다. 이는(세계와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의한) 실증적, 경험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조의 닫혀진 체계 내에서의 다른 낱말과의 대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색’이라는 낱말은 -가령 물리적 대상을 기술하는 문맥에서- 그것이 ‘형태’, ‘크기’, ‘무게’, ‘재질’ 등과 대조되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벌린(Berlin)과 케이(Kay)의 고전적인 연구에 의해 문화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임이 알려진 색의 낱말들 자체는 의미체계의 특히 두드러진 예가 된다. 왜냐하면 원색의 낱말들은 서로간의 대조에 의해 정의되며, 어떤 새로운 색의 낱말들은 원색의 낱말들에 의해 구성된 체계 내에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색의 낱말일 수 없다. 색에 관한 우리 어휘의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의미에 있어 경험적 측면보다 구조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선천성 맹인의 예에서 확증된다는 점이다. 비록 색을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맹인은 실수 없이 책의 낱말의 용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말과 글을 보면 그는 그 낱말의 의미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경험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그는 결코 색의 낱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사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 대조 체계를 배운 것이다.


4. 구조주의


최소한의 일반적 의미에서 구조주의를 음소 분석의 실제를 형성하는 구체적 조건을 추상함과 아울러 음소 분석을 모든 언어 현상, 혹은 사회 현상에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조- 음소의 체계와 유사한 닫혀진 대조체계- 가 행위나 발언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이다.3) 따라서 행위나 발언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실증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특정한 표현의 선택에 의해 배제되는 모든 대안적 가능성에 의존하는 어떤 것이다. 물리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행위나 발언은 다른 체계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제된 가능성의 다른 집합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 가령 ‘gift'가 영어와 독일어에서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듯 말이다. 이 표현의 전체 구조에 친숙할 경우에만, 그로부터 어떤 대안적 가능성이 배제되는지를 알 경우에만,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 표현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의 세세한 역사가 아니라 추상적 대조 체계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 개념은 음소 분석의 방법을 일반화할 뿐 아니라 경험적 조건으로부터 추상하기도 한다. 언어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다. 만일 우리가 암주 임의적 규칙을 가지고 새로운 부호를 만든다면, 구조주의의 원리에 의하면 부호가 전달되는 정보는 그 부호가 역사를 갖는지, 또는 실제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부호 내에서 의미를 가질(혹은 갖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추상을 통해 구조주의는 음소 분석의 실제적 측면보다 이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구조주의가, 파이크가 구조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 음소를 “말해진 언어를 옮겨 쓰는 기술”로 묘사한데 포함된 실제적 측면에로의 정위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짓 명제의 도전에 대해 구조주의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구조(“부정적 실재성”)와 경험적 사실(“긍정적 실재성”)을 예리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구조에 의해, 참은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커스가 제시한 정의에 전제된 이원론의 영향력을 확인한다. 그래서 문장이 어떻게 의미 있으면서도 거짓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마 우리는 구조주의와 결정론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함으로써 구조주의에 대한 어떤 전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교의 단초는 소쉬르의 작업과 뉴턴의 작업 사이의 일정한 유사성이다. 소쉬르의 작업이 뉴턴의 작업과 동등하게 과학적이라거나, 가치가 있다거나, 중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접어 두기로 하자. 그 둘 모두가 그 당시에 명쾌한 재현의 방법이 없었던 자료에 직면했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유사성이다. 그 그들은 각각 현상을 효과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새 방법은 추종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손질되고 확장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의 작업하던 분야 밖에로 일반화되어- 이를테면 철학적으로 일반화되어- 각각 결정론과 구조주의로 정립되었다.

뉴턴이 고안한 방법의 핵심은 미분 방정식이었는데, 그것은 뉴턴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아마도 그것을 뉴턴과 독립적으로 고안한 것으로 추정되는 라이프니츠를 제외하고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미적분학”이라고 알려진 수학의 분야를 개척해야 했다. 그는 엄청나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의 모든 기계적 현상이 미분 방정식에 의해 기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도 그 방법은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기체의 동역학 이론은 입력과 온도 현상을 뉴턴 역학의 영역에로 환원시켰다.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통계역학이 등장하기 전인 지난 세기말 까지 마치 뉴턴의 방법을 자연 현상의 기술(記述)에 적용하는데 아무런 제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론이 스토아 철학(예를 들어 루크레티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고대의 이설임에도 불구하고, 과거300년 동안이나 지배적이었던 것은 뉴턴 역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계 미분 방정식에 의해 기술될 수 있는 현상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결정론적 현상이다. 우리가 탄도 미사일의 진로를 알고, 인공위성을 귀도에 진입시키고, 일식과 월식을 예언하고, 행성들이 866년 5월 5일에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은 까닭은 그 현상들을 재현하는데 뉴턴의 방법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론은 뉴턴의 기술(記述)이 모든 자연 현상, 혹은 물리 현상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이념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뉴턴의 기술이 전혀 적용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항상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뉴턴의 기술이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우연이나 자유가 결여된 완전히 결정론적인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뉴턴 물리학이 등장 이후 처음 2세기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소쉬르의 언어학은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형태소론(morphemics), 형태음소론(morphophonemics), 어휘소론(Lexemics), 문법소론(tagmemics) 등의 분야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언어학 이외의 분야로 까지 확대된 것은 무엇보다도 레비-스트로스의 풍성한 인류학적 탐구와 연관된다. 그러나 다른 탐구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 적잖이 중요한 인물이 “에틱(etic)"과 ”에믹(emic)"을 구분한 미국의 언어학자 파이크이다. 그는 “에틱”이라는 말에 음성학과 같은 과학, 즉 음향학 뿐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을 포함하는 문화적으로 차이가 없는 정상과학에 의해 기술될 수 있는 모든 현상을 포함시킨다. “에믹”이라는 말에는 모든 언어 현상과 광범위한 (아마 모든) 사회현상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상들이 오로지 음소학의 방법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제대로 기술될 수 있다고 본다. 파이크의 대부분의 작업은 전문적인 것으로서 이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레비-스트로스와 같이, 소쉬르의 재현의 방법이 통하는 말소리 패턴을 넘어서는 어떤 현상들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언어학적, 구조적 관점이 구조주의의 형이상학적 형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구조적 방법을 통해 정의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 말고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거나 우리의 삶이나 경험에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되는 어떤 것이 과연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파이크는 구조주의가 아니다. 그는 분명 방법론적 구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업 어디에서도 그가 물리적 대상이나 사적(私的)인 의식적 경험이나 의도를 부정하고 있다는 암시를 찾을 수 없다. 그의 구조주의는 사회현상과 언어를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하는 한 방식이다. 아이리스 머독이 염두에 두고 있는ㄴ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자는 언어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일차적으로 사실에 초점으로 맞추고 있는데, 사실들은 모두 "논리적 공간“을 전제하고 그 공간 내에 놓여지기 때문에,(원자적 사실들 간의 논리적 상호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구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에 근접해 있다. 머독은 유사성과 차이성에 주목한다.


언어, 의미는 실제적, 혹은 가능적(‘일상적’ 혹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는 구조이다. 혹은 그러한 구조일 수밖에 없다. ‘논고’는 사실의 언어에의 투사와 세계를 언급이나 논의가 불가능한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림은 자신의 그림 형식은 그릴 수 없다. 그림은 그림 형식을 현시한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다양한 변모를 거쳐, 구조주의로 간주될 수도 있다. ‘논고’의 두 번째 문장인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는 구조주의적 통찰을 닮았다.


하나의 큰 차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노고’에서 ‘탐구’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세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견지한 반면, “구조주의적 사상가와 그에 영향 받은 저술가들은 언어가 ‘세계’와 연관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연관 맺고 있다는 근본적인 가정에 자극 받았다.”는 것이다.


초기의 구조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1956년에 라깡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켐브리지에서 주류를 이루던 생각(예를 들어 ‘내적 과정’과 이름이 아닌 낱말에 대한 생각)을 새로운 것으로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분석적 전통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구조주의의 저작은 세밀한 철학적 반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구조주의의 논박 중의 일부는 이미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비판된 생각을 겨냥하고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경험에 관해 미묘하고 난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사적 언어논의‘는 기호의 의미가 사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가 사적인 의식 경험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그러한 경험이 실제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투구벌레에 관한 그의 유명한 논의를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어떤 것이 들어 있는 상자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상자 속에 든 것을 “투구벌레”라고 부르기로 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의 투구벌레를 봄으로써 투구벌레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한다. - 여기서 각자는 상자 속에 서로 다른 것을 가질 수도 있다. 심지어 우리는 상자 속의 것이 계속 변화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 그러나 “투구벌레”라는 말이 이 사람들의 언어에서 어떤 쓰임을 갖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사물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상자 속의 사물은 언어 게임에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서조차도 들어 설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아니, 우리는 상자 속에 사물을 생략해 버릴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말살된다.



그러한 사적인 사물이 어떤 것조차도 아니라는 견해는 쉽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상, 즉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몇 구절 뒤에 이러한 추론을 반박하고 나선다. 이 추론을 행한 상대자 말은 아래에서 인용부호로 구별된다.


그러나 당신은 아픔을 수반하는 고통-행동과 그렇지 않은 고통-행동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 인정 할 것이다. “ -인정한다고? 그보다 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도 당신은 자꾸만 감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떤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결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과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강요되는 문법을 거절하였을 뿐이다.

역설은 오직 우리가 언어가 언제나 한 가지 방식으로 기능하고 언제나 같은 목적, 즉 말이나 아픔이나 선이나 악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전달하는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탈피할 경우에만 사라진다.



감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근거로 도나간(Donagan)과 같은 몇몇 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의미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정말로 내적 경험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이에 도의할 수도 있지만 이를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감각의 존재뿐 아니라 철학에서의 감각의 역할과 지위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경험을 의미론이나 인식론을 위한 형이상학적 기점으로 삼기를 거부했음은 물론이다. 이는 중요한 점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소위 “현전(現前; presence)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논박에 동조한다고 본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뚜렷한 차이는 사적 경험에 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실과 의도에 관한 그들의 태도에서 발견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머독의 글에 이미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구조적으로 정의된 언어의 단위로서가 아니라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구조밖에는, 또는 구조와 독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한다. 즉 우리의 형이상학적, 혹은 실천적 정초로서 마련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세계, 감각 자료의 심적 세계, 순수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항상 명백한 사실과 인간의 의도를 부각시켰고, 또 우선성을 부여했다. 그는 ‘논고’의 첫머리에서 세계가 사실의 세계이고, 세계가 사물이 아니라 사실에로 쪼개진다고 말한다. 사실이 언어에 의해 투사될 경우(그리고 아마 채색될 경우), 이 투사 자체는 인간의 의도적 행위에 관한 명백한 사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는 그가 ‘논고’에서 후기 저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 견지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탐구’에서 자신의 작업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인간 존재의 자연사(自然史)에 관한 소견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다.


우리의 낱말이 의미를 얻는 친숙한 언어 게임은 이 사실에 속한다. ‘탐구’,&25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명령하고, 질문하고, 말하고, 담소하는 것은 걷고, 마시고, 노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연사의 일부이다.



앞서 인용한 ‘탐구’ &304에서의 역설은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친숙한 사실을 참조할 때 사라진다. 이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의미를 정초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외적 세계와 인간의 의도적 행위에 관한 사실인 자연사의 사실은 텍스트나 언어 밖에 놓여 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은 그가 데리다가 구조주의자인 의미에서 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근대의 결정론이 뉴턴의 기술(記述)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주의도 소쉬르의 기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소쉬르의 기술, 혹은 “에믹”한 기술이 적용되는 현상은 구조적 현상이다. 모든 언어 현상이 “에믹하게” 기술될 필요가 있다면 언어에 관한 구조주의적 입장은 참일 것이다. 모든 사회현상이 그러한 방식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면 사회나 문화에 대한 구조주의적 입장도 참일 것이다. 구조주의를 모든 사회 현상이 음소론의 방법과 같은 방법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이설로 생각하는 것이 간편한 까닭은 바로 여기 있다. 구조주의가 특정한 형이상학적 형식을 띨 때 그것은 언어 구조밖에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비실제적”, 혹은 “부정적” 대조의 영역이 환상이라는 이유로 구조주의를 강력히 거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영역이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정론과 마찬가지로 그 환상의 토대가 확실한 성공을 거둔 뛰어난 생각일뿐더러, 여전히 의미 있고 올바르게 적용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5. 은유의 도전



장면1



커밍스(E.E.Cummings)는 시인이 펭귄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동의한다.


―당신은 우리, 즉 커밍스와 내가 그것을 의미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시인이 정말로 가령, 에이브스(Aves) 문(門)의 스페니시데 과(科)의 18번 째 종(種)의 성원임을 뜻할 수 없다.


- 그러나 우리는 바로 우리가 말한 것을 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한다. 시인은 펭귄이다.

- 당신은 내가 시인이 정말로 펭귄임을 뜻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 그러나 당신은 분명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나는 피상적, 일시적, 우연적 특징이 아니라 시인이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내가 단지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혹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도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분명 그러한 말에 대한 진리 조건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정반대로 진리 조건이 있다. 왜냐하면 진리 조건이 없다면 증거도 없을 터인데 커밍스는 자신의 날개가 수영을 하기 위해 있다는 증거를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면2


잭은 공작과, 헝가리 뇌조(gouse), 토끼, 그리고 애완 너구리뿐만 아니라, 이구아나나 보아 뱀도 기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펭귄을 기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어느 날 그를 방문했는데 그는 “시인”의 희귀한 행동을 기술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기르는 동물 대부분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새로운 동물임을 확신했다. “맞아 시인은 펭귄이야”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분명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시인은 정말로 펭귄이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류학자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친숙한 진리 조건이 시각적 증거에 의해 충족되었다.



세상에 있는 어떠한 두 사물도 그러하듯 장면 1과 장면2도 일정한 유사성과 차이성을 갖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1) ‘시인은 펭귄이다’와 ‘시인은 정말로 펭귄이다’라는 두 낱말 계열이 있으며, 각각은 장면1과 장면2에 모두 나온다.


2) 장면 1에서 이 두 문장은 분명 존재의 모든 집합에 적용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단일한 실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우리는 이를 러셀적 왜곡이라 부를 수 있다.)은 옳지 않다.


3) 장면 2에서 이 두 문장은 분명 단 하나의 특정 동물에 적용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2에서 두 문장이 일반화되어 적용될 수 있다는 가정, 혹은 복수형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가정은 옳지 않다. 이점은 장면2에서 ‘시인’이라는 말이 고유 명사로 기능한다.( 이 때문에 그 말은 영어 텍스트에서 대문자로 표기되었다.)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4) 장면2에서 이 두 문장은 어떤 것을 분류한다. 즉 두 문장은 개별자를 기존의 분류학적 범주에 귀속시킨다. 장면 1에서 두 문장은, 비록- 아주 다른-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전제되기는 하지만, 어떠한 분류학적 귀속도 수행하지 않는다.


5) 장면 2에서 이 두 문장은 ‘펭귄’이라는 낱말에 속하는 의미론적 대조와 포섭에 의거해 추론의 상당한 영역을 보장해 준다. 시인은 포유류, 물고기, 부엉이, 신천옹 등이 아니라 새인 것으로 추론될 수 있다. 장면 1에서 이러한 일상적 추론은 닫혀 있다. 펭귄이라고 말해지는 시인은 부엉이나 신천옹일수도 있지만 확실히 새라기보다는 포유류이다. (우리는 의도의 문맥이 지시체에 관해 불투명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은유가 초점이 되고 있는 낱말의 의미에 관해 불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6) 장면2에서가 아니라 장면 1에서 이 두 문장은 어떤 특성을 묘사한다. 즉 두 문장은 생물학적 분류와 달리 정도를 허용하는 특성이나 특징을 어떤 것에 귀속시킨다. 시인은 다른 무엇보다 펭귄인 것처럼 보인다.



7) 장면1과 장면2에서 두 문장의 쓰임의 분명한 차이는 음성학적으로 분명히 표나지 않는다. 두 문장의 발성법이 두 장면에서 구분될 필요도 없고, 아마 구분되지도 않을 것이다.


8) 장면1과 장면2 사이의 차이가 ‘펭귄’이란 낱말에 대한 대안적인 사전적 의미에서 비롯될 수는 없다.


9) 이러한 차이가 언어의 잘못된 부정화된, 혹은 부적절한 쓰임에서 비롯될 수도 없다.


장면1과 장면2의 비교는 우리에게 중대한 도전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를 은유의 도전이라 부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유와 그 외의 비유법 간의 차이, 그리고 장면1에서의 표현이 엄밀한 의미에서 은유인지의 문제를 접어두고, 대신에 은유를 하나의 사물에 그것과는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존 할 것이다. 우리는 훌륭하게 잘 정의된 언어 이론과 언어적 수행 이론 내에서 앞서의 9가지 사실 모두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도전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 까닭은 그의 정의가 9)와는 반대로 은유를 일종의 실수처럼 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은유나 그 외의 다른 비유법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이는 것, 혹은 의미와 해석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도전이 어떻게 해석되든, 어떠한 언어 이론이나 언어적 수행 이론도 장면 1과 장면2의 유사성과 차이성의 설명에 실패할 경우, 중요한 경쟁자로 간주될 수 없다. 오늘날 이 도전은 금세기 초에 러셀이 물리쳤던 거짓 명제의 도전만큼이나 중요하다. 각각의 예에서 도전은 기존의 일견 그럴듯한 이론에 따를 경우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주 친숙한 언어 현상에 항상 주목하는데서 찾아진다.

장면 1과 장면2의 대조는 은유의 도전을 포함하는 도전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특히 구조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모든 의미가 소리 패턴, 의미론적 대조, 문장 패턴에 포함된 것과 같은 언어적 구조로부터 나온다면, 장면1과 장면2사이의 차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소리 패턴, 동일한 낱말, 동일한 언어를 갖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는 현상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양식으로, 즉 “에틱”한 양식과 “에믹”한 양식으로 체계화된다는 통찰에 근거해 있다. 은유의 도전의 첫 번째 결론은 이 이분법적 분류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에믹이 에틱과 구분되는 것처럼 은유도 에믹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만일 첫 번째 도전이 반박되거나 대답될 수 없다면, 현상(기호)을 의미 있게 정렬하고 제시하는 최소한 세 가지 기본적인 환원 불가능한 양식이 존재해야 한다. (이는 찰스 모리스가 언어에 대한 연구를 구문론과 의미론, 화용론으로 나눈 것을 시사하지만, 그에 대응하지는 않는다.) 에믹한 현상이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철학적, 설명적 이설로서의 구조주의는 이러한 고도의 복잡성을 배겨낼 수 없을 것이다.

구조주의자는 당연히 이렇게 표현된 도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지 숙고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제시되는 모든 도전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리고 도전이 피할 수 없게 될 때조차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맞받아치는 것이 나을 경우도 간혹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도전이 실제로 무엇인지, 도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거이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말지가 문제가 되어야 한다. 잠시 우리는 주로 그 도전을 피하려는 방식을 논의해 보겠다.

6. 도전을 거부하는 방식


“후기 구조주의자”는 은유의 도전에서 얻는 교훈이 구조 탐구가 포기될 수 있다는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에로 건너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성급한 것이다. 결정론적 이계 미분 방정식은 상대성 이론이나 불확정성 원리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포기되었다기 보다는 사용에 제한이 가해지게 되었다. 결정론적 현상이 자연세계에서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구조적 현상이 언어 탐구에서 중요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은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모든 구조적 현상을 거부하는 것이 은유의 도전에 응하기를 거절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펭귄’이라는 같은 낱말과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같은 문장이 장면 1, 2 모두에 나온다는 점, 그리고 같음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구조적인 현상으로 보인다는 점도 도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면 1과 장면 2의 차이가 혼란스럽게 되는 문맥에 속하며, 따라서 도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불출분하기는 하지만 이와 연관되는 하나의 대답은 의미를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영역으로, 즉 의미의 문제와 지시체의 문제로 구분하는 것이다. 콰인을 비롯한 일부 철학자들은 프레게의 논문, “의미와 지시체에 관하여”의 영향 하에 이 구별을 주장해 왔다.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우리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먼저 두 장면에서 ‘시인’의 쓰임적 요소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콰인의 이러한 이분법은 이미 구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해당한다. 지시체보다는 의미를 구조적 현상으로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시체의 도전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도전은 두 장면 간의 대조의 일부이며 이에 관해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어 온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시체 문제의 고려가 그 자체로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해도, 그거이 은유의 도전을 해결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도전에 응한 것이 아니라 회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 장면에서 ‘시인’의 쓰임에 있어서는 의미의 차이가 지시체의 차이라고 가정함이 옳아 보이지만, ‘펭귄’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는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 설사 우리가 의미와 지시체 양자를 전적으로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설명하게 된다해도 은유는 도전으로 남게 될 것이다.

도전을 거부하는 또 다른 방식은 오스틴이 제안한 것처럼 우리의 주의를 “진지한”발언에 국한 하는 것이다. 오스틴의 요점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은 실제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는 청중이 좌석을 떠나 도움을 주러 오기를 바라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참이다. 더 나아가 오스틴은 무대에서 오고 가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이 무대 밖에서 발언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선 그 말이 예를 들어 극 중 연기, 교실에서의 연습, 아이러니, 은유 등으로가 아니라 진지하게 발언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이 역시 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 내에 머무는 것은 여전히 은유의 도전을 피하는 것이다. 꼬집어 말하자면 ‘신중한 것’이라는 것 자체가 여기서는 은유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4)

우리는 은유를 특별한 종류의 언어 행위로 보아 오스틴(또는 썰)의 이론에 동화시킴으로써 은유의 도전에 응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조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은폐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오스틴이(썰도 마찬가지) 언어행위에 대한 아주 합리적인 분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유가 이 분류의 어떠한 주요한 범주에 들어맞을 것 같지는 않으며, 주요한 범주를 새로 첨가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틀을 전도 시킬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언어 행위는 발화수반 행위(illocutionary)인 반면,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은 특별한 발화수반 행위로 고려되어야 할지 아니면 (일상적인?) 발화수반 행위를 통해 특별한 발화 효과(Perlocutionary)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불확실하다. 은유는 전통적 구조주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오스틴의 이론에 대해서도 도전이 된다. - 왜냐하면 실로 오스틴의 이론이야말로 기본적으로 언어 행위에 대한 구조주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색의 낱말 집합에 다른 원색이 단순히 “부가될 ‘수 없는 것처럼, 은유의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은유적 언어 행위“라는 범주를 오스틴의 이론에 부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이 특별한 언어 게임이거나 언어의 특별한 쓰임이라는 제안이 좀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이나 언어의 쓰임에 대해 한 말과 직접 충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출발점으로는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도전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은 “원초적인” 언어 게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우리가 다른 언어 게임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 언어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아마 다른 어떤 게임도 그것에 의해 전제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이 언어의 ‘원초적‘ 쓰임일 수 있을까?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에세이‘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논의는 설득력이 없다. 가령 장면 1에서의 은유의 경우에, 우리가 ’펭귄‘의 일상적 의미를 모른다면 우리는 커밍스가 시인을 ’펭귄‘으로 부르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은유적 쓰임은 일상적 쓰임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이 경우에) 은유는 언어의 원초적 쓰임일 수 없다. 실제로 ’펭귄‘의 일상적 의미는 커밍스의 글을 일근ㄴ 과정에서 두 차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우리는 그것을 그 표현이 은유적인 것임을 확인하는데 사용한다. 일단 그 지시체가 시인- 어떤 인간의 집합-인 것으로 설정되면, 어떠한 인간도 새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새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펭귄‘의 일상적 의미로 말미암아 곤경에 빠지고 , 다시 이 곤경 때문에 그 표현을 은유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5) 따라서 우리는 은유의 의미가 무엇인지의 문제에 이르게 되며, 블랙(Black)이 자신의 은유의 ’상호작용 이론‘을 통해 명확히 하고 있듯이,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펭귄‘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렇다면 은유는 적어도 희망하거나, 거짓말 하거나,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중 어떤 것도 원초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그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우선 그 장치를 기술하는 문제가 은유의 도전의 중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낱말의 “은유적 의미”에 대해 말함으로써 은유의 도전에 응할 수 없음은 분명해졌을 것이다. 낱말의 의미는 사전에 주어져 있는데 사전에서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은유의 특징이다. 사실 분명히 원래는 은유였지만 일삭ㅇ적 쓰임으로 정립된 경계선 상에 있는 표현이 많이 있다. 가령 책상의 ‘다리’, 비행기의 ‘날개‘ 등. 버나드 해리슨은 모든 은유가 원칙상 우리가 이러한 ’다리‘,’날개‘ 등과 같은 예를 다루는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구조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안 될 말이다. 이제는 사지의 하나로서의 ’다리‘의 의미를 배우기 전에 책상의 일부로서의 “다리”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은유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지언정 기껏해야 묽어진다. 그러나 은유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사이의 소위 회색지대의 존재는 장면 1과 장면 2의 비교에 의해 제시된 도전을 다루지 못한다. “은유적 의미”는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은유의 도전을 피하는 가장 초라한 방법에 불과하다

논의를 계속하기 전에 우리는 최근에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데이빗슨의 은유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낱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의미의 전부라는 생각, 혹은 은유가 그것의 문자적 의미 외에 다른 어떤 부가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생각은 은유의 도전을 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면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여러 시기에 여러 모습으로 출몰해 왔지만 최근 데이빗슨의 작업으로 인해 다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데이빗슨은 비언어적, 혹은 비문자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비판한다. 그는 의미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적 자극에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콰인의 주장을 특히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이를 “경험론의 세 번째 독단”이라 부른다. 그는 콰인의 이론에서 의미가 감각에 의존함이 의미 연관에 대한 증거나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라 기껏해야 일종의 인과의 문제라고 본다. 규칙이 연관될 때 문제가 되는, 원인을 정당화로 변환시키는 작업의 난점은 경험론적 의미론 일반의 골치 거리이다. 데이빗슨의 대안은 어떠한 의미도 비언어적이거나 비문자적이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은유의 의미 문제 역시 이런 식으로 해결되어야만(또는 비껴가야만) 한다. 즉 은유의 의미는 은유를 구성하는 낱말의 문자적 의미에 의해 완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은유의 도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은유의 대부분은 거짓이다. 가령 시인은 문자 그대로는 펭귄이 아니기 때문에, 장면 1에서의 은유적 문장은 데이빗슨에 따르면 명백히 거짓이다.

데이빗슨은 일련의 낱말의 문자적 의미는 그 진리조건에 의해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은유를 비(非)수사적 서술문에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 둘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는 것에 해당하며, 따라서 은유의 위치를 위협한다. 어떤 은유든 그것이 어떻게 참일 수 있는지를 알기란 상당히 어렵다. 데이빗슨은 은유를 초의미론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의미도 환원의 과정에서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은유는 오직 쓰임의 영역에 속하며,” “낱말이 의미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구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사실 사전에 있는 낱말 중 오랜 기간 동안 쓰이지 않는 것도 있으므로 낱말의 실제적 사용이나 등장은 그것의 쓰임의 방식(비교적 안정된 사전적 의미)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데이빗슨이 은유를 환원하는 기초로 삼는 소위 문자적 의미가 어떻게 쓰임과 독립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그것 자체도 일종의 쓰여지고 있는 의미이다.

의미’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많은 경우에- 비록 그 모든 경우는 아닐지라도 -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쓰임이다.



문자적 의미는 주어진 일련의 낱말에 마술처럼(혹은 “경험적으로”) 각인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도 “언어에서의 쓰임”이다. 은유의 도전을 다루기 위해서는 어떤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할렛(Hallet)의 지적처럼 비트겐슈타인이 ‘탐구’ &43에서 언급한 “쓰임”(Gebrauch)과, (개별적 낱말이 아니라) 표현들이 (추상적으로 “언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는 다른 종류의 “쓰임”(Verwendung, Anwendung)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 종종 간과되곤 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 점을 좀더 상세히 논의할 것이며, 여기에서는 단지 의미와 쓰임의 구분이 데이빗슨이 전제하는 것처럼 뚜렷하거나 간단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은유가 명백한 거짓이라는 데이빗슨의 견해는 똑같은 난점에 봉착한다. 데이빗슨은 오직 한 종류의 의미(즉 문자적 의미)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직 한 종류의 진리(또는 한 의미의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도한 양자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언어의 비수사적 기능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은유를 단순히 “거짓”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은유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이다. 문제는 은유를 어떻게 의미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냐인데 “거짓”은 거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유의 도전을 거부하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은 이 도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태도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보여준다. 거부의 분명한 이유의 하나는 도전에 응할 경우, 언어와 의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복잡해 질 것이라는 우려이다. 따라서 이 도박에 거는 비용은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장면 1과 2의 비교를 통해 그 도전을 제시한 이상, 그것에 응수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고 있다. 이 입장에 관한 재고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7. 은유와 의미


언어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에서 아주 분명해진 것처럼, 의미의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문장이나 일련의 낱말이 참된 어떤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함축한다. 의미의 제 측면을 분류하는 확정적 방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이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나 언어학자의 전문 용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단계, 또는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문법적 측면, (2) 정의(定義)적 측면, (3) 지시적 측면, (4) 범주적 측면, (5) 상황적 측면


첫 번째 것은 일련의 낱말이 서술문의 형식적, 언어적 요구를 충족시키는지의 여부에 의존한다. 이러한 요구는 강세와 음높이의 패턴, “기능적 낱말,” 그리고 명사, 동사, 형용사 등과 같은 총체적 낱말 집합에 의해 진술된다. 만일 일련의 낱말이 문법적으로 의미가 없다면, 여전히 그 “의미”에 대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낱말이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 포섭될 수 있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두 번째 것은 문장에서의 일반적 낱말이 기존, 혹은 규정된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여부에 대한 것과 연관된다. 재버옥키(Jabberwocky)에서 루이스 캐롤은 정의적 의미를 결여한 낱말을 포함하기 때문에, 참 거짓의 영역 밖에 있는,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의미 있는 문장의 멋진 예를 제시하고 있다.


Twas brillig and slithy toves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셋째, 지시적 의미는 고유명사나 다른 지시적 표현이 갖는 특성이다. 문장은 그것을ㄹ 구성하는 지시적 표현이 의미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때, 오직 그때에만 올바른(비일탈적인) 지시적 의미를 갖는다. (잠시 우리는 지시적 의미가 문맥적 고려를 요구하고 있다기보다는 언어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가정을 해본다.) 허구는 그것의 고유명사가 지시적으로 일탈적이기 때문에, 참, 거짓의 영역밖에 있는 이야기 형식이다.

한 문장이나 진술이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포섭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문법적, 정의적, 지시적 의미의 기준의 충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자. 이러한 점에서 유의미성은 문장의 진리 주장에 대한 최고한의 조건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기준이 진리 주장에 충분조건을 구성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개념이 예리하게 경계를 가지며 따라서 모든 개념이 모든 대상에 대해 ‘참’, 혹은 ‘거짓’으로 정의된다는 프레게의 주장은 그러한 견해의 한 예이다. 타르스키(Tarski)의 진리론은 그 또 다른 예로 볼 수 있다. 타르스키에 따르면 총체적 낱말 집합은 논리적 유형이나 언어의 위계를 상술함으로써 보충되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자기 지시적 문장은 문법적으로 (구문론적으로) 일탈적인 것으로 말해진다. 위의 세 가지 기준이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한다면, 대부분의 은유(“시인은 펭귄이다”를 포함)가 거짓이라는 데이빗슨의 주장은 분명 옳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을 하게 되면 다른 기준- 프레게의 경우에는 정의적 의미, 타르스키의 경우에는 문법적 기준-을 간섭하게 된다. 그래서 프레게는 데이빗슨의 가정에 동의하겠지만, 대신 무의미한 어떤 문장을 거짓으로 간주하기를 요구한다. (“3의 제곱근은 자주색이다.”) 그리고 카르스키는 참인 어떤 명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기를 요구한다.(“바로 이 문장은 일곱 개의 낱말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기준들이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범주의 인식론적 의미는, 늦어도 플라톤부터 논의가 시작된 중요한 철학적 문제였다. ‘소피스트’편에서 플라톤은 모든 형상이 서로 연관되는지, 또는 형상도 서로 연관되지 않는지에 대해 묻고, 이 두 가설을 모두 거부한다. 그는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형상이 다른 어떤 형상과 연관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어떻게 범주를 인식해야 하는지, 또는 어떠한 상세한 범주적 제한이 요구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라일(Ryle) 등 많은 사상가들이 그 세부 사항을 보충하려 시도해 왔다. 다양한 언어 게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구분은, 비록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지만, 이 전통에 대한 가장 최근의 공헌이다. 이들은 한 문장이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 포섭될 수 있으려면, 범주적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3의 제곱근은 자주색이다.

태양의 지금 시각은 7시 정각이다.

색 없는 녹색 생각은 격렬하게 잠긴다.



와 같은 문장은 . 비록 그것이 처음의 세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하더라도 범주적 의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배제된다. -물론 정확히 어떻게 관련 범주를 기술하고, 위반된 규칙을 언명할 것인지가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인은 펭귄이다‘와 같은 은유는 ’참‘,’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편 사람은 블랙인데, 그는 은유의 문제로 데이빗슨과 논쟁을 벌였다. 블랙의 입장은 무엇보다도 은유를 합리적으로 담론으로부터 배제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함축한다. 그것은 언어를 정화함으로써 언어가 동어반복이나 세계의 사실을 기술하는 데만 사용되도록 하려 했던 1930년대의 논리실증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은유를 ‘참’, ‘거짓’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킴에 있어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범주적 기준이 필요한가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으로부터의 일탈이 때때로 무의미가 아니라 은유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블랙이 주장하듯, ‘참’의 쓰임이 일상 언어에서 검증이나 확증을 위한 기존의 절차와 아울러 사실을 진술하는데 한정되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처음의 내 가지 기준의 충족이 어떤 발언이나 문장이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인지의 여부이다. 은유에서 중요한 점은 사실의 결정이 아니라 사실의 해석이라는 것이 블랙의 논점이다. 이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옳은 것처럼 보인다! 블랙이 말하는 것처럼, 은유가 비록 문자 그대로 검증 가능한 사실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도, 참이면서 동시에 명료할 수는 없을까? 블랙의 부정적인 답변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블랙이 언어적 사실을 잘못 제시했거나 ‘참’의 쓰임을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문제는 처음의 네 가지 의미 기준이 어떤 결합 하에서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위한 충분조건을 제공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대안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처럼) 상황적 요인이 범주에 대한 고려에 빠져있다면, 우리가 의미에 관한 앞선 논의에 포함되지 않는 그 요인을 고려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처음의 내 가지 기준(전통적 방식으로 이해된 범주적 의미를 포함하는)을 충족시키는 문장도 그것이 전적으로 부적절한 문맥에 놓여 있을 때에는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다”라는 문장은 처음의 내 기준을 충족시키지만 신의 은총을 위한 기도로 사용될 경우에는 무의미하다. 반대로 앞의 네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장도 어떤 문맥에서는 “유의미”할 수 있다.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문장은 장면 1에서 은유로 사용될 경우에는 의미가 있지만 동물학 수업에서 사용된다면 무의미하다. 더 나아가 그러한 은유적 문장이, 적절한 상황에서는, 또는 그것이 참이라는 승인의 표현과 함께 사용될 경우에는 무언가를 말한다고 주장해도 잘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주어진 문장이 상황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도 있어야 하며, ‘참’이 사실에 대한 동의뿐 아니라 아이러니에 대한 동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여기’, ‘지금’, ‘당신’, ‘나’와 같은 지시어가 연관될 때 뿐 아니라, 한 발언이 어떤 종류의 언어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아는 과정에도 발생한다. 다음 문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저 창문은 열려 있어 아주 춥다.



이 문장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암암리에 지시하고 있으며, ‘저’라는 낱말에 관한 문맥은 다소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 문장을 다른 식으로 발언하면 의미와 진리치가 변경될 수 있다. 그러한 고려는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구체화하는데 요구되는 기준에 상황적 기준을 포함시킬 것을 옹호하는 하나의 논증을 제시한다.( 그것이 확실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이러한 고려가 상황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예를 들어 지시적 의미로 설명된 것을 약간 수정함으로써- 수용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문장이 언제나 진리 주장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위의 문장이 나타날 수 있는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1)남편과 아내는 소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그 문장을 발언하고 다른 사람이 대답한다. “맞아요. 그러나 우리에겐 맑은 공기가 필요해요.” (2) 창문을 열어둠으로써 공부방을 서늘하게 할 수 있다고 A가 B에게 자랑했다. 창문이 열려있는 데도 그의 공부방은 지금 불쾌할 지경으로 덥다. B가 그 문장을 말하고 A가(웃으면서) 대답한다. “맞아, 사실이야.” (3) 젊은 여주인이 창문을 열고 환기하자 늙고 허약해 뵈는 손님이 그녀에게 그 문장을 말한다.

첫 번째 상황에서 그 문장은 사실을 진술하는 진리 주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답은 말해진 것이 ‘참’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 포섭됨을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두 번째 상황에서 그 문장은 어떤 점을 아이러니칼하게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1)과 똑같은 동의의 대답이 이번에는 그 문장을 사실적인 참으로 인정하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가 적절했음을 인정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세 상황에서 그 문장은 하나의 요구로서 사용되었으며, 이에 대해 단지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혹은 온도를 측정하는 것으로 반응한다면 이는 그 손님이 말한 바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마지막 두 상황에서 그 문장은 ‘참’, ‘거짓’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 내에 포섭되지 않는다. -또는 적어도 ‘참이다’, ‘거짓이다’를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다. - 그러나 두 번째 상황에서 ‘참’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대답으로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만일 ‘참’이 아이러니를 확증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면, (블랙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것은 분명 은유의 명료성을 확증하는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유의미성의 다섯 가지 기준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장면1 에서의 은유가 의미 있고 또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은유가 언어의 규칙을 명백히 위반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합법적 언어 게임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상황적 기준이 의미를 결정하는데 요구되는 기준의 하나로 채택되어야 한다. 음소와 달리 은유는 긍정적 실재를 참조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소쉬르가 제시한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한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재는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고려에서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데리다에 있어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은유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명확히 보여주듯이 의미와 이해가 언어의 논리적, 사전적 차원 뿐 아니라 수사적 측면에 대한 주의를 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거짓 명제의 도전은 의미와 진리의 구분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는 어떠한 궁극적이고 심원한 방식으로도, 즉 특정 상황에 뿌리박은 사례의 제시를 넘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해하기 쉬운 구분이 아니다. 이에 대한 다음의 두 응답은 그것이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기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첫째 응답은 모든 명제가 부분적으로는 거짓이라는 관념론자의 주장인데, 이는 마치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인 양 무시해버리는 것에 해당한다. 둘째 응답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나타나는 이원론인데, 이는 매우 당혹스러운 형이상학을 포함하고 있다. 협의의 비형이상학적 의미에서 구조주의는 기술 언어학의 실제적 성과에 기초해, 그 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리적으로 응수하고 있다. 음소론의 규칙처럼 집합이나 체계의 형태로 등장하고, 대조의 패턴에 의해 체계의 요소를 정의하는 일정한 규칙에 의해 의미가 구성된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말소리 패턴을 음소의 합성으로, 그리고 음소를 언어적 의미의 가장 단순한 요소로 명료하게 기술하도록 한다. 아울러 “에믹”한 것과 “에틱”한 것의 구분을 통하여 방법을 일반화해서 의미의 모든 예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의미 있는 소리를 기술하는 성공적 방법을 언어 현상의 전 영역에로 일반화하는 것은 운동을 기술하는 성공적 방법을 모든 물리적 현상에로 일반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구조주의와 결정론의 이러한 유사성은 그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양자의 경우 모두 일반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 타당하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양자 모두 일반화에 실패하는데, 그 이유는 애초의 기술(記述)이 성공하게 된 조건을 고려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언어학적 의미의 경우에 이러한 조건은 언어적 의사소통이 규칙, 실행, 규약뿐 아니라, 목적, 의도, 목표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오의 법칙과 케플러의 법칙은 상대성 이론적 현상, 양자역학적 현상, 혹은 열역학적 현상에 대한 참조를 포함하거나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음소 또한 특별한 경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의 기술(記述)이 어떠한 화자의 의도나 목적에 대한 참조를 포함하거나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유가 이를 증명해 준다. 그것은 순수히 구조적인 기술을 거부한다. - 그 부분적인 이유는 은유가 구조적인 규준과의 일치보다는 종종 그 규준으로부터의 일탈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부분적인 이유는 은유가 비표준적인 거이므로, 은유는 독자로 하여금 화자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의도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의도를 지시하는 것은 가능하다. 썰이 자신의 자연주의적 설명에서 충분히 보여주듯이, 의도는 행위나 상황에서 드러난다. 관습, 제도, 그리고 언어를 포함한 다른 사회적 구조가 그러한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고 행위자가 처한 직접적 환경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반적인 것, 특수한 것, 타입(type), 토큰(token)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은유가 화자나 저자의 의도에 연관된다는 말은 은유가 기호들 간의 관계, 낱말과 세계와의 관계뿐 아니라 화자와 발언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관계에도 연관됨을 뜻한다. 화자에 대한 고려 없이는 은유와 무의미는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은유적 표현이 의미론적으로 일탈적인 그러한 빈번한 경우에는 말이다.




8. 은유와 철학


‘논고’의 한 아이러니는 비트겐슈타인이 무의미를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 낱말의 형태로 간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은유를 묘사하려는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논고’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주석(註釋)으로 기여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가 그것들을 통하여- 그것들을 딛고- 그것들을 넘어서서 올라갔을 때, 종국에 가서는 그것들이 무의미한 거임을 인지한다. (말하자면 그는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내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논고’에는 아무런 지향성이 없다는 통념과는 반대로 이러한 언급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점은 텍스트의 의미가 그것을 구성하는 낱말의 초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커밍스가 한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커밍스를 이해하는 독자는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무의미한 것으로 인지한다. 그 말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지하는 것은 두 경우에 있어 그 사람과 의 일정한 관계로부터 나오며, 더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단지 의미론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한 점에서 데이빗슨은 옳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에서 우리는 왜 합리적인 사람이 무의미한 어떤 것을 말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야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 말하자면 그 사람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6) 우리가 시인 커밍스에 대해 그가 의미했던 바를 언어적으로 좀더 정확히 표현해 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논리학자/도덕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도 그가 의미했던 바를 언어적으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해 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두 경우에 비유적으로 표현이 분석되거나 해석되기 보다는 숙고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읽기의 관점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이 문제를 침묵에 넘기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텍스트의 이해와 사람의 이해의 이러한 단순한 구분은 ‘논고’의 마지막에, 그리고 커밍스의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데리다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이외의 모든 실재를 의문시함으로써 데리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커밍스를 그들이 요구하는 일상적 방식, 즉 그들을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어떠한 형태의 은유에 대해서도 이해의 여지를 남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은유는 텍스트일 뿐 아니라 제스쳐이다. 은유는 개인적 표현으로서의 이의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말뿐 아니라 사람을, 즉 말 이상의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은유는 알티에리의 말처럼 “발언을 통해 일어나는 행동의 표현이며, 그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은유가 사용된 이유를 올바로 알게 된다. 이러한 단순한 기본적 구분을 부정함으로써 데리다는 은유와 텍스트(구조)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무너뜨린다. 이로써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완전히 결벌함과 동시에 모든 언어가 철두철미 은유적이라는 그 자신의 주장(이 점에서 그는 루소에 동조한다)을 스스로 반박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은유가 일상적인 구조적 텍스트와 구별될 수 없다면 은유 개념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은유의 경우에 있어 화용론과 의미론의 관계는 미묘하며, 조심스레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펭귄”의 새로운 사전적 의미- “은유적 의미”-를 가정함으로써 은유를 구조적 의미론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원은 은유의 은유적 특성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원은 실제에 있어서 부정, 즉 은유의 부정과 구별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컨대 모든 언어가 은유적이라는 제안, 혹은 모든 의미가 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라는 제안을 통해서 의미론을 화용론에로 환원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은유로서의 표현을 인지하고 또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의미론에 의해 주어지고 사전에 기록된 ‘펭귄’의 일상적 의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유의 도전은, 화용론이 구조적 의미론을 보충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의미개념을 어떻게 다듬느냐의 문제이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상을 통찰하려는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과제에 관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모든 사람이 택하지 않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요구되는 통찰이 (만일 그것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의미론에 의해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을 연관시켜 보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고찰을 진행시켜감에 따라 차이가 드러나며, 결국 그것은 이러한 공통적 관점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데리다는 이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마치 우리가 구조주의 이론을 피한다면 어떠한 이해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머독이 계속해서 그를 구조주의자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이해를 이론적 이해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따라서 그가 이론을 피할 때 그는 문제를 밝혀주는 전망에 대한 탐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논고’에서의 보여줌과 말함의 구분의 잔여일 것이다. 혹은 아마 힌티카가 논의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의미를 경험적(과학적) 현상으로보다는 선험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골리스는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은유의 역할에 관해 날카로운 견해 차이를 드러낸다고 본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간의 가장 큰, 아마도 가장 광범위한 차이(실제로 차이 이상의 대립)는 바로 이것이다. 데리다는 니체적 의미에서 언어가 지니는 극단적인 은유적 성격을 주장하는데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사회적으로 실행되는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자연언어를 주장한다..... 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은 니체적인 개념의 파괴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골수 회의론자이며, 비트겐슈타인은 골수 회의론자의 숙적이다.



이렇게 시작한 그는 두 사람의 뚜렷한 차이를 확대시켜 나간다.



데리다는 이해 가능성의 필요조건으로 불가능한 인지적 조건을 설정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인식 자체를 기본적으로 사회적 생존이라는 -결코 명시적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조건에 의존함에 의해 조절되고 검증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데리다는 “원초적” 기원을 상정하는데, 그는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이는 분명 옳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를 제약하는 조건을 신비화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원에 대한 제반 물음을 거부한다. 데리다가 아주 투명한 형이상학적에 관한 거짓된 실재론을, 명백히 실제로 기능하는 사회에 관한 세속적인 실재론과 (아마도 고의적으로) 혼동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다.



은유의 도전과의 씨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가피하게 언어와 의미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단순화하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언어와 그 사용의 엄청난 복잡성을 인정하는 방향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조리 그린이 “시인의 작업에서 탁월하게 표현될 수 있는ㄴ 인간의 어떤 능력이 없다면 어떠한 담론도 불가능할 것이다.”-이는 니체나 데리다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혹은 동의하지 않는 논평으로 볼 수 있다- 라고 말할 때 그녀는 아마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은유와 철학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은유를 거짓이나 무의미로 간주하는 사람은 앞에서 논의한 의미와 진리의 네 번째 기준, 즉 범주적 기준을 그 이유로 들 것이다. 그는 은유가 철학에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어떠한 이성적인 논의에 대해서도) 해를 끼친다고 주장한다. 철학이 세계의 존재에 대한 각기 다른 범주를 인지하거나 고안하는 반면 은유는 그 범주적 구분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철학 자체도 은유로 가득 차 있다고 반박한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은유, 환유, 신인(神人)동형론의 불안정한 다양성이다. 요컨대 시적으로 수사학적으로 강화되고 변형되고 치장된, 그리고 오랜 사용 후에 어떤 종족에게는 고정적이고, 표준적이고,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관계의 총화이다. 진리는 환영이다. 단지 우리가 그것이 환영임을 잊었을 뿐이다. 진리는 무력해져 감각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낡아빠진 은유이다. 진리는 표면이 닳아빠져 이제는 더 이상 동전이 아니라 단지 금속으로만 여겨지는 동전이다.



분명 니체는 진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철학 전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철학에서 은유적 표현을 허용하지 말 것을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주장은 진리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 실로 모든 철학적 담론이 환원 불가능하고 불가피한 은유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은 엄청난 장난기의 -은유로 가득 찬- 원천이다. 동전의 은유는 언뜻 보기에 무해한 것 같다. 동전과 은유는 모두 교환의 도구이기 때문에 동전은 실로 은유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다. 그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교환에 사용되거나, 혹은 관습적, 또는 허구적 등가에 의거한 옮겨 놓기에 의해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 여기에서 니체의 언어는 활기 없다거나 진부하기는커녕 귀에 쟁쟁할 정도로 생생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말이 정말로 참이라고 주장하는 한,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J.힐리스 밀러가 지적하듯이 그는 동전의 은유 자체가 은유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이 글에서 경고하고 있는 오류에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다.

데리다는 니체의 입장을 수용하고 확장시켜, 철학자가 사용하고 있는 주된 은유를 은폐하는 방식을 공격한다. 은유에 관한 데리다의 글 “백색신화”의 표제는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 ‘에피큐로스의 정원’에서 빌러 온 것이다. 그 작품에서 프랑스는 형이상학적을 백색신화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자들이 “영원히 우화 속에서 살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시인의 가엾은 운명이여. 그들은 고대우화를 퇴색시키는 우화수집가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형이상학적의 언어가 색이 바랜 은유, 닳아빠진 원래 의미의 말소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소의 과정을 용이하게 하는 하나의 경제적 방안은 단순히 원래의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절대적인, 무한한, 만질 수 없는, 비존재 등의 새로운 전문 용어를 만드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이라는 이름조차도 “자연 현상의 바깥” 또는 “물리적 담론의 지워진 목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정적인 이름이다.

동전에 대한 니체의 논의로 되돌아가, 데리다는 동전의 usure를 문제 삼는다. 프랑스어에서 usure는 고리(高利:usury)와 마모(using up)를 뜻한다. 동전이 유통과정에서 각명부(刻銘部; exergue)가 마모되었을 때, 동전의 가치는 더 이상 액면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잉여가치(일종의 고리)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낱말이 사용과정에서 문자적 의미가 마모되었을 때, 그 의미는 더 이상 어떠한 단일한 문맥에 의해 한계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된다.usure는 어떠한 낱말, 어떠한 문장도 가정된 어떠한 의미 단위로부터도 본질적으로 일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철학용어를 포함한 모든 용어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것도 어떤 언어적 단위의 의미를 완전히 결정하거나 고정시킬 수 없다. 일정한 유형의 은유적 의미가 usure를 통해 끼어들어 의미를 분할, 재분할 할 수 있다. 유통과정에서 은유의 의미가 엄밀히 명료화되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은유의 규칙’에서 뽈 리꾀르는 언어적 담론 문맥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우리는 각 낱말의 가능한 다양한 의미 중 어느 것이 주어진 문맥에 적절한지를 결정한다. 문맥을 신중히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잉여 의미를 환원하고 제거할 수 있다. 리꾀르에 의하면 은유를 이해하려는 의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상적인 담론에서의 다른 의도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의 엄밀한 명료화를 지향한다. “은유의 물러서기”에서 데리다는 리꾀르의 지적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앞서 살펴본 바를 반복하며 간략히 답한다. 데리다는 리꾀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침은 일상적 쓰임일 뿐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그것은 안정적이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그리고 오스틴과 썰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의도는 전적으로 현전(現前)하지도, 의미의 명료화에 직접 연관되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색신화”에서 데리다는 또한 “은유‘의 어원인 희랍어 동사 metapherein에 대한 하이데거의 어원학적 분석을 논의한다. metapherein은 ”옮겨놓기“를 뜻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지적하듯이 이 옮겨놓기는, 오로지 옮겨놓는 움직임이 발생하는 두 영역간의 구분이 전제될 때 비로소 은유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옮겨놓기’와 은유의 개념은 감각적인 것과 감각적이지 않은 것을, 비록 완전한 분리는 아닐지언정 각기 자존하는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데 의존한다.



예를 들어 장면 1에서 ‘펭귄’의 조류학의 문맥에서 의미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러한 은유의 주요한 기능은 의미를 감각적 영역으로부터 감각적이지 않은 영역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의 구분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의 소산이자 근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은유적인 것은 오로지 형이상학적의 영역 내에 존재한다.” 서구의 형이상학적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분법으로 구획하였다.― 예컨대 생물과 무생물, 질료와 형상, 육체와 정신, 현상계와 예지계, 자연과 문화, 기표와 기의,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모든 이분법은 은유이다. 그들은 언어의 ‘은유성’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다. 형이상학적적 구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존재(Being)로부터 존재자에로 관심을 전향하게 되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적은 존재자들을 존재로부터 소외시켰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적 범주를 통해 시원적 개방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풍부한 의미론적 잠재성을 지닌 은유로부터 물러서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담론이 은유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하이데거 자신이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빠져 있다고 본다. 만일 모든 이분법이 은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면 존재와 존재자에 관한 하이데거 자신의 이분법도 마찬가지 아닐까? 더 나아가 원초적 존재를 기술하는 하이데거 자신의 언어도 여전히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언어를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단지 언어가 스스로 말하게 하며, 이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언어가 은유적이지 않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만일 우리가 언어 전체가 서구 형이상학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훼손되어 왔다면 어떠한 용어도 은유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존재에 대해 말할 때 (또는 존재 스스로 말하게 할 때) 조차도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이데거도 예외가 아니다. 단지 그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존재는 무(無)이고,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적(ontic)은유에서 말고는 말해질 수 없고, 스스로를 말할 수 없다.... 존재 의미의 해석이 산출되는 것은 은유적인 주장 내에서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언어가 존재를 훼손시키지 않은 채,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의심하는데서 더 나아가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만일 존재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면, 그리고 만일 주어진 유일한 언어가 너무 훼손되어 존재의 순수한 메시지를 담을 수 없다면, 우리는 존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 물러섬은 원초적 기원의 유보, 즉 모든 존재자의 기원의 유보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기원 자체가 형이상학적이고, 증명되지 않은 것이며, 모든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적 방식의 추구, 즉 서구 형이상학사를 통해 계속해서 헛되이 반복된 추구에 지나지 않는다. 데리다는 잃어버린 기원에 대한 이러한 향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사 존재에 대한 이름이 있다 해도 그것은 고유한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향수에 빠지지 말고 이를 생각해야 한다. 즉 순수히 모권적인, 혹은 부권적인 언어의 신화 밖에서, 잃어버린 사고의 고향 밖에서 생각해야 한다.



폴 드만은 철학이 언어의 모든 비유법을 포기하거나, 혹은 철학의 엄밀성 주장을 포기하거나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이데거는 분명 첫 번째를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이 형이상학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본다. 형이상학, 혹은 그것의 언어를 단순히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드만이 제시한 두 번째 대안, 즉 철학의 엄밀성에 대한 전통적 주장의 정반대이다.― 은유, 익살, 그리고 언어의 변화무쌍한 유희. 언어의 유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는- 은유적으로, 즉 우리의 사지를 각각 말에 묶지 않고서- 갈갈이 찢겨지고 닳아 없어진다.

우리는 은유에 대한 데리다의 견해를 여기에서 직접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다만 모든 담론이 환원 불가능한 은유적 요소를 갖는다는 그의 견해를 가지고는 장면1과 장면2의 대조에서 제시된 도전에 응수 할 수 없으며, 이는 은유의 도전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는 일상적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표준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도전은 차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며, 차이가 부정되면 언제나 도전은 거부된다. ―데리다의 경우 에서처럼 일상적인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 것에 동화될 때, 해리슨의 경우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일상적인 것에 동화될 때 혹은 “은유적 의미”라는 공통적 개념에서처럼 말이다.

구조와 은유에 관한 데리다의 입장은 수수께끼이다. “해체의 필요 불가결한 문맥은 ‘후기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이다. 오직 유행을 좇아 근시안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만 그 반대로 보일뿐이다.” 이점에서 데리다는 일종의 구조주의자이며, 텍스트 밖에 실재가 존재함을 부정한다. 특히 그는 의식의 개별적인 사적 실재성이나 공적, 경험적 사실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머독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는 또한 일종의 결정론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말하는 바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것 같은 일상적이지만 오염된 의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낱말의 배후에 놓인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때때로[의미가 그와 연관됨으로써 수정되는, 내적으로 연관된 개념들의]집합은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우리는 이제 모든 언어가 내적 연관으로 이루어짐을, 사실 어떤 한 사람이 모두 개관할 수는 없는 내적으로 연관된 그물망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그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며 정말로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떠한 ‘우리 자신의 ’ ‘현전’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적 구조의 주인이 아닌 인질로 떨어지고 만다. 다른 한편 데리다는 언어가 은유로 가득 차 있다는 루소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소쉬르 및 건전한 구조ㄹ적 방법론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은유는 구조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구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해당한다. 그리고 언어가 모두 은유적임을 주장함으로써 데리다는 소쉬르와 파이크의 관계의 건전한 뿌리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짓고 있다.





1) 이 승종, “의미와 해석에 관한 콰인, 데이빗슨 논쟁,” ‘철학’, 39집, 1993, pp. 325-358.

2)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개에서 50개 사이의 분절적 음소를 가진다. 이들은 말에서 잇따라 나오는 소리로서, 들에서는 서로 잇따라 나오는 글자에 의해 재현된다. 또한 음소의 다른 범주가 있는데 초(超)분절적 음소가 그것이다. 이는 음높이, 강세, 연접의 뚜렷한 패턴을 말한다. 이 패턴은 소리마디에 끼워 놓여지지는 않지만 소리의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생성되며 일반적으로 글에서는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의 논의를 자의적으로 분절적 음소에 국한하기만 한다면, 구조주의가 일종의 원자론이라는 몰(Moles)의 논의에는 타당성이 있다.

3) 버나드 해리슨은 “경험주의적 의미론”에 대한 (분명 매우 필요한 ) 대안으로서 그러한 의미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구조주의자로서는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은유 역시 (그가 명쾌하게 주장하고 있는 )관습과 의도의 구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언어적 장치”로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틴에 대한 스탠리 피쉬의 비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우리는 오스틴의 출발점이 불안정하다는 데리다의 논평에서 썰(searl)이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취할 점이 많다고 본다. 오스틴에 대한 썰의 비판은 그의 논문 “Signature Event Context"와 그 이후에 전개된 썰과의 논쟁을 참조하면 된다. 데리다는 오스틴의 ”진지한 언어 행위“의 요구에서 그가 서구 형이상학의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것과 똑같은 이성중심주의적 현전(現前)의 열망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오스틴은 화자가 말하는 바를 의미할 때 자신의 발언에 현전적으로 관계 맺고 그 의미를 충실하게 의도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즉 우리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의 표현이 은유가 아니라 무의미한 것으로, 혹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은유로 간주되어지는지는 중요한 문제지만 이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여기서 접어 둔다.

6) ‘논고’의 독자 중 이 작품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지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예외는 브라이언 맥기니스인데 그 조차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주장을 통해 ‘논고’를 일종의 수사법적 작품으로 볼 것을, 즉 은유에 접근하는 식으로 이 작품에 접근할 것을 말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다. 이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함축하는 바를 살펴보는 작업은 전인미답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