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과 철학(박병철)

나뭇잎숨결 2012. 11. 16. 12:27

비트겐슈타인과 철학


박 병 철(부산외대)
Wittgenstein on Philosophy
Byong-Chul Park


【주제분류】언어철학, 철학론
【주 요 어】비트겐슈타인, 철학관, 논리, 논리적 형식, 문법
【요 약 문】이 논문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을 해명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후기 철학을 통해서 일관되게 철학을 과학과 구분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분을 통해서 철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은 곧 과학의 영역이며,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분석을 통한 언어의 명료화를 통해 유의미한 명제들을 구별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적 명제들의 위치를 확보함과 동시에 철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도 현상에 대한 순수하고 본질적인 기술보다는 다소간 그 본질이 왜곡되더라도 단순화를 꾀하면서 현상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과학(물리학)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철학의 기능과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철학의 활동을 문법적 탐구라고 불렀다.


1. 들어가는 말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인 철학의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로 철학을 했다. 이것은 그를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게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의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데도 일조했다. 전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작인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만 해도 독특한 문체는 그 내용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전통적인 책쓰기와 읽기에 익숙한 독자들은 목차도 없고, 장과 절의 구분도 없으며, 특정 주제에 대한 논증조차 결여된 이 저작들을 처음 접하고서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왜 그러한 스타일로 철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길이 될 것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의미의 저술을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스타일로 철학을 한 것은 분명히 그가 생각한 철학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가 철학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면, 그의 철학의 스타일의 특이성의 문제와 그로 인한 그의 철학의 난해함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2. 과학과 철학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대해서 독특한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은 이미 ?논고?에서부터 철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먼저 ?논고?에서 주목할만한 철학에 대한 언급을 몇 개 살펴보자.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4.111 철학은 자연과학의 일부가 아니다.
(‘철학’이란 말은 그 위치가 자연과학 옆이 아니라, 그 위나 아래에 있는 무엇 을 의미해야 한다.)
4.112 철학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를 목적으로 한다.
철학은 일군의 이론(dontrine)이 아니라 활동(activity)이다.
철학적 작업은 본질적으로 해명(elucidation)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은 ‘철학적 명제들’로 귀결되지 않고, 명제들의 명료화로 귀결된다.
4.113 철학은 자연과학의 영역에 대한 논란들에 한계를 긋는다.
4.114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긋는다.

위의 인용문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과학과 구분짓고 있으며, 그러한 구분에 따른 역할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이 과학의 일부가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의 구분에서 이끌어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가 4.116과 ?논고?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곧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이기도 하다. 페어스의 지적과 같이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하는 것은 곧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서 과학의 영역인 반면, ‘말할 수 없는 것’, 즉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 외의 모든 언명들이다. 물론 철학은 후자에 속한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의 영역을 확보함과 동시에 철학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바꾸어 말해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철학에 대한 논의는 과학에 대한 그것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을 과학과 구분하고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논고?에서 그가 과학과 무관하게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을 보인 곳도 있어 보이기는 한다. 일례로 서문에서 ?논고?의 성격을 논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믿기에, 우리 언어의 논리가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앞서 인용한 4.0031과 더불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사를 언어비판이라고 단순화시키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서문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결국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영역인 과학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영역을 구분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4.0031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서 그는 러셀이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이 진정한 논리적 형식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면서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다”라는 4.01의 그림이론의 아이디어로 이어가고 있다. 명제가 실재의 그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사실에 대한 진술--즉, 과학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소위 명제의 그림이론이라는 것은 오해된 언어의 논리를 명료화하는 과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것이지만, 결국 과학의 영역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셈이므로, ?논고?에서 그의 관심사가 단순히 언어비판에만 독립적으로 국한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비판의 과정은 곧 사실에 대한 참된 진술의 집합인 과학적 지식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과학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하면서 철학을 과학과 구별하고, 철학의 목적은 명제의 명료화라고 하면서 종래에 철학이 다루던 대부분의 내용을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고 한 것은 그가 철학의 과학화를 꾀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과학적 세계관에서 철학을 바라본 철학자라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비엔나 써클의 구성원들이 1920년대 초에 ?논고?를 그들의 바이블처럼 여기며 강독한 사실은 그들이 한때 비트겐슈타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석할만한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적 세계관을 채용하고 그런 입장에서 철학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과학에 대해서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입장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과학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기보다는 반과학주의적 입장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책은 이 책이 씌어진 정신과 공감하는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 내가 믿기에 이것은 유럽과 미국의 주류가 되는 정신은 아니다. 이 문명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산업, 건축과 음악에, 파시즘과 사회주의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나에게는 외래적이며 이질적인 것이다. (중략) 전형적인 서구의 과학자들이 나의 작품을 이해 혹은 인정하든 말든 내겐 똑같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경우에든 내가 저술하고 있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은 ?철학적 언명?(Philosophical Remarks)의 서문의 초고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정신은, 과학자들이 그의 저작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과학의 정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비트겐슈타인이 반과학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의 철학을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보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생전에 ?언명?을 출판하지 않았고, 사후에 나온 ?언명?의 서문도 위에 인용한 초고의 내용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위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던 것은 틀림없다. 다음과 같이 지속적으로 유사한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인간성의 종말의 시작이고, 위대한 진보의 관념은 진리는 궁극적으로 알려지게 되리라는 것과 더불어 환상이며,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좋거나 바람직한 것이 전혀 없으며, 그러한 것을 추구하면서 인류는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믿음은 어리석지 않다.

나는 과학적 물음들을 흥미롭게 느낄지 모르지만, 과학적 물음들은 나를 사로잡은 적은 없었다. 오로지 개념적이고 미학적 물음들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근본적으로 나는 과학적 문제들의 해결에 관심이 없다.

?문화와 가치?에 따르면, 첫 번째 인용문은 1947년의 노트북에서 발췌된 것이고, 둘째 것은 1949년에 씌어진 것이다. ?언명?의 서문 초고가 1930년의 생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트겐슈타인의 과학관은 그의 철학적 생애를 통해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가 과학의 물음들이나 그 해결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진단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고?에 제시된 철학에 대한 입장과 관련하여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고, 과학의 성과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면, 그는 왜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은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영역과 동일시하고, 그러한 과학과 철학의 구별을 통해서 철학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의 답을 위해서 ?논고?를 다시 자세히 살피도록 하자.

3.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강제된 것
비트겐슈타인이 명제의 그림이론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명제는 사실을 표상한다. 그것은 크게 볼 때 언어가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의미한 언어는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사실적 언어, 즉 명제들이 나타내는 바는 우연적(contingent)인 것이다. 이는 언제나 반드시 참 또는 거짓이 되는 그런 명제들이 아니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언어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그림이론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렇게 유의미한 명제들로 이루어진 사실적 언어, 과학적 언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적 언어를 세계를 기술하는 본질적인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과학적 언어의 불완전한 성격을 보여주는 예는 ?논고?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6.342 (전략) 뉴튼 역학으로 세계를 기술하려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서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가능한 정확한 방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세계가 역학의 한 체계보다는 다른 체계로 더 단순히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세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듣게 된다.
6.343 역학은 우리가 세계를 기술하는데 필요한 모든 참인 명제들을 하나의 계획에 따라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6.371 세계에 대한 근대적 개념 전체는 이른바 자연법칙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 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6.372 따라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거에 신과 운명에 대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무엇으로 여겨서 자연법칙에 대해서 생각하려 들 지 않는다.

6.342가 보여주는 것은 과학적 언어가 세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하나의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언명에서 보듯이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분명 절대적인 도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과학을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으로 여기고 있다는 비판이 6.372로 이어지고 있다. 과학적 언어의 세계와의 관계는 이처럼 선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유의미하게 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성격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적 언명들은 무의미하게 된다는 언급은 결코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영역을 제거해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실로 언어와 세계를 이어주는 근본적인 틀 또는 구조가 있다는 생각은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기본 전제이며,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논제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의 근본적인 틀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체계에 주어지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강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어진 구조, 강제된 틀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논리학의 명제들은 과학의 명제들과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공리나 정리들은 사실에 대한 진술은 아니지만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는 논리학이 다루는 명제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논리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는 문장들은 이미 사실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공리와 같은 항진명제들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문장들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면, 그런 문장들은 무의미한 문장들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 역시 ?논고?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핵심은 논리는 모든 경험에 앞선다는 것이다. 즉 논리학은 과학처럼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논리란 ‘논리적 형식이 주어진다는 것’과 ‘요소명제들은 진리함수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때 논리적 형식은 대상과 함께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다. 다만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과 과학에 대해서 강조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점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지는 논리적 명료화를 통해 유의미한 명제들을 무의미한 문장들로부터 구별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적 명제들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논리적 명료화의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형식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라는 점이며, 이점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으므로 간접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서 논리적 틀이 강제된 틀이라는 것은 논리라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리는 모든 경험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이다(5.552). 이때 논리와 경험과의 관계는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매우 묘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으로 아래에 인용하기로 한다.

5.552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은 어떤 것 또는 다른 것이 사태(state of things)라는 경험이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이 아니다.
논리는--어떤 것이 그렇게 존재한다는--모든 경험에 앞선다.
그것은 ‘어떻게?’라는 물음에 앞서는 것이지만, ‘무엇?’이라는 질문에 앞서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논리를 통해서 어떤 대상이나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대상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어떠한 사실을 이루게 될 것인지는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무엇?’과 ‘어떻게?’라는 물음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다.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아 프리오리(a priori)하게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논리학이 다루지도 않고 다룰 수도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왜 시야의 한 위치에서 동시에 두 개의 색을 경험할 수 없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논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세계의 대상들은 어떠 어떠하게 결합하여 어떤 사실은 가능하게 되고 또 어떤 사실은 불가능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은 논리에 의해 아 프리오리하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러한 가능성을 규정하는 논리적 형식은 우리의 직접경험에 대상이 주어짐과 동시에 주어진다는 그의 입장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경험은 우리가 말하는 일상적 의미의 경험과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논리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서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든 참인 논리적 명제들에 대한 기술을 미리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논리학에는 놀라운 일(surprise)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한다(6.125-6.1251). 보존의 법칙에는 아 프리오리한 믿음이 있을 수 없지만, 논리적 형식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 프리오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6.33). 그렇다면 논리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우연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르게 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고, 또한 그러한 논리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대상의 논리적 형식이 대상의 경험과 동시에 주어진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첫째는 논리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강제된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이러한 논리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이해 또는 인식하는 가능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분명 어떤 명제가 어떤 사실과 일치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의 그러한 특성을 소리 높여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국 나는 그가 과학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철학의 특성을 규정하려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철학과 현상의 기술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의 문법이 논리적 구조를 감추고 있어서 철학적 문제들이 일어나며, 만약 우리가 논리적 구조에 대한 명료한 표상을 가져다주는 표기법(symbolism)을 가질 수 있다면, 모든 철학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점에서프레게와 러셀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겠지만,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철학의 과제는 불명료한 혼란스런 표현들을 기호언어에 의해 명료하게 바꾸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1929년을 기점으로 하여 변화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부터 1935년에 걸친 중기 저작들을 통해서 ?논고?의 핵심 아이디어였던 논리적 원자론과 진리함수론을 주축으로 한 언어관을 포기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이른바 언어게임 이론으로 발전되는데, 과거에 그가 강조했던 논리적 형식 대신에 중기 이후에는 ‘문법’(grammar)이라는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논고?에서 논리적 형식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였는데,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문법을 채용하면서 논리적 형식이 가졌던 단일성에서 벗어나고 있다. 바꾸어 말해, 그가 말하는 문법이란 과거에 논리적 형식이 했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되,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이름이 대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요소로서의 논리적 형식과 같은 단일성에서 벗어나서 색채에는 색채의 문법, 음향에는 음향의 문법과 같이 다양한 현상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개념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감추어진 논리적 구조를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이상적 표기법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문법에 의해 논리적 형식이 대체된 중기 이후의 철학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변화했는지가 궁금하게 된다. 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분명히 전기 비트겐슈타인과는 내용상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가 논리적 형식 대신에 문법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게 되었듯이, 철학의 주요 관심사도 언어에서 이상적인 표기법의 구축 대신 문법적 탐구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제 중기 이후에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철학적 문제들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의 109-133절에서 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비록 ?탐구?에 담긴 내용의 상당 부분은 1936년 이후에 씌어져서 이른바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고 있지만, 철학에 대한 입장이 담긴 109-133절의 대부분은 그의 중기에 해당하는 1933년에 씌어진 것이다. 이른바 「대타자본」으로 알려진 TS 213에는 “철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챕터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미 그곳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최종적 입장은 정리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타자본」에서 그는 우리가 자연과학의 문제들은 실제적인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반면, 철학적 문제들은 실제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내에서 특정한 유추를 함으로써만 마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언어의 잘못된 사용과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역시 철학을 자연과학과 구별하여 다루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특정한 유추’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인용해 보도록 하자.

언어는 세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은 유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언어는 그저 우리가 다르게 상상할 수도 있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누군가 ‘모든 것은 유전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실제의, 실제의 실재(the actual reality)를 규명하는데 방해를 받는다고 느낀다.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계속되고 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술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 것과 다른 무엇일까? 그 기술은 스크린 위의 그림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이러한 무력한 느낌의 바닥에는 잘못된 그림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잘못된 그림이란 너무도 빨리 움직여서 우리가 지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그런 필름조각 위의 그림이 아닐까?

이 인용문은 난해한 유추를 포함하고 있다. 도대체 언어가 세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모든 것은 유전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를 명확하게 잡아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언어가 세계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연적인 것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가 우연적인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이어서 언급하고 있는 스크린과 필름의 메타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메타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것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붙잡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기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기술이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 되묻고 있다. 여기서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것 또는 그림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실로 영화관의 스크린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모든 것이 유전한다’는 말은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경험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진짜 문제는 그러한 변화하는 것을 기술하는 방법에 있다. 그렇게 쉼 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세계를 기술할 수 있을까? 그는 기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과연 그러한 기술이 진정 경험의 세계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인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기술 또는 그림은 잘못된 그림이라고 보고 있다. 필름 조각 위의 그림이 바로 우리의 기술일텐데, 그것은 결코 빠르게 쉼 없이 움직이는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내용의 정확한 묘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위의 난해한 인용문에 대한 이러한 나의 해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대타자본」에서 인용한 위의 문장들은 사실은 그 보다 4년 전에 씌어진 ?언명?에서 이미 대부분 언급한 것들이다. ?언명?과 더불어 시작된 1929년 이후의 중기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은 현상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기에서는 논리적 형식이라는 단일한 매개체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현상을 그대로 투명하게 표상하는 표기법이 바로 ?논고?에 제시된 이상언어다. 그러나 중기저작에서 보듯이 그는 그러한 투명한 표상 방법에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 필름과 스크린에 비친 영상에 대한 비유에 의해 잘 나타난다. 이 필름 메타포를 통해 그가 보이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그 언어가 기술하는 세계와의 관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끊임없이 흘러간다. 우리의 경험 내용은 순간 순간을 느끼게 되어있어서 흘러가는 그 내용을 잡아 둘 수가 없다. 눈을 뜨면, 시시각각으로 감각의 데이터들이 시각경험에 들어온다. 이것은 마치 스크린 위에 비친 영상의 세계와도 같다.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하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듯이 스크린은 망막에 비친 상(像)과 같은 역할을 한다. 데이터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크린의 영역에서는 끊임없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조금 전에 스크린에 비쳤던 영상을 보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스크린 위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들이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영사기에 물려있는 필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필름에는 현재만 있다고 할 수가 없다. 필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도 아니다. 필름에는 지금 영사되는 장면과 바로 전에 영사된 장면, 그리고 곧 이어서 영사될 장면들이 공존한다. 하나의 장면은 다른 장면들과 함께 이웃을 형성한다. 이는 곧 현재, 과거, 미래가 모두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크린의 경우 언제나 지금뿐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비트겐슈타인은 스크린 위에 일어나는 것을 잡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반면 필름의 경우는 다르다. 필름에서는 한 컷 한 컷이 모두 다른 장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현재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이전 장면은 분명 지금의 장면 보다 과거의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는 필름을 되돌려 봄으로써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로 이 확인 작업이 비트겐슈타인이 ‘검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크린 위에서 유전하는 것에 대한 확인 또는 검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사기의 필름에서는 확인 또는 검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사기의 필름을 앞뒤로 돌리면서 확인하는 것은 공적인 검사이며, 이러한 검사에는 시간성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시간적인 것이다. 언어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기호와 음성으로 이루어지는) 언어는 물리적 체계인 것이다. 반면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경험 내용--은 비시간적이다. 경험의 데이터는 우리의 마음속에 쉴새없이 들어온다. 유전하는 이 데이터에는 끝없는 현재만이 계속된다.
결국 세계의 본질은 스크린에서 나타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의 연속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그러한 유전하는 세계의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영사기에 물린 필름의 경우와 같이 언어를 통해서 그러한 유전하는 세계를 담아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는 이른바 물리적 언어다. 결국 시간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는 과학이 도구로 이용하는 물리적 언어를 세계를 기술하는 매개체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대안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 장치에 의해 운용되는 물리적 언어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변화하는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을 가장 그럴듯하게 표상하는 매체가 필름인 것과 같다. 문제는 필름은 가장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결코 스크린 위의 상들을 왜곡 없이 그려낸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언어인 물리적 언어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가장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물리적 언어를 채용하지 않는다면 필경 우리는 유아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결국 물리적 언어는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나 그것은 좀 불만족스럽지만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대안일 뿐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세계를 왜곡 없이 그려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물리적 언어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언어이지만, 언어는 세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그가 철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분명히 해준다. 가능한 유일한 언어는 우리의 일상언어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언어는 물리적 속성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언어요 과학의 언어다. 일상언어는 과학의 영역에 국한된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다양한 일상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다. 그러나 그것이 물리적 속성의 지배를 받고 또 과학이 다루는 언어라고 할 때, 결국 세계와 언어와의 관계는 그러한 언어를 매개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왜곡됨 없이 순수하게 표상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고?에서의 언어는 물론 과학의 언어로 대표되었고, 거기에서도 완전한 표상은 아니었다. 중기 비트겐슈타인에서는 이제 ?논고?의 언어관을 버리고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총체가 과학이 다루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언어는 물리적 언어이며, 그 유일한 대안은 우리를 세계와 이어주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세계에 대한 완전한 표상은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고 하는 일은 철학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철학은 바로 그러한 일상언어의 유통의 뒷전에서 문법의 후견인으로서 언어의 명료화를 꾀하는 작업이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후견인으로서 철학은 실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이 다하지 못하는 일을 철학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며, 과학과 구별되는 철학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철학은 과학과 기타 제반학문과는 그 성격이 분명히 대비되는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 철학과 문법
결국 성숙한 철학자로서의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견지한 철학에 대한 입장은, 현상에 대한 순수하고 본질적인 기술보다는 다소간 그 본질이 왜곡되더라도 단순화를 꾀하면서 현상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과학(물리학)과의 대비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철학의 활동을 문법적 탐구라고 불렀다. 과학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개념에 의존하는 언어로서 대상을 시공의 틀에서 이해한다. 그것은 현상을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왜곡이 불가피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일상언어는 그러한 물리적 언어이며, 따라서 언어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관적인 상황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철학의 길은 어쩌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철학은 과학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의 언어의 배후에서 그러한 과학적 탐구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논리적 형식에 대한 탐구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던 ?논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제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과학적 탐구의 임무인 설명 이전에, 즉 경험적인 관심과는 별도로, 이러저러한 문제들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문법의 탐구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현상을 관통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탐구는 현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으로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우리의 탐구는 따라서 문법적인 것이다. (?탐구?, 90절)

즉 과학이 현상에 관한 학문이라면, 문법적 탐구인 철학은 현상의 가능성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반면, 철학은 현상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철학을 과학과 구별하여 설명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시도는 ?탐구?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고찰이 과학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것은 참이었다. 우리의 선입관과는 반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그러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가능한 관심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고찰에서는 어떠한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든 설명을 제거하고, 기술만이 홀로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은, 말하자면 그 목적에서,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그 빛을 얻는다. 물론 이 문제들은 경험적인 문제들이 아니다. (?탐구?, 109절)

위의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관심사는 과학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의 주요 역할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을 꾀하며, 그 과정에서설명의 단순화를 위해서 가설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철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설명을 꾀하거나 가설적인 것을 채용하지도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경험적(empirical) 탐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철학은 무엇을 설명하거나 연역해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철학은 과학에서 탐구하는 모든 새로운 발견과 발명 이전에 가능한 것에 대한 학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이 다루는 경험적 탐구가 아니라 경험적 탐구를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철학적 탐구를 문법적 탐구라고 보았으며, 그러한 탐구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비트겐슈타인이 문법 또는 문법적 탐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 명확하게 문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파헤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형식)에서 발전되어 나온 개념임은 틀림없어 보이므로 그 점에 주목하여 논리와 문법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고, 그로부터 각각의 개념이 철학과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3절에서 논한 바와 같이 ?논고?에서 논리적 형식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논고?에서는 논리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논리는 주어지는 것의 영역에 속하며 진리함수적 결합사라는 것도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한 논리와 더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를 명료하게 표상하는 이상적 표기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탐구?에서의 문법은 그러한 주어진 것의 영역에서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문법을 강제적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다. 왜냐하면 문법은 논리처럼 정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참여하는 언어게임의 맥락에서 그 규칙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형식이 명제의 의미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역할을 했듯이 문법이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언어게임이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단어나 명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논리적 형식에 의존할 수는 없고, 언어게임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법의 규칙은 임의적(arbitrary)이며, 우리에게 강제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문법의 규칙이 임의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실재(reality)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실재의 기술이 논리적 형식을 내재하고 있는 실재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이제 문법의 규칙이란 것은 그렇게 실재와 타이트한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명제와 사실이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고 그 관계를 지배하는 논리적 형식을 사실을 구성하는 대상에서 찾았던 그림이론에서는 논리적 분석이 중요했지만, 그러한 엄밀한 대응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언어게임론에서는 명제와 사실의 관계는 느슨하게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문법의 규칙은 고정적이라기보다는 언어게임의 맥락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결국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철학이 할 일은 우리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 명제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강제되고 단순하게 적용되는) 논리적 형식에 대한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이상적인 기호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던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는 우리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 철학은 명제의 가능성의 틀이 되지만 다양성을 가지고 언어게임을 통해 임의적으로 적용되는 문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6. 맺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성숙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로 여겨지는 ?탐구?에 주목하여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철학의 임무는 일종의 치료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했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는 병을 다루는 것처럼 문제를 다룬다(?탐구?, 255절)고 말하며, 하나의 철학적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치료법들이 있는 것처럼, 실로 방법들이 있다(?탐구?, 133절)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적 혼란에서 연유하는 질병에 걸려있으며, 따라서 철학의 진정한 임무는 그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적절한 치료법의 하나로서 과거의 어떠한 철학적 이론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대적인 이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목적을 위장된 무의미에서 명백한 무의미로 넘어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탐구?, 464절)이라고 한 점이나, 철학적 문제들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늘 알고 있던 것을 정돈함으로써 해결된다고 한 점 (?탐구?, 109절)등이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여러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이러한 문맥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언어의 혼란(질병)을 해소(치료)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적절한 치료법으로 철학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해야 함을 보여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활동을 함에 있어서 평생동안 도망치지 못한 굴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가 건드린 모든 철학적 문제는 사실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역시 이 문제와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논고?에서 그가 과학과 철학을 비교하면서 철학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아마도 과학의 문장들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 언어비판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서 드러난다. 언어가 세계를 표상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언어가 표상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은 곧 과학적 지식이다. 따라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의미의 가능성은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나 다름이 없다. 단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연구인 반면, 철학은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연구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는 언어가 물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의 문제들이 언어의 혼란에서 나왔다는 지적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세계에 대한 명료하고 적절한 표상체계로서의 언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편 언어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결국 ?논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관계에 대해서 다루는 일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떠한 이론도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서만 적절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좋은 이론이 나온다 해도 그것은 결국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언어를 통한) 설명의 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취한 최종적 태도는 문법적 탐구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실행되고 있는 다양한 언어게임에 참여하면서,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가의 문제에 부딪침으로써만이 철학은 그 임무를 다하는 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