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혔지만, 글쟁이들은 열하일기에 열광했다

나뭇잎숨결 2012. 11. 13. 13:59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혔지만… 글쟁이들은 열하일기에 열광했다

  • 김탁환 소설가

    입력 : 2012.11.12 03:03

    서른한 번째 작품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명사 101명 추천 도서 목록은 chosun.com
    김탁환이 읽은 '열하일기'
    슬쩍 낀 사절단에서 5개월 淸 여행 왕이 직접 문체 거론, 금서로 지정
    밀착·후퇴 자유자재… 탁월한 관찰 "있어야 할 미래에 대한 전망과 포착"

    김탁환 소설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각자의 여행을 글과 사진과 그림, 때론 동영상으로 블로그에 담는 것이 가능한 시절이 됐다. 연암 선생이 21세기에 태어나서 디지털 환경을 접하였다면 어떤 식으로 여행기를 만들까.

    여행 블로그의 다채로움과 '열하일기'의 다채로움은 차이가 크다. 여행 블로그는 콘텐츠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틀을 블로거가 취사선택하여 이용한다. 그 틀을 벗어나는 작업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열하일기'의 다채로움은, 글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정조시대 고정관념을 뛰어넘었기에 가능했다. 거기엔 쓰면 안 되는 대상도 없고 쓰지 못할 문체도 없다.

    조선과 청나라를 오간 이들이 남긴 '연행록'이 적지 않다. 연암 선생과 교유한 백탑파(白塔派) 중에도 홍대용이 '을병연행록'을 썼고 박제가가 '북학의'를 남겼다. 이 많은 연행록 중 왕이 그 문체를 거론, 금서로까지 지목된 책은 '열하일기'가 유일하다. '열하일기'만 왜 유독 위험한 작품이 되었는가에 대해선 조선후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의 쟁론이 이어지고 있다.

    연암 선생이 주도한 백탑파를 중심으로 장편소설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소설 장르로 '추리'를 택했다. 구성원들이 모두 남다른 관찰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저술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탐정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자질이다.

    '열하일기' 역시 연암 선생의 관찰력이 빛나는 책이다. 이국 풍광이나 조선에는 없는 물건, 유교적인 규범을 훌쩍 뛰어넘은 인물 묘사들도 일품이지만, '요술놀이 이야기(幻戱記)'부터 먼저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정지된 대상이 아니라 요술쟁이가 청중 앞에서 요술을 부리는 동작이 꼼꼼하면서도 물 흐르듯 담겼다. 연암 선생의 문장을 따라서 각기 다른 요술들을 부려보고 싶은 충동까지 생길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다.

    남다른 관찰력과 부지런히 메모하는 습성만 있다고 '열하일기'와 같은 여행기가 탄생하진 않는다. 수십 장의 사진과 동영상만 나열된 여행 블로그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연암 선생은 열심히 관찰하고 꾸준히 메모하면서 또한 마음껏 느끼고 깊이 깨달았다. 느낌과 깨달음에 따라 '열하일기'의 구성과 문체가 다양해졌다.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의 우위를 따지는 대신, 이 느낌과 깨달음에 적확한 문체라면 편견 없이 가져와서 썼다. '열하일기'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논설도 있고 인터뷰도 있고 일기도 있고 수필도 있다. 당시 유행하던 모든 문체가 총동원된 놀랍고도 기이한 책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늘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 책이 일정한 높이와 각도로 여정을 담은 기록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폭과 높낮이가 너무나도 다른 글의 연속인 탓이다. 낯선 문물에 집착하여 시야가 협소해지는 보통의 여행객과는 달리, 연암 선생은 적재적소를 찾아 밀착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한순간도 적당히 넘어가는 대목이 없으니 읽는 이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열하일기'를 읽는 묘미는 연암 선생이 청나라에서 무엇을 보고 누구와 만났느냐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만약 내가 이런 사건이나 인물과 마주친다면 어떤 글로 옮길까 하는 고민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과 '열하일기' 사이에 놓인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것은 '왕오천축국전'처럼 단정하게 압축하기도 힘들며, '열하일기'처럼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과 나의 교감을 거기에 딱 맞는 문장으로 담기도 힘들다는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열하일기'가 등장했을 때 조선의 젊은 서생들은 열광했다. 이 책은 '조금 특이한' 연행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틀로는 가둘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광야의 작품이다. 유교적 틀을 강조한 이들에게는 '열하일기'에 담긴 도저한 자유로움이 불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글로 삶을 재단하지 않고 삶에 딱 어울리는 글을 찾아 헤매는 자유로운 여행자, 그이가 곧 연암 선생인 것이다.

    낯선 시공간으로의 이동은 일상에 찌든 나 자신을 흔들어댄다.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려는가. 공책을 펼치고 느낌을 적으려는가. 디지털 기기에 의지하여 영상을 담으려는가. 여행기 혹은 여행 블로그를 남기겠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먼저 '열하일기'부터 읽어볼 일이다. 거기, 여행이라고 하는 움직이는 삶의 축제를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기록한 이정표가 담겼다.

    140자 트윗독후감

    "곧 제 아기가 태어납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 연암이 얘기하듯 '저절로 터져나오는' 탄성 같은 울음을 터뜨릴 겁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나오는 그 울음은, 슬픔에 국한된 감정이 아니라 요동벌판처럼 넓은 세상을 향한 힘찬 감정 때문이겠지요? " (트위터 응모자 tough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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