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방 문 벽 들 장 몸 길 물
-파편 자전 : 공간
최윤,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문학과지성사, 1999
집
어두웠겠지. 너는 먼 바다에 떠 있는 부표처럼 눈을 감고 하루 종일 작은 밀썰물의 애무를 느낀다. 부표인 너는 멀리 갈 수 없고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깊이의 물 속에서 처럼 당황할 필요도 없다. 너는 가끔 사지를 움직이고 눈을 감은 채 밖의 세상에서 들려오는 멀 고도 부드러운 웅얼거림을 듣는다. 거세고 모서리 날카로운 세상의 소리는 무한히 궁글려져서 내 장 근육의 조화된 협화음 속에 흡수된다. 너는 기다린다. 어둠 속의 느린 유영과 침묵의 귀기울임 을 변주하면서.
유방처럼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 사이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 그 금빛을 받으며 내려와 너의 어머 니의 품에 안겼다는 두꺼비의 태몽을 너는 믿지 않는다. 두꺼비라니! 자궁으로부터 타고난다는 운 명과 운명에 연관된 설화를 너는 믿지 않는다. 가끔 너는 탄생 이전의 그 어두운 시간대로 내려 가본다. 네가 움츠리고 기거했던 너의 어머니의 어두운 복부 속으로. 모든 상상력이 그곳에서 멈 춘다.
언젠가 어떤 무녀가 말했다. 너의 생시(生時)와 이름을 댔을 때, 여인은 주어도 목적어도 밝히지 않은 단문으로, 단지, “빨리 쏟았다”, 고 말했다. 너의 어머니의 분만 전의 고통이 시작되어 산파를 부르러 가는 발길이, 네 고향이 된 돈암동 집의 대문을 채 넘기도 전에 너는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세상에 서둘러 나 오고자 한 너의 조바심, 너는 그것만은 믿는다. 어머니의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하기 위한 너의 최 소한의 배려를.
어머니. 너의 원초적 셋집의 주인, 그 여인에 대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의 삶 전체에 걸쳐 네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고심했으며, 네가 만난 사람 중에 너의 가장 큰 호기심을 불러일 으킨 여인. 그렇지만 너는 그녀에 관한 한 아직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 아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버지니아 울프가 어느 날, 단번에, “봇물이 터지듯이” 그들 부모에 대한 글, "등대에서"를 썼다고 했다. 언제 그런 폭풍 같은 시간이 다가올 것인가. 너는 말할 수 없다. 어 머니에 관한 한 너의 어떤 생각도 이성적일 수 없다. 이제는 기억의 왕국으로 은둔해버린 그녀를 꿈에서 만나는 날, 너의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어느 날, 그녀가 남긴 바바리코트의 주 머니에서 너는, 퇴색할 줄 모르던 노년의 동심이 주워넣었을 작고 매끄러운 조약돌 하나를 발견 했다. 그녀처럼 만란한 풍경을 너는 본 적이 없다. 너는 그녀가 우물가에서 기울인 물항아리에서 악을 다투어 쏟아져나오는 물 입자의 이동으로 너의 출생을 기억한다.
방
너의 방은 네게 간이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상에서 들어와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그런 간이역.
그렇지만 방 한칸을 얻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를 너도 가지고 있다. 누구나 방을 통해 한 나라의 경제사를 겪는다. 모든 식구가 다 머물던 방이 있다. 그리고 형제들과 나누어 쓰던 방, 그리고 혼 자만의 방. 다락방이 있고, 구석방이 있으며, 정상적인 방과 제법 큰 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너의 부모집의 방이 있고, 이국의 월셋방, 혼자 사는 셋방이 있으며, 너의 소유의 작은 방.
네가 다락방을 너의 공간으로 점령하던 시절, 그때 너는 방에 집착했던 것 같다. 라면상자 가득 만화를 그리던 때였고 가끔 방이 있었으면 만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너의 어머니 는 다락정리를 하면서, “내가 딸을 헛키웠다. 그렇게 만화를 못 그리게 했는데 다락의 박스마다 만화가 가득하다. 내 딸 이라도 이렇게 만화만 그리고 있는 줄 몰랐다”, 고 배반당한 사람이 하는, 하늘 무너지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너는 자는 척하면서 역시 무 너지는 듯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래도 집안에 사람이 없을 때면 다락으로 기어올라갔고, 낮은 천장 때문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그리는 만화 속의 이야기는 아주, 아주 슬픈 멜로 드라마였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이 헤어져 살게 된 형제, 얼굴의 커다란 반점 때문에 자식을 볼 권리도 없이 내쫓긴 여인, 다이아몬드 모양의 눈 물을 흘리는 공주, 쓸쓸히 고향을 떠나는 어린 고아소년. 너는 긴 머리 소녀의 옆얼굴, 우산을 쥔 손(손은 늘 잘 살려내기가 어려웠다), 진주알 세 개를 잇대어 그려지는 소녀의 큰 눈망울, 머리를 틀어올린 여인의 뒷모습과 완만한 목선, 꽃바구니, 소년의 머리카락, 파도 곡선 무늬로 뒤덮인 의 자…… 이런 만화에 들어갈 세부를 다락방에 올라가기 전에 연습한다. 다락방에서는 빨리 그렸어 야 했으므로.
사춘기 시절, 너는 방이 필요하지 않았고, 방에 머무른 적이 없기에 방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때 는 익명의 방들이 있다. 빈 교실, 음악감상실, 영화관과 도서관, 남산에 있던 친구의 방과 거리의 방.
프랑스 유학 초기에 아이들을 돌봐주는 대가로 얻어들어 있던 지붕 밑 방은 어릴 때의 다락방과 는 대조적으로 천장이 아주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만화가 지망 시절의 다락방을 생각나 게 했다. 명륜동2가의 집, 창경원 담 밑에 붙어 있던 방, 문에 군용 담요를 쳐두고 백열등 아래에 서 표현주의 추상 유화를 흉내내던 그 외딴 방도 너는 일종의 다락방으로 기억한다. 다락방에 살 던 많은 사람들을 자세히 보라. 그들은 무언가를 열렬히, 특히 다가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열렬히 지망하던 사람들이다.
그 밖에, 너는 쓰는 일을 위해서 방이 꼭 필요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사람 이 많은 곳에서, 사람 속에 섞여 있을 때 너는 가장 자유롭게 썼다고 할 수 있다. 사람 속에서 절 정을 떠도는 너의 상상은 슬프게도 그때만은 실현 가능해 보인다. 군중은 너를 취하게 만든다. 주 위에 한눈팔고 있는 방심과 소음의 벽에 둘러싸여서 솟아나는 이상한 집중의 조화. 너는 다방이 나, 지하철 혹은 도서관 같은 곳은 물론이고…… 어쩌면 서서도 일할 수 있다.
방에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은 대충 이런 일들이다. 방이 필요한 것은 꼭 네 기운을 빼기 위 해서 세상이 무법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일기를 쓴다거나, 기운 이 빠지는 진짜 이유를 캐보기 위해서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오래 전에 죽은 문학 동업자들을 불러내어 용기를 얻는 비법을 전수받을 때도 방이 필요하다. 때 때로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조금 울거나 할 때도. 그런 데서 벗어나기 위해서, 꼭 그 러기 위해서만, 시도 아닌 시를 쓰느라. 이 시 아닌 시는 공공의 장소에서 써본 적이 없다. 그것 은 네 것이 되기에는 때로는 너무 진지하고 때로는 너무 유희적이다.
공문서를 쓰거나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전화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경우, 네게 제일 어렵고, 네가 제일 싫어하는 이런 일 또한 아무도 없는 방 안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너는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놀라운 유머감각을 기르고 있는 아주 평범한 주부를 알고 있다. 그것이 무서운 투쟁에서 나온, 존재를 잘 가꾸는 사람의 유머임을 알기 때문에 너는 비밀문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기분으로 그 사람에게 가끔 전화를 건다.
너는 최소한 하루에 오분 정도, 네가 “시간 농축하기”라고 부르는, 너 자신을 삼인칭으로 생각 해보는, 너 자신과의 일대일의 맞대면의 시간을 가져야 생존한다. 이 과정에서 희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너의 비극이란 드물다. 그러니 방은 필요하다.
네가 방에 대해 하고 싶은 사치는 단 하나. 언젠가 벽 하나 정도는 완벽히 비어 있는 방을 가져 보는 것. 그리고 사방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는 네 책들을 한 군데에 모아놓을 수 있는 방. 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한 방은 네게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만 두는 개인 도서 관이 있거나 " 너는 실제 여행지나 사진에서 본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의 모형 중 맘에 드는 부 분을 뒤섞은 소형 도서관의 설계를 해놓은 바가 있다. 그 설계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파리 북부 샹띠이 성(城) 내에 있는 도서관, 그 도서관은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며, 경제적으로 공간 을 활용했다 " 그렇지 않다면, 방이 아주 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큰 방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문
열린 문보다 닫힌 문이 더 많다는 것, 닫힌 문 악에서의 당황과, 닫힌 문 악에서의 스산함, 그 악 에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여유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열려져 있는 문도 다른 어떤 문보다 더 굳건히 닫혀 있다는 것도.
세살. 너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고 아래쪽에 유리창이 달린 문 저편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처 음으로 생명이 준비되는 아픔의 소리를 들었다. 네 바로 밑의 동생의 탄생. 아주 가깝고도 먼 미 닫이문. 겨울. 너는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그 문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어둡고 추운 툇마루와 문 저쪽의 신음, 그리고 그쪽으로 데려다달라고 보채는 너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요지부동으로 너의 몸에 밀착되어 있던 생소한 사람의 등.
너의 유년엔 거지들이 많았다. 그들의 유일한 생활집기는 철사줄이 매달린, 커다란 배급분유깡통. 유년의 한때, 국민학교 2, 3학년, 너의 귀가는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도 한참이나 지 나서, 거리에 행인이 드물 때에나 이루어졌다. 밤늦으면 밝혀지는 알전구 가로등은 노랗게 따뜻했 다. 가끔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절 입구의 사천왕처럼 과장되이 엄중해져서, 길어귀마다 나누어 맡고 너의 귀가를 지키고 서 있는 식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언니나 아버지 혹은 삼촌…… 또 이 따금 그 시간마저 훨씬 넘었을 때, 네가 만나던 것은 굳게 닫혀진 대문. 그리고 그 악에 동그마니 놓인 철사줄 달린 빈 분유깡통. 거기에는 이렇게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밖이 그렇게 좋으니 아주 나가서 거지가 되거라.”
시간의 저 깊이에서 펄럭이는 그 종이 쪽지는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 만 철사줄이 깡통에 부딪쳐서 내는 스산한 금속성의 소리였을 뿐. 그러나 너는 그 문구 없는 무 언의 엄명을 분명히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다른 어떤 글씨보다 더 선명하게 뇌리에 쓰여져있 기에.
왜 그랬을까. 닫힌 문 악의 그 깡통은, 알루미늄 갓모자를 비스듬히 쓴 당시의 가로등만큼이나 네 게 다정해 보인다. 아무런 것 없이 텅하니 비어 있는 닫힌 문보다, 분유깡통이 장식하고 있던 닫 힌 문은 그 경황중에서도 얼마나 유머가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가, 얼마나 네게 호의적이었던가. (그 깡통 중의 하나에는 날개 달린 아기가 엎드려 있는 그림이 있는데, 아마도 서울우유 깡통?)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너는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분유깡통의 삶을. 깡통을 보면 너는 늘 배가 고파온다.
프랑스 거지의 필수적인 생활집기는 값싼 포도주병이다. 적어도 네가 그 나라에 머문 70년대 말, 80년대 초에는. 혹은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 였을지도 모른다. 이들 중에는 자발적이거나 중독증세 로 인한 혹은, 소속을 거부한 잠적성 부랑자들이 많았다. 네가 살던 남불의 도시에도 매년 날씨가 따사한 3월초와 10월초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두세 달 노천에서 머물던 한 거지가 있었다. 너 는 거의 매일 그 사람이 누워 있는 역의 한 닫힌 문 악을 지나갔다. 오로지 그의 허물어진 모습 을 보기 위해 너는 그 길을 지나갔다. 아무리 애써도 너는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매번 같은 질문이 너의 조용한 일상에 불안정한 파문을 만들었기에. 무엇이 저 이를 저 자리에, 다른 누구에게서 잊혀지기에 악서, 자기 스스로에게 잊혀진 채 누워 있도록 만들었을까. 어떤 동질성의 느낌이 그를 보기만 하면 네 자신을 텅하니 비게 만드는가. 어떤 무서운 호기심이.
그의 발치에 놓인 포도주병이 채워진 것을 너는 본 적이 없다. 그의 갈증은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음을 너는 알고 있다.
70년대 초반, 대학 초년이자 유신 초기, 화가 난 너는, 너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던 너는, 창경원 담 밑의 화계에 외따로 지어진 방 안에서 약 1년간 문 위에 담요를 치고 지냈다. 가능했다면 나오고 들어갈 때마다 문에 각목을 박았을 것이다.
네가 닫고 열지 못하던 문도 있다. 너는 M서의 화장실에서 서너 장의 원고지를 잘게 찢어 변기 로 흘려 내보내느라 안에서 잠근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까짓! 하고 말 내용이었지만, 네가 관여 한 편집물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었던 학생이었던 너는, ‘순경음 ㅂ’에 대한 언어학 논문 속의 순경음 ㅂ을 불온한 암호로 보는 조사자와 논란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너를 가두고는 한동안 열려지지 않던 문도 있었다.
가끔 미닫이문이 열린 유년의 안방에서 부모의 대화소리가 들리곤 했다. 끝도 없는, 졸음을 억지 로 쫓으면서 귀기울이던 그들의 속삭임. 그 소곤거림 속에 등장하던 무수한 사람들, 얼굴을 모르 는 친척들, 돌아가신 분들의 세계,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이야기의 끝도 없는 원천. 때때 로 부모의 속삭임 속에 보이지 않는 문을 만들면서 섞이곤 하던 일본말.
겨울에 열리던 문도 있다. 너는 여섯살의 겨울에 우울의 맛을 알았다. 달콤하기도 하지만 무한히 너를 네가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불편하게 하던 그 어둡고도 끈적한 느낌. 적어도 네가 후에 알 게 된 또다른 무채색 단어인 절망이라는 말에 무한히 가까이 가는 어떤 것. 부모는 부재중이었고 너와 동생이 함께 앓던 홍역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날의 날씨는 불친절했다. 너는 동생 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냄새와 소리와 색깔에 이끌려. 그날 너 를 유혹한 것은 놀이의 웃음소리.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당시만 해도 명륜동 길은 네게 낯설었다. 아마도 일요일? 어느 골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란스런 웃음소리 쪽으로 너는 자 석처럼 끌려갔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조금 열린 철문을 활짝 열 만한 용기는 없는 채 그 악 에 오래 서 있었다.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 어른이 나왔고 문 밖의 추위에 서 있는 너와 동생을 안으로 들여놓았으며, 네 또래의 아이들이 놀고 있던 마당을 가로질러 쪽문을 통해 한 실내로 안내했다. 그곳은 교회였 으며 어른은 목사였고, 실내는 목사의 사택이었다. 그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그 악에 네 나이의 세 배쯤 되는 목사의 딸이 앉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네가 처음 본 피아노.
“여기 하느님이 내려주신 아기천사 두 명……”
두고두고 너를 웃게 했던 이 비슷한 말, 정색을 하고 이 말을 한, 여린 몸집의 목사의 부인도 있 었다. 모두 이북 사투리.
너와 상당기간 인연을 맺은 C목사 집안과 알게 된 내력은 이처럼 반쯤 열린 문. 그때부터 고등학 교 일학년 정도까지 너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소설만큼 재미있게 성경을 읽었고 찬송가를 목청 높여 합창으로 부르는 것을 즐겨했다. 네가 다시 무종교로 돌아갔을 즈음, C목사와의 친교 덕분 으로 유교였던 너의 부모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때로 많은 열린 문을 보지 못하고 너는 그 악을 지나쳤다.
벽
어느 날, 50년대 말, 60년대 초? 확인해볼 기회가 많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다. 네가 글을 익히 고 난 후 처음 읽은 벽보에는 어떤 얼굴과 함께 이런 문구가 인쇄돼 있었다.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
국회의원 출마자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그의 얼굴은 뚱뚱했던 것 같고 안경을 썼던 것 같다. 흑색 양복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흑백 사진 속에서 모든 양복은 흑색이던 때다-벽보가 붙어 있던 시멘트 벽과, 뒤돌아선 너의 눈악에 펼쳐진 구정물 고인 물웅덩이, 공터의 황량함이 그 문구 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네게 모든 벽은 낙서와 벽보를 위해 있다. 낙서와 벽보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는 ××를 좋 아해. 미싱사 구함, 화살표를 따라가시오. 식모 급구. 그리고 3류 극장 화장실 벽의 음화(淫"). 체 육시간의 빈 교실에서 물건을 훔치는 동급생의 이름을 고발하던 외설스럽던 벽. 모든 자기방어성 고발에 외설기가 있음을 알려주던 벽. 한때 미국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퍼졌던 검은색 살포 기로 부려진 BOXER라는 전언 없는 밀어, 베를린 장벽의 낙서. 18세쯤의 네가 좋아했던 명륜동 2가의 가도집, 창호지가 발린 언니의 방문을 너는 무척 부러워했다. 그 방문의 창호지 전체가 낙서 와 시구로 뒤덮여 있었다.
좀더 후의 또다른 벽보. 그 노인의 이름이 무엇이던가. 변하는 시대에 대해 까탈을 부리는 긴 수 염의 엄숙한 표정에 한복을 걸친 갸름한 얼굴, 사 년 만에 한 번씩 여일하게 벽보로 나붙던 무소 속 대통령 후보의 얼굴. 모든 이에게 한국 정치사의 캐리커처로 보였을 그 얼굴 악에서 너는 오 랫동안 머물렀다. 사춘기적 감수성에 균형 잡힌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바로 사춘기적 무책 임으로 너는 너의 첫 선거권을 그 노인에게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강요된 소속에 대한 불편함에 신경질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던 네게, 그 노인의 무소속은 진짜처럼 보였기 때문에. 너는 아주 오 랫동안 선거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행사해볼 필요가 없었던 결여의 시대를 살았음을 잊지 않는다.
막 진학한 고등학교 건물 옆, 체육관 뒤에는 먼지 덮인 평균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수업이 끝나 고 너를 포함한 세 명의 친구는 그곳에서 밀회했다. 만나자마자 너희들은 내기하듯 시멘트 바닥 에 침을 뱉었다. 어떤 근거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뱉어낸 침의 색깔이 하얄수록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므로 모두 자신의 침이 가장 하얗기를 바랐다. 하얗게 거품이 인 침은 너 희들의 연대(連帶)를 확인하는 척도. 그리고 나서 너희들은 평균대 타는 연습을 했다. 팔을 제대 로 펼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체육관 뒤의 벽과 벽 사이에서. 단지 심심해서.
짚고 기대기 위한 벽도 있다. 그러나 모든 벽은 기대는 사람이 실은 무게만큼 뒤로 물러난다. 아 주 오래 전, 뙤약볕에 드러난 고궁의 끝도 없는 벽이 있다. 4·19가 되어버린 그날, 취소된 그 봄 소풍 날, 집으로 돌아오던 너는 보았다. 어디론가 몰려가는 인파가 지나가고 비어져버린 돌담을 짚으면서 무한히 느린 속도로 걸어가는 한 노파의 뒷모습. 백통 비녀로 쪽진 성긴 흰머리, 구겨진 마직 치마저고리. 가을 나뭇잎 같은 가벼이 마른 손길에도 뒤로 무너질 것만 같던, 노파를 안심시 키기에는 불안한 담벼락. 노년을 보고, 삶 속에 진행되는 죽음을 보고 삶이 연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양주의 거리, 서천의 돌담, 태백의 흙집 담벼락에 기대서 한없이 햇빛바라기를 하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퀭한 눈길, 악이 타진 바지나 치마, 경련처럼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씨부렁거리 는 말, 그들은 이유도 없이 각질이 돼버린 살을 긁는다. 때로 피가 날 때까지.
들
네게 자주 한 장소는 계절로 남는다. 너의 내면에는 사계절에 짝맞추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네 종 류의 들판이 살고 있다. 경기도 제치레미의 시골 큰집은 네 머릿속에서는 늘 겨울이다. 짱하고 대 기가 갈라지는 것 같은 순수한 추위의 겨울을 기억한다. 가파른 재를 넘어야 닿을 수 있었던 이 시골집은 마을의 동산에 기대어 넓게 펼쳐진 들판과 마을을 내려다보며, 겨울처럼 외따로, 그만큼 근엄하게 서 있다. 이 시골은 몇 개의 영상으로 남아 있다. 나이 많은 사촌들과 어울려 지치던 얼 음판, 늦은 밤의 참새서리, 5남 1녀의 손주에게서 나온 무수한 증손자들을 일일이 구분하지 못하 지만 누구에게나 말랑한 과자와 화로 속 군밤을 내주던 소년 같은 맑은 표정의 증조할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부엌과 뒤꼍의 여인들의 말잔치, 일잔치. 큰집의 잔치는 늘 겨울이었던가? 집을 가 득 메우는 동네사람들. 재를 오르기 전에 늘 같은 바위 위에 멋지게 올라서서 딸들의 손을 잡고 고향에 대한 시 한 수를 짓던 너의 아버지의 겨울. 딸들의 머릿속에 몇 가지 잊히지 않을 기억을 안배할 줄 알았던 너의 아버지의 예술. 매일 아침 큰산을 마주하고 일어나본 사람에게 세상은 가 끔 하찮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겨울. 그렇지만 이 겨울의 풍경이 너를 위로해주러 기억에 떠 오르는 일은 드물다. 그것은 모든 이가 말하는 빈 자리로 기억된다. 육이오 때 비명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빈 자리로. 당신의 둘째 아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할아버지를 너는 본 적이 없다. 그곳 에 가지 못한 지 참으로 오래 되었다.
경기도 마석의 외가댁 시골은 늘 여름이다. 너와 두 동생은, 특히 네가 인형처럼 돌보던 막내동생 과 함께, 여러 여름, 이 시골에 맡겨졌다. 완화군의 사부셨던 외고조할아버지의 호를 딴 광암부락 에는 지금도 웃기 좋아하고 삶을 건강하게 즐길 줄 아는 외가댁 식구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 여 름에 만난 사람들의 기억은 생생하다. 토끼처럼 흰 살결이 그을지도 않던 아기동생을 그림자처럼 데리고, 지금은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K 같은 마을 친구들과 몰려서 고기잡이 천렵을 자주 갔고, 제사준비 곡식을 광에서 내어다가 강가에서 해먹던 덩이수제비, 풀떼기, 밀범벅은 네게는 모유의 심리적 효과를 지닌다. 마을 악의 내에 비추어진 마석 여름의 적나라함, 장거리까지 가는 흰 먼지길, 아주 옛날, 열네살의 나이로 마석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일본으로 공부하러 도망갔 던 엄격한 유교집안의 맏딸, 당시 마을에서 유일하던 너의 어머니의 하이힐 굽을 부러뜨렸던 거 친 들길을 거닐어보는 것을 너는 좋아한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된 그 흙길을 지나노라면 너는 장 소가, 세상의 모든 장소가 숨은 애기를 속삭이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너는 매번 외갓집에 들를 때 마다 조금만큼씩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채집한다. 아주 조금씩, 미미한 것들도 무거워 조심스럽 게. 여름의 철없던 외갓집에서, 어머니가 비밀스럽게, 실수처럼 짓곤 하던 슬픈 미소까지 가는 데 는 너무도 먼길이 있다.
양수리, 물너머마을이라는 뜻의 무네미에 있는 작은할아버지댁에 아버지 따라 가는 것을 너는 즐 겼다. 무네미의 시골은 네게는 가을이다. 감나무 때문이다. 저녁 나절의 가을하늘을 지키는 오렌 지색 램프처럼, 무수한 감을 달고 멀리서 오는 모든 이를 반기던 감나무. 미남 자손을 많이 두었 던 때문일까, 작은할아버지는 아들을 여럿 잃었다. 넓은 뜰 안을 조금은 쓸쓸하게 지키고 있던 과 꽃. 그리고 집 뒤뜰을 뒤덮던 알밤송이. 너는 나무들이 줄 수 있는 친밀한 경이의 깊이를 이곳에 서 배웠다. 네 콧등의 상처 또한 이곳에서 얻었다. 너의 부모가 각별히 사랑한, 오래 자리보전한 큰아저씨의 건강식 마련이었던 송사리잡이, 물 속 곤두박질에서 돌부리에 부딪쳐 얻은 상처. 투병 의 막바지에 명륜동에서 혜화동 병원까지 그 거구의 큰아저씨를 업고 뛰던 너의 부모의 혼비백 산, 그리고 철없이 서럽게, 서럽게만 울던 엷은 갈색눈의 서구형 미인인 큰아주머니. 처음으로 너 는 미로 같은 병원의 복도를 배회했다. 이제 너의 각진 콧등이 시리지 않다.
봄의 야산에는 수줍게 철쭉과 진달래가 덮고 있고 드문드문 구기자 나무, 오미자 나무의 약소한 키와 가지가 보인다. 작은 골이 여럿, 잡목숲 사이의 빈터도 여럿, 봉긋한 무덤도 여럿. 9대조, 8 대조, 7대조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홀로 있는 6대조 할머니. 어머니의 무덤. 주인의 모습을 따 라 운중선좌형이라는 네 어머니의 자리에서 반대편 산을 보면 겹겹의 능선이 시원하고도 슬프다. 삼월 초에 돌아간 분이기에 포천의 선산은 봄에 자주 가거니와 봄이 가장 예쁘다. 포천시를 지나 이동 쪽으로 가기 위해 차가 계곡을 지날 때면, 차만 타면 자는 너를 어김없이 깨운다.
“일어나! 네가 제일 좋아하는 데 지나간다!”
가끔 뒤에서 몰려오는 소나기 구름과 달음박질 내기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주기 위해 이동막 걸리도 몇 병 산다. 이 야산은 가꾸어지지 않았고 땅도 기름진 편이 아니다. 반쯤은 버려진 그 작 은 들과 둔덕이 좋아 너의 마음은 틈만 나면 이곳으로 달린다. 여름에는 정글 이상으로 살찐 동 물성 잡초가 무성하고 겨울에는 마른 풀의 정경이 너무 한산하다. 단풍을 즐기기에 이 야산을 드 문드문 지키는 나무는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같은 멋없이 소박한 나무들뿐이다. 화 사한 봄날, 당신들이 누울 자리를 신방 고르듯 고르던 너의 부모에게서 너는 죽음의 또다른 모습 을 본 적이 있다. 다른 날도 아닌 화사한 봄날, 너는 죽음을 호들갑스러운 파국도, 두려움도 아닌, 평화롭게 기다리는 안식으로 본 적이 있었다.
장
대형 시장을 빼놓고 네가 잘 알고 있는 시장으로는, 명륜동3가 시장과 성대 입구에서 시작되던 명륜동 뒷골목시장(지금의 대학로 뒷골목), 신촌시장, 신길동시장, 엑-상-프로방스 법원 악의 토요 일 시장, 파리 근교 퐁토와즈 시의 일요일 시장, 안양4동 시장, 월계3동과 석계역 사이의 도깨비 시장. 그 밖에 네가 방문한 무수한 시장들은 모두 이들 시장과 뒤섞인다.
모든 시장에 대해 너는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 시장은 너를 모른다. 시장의 익명 성을 너는 좋아한다.
모든 시장의 원형은 네게는, 부정선거와 화폐개혁, 4·19와 5·16이 소란스런 배경음악을 깔던 50 년대 말, 60년대 초의 명륜동3가 시장이다. 약간의 경사지를 이루며 내려오는 주택가가 끝나면서 그 시장은 시작된다. 시장길로 나서는 모퉁이에 쌀집이 있다. 쌀집에는 늘 미륵반가상의 자세로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긴 얼굴의 인색한 쌀집 주인과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주택가의 쌀가마 니 배달과는 달리, 산동네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누런 양회부대를 뜯어서 만든, 한 되짜리 봉지쌀 을 사간다. 또다른 도둑 봉지쌀도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쌀을 담아두는 너의 집 쌀독은 뒤꼍에 있었다. 가끔 누군가가 쌀독의 쌀을 바닥까지 긁어내간다. 너는 가끔 그 쌀을 여러 개의 누런 봉 지에 나누어 담고 어머니 몰래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의 가난한 친구들, 당시에는 그렇게가 아니면 끼니를 굶던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장 모퉁이를 돌면 왼쪽으로는 높은 한옥의 담벽 밑에 야채장사들이 줄지어 있다. 길의 반대편, 낮은 지붕에 슬레이트를 이어 늘린 상가에는 만두·찐빵집, 기름가게, 철물점(?), 만화가게, 속옷 가게…… 기껏해야 폭 삼사 미터, 길이 이삼백 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시장길. 야채전이 차려지는 오른쪽 길의 중간쯤, 작은 골목이 성균관대학교 뒷산으로 이어지고 그 교차지점에 어물전이, 그리 고 그 밑으로는 양복점이 있다. 거리는 좁고 상점들은 거의 겹쳐지듯이 붙어 있다. 쌀가게 주인과 생선가게 주인은 늘 사이가 좋지 않고(생선을 물어가는 고양이, 그렇지만 시장거리의 쥐를 없애 는 고양이), 대부분 산동네의 무허가 건물에 기거하는 야채상들은 주눅이 들어 있다. 이 시장거리 로 박수의 대열, 문둥이, 팔 끝에 쇠갈고리를 단 상이군인들, 전후의 불행한 흔적들이 줄지어 시 장거리를 지나 끝이 빤히 보이는 산동네로 사라진다. 너는 산동네 끝, 산동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드문드문 헌데처럼 내려앉은 천막집, 그리고 줄기를 꺾으면 짙은 쓴 냄새의 수 액이 나오는 야생화말고는.
모든 이상한 이들을 삼키는 것 같던 이 산동네를 너는 겁도 없이 자주 방황한다. 너는 성균관대 학의 개구멍으로 돌바위 언덕을 오르고 오랫동안 계속되는 숲을 지나 산동네의 꼭대기로 연결되 는 먼 우회도로를 선호한다.
윗동네에서는 아침마다 가수 지망생으로 알려진 한 여성이 하이힐을 신고 시장거리로 내려온다. 가수 지망생이 즐겨 부르던 연습곡은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안겨… …’ 적지 않은 숫자의 정치 지망생이 문 열어놓은 양복점 악이나 복덕방에 나와 앉아 큰 목소리 로 떠든다. 세상을 등진 것 같은 표정을 한 젊은이, 까만 양복에 더욱 창백해 보이는 청년은 꼭 시장거리를 거슬러올라와서 시장 뒤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한번도 철문이 크게 열린 적이 없는 해군소장집으로 숨어들어간다. 동네에서 가장 큰 일본식 집, 높은 담장에 병조각들이 뾰족하게 박 혀 있는 큰 대문의 그 집 악에서 싸구려 달걀 아이스케키를 먹던 아이들은 순경이 나타나면 먹던 것을 뒤로 감추면서 흩어진다…… 시장에서는 참기름 냄새, 생선 냄새, 가끔 가죽이 썩는 냄새, 소독약 냄새, 빛바랜 포장 신문지 냄새, 만두 속 냄새…… 이런 냄새들이 하루의 시간대에 따라 변주된다. 그 시장에는, 술주정꾼이 많지 않다.
기억 밖에서 이 시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무수히 이 시장을 묘사해야 할 생리적 욕구 를 느낀다. 시장은 돋아나고 지워지며 첨가되고 변형되며 흐려지고 재생된다.
대학로 뒷골목 시장의 떡집(낙원 떡집)은 지금도 건재하다. 데모가 끝나면 숨어들던 신촌시장은 없어졌다. 신길동시장에는 여전히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와 네 부모의 소식을 묻는 건어 물상점 주인이 있다. 안양4동 시장의 반찬골목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들르지만 겉모양을 빼놓고 는, 내가 좋아하기에는 너무 큰 익명의 시장이며, 여전히 시장으로 남아 있는 석계역 부근 도깨비 시장에는 단추가게와 게장을 맛있게 담그는 젓갈장사가 있다. 언젠가 그 사람은 너에게 철야기도 를 꼭 한 번 같이 가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무수한 종류의 전도사 유형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진 치고 있다가 네가 굴복하는 것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는 자주 잊는다.
몸
너는 사람의 몸이 아마도 이 나라의 문화에서 가장 푸대접받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은 육체적인 사람인가, 정신적인 사람인가를 가늠해보려고 하 는 버릇이 있다. 자주 대화의 내용만큼이나 목소리의 질감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 도 같은 버릇.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균형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해도 그 균형 은 순간적인 것이라 너는 어떤 완벽한 균형도 영원한 것으로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록 5퍼센트 혹은 10퍼센트 정도가 정신 혹은 육체 쪽에 더 가까이 가 있다. 너는 어떤 쪽인가 하면 몇 퍼센트라도 육체 쪽에 기울어진 사람을 더 쳐주는 편이다. 몸은 아주 솔직하기 때문에. 몸이 솔직한 사람은 예외 없이 정신도 솔직하지만, 정신이 솔직한 사람이 꼭 몸이 솔직하지는 않기에.
너는 육체 우월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가령, 자신의 육체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 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육체에 민감한 사람이 모두 자신의 육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 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근엄하지 않은 사람, 권력의 욕구가 없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몸 을 이해한다. 몸의 변덕스럽고 순간적인 법칙, 몸의 고독과 몸의 위로의 격렬한 존재론적 대립을. 몸을 위한 모든 감동적인 싸움도.
그렇지만 너는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영혼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나의 성실한 동반자, 나의 육체……”(마르그리트 유르쓰나 의 "아드리엥의 초상")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너 사이에는 아마도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너는 육체를 무시하며, 육체를 지배하려는 모든 사람과, 이념에 반대한다. 자신의 육체, 타인의 육체를 무시할 때, 배덕과 범죄가 생겨난다고 너는 믿고 있다.
몸을 둘러싼 것 못지않게 사회적인 몸의 표현은 네게는 무한해 보인다. 밤늦은 시간 긴 연휴의 끝, 지하철 안은 비어 있다. 맞은편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 계절에 어 울리지 않는, 방어적으로 두꺼운 검은 치마, 검은 구두, 흑백 체크무늬 상의, 흐트러진 꼰 다리, 곧은 상반신, 동승객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지루해진 시선, 고개를 돌리는 빠른 속도, 경망한 손놀 림, 몸짓의 계산된 절제…… 필요 이상으로 오만하기 때문에 세상을 무시하고 미워하다 중년이 돼버린 노처녀. 아니면 이혼하고 혼자 사는 것을 창백하게 즐기기로 작정한, 거세된 느낌을 주는 중년의 몸의 표정. 그럼에도 그 몸은 정열에 대한 향수와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이를테 면 신부(神父) 같은, 불가능한 직분의 사람과 안심하고 가까이 지내며, 그런 사람 악에서는 갑작 스럽게, 자유롭고도 명랑하게 조잘거릴 것 같은…… 그런 여인.
그러나 기차가 종점에 도착하고 여인이 일어서서 걸을 때의 몸이 만드는 또다른 표정은 너의 모 든 추정을 무화한다. 너는 그 몸의 언어를 다시 써본다…… 그녀는 아마도 장성한 아이 둘쯤 가 진, 살기에 지쳐 뻔뻔하고 오만하게 된, 세상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는…… 너는 그 여인의 뒤를 쫓아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자제한다.
사람의 몸의 작은 표현들은 무한히 그 몸이 사는 사회를 상상하게 만든다. 때로는 그들의 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립되지 않는 어떤 지식이 몸의 언어를 이해하게 한다. 뒤에서 보는 둔중한 남자 의 목덜미에 숨겨진 잔인함, 어떤 손가락 끝에 배어나오는 악의, 어떤 눈과 목소리가 조합될 때의 안도감…… 대부분 증명할 수도, 검증될 수도 없는 상상, 그 상상의 깊은 위험을 알고 있지만 상 상을 그치기는 어렵다. 몸은 상상하게 만든다. 꿈꾸게 만든다. 슬프게 만든다.
고등학교 막바지, 너는 가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그 시절에는 아무 이유나 대고 가출하 고 싶어하며 모든 이유가 당사자에게는 정당해 보인다. 그 당시의 가능한 세상의 끝은 바다였는 데, 인천은 세상의 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웠고, 남해는 너무 멀었다. 횡단하기 알맞은 세상 의 끝은 그러므로 동해. 기차에 오르고 저녁 나절에 춘천에 도착. 춘천에서 기차를 내려 걸어다니 다가 너는 한 책방에 들어갔다. 네가 구입한 것은 김지하의 『황토』. 한 여관의 백열등 밑에서 혹시 괴한이 겁탈하러 들어올 것이 두려워-이런 용감한 여행에서조차 여자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는 것은 얼마나 화나고 폼이 안 나는 일이던가-돈은 속옷 속에다 감추고 너는 소리내어 삼십 편 의 시들을 낭송했다. 너는 그의 시를…… 그 즈음, 몸의 시로 이해했다. 아니면 모든 시가 몸의 시가 아닐는지. 몸이 리듬이고 호흡이고 음악이듯이. 이튿날 너는 재생되었으며, 세상의 끝, 동해 를 버리고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 이후 너는 여러 번에 걸쳐, 대개는 시인들 덕분에 되돌아왔으므 로-그러나 어디에서 어디로?-문학에 빚을 졌다고 말한다. 너는 확실히 문학에 빚을 졌다.
몸이 약했던 너는 육체의 시달림이나 노화를 경험하면서부터 사람이 보수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육체와 정신의 결별을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다. 너는 그 둘의 결합을 신임한다.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모든 종류의 삶의 표현 때문에 몸이 위협을 느껴야 하는 사회와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회, 때로 너의 진보의 개념은 이토록 단순하다.
길
솔직히 물어보자. 무엇이 너를 끝없이 길로 내모는가를. 산 속의 길보다는 도시의 길. 아직까지는. 모든 길은 그 어느 하나도 같은 길이 없고 같은 길이라도 어느 한순간 같은 적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 너는 매번 놀란다. 너는 자주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 자주 길 을 잃는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무의식적인 욕구 아니었을까. 너는 길을 잃는 것을 즐긴다. 그 미 지에 대한 긴장과 길이 찾아졌을 때의, 제길로 돌아왔을 때의 아쉬운 환희. 긴장의 절정에서 일어 나는 직관의 힘으로 너는 세상의 거리를 이해한다.
너는 길의 끝, 그러니까 상실의 끝, 그러나 완전한 끝이 아닌, 무한히 끝에 접근할 뿐인 그런 끝 의 경계선까지 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닫힌 문 악에 분유깡통이 놓여 있듯이, 그 끝의 경 계에서 너는 깨어난다. 너는 아주 길을 잃지는 않는다. 가끔 더이상 젊지는 않음을 느낄 때, 너는 세상의 주름살 같은 그 수많은 길에 대해 미안함을 느낀다. 네가 한번도 지나쳐주지 않을 것이 분명한 많은 길에 대해서. 광기와 정상 사이의 무한히 가까운 거리, 숭고와 타락, 일상과 일탈, 군 중과 소외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길이 네게 가르쳐주었다.
네가 유년의 집을 나와 혜화국민학교까지 가는 길은 모두 세 갈래의 길이 있다. 주택가 골목인 해군소장집 악을 지나는 길, 주택가를 벗어나 산동네로 올라가 등성이를 따라 보성고등학교 쪽으 로 내려오는 길, 그리고 시장 쪽으로 돌아 큰길로 나서는 길.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알려진 이 세 갈래 길 외에 학교까지 가는 무수한 길의 변주를 너는 알고 있다. 명륜동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길, 부뤼노 드 마레샬가에서 플라스 드 팔레 드 쥐스티스까지 가는 길, 엑-상-프로방스 시에서 에 귀으 마을 언덕까지 가는 길, 아비뇽에서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길, 월계동에서 신촌까지 가는 길, 신촌에서 안양까지 가는 길, 혹은 단지 네가 있는 곳에서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 수많은 길. 매번 그 중의 한 길을 택하는 일은 네게 은밀한, 즐거운 놀이와 같다. 몇 년 전, 병원의 입원실의 옆 침대에 거동을 못 하는 환자가 누워 하루 종일 귀에 리시버를 꽂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교통 방송을. 매시간의 10분 전, 그는 연속극을 듣듯이, 볼륨을 올리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몸을 뒤척이 며 10분 교통정보를 듣고 있었다.
네가 아끼는 서울의 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네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중한 선물. 1965년에 희 성사가 발행한 그 지도에는 서울 아홉 개 구의 모든 집들과 건물의 모양이 무한히 축소되어, 그 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려져 있다. 아주 작고 시시한 집까지. 소파에 올라서서, 벽에 걸린 그 지도에서 네가 아는 길, 집, 건물, 공간을 확인하고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 시들어버린 시간을 되살려내는 일을 너는 즐긴다. 그 길 위로 60년대, 70년대, 80년대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모든 길들은 너를 유혹한다. 가끔 네 기억 속의 몇 개의 길의 냄새와 빛깔이 고스란히 되살아올 때 너 는 끝도 없는 우수에 사로잡힌다. 너의 온 존재는 그 길을 향해, 그 시간 속으로 달려간다.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 길을 달릴 때는 이렇다 할 목적이 없다. 길의 목적 그 이외에는.
길 끝에는 늘 공터가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이 공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약속을 한다. 길을 거쳐오지 않은 모든 공터의 약속을 너는 의심한다.
물
너는 이제 동해보다는 남해를 좋아한다. 너는 지중해보다는 대서양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 무 엇보다도 협재 근처의 오월의 태평양을 좋아한다. 특히 1988년 5월에 네가 뛰어들어갔던 협재의 물을. 개울과 계곡, 우물과 강, 그 모든 물의 집 중에서 너의 집은 바다에 가장 가깝다.
너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충분히 진척되어 해저도시가 건설될 때 그 첫 입주자들 중의 하나가 되 기를 꿈꾼다. 네가 꿈꾸는 또하나의 물의 집이 있다. 그것은 유리 같은 투명한 재질로 된 커다란 반구(半球) 형태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 집에 누우면 천장 대신 하늘의 대형화면이 보일 것이 다. 이런 집을 꿈꾸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가 오는 날이다. 투명한 반구형의 이 집 안에서라면 일 년 내내 비가 오는 것이 마땅하다. 투명한 지붕 위로 비가 내리고 반구 위로 빗물이 줄기를 이루 며 흘러내린다. 무한히 변주되는 반복 무늬. 바로크 음악.
비가 올 때 맨발로 경사진 아스팔트를 자주 걸었던 적이 있다. 그 즈음의 너의 사치는 장화와 비 옷. 너는 비 오는 밤길의 국도를 차로 달리는 것을 즐겨하지만 그것을 즐길 정도로 안전한 자동 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너는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만든 모든 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굴, 게, 낙지, 해삼처럼 진화가 덜 된 괴물 같은 외양의 해산물. 멜빌의 "백경", 쥴 베른의 "신비의 섬", 에드가 포우의 "고돈 핌의 모험(원제는 ‘낸터겟의 아더 고돈 핌의 이야기’)"은 성장기 이후 변치 않는 너의 애독서 다. 특히 멜빌의 "백경". 일생 유조선 선장이었던 한 친척 아저씨에게서 너는 무한한 동질감을 느낀다. 몇 번 보지 못했음에도.
밤, 바닷가에서, 비틀즈나 마일즈 데이비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나 라이히의 음악을 귀에 꽂고 누워 있어보라. 음악 사이사이로 반주처럼 울리는 밤바다의 파도소리와 함께. 바다가 제공하는 감 각의 무한한 확장을 너는 좋아한다. 밤의 바닷가에서 너는 늘 동일한 종류의 음악만을 듣는 편이 다. 바다와 수평으로 눕는 것 또한 바다를 더 잘 아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너는 한때 죽음의 여러 방식을 놓고 몽상한 적이 있다. 죽음을 선택할수 있다는 가정하에. 너는 너무 부드러워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정도로 완만히 깊어지는 바다를 택한다. 모래밭이 길어서 땅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그런 해안. 그러니 너의 바다는 닫힌 바다여서는 안 된다. 동해나 서 해나 지중해, 혹은 흑해나 발트해, 홍해나 남지나해, 셀레베즈해나 아드리아해 같은 바다를 너는 극구 사양하고 싶다. 그것은 너의 상상이 미치는 저 먼길까지 시야를 막는 점 하나 없는 열린 바 다여야 한다. 시간은 아침이 좋다. 아니면 밤과 아침의 불분명한 경계에 놓여 있는 시간. 너는 아 침을 맞으러 모래 위를 걸어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이며 바다의 찬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러니 아마도 여름이어야겠다. 너는 천천히 몸을 담그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물 위에 뜰 것 이며, 움직임을 무한히 아낀 느린 동작으로 몸을 저어 먼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너의 힘이 다할 만큼, 되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까지. 네가 무수히 떠난 모든 길에서 너는 아슬아슬하게 되돌아 왔다. 그러나 단 하나의 여행,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물의 여행,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간, 그렇게 물로 되돌아가는 여정, 너는 그렇게 죽음을 그린다.
최윤 소설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8년 허윤석에 관한 평론 "소설의 구조분석"을 발표했고, 1988년 중편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로 소설 발표를 시작했다. 창작집으로 『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장편소설로 『너는 더이상 너가 아니다』가 있으며 93년 동 인문학상, 9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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