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과 그 의미 전 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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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왜 동시성 현상이 문제인가? 어쩌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만나는 이 생경하고 모호한 경험은 태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 가운데 면면히 축적된 사건이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그리 쉽사리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경험을 포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포용력은 경험의 생경함 앞에서 언제나 쉽게 좌절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강렬한 경험과 이미 타진해버린 나머지 빛이 바랜 청동거울일런지도 모른다. 칼 구스타프 융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험 속에 산 사람이었다. 융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인과적으로 연결이 불가능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과거와 미래의 모호한 맞물림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직시하였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임상 사례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희귀한 체험과 환상'[1]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융의 담대함은 '희귀한 체험과 환상'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쉽사리 해명될 수 없는 그 영역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진솔하게, 혹은 대담하게 돌파해 나아갔다는 점일 것이다. 당시 융은 의사의 가운을 입고 있었던 과학자였던 만큼, 서구의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쉽사리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을 건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2] 그러나 당시의 정상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과거와 미래의 뒤섞임, 인과율의 파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인생을 거쳐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여든 가까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글이 바로 <동시성 :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zitat als ein Prinzip akausaler Zusammenhange (Zurich, 1952)이라는 논문이다. 여기에서는 이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융의 동시성 개념과 그 의미를 숙고하려 한다. 융은 이 논문에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인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 1880-1926)의 논문에 많은 통찰을 얻었다. 카메러는 20세부터 40세까지 동시성 현상에 관련한 경험사례를 정리하여 <연속성의 법칙>Das Gesetz der Serie (Stuttgart, 1919)이라는 저서에 100가지의 사례로 수록하였다.[3] 여기에서 카메러는 물리적인 인과법칙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우연의 일치를 설명하려 하였다.[4] 융은 그의 논문 서두에서 카메러의 연구를 자주 언급하였고 특히 그의 개념인 <연속성의 법칙>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였다.[5] 동시성에 대한 카메러의 단초를 바탕으로 하여 융은 인과율에 의한 자연법칙을 단숨에 넘어서는 회귀한 경험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그의 논문에서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세계에는, 특히 정신세계에는 인과율의 파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그럼으로 인과율의 법칙을 넘어서는 또 다른 '법칙'이 존재할 수 있음을 융은 그의 논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2. <동시성>Synchronicity에 대한 융과 제자들의 개념정의 융의 제자인 프란츠는 "동시적 사건"(Synchronic events)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동시적 사건은 비일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적 사건을 확고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인과적 법칙을 경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적 사건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6] 프란츠가 잘 지적하였듯이, 동시적 사건은 우리가 일상에서 결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통계적으로 입증되고 규칙적으로 재생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고, 경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동시적 사건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시공연속체가 포함하고 있는 일반적 사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7] 그렇다면 융은 동시성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일단 그와 그 제자들의 개념정의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동시성의 유형과 사례를 조명해 보도록 하자.
3.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과 그 사례 동시성 현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12] 첫째, 관찰자와 의식상태(M)와, 외부의 사건(과거/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이 첫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치료에 강한 저항을 보이던 여자환자와 분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닫혀 있는 창을 등 뒤로 하고 앉아서 융은 이 환자가 자기의 꿈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환자의 꿈은 매우 인상 깊은 꿈이었는데, 누군가가 황금색 풍뎅이 모양의 고귀한 보석을 선물로 주는 내용이었다. 순간 등 뒤의 창 밖에서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융이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니 황금색 풍뎅이와 유사한 곤충이 방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이었다. 융은 창을 열어 그 곤충을 잡아 환자에게 "여기에 당신의 풍뎅이가 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건네 주었다. 이러한 사건은 환자의 냉철한 합리주의와 지적인 저항에 금을 가게 하였고, 이후에 그 환자에 대한 치료는 매우 원활하게 진행되었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13] 둘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관찰자의 지각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외부의 사건(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두번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융이 언급한 이 사례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회고하였던 사례이고, 많은 문헌에 기록된 사건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스웨덴보그는 스톡흘롬에서 큰 화재가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환상은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순간에 스톡흘롬에서는 대 화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에는 투시, 텔레파시라 불리울 수 있는 것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고 융은 해석하고 있다.[14] 셋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미래/N)과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세번째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과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1902년 봄에 던(I.W. Dunne)이 꾼 꿈을 인용한다. 던은 꿈에서 자신이 화산에 서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그 곳은 섬이었고 던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꿈에서 4,000명의 주민을 대피시키기 위하여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며칠 후에 던은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은 신문의 헤드라인에 쏠리게 되었다. "마르티니크의 화산폭발―용암이 도시를 휩쓸어 갔다. 40,000명 이상의 인명 유실."[15] 4. 동시성 현상의 역학과 의미 우리는 위에서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을 살펴 보았다. 이 유형과 사례를 바탕으로 동시성 현상은 어떠한 역학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첫째, 동시성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의 산물이다. 실로 <집중>은 의식의 특징이다. 우리는 의식적 집중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사리분별을 가하고 세계를 분명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집중의 강도가 높아지는 반면, 세계 전체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온전한 수용력이 낮아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전체의 세계에 대한 조명을 쉽게 상실해버릴 우려가 있다. 이런 면에서 의식의 예리한 칼날은 무의식의 육중함에 비해 쉽게 소진되거나 마모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갇힌 의식의 감옥 철창 사이로, 끊임없이 온전하고 보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의식을 향해 암호와 메시지를 보낸다.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동시성의 경험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이며, 또한 개인의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험인 것이다.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동시성 경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의식적 보완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다. ... 동시성 경험은 개인적인 측면의 의미를 지닐 지언정, 그 경험은 원형적인 차원이며 보편적인 차원이다."[17] 둘째, 융의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하고 있는 정신 현상에 관한 해명이다. 인과론의 파탄 속에서도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해명한 융의 시도는 가히 예언자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한 정신적 현상의 한 면을 밝히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융의 동료인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융의 심리학과 과학과의 관련성을 <인간과 그의 상징>Man and His Symbols 후반부에서 개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프란츠에 의하던 융이 전개한 정신현상에 관한 이론과 현대과학은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융의 동시성 이론을 물리학적으로 해명하는데 매우 커다란 일조를 한 융디안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EPR 사고실험과 양자 파동과 데이비드 봄의 내장 질서(Implicate Order)와 동시성 현상과의 관련성을 심도깊게 논의하고 있다.[19] EPR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EPR 사고실험을 통하여, 전자와 다른 전자 사이의 정보소통에 있어서 시간의 개입이 없이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field)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동료제자인 포돌스키와 로젠과 함께 중요한 사고실험의 결과인 논문을 발표하였다.[20] 이 세 사람의 약자를 띤 실험은, 초기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로 분리된 양자적 대상인 S1과 S2의 두 체계를 상정하였다. S1과 S2는 물론 공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 실험의 요약은, S1에 외부의 영향력으로 인해 결과로서 S1이 변했을 때 아무 관계도 없는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화값 만큼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물론 상식적인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알지 못할 상관성이 있고 서로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인과율을 넘어선 관계로 직조된 세계라는 것을 밝혔다.[21] 만스필드는 인간의 내적인 정신의 영역이 바로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EPR이 작동하는 영역, 그리고 인과성과 확률을 동시에 고려하는 양자역학에 있어서 살아있는 내적인 정신의 영역을 양자파동(quantum wave)의 영역으로 해명하고 있다.[22] 또한 그는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초심리학적인 현상은 자연법칙의 비인과적 표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서 초심리학[23]을 자연법칙의 일부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24] 셋째,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인과적 시공구조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부영은 "무의식에는 의식의 제약된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이를 상대화 하는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25]고 본다. 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매개로 한 사태이지만 무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초기에 융은 고전적인 물리적 세계상의 3요소인 공간, 시간, 인과성에 동시성을 결합시켰다. 이후 융은 물리학의 혁명의 영향과 파울리의 도움을 받아 시공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공식을 에너지(보존)―(시공)연속성으로 대치하였다. 이는 시공의 절대좌표 조차도 정신 안에서 상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라는 그 아르키미데스 점은 시공연속체 안에 있으면서 그를 넘어서는, 다차원적으로 열린 초점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정신은 시공 안에 있지만 정신은 시공을 넘어서 있다. 융은 구체적으로 그의 자서전 12장 <죽음 뒤의 생(生)에 관하여>에서 정신의 일부는 시공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시공간의 관념과 인과론이 모두 완전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완전한 세계상을 최종적으로 그려낼 때에는 이전의 관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간, 공간, 인과론을 지닌 인간의 세계가 그 배후에 또는 그 이면에 있는 사물의 다른 질서에 관련되며, 그곳에서는 "여기와 저기"도 "이전에, 그리고 뒷날에"라는 구별도 중요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융은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질 수록 그것은 절대성인 무시간성, 무공간성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고 술회하고 있다.[26] 동시성은 철학적인 견해도 아니고 인식에 필요한 원리를 제시하는 경험적인 개념이며 물질주의나 형이상학도 아니라고 융은 그의 글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다.[27] 그러나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동시성에 관한 융의 착상과 지론은 이미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 안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수위를 훨씬 넘어버린, 매우 중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신학적으로는 신 인식에 관련한 신론과 닿아 있고 형이상학적으로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인식지평을 논의하는 인식론, 주체와 주체 사이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논의하는 관계론, 또한 주체를 근거지우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의 존재론과 닿아 있다. 융의 동시성은 인과적으로 상호 독립된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인 것과 지속에 대한 논의[28]가 융의 동시성 현상에 어떠한 관점을 제공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와 지속은 융의 동시성 현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1)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의 기초가 되는 인과율로부터 독립된 사건들의 존재론적 기반을 형성한다. 동시적인 존재들은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해서 발생하는 존재들이다. 인과율에 저촉되지 않는 동시적인 영역의 확보는 절대시공간에서 상대시공간으로 넘어가는 융의 시공간 이해의 가장 구체적인 성과이다. (2)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 즉 의미있는 사건의 우연적인 일치가 의식적 차원에서는 놀라운 경험일 수는 있어도, 결코 놀라운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이라는 근원적인 지각양태에 바탕하고 있다. 모든 정보는 광속을 기준으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 축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어떠한 존재의 정보라도 7분 30초 이내에 <동시성 현상>으로 사건화되는 것은 결코 낯선 사건이 아니다. 인과적 효과성의 '강물'은 나와 너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한 Unus Mundus와 매우 가까운 영역이다. 의식적 지각의 후기양태로서의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은 인과적 효과성의 견실한 여건을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연장적 관계를 동시적인 영역에 투사시킨다. 우리의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는 우주 전체와 동시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의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는 나의 신체와 동시적인 영역에만 관계를 유지한다(cf. 동시성 현상의 두번째 유형). (3) 동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에 의해 정의되는 지속은 동시성 현상의 다차원적 실재성을 보증해 준다. 고전적인 시공이론을 넘어서서 상대성이론을 그의 체계 속에 통합시키는 방식은 바로 M을 관통하는 지속이 하나 이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성 현상'은 우리의 4차원 시공연속체 안에서 무한히 다양한 양태로 출현할 수 있다. (4)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지속의 영역은 인과관계가 파괴하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최소 지속의 단위가 현재에 적용된다면 아래의 보기와 같이 최소 지속 내부에서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서는 광속보다 빠르지 않는 물체의 세계에서도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29] 융의 동시성 현상은 바로 현재라고 하는 영역에서 인과율이 파기되면서, 동시에 세계 전체의 '순간'에 대한 의식적 파악이 진행된 찰나인 것이다(cf. 동시성 현상의 세번째 유형의 접근가능성). (5)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은 개별적인 인격들의 정체성을 구유(具有)해 줄 뿐만 아니라 Unus Mundus 개념을 구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모든 인격은 동시적 세계의 존재이다. 동시적 사건의 정의는 그것들이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동시적 계기(M와 N)는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의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적 계기는 자기 독립의 절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동시성은 모든 존재의 동등한 위상을 지시한다. 거기에는 비교도 없고 가치도 없다. 바로 그것은 동시적 존재들의 독자적 주체성이 확보됨을 의미한다. 동시에 연대성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동시적 존재들은 상호 독립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없다(M≠N). 이는 하나님의 부재(Deus absconditus)이다. 하지만 동시적 세계의 타자성은 이제 세계의 연대성으로 전진한다.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이 바로 Unus Mundus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현존(Deus revelatus)이다. Unus Mundus에 의하여 동시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세계와의 조화를 구현할 수 있다(M=N). 이는 Unus Mundus에 근거한 절대지의 활동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30] 넷째,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차이를 강조하는 클레아투라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플레로마 사이의 불가분리적 연결인 하나의 세계(Unus Mundus)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 안에서 운행하는 절대지(das absolute Wissen)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동시성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사이의 의미있는 일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적 주관적 의식의 카테고리가 박살나고 이 하나의 세계에 내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그물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직관적 파악은 동시성 현상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매우 강렬한 체험인 것이다. 또한 원형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을 동시성 현상은 열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한 주체의 파악(파악의 주체)과 그 파악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 세계[존재론적 시공간], 혹은 그 파악을 매개로 투사되는 객관적 세계[인식론적 시공간] 사이의 흩어진 조각들은 주체가 세계에 가하는 논리적인 분별지(分別智)에 불과할 뿐, 실제적으로는 Unus Mundus가 존재할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Unus Mundus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오히려 이들을 품는 근원적인 깊이이다. 융은 Unus Mundus를 물질과 마음이 분화되지 않고 따로 따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융에 의하면 "절대지"는 감각이나 경험적인 자아의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3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의 일상적인 범주의 제한을 넘어서는 동시성의 사건을 매개로 절대지와 접촉하게 된다. 5. 나가며 : 동시성 이론의 현재적 의미와 성찰 첫째,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융의 동시성 이론은 맹목적인 합리성과 과학성에 찌든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거점을 확보해 준다.[32] 둘째, 심리적으로 동시성 현상은 <자기>Self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Ego를 향해 전체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아의 결여를 직시하고 미래의 혹은 현재의 치명적인 손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 프란츠는 동시성이라는 현상 안에서 Unus Mundus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인간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33] 동시성 현상 역시 무의식의 작용인 한,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전체성과 관련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음에 틀림없기[34]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레 다가오는 기이한 조짐들을 잘 포착해 내는 것, 그리고 무의식의 미세한 음성을 귀담아 듣는 것이 매우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 융의 동시성 현상은 인간 인격의 온전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과도 연계[35]되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동시성 현상은 종교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던져준다. 인간은 동시성 체험을 통하여 온전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체험은 누미노제[36]적인 것일 수 있고 더욱 커다란 존재에 의하여 자신이 운행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영적인 성숙을 인도한다. 특히 비인과적 연계성인 동시성은 우리에게 주체와 대상, 정신과 물질, 인과성과 목적론 사이의 온전한 조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동시성 현상은 주체의 인식론적 영역과 세계의 존재론적 영역 사이에 의미있는 일치를 심오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37] 어쩌면 우리는 다시 적막감이 끝도 없이 감도는 무한한 동일성의 우주를 머리속으로 그려낼 수 밖에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실로 동시성 현상은, 우리를 향한 융의 투명한 해명과 제시가 아니라 더욱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하는 암호가 된다. 융은 물질과 정신의 문제, 몸과 마음의 문제[38]를 해명하는 데 매우 고려할만한 유용한 단서로서 '동시성'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비밀이자 역사의 비밀인, 누적적인 시간의 문제, 우주의 대극에서의 영혼의 위치와 영혼의 불멸,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아우르고 분유하는 Unus Mundus의 그 깊이에 관한 물음이 스산하게 다가온다. 실로, 우주는 아직도 인류가 해명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비밀로 간직한 채 저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각주 1)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2) 융이 동시성(Synchronicity)에 관련하여 겪은 연구의 어려움과 이 해명을 둘러싼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Synchronicity :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 Collected Works VIII, pp.419-420. 서문에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3)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4)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Kammerer, Paul" 5) Synchronicity, pp.424-427. 6) Marie-Louise von Franz, Psyche and Matter (Boston : Shambhala Publications, 1992), p.137. 7) 이부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인과적 동시성 현상은 폰 프란츠도 말한 것처럼 '바로 그렇다는 이야기'Just-so-story이다. 우리의 논리로 남김없이 증명하는 일은 없으나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로써 합리성 너머의 비합리적 질서의 가능성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측면임을 알게 된다." 이부영, {분석심리학}(서울 : 일조각, 1998), p.323. 8) Synchronicity, p.441. 9) Ibid., p.520. 10) Marie-Louise von Franz, Psyche and Matter, p.258. 11)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470. 12) Synchronicity, p.526. 13) Ibid., pp.525-526. 14) Ibid., p.526. 15) Ibid., pp.443-444. 16) C.G. Jung,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p.386. 17) Victor Mansfield,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 An Essay in Honor of Marie-Louise von Franz, pp.4/23. in http://lightlink.com/vic/distinguishing.html 18)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 (서울 : 통나무, 1997), p.322. 19) cf. Victor Mansfield, Synchronicity, Science, and Soul-Making (Chicago : Open Court Publications, 1995). 20) Einstein/Podolsky/Rosen,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n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cial Revier 47(1935). 21) on Jungian Transpersonal Psychology, Psychokinesis, Precognition and Remote-Viewing in Post-Modern Physics. in http://www.hia.com/pcr/mansfeld.html. 23) 실제로 융은 점성술, 강신술, 텔레파시, 염동(念動)작용, 투시력, 초감각적 지각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를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비적 현상은 동시성 현상과 집단무의식의 영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성과 집단 무의식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동시성은 집단무의식에 기초해 있고,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경향들에 의하여 형성된 원형으로의 진입을 제공해 준다. 24)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pp.13/23. 25) {분석심리학], pp.316-317. 26)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347. 27) Synchronicity, p.512. 28)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우주의 횡단면(橫斷面)인 동시적 세계 안에 포함된 정보는 결코 (주체에게)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현재의 태양을 결코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우주의 횡단면을 화이트헤드는 지속(Duration)이라고 부른다. 지속은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현재의 우주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지속은 우선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의 현재의 횡단면인 지속의 두 성원은 동시적이다. 둘째, 지속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과거에 있던가 미래에 있을 뿐이다. 셋째, 지속이란 지속 안에 모든 성원이 상호간에 동시적인 계기들의 완전한 집합이다. 정보소통이나 세계 인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정보'와 '인식'을 더욱 합리적인 언어로 새롭게 해명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 The Free Press, 1978), pp.125, 168, 320. 29) 전병기, "화이트헤드의 지속과 이중 스릿 실험", {창조성의 형이상학} (한국화이트헤드학회, 1998), p.102. 30) cf. 전 철, "화이트헤드의 인간이해", {신학의 미래} (한신대학교 신학부, 1997). 31) Distinguishing Synchronicity from Parapsychological Phenomena, pp.5/23. 32) cf. Synchronicity, p.421. 33) Psyche and Matter, p.263. 34) 김성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서울 : 동명사, 1999), p.364. 35) cf. Victor Mansfield, The Challenge of Synchronicity (Quest Magazine, May 1996). in http://lightlink.com/vic/chall.html. 36) Mel Faber, Jungian Synchronicity : Questions, Issues, Alternatives (Praeger Publishers, 1998), p.5/23. http://www.jungindex.net/faber/jungdian_synchronicity.shtml 37) Stephen J. Davis, Synchronicity and Information Theory in http://members.tripod.com/~One_3/page-1.html 38) cf. Synchronicity,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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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한 의사의 삶과 사상 ―
전 철
1. 칼 융과의 만남
저 창 밖의 보름달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 서 그 겨울밤에 찬바람이 잔잔히 흐르는 들녘에 나와 저 달을 향해 힘껏 후- 하고 따스한 입김을 보내주 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미한 잔상으로 기억 언저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더 군다나 지금의 삶은 그 어린 시절의 따스한 세계를 훨씬 이탈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 대한 무조 건적인 친화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나는 융을 만나려 한다. 융과 더불어 저 어두운 그늘에 고 여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건져내는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나는 1992년 대학 도서관에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1]을 통하여 융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융의 방대한 저서와 깊은 사상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하여 융과 제자들이 집필한 책이다. 지금 생각컨 데, 그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여느 책과는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양한 장면을 담은 사진과 그림과 미술작품, 심지어는 만화책에 나올 법한 낙서들 덕분인지,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여느 책과는 달리 매우 현란한 잡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융의 시선은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부터 홀연히 다가왔는 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융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모든 만남은 이렇듯 우연한 만남일까. 그 때부터 지금 까지 융과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이제 융은 마음 의 고향이자 삶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주는 커다란 그루터기이다. 그리고 그는 안개와 같은 내면의 세 계를 향해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영원한 유혹이다.
우리가 심리학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머리에서 기억해 낼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만큼의 대중적 지명도가 없지만 그 또한 깊은 세계를 갖고 있 다. 게다가 융은 프로이트가 가장 아끼는 동료이자 제자였다. 이후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을 선언한 후 프 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새 지평을, 그리고 융은 <분석심리학>의 새 지평을 심리학 분야에서 개척하였 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는 프로이트이고 오히려 융은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 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융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오묘한 진실을 감상하 려 한다.
2. 칼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우리가 기억의 그물로 건져낼 수 있는 최초의 경험들은 몇 살부터의 경험들인가? 융 은 놀랍게도!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 세살의 기억 을 떠올린다. 그것도 팔십 세가 넘은 나이에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역마살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유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 았다. 실로,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기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은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 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 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現實)에 대한 최초의 경험 이 되었다. 융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 다. 그 와중에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결국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칼 융의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 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2]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 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 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려 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 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3]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 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 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 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 컴컴한 순간일 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4]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 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 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 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 일 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 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 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5]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 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 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 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 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아니 마Anima, 아니무스Animus 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 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 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 만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환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의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6]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分析家)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 결과 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 데 반 세기 이상 을 보내 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 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7]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 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8]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트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꿈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 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4.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 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 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 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갈라디아서 2:20), 융은 자신으로부터 ?레야 떼어낼 수 없는, 마음 안에 내 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 구는 수 백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 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 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說法>[9]을 마흔 한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Anagrama)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러한 기이한 느낌을 자주 체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체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본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경험을 자주 듣곤 한다. 융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 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10]
어느 날 융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순간 뒷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알은 마침 융이 심한 통증을 느낀 부 분에 박혀 있었다. 1918년 융은 영국인 수용소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자기(Self)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형 상화되어 나타나는 像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그림은 황금의 성 모양을 한 만다라였다. 얼마 뒤에 리햐르 트 빌헬름이 융에게 보낸 책 안에는 융이 그렸던 만다라 그림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융은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11]으로 부르 고, 이와 같은 정신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한다. 사실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 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12]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 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13] 실로 융에게 있어서 텔레파시나 예언현상은 신비한 체험 이나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5. 결론 : 칼 융이 주는 의미
첫째, 융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명화된 의식이다. 의식 은 자아의 세계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우리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중심인 자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자아의 세계가 전부 로만 착각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의 세계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추방당하였다. 우리는 중심을 상실하였 다. 현대인의 마음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보헤미안의 서글픈 운명이 맺혀 있다.
융은 희미한 잔영으로만 남아있는 자기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 왔고, 오늘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네주고 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자 기의 세계는 너와 내가 서로 넘나드는 화해의 세계이고 통합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보다 보편적이며 진 실한 세계이고 영원한 세계이다. 오히려 그곳은 그늘에 가리워진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심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꿈을 통하여, 신화를 통하여, 상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에서 자아의 세계를 향해 건네주는 메세지에 우리는 귀를 모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치명적인 손실은 꿈에 의해 보완되 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저 깊은 내면의 무의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둘째, 우리의 세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마음의 전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 다.[14]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 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의식할 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15] 의식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겸허함을 상실한 채, 이성의 왕국으로만 전진하려는 현대문명의 기나긴 행렬은 사실 막대한 손실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 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성은 존 재하지 않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이 감내해야 할 불길한 징후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심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치 빛이 소멸하고 어둠에 깃든 저 밤하늘에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 는 저 별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연은 존재를 망각케 한다. 하지만 존재는 심연에 앞선다. 오히려 존재는 어둠을 품는다. 심연과 어둠 에 서 있는 존재는, 비록 설명되지 않을지언정, 자명한 존재이다. 그래서 은폐되어 있고 불가해한 존재 (essentia absconditus et incomprehensibilis)는 모르는 존재(essentia ignotus)가 아니다.[16] 사실 '비합리 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조차도 이름붙일 수 없을 것이 다.[17] 이름은 존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실로 융의 동시성 이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는 우리의 이성 이 얼마나 빈약한 기능인가를 예증해 준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는 않고 설명되지는 않는 세계가 우리 가 까이에 있고,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융은 말한다.
셋째, 융은 우리 각자의 生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 의식의 세계, 전체의 세계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生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 것 없는 生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生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生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生이다.[18] 우리의 生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 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生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 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19]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生)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제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 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 간동안 새가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의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백 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그 한 순간 만을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 만년 겨울잠 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 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몸으로 살아 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 의 生이다. 그러기에 生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生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 (Individuation)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꿈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고백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지금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서늘하게 만났던 융에 대한 감정은 이제는 따스한 할아버지로, 예리한 관조의 시선을 통 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영혼의 의사로, 오늘의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문명에 한 줄기 빛 을 선사하는 천상의 헤르메스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
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門)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 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20]
- 칼 구스타프 융 -
■ 각 주
[1] 융은 1875년 스위스 산간지방인 케스빌에서 태어났다. 이 저서를 쓴 시기가 1961년, 융은 이 저서를 탈고한지 10 일 후 병들어 누워 영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서야말로 융의 유작이라 할 것이다. 융은 여든 일곱에 이 저 서를 기록하였다. 한 생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여 살았던 탁월한 의사요 심리학자로서, 이 저서는 그의 인간이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융에게 있어서 이 저서는 모든 비전문적인 독자들에게 전하는 소 중한 삶의 언어이다. 그리고 융의 인간적인 면이 흠뻑 배어나오는 사랑의 언어이다. Man and His Symbols는 국내 에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다양한 번역서 가운데 추천할 만한 것은 집문당에서 출판한 이부영 역의 <인간과 무의 식의 상징>이다. 이부영 교수는 스위스 융 연구소를 직접 거친 독보적인 융 전문가(Jungdian)이다.
[2]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p.17.
[3] C. G. Jung,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Belief in Spirits, The Collected Works, vol. 8 (New York :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303-4.
[4] C. G. Jung,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p.386.
[5] 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p.85.
[6] Ibid., p.58.
[7] 이부영, {분석심리학} (서울: 집문당, 1978), p.196 ; "I have no theory about dreams, I do not know how dreams arise. And I am not at all sure that - my way of handling dreams even deserves the name of a 'method.'" C. G. Jung, The aims of Psychotheraphy, The Collected Works, vol. 16, p.42.
[8] Man and his Symbols, p.58.
[9]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p.434-47.
[10]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11] 융은 동시성 개념을 {동시성: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city: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이라는 논문에 서 발표하였다. 그 논문은 배타원리의 발견자인 볼프강 파울리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융은 파울리와 함께 무의식에서 보이는 동시성과 양자물리학에서 인과율의 파탄이 일어나는 현상 사이의 유사성에 주 목하였다. 그런데 이 논문은 부분적으로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의 논문 {연속성의 법칙}(Das Gesetz der Serie, Stuttgart, 1919)에 근거하고 있다. 카메러는 20세부터 40세까지 동시성 현상에 관련한 경험사례를 정리하여 {연속성의 법칙}이라는 저서에 100가지의 사례로 수록하였다. 융의 동시성은 주로 시간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 시성을 기술하는 반면, 카메러의 연속성은 주로 공간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을 기술하였다 ;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참조.
[12] 융이 깊이 엿본 동시성 현상은 결코 현대과학의 실재관과 유리된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신비적이거나 초월적인 현상이 아니다. 융이 지적한 동시성 현상을 지지하는 실재관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실재관은 실체적 실재관에 대한 관계적-유기적 실재관으로의 전환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첫째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이다. 둘째는, 양자물리학에서 비국소장에 관련된 EPR 사고실험이다. 그러 나 이 두 실재관은 아직도 현대과학이 해명해야 할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 전개에 있어서 우리 언어의 한계는 더욱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동시성 현상이나, 화이트헤드의 실재관이나, EPR 사고실험의 논의는 '정보소통'의 관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할 필요가 있겠 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동시적 세계는 정보소통, 즉 인식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식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정보소통이라고 한다면, 그 정보소통은 시간의 흐름에서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보가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전달되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과거의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듣는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 방 안에서 듣는 음악은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음악이다. 지금 듣는 비행기 소리는 몇 초 전의 비행기가 내는 소리이 다. 지금 듣는 천둥 소리는 몇 분 전의 천둥이 내는 소리이다. 우리가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의 태양은 8 분 20초 전의 태양일 뿐 현재의 태양이 아니다. 실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세계는 빛바랜 과거의 세계이다. 우 리는 결코 현재를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과거의 세계는 동시적인 세계가 아니다. 동시적인 세계는 현재이기 때 문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우주의 횡단면(橫斷面)인 동시적 세계 안에 포함된 정보는 결코 (주체에게)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현재의 태양을 결코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우주의 횡단면을 화이트헤드는 지속(Duration)이라고 부른다. 지속은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현재의 우주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지속은 우선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의 현재의 횡단면인 지속의 두 성원 은 동시적이다. 둘째, 지속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과거에 있던가 미래에 있을 뿐이다. 셋째, 지속이란 지속 안 에 모든 성원이 상호간에 동시적인 계기들의 완전한 집합이다. 정보소통이나 세계 인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 되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에 대한 논의는 '정보'와 '인식'을 더욱 합리적인 언어로 새롭게 해명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둘째, EPR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EPR 사고실험을 통하여, 전자와 다른 전자 사이의 정보소통에 있어 서 시간의 개입이 없이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소(field)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35년 아 인슈타인은 동료제자인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과 함께 중요한 사고실험의 결과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Einstein/Podolsky/Rosen,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n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cial Revier 47(1935)). 이 세 사람의 약자를 띤 실험은 초기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 로 분리된 양자적 대상인 S1과 S2의 두 체계를 상정하였다. S1과 S2는 물론 공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 실 험의 요약은, S1에 외부의 영향력으로 인해 결과로서 S1이 변했을 때 아무 관계도 없는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 화값만큼 변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 쌍둥이 형제 S1과 S2가 서울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하자. S1은 백록담으로 갔고 S2는 천지연으로 갔다. 백록담에 간 S1이 돌에 부딛쳐 이마에 혹이 났는데, 같은 시각에 천지연에 있는 S2는 돌에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이마에 혹이 났다. 이런 상황은 물론 상식적 인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알지 못할 상 관성이 있고 서로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관계로 직조된 세계라 는 것을 밝혔다.
그럼 융의 동시성 현상은 무엇인가. 소련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실험을 하였다. 어미 고양이를 바다 깊은 곳의 잠수함에 가두고 지상에서 새끼 고양이를 죽인 일련의 실험이다. 이 실험에서는, 지상에서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순간 잠수함의 어미 고양이는 움찔거리면서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가.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의 관계에 보이지 않는 내재적 상호작용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러한 작용은 동시성의 부분적인 증명사례이다. 우선 동시성은 동일하지 않은 시간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과, 동일한 시간으로 연결된 사건의 동시성이 있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아버지의 교통사고를 꿈에서 보았는데 '그날 오후' 그 교통사고가 현실에서 일어난 경우이고, 후자는 부산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교통사고가 서울에 있는 아들 에게 '동시에' 마음에서 스쳐 지나간 경우이다. 특히 여기에서 논의하는 동시성은 후자, 즉 동일한 시간으로 연결 된 사건의 동시성만을 지칭하려 한다.
지금 이 순간 부산과 서울은 동시적 세계이다. 융의 동시성 이론에 의하면 한 순간에 부산에서 발생된 정보가 동 시적인 순간 서울에까지 전달될 수 있음을 밝혀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시성 현상의 외양은 EPR의 실재관을 근 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만약 부산에서 발생된 정보가 <동시적 시간>에 서울 에까지 전달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지상에서 발생된 새끼 고양이에 관한 정보가 <동시적 시간>에 깊은 잠 수함에 있는 어미 고양이에까지 전달된다고 할 수 있는가? 정각 12:00:00초에 부산에서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났 을 때, 12:00:01초에 아들이 그 정보를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 는 현상일 수는 있어도, 동시적 세계에 대한 정보소통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소통에 있어서 1초라는 단위는 여전히 매개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엄밀하게 말하면, 아들의 인식은 1초 전의 과거의 정보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아들의 정보가 1초 전의 과거의 정보에 대한 인식일 지라도, 1 초 사이에 서울과 부산의 서로 떨어진 존재가 어떠한 의미있는 감응을 할 수 있음(!!)을 밝힌 최초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융의 동시성 이론은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우선 융의 동시성 현상은 결코 현대과학과는 유리된 사각지대의 현상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동시성 현상의 근거인 실재관으로서 융의 동시적 세계와 EPR 사고실험을 말할 수 있다. 화이트 헤드는 관계가 진정한 실재이며 대상은 추상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EPR 사고실험의 아이디어 를 별 무리없이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엄격히 비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실재관과 EPR 사고실험의 실재 관은 정면으로 대립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동시적 세계는 정보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입장과 정보소통이 가 능하다는 입장이 바로 그 지점이 된다. 이렇게 두 이론 사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화이트헤 드와 EPR 사고실험은 융의 동시성 이론을 지지하는 실재관으로서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pp.125,168,320 ;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 가 - 현대 자연철학의 이해} (서울:소나무, 1995년), pp.139-206.
[13] 융의 동료인 폰 푸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융의 심리학과 과학과의 관련성을 Man and His Symbols 후반 부에서 개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푸란츠에 의하면 융이 전개한 정신현상에 관한 이론과 현대과학은 긴밀한 함 수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14] C. G. Jung, The Psychology of the Uncou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p.117.
[15]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344.
[16] Rudolf Otto, Das Heilige (Muenchen : Verlag C. M. Beck'sche Reihe, 1987), p.163.
[17] Ibid., p.164.
[18] 융은 우주의 대극쌍으로서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를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플레로마는 원형의 세계이고 자기 (Self)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고 무(無)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그리고 플레로 마와 대극의 자리에는 크레아투라가 놓여있다. 크레아투라는 자아(自我)의 세계이고 의식의 세계이다. 융은 의식 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해는 지(知)이고 그것은 분별(分別) 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의 세계인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인 클레아투라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은 플레로마 자신이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보이려는 강렬한 의지이고 신념이다. 그런데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긴 장적 대극적 운동은 플레로마의 세계인 무로 와해되는 것, 그리고 클레아투라의 세계인 끊임없는 분열상으로 와 해되는 것을 동시에 지양한다. 클레아투라를 통하여 플레로마가 승화되어 드러나는 과정, 혹은 플레로마의 중심 인 자기로 향해 가는 과정이 개성화(個性化)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자기실현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평탄 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이란 또한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플레 로마의 무로 와해되지 않고 클레아투라의 구별로 와해되지 않는 고양과 상승의 과정으로서의 개성화는, 결국, 세 계를 배제하지 않고 수용한다 ;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p.365,466. C. G. Jung(이부영 역), {현대의 신화} (서울 : 삼성출판사, 1993), p.21 참조.
[19] 우리는 개성화(individuation)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융에게 있어서 개 성화는 개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개인주의는 한 개인에게 부과된 고유한 기질의 단층이다. 또한 개인주의의 기 질은 한 개인의 사회적 실현을 간과하거나 혹은 억압한다. 하지만 개성화는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온전히 실현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특성에 대한 깊은 사려는, 더욱 성숙한 사회적 실현을 추구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 C. G. Jung, The Relations between the Ego and the Unco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p.171.
[20] C. G. Jung, The Meaning of Psychology for Modern Man, The Collected Works, vol. 10, pp.144-45.
■ 참고문헌
1. 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2. ___________, The Psychology of the Uncounscious, The Collected Works, vol. 7.
3. ___________,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Belief in Spirits, The Collected Works, vol. 8.
4. ___________, The Meaning of Psychology for Modern Man, The Collected Works, vol. 10.
5. ___________, Answer to Job, The Collected Works, vol. 11.
6. ___________, The aims of Psychotheraphy, The Collected Works, vol. 16.
7. ___________(이부영 역), {현대의 신화} (서울 : 삼성출판사, 1993).
8.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문당, 1989).
9. 이부영, {분석심리학} (서울 : 일조각, 1982).
10.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Jung, Carl"
11.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12. Rudolf Otto, Das Heilige (Muenchen : Verlag C. M. Beck'sche Reihe, 1982).
13. Arthur Koestler(최효선 역), {야누스-혁명적 홀론이론} (서울: 범양사, 1993).
14.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 현대 자연철학의 이해} (서울:소나무, 1995년).
한신 23, 1996
참조 : 칼 구스타프융의 동시성 이론과 그 의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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