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L.비트겐슈타인의 인간지각작용 이해(정윤승)

나뭇잎숨결 2012. 12. 3. 12:04

 

 

L.비트겐슈타인의 인간지각작용 이해
-『On Certainty(확실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정 윤 승 (충남대)

한글요약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언어와 실재가 일치한다는 그림이론을 전개하면서 지금까지의 철학적 문제는 그릇된 언어사용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한 철학적 문제가, 개념적으로 분명하고 확실한 단어 사용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까지 어떤 한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과 이론이 난무했고 그들간의 의사교환 혹은 종합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각각의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단어가 그 의미와 개념에 있어서는 다르게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한 단어는 한 사물에 대응되어야 하기에 철학에서의 개념 역시 한가지 의미만을 가져야 한다고 보면서 완전한 인공언어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이론에서 보여주었던 일원론적 방법론을 포기하게 된다. 이것은 ‘말놀이(Language Game)’라는 개념으로 응축될 수 있는데 이것은 언어가 사용되는 각각의 상황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묘사한 것이다. 세계 전체는 분명 언어로 드러나지만 언어가 세계 전체를 완전히 표현하지는 못한다. 다만 언어는 인간 삶과 관련 맺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소박한 표현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 개인의 감정조차도 언어는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발화상황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불충분한 언어로서도 충분히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기반에 있어 확실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도 아니고 경험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은 불확실한 인식을 확실한 것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후기 사상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 1978) 』와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 1969)』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논자는 특별히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본 논문이 밝혀내고자 하는 논제를 펴고자 한다. 이 저서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썼던 책으로 『철학적 탐구』에서 다루었던 내용 중 인식에 관해 더욱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그의 인식론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서『확실성에 관하여』는 인식의 확실성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한 명제의 확실성이 그 밖의 다른 명제에 의해서 입증될 수는 없다고 설명하면서, 만일 어떤 사실이 확실하게 여겨지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확실한 것인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 사실이나 대상에 대한 이 같은 의심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상황에서 내가 과연 손이 있는지 의심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의미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것이 「확실성에 관하여」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영어에서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알고 있다(I know that ~ )”라는 문장은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믿는다(I believe that ~ )“ 혹은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추측한다(I guess that ~ )“라는 문장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말에서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알고 있다“는 문장은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조심스럽게 알리거나 자신이 어떤 사실이나 대상을 알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때 사용된다. 위에서 언급된 영어에서의 ‘~알고 있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생략된다. 이처럼 생략된 상태에서 쓰이는 ‘~알고 있다’는 말은 영어에서의 ‘알다(know)'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알다‘란 말은 인식된 사실임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확실한 것임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인식의 기초로서의 믿음과 주관적 확신의 표현인 ‘안다’는 개념은 상치된다.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알다’라는 말과 ‘믿는다’라는 말을 이처럼 비교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결국 인간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실제로 인간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인 의미의 부정적 회의론이라기보다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인식의 불완전 속에서도 서로의 의사를 이해하며 자신의 인식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구하며, 결국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울타리 -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말놀이(language game)로 표현한다 - 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회의론이라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의 첫째 장에서는 그가 화두로서 대두시켰던 앎의 확실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의 앎, 즉 무엇 무엇을 안다는 것이 결국 그러하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며, 둘째 장에서는 불확실한 인식, 즉 각각의 상황이 가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 인식 내용이 비록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앎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임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그러한 불확실한 인식 내용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근거를 세 가지로, 즉 경험을 뛰어넘은 인식의 토대로서의 언어, 확실성을 뛰어넘은 인식의 토대로서의 불확실성 그리고 전통적 권위를 뛰어넘은 인식의 토대로서의 주관적 승인을 밝히고자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하는 인간의 인식을 데카르트와 비교해 보면 방법론적으로는 회의적 수단, 즉 의심을 통해 인식의 기준을 찾고자 했다는 데서 유사하지만 확실성을 바탕으로 인식체계를 구축하려는 데카르트와 달리 불확실성을 인식의 본질적 요소로 이해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인식은 그러한 불확실성을 확실한 것으로 믿고 신뢰하고 각 상황에서의 단어의 쓰임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다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규칙을 비판없이 수용하는 것이 우선하고 그 다음에 변화와 수정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주제어 : 비트겐슈타인, 인식, 확실성, 불확실성, 주관적 승인.

1. 지식의 개념

1)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에 대한 회의

비트겐슈타인은 ‘안다’라는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모른다”라는 문장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이 문장에서 ‘안다’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 의미를 표현하는 문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나는 내가 인간임을 모른다”는 문장과 그 반대 의미를 지닌 “~안다”는 문장은 모두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명제를 “나는 내가 진정 인간인가, 다시 말해 내 안에도 인간의 기관, 예를 들어 뇌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문장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의 뇌를 본적이 없으며 다만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이 믿음의 기원은 간접적인 다른 경험에서 온 지식에 의한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명제에 대한 이해가 그 명제에 대한 이해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믿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묻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그렇게 믿는 것일 뿐이지 사실이 그러한지는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인간의 존재 이해 방식이 그러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이 맞닥뜨린 상황에서 그렇다고 믿는 것이 쉽게 상상될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쉽게 이해되거나 상상될 수 없는 상황은 되도록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쉽게 이해되거나 상상할 수 있게끔 하는 객관적인 확실성이 요청된다.
그러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오류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여기 있는 것은 내 손이며 이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문장과 같이 그것이 사용된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그 대화의 상황을 이루는 말놀이를 이해함으로써 분명해진다. 그 발화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화자가 의미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명제가 결코 무의미한 명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더 이상 잘못된 것이 아니다. 또한 위의 명제와 함께 “어떤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명제는 이미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확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말놀이에서는 믿어 의심할 수 없는 전제가 그 무엇보다도 앞서 있다.
이처럼 모든 것에 앞서 있는 변치 않는 믿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놀이의 규칙을 익혀야만 어떤 놀이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일련의 훈련이 요구된다. 그런데 말놀이의 규칙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12×12=144’가 확실하다는 것은 그것이 확실한지를 결정하는 규칙 자체를 배워서가 아니라 그 계산 방법을 배움에 의해서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규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비록 확고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실천적 목적을 가지는 주관적 승인에 불과하다.
감각적 경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상적으로 물리적 대상이라는 개념으로 통용되는 ‘ㄱ’이라는 낱말은 ‘ㄱ’에 대한 실재적인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혹은 물리적 대상이란 것이 경험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용된다. 사실 물리적 대상이란 경험적 개념이 아닌 논리적 개념으로서 다른 대상 혹은 개념을 가르치는데 사용되는 논리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어떤 말놀이에서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 있다. 물론 관념론자에게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명제일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말놀이가 서로 다르다는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이 어떤 말놀이에서 의미를 갖는지 갖지 않는지에 무관하게 이미 논리의 한 부분에 속한다.
게다가 우리는 “나는 어떤 것을 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지를 의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외적인 것을 눈과 의식에 투영된 것을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을 통해 지각된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형태인지를 알게 할 뿐, 과연 그 이미지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나타내 주지는 않는다.

2) 확고한 ‘지식’의 변화 가능성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안다’라는 개념이 말놀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말놀이의 규칙과 단어의 의미를 대응관계라고 보는데, 이것은 규칙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말놀이가 바뀔 때에는 단어의 개념도 변화하며 그 개념과 더불어 단어의 의미들도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말놀이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실재로는 그렇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러하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나 자신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착각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잘못된 믿음을 모두 오류라고 여길 수는 없다. 더욱이 여기에서의 착각은 단순한 것이며 쉽게 바로잡아 질 수 있다. 그러나 오류는 그것을 일으킨 사람이 여러 가지 근거를 댈 수 있는 것이기에 쉽게 바로 잡기 힘들다는 점에서 착각과 구별된다. 즉 오류는 원인뿐만 아니라 근거도 가지고 있으며, 그 오류를 행한 사람의 지식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된 오류는 더 이상 오류일 수 없다. 사실 이런 식으로 판단하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지식, 지구의 연대 등도 오류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모든 인식체계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의 인식체계는 그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나의 확신보다는, 오히려 이것은 전승된 것에 가깝다. 물론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확고한 명제들이 비유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즉 변치 않는 명제가 일순간 변할 수 있는 명제로 변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총체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주변 테두리의 부분적인 변화는 가능하며 실제로도 그러한 변화는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확실성의 체계 전테가 변화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부분적인 변화는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인식의 기반인 확실성은 부분적으로 의심될 수 있고 변화되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의 의심까지 의심하게 되어 더 이상 아무 것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시말해 의심 자체는 확실성 여부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판단 체계는 의심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이미 최소한의 확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 확실성의 근거를 경험에 둔다면 또다시 우리는 그 경험의 또 다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순환논리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 역시 우리 판단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항상 일어나던 것은 또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추측 혹은 기대가 그 근거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의심에 전제된 최소한의 확실성에서 보았듯이, 어떤 믿음은 확고부동하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여러 가지 것들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 의심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믿음 이후에 뒤따른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믿음의 체계가 형성되고 그 체계 속에서 어떤 사물에 대한 생각은 고정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정된다는 것은 단순히 단독으로 고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주위에서 바뀌고 있는 생각의 체계에 의해 그 자리가 매겨지고 고정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을 믿을 때 그것은 단순명제가 아니라 명제의 전체 체계이며, 상호 보완적 관계의 체계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판단들뿐만 아니라 그 판단들 사이의 관계로서 이러한 교육에 의한 체계를 통해 우리는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런데 이 확실성은 결국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이 어떠하다’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닫혀진 것이어서는 안되며 변화에 대해 항상 열어져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떤 것이 확실하게 참이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라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먼저 한 명제에 대해 지지할 것인지 혹은 반대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는 한 명제에 대한 참․거짓의 결정이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는 말해주지 않은 채 명제에 대한 찬반 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의심의 가능성

우리의 판단 체계는 의심에서 시작되지만 그 의심 자체마저도 의심할 수는 없으며, 더불어 우리는 그러한 의심 이전에 우리에게 전승된 내용들을 믿고 실천하라고 배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체계를 이루면서도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는 그러한 의심할 수 없음의 근거를 과연 전승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러한 의심은 가능하다. 우리는 여러 사실들 모두를 하나씩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사실들 모두를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사실들은 단순하고 몇 가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사실들 속에 내포된 그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여러 사실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서 모든 사실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 판단 방식과 행위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있어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통해 의심할만한 것에 관해서만 의심한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출생하기 오래 전부터 지구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나에게 확고하고 명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있는 모든 부류의 판단들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장에서 보았듯이 확실성의 근거를 경험에 둘 수는 없지만 의심의 일부분은 경험의 도움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사실은 ‘안다’라기보다는 ‘믿는다’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집단을 이루며 같은 구성원끼리 살면서 그 말놀이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형성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맹목적이진 않지만 전승되어 온 그 믿음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다. 그 믿음이 고정되고 폐쇄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 열려 있어 다른 말놀이의 구성원과의 의사교환이 가능한가가 중요한 점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다른 말놀이의 규칙을 배워야 하며 최소한으로 믿어야 할 판단들이 있다. 이것은 그 판단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 구성원들이 믿어 왔던 것으로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인식은 확실하지 않으며 의심의 근거로서의 삶의 방식 역시 가르쳐 지고 전승되었을 뿐 그것의 근거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던 것은 긍정적 의미에서의 회의론을 표방하는 것이다.


2. 인식의 불확실성

1) 불확실한 인식의 오류없음의 근거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과학적 주제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의미를 보여주는데 사용되는 문장이다. 여기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명제에 대한 반대명제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리적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 역시 철학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만약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을 “인간은 자아 혹은 사유(res cogitans)와 독립된 연장(res extensa)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자라고 한다면, 그러한 의견을 거부하면서 “물리적 대상은 자아, 사유 등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관념론자라고 볼 수 있다.
관념론자의 주장은 실재론자의 관점에서 볼 때 회의적이라고 받아들여 질 수 있다. 물리적 대상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일상적인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특수한 가정에 관해 회의적이며,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 같은 견해에서 ‘관념론적 회의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내가 나의 손이라고 여기는 그 대상이 실제 나의 손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회의주의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가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만 ‘그 대상이 실제 나의 손이다’라는 긍정적인 주장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믿음과 ‘우리가 물리적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재로는 매우 상이한 것, 즉 감각들, 추상들이다’라는 믿음을 고수할지도 모른다. 물리적 대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어떤 것이라고 정의한 그것이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다른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트겐슈타인 역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 대상을 긍정하는 주장에 대한 피상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며 더욱이 두 주장의 논리가 성립되는가를 문제삼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회의주의도 아니다. 여기서 만일 각각의 긍정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의 논리를 문제시한다면 이것은 결국 어떤 진리값(truth-value)도 무의미한 명제일 수 없다는 주장에 머무를 것이다.
그 명제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의 논리를 따른다. 만약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경험적 명제, 경험에 대한 명제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를 만족시킬 경험이 존재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경험이 다가갈 수 없는 명제이며, 오히려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처럼 어떤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다가간다면 어떤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주장할 때, 이 주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확신하며 아울러 그것을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기 위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그 정당성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참을 확신할 수가 없다면 그 주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긍정과 부정에 대해 양자택일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이처럼 회의적 입장에 서지 않고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양자택일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명제의 정당성만을 판단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의 전체적인 체계, 즉 다른 명제와의 관계 속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어떤 것을 검사할 때는 검사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가정 혹은 때로 배워진 것으로서 여겨지는 것과 개인적인 가설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는 전자를 탐구의 ‘자명한 근거’ 다시 말해 ‘세계 그림’이라고 부른다.
즉 세계그림의 토대 위에서만 참 혹은 거짓의 판단과 검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세계그림 자체에 대한 진술의 참․거짓에 대한 질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세계관에 익숙해져 가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게 된다. 분명히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어떤 특정한 상황들에서는 실수를 할 수 없다(여기서 ‘can'은 논리적으로 사용된 말이며, 그 명제는 사람이 그러한 상황들에서는 어떤 오류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무어가 그가 분명하게 주장하는 그러한 명제들의 반대를 말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그의 의견에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미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사람이 실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일반에 일치하게 판단해야 한다.

위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반을 따라가지만 일부분에 있어서 일반과 다른 경우를 일컫는다. 그는 오류가 불가능한 정황을 찾고자 했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명제, 즉 ‘12×12=144’, ‘나는 방금 점심을 먹었다’, ‘나는 결코 달에 간 적이 없다’ 등의 여러 가지 예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예들은 오류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 종류가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일군의 대상들에서 수학적 판단만은 제외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에 관한 자신의 노트 결론에서, 누구도 오류를 절대로 범하지 않을 상황의 ‘특징’을 제시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의 오류로부터 면제되는 상황'과 '우리가 실수할 수 없는 상황'이 같은 의미임을 제시해주고 있다.
여기서 오류가 면제(immunity of error)된다는 주장으로 제기되는 것은 첫째, 어떤 주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문제 둘째, 우리의 행동과 언어사용에 있어서의 오류 면제 규칙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오류 면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알기는 하더라도, 옳지 않은 어떤 것을 하거나 혹은 옳거나 참이 아닌 어떤 것을 말할 때에 오류를 범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방식의 다양성을 무시한 면이 없지 않지만, 인식론의 측면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주체가 사태의 존재를 믿는다고 가정하고, 주체가 그것을 믿는다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잘못되었음을 의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오류는 단지 의견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즉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그것이 참이라고 확신하더라도 결국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사람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와 같은 기술(記述)을 모두 오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즉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 실수의 가능성은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들 - 정의 혹은 의미의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이 오류라고 불릴 수 있기는 하지만 ‘놀이 안에서는 그 입지가 마련되지 경우’들 - 에 대해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행위자 혹은 그 발화자를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머리가 없다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신은 뭔가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머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합리적인 설명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신병자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실수다, 단순히 안다는 주장이 안다는 주장의 참을 성립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항상 자연의 도움에 의한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아는지 어떤지는 그 증거가 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지에 좌우된다.

주어진 어떤 증거가 진정 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지는 내 자신의 판단이나 추리에 달려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그 상황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어떤 사물들은 사실상 의심되지 않는다’는 우리들의 과학적 탐구는 논리학에 속한다.
... 의심 없음은 말놀이의 본질에 속한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하더라도 당신이 현재 어떤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까지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심의 놀이는 그 자체로 확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2) ‘인식의 불확실성’에서 드러나는 회의적 관점

분명 우리의 인식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불확실한 인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세계그림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록 의심이라는 방법론이 데카르트적이라고 보일지라도, 분명 그것과는 상이한 점이 있다. 첫째로, 의심이란 그 끝이 분명한 의심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또한 그의 언어에서 사용된 의심이란 표현까지도 의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하면 의심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만일 어떤 것을 의심하고 있다면 이것은 최소한 어떤 가정에 대해 반대하거나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음 속에 이미 받아들여져 있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기준은 그 정당성을 의심하거나 문제삼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내가 사려고 하는 빵의 무게가 진짜 1 킬로그램인지를 의심할 때, 다시 말해 나의 판단을 확인하고자 할 때 그 저울이 정확히 표준치 킬로그램에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내 빵의 무게를 잴 수는 없다. 셋째로, 어떤 것에 관한 판단들을 구성할 때, 우리는 백판(tabula rasa)이라는 토대를 배경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그림(world-picture)을 배경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이 세계그림은 믿거나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일군의 참 명제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가설을 검사하고 확증한 것을 기초로 하여 진리치를 배분하고, 다른 개념 구조는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도 한다.
‘어떤 경험 명제들의 참은 우리의 - 행동․판단을 지배하는 - 준거에 속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일부의 가정과 인식론적 태도(믿는 것,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 인식하는 것)들 역시 사고와 행위의 기초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토대 문제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시도한 해결 방법들이 그 성격에 있어 회의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요소와 유사한 면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세계그림)의 옳음에 만족함으로써 세계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그 옳음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세계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세계그림)은 내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승된 배경이다.

즉 세계관이란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검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의 세계관은, 참 혹은 거짓이 문제시되며 시험되어야 할 우리들의 확신을 위한 배경을 구성해야 한다. 세계관의 옳음(참 혹은 거짓) 자체는 어떠한 검사에서도 벗어나 있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의심, 즉 회의적 방법은 회의주의와 분명한 차이점이 지니고 있다. 회의적 방법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회의주의와 유사하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 어느 한쪽을 편들어 결정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의 대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닌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즉 ‘회의적 방법’은 확실성에 기초를 두는 것인데 이것은 ‘오해되고 있었던 부분들을 발견하는(to detect the point of misunderstanding)’ 노력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는 모든 주장을 검사한 뒤 그것들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회의주의와는 다르다.


3. 인식의 토대

우리는 종종 단어에 의해 마술에 걸린다. 예를 들면 “알다”라는 단어에 의해(O.C. 435.)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는 언어와 논리 그리고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이었다. 여기서 언어로부터의 자유란 전통적 관습이나 태도로부터의 자유이며, 논리와 세계로부터의 자유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에 대한 거부를 말한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이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거부하고자 했기 때문에 근대 유럽 철학과는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실재로 결별하고자 했던 것은 종래의 흐름, 즉 역사․언어․편견․법 등에 의존하는 권위적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물론 그가 「논리철학논고」에서 세계를 알려질 수 있는 것과 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 나누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언어는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말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언어가 어떤 것으로부터도 철저히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고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전통적인 언어관과의 타협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알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관점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과연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 수 있을까, 언어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일치할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의 개념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던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언어와 인식의 관계성이라는 문제를 고찰하는데 있어 그의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책의 전체 의미는 다음의 단어들로 요약된다;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T pg.3).

그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한계가 있음을 램지의 비판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결국 후기에 와서 그는 지식은 승인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통해 새로운 지식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라는 명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제로서 아는 것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식은 어떤 사물에 대해서는 왜곡되어져 있어 수정되어야 부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이 오랫동안 증명되어온 것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고수해왔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식이란 경험에 의해 기초지워지고 확실해야 하며, 지금까지의 철학적 전통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지식이 경험 없이도 가능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알기 위해서 경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도 하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식이 확실성 없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잘못을 범할 것이며 결점 없이 놀이를 하면서 여전히 질 것이다. 그러나 지는 것은 잘못 노는 데에 대한 규준이 아니다. 우리는 비난받지 않고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실수와 오류는 가능하며 실제로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식은 확실성을 요구함으로써 윤리적인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끝으로 지식이 권위 없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알 수 있는 능력, 배울 수 있는 능력, 더욱이 권위에 대한 경험 혹은 이성에 의지하지 않은 채 우리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개념은 플라톤 이래의 인식론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던 참된 믿음으로서의 지식체계를 와해시킨다. 경험 없이 가능한 지식은 진리 조건을 제거한다; 확실성을 유일한 목표로서 설정하거나 이를 추구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를 진리에 얽매이지 않게 한다;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은 그것이 소박하고 다루기 쉬운 것임을 알게 해 준다. 궁극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들의 진리 상태, 혹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의 정신적 상태에 관해 초점을 맞추는 대신 행위들과 그것들의 상황에 눈을 돌린다. 어떤 것을 아는 것은 마음과 사실 사이의 단순한 관련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들이 포함된 복잡한 작용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숙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리의 명제들뿐만 아니라 경험 명제 형식의 명제들도 언어로 하는 모든 사고 작용의 근본 토대에 속한다. - 이러한 관찰은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라는 말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라는 말은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술하는데, 그것은 논리적 관심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언급에서 “경험적 명제들의 형태를 지닌 명제들”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물체적 사물들에 대한 말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면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는 가설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초로서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쓴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1) ‘경험’을 배제한 인식의 토대로서의 언어

당신은 언어를 배울 때 ‘고통’이라는 개념을 배운다.
나는 이 색깔이 빨간색인지 어떻게 아는가? 말할 대답은 이럴 것이다: ‘나는 영어를 배웠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위와 같은 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동문서답 같이 여겨질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배움으로써 고통과 색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인정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색깔과 고통을 인식하게 되며 그 대상들은 경험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고통들에 대해서는 느끼고, 색깔들에 대해서는 본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을 느끼고, 색깔들을 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지만 경험을 통해 색깔들과 고통들에 대하여 배웠다는 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물론 일상언어에서의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인식의 분명한 이정표는 경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단지 감각되어진 것에 이름 붙이는 것을 하기만 한다. 하지만 색깔과 고통이란 낱말은 분명 교육에 의해서 개개인에게 가르쳐진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어떻게 불리는지는 교육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감각적 내용이 언어 없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우리는 언어를 배움으로써 고통과 같은 우리들의 경험들을 확인한다.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언어가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는 개념에 그리 멀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고통의 혹은 색깔의 지식이 언어에 의존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것들의 실제적인 경험에 있어서 발견할 수 있는 언어의 비판적인 역할은 더욱 인정될 것이다. 다시말해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지 간에, 그리고 그 이름이 ‘모호한’, 혹은 ‘선명한’ 경험일지라도 이름붙이기 과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배움은 지식 놀이의 부분이지 경험 놀이의 부분이 아니다. 고통을 아는 것은 바로 고통을 가지는 경험놀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하는 말놀이에 해당한다.
언어의 사용기술은 인간 경험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언어를 경험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 지식에 대한 경험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고통 혹은 색깔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그것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경험이 언어를 소유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경험적인 내용 없이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어가 경험을 얼마나 조절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적 언어에 대한 논의 중 특별히 ‘상자 속의 딱정벌레’라는 표현은 인식에 있어서의 경험적 요구를 간결하게 비판한다.

만일 내가 “고통”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 자신의 경우로부터만 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러한 하나의 경우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가?
이제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 사람 자신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다만 그 자신의 경우로부터만 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을 상자 안에 넣고 그 상자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라. 아무도 어떤 다른 이의 상자를 들여다 볼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은 그가 그의 딱정벌레를 봄으로써만 딱정벌레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한다. -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상자 안에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물이 계속해서 변화한다고까지 상상할 수 있다. - 그러나 “딱정벌레”라는 단어가 이러한 사람들의 언어에 있어서 어떤 쓰임이 있다고 가정하라? 그렇다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이름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자 안의 그러한 사물은 말놀이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것으로서조차도: 왜냐하면 그 상자는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 아니다. 우리는 상자 속에 있는 그 사물에 의하여 ‘약분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상쇄된다.
말하자면, 만일 우리가 ‘대상과 명칭’의 틀 위에서 감각을 표현하는 문법을 구성한다면 그러한 대상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숙고하는 것에서 손을 뗄 것이다.

단어들은 사물이나 관념을 말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말 혹은 언표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의미는 첫째로, 어떤 단어가 그것을 포함하는 언어 예를 들면 영어, 한국어 등등 언어에서 가지는 의미, 둘째로 발화자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쓰임새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교환을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규칙과 같이 실행을 요구하며 언어적 기교에 정통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어떤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는 그것도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 할만 것일 수 있는 어떤 것인가? - 이것은 물론 “규칙을 지키는 것”이라는 표현의 문법에 대한 주해이다.
어떤 사람이 규칙 지키는 단 하나의 상황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이 이루어진, 명령이 주어진, 혹은 이해되는 등등의 단 하나의 상황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규칙을 지키는 것, 기록이 이루어지는 것, 명령이 주어지는 것, 체스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관습들(쓰임들, 관례들)이다.
어떤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이해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술에 정통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나 나는 이해한 것처럼 보이는 소리들..."로서 정의되는 사적언어는, 언어에 의해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에게 나누어진 그리고 공적인 규칙들의 체계이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요구 때문에 하나의 언어로서는 부족하다. 사적언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적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또한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암호(나만이 이해할 수 있게 쓴 낱말이나 개념; 예) 일기 속에서 사용하는 이니셜)들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사적 언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적 암호들을 ‘언어’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서 만일 경험은 사적이고, 언어가 공적이라면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공적인 공간에서 전개되는 일반적인 도구가 어떻게 사적인 목적들을 위해 쓰이게 되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해답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지식’이라고 한다면, 즉 “딱정벌레”라는 단어가 어떤 경험들을 가지는 데에 좌우된다면 그때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논의가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 각자는 딱정벌레의 서로 다른 표상 혹은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딱정벌레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고 상자는 비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경험만으로는 우리에게 그것의 수많은 이름들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딱정벌레’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경험으로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경험이 일대일의 단순한 방식으로 언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내용들은 자연의 일반적인 사실들에 막연하게 의존하고 있다. 즉 우리가 고통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언어에 있는 놀이와 관련된 고통은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만 단어의 쓰임은 명확히 규정된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러한 혹은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안다. 더욱 비정상적인 그리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만일 사물들이 그들이 실재로 있는 것과 매우 다르다면 - 예를 들어 고통의, 두려움의, 즐거움의 특징적인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규칙이 예외가 되고 예외가 규칙이 된다면, 혹은 양자가 대략 동일한 빈도의 현상이 된다면 - 이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언어가 그들의 요점을 상실하게 된다. - 저울 위에 치즈 한 조각을 놓는 과정과 그 저울의 변화에 의해 그 가격을 정하는 과정은 그러한 조각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자라거나 작아지는 것이 자주 발생한다면 그것의 요점을 상실할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우리가 그러한 사물들을 느낌과 그것과 비슷한 주제들에 대한 표현의 관계로서 토의할 때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고통이라는 개념을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그들이 고통을 경험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재고해야 할 것은 ‘경험’을 위해서 어떤 기준이 필요한가이다.

고통을 결코 느껴보지 않은 어떤 사람이 “고통”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가? - 이것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인가? - 그리고 우리가 “사람은 가끔씩 그것을 느껴보지 않은채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어떻게 그것이 참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명시적 정의가 가지는 다의성에 관해서도 같은 입장을 지닌다.

의심할 바 없이 명시적 교육이 이것(석판)을 가져오는데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지 어떤 개별적인 훈련과 함께 해서만이다. 이러한 단어들의 동일한 명시적 교육은 다른 교육과 함께라면 매우 다른 이해를 초래할 것이다.
“나는 막대와 지레를 연결함으로써 브레이크를 걸었다” - 나머지 기계장치의 전체가 주어진다면 그렇다. 기계장치와의 연결에서만 이것은 브레이크 지레이고, 이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면 이것은 지레조차도 아니다; 이것은 어떤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단어가 어떠한 문맥과 체계에서 사용되는지를 아는 것이며 이것은 삶의 형식에 의해 좌우된다. 문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결국 단어들의 쓰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러한 사물들의 경험에 의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우상 다시말해 참된 지식는 이해는 경험을 요구로 한다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예로 우리 모두는 ‘딱정벌레’라는 말로 실제로는 다른 의미의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고통’이라는 말로 다른 경험을 나타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이해마저도 때로는 불일치하게 된다는 회의주의와 정면 대결하게 된다. 우리는 착각이 아닌 정상적인 상황에서 “착각”이라는 단어를 배운다. 분명히 우리는 단절됨이 없이 서로의 의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요구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의사교환이 항상 일어난다거나 쉽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들은 어떤 한 책상의 외관에 대한 우리들의 예상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왔다. 그래서 때때로 그것이 의자인지 책상인지 혼란을 겪을 때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언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배워왔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언어는 공적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어를 발명할 수 있겠지만 그 언어들은 언어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부분들 - 언어는 의사교환이라는 목적성을 띠고 있다 등등 - 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공적 언어의 창조성이나 변화성을 막는 것은 아니다.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공적이고 가르쳐져야만 하지만 그 이후에는 변화될 수 있으며 일상적으로 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글씨를 쓸 때 특정한 근본 형태를 배우고 그리고 나서 이것을 나중에 변화시키듯이 그렇게 우리는 우선 사물들의 지속성을 표준으로서 배우며 그리고 나서 그 표준은 변화들을 겪는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현상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정형적이지 않고 그때마다 변화되고 창조되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때 사용되는 단어와 문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통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이러 이러하게 반응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가 그렇게 한다면 그 아이는 그로써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은 더 나중 단계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즉 언어는 우리에게 개념들을 가르쳐준다. 또한 언어는 우리의 육체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명료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한다. 단어는 결코 이름 붙이기(labeling) 이상의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모든 언어는 무의미해진다. 반대로 경험을 가지는 데에 있어서 언어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도 이것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에게 그들이 고통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언어의 이름 붙이기의 역할은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고통을 느끼거나 가지는 것과는 달리 경험은 언어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언어에 의해서 이미 변화되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우리들의 교육과는 매우 다른 어떤 교육 역시, 매우 다른 개념들을 위한 기초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삶은 다르게 돌아갈 것이다. - 우리에게 흥미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흥미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개념들이라는 것이 더 이상 상상되어질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이 상상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어는 우리의 개념을 구체화시키며 우리에게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는 그 밖의 막연한 경험까지도 분명하게 한다. 물론 언어는 우리의 경험을 축소시키거나 변화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문법은 우리가 고통이 ‘고통’이라는 단어임을 확인하도록 돕는다. 문법은 우리에게 그 단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그렇게 해서 세계 속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판별력을 가지게 한다.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그러한 존재에 관한 영역을 정하도록 하고 개념적 영역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와 사물의 연관성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존재한다.

그럼 모든 것이 하나의 가설을 지지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면 그때 이것은 분명하게 참일까? 우리는 이것을 그러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실재와 그리고 사실들과 일치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더불어 당신은 이미 원 안에서 돌고 있다.
참 혹은 거짓이란 표현의 사용은 잘못 이끌어질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들과 일치하거나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일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의 문법 속에서, 분명하다고 여겨진 어떤 사실에 대해 실제 세계에서 그러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세계와 개념적 사실들이 인위적인 연결에 의해 관련되어져 있을 뿐, 인과적 연관성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실들을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와는 다르게 상상한다면 어떤 말놀이는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는 반면에 다른 말놀이가 중요하게 된다. 즉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의 어휘 사용에 있어서 변화가 존재하게 된다.
말놀이가 바뀔 때에는 개념의 변화도 존재하며 그 개념과 함께 단어의 의미들도 변화한다.

세계는 자율적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이론에 대해 독립적이며 관련되어 있지도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저서에서 세계의 본질과 논리가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가 세계와 논리를 완전히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세계가 지식에 있어서 필연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기억하는데 있어서 내적 과정들이 일어 난다는 것.” - 우리가 어떤 것을 부인하기를 원한다는 인상은 무엇이 일으키는가? 우리가 “여전히 내적 과정은 일어난다”고 말할 때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원한다: “결국 당신은 그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수동적으로 기억하기”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내적 과정이다. - 우리가 어떤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인상은 우리들의 그 ‘내적 과정’ 이라는 그림에 우리가 반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내적 과정의 그림이 우리에게 “스스로 기억하기”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를 가지는 이러한 그림이 단어의 있는 바 그대로의 쓰임을 보고자 하는 우리들의 길에 끼어든다는 것이다.

“고통” 혹은 “회상하기”와 같은 사적경험은 마치 알고 있음이 지식에 필연적인 조건이며 더욱이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의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고통을 지니는 고통의 태도와 고통이 없는 고통의 태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 그것을 인정하는가? 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 ”그러나 당신은 반복해서 그러한 감각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결코 아니다. 어떤 것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결론은 다만 무가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에서처럼 무도 마찬가지로 쓰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여기서 우리를 강요하려는 문법을 거절했었을 뿐이다.
역설은 우리가 언어에 대해 그것이 항상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하며 항상 동일한 목적을 위해 쓰인다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깰 때만, 사라진다: 즉 집이나, 고통, 선악, 혹은 그밖에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생각을 운반한다는 것.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이 가진 지식은 의심할 바 없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과 다르다. 그들은 다른 판별력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더욱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경험은 지식에 더 나은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지식에 대해 주장할 자격이 경험의 부족으로 박탈되지는 않는다. 아울러 우리는 경험적 지식을 참된 지식보다는 완전하지 않은 지식이라고 부르려는 경향을 버려야 한다. 양자 모두는 그것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한 사례일 뿐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분류하고자 한다면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하고 적당한 상황들에서 어떤 것이 적절한지를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확신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명제보다도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사용했던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안다’는 명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앎이 가지는 개념적 토대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배우고 자란다. 우리가 정확히 동일한 현상을 경험할 때까지는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실제경험 없이도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형식을 언어에 분배하며 그것은 어느 정도의 이해를 보장해준다. 우리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가난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미국에서의 흑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흑인이 될 필요도 없으며, 성차별에 대해 알기 위해 여성이 될 필요도 없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예들이 있다. 물론 가난해지는 것 혹은 흑인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지식에 증거를 제공하며 그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한 것은 아니다.
덧붙여 말하면 이러한 인식은 공식적인 교육, 즉 교실 혹은 교과서의 가르침을 통해 얻게 된다. 책은 실재 사물에 대한 대리적인 대체물이 아니라 흔히 있을 수 있는 경험의 좁은 교육을 올바르게 수정할 수 있도록 한다. 언어는 경험만큼이나 인식의 매개물이며 여러 경우에 있어서 더 나은 매개체이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은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데 있어서의 성공여부는 언어적 훈련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삶의 형식에 달려 있다. 경험은 상황의 문맥 속에서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러한 문맥은 경험의 기능보다는 언어의 기능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확실성’을 배제한 인식의 토대로서의 불확실성

왜냐하면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는 그것이 알려진 것임을 보증해 주는 사태를 기술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라는 표현을 잊고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성 혹은 의심할 바 없음을 지식의 조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확실성을 인식의 조건을 세우기보다는 인식의 불확실성을 인식의 토대로써 이해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개념은 데카르트를 뛰어넘은 지식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데카르트는 모든 의심과 오류가 삭제되고 그에 더해 그것들이 불가능하게 보여질 때에만 어떤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의심할 바 없음’이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 그리고 객관적 해방을 의미한다. 즉 의심하는 사람 본인은 그 의심이라는 자체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실수를 범할 수 없다. 즉 분명히 그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더욱이 자신의 의심을 의심하는 것은 올바른 의심일 수 없고 방법론적으로 잘못된 의심일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진리를 분석을 통해 얻는다고 이해하는데 반해 칸트는 진리란 종합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방법이 분석이거나 종합이거나 모든 명제들이 적어도 하나의 필연적인 사실이나 명제에 기초지어지는 경우에만 경험적 진리가 아닌 명백한, 필연적인, 명확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에는 양쪽 모두 동의할 것이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이라는 말은 명확한 명제였다. 그러나 아직은 경험적이며 종합적인 명제였다. 사고는 정신적이며 개인적이다. 이와 같이 사고와 연결된 지식의 개념보다 오히려 상위에 있는 사고에 대한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을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먼저 의심에 대한 데카르트적 방법인 “방법적 회의”에 도전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대로 의심할 수가 없으며, 또한 모든 것을 의심할 수도 없다고 논박한다. 의심이란 문맥이 있어야만 하고 그것은 신뢰와 확실성을 수반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의심에 우선한다고 논의한다. 또한 ‘의심 할 여지없음’은 우리가 아무 것도 의심할 수 없는 때에도 어떤 것은 의심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회의적 방법이 철학에 있어서의 최고의 방법론은 아니다.
여기서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앎이란 진리임을 보증하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오류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고 알고 있다”는 것은 “나는 무엇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과 유사하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wissen, videre). 그리고 “나는 그가 방에 있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방에 없었다.”라는 문장은 “나는 그를 방에서 보았지만, 그는 거기에 없었다.”는 문장과 같다.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는 것은(“나는 무엇 무엇을 믿는다”는 것처럼) 나와 어떤 한 명제가 지니는 의미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어떤 한 사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은 나의 의식에 받아들여지게 된다(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외부 세계에서 다가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른바 감각 자료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려 하는지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알게 되어지는 그림을 눈과 의식에 그대로 투영되는 시선을 통한 바깥 사건의 개념으로 제시할 것이다. 다만 바로 그때 ‘우리가 이와 같은 투영(projection)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은 우리의 숙고가 지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실재로 보여주지만, 그 관념의 근저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나타내 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앎은 투영된 것에 대한 추론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주관적인 기준)이나 허위 혹은 오류가 가능한 곳에서만 지식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데카르트를 논박하지는 않는다. 즉 의심이 없는 곳에는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반적으로 의심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간과되거나 무시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의심도 없는 곳에는 어떠한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어의 견해는 실제로 “나는 무엇 무엇을 알고 있다”라는 진술이 결코 실수(mistake)일 수는 없다는 데에서 바로 그 ‘안다’라는 개념은 ‘믿다’, ‘추측하다’, ‘의심하다’, ‘확신하고 있다’는 개념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사실 그러하다면, 그때 그런 어떤 말에서 진실한 주장으로의 추론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안다고 생각했다”라는 형식은 간과된다....

아는 것은(knowing) 믿는 것(believing)과 다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엇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오류가 없을 때 사용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전자가 객관적이며, 후자는 주관적이라고 보는 데서 기인한다. 즉 앎은 의심하기 쉽기 때문에 믿음과 다르며 오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과도 다르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카르트에 대해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앎은 의심할 바 없음을 포함하는 것도 아니며, 진리를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갖고 있었던 지식 개념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음이 아니라 의심될 수 있다 하더라도 확신한다는 것이다.

저기에 의자가 있을 때에만 “나는 저기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실재로 의자가 없다면 참이 아니겠지만 내가 의자가 거기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비록 그것이 틀렸다 하더라도 나는 저기에 의자가 있다고 말할 권리를 가진다.
여기에서 권리라는 것들은 철학자의 사고력에 부담을 주는 일종의 저당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 가운데 일부는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 주장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어차피 우리의 지식이란 것이 항상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과학은 오랫동안 주장되어온 지식을 부정하고 변화시키는 일이 많다. 즉 “지구는 평평하다”, “인간은 지구 표면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다” 등등과 같은 것이 변화의 대상이었다. 지식은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반드시 지식이 진리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지식이 진리를 보장해 준다는 것에 변화를 주려 했다.

그것은 추측이 아닐 것이며 나는 이것을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어떤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것의 무조건적 진리를 의미해 주는가? 내가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나의 전 생애 동안 여기서 보아 온 나무로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나지는 않을까? 이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이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는 “나는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나는 단지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옳았다. 사실 나는 단지 그것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나는 내 이름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 이끌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것에 대해 실수(mistake)를 범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옳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틀리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잘못되었을 수 있으며, 오류에 빠진 것일 수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무엇 무엇을 알고 있다’라는 표현이 비록 ‘나는 이러 이러한 것을 확신하다’라는 명제에 의해서 더 잘 표현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확신한다고 해서 믿음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이란 ‘2+2=4’, ‘이것은 나의 손이다’, ‘나의 이름은 무엇 무엇이다’라는 등의 명제와 같이 결코 반대할 수 없는 그런 명확한 명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명제들은 논리에 속하거나 혹은 사고의 기저에 속하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들이 비록 일상적이며 경험적인 명제들일지라도 기술(description)의 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수학적 명제를 믿을 때의 확실성과 문자 A와 B가 발음되는 방법, 사람의 피 색깔이 불리는 이름, 다른 사람들이 피를 가지고 있음, 또 그것이 피라고 불린다는 것에 대한 확실성은 동일하다.
이것과 12×12=144를 비교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아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명제가 우리들의 잘못된 셈이나 잘못된 계산을 기초로 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그 계산하고 있을 때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는 한, 그러한 수학적 명제와 물리적 명제는 같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러한 물리적 놀이는 수학적 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나의 발언은 논리적인 것이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경험 명제들, 즉 칸트가 ‘종합적’이라고 일컬었던 명제들은 수학적 명제처럼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하게 진리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아니라 - 어떤 명제도 의심으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다 - 우리가 그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 그들은 고정되어 있으며, 앞으로의 모든 진리를 결정짓는데 필요한 틀을 제공하는 기초명제들이 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러므로 논리학도 하나의 경험 과학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다: 동일한 명제가 어떤 때는 경험에 의해 검사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어떤 때는 일종의 검사 규칙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한편 이것이 나의 손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해서 아는가? 오히려 여기서 나는 이것은 나의 손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니는 의미라도 정확히 알고 있는가? - “나는 어떻게 해서 알고 있는가?”하고 내가 말할 때 내가 거기에 대해 아주 적게나마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가지는 것은 내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기초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라는 말에 의해 잘못 표현되어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볼 때 지식이란 실수가 있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논의와 증명이 오래도록 이루어져 왔던 상황, 예를 들면 백두산의 높이와 같은 것에 대해 적용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지식이란 명제의 진리를 보증하는 것이 역할이 아니며 그러한 주장이 근거를 갖는지, 다시 말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가 진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이 불 위에 올려지면 끓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경험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 나는 “오늘 내가 아침 식사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나는 그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도 말한다. 그러한 말놀이는 매번 다르며, 우리는 매번 확신하며, 사람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매번 우리와 동의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물리학의 명제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교과서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판단에 의해 그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가정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가능할 때 가장 적절한 지식을 얻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슨 이유로 그는 그것을 믿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항상 대답할 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어떤 것을 안다면 “어떻게 그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하는 물음에는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답하려 한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공리들에 따라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방법이다.

지식은 대개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좌우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참인가와는 별개의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오류는 그 놀이에서 어떤 자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놀이 속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실수와 예외로 발생하는 완전한 불규칙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실수가 발생할 때는 그것이 정신적 착각으로 그랬던 것인지 실수로 그랬던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불명확하다:

만일 나의 친구가 어느 날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 그러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고 상상한다면 나는 이를 실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순간적인 정신적 혼란이라고 불러야 한다.
즉 이러한 종류의 그릇된 믿음이 모두 실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수와 정신적 혼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혹은 실수로 취급하는 것과 정신적 혼란으로 취급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실수를 정신적 혼란으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명제의 규준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실수할 수 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라면 나는 나의 명제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실수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어떤 것이 결국 내 명제에 반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나는 이러한 보여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명제를 고수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그것이 총체로서의 놀이가 잘못 행해졌다고 제안하기 때문에 실수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나는 달에 가 본 적이 없다 - 그러나 내가 실수를 범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백치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잠든 사이 알 수 없는 어떤 수단에 의해서 거기에 운송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도, 나에게 가능한 실수를 말할 어떤 권리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놀이를 잘못하고 있다.

게다가 잘못된 혹은 올바른 어떠한 규준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총체로서의 그러한 놀이가 잘못 행해졌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놀이가 항상 잘못 행해져 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혹은 그녀가 서로 다른 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개인적으로 발생한 무작위의 실수와 근거와 논리가 분명한 조직적인 오류 사이를 차별화하면서 구분한다. 후자는 오직 총체로서의 놀이에 해당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실수’라고 부르기보다는 “착오”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하나의 놀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또 다른 규칙을 가지고 또 다른 놀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오류도 결코 불가능한 어떠한 곳에서조차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는데 여기서 과연 잘못을 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면에서는 의심이 ‘합법적으로’ 있을 수 있다고 말해질 수 있을 그런 곳에서조차도 완전한 무의심이 말놀이를 반드시 잘못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또 다른 산수와 같은 것도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허락이 어떠한 논리 이해의 바닥에도 놓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세계-그림은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불러왔던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지식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바뀔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두 개의 놀이들을 비교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옳으며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비록 우리가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실수에 있어서는 거짓이라는 판단은 전체 사고 체계를 변화시키지만 체계적인 오류들에서는 참과 거짓이라는 판단이 그 말놀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항상 불확실한 상태에 있고, 실수를 범하고 있으며, 어떤 명제에 대하여 오류를 범할지라도 분명 우리는 어떤 지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원인은 의심이 가능한 곳에서조차도 지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식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확실성, 의심할 여지 없음, 필연성과 같이 인간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확실하며, 의심의 여지가 있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더 이상 회의주의자들의 입장 즉, 의심할 바 없음이 지식의 기준이며, 모든 것은 상대적․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두 의심할 수 있고 그러한 이유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식의 입장은 설자리를 잃고 만다.

만일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가 문법적 명제로 파악된다면 그 “나”란 물론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대체로 “이 같은 경우에서는 아무런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이 같은 경우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로부터 “나는 안다”는 것도 역시 아무런 뜻을 지니지 않는다는 결론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결국 회의주의는 지식의 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지식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의 앎이란 동시에 무지(無知)를 포함하는 불완전한 앎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3) ‘전통적 권위’를 배제한 인식의 토대로서의 승인

지식은 결국 승인(acknowledgement)을 기초로 한다.

만일 경험(세계)도 확실성(논리)도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것을 제공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아무 것도 그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지식은 토대가 없는 것이다. “어려운 것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언어, 논리 그리고 세계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권한”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도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렇게 주장할 수 있기 이전에 세 번째의 가능성인 권한, 신, 혹은 법 등을 숙고해야만 한다. 지식을 근거짓기 위해 신에게 호소하거나 다른 현실적인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사상의 역사에서 초기 시대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물으면 나의 어머니께서 말해주셨다고 대답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믿음이 근거없는 것임을 우리들이 확신하게 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은 권한, 특히 종교적인 것과 논쟁하지 않고서는 불완전한 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권한, 특히 신을 배제하기 위해 승인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승인acknowledgement)이란 말의 어원을 따지고 보면, 보면 신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약간 모순된 점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승인’이란 말이 허락하거나 고백하는데 쓰였던 중세영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승인이란 신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좀더 명확하게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인정을 의미한다.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소유로서 그것에 소유되는 것이며, 그분의 의무 혹은 그분의 자녀 혹은 가족들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것을 지식으로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 무엇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비록 전에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집에 지하 6층 깊이의 계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그러한 결론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이고 있음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위에서 보았듯이 회의주의는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삶 속에서 볼 수 있다.
‘신뢰’와 ‘승인’은 토대를 인정한다. ‘승인’이란 우리가 확실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신뢰하고 있을 때에만 말놀이는 가능하다는 것이다(나는 무엇인가를 신뢰할 수 있을 때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엇인가를 반드시 받아들이고 신뢰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받아들임은 일종의 증명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결정이 아니며 비판없이 이루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것은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어떤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질문이 잘못된 방향의 탐구를 유발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신뢰한다.

“나는 물론 그것이 수건이라는 것을 안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일종의 발언을 하고 있다. 나는 어떤 검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직접적인 발언이다.
나는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그리고 물론 무어 역시 그렇다.)
이것은 내가 의심하지 않고 수건을 잡는 것처럼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붙잡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붙잡음은 역시 확신함에 대응되는 것이지 알려져 있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또한 나는 사물의 이름을 그처럼 붙잡고 있지 않는가?

행위들과 주장들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우리가 검사해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나의 삶은 내가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는데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러한 확신함을 승인하거나 신뢰하는 것이지만 맹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승인이란 개념을 우리들이 가지는 정신적 태도에 대한 심리학적인 기술 뿐만 아니라 지식을 포함하는 말놀이에 대한 논리적 혹은 문법적 요점으로서도 사용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물리적 놀이는 산술적 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될 수 있다. 나의 주장은 논리적인 것이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확실성은 말놀이의 본성 속에 놓여 있다. 지식은 아래 인용의 마지막 문장에서처럼 확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의 손이라는 것을 왜 그토록 확신하는가? 이런 종류의 확신을 말놀이 전체가 근거로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말놀이에는 이미 이러한 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요컨대, 만일 어떤 사람이 대상들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 놀이를 하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잘못하고 있다는 점에 의해서.

예를 들어 장기를 두기 위해서는 혹은 장기에 대해 질문을 하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장기를 장기로서 인식해야만 한다. 그 놀이는 근거로서의 확신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다. 놀이를 하는 것은 확실성에 의존한다기보다는 그 확실성을 산출해낸다.

나는 나의 확신들의 밑바닥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토대-벽들이 집 전체에 의해 지탱된다고 거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 토대가 모든 사실의 아래에 있으면서 그 사실들을 지탱해주는 근거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실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압축하는 전제일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나머지 진행들로부터 그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러한 문맥은 한가지 사실을 아는 것이 또다른 사실을 아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한가지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판단들을 판단의 원리(들)로 사용한다.” 우리들이 한때 승인했고 어떤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들이 가능하게 해 준 토대였다.
지식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있어서의 이러한 문맥과 그것의 기능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비트겐슈타인이 기술은 설명을 대신해야 한다고 논의할 때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설명에서 단순한 기술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한 기술이란 그것이 논쟁된 명제의 문맥을 명쾌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용한다. 어떤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설명은 숨겨진 것을 찾는 것이며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함을 가정하는 것이다.
지식을 위한 근거로서의 권한을 배제하는데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그의 전기 사상을 이용한다. 그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안다는 사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는 것은 그 밖의 어떤 것을 아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사실들은 시간과 지식처럼 우리들에게 아주 밀접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이름을 물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을 알고 있어야(또는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름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하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의미있게 이름을 물을 수 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매우 신비롭다. 어린이들이 언어를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더욱 느끼게 된다.

....어떤 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기술에 정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언어를 배우기 전에 이미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문장들이나 혹은 단어들을 배움으로써 언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그 반대라고 제시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체를 가지고 난 뒤 구성요소들의 의미들을 이해한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언어를 배울 때 이미 사람들은 그 언어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것을 마치 어린아이가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기술한다; 즉 어린아이는 이미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다만 그 언어가 그 나라의 언어가 아닌 것처럼. 혹은 : 그 아이가 이미 생각을 할 수 있고, 다만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생각한다”는 것은 여기서 “혼자 독백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이처럼 언급하면서도 언어 교육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시적 정의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도 역시 우리가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전제로 해야했다:

따라서 내가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과 이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메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도대체 새로운 어떤 것을 어떻게 배우는지를 묻는다.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한 현상을 정당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논리철학논고」에 따르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생각되어질 수 있다. 즉 사고와 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여지는 사라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그러므로 시간은 무엇인가?(Quid est ergo tempus) 어떤 사람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다(Si nemo ex me quaerat, scio); 만일 그 물음에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나는 모른다(Si quaerenti explicare velim, nescio).”라고 말한다. - 자연 과학의 의문에 대해서는 이것이 말해질 수 없다(예를 들면 “수소의 비중은 얼마인가?”).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설명해야 할 때는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은 우리가 스스로 상기해야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이다(그리고 명백히 몇 가지 이유에서 우리 스스로 상기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의 해결책을 마련하게 된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림이론이 「논리철학논고」의 논의들이 가지는 문맥과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언어가 그것이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던 새로운 철학하는 방법도 그것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앎의 신비를 해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설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개념들의 열려있음과 가족 유사성의 관념을 이용하고 있는 「철학적 탐구」의 접근이 무언의 지식에 대해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해 준다.

놀이가 과연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지식은 어떤 조직적으로 표현되지 않은(unformulated) 정의와 동등한 어떤 것인가? 그래서 만일 그것이 조직적으로 표현된다면(formulate) 나는 그것을 내 지식의 표현으로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지식, 나의 놀이 개념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설명들 속에 완전히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즉 나의 다양한 종류의 놀이 예들에 대한 기술에서; 이것들과의 유추에 의해서 어떻게 다른 모든 가능한 종류의 놀이들이 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서; 나는 놀이에 이러이러한 것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에서; 등등.

알고 있으면서도 체계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체계화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체계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은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알려지는 것과 말해지는 것을 비교하라.
몽블랑의 높이가 몇 미터인가를 -
“놀이”란 낱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
클라리넷이 어떻게 소리내는가를 -
만일 당신이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데 말할 수는 없다는 것에 놀라워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첫 번째와 같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와 같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아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의 경우 거기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지식은 오히려 행위를 통해 증명되지만 결코 의식에서 발생되지는 않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적인 지식과 같다. 정의적 표현은 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커피의 향기를 기술하라. - 왜 이것은 안 되는가? 우리에게 낱말들이 부족한 것인가? 그리고 낱말들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 -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어떻게든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가지게 되는가? 당신은 이전에 그런 기술의 결여를 느낀 적이 있는가? 당신은 커피 향기를 기술하려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나는 말하고 싶다: “이 음색은 훌륭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 음색은 강한 몸짓이지만, 나는 그것과 나란히 놓을 어떠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 몹시 진지한 고개 끄덕임. 제임스: “우리들의 어휘는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새로운 어휘들을 도입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어떤 상황이어야 할까?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부적절하며 또한 그러한 기술들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언어적 표현을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표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단지 그것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함이 앎을 위한 유일한 규준(criterion)은 아니다. 「철학적 탐구」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은 철학이 해야했던 임무, 즉 모든 사물과 사실들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식이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안다는 개인적인 승인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어떤 것은 우리에게 기초로서 반드시 가르쳐져야만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일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더 설명될 수 없다. 어린아이일 때 우리는 신뢰와 확신함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말놀이의 변함없는 토대로 취급된다.

그때 나는 무엇이 “명령”이라 불리고 무엇이 “규칙”이라 불리는지를 “규칙성”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는가? - “규칙적이다”, “한결 같다”, “같다”의 의미를 나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하는가? - 이를테면 오직 프랑스어만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 낱말들을 그에 대응하는 프랑스어 낱말들에 의해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개념들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예들과 실습에 의해서 그 낱말들을 사용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이것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그에게 의사 교환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덜하지는 않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서 내가 그에게 같은 색깔들, 같은 길이들, 같은 도형들을 보여주고, 그로 하여금 그것들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그가 어떤 명령에 대해서는 어떤 장식 형태를 한결같이 계속하도록 할 것이다. - 그리고 수열을 계속하도록 지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 에 대해서는 .... 와 같이 계속하도록.
나는 이것을 행하고, 그가 나를 따라한다; 그리고 나는 동의, 거부, 기대, 격려의 표현 등으로 그에게 영향을 준다. 나는 그가 그의 방식대로 해 나가도록 하거나, 혹은 제지하거나; 등등을 한다.
그러한 교육의 증인이라고 상상해보라. 어떠한 낱말도 자기 자신에 의하여 설명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논리적 순환도 없을 것이다.
“...등등”과 “...등등 무한하게”란 표현 역시 이러한 교육에서 설명된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몸짓이 될 것이다. “이것처럼 계속해라!”나 “등등”을 의미하는 몸짓은 어떤 대상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에 비교될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생략된 필기의 “등등”은 그렇지 않은 “등등”과 구별되어야 한다. “등등 무한하게”는 그러한 생략이 아니다. 우리가 π의 모든 소수점 자리를 기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수학자들이 가끔씩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적인 부족함은 아니다.
제시된 예들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교육은 그 예들 ‘밖으로 나가라고 가리키는’ 교육과 구별된다.

‘실례’를 들어주는 것은 가르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어떤 선생님도 이러한 과정없이는 가르칠 수가 없다. 우리들은 단편적으로 가르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들을 넘어서서 지시해 주는 어떤 것이 아이들의 지식체계 속에서 창조된다.
배우는 것의 복잡함은 본유관념의 학설이나 상기설 혹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심연의 조직 혹은 유전적 정보와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바로 이러한 관념들이 불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실례’를 이해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것과 동일한 것의 무한한 것들을 의미하는 ‘실례’와 그것과 상이한 무한한 것들을 의미하는 ‘실례’를 구분하도록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판단을 판단의 원리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알 수는 없으며 그 끝에 가서는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신도 없고 의식도 없으며, 과학도 없다는 것 등을 승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지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이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는 승인에 근거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삶의 형식이나 보는 관점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져야만 하는 것,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을 삶의 형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뢰하는 것, 승인하는 것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시킨다. 신뢰는 그대로의 상태를 위한 논의가 아니며, 이것이 사물들은 결코 바뀔 수 없다거나 바꿔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변화하기 위한 통로이다. 아울러 우리들의 삶의 형식도 변화의 과정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절대명령과 같은 권위에 의해 변화를 창조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먼저 변화를 향한 통로를 개척해야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관이 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변화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철학 역시 무의미한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지식에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은 ‘이것이 지식이다’라는 우리 자신의 승인 뿐이다.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의 임무는,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은 뒤엉켜있는 관점을 밝히고 우리가 무엇을 알며 어떻게 아는지를 명쾌하게 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4. 결론

비트겐슈타인은 앎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데카르트의 방법론, 즉 방법적 회의를 사용한다. 그는 ‘안다’라는 단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안다’의 의미는 오히려 ‘믿는다’의 개념에 가깝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인식체계를 전개해 나간다. 이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앎이 실상 감각에 투영된 내용이 그러 그러할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할 뿐 그 내용의 근저에 과연 어떤 것이 있으며 우리에게 투영된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고 부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지식-내용은 결국 설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부정적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의 인식 체계란 우리가 비록 실수를 범한다 하더라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현상의 원인이 지식에 대한 우리의 승인에 있다고 본다. 즉 교육을 통해 배운 확고 부동한 지식들조차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변화․수정될 수 있는 유동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시말해 확고 부동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신뢰하고 승인하기 때문일 뿐 실제로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들의 지식-내용들은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말놀이가 어떤 종류의 것이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여기서 참여하고 있는 말놀이조차도 우리의 선택에 따라 변화한다. 여기서 지식-내용이 변화한다는 것은 각각의 말놀이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쓰임과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말놀이에 있는 이들 사이의 의사교환은 불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사교환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속해 있는 말놀이에 참여하면서, 그곳에서 이미 전제되어 사용되어 온 규칙을 배워 익혀야 할 것이다.
말놀이의 규칙을 숙지한 상태에서는 우리 인식에 결코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오류로부터 면제되는 상황’이라고 말하며, 만일 규칙을 배워 익힌 상태에서도 인식의 오류가 발생했다면 ‘정신적인 착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12×12=144’, ‘나는 방금 점심을 먹었다’와 같은 명제들은 말하는 이가 정신병자가 아닌 한 잘못된 명제일 수 없으며, 설령 ‘정신적인 착각’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류라고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의 오류에서 면제되는 상황’과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고 해서 위에서 언급된 명제들이 불확실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렇게 간주해 버린다면 결국 우리들의 인식체계 전반이 붕괴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식의 부정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한 체계와 기준이 요청된다. 즉 어떤 사실이 참이라면 참임을 증명할 기준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기준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유동적 성격의 것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초기에 언어와 실재가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곧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라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흐름은 수정을 거듭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고 변화하게 된다. 즉 지식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언어를 가지지 않았다면 인간 인식의 구조상, 경험된 내용에 대한 서술과정이 불가능할 것이며, 이를 통해 어떤 내용을 추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언어의 한계가 지식의 한계일 수 없다는 명제에서 언급되고 있는 ‘언어’가 의미하는 바는 지식내용을 배우기 이전에 존재하는 인식체계의 틀을 가리키고 있다. 즉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학습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들은 언어에 의해 학습하는 동안 그 내용을 우선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후, 삶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그것의 확실성을 검증해 나간다. 이러한 검증 과정 속에서 그것이 확실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인식체계를 재구성하고 변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되는 재구성 능력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지식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러한 과정 속에 내재하는 구성능력이 바로 어떤 사실에 대한 참, 거짓의 기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과정을 거쳐 배워간다. 이러한 과정은 언어를 배움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들의 지식은 경험을 벗어나서는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경험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경험을 통해서는 어떠한 사실도 배우거나 가르쳐질 수 없음을 설명한다기보다는, 가르치는데 있어서의 성공여부는 언어적 훈련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훈련은 기초적인 문법습득과 상황에서 드러나는 문맥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
결국 지식이란 객관적 확실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승인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주관적’이란 단어가 부정적 의미에서의 회의주의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만, 여기서의 회의주의는 지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지식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구성요소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자는 ‘언어와 인식의 관계성’을 통해 인식의 불확실한 확실성을 그의 저서 「확실성에 관하여」, 「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논점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인간의 생활방식이 삶(생명)이라는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불확실한 인식 내용 역시 끊임없는 유동성․창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확실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으며 인식의 불확실함으로 발생하는 어려움은 그다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양식인 것이다. 물론 좀더 확실한 기초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것 역시 삶의 양식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본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하는 ‘언어와 인식’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도는 ‘언어와 윤리’라는 측면으로도 연계되어 각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져 온 도덕․윤리의 기초는 무엇이며, 각각의 전통과 윤리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그 토대로서의 윤리의식 특히 생명에 대한 공통된 윤리의식은 무엇에 기인하는가에 대한 연구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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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Wittgenstein's Understanding of Perception-Process

Chung, Youn-seung (Chung-nam Univ.)

Wittgenstein makes use of Descartes' methodology - skeptical method, to make clear what knowledge is. He explains not to be clear our conception of word 'know'. If we investigate its usage carefully, in the point of the meaning we discover likeness between word 'believe' to it. This point come to light that knowledge on a fact is really a supposition through sensible cognition, it can't show what the bottom of it is.
To conclude, the knowledge data for our to consider understood may be unacceptable thing to us. However, he doesn't stand for negative skeptical position that we can't understanding anything.
Cognition system is never collapsed even though we mistake. For instance, even the steadfast knowledge taught by common education has diversity to be changeable(even improvable), as far as we regard the knowledge as thing able to be mistaken. As it were, it is not because it is really 'steadfast', but we only accept what it is faithful, approve like that.
Furthermore our knowledge-data change constantly as which 'language game' we participate in. This change is due to difference of the usage and meaning of the word used each 'language game'. By reason of that, in disparate 'language game' each other's communication may be impossible. But if we master the rule of the game, the communication and cognition is possible each other in any 'language game'. Our cognition has no mistake in that circumstance. It is called 'nearly immunity of mistake'. Propositions like that as follow. ‘12×12=144’, ‘I have just eaten lunch' etc... These propositions are right as far as they aren't psychotic. And even if they are happened by confusion, it isn't mistake.
If we consider them as uncertain thing because our cognition is uncertain, the cognition system is collapsed. At last it lead we involve negative skepticism which we can't know anything. Without doubt we has the cognitive faculty, and a criterion of that clearly needs. That is to say if we accept that a cognition data is true, there must be surely the condition which is not changeable in any circumstance.
What is the criterion which is accepted, approved? We must look carefully the relation of language and cognition to understanding that. Never don't a bound of language and that of knowledge correspond. Of course, if we don't have the language, in organization of the episteme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a given sense-data, to deduct a fact through that. And the proposition 'Never don't a bound of language and that of knowledge correspond' contains that the language is form of cognition system existed before education. That is to say, knowing beyond sayable means an ability for child to change, construct own cognition system in the process knowing the uncertainty of facts taught unconditionally. These reformation abilities provide basis of true and false with a fact.
The knowledge don't obtain through learning language, but that process.
However Wittgenstein doesn't deny that our knowledge must be impossible without experience certainly, either. He only emphasized that even if we don't experience a fact, we don't know everything entirely. Here the success or failure in teaching depends on linguistic training(understanding of the grammar, context in each circumstance).
In the end, the knowledge depends on not the objective certainty but the subjective acknowledgement. Furthermore the scepticism must be understood not an enemy of knowledge but essential structural element although 'subjective' seems the sceptic nuance.
We investigate the 'relation of language and cognition' through his work「On Certainty」,「Philosophical investigation」To be brief his thesis, the uncertain cognition has the certainty based on changeableness, creative faculty as the form of life is possible by purpose of breath.
This thesis is merely a little try to investigate what 'relation of language and cognition' is. In the view of 'relation of language and morality', this trial must be connected with the research into what ground of culture, morality is.

Key-words : Wittgenstein, Perception, Certainty, Uncertainty, Subjective acknowledg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