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나뭇잎숨결 2012. 10. 24. 11:10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과 구별되지 않는 어떤 공명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어렵사리 하나의 사회를 기획하고, 계약하고, 꿈꾸고, 체험한다. 사회란,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되는 덧없는 순간의 불안정한 제도화이다. 억조창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사한 언어와 기억, 고통의 감각과 행복의 소망을 공유하는 집합체의 ‘마음’을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인정하고 그 모양새(體)와 쓰임(用)을 논구하는 작업은 허망한 번뇌가 아니다. 번뇌라 하여도 할 수 없다. 한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번뇌도 별빛이 아니던가? --- 프롤로그 중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마음의 레짐’을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라는 것은 집합적 마음의 레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주체이다. 그리하여 시대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초월해 있다. 이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불편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행로를 사유하는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진정성의 해체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진정성을 역사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치’들의 형성과 발명이 이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 본문 중에서

스놉이 더이상 멸시받지 않고 도리어 사회의 선망을 취득함으로써 존재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사회의 이름이 스노보크라시이지만, 이에 대한 세인(世人)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물적 욕망에 시대적 면죄부가 부여되었다는 점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모두가 속물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파렴치의 만연에 대하여 도덕적 불안감을 느낀다.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이 양가성 위에 건축되어 있으며, 새롭게 열리는 스놉의 시대는 민(民)의 소망인 동시에 악몽이라 할 수 있다. 민은 자신 또한 스놉이 되어 세속적 성공의 풍요를 누리기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위하여 자신들의 근본적인 도덕감정과 싸워가면서 강박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보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민중의 스노비즘은 처절하다. 이 처절함은, 스놉이 되지 않으면 ‘서바이벌’할 수 없기 때문에 스놉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스노비즘은 거대서사가 조락하고 이제 삶의 방식을 지휘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부재하는 듯이 보이는 당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력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또한 주체의 형식을 주조하는 ‘최후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스노비즘의 판타지는 비판적으로 응시되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세련된 속물취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루키 소설의 참된 매력은 이국적 이미지, 놀라울 정도로 용의주도한 소설적 테크닉,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의 재능, 그리고 그의 이야기들이 내포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깊이나 분방함 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90년대 이후 발생한 세계의 근원적 변용을 살아남게 해 주는 ‘서바이벌 키트’였다. 하루키를 읽는 것은 ‘유희’가 아니라 ‘교육’이었다. 하루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흘러간 한 시대와 결별하고 그것에 뒤이어 도착한 새로운 시대와의 낯선 불화와 갈등의 관계로 어렵사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한 시대와 다른 시대의 갈라짐, 즉 지층의 균열, 역사적 지각의 진동의 기억을 몸에 새긴 채, 그 균열의 시간을 육화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키적 멜랑콜리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하루키에 익숙해진 자는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지각변동의 충격파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하나의 조건으로 수용한 채 상실의 감각을 익히고, 낙관주의를 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영겁회귀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우울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서평)‘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괴로워하던 80년대 지식인은 다 어디로 갔는가?
웰-빙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
‘뻔뻔하고 당당한 속물’들이 주류가 된 시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김수영의 시와 홍상수의 영화,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와 하루키의 『1Q84』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한 사회학자의 통렬한 상상력!

“결국 사회학이 탐구해야 하는 최종 영역은 그 사회의 마음이다.”

한국의 ‘지젝’ 탄생을 예견케 하는 사회학자 김홍중의 첫번째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특이하다. 딱딱한 사회과학서도, 그렇다고 단순한 평론집도 아니다. 8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진정성의 시대에서 속물주의의 시대로 이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히 파헤쳤다는 점에서 이 책은 사회과학서이다. 한편, 이상과 김수영부터 ‘미래파 시인’들의 시를 비롯해 하루키의 소설, 홍상수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까지 섭렵하는 이 책은, 분명 문학 평론집이자 문화비평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학적 비평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저자는 사회의 모든 현상과 변화 속에 사람들의 ‘마음’이 내재돼 있다고 보았다. 그 마음은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기억이 공유되어 탄생한 것이다.


벤야민과 들뢰즈, 니체 등 지식사회를 뒤흔든 거장들의 사상을 사회학적 프레임 삼아 저자는 김수영과 이상의 시, 하루키의 소설과 홍상수의 영화 등 이 시대의 속살을 보여주는 다양한 문화를 조망했다. 왜 예술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다양한 문학, 예술 텍스트야말로 사회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이자 ‘징후’이기 때문이다.

제1부 ‘마음의 레짐’에서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규범적 동력이었던 진정성의 구조, 기원, 소멸을 탐색한다. 80년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하던 지식인들은 차마 자기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 의식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진정성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 주체 형성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97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뻔뻔한 당당함’을 내세운 스놉(snob)이 됐다. 스놉이 지배하는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시대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