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G. 라일과 언어분석(이대희)

나뭇잎숨결 2012. 10. 19. 11:27

G. 라일과 언어분석*1)

이 대 희**

[한글 요약]

일상언어의 기능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환원적 분석을 정초하였던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종전의 입장을 번복하면서 어떠한 인공언어도 일상언어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음을 강조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면서 라일은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쓰여지는 구체적인 삶의 테두리, 즉 삶의 양식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사실 오늘날 "언어적 철학" 또는 "언어적 분석"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관의 최초의 명백한 공개적 진술은 라일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1931)에서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철학은 언어분석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된다. 라일에게 있어서 철학은 이제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가 무반성적으로 따르고 있는 규칙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며, 범주습관을 범주학문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철학자는 과학, 심리학, 신학 또는 철학 자체의 어디에서나 "범주착오"가 발생할 경우에 그것을 바로잡아 주고, 개념들의 논리적 지리를 명료하게 해주는 메타업무에 종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곧 라일의 철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일에 의하면 "철학적 문제는 특별한 종류의 문제이지, 특별한 존재자에 관한 일상적인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즉 철학적 문제는 개념의 혼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철학적 문제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정돈함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이제 더 이상 거창한 이론체계를 수립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빈발하는 오해와 불합리한 이론의 원천을 언어상의 관용어법에서 찾아내는 것"이 된다.

1. 머리말

현대 영·미철학은 한 마디로 "언어 분석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분석철학이라는 명칭 속에는 다양한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 러셀에서 시작하여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 등의 일부 언어학자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형식언어의 구축을 통한 의미분석, 그리고 무어의 철학적 언어의 명료화에 대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일상언어의 의미분석을 시도하는 라일, 오스틴 등 일상언어학파의 활동, 그리고 검증 원리를 토대로 하여 철학의 과학화를 시도하는 슐리크, 바이스만, 파이글 등의 논리실증주의자들, 그리고 콰인, 스트로슨 등 논리학과 언어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리에 관한 새로운 의미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최근의 이러한 모든 철학적 활동들이 분석철학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다.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들 철학적 활동들은 모두가 논리적·언어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1)

1921년에 발간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4.0031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2)라고 선언하였으며, 이 선언이야말로 철학의 새로운 자기이해, 즉 분석철학의 가장 집약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그 다의성과 애매성으로 인하여 언어가 가지는 참된 논리적 구조를 감추고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외형만 가지고는 그 참된 의미를 알아낼 수 없으므로, 언어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참된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인공언어가 필요하다. 이러한 인공적으로 구성된 이상언어(ideal language)에서는 모든 애매성과 다의성이 배제되며, 언어적 표현의 표층적인 문법적 형식은 그것의 심층적인 논리적 구조와 일치한다. 프레게나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은 진리함수적 논리(truth- functional logic)야말로 언어의 참된 심층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일상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공언어로 옮겨 놓아 감추어진 논리적 구조를 명백히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철학자들의 이른바 환원적 분석의 핵심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환원적 분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의가 제기된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인공언어가 과연 일상언어의 골격을 만족스럽게 나타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일상언어의 기능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환원적 분석을 정초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종전의 입장을 번복하면서 어떠한 인공언어도 일상언어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음을 강조하게 된다. 라일은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면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씌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테두리, 즉 삶의 양식(form of life)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사실 오늘날 "언어적 철학" 또는 "언어적 분석"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관의 최초의 명백한 공개적 진술은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systematically misleading expressions, 1931)에서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철학은 언어분석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된다. 라일에게 있어서 철학은 이제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가 무반성적으로 따르고 있는 규칙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며, 범주습관(category-habits)을 범주학문(category-disciplines)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3)

라일이 철학적 활동을 시작하였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던 시대였다. 즉 철학은 이제 더 이상 물리적 현상에 대립되는 정신적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물리학이나 화학 또는 생물학과 구별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비실험 심리학자라고 공언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딱정벌레와 나비가 곤충학의 대상이듯이 철학의 대상이 되어야 할 비정신적·비물리적 대상을 찾고자 하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적 형상', '명제', '지향적 대상', '논리적 대상' 등이 철학자들 자신의 주제를 갖고자 하는 직업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끌어 모아졌다. 그러나 라일은 철학의 "고유한 주제에 대한 어떤 명세서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4)는 것을 알았다.

라일은 만약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생각이 옳다면, 철학은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결코 철학이 쓸모 없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에 남겨진 임무가 무엇인가를 명백히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은 그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차원을 가질 뿐이다"5)라고 결론짓는다. 즉 철학자는 과학, 심리학, 신학, 또는 철학 자체의 어디에서나 "범주착오"(category-mistake)6)가 발생할 경우에 그것을 바로잡아 주고, 개념들의 논리적 지리(logical geography)를 명료하게 해주는 메타업무에 종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곧 라일의 철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일에 의하면 "철학적 문제는 특별한 종류의 문제이지, 특별한 존재자(entity)에 관한 일상적인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7) 즉 철학적 문제는 개념의 혼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철학적 문제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정돈함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이제 더 이상 거창한 사상체계를 수립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빈발하는 오해와 불합리한 이론의 원천을 언어상의 관용어법에서 찾아내는 것"8)이 된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많은 관용어구들 - '개념의 논리적 지도작성', '범주착오', '성향적 분석', '부사적 분석',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 - 은 라일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실 라일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어서 "철학계의 실력자"(philosophical kingmaker)로 불릴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철학의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9)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주저인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은 심신의 문제(mind-body problem)에 관한 일상언어 철학의 방법을 사용한 최초의 대규모적 탐구로서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에 대한 일련의 분석적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일에 의하면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은 인간의 신체라는 기계 속에 마음이라는 유령이 내재하고 있어서 그것이 신체를 조종한다는 이론인데 라일은 이것을 "기계 속의 유령의 독단"(the dogma of the Ghost in the Machine) 또는 "데카르트의 신화"(myth)라고 부르면서 비판한다.10) 그리하여 라일은 "인간이 두 개의 분리된 부분, 즉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철학은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왔다"11)고 주장하면서 그의 일상언어 분석 방법12)을 통하여 이러한 왜곡된 교리를 바로 잡고자 시도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라일의 언어분석의 구체적 사례에 대한 심층적 고찰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스타일과 방법을 부각시키고, 나아가서 분석철학 특히 일상언어 철학의 한 특성과 그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2. 분석의 목적



1931년에 발표된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이란 논문에서 라일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체계적으로 오해를 야기시키는 여러 유형의 표현들 - 의사(quasi) 존재론적 진술, 의사 플라톤적 진술, 의사 기술 등 - 을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러한 표현들에 관한 자신의 고찰에 있어서 수행된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타당하게 물을 수 있고 그리고 심지어 '여차여차하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말할 수 있는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실제적 형식이 문제의 표현에 의하여 숨겨지거나 위장되어 정당하게 드러나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기록된 사실의 실제적 형식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단어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형태의 단어로 이러한 사실을 진술하는데 종종 성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현재로서는 이것이 바로 철학적 분석이며 그리고 이것이 철학의 유일하고 완전한 기능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 지금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고백은 영혼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결론들이 시사하는 결론들에 대해서는 많이 음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빈발하는 오해와 불합리한 이론들의 원천을 언어적 관용구에서 찾아내는 일 보다 더 숭고한 임무를 철학에 부여하고 싶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철학의 임무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다.13)



라일의 이러한 말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논리적 원자론자들의 낡은 분석이론 - 철학자는 사실의 실제 형식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명제들을 그 형식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재진술 하는 일에 종사한다는 주장 - 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일의 이러한 분석은 새로운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라일은 우리의 목적이 실재(reality)의 구조에 관한 보다 명백한 시야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당혹(puzzlement)을 제거하고 언어의 오해를 방지하고 그리고 불합리한 이론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볼드윈 씨는 정치가이다"라는 진술은 사실의 형식을 드러내 보여주며,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반면에, "볼드윈 씨는 객관적이다"라는 진술은 사실의 형식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며, 분석을 필요로 하고, 분석이 없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일의 주장은 "볼드윈 씨는 정치가이다"라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인 치료가 필요 없지만, 반면에 "볼드윈 씨는 객관적이다"라는 표현은 불합리한 이론과 추론에로 우리를 잘못 인도하기 때문에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오도하지 않는 다른 언어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임무를 철학자가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1937년에 발표된 「철학은 상식을 분석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에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우리는 분석을 제공한다는 것, 혹은 정의를 내린다는 것, 혹은 철학적 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해답은 분석의 형식을 언급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석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철학적 분석을 요구하는 상식적 명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추론을 하게 하거나 혹은 가짜(spurious) 물음을 묻게 하거나 혹은 어처구니없는 가정을 하게끔 고무시키는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명제들이다. 그리하여, 국가에 관한 명제들이 철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국가를 확대된 사람(magnified persons)인 것처럼 다루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물질적 사물에 관한 명제들이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것이 현상의 세계 '배후'에 물리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고무시키기 때문이며, 그리고 확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ve phrases)를 포함하는 명제들이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재하는 존재자(subsistent entities)에 대한 요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그리고 존재 명제들이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것이 존재론적 논증(onto- logical argument)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이러한 모든 위험요소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제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형식으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철학적 분석의 과정이 단일한 형식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철학함의 활동이 오직 번역의 제공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4)



이러한 주장과 라일의 주장과의 관계는 아주 명백하다. 즉 어떤 표현에 대한 철학적 치료(philosophical treatment)의 필요성은 이제 사실의 형식을 언급할 필요가 없이 그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성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치료가 반드시 번역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점이 인식된 것이다. 번역과는 다른 기술적 방법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합성(adequacy)의 기준은 표현에 있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밝혀내는 일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일과 에이어 양자 모두에 있어서 분석의 목적이 언어에 의한 오도됨의 회피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분석의 목적은 사실들의 논리적 연관성이나 언어의 구조에 관한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언어가 계산체계와 유사한 어떤 것이어야 하지만, 언어에 의한 오도됨의 회피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언어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3.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



라일이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이라는 논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철학이 일반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기본적인 유형의 표현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진술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의미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철학적이지 않은 담화에서 나타나는 상당히 많은 표현들이, 비록 그 표현들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 표현들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은 그 표현들을 전적으로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들이 기록하고 있는 사태들 (혹은 그 표현들이 기록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그 주장된 사태들)에 명백하게 부적합한(improper) 문법적 형식이나 구문론적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들은 재공식화될 수 있으며 그리고 철학적이지 않은 담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학을 위해서는 기록된 사실 (혹은 기록되었다고 주장되는 그 주장된 사실)에 적합한 구문론적 형식을 가지는 표현들로 재공식화되어야만 한다.

어떤 표현이 기록된 사실에 부적합한 그러한 구문론적 형식을 가질 경우에, 그 표현은 기록된 사태가 실제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태라는 것을 일부 사람들에게 - 비록 '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 자연스럽게 시사한다는 점에서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15)



그리하여 라일은 자신의 주장을 몇 가지 예시를 통하여 입증하고 있다. 그는 먼저 일상적인 담화에서는 아주 만족스럽게 사용되지만, 그러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16) 표현들, 즉 말하자면 기록된 사실에는 부적합하면서 기록된 사실과는 전혀 다른 논리적 형식의 사실에는 적합한 그런 구문론적 형식으로 표현된 한 가지 유형의 표현들 전체 부류에 대한 고찰로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표현들에는 의사 존재론적 진술, 의사 플라톤적 진술, 의사 기술 등이 있다.

이제 이러한 표현들 각각에 대한 라일의 분석을 차례대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1) 의사 존재론적 진술(quasi-ontological statements)



라일에 의하면 칸트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존재(existence)는 성질(quality)이 아니다"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말로만 경의를 표해왔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신은 완전하다, 완전함은 존재함을 수반한다, ∴ 신은 존재한다"라는 존재론적 논증의 거짓 함축을 거부해왔다고 한다.17) 왜냐하면 만약 존재가 성질이 아니라면, 존재는 어떤 성질에 의하여 수반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신은 존재한다"(God exists)라는 진술에 있어서 '존재한다'라는 말이 (문법상의 의미를 제외하고) 빈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동일한 진술에 있어서 '신'은 (문법상의 의미를 제외하고) 빈사의 주사(subject)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주 최근에 와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인식은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일각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와 같은 부정적인 존재 명제들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만약 사탄이 전혀 없다면,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나는 졸립다"라는 진술이 나에 관한 진술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탄에 관한 것일 수가 없다. 표면상의 모습(appearances)에도 불구하고 '사탄'이라는 말은 속성들(attributes)의 주체를 지시(signify)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이 여전히 어쨌든 사탄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과 그리고 '존재한다'라는 말이 여전히, 비록 성질(quality)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속성(attribute) 혹은 특성(character)을 지시한다고 계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그러한 이론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일부 철학자들은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사탄의 관념'(the idea of Satan)이라고 기술되는 어떤 것에 관한 진술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 철학자들은 그 진술은 '사탄'이라고 불려지는 존재(subsistent)하지만 비현실적인 존재자(non-actual entity)에 관한 진술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양측 이론 모두가 실제로 입증하고자 시도한 것은 어떤 것이 ('단순히 정신적인' 존재로서 이건 아니면 '존재자(subsistents)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이건 간에) 있을(be)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존재(existence) 안에는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혹은 "진정한 비존재자(real nonentities)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 존재자들(negative existentials)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해석은 존재자의 세계나 관념의 세계를 살아있는 자기 모순자들(self-controdictions)로 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양측 이론 모두가 폐기되어야만 하였고 따라서 존재 명제에 관한 새로운 분석이 시작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라일의 분석을 직접 인용해 보기로 하자.



내가 (외관상) 일반 주사(general subject)인 '육식 젖소'에 관해서 단언하기를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나의 단언이 참이라고 가정할 때, 나는 실제로 육식 젖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식 젖소'라는 표현은 그 빈사가 단언되고 있는 사물이나 사물들을 지시하는 데 실제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 - 비록 문법적 외양은 그 반대일지라도 - 이 귀결된다. 그리고 '존재한다'라는 동사가 단언된 그 특성을 지시하지 않는 것 - 비록 문법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일지라도 - 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정한 빈사는 다른 곳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따라서 문법상의 단서는 거부되어야만 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분석에서는 "육식 젖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어떤 젖소도 육식성이 아니다"라는 표현이나 혹은 "어떤 육식 동물도 젖소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해왔었다. 그러나 한층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한 것 같다.

"일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네발짐승이고 초식성이고 한 개의 뿔을 가진 것이기도 한 (혹은 일각수임의 징표인 것은 무엇이든 간에)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새로운 표현은 어떤 네발짐승이나 초식동물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육식 젖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어떤 것이든 젖소이든가 육식성이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라는 것을, 현 상태로서는, 함축하지 않는 표현인, "젖소이면서 육식성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18)



계속해서 라일은 이번에는 "신은 존재한다"라는 표현이나 혹은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외관상 단칭 주사(singular subject)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만약 앞에서 행한 라일의 분석이 옳다면, 여기에서도 '신'과 '사탄'은, 문법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서술적 표현(predicative expressions)이 된다. 즉 말하자면, 이들 표현들은 그 주사가 그것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고 단언되고 있는 그 특성(character)이나 특성들의 집합(set of characters)을 지시하는 특정한 특성 또는 특성들의 집합을 어떤 것이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결여하고 있다는 단언(assertion) 속에 들어 있는 그 요소(element)인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어떤 것, 그리고 오직 하나의 것만이 전지하고 전능하며 무한히 선하다"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악마이면서 그리고 악마임에 있어서 혼자이기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표현이나, 혹은 어쩌면 "악마이면서 그리고 '사탄'이라 불려지기도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표현이나, 혹은 심지어 "'사탄'은 어떤 것의 고유명도 아니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대략적으로 표현하자면, "x는 존재한다"와 "x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주어진 속성들의 주사 x가 존재함이라는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단언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술에서 이름되지 않은 어떤 것이 x같음(being x-ish)이나 혹은 x임(being an x)이라는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단언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라일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즉 그는 "육식 젖소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러한 표현들은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과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을 바꾸어서 말한 다른 표현들은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혹은 동일한 방식으로나 동일한 정도로는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일은 '소위 존재 진술들'(so-called existential statements)에 관한 자신의 분석의 결과를 일반화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일반화가 필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신은 존재한다"라는 진술이 가지는 체계적인 오해유발성에 대하여 칸트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동일한 증상이 다른 많은 표현들 전체를 감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들 중 소수만이 인식하고 때문이다. 만약 "신은 존재한다"라는 진술의 의미에 관한 라일의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명백히 "신은 실재하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 "신은 존재(being)를 가진다"라는 표현 및 "존재"라는 표현은 동일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 실재하는 것이다"와 "???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오직 허위 빈사들(bogus predicates)이며, (문법상) 그러한 허위 빈사들이 단언되고 있는 주사들은 오직 허위 주사들(bogus subjects)임이 밝혀진다.

위의 진술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제로 픽크윅 씨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들 진술들이 참이라면, 이들 진술들이 관계하고 있어야 할 그러한 사람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진술들 가운데 어떤 것도 볼드윈 씨에 관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들 진술들이 거짓이라면, 이들 진술들이 관계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진술들 가운데 어떤 것 속에도, 어떤 것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거나 혹은 특징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고 단언되고 있는 그러한 특성을 지시하는 진술의 요소인 문법적 빈사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라일의 결론은 그 진술의 문법적 빈사가 특정한 특성(character)을 가진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위(status)를 가진다는 것 (혹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진술들의 한 부류(a class of statements)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진술들에 있어서 외양은 순전히 문법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그 진술들이 실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의사 존재론적 빈사들(quasi-ontological predicates)을 전혀 갖지 않는 진술들로 재진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사 존재론적 진술들에 있어서 문법상의 주사어(subject-word) 또는 주사구(subject phrase)가 의사 존재론적 빈사에 의하여 서술되고 있는 어떤 것을 지시(denote) 또는 지칭(refer)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외관상의 주사 항(subject term)은 숨겨진 서술적 표현이며, 그리고 이러한 의사 존재론적 진술들이 실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어떠한 부분도 그러한 어떤 주체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진술들로 재진술될 수 있다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요컨대, 모든 의사 존재론적 진술들은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일은 자신의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마치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 '실체'(Reality)라든가 '존재'(Being)라는 표현을 자신들의 명제의 주사로 삼거나, 아니면 '실재적'(real)이라는 표현을 빈사로 삼고 있는 그러한 형이상학자들은 최대의 죄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한다.19) 왜냐하면 형이상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 이것은 철학자의 명제가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 이든가 아니면, 가장 나쁘게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의사 플라톤적 진술(quasi-Platonic statements)



우리는 흔히 그리고 아주 간편하게 "시간 불엄수는 비난받을 만하다"(un- punctuality is reprehensible)라거나 "덕은 그 자신의 보상이다"(virtue is its own reward)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첫눈에 이러한 표현들은 "존즈는 비난받을 만하다"(Jones merits reproof)라든지 "스미드는 자기 자신에게 상을 수여하였다"(Smith has given himself the prise)라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 처럼 보인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전자와 같은 그러한 진술들이 의미하는 것은 후자와 같은 그러한 진술들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하게 유사한 것이라고 해석하고서는, 세계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대상들, 즉 존즈 및 스미드와 같은 특수자(particular)와 그리고 시간 불엄수 및 덕과 같은 '보편자'(universals)를 포함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로소 불합리(absurdities)가 발생하게 된다. 보편자에 대해서 비난받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우리가 적도(Equator)에다 구멍을 뚫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자'를 칭찬한다거나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 불엄수는 비난받을 만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시간 불엄수가 그 자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실제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그가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Whoever is unpunctual deserves that other people should reprove him for being unpunctual)라는 진술에 의하여 훨씬 더 잘 표현된다. 왜냐하면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 주체(moral agents)이지만 시간 불엄수는 도덕적 주체가 아니므로, 비난받을 수 있고 또 비난받아야만 하는 것은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지 시간 불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비난받을 만하다"(whoever is unpunctual merits reproof)라는 새로운 표현에 있어서는 '시간 불엄수'라는 말이 '시간을 지키지 않는 ???'이라는 서술적 표현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원래의 표현에 있어서 '시간 불엄수'라는 말은 어떤 속성이 단언되고 있는 주체(subject)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이제 새로운 표현에 있어서는 그것이 어떤 속성을 가짐(having of an attribute)을 지시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속성 - '시간을 지키지 않음'이라는 속성 -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또 다른 속성 - '비난받을 만함'이라는 속성 - 을 가진다는 것을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덕이 보상의 수령인이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 아니다. 사실은 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누구든지 선함으로 인하여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의 진술은 '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에 관한 진술이며, 그리고 문법상의 주사어 '덕'은 '덕이 있는 ??? '(??? is virtuous)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서술적 표현(predicative expression)인 것이다.

계속해서 라일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 "정직은 나로 하여금 여차여차하게 진술하도록 강요한다"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직'이라는 말은 어떤 강제적인 주체(coercive agency)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을 보다 적절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 "나는 정직하기 때문에, 혹은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여차여차하게 진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색깔은 연장을 포함한다"라는 진술은 "색깔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연장을 가진다"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며 ; "연기된 소망은 가슴을 병들게 한다"라는 진술은 "오래 동안 무엇인가를 소망하면서도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가슴이 병들게 된다"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20)



그리하여 라일의 주장은 '보편자에 관한'(about universals) 것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진술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일반 명사들(general terms)은 결코 진정하게 속성들의 주체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에베레스트 산이 하나의 대상(object)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이 아니며, 그러므로 "보편자는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은 허위 물음(bogus question)이라는 것이다. 일반 명사들과 형용사들 등등은 고유명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평등'이라든가 '정의'라든가 '진보'라고 불려지는 대상들에 관해서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은 진정한 존재자이다"라거나 혹은 "평등은 진정한 존재자가 아니다"와 같은 이러한 플라톤적 단언과 반플라톤적 단언은 똑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그리고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단언들은 의사 존재론적 진술인 동시에 의사 플라톤적 진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1)

그런데 라일은 여기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입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즉 상당한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문법적 형식상 "정직은 여차여차하다"(honesty does so and so)라거나 혹은 "평등은 이러이러한 것이다"(equality is such and such)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이 실제로는 형식상 부적합한 방식으로 (비록 쉽사리 이해가능하고 그리고 관용어법적으로 올바른 방식일지라도) "x와 동등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러이러한 것이다"(anything which is equal to x is such and such)라거나 혹은 "정직한 사람은 누구든지 여차여차한 사람이다"(whoever is honest, is so and so)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진술들은 다른 진술들이 숨긴 채로(covertly) 진술한 것 - 어떤 것이 한 속성을 가짐은 그것이 다른 속성을 가짐을 필수적으로 한다라는 것 - 을 공공연하게(overtly)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의사 기술(quasi-descriptions)



우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부총장'과 같은 '아무개'(the so and so)라는 형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표현들로써 우리는 아주 흔히 유일하게(uniquely) 기술되는 어떤 한 개인을 지칭한다. '현재의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부총장'이라는 기술구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기술구는 "현재의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부총장은 키가 큰 사람이다"와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본 적이 없다"와 같은 명제들에 있어서 그러한 어떤 지칭물(reference)을 가진다. 이처럼 유일한 기술로서의 정관사구들('the'-phrases)의 사용에는 - 비록 이들 구들이 요약하거나 생략한 의미는 있을지라도 - 본래적으로(intrinsically)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구들이 의미하는 것에 관하여 철학자들이 설명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실수(mistakes)를 범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 범하고 있다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상 전혀 지칭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법적으로는 마치 개별자를 지칭하는 유일한 기술(unique descriptions)인 것처럼 행세하는 정관사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류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에 대한 검토는 진짜 유일한 기술들이 어떻게 지칭하는가를 살펴본 연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기술구는 고유명(proper name)이 아니며, 그리고 기술구가 지시하는 속성들의 주체가 그 기술구에 의하여 지시되어지는 방식은 그 주체가 '아무개'라고 불려지고 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구가 지시(signify)하고 있는 바인 그 특유의 속성(idiosyncratic attribute)을 그 주체가 가지고 있음에 있으며 그리고 사실 그 자체에 의해(ipso facto) 그 주체가 그 특유의 속성의 유일한 소유자임에 있다는 것이 라일의 설명이다.



만약 토미가 존즈의 장남이라면, '존즈의 장남'(the eldest son of Jones)이라는 구가 토미를 지시하게 되는 것은, 누군가가 토미를 '존즈의 장남'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존즈의 아들이면서 존즈의 나머지 모든 아들들보다 더 나이가 많기도 한 것은 토미이지 다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말하자면, 그 기술구는 하나의 고유명이 아니라, 존즈의 아들이라는 특성과 그리고 존즈의 나머지 아들들 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특성을 공통으로 지시하고 있는 서술적 표현(predicative expression)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구는 토미가 그리고 토미 혼자만이 그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만 토미를 지칭하는 것이다.22)



따라서 '존즈의 장남'이라는 구는 결코 토미를 의미(mean)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존즈의 장남'이라는 구는 "존즈의 아들이면서 그의 나머지 아들들보다 더 나이가 많기도 한 ???"이라는 서술적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구 자체는 하나의 서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라일이 말하는 '서술적 표현'이라는 것은 특정한 특성 또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하는 진술의 한 부분(fragment)을 의미한다. 그리고 '존즈의 장남'이라는 구는 그 자체로서는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주체를 이름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고 어떤 주체가 그러한 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구는 실제로 그 자체로는 표현될 수 없고 오직 완전한 진술의 한 요소로서만, 즉 서술적 요소로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즈의 장남은 오늘 결혼하였다"라는 완전한 진술은 "누군가가 (즉, 토미가) ⑴ 존즈의 장남이고, ⑵ 존즈의 나머지 아들들보다 더 나이가 많으며, 그리고 ⑶ 오늘 결혼하였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진술은 이들 세 개의 요소 진술들이 참이지 않는 한 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요소 진술 ⑴과 ⑵ 모두가 그에 대해서 참이 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이들 요소 진술들이 진술됨에 의하여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진술도 그 자체의 진리성을 보증할 수 없다.) 따라서 특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 . . 존즈의 장남이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그의 고유명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든 혹은 그 표현의 이해는 토미가 이러한 특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 그런 표현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든 토미를 의미(mean)하지 않는다. 그 표현은 단지 정보에 정통한 청취자는 토미가 그리고 토미만이 실제로 이러한 특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토미를 지칭(refer)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은 "존즈의 장남은 오늘 결혼하였다"라는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의 일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토미가 바로 그 장남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가 오늘 결혼했다는 것을 모르고서도 그 진술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 완전한 진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렇게 묘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23)



계속해서 라일은 주장하기를 한 진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혹은 한 진술이 의미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이 진술이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 진술이 사실에 관한 기록이라면 진상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립된 고유명이나 혹은 고립된 유일 기술(isolated unique description)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이해나 파악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별히 누군가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거나 아니면 그러한 기술구에 의하여 지시되는 특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든가 - 이러한 앎은 우리가 그 이름이나 그 기술 및 그렇게 이름 불려지거나 기술된 사람 모두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 아니면, 이러한 것들을 모르고 있든가―이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 의사 이름(quasi-name)이 도대체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그 의사 유일 기술(quasi-unique description)이 누군가를 기술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 이름이나 의사 유일 기술이 나타나는 진술들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이름 불려지거나 또는 그렇게 기술될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그러한 진술들의 빈사들로써 다른 특성들이 서술된다면, 진상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술구가 단축된 서술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기술구의 기능은 (전체적으로 어떤 것이 특정한 특성 혹은 특성들을 가진다는 것을 기록하는) 진술들에 들어 있는, (이런저런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러한 요소 혹은 (보다 흔하게는) 그러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라일의 논의는 어떤 현실적이거나 혹은 가능한 철학적 과오들(errors)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도된 것이지만, 이들 과오들은 기술적 표현들에 대한 과오이지 그러한 기술적 표현들 속에 들어 있는 술책성(trickiness)에 기인하는 과오는 아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라일이 제거하고자 시도해온 철학자들의 과오는 대략 두 가지 견해 - ⑴ 기술구가 고유명이라는 견해와 ⑵ 한 기술이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 기술이 의미하는 바이라는 견해 - 로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이제부터 라일의 논의의 본줄거리로 들어가서 또 한 부류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 - 의사 지칭적 정관사구들 - 에 대한 라일의 분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4) 의사 지칭적 정관사구(quasi-referential 'the'-phrases)



라일에 의하면 정관사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유일한 기술(unique descrip- tions)이 아닌 - 비록 문법적 형식으로 볼 때는 유일한 기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 표현들이 일상적인 담화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추상화(abstrac- tion)하고 일반화(generalization)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들을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하며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을 포함하는 문장들이 의미하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지만 철학자들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표현들을 형식적으로 보다 더 적합한 표현으로 재진술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가령 "왕은 오늘 사냥을 나갔다"(the King went shooting to-day)라는 문장에 있어서 처럼, 한 기술구가 형식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한 문장의 문법적 주사로 사용될 때, 만약 그 진술이 전체적으로 참이라면 (혹은 거짓일 때조차도) '왕'(the King)이라는 기술이 특별하게 지칭하거나 적용되는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왕은 누구인가?"라거나 또는 "웨일즈 왕자의 아버지와 왕은 동일한 인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일상적 담화에서는 "아무개"(the so-and-so)라는 형식의 의사 기술구가 통상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 구가 지칭하거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기술될 수 있는 그러한 사물이나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이 아무개인가?" 혹은 "그와 아무개는 동일한 인물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그러한 사물이나 사람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the King of France)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토미 존즈는 영국의 왕(the King of England)이 아니다(즉, 영국의 왕과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진술과 첫눈에 형식적으로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점은 이내 밝혀진다. 왜냐하면 후자의 진술이 참이라면 그것의 역인 "영국의 왕은 토미 존즈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참인 반면에, "프랑스의 왕은 포앙카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왕은 전혀 있지 않으며 '프랑스의 왕'이라는 구는 누구에게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라고 말한 평범한 사람은 그 반대 경우를 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술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왕'은 다른 진술에 있어서의 '영국의 왕'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왕'이라는 구는 실제로 지칭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전혀 누군가에 관한 유일한 기술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라일은 이러한 대조적인 명제들을 다음과 같은 형식의 말로 바꾸어 쓸 때, 원래의 명제들이 숨기고 있는 기록된 사실의 형식들간의 차이점이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즉



"토미 존즈는 영국의 왕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⑴ 누군가가 그리고 - 어떤 불특정한 범위 가운데서 - 오직 한 사람만이 토미 존즈라고 불려지며; ⑵ 누군가가,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영국에서 왕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⑶ 토미 존즈라고 불려지면서 영국의 왕이기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진술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의 진술은 진술 ⑴과 ⑵가 참이지 않는 한 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라는 진술을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⑴ 누군가가 '포앙카레'라고 불려지며 그리고 ⑵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진술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진술은 누군가가 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24)



한편 정관사구의 이러한 이중적 사용, 즉 지칭적 사용과 비지칭적 사용은 단순한 일상적 담화의 수행에 있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스미드는 지금까지 몽블랑을 등정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Smith is not the only man who has ever climbed Mont Blanc)라는 진술은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몽블랑을 등정하였고, 그런데 스미드는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진술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쉽사리 간주되는가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스미드가 몽블랑을 등정하였지만 그러나 적어도 다른 한 사람이 역시 그렇게 하였다"라는 진술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러한 표현들이 가지는 특별한 경우의 애매성이 아니라, 실제로는 비지칭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이 마치 지칭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혹은 모든 정관사구가 지칭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처럼, 해석되기가 쉽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추상화하고 일반화해야만 하는 철학자들과 그밖의 사람들은 한 종류의 정관사구들과 다른 종류의 정관사구들이 가지는 언어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주어진 정관사구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위하여 "존재자를 새로 만들어 내는 일"(coining entities)에로 오도되기가 쉽다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해서 데카르트와 그리고 아마도 뉴튼이 범한 실수들(blunders)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우리가 사물들의 시점을 확정하고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x가 점령한 영역'(the region occupied by x), 'y가 진행한 궤도'(the path followed by y), 'z가 발생한 순간 또는 시점'(the moment or date at which z happened)과 같은 그러한 정관사구가 가지는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성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들 정관사구들은 단지 절름발이 서술적 표현(hamstrung predicative expressions)이며 그리고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라는 진술에 있어서 '프랑스의 왕'이 일상적으로는 지칭적으로 사용된 정관사구로 취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칭적으로 사용된 기술적 표현이 아니며 그리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간주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 …

'표현 x의 의미'(the meaning of the expression x)라는 의사 기술구에 대한 분석태만으로 인하여 논리학 자체와 인식론에 있어서도 동일한 종류의 상당히 많은 실수가 발생해왔었다. 개념들, 관념들, 명사들, 판단들, 객관적 명제들, 내용들, 객체들 및 기타 등등에 관한 모든 잘못된 이론들은 동일한 오류, 즉 "우리 마을의 경찰관은 축구를 좋아한다"라는 진술에 들어 있는 그 기술구에 의하여 실제로 지칭되고 있는 그 경찰관과 부합하는 어떤 것이 '단어(구 혹은 문장) x의 의미'와 같은 그러한 표현에 의하여 지칭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부 정관사구들이 지칭적으로 사용된 기술구들과 단지 문법상으로만 유사하지 기능상으로는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문제가 되고 경우에 있어서, '"x"의 의미'라는 것은 "포앙카레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라는 진술에 있어서 '프랑스의 왕'과 마찬가지로 비지칭적으로 사용된 서술적 표현인 것이다.25)



그리고 계속해서 라일은 역시 철학적 오해를 발생시키기 쉬운 또 다른 형태의 정관구의 사용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내가 "노동당의 패배(the defeat of the Labour Party)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한 말은 "노동당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놀람이었다"라거나 "노동당이 패배하였고 그리고 나는 노동당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놀랐다"라는 표현으로 올바르게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 정관사구는 어떤 사물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진상이라는 것에 관한 단축된 기록(condensed record)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통상적이고 간편한 관용어법이다. 우리는 "A가 B이기 때문에, 따라서 C는 D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C가 D임은 A가 B임에 기인한다"라고 언제나 말할 수 있다. 즉 "높은 채소 가격은 겨울의 혹독함(the severity of the winter) 때문이다"라는 진술은 "겨울이 혹독했기 때문에 채소 가격이 비싸다"라는 진술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노동당의 패배는 1931년에 일어났다"라고 말한다면, 나의 정관사구는 어떤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지칭적으로 사용된 것이지 어떤 사실에 관한 단축된 기록으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건들은 날짜를 가지지만 사실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유사한 진술인 "노동당의 패배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라는 진술과 "노동당의 패배는 1931년에 일어났다"라는 진술에서 기록되고 있는 사실들은 논리적 형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종류의 사실들 모두는 "노동당의 승리(the victory of the Labour Party)는 나를 놀라게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진술에서 기록되고 있는 이러한 세 번째 종류의 사실과는 형식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진술은 어떤 사건을 지칭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노동당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만약 노동당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놀랐을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 정관사구는 하나의 조건절 이다. 그리고 한 가지 유형을 더 든다면, 이들 세 가지 유형의 정관사구의 사용 모두는 "다음 선거에서 보수당의 패배(the defeat of the Conservative Party)는 가망이 있다(혹은 가능하다, 혹은 불가능하다)"라는 진술들과는 그 의미의 종류에 있어서 다르다. 왜냐하면 이들 진술들은 "유효한 관련 자료는 보수당이 다음 선거에서 패배함을 지지한다(혹은 패배함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혹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6)



그리하여 문법적으로 구별 불가능한 정관사구들을 포함하고 있는 진술들로써 기록될 수 있는, 그리고 일상적 담화에서 간편하고 이해 가능하게 기록되고 있는 사실들에는 적어도 이와 같은 상이한 네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진술들은 기록된 상이한 종류의 사실들이 가지는 다양한 논리적 구조를 - 그 진술들의 특별한 문법적 형식덕택으로 - 잘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형식의 표현으로 재진술 될 수 있다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일이 분석하고 있는 또 한 부류의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정관사구는 "고래(the whale)는 물고기가 아니라 포유동물이다"와 "충실한 영국인(the true Englishman)은 배신행위를 싫어한다"와 같은 진술들에서 나타나는 정관사구 이다. 이들 진술들은 명백히 어떤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들은 이 고래나 혹은 저 영국인에 관한 진술이 아니며, 그리고 설령 단 한 마리의 고래도 없거나 단 한 사람의 충실한 영국인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참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진술들은 필시 위장된 가언적 진술(disguised hypothetical state- ments)이며 그리고 명백하게 위장된 진술이라는 것이 라일의 주장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라일이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들의 주된 유형으로서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 모두가 특정한 한 방면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 표현들 모두가 새로운 종류의 대상들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 표현들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자들(entities)의 수를 증가시키게끔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 존재론적 표현들, 의사 플라톤적 표현들, 의사 기술적 표현들, 각각에 있어서 한 표현은 실제로 지시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단지 지시하는 데 사용된 표현들과 문법적으로 유사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지시 표현(denoting expression)으로 오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캄의 처방(Occam's prescription)을 라일의 주장에다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유명이나 또는 지칭적으로 사용된 정관사구와 문법적으로 유사한 모든 표현들을, 그러므로 고유명이나 지칭적으로 사용된 정관사구인 것처럼 취급하지 말라."





4. 맺음말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 논문의 의도는 라일의 언어분석의 실례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스타일과 방법을 부각시키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분석철학 특히 일상언어철학의 한 특성과 그 의의를 조명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분석철학은 그 스타일과 방법에 있어서 고대이래의 철학이 수행되어온 방식과 연속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해진다.27) 첫째는 분석철학이 19세기 후반 동안에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매우 색다른 철학 - 영국 관념론 철학 - 에 대한 반동으로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분석철학이 어떤 형이상학의 가능성도 완전히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되었다는 점이다. 세째는 분석철학이 비록 포괄성(comprehensiveness)이라는 철학의 낡은 주장을 포기하기는 하였지만, 자연과학의 기술과 방법 및 사물관(outlooks)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아무튼 분석철학자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관심은 문제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공식화하기 위해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한 조심스런 음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두 번째 관심은 인공언어 내지 수학적 언어의 구성이었다. 이것은 기호논리학의 발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마지막의 관심은 철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상언어' 또는 자연언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가상적 상황을 설정해 놓은 다음에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말하게 될 것이나 또는 말해야 될 것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관심영역 - ⑴ 우리의 논점을 명백하게, 그리고 애매하지 않게 서술할 수 있도록 낱말들을 정확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관심, ⑵ 인공언어에 대한 관심 및 ⑶ '일상적인' 철학적 언어에 대한 관심 - 가운데 세 번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철학자들이 자연언어로써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을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며 따라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논리적 원자론자들28)과 논리 실증주의자들29)의 입장을 거부한다. 이들은 이제 철학적 문제들은 철학자들이 빠지게 된 언어적 함정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기보다는 해소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철학은 언어의 미로에 빠진 사람들에게 출구를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의 말이 걸린 "언어적 질병"을 치료해주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철학은 그 활동의 대상으로서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이 야기한 개념적 난제들(puzzles)을 일소하는 과업을 가진다. 우리가 심적 과정에 관하여 그들이 마치 물리적 과정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 사물의 본질적 속성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개념들의 단일성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혹과 혼돈에 귀착하게 된다. 탈출구는 언어의 각종 다양한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차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거짓된 그림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언어의 작용에 의한 이러한 거짓된 그림들의 지배가 일단 파괴되고 나면, 그는 자신의 혼돈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이론을 수립함으로써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들이 어떻게 해소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한다. 명료성이 문제의 제거를 낳게 되는 것이다.30)



분석철학자들은 다른 학파의 철학자들만큼이나 공통점이 많든가 아니면 거의 없든가 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언어분석철학자들은 적어도 두 가지 견해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⑴ 많은 수의 철학적 문제들 -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 은 언어가 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면밀한 분석이나 개조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해결 또는 해소될 수 있다는 견해(무어, 러셀, 논리실증주의자들, 비트겐슈타인, 라일, 오스틴, 스트로슨, 콰인 등은 모두가 이러한 견해를, 각기 다른 방식에 있어서, 참이라고 생각한다)와 ⑵ 언어의 문제와 그리고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분석적 철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가 아니라, 철학의 과업 전체와 매우 밀접한 것이다. 따라서 분석철학자들은 일상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며 또한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상언어를 분석하는 데 그들의 노력을 집중 하든가, 아니면 모든 실질적인 문제들을 공식화할 수 있는 그러한 형식언어를 구축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분석철학자들이 제시한 다양한 언어관은 세부적인 면과 원리적인 면 모두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분석철학자들은 훨씬 더 세밀하고 훨씬 더 고도로 추상적인 언어적 문제들에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다. 결국 이러한 과업은 일부 철학자에게는 전담 업무(full-time occupation), 즉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 되지만, 그러나 모든 철학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