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가치가 있으며 이를 각각 인식적·미학적·정서적 가치로 명명해볼 수 있다고 다른 지면에 적었는데, 이 가치들의 우열관계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동하는지를 통시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시대에 사람들은 소설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 시대가 저물면 그 반작용처럼 소설의 ‘미학’적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때가 온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멘토·공감·힐링 등의 어휘가 유행하는 시절에는 소설도 그런 ‘정서’적 맥락에서 많이 읽힌다. 이런 식으로 그 상대적 우열관계가 변하며 소설의 특정 가치는 주목되거나 간과되거나 한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지만, 근래 한국 소설에서 인식적 가치는 다른 가치들에 비해 힘을 잃은 듯이 보인다. 그런 상황이 조금 답답하던 차에 읽은 은희경의 새 장편 <태연한 인생>은 우리가 사회학·심리학·철학 등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인식에 자주 힘있게 도달해서 인상적이다. 밑줄을 치고 싶은 문장이 많다는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물론 이 소설에는 그런 문장이 무수히 많으며 그것은 그 자체로 미덕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식’을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느냐 아니냐에 걸려 있다. ‘인식의 생산’이 없는 아포리즘의 수명이 짧다는 것을 이 작가는 잘 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중년의 나이쯤 되면 특정한 단어가 각자의 사전에서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이라는 부제하에,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들이 특정 단어를 어떻게 달리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구축해낸다.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전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어휘를 각자 달리 이해하고 살아내는 인간(삶)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주기 위해 씌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인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의 한 사례다.
은희경의 이번 소설의 두 중심인물인 ‘류’(여)와 ‘요셉’(남)에게도 각자를 위한 열쇳말들과 그 은유적 대응물이 배당돼 있다. ‘류’의 경우 열쇳말은 ‘고통과 고독’이고, 그의 은유체계는 ‘영화적’(극장과 배우)이다. 류의 서사는 부모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생활의 파국과 그것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을 순차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씌었다. 부모의 삶을 통해 타인 있는 삶의 고통과 타인 없는 삶의 고독을 함께 배운 류가 그 두 함정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 모습을 작가는 시종 담담히 관찰한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우리 삶의 어떤 영역이, 이미 결정된 극장에서 특정한 배역을 떠맡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성찰하게 한다.
‘요셉’의 경우 열쇳말은 ‘패턴과 고유성’이고, 그의 은유체계는 ‘소설적’(플롯과 인물)이다. 패턴을 따르는 삶은 따분한 플롯과 진부한 인물로 이루어진 소설을 닮는다는 것, 집단의 패턴에 맞서 개인의 고유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 류와는 달리 요셉은 자신의 이런 열쇳말로 세계의 여러 인식의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힌다. 작가가 주인공인 소설에 질색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럴 만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상상력의 빈곤을 작가의 일상사로 대체하지 않는다. ‘패턴과 고유성’에 대한 인식을 생산해내는 데에 소설가라는 직업의 은유체계가 효율적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둘 중 한 인물을 실제 작가와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는 가끔 류의 열쇳말로 요셉의 삶을 열어보기도 하고 요셉의 은유체계로 류의 삶을 이해하기도 하며 균형을 잡는다. 요셉의 목소리가 통렬하게 독자를 압도하지만 류의 침묵에 더 귀기울일 독자도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작가의 일부이겠지만 어떤 인물도 완전히 그녀와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쿤데라를 인용하자면, 소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어떤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장소다. 소설은 실험실이고 작가는 실험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실험 보고서의 인식적 가치다. 은희경의 이번 보고서는 예리하고 우아하다.
문학평론가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르포 [2012.09.10 제927호] |
|
[신형철의 문학사용법] 아쉬운 밀도와 호소력 있는 겸허함, 르포문학으로서 <의자놀이>의 한계와 성취 |
|
|
|
| | |
|
|
|
한국에서 르포의 위치는 애매하다. 알다시피 서구에서는 문학 분야가 ‘픽션/논픽션’으로 구분된다. 문학의 범주를 가능한 한 넓게 잡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꾸로 말하면, 사실에 근거하는 논픽션에서도 문학적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창 시절 이래로 우리에게 익숙한 구분법은 ‘문학/비문학’이다. 문학의 범주를 최대한 넓게 잡고 그 안에서 픽션과 논픽션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범주를 최대한 좁게 잡고 그 외의 것은 비문학이라는 범주 안에 밀어넣는 것이 우리의 관행이다.
서구의 분류법하에서 르포는 수필, 자서전, 평전, 여행기 등과 함께 논픽션 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하위 장르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문학과 비문학을 가르는 한국적 분류법하에서, 일차적으로는 비문학적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하지만 추가적으로는 문학적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 르포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가 곤란해진다. 비문학으로 분류되면 문학적 요소를 평가받을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하게 되고, 문학으로 분류되면 또 그쪽의 기준에 의해 문학적으로는 부족한 데가 많은 글쓰기라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 것이다.
이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문학평론가들이 르포를 대할 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르포에서 일차적인 것은 팩트와 관련된 비문학적 요소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면, 르포 텍스트를 평가하는 일은 문학평론가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된다. 이와 다르게, 르포문학의 고전들은 탁월한 문학성을 갖고 있으니 당대의 르포들에도 당연히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면, 행여나 자신의 그런 작업이 르포의 다급하고 절실한 취지에 냉담한 ‘문학주의자’의 젠체하는 트집처럼 보일까봐 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가 공지영의 르포 <의자놀이>(휴머니스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렇긴 해도, 이 텍스트의 ‘다급하고 절실한 취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지가 쏟아지고 있으니, 이 르포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논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논평들을 모아본다면 아마 ‘르포문학’으로서의 이 책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것이다. 르포문학의 힘은 무엇보다도 해당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 더 깊게 알고 있는 저자의 강력한 텍스트 장악력에서 나온다. 공유된 사실에서 미답의 진실을 끌어내는 힘 말이다.
이 책에 그것이 있는가? 충분하지 않다. 이 책의 저자는 해당 사건에 대해서 이 세상 누구보다 깊게 알고 있는 이의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을 것이다. 책에 밝힌 대로라면 저자가 쌍용차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1년 겨울 어느 날’이다. 반년 남짓한 기간 동안 취재와 집필이 모두 완료됐다. 그만큼 다급했을 것이다. 그러니 6년 동안 쓰인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나 인터뷰에만 1년이 걸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같은 책들을 기준으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그 대신 저자는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고백하고, 인용에 기꺼이 의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진솔하게 아연해하고, 혹자들은 감상적이라고 할 만한 문장들을 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단점들이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이 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수많은 분이 함께 만들었다”는 저자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지만, 이 책을 끌고 가는 겸허한 목소리는 확실히 이 작가의 것이다. 이 목소리가 르포에 대한 독자들의 부담감을 눅이는 데 성공했다. 저자의 이름값만으로 책이 이렇게 팔리지는 않는다.
부기. ‘인용 논란’도 이 책의 이런 독특한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책 후반부에 출처가 있으니 도용 운운은 당치 않지만, 유독 그 한 부분만 본문 내의 출처 설명이 빠져 문장의 주인이 헷갈리게 됐다. 독자의 ‘감정의 흐름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다던가. 촉박하게 쓰인 탓에 르포로서의 밀도가 옅은 원고에 힘을 싣기 위해 정서적 울림을 높이려고 했으리라. 이 선택에 악의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로 이 소중한 책에 대한 다른 모든 토론을 대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
우리가 소설을 내려놓는 순간 [2011.12.26 제891호] |
|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소설적인 문장에 대한 고뇌는 반드시 전달된다… <토성의 고리>를 쓴 제발트의 견고한 고집 같은 것, 우리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길 |
|
|
|
| | |
|
|
|
다른 지면에서 ‘올해의 시집’을 선정해 짧게 몇 마디 적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올해의 소설’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싶어 지난 1년간 출간된 한국 소설의 목록을 정리해봤더랬다. 비평이 개입할 가치와 여지가 있어 보이는 책들로만 골라도 장편 45권, 단편소설집 30여 권이 추려졌다. 책들을 다시 들춰보다가 나는 조금 허전해졌는데, 읽지 못한 책이 많아서가 아니라, 읽다가 중단한 책들이 많아서였다. 그랬던 까닭을 되새기다가, 올해의 소설을 선정해보겠다는 생각을 이내 접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물음 속으로 또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그래도 해볼까.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다가 내려놓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자 각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제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겠지. 나에게 ‘이 책을 그만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이 찾아오는 1차 고비는 처음 10쪽 부근, 2차 고비는 3분의 1 지점이다. 고비가 두 군데라는 것은 내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적어도 두 가지라는 뜻이다. 10쪽 부근에서 하는 생각들만 일단 말해보려고 한다.
신기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얘기다. 모든 예술 장르는 각자의 매체를 갖는다. 음악이 소리를, 회화가 색을, 영화가 영상을, 무용이 몸을 갖고 있듯이, 문학은 언어를 갖고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소설가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 ‘시달리는’ 소설가는 드물다. 시달리지 않는 소설가들은, 그냥, 쓴다. 그럴 때 문장들은 달콤한 먹이를 실어나르는 개미들처럼 부지런히 이야기를 실어나른다. 여기엔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자의식이야말로 예술가의 존재증명이라면? 10쪽까지 읽었는데도 그 자의식을 증명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 소설을 내려놓고 언젠가 영화화되길 기다리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소설적인 문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저 아름답게 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요령부득의 문장을 써놓고 폼을 잡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추상적인 명제이지만 정직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 고뇌는 반드시 전달된다.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라고 믿는 소설가, 동시대의 전위적인 시를 따라 읽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소설가들에게는 아마 무의미한 진리이겠지만.
그런 작가들은 자신은 전문적인 기능인일 뿐이며 예술가 대접까지 받을 생각은 없다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고 그것은 존중받을 만하다. 나 역시 소설가는 모두 예술가여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반예술가적 타입의 작가라면 자신이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비평가들 역시, 사운드의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는 데 관심이 없는 작곡가, 카메라의 윤리적 위치 따위에는 관심 없이 스토리텔링에만 열중하는 감독 등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건 당연한 일로 보인다.
내가 신뢰하는 몇몇 작가들로부터 존경에 가까운 지지를 얻고 있는 독일 작가 W .G. 제발트는 비평가 제임스 우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화자 자신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소설 쓰기란 매우,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사기의 한 형태라고 생각해요. 화자가 자기 자신을 텍스트 안에서 무대담당자이자 연출자, 판사이자 집행자로 내세우는 그 어떤 형식의 작가적 글쓰기도 용납되지 않아요.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어요.”(<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창비, 15쪽)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 윤리적 자기 검열에까지 이른 경우다.
올해 번역 출간된 소설 <토성의 고리>(1995)에서도 이 작가의 기질적 신념은 철저히 관철된다. 그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서술자와 인물의 내면이 뒤섞이는) 자유간접화법을 거의 혐오하면서, 실로 경건할 지경인 벽돌 같은 문장들을 써나간다. 물론 제임스 우드의 말마따나 이것은 지나친 태도다. 나는 제발트를 좋아하지만, 오류를 피하기 위해 다른 가능성에 소극적일 필요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소설의 최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올해 내려놓은 많은 소설들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제발트만큼 고집불통인 어떤 자의식을 모국어 소설에서 자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쓸쓸해한다.
문학평론가
|
------------------
오늘 나는 릴케의 근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로 하여금 <로댕론>(1902)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게 한 그 감정이 근심이 맞는다면 말이다.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릴케는 그 뒤에 바로 낙관적인 말을 덧붙였다. 로댕의 위대한 작품들이 결국 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오늘 나는 릴케의 그 낙관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진은영이 예전에도 고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최근 2~3년 동안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정치’나 ‘실천’ 같은 말이 자주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몇 년 동안 보여준 지성과 용기를 보건대 이는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그가 늘 오해만 받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는 더 고독해졌을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그의 당당하고 예리한 산문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들에 대해서도 말했으면 싶었다.
시가 물리적 의미에서 가장 ‘순수’해졌을 때 시에서는 시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때 시는 누구 것도 아니고 그저 언어의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쓴 시다. 말라르메를 따라서 이것이 시의 가장 지고한 경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진은영이 이 시집에 인용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의 생각도 그렇다. “시적인 말은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서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어느 누구가 아니다. 오히려 말 홀로 스스로를 말하는 것 같다.”(<문학의 공간> 2부)
나는 이것이 시의 빛나는 한 경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지고한’ 경지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시를 사랑하는 다른 많은 이유들을 쓸쓸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시인 진은영을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저 ‘무위’(無爲, desœuvrement)의 언어로 쓰이는 시, 혹은 시의 목소리만이 울려나오는 시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용산의 목소리, 4대강의 목소리, 죽은 김남주와 산 김진숙의 목소리, 두리반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의 목소리.
그런데도 그 결과물은 언제나 아름답다. 다른 시에서는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직유들을 그는 어린아이가 과자를 흘리듯이 한 편의 시 안에 아무렇게나 흩뿌려놓는다. 그가 제아무리 헌신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의 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에서 천사는 폭풍에 떠밀리듯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저항하듯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베냐민은 진보라는 신화를 맹신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천사가 아니라, 파국에 파국을 거듭하는 중인 역사를 우울하게 ‘돌아보는’ 천사를 봤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역사의 천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 하나를 상상해본다. 그 그림에서 천사는 천상으로 떠밀리듯 날아오르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지상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가 가장 순수해져도 좋은 때에 그의 언어는 무위의 언어다. 그것이 천사를 하늘로 밀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지상을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천사의 언어는 탄원의 언어가 된다. 그 언어가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천사는 중간에 있다. 밀어올리는 힘과 끌어내리는 힘 사이에서, 상승이기도 하고 하강이기도 한 날갯짓으로, 무위와 탄원의 언어를 함께 말하면서, 천상과 지상의 중간 어디쯤에 떠 있는 천사. 그 천사의 이름은 ‘시의 천사’일 것이다. 이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비)에는 그 천사가 깃들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