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악의 꽃’-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김영옥(이화여대)
Ⅰ. 들어가는 말
1930년대, 즉 20세기의 초입에서 <샤를르 보들레르: 자본주의 전성기 시대의 시인 Charles Baudelaire - ein Lyriker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이라는 방대한 책을 기획하고 있을 때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은 진지하게 19세기와 20세기의 ‘사이’를 질문하고 있었다. 그는 19세기에 활동한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1821-1867)라는 한 시인의 시를 통해 모든 성스러움을 물리치고 자본주의가 유일종교로 등극하게 된 20세기의 역사적 시점에서 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성운을 읽어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는 문화이론과 비평의 실천적 활동을 위해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과 실제를 발전시키려는 기획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벤야민은 이러한 기획을 통해서 문화 현상을 사회 경제적 조건들의 직접적인 반영으로 이해하며 문화유산의 전수자 및 담지자를 질문하지 않는 소위 ‘통속’ 마르크시즘 뿐 아니라 관념론적 부르주아 미학 전통의 형식개념들을 은밀히 역사적 유물론에 끼워 넣는 ‘교활하고 세련된’ 문화․역사이론에도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본 연구는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에서 행해진 기존의 보들레르 수용과는 달리 상징이 아닌 알레고리의 미학적, 역사철학적 프리즘을 통해 보들레르 시학을 분석하고 있는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살펴봄으로써 벤야민의 후기 예술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근대 비판의 주요 특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벤야민이 탐색하고 있는 보들레르는 ‘자본의 시대’에 서정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문화‘상품’으로서의 위상을 시어로 포착하고 성찰함으로써 유럽의 마지막 위대한 시인으로 남게 된다. 보들레르를 이해하는데 있어 자본의 시대와 서정시, 즉 문화예술의 이 상관관계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벤야민은 자신이 살고 있던 20세기를 역사철학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보들레르가 살았던 19세기를 20세기의 ‘태고사 die Urgeschichte’로서 재구성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즉 19세기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성운 속에서 ‘독해 및 인식의 가능성’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20세기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보들레르를 읽으면서 벤야민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Ⅱ. 샤를르 보들레르 - 자본주의 전성기 시대의 시인
1 아케이드 작업 Passagenwerk 기획과 19세기의 역사철학적 성운
벤야민은 1930년대 망명시절 대부분을 ?아케이드 작업 Passagenwerk?에 몰두하면서 지낸다. 이 작업은 파시즘에 점령당한 유럽 대륙에 체류한다는 것 자체가 생사를 건 모험이 되는데도 그가 유럽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가 되었다. ?횡단면 Der Querschnitt?이라는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1927년 처음으로 구상했던 ‘아케이드 작업’은 오랜 작업기간을 거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적 역사가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비평가 벤야민 자신의 역사철학과 비평적 인식론의 결정체로 자라나게 되었다. 숄렘 Gershom Scholem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아케이드 작업’의 중심에 놓이게 될 개념은 ‘상품의 물신성’이었다. 변증법적 비평가인 벤야민의 관심은 19세기의 역사 및 예술이 마르크스의 초기저작과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에서 분석된 바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조직을 통해 왜곡되는 방식과 양상에 놓여 있었다. 1935년 작성된 초안 「파리, 19세기의 수도 Paris, die Hauptstadt des XIX」에서 벤야민은 19세기의 역사적 현실을 다음과 같은 정신분석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케이드, 인테리어, 전시장과 파노라마는 이 시대에서 유래한다. 이것들은 꿈의 잔재이다. 깨어나면서 꿈의 요소들을 가공하는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사고의 모범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사고는 역사적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기관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비판이론과 접맥시키면서 인류의 역사를 인류가 꾼 꿈으로 이해한다. 역사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삶에 대한 소망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간의 충동은 꿈에서인 양 일그러지고 축출된 형태로밖에 표현되지 못하며, 모든 문화적 현상과 사회적, 경제적 조직 형태들은 옛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나타난다는 점에서 꿈의 표상들이자 환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물신적 형식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왜곡과 모순은 이 시대의 모든 표현 형식에도 각인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변증법적 문화비평, 즉 벤야민 스스로 ‘비관주의를 조직하기’(II.1, 308)라고 명명했던 구성적 몽타주를 통해 역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아케이드 작업의 웅대한 목표였다.
그렇다면 왜 ‘아케이드 작업’인가? 19세기 파리의 현상학을 꿈의 표상들로 독해하고자 시도하면서 벤야민은 당시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등장한 아케이드에 주목하게 된다. 긴 회랑을 끼고 줄지어 이어진 쇼 윈도우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상품들, 이 상품들의 신전에서 그는 상품자본주의의 궁극적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건축의 국제적 양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인 아케이드에 대한 벤야민의 특별한 관심은 아케이드의 변증법적 이미지, 즉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아케이드가 신화화되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신화화된 이미지로서의 아케이드가 개인들의 소비의 효과에 대해 갖게 되는 역할에 놓여있었다. 지붕이 유리로 덮여 외부의 하늘이 실내로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일종의 ‘문지방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아케이드는 내적 의식, 즉 ‘꿈꾸는 집합체의 무의식’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흔적이었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기획은 도시라는 거대한 미궁 안에 존재하는 작은 미궁으로서의 아케이드에 초점을 맞춘 ‘19세기의 파리’ 연구로서, 꿈꾸는 집합체가 몽롱하게 스쳐 지나가는 ‘소비의 원초적인 풍경’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미완으로 끝난 벤야민의 이 기획 속에서 아케이드는 이처럼 내부와 외부, 과거와 현재, 꿈과 깨어남이 상호 침투하고 겹치는 경계 지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벤야민에게 아케이드가 매혹적이었던 것은 그곳이 바로 환상과 욕망, 그리고 유혹의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진열된 상품을 반사하는 창문과 아케이드의 유리 표면, 이 창유리 앞에서 전시된 사물을 바라보는 보행자를 벤야민은 수집가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욕망은 지녔지만 그러나 소유하지는 못하는 보행자로서의 이 수집가는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전시가치를 지닌 채 반사되고 있는 상품에 물신화된 사물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 아우라에 도취된다. 수집가에 대한 벤야민의 언급은 인테리어 공간으로서의 아케이드 위상을 강화시키는데, 이것은 전시된 상품으로 가득한 아케이드의 수집가와 예술작품으로 뒤덮인 거실에 거주하는 수집가와의 유사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통과와 상품교환의 장소로서 19세기의 아케이드는 이렇듯 또한 사적으로 점유된 공적 지대를 의미했으니 이곳에서 부르주아 만보객들은 실내 공간의 도취적 아늑함에 빠져드는 것이다.
2. <아케이드 작업> 기획 내에서의 보들레르 연구
초안이 보여주고 있는 건축학적 구조에 따르면 아케이드 작업은 “푸리에 혹은 아케이드”, “다게르 혹은 파노라마”, “그랑빌 혹은 세계 박람회”, “루이 필리프 혹은 인테리어”, “보들레르 혹은 파리의 거리들”, “오스망 혹은 바리케이드” - 이렇게 모두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결국 미완으로 남겨진 이 아케이드 기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텍스트들 중 하나가 보들레르에 관한 연구이다. 아케이드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자 벤야민은 기왕에 그 일부로 기획되었던 “보들레르 혹은 파리의 거리들”을 발전시켜 ?샤를르 보들레르: 자본주의 전성기 시대의 시인?이라는 독자적인 에세이 집필을 계획한다. 그러나 “아케이드 작업의 매우 정확한 모델”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이 에세이 또한 완성되지 못했다.
<샤를르 보들레르 - 자본주의 전성기 시대의 시인>은 변증법적 구성 원리에 따라 원래 3부로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이 중 2부가 집필되어 ?보들레르에게 나타난 제 2 제정 시대의 파리 Das Paris des Second Empire bei Baudelaire?로 발표되었으며, 1부는 집필되지 못했고, 3부는 집필을 위해 수집된 단상들만 남겨져 후에 ?중앙공원 Zentralpark?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1부는 보들레르 시학의 수용사를 토대로 집필될 계획이었으니, 여기서 보들레르는 자연스러운 교감과 알레고리 사이의, 즉 상징적 기억과 알레고리적 리얼리티 경험 사이의 모순 속에 위치해 있는 혼합된 대상으로 서술될 것이었다. 보들레르 자신은 이것을 ‘이상과 우울‘로 대비시켜 표현하였다. “보헤미안”, “만보객” 그리고 “근대” 등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2부에서 보들레르의 시작품은 당시의 사회적 삶의 양태인 시민사회 속에 편입된 것으로 묘사된다. 보들레르의 시작품을 그것이 탄생되어 나온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성들에 기초해 독해함으로써 벤야민은 기존의 독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들레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보헤미안”, “만보객” 그리고 “근대”(I.2, 511-604 참조), 이 세 개의 장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관관계들이 보들레르가 행하는 시인의 역할과 그의 텍스트에 판타스마고리아 Phantasmagorie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시적 대상으로서의 상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3부의 결과물로 남겨진 ?중앙공원?의 단상들에서 벤야민이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보들레르 시를 특징짓는 알레고리적 시선의 역사철학적 근거였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타나는 알레고리적 형상화는 말하자면 절정에 이른 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사물이 지니게 되는 범 우주적 상품성격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1) 보들레르와 현대성의 경험
보들레르는 도시적 환경에서 사는 현대인의 경험과 자기 망상에 정교한 시적 표현을 부여한 시인이다. 「1845년 살롱」에서 그는 ‘현대적 삶의 용감무쌍한 면모’를, 즉 당시 메트로폴리탄의 삶을 그 모든 풍부함과 생동감 그리고 흘러 넘침 속에서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예술가의 과제라고 보았다. 순간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는 도시가 창조해 내는 동시에 또한 요구하는 새로운 재현 양식과 새로운 예술(가)적 감수성 및 실천, 이것이야말로 보들레르를 비롯한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부과된 인식론적, 심미적 현대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들레르는 일회적이고 일시적이며 우연한 것, 즉 휘발성이 강한 속성을 모더니티로 명명하면서, 그러한 모더니즘 예술의 마지막 반은 “영원하고 반복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길러내는 것이 당대 예술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길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보들레르가 제시한 이러한 과제는 바로 그 덧없고 무상한 모더니티의 본질적 특성을 역사철학적으로 규명하고 그것을 적합한 언어 ‘형식’으로 담아냄으로써 수행될 수 있다.
보들레르라는 렌즈를 통해 19세기 파리의 신화적 지형학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개인의 운명을 탐색하고자 하는 벤야민에게 있어 보들레르는 이처럼 무엇보다도 모더니티의 충격과 도취에 적합한 언어적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현대시의 토대를 놓은 시인이다. 알레고리가 바로 이 언어적 형식으로서, 벤야민은 알레고리와 19세기 자본주의 상품물신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경제 체계와 문화 사이의 원인 관계’를 묘사했다면, 벤야민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경제 생산과 문화 영역이 맺는 ‘표현적 관련망’이었으니, 그는 ‘문화의 경제적 기원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표현되는 경제’를 기술하고자 했던 것이다(V.1, 573 f). 문화의 형태들과 예술작품들은 토대가 되는 경제적 패턴의 표현으로서 존재하며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지만, 그러나 생산 관계와 힘들의 단순한 반영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벤야민은 보들레르 시학에 알레고리적 특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 알레고리적 특성의 객관적 기원을 강조했다. 즉 그것은 상품 생산의 사회적 리얼리티가 보들레르 시학 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성격과 물신화, 그리고 보들레르의 알레고리적 시학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근대적인 것의 형상과 알레고리의 형태는 상호 연관되어야 한다.”(V.1, 311) 시학의 형태와 산업 생산방식의 독특한 관계가 나타내 보이는 특수한 형식으로서의 알레고리 개념, 물신으로서의 상품 그리고 모더니티 사이의 상호연계성 - 이것이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로써 보들레르가 모더니티의 본질적 특성을 역사철학적으로 규명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의 시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판타스마고리아적 요소는 그러한 어긋남의 흔적이며, 그것은 또한 당시의 모든 문화적 텍스트에 달라붙어 있는 시대의 잔상들이기도 하다. 보들레르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반혁명의 시대에 악마주의와 이의성으로 피신함으로써 파쇼적 대중의 특징들을 여전히 미적 가상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고 벤야민은 분석한다. 반혁명적인 제 2제정의 “제국주의적 복고 패러디”를 배경으로 보들레르의 시들을 분석함으로써 벤야민은 그것에 각인되어 있는 “야만”(II, 477)의 흔적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때 그의 분석에 전범이 되고 있는 것은 반혁명의 유령을 역설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공화력 제 2월 18일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이 보나파르트와 보들레르의 모습에서 후에 파쇼적 테러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는 히틀러와 그에 따라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벤야민 자신의 모습이 선취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알레고리적 직관방식은 가치의 무효선언이 일반규범이 되어버린 사물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덮어 버리듯이, 알레고리에서 기호적 성격은 사물의 본성을 덮어 버린다. 따라서 알레고리적 형상화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연관망에서 떨어져 나온 사물의 물신적 성격을 형식적으로 모방하는 알레고리적 의도가(I.3, 1074) 지니게 되는 이중적 특성이다. 한편으로 알레고리는 가상적 착각의 성격을 지닌 이미지로서 판타스마고리아로 작동하며, 다른 한편으로 알레고리는 바로 그 물화 속에서의 유물론적 비판을 위한 단초로 기능한다. 언제나 새로운 유행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언제나 동일한, 열악한 사회형태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인 전시 상품의 기만적인 변용을 파괴하고 그것을 다시 몽타주 형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알레고리는 생산수단의 끝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늘 동일한 생산관계를 유지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구조를 해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루이 보나파르트와 히틀러, 그리고 보들레르와 벤야민 사이의 평행선은 여기서 다시 한번 더 분명해진다. 1848-1851년의 역사적 시간과 1918 -1933년의 역사적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제반조건이 근본적으로 동일하게 남아있다면, 다시 말해 사회조직이 여전히 동일한 상품교환에 기반하고 있다면 혁명적 폭발에 대한 희망은 반동적 역사진행의 사기 극에 늘 걸려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시의 현재적 중요성을 강조할 때 벤야민이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사적 구조의 동질성이었다. “보들레르가 개인으로서 최초로 겪은 역사적 경험들은 - 그가 마르크스의 세대에 속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후 좀 더 일반적으로 그리고 좀 더 영향력 있게 되었다. [...] 보들레르 시의 그 어떤 것도 아직 낡지 않았다”(V.1, 425). 일단 상품생산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역사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벤야민의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은 항상 동일한 세계상태의 영원한 회귀라는 니체와 블랑키의 세계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2) 보들레르와 대도시 파리의 판타스마고리아
이제 보들레르의 시를 침윤시키고 있는 판타스마고리아적 요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비참함과 알코올이 맺는 협약’이라는 은유로 표현될 수 있는 당시의 반동적 파리의 사회적, 정치적 풍경은 보들레르의 「넝마주의 술」에서 잘 드러난다. 넝마주의와 술이라는 이중의 중요한 사회적 기표를 담고 있는 이 시에서 보들레르는 당시 도시 주민의 위험한 계급 중 하나인 넝마주이를 서정시의 주요 테마로 선택해 계급의식과 연결시켜 묘사함으로써 라마르띤느나 생트 뵈브의 한계를 벗어난다.
머리 주억거리며, 비틀비틀, 시인처럼
담벼락에 부딪치며 오는 넝마주의가 보인다,
제 신하 놈일 뿐인 밀정 따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온갖 포부를 영광스런 계획으로 털어놓는다.
선서를 하고, 숭고한 법률을 공포하고,
악인들을 타도하고, 희생자를 들어 일으키고
휘장 두른 용상인 듯 하늘 아래서
제 자신의 찬란한 덕행에 도취한다.
거리에서 행해지는 가내노동을 상징했던 넝마주이는 인간의 비참함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지점을 가리키면서, 비록 보헤미안의 일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보헤미안들이 ‘다소간 불안정한 생존에 직면하여, 사회에 대해 다소간 은근한 반항’을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헤미안 패거리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은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 상속받지 못한 사람들의 조상, 즉 보들레르의 말을 빌자면 ‘카인의 후예들’이었으니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독특한 상품소유자의 종족, 즉 자신들의 노동력밖에는 다른 상품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의 종족’이라고 일컬은 사람들이다(I.2, 523). 현대시인으로서 보들레르 역시 자신을 카인의 후예로, 넝마주의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넝마주의의 실존적 위치에서 만보객의 걸음걸이로 시장에 나선다. 대로에서 나태의 시간을 보내며 그것을 노동시간의 일부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 “그는 마치 모든 상품의 가치가 그 생산의 사회적 필수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마르크스에게서 배운 것처럼 처신”(I.2, 530)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대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대중의 무리가 거리를 채우기 시작할 때 그러한 현상은 대도시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뿐 아니라 시인이나 유물론적 역사가에게도 집중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벤야민은 개인이 대중 속에서 겪게 되는 충격을 한편으로는 감각 인지적 구조의 변화 및 경험의 문제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 및 혁명의 문제에서 분석하면서 당시의 모든 문화적 형식 속에 침윤되어 있는 판타스마고리아적 요소를 가시화 시킨다.
보들레르에게 도대체 대도시 경험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러한 경험의 시적 언어화는 알레고리적 재현과 상징적 재현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보들레르의 시를 알레고리적으로 독해한다는 것이 유물론적, 비판적 역사관을 기초로 한 벤야민의 근대 해석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도시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경험이 경험의 상품화를 포함하고, 새로운 것의 가상에 은폐되어 있는 폐허 및 죽음의 경험이 경험의 폐허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대도시 및 대도시를 채우는 대중에 대한 보들레르의 양가적 태도, 즉 소외와 매혹은 도시의 이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독법의 과제는 대도시를 채우는 ‘꿈꾸는 집단’, 새로 등장한 이 대중을 깨워 이들이 자신의 소망과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즉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의 구조는 대도시의 각 요소들이 판타스마고리아적 성격을 띠게 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940년대에 출간되기 시작한 생리학 Physiologie은 거리를 물결처럼 휩쓰는 군중이 환기시키는 낯섦과 위협을 무마시키고 사람들에게 상호 우호적이며 호감 가는 이미지를 선사함으로써 파리 생활의 판타스마고리에 기여를 하는 반면,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탐정소설은 동질적인 군중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를 위험의 공간으로 만들고 추적자와 추적의 장소를 변용 시킴으로써 역시 파리 생활의 판타스마고리아의 유행에 기여한다. 반사회분자가 추적자를 피해 자신을 숨기는 은신처로 대중을 묘사하는 탐정소설에서 개인(탐정, 추적자)은 영웅으로 숭앙 받는 동시에 부정된다. 결국 그 역시 군중의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리학이나 탐정소설에서 중요한 두 요소는 위협적인 면모를 띄고 거리를 휩쓰는 대중의 물결과 거리에서 이러한 대중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관찰자이다. “관찰자는 어디서나 암행을 즐기는 왕자”라고 보들레르가 언급한바 있듯이 “모든 사람이 일정 부분 음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공포의 시대에”(I.2, 542f) 각 개인은 탐정노릇에도 이끌릴 수 있으며, 이러한 유혹에 직업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 만보객이다.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인물유형인 만보객의 특징은 그가 아직 대도시와 부르주아 계급의 문지방에 서 있으나 그 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군중 속에서 오히려 피난처를 찾는 그에게 군중은 일종의 베일이며, 이 베일을 통해 낯익은 도시가 판타스마고리아로서 그에게 손짓을 한다. 아직 후원 층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미 시장경제에 편입되기 시작하던 이 과도기에 지식인층은 자유로이 방랑하는 사람들, 즉 경제적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만큼 정치적 기능도 결정되지 않은 사람들로 나타난다. 즉 보헤미안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 완전히 군중 속에 사라지기를 원하면서도 그에 강렬히 저항했던, 다시 말해 군중의 매혹과 도취에 빨려드는 동시에 군중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을 간직하고 있던 이들은 ‘대도시 군중 속에서 개인의 흔적이 소멸되는’(I.2, 546) 문제를 민감하게 포착해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보들레르의 시 「지나가는 여인에게 A une passante」는 이러한 개인의 흔적의 소멸이 어떻게 사랑 자체에 상처를 입히는가를 다루고 있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喪服),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 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장식 치마 자락을 살풋 들어 흔들며,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얼빠진 사람처럼 경련하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얼음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 줄기 번갯불...그리고는 어둠! -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려는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끝내>!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을 매혹시킨 아름다운 여인의 출현이 군중에 의해서만 그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라고 벤야민은 강조한다. 군중의 기능을 에로틱한 시인의 생활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이 시에서 사랑은 “어떤 한 모습에 의해 존재의 모든 구석을 점령당한 자의 감동”이 아니라, 차라리 “위압적인 욕망에 의해 일거에 강타 당한 고독한 자의 충격”으로 나타난다.(I.2, 548) 그리고 이러한 대도시 사랑의 방식이야말로 만보객이 수많은 유혹의 미로를 품고 있는 대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물신적 상품들과 독특한 역사적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벤야민은 대도시 군중의 베일이 불러일으키는 도취를 고객의 물결에 부딪치는 상품의 도취로 설명하면서, 상품을 감싸고도는 일종의 ‘아우라’에 대해 말한다. 현대 대도시 경험의 감각 인지적 구조와 예술작품의 생산 및 수용을 이야기할 때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사실은 자극이 강렬해지고 그에 대한 방어기제가 발달할수록 지속적인 경험 Erfahrung은 불가능해지며, 기술을 통한 복제가 예술작품의 원본성, 독창성 등을 더 이상 핵심적인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게 만들수록 심미적 대상의 아우라는 상실된다는 것이다. 전통 및 역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아우라는 그 미적 대상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지른 사람들의 감동이 모여 이루어낸 것이기도 하다. 이제 경험의 빈곤과 아우라의 상실이 현대인의 심리적, 심미적 인지구조를 각인 짓는 시점에서 구매인들의 욕망의 시선에 둘러싸인 상품들은 일종의 유사 아우라를 획득하기 시작하며, 이것이야말로 보들레르가 언급하고 있는 대도시의 “종교적 도취” 혹은 “영혼의 성스런 매음”을 가능케 하는 자유시장의 비밀이다(I.2, 557-559).
그러나 대도시 군중의 이러한 도취적 면모는 ‘인간의 본성에 거슬리는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그 이면에 품고 있다. 서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듯이 서로 떠밀고 부딪치며 몰려가는 이들의 “무관심, 자신의 개인적 이해 속으로만 치닫는 개개인들의 이 매정한 고립은 이 협소한 공간에 갇힌 개인들의 수효가 많아질수록 더욱 혐오스럽고 불쾌하다” 이러한 정치적, 역사철학적 의미에서 벤야민은 군중을 일종의 ‘기형’, 일종의 ‘사생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집합에 참여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국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의 특수한 이해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공유하는 원인은 사물을 둘러싼 구매자의 욕망일 뿐이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들의 경우에서처럼 국가가 이들을 대대적으로 집합시키는 것을 자신의 항구적이며 필연적인 조건으로 삼을 때, 이들의 사생아적 성격은 분명해진다”(I.2, 565). 자신의 고립되고 소외된 생존양식이 생산제도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몰락하지 않은 만보객은 여전히 ‘감정이입’을 통해, 스스로 상품이 되어, 상품물신의 도취에 빠져들었지만, 그러한 동일화를 통해 바로 거기에 사회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이 예시되어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느끼게 된 인간이 맛보게 되는 도취로서 만보객이 느끼는 안락감은 후에 프롤레타리아가 되어버린 대중의 실존양태를 미리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보들레르가 군중에게서 거대한 자연경관과 함께 세계의 깊이를, 다시 말해 민중의 놀라운 생명을 본 위고식 군중 경험에서 거리를 취하고 ‘만보하는 상품으로서의 자의식’을 움켜쥔 채 개인과 군중을 갈라놓은 문턱의 수호자로 남은 까닭이다.
3. ‘심연에서 떠오르는’ 시어들
위에서 설명했듯이 벤야민의 보들레르 분석은 대도시에서의 삶을 특징짓는 경험의 빈곤 및 아우라의 상실에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보들레르의 시에서 특히 묘하게 아름다운 부분은 시가 처음 시작되는 부분인데, 그것은 그 시들이 ‘심연에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현대시인의 한 전형으로 호명하고 있는 보들레르의 시는 궁극적으로 문화적 재현 또는 창조의 근원과 원인에 대한 질문이 현대시에 이르러, 다양한 형태의 ‘전환’ 또는 ‘뒤집기’를 경유하여, 철저하게 탈아우라적으로 된 인간 실존의 심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 어떤 경험도 불가능해진 시대, 즉 인간과 사물대상이 자연스런 교감의 관련망에서 떨어져 나와 철저한 고립과 소외 속에서 우연적인 의미화의 지시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 시대에 요청되는 미학적 태도이다. ‘서정시가 어려워진 시대’에 보들레르가 선택한 ‘새로운 미학적 태도’는 상징적 가상의 미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체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며, 이로써 시의 생성지가 다름 아닌 인간의 ‘실존적 심연’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의 생성지를 인간의 ‘실존적 심연’에서 찾으려고 하는 벤야민의 문학 비평적 태도는 이미 그의 초기 에세이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벤야민은 ?도이치 비극의 원천?에서 예술 및 시학의 ‘존재근거’와 ‘심연’ 간의 횡단교차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니체 식의 ‘예술지상주의’가 표방하는 심연에 대항하여 다름 아닌 인간의 실존을 예술의 근거로 내세운다(I.1, 281). 즉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인간 실존 자체를 예술의 투사물로 파악한다고 본 벤야민은 그리이스 비극을 가능케 한 험난한 역사적 사실들을 강조하면서 예술을 탄생시키는 추동력은 바로 인간 실존임을 역설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실존을 한편으로는 영원히, 다시 말해 끝없이 ‘미리 던져져 있는 존재’(I.1, 282)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탐구의 대상으로 명명함으로써 관념론적 주장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가는 ‘측량할 수 없는 심연(즉, 선험적 근거 없음)’의 가능성과 함께, 예술작품의 창조자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도약이, 혹은 분열이 일어난 장소로 확인된다. 예술의 근거가 되는 이 실존은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근본적인 근거도 아니고, 인식론적으로 자명한 현존도 아니며 영원히 지체된 ‘이전’의 심연일 뿐이다. 이 ‘이전’, ‘이미 던져져 있음’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언어, 그것이 바로 보들레르가 실현하고 있는 현대시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비평가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벤야민에게 있어 이러한 심연은 물론 근대를 특징짓는 역사적, 사회사적, 문화사적 심연이다.
벤야민은 호르크하이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인으로서의 보들레르가 갖는 역사철학적 의미를 “최초로 그리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생산력을 이중적 의미에서, 다시 말해 인지해 내고 그것을 물화 과정을 통해 상승시켰다는 의미에서 포착해 낸”(I.3, 1074) 것에서 찾는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20세기 근대를 진단하기 위해 그 전 세기에 살았던 보를레르의 시를 읽는 벤야민에게 보들레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내건 소송의 증인”(V.1, 459)이다. 물론 이 증인은 소송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파악하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기존 체제에 기생하면서 그에 저항하는 시를 썼던 오염된 증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오염된 위치에서 상징적 교감과 알레고리적 우울의 교착이라는 보들레르 시의 이중적 구조가 발생하는 것이다.
Ⅲ. 나가는 말
“혁명은 세계사를 이끄는 기관차이다”라고 마르크스는 아직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거의 모든 지적 교류에서 고립된 채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긴 투쟁의 역사가 급격한 파국의 내리막길을 치닫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 지식인 벤야민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사태는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혁명은 이 기관차를 타고 가는 인류가 위험의 순간 잡아 다니는 급브레이크일지 모른다”(I, 1232). 벤야민이 이 급격한 파국의 순간에 다름 아닌 19세기 파리를 ‘현대성의 수도’라는 맥락 속에서 역사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구원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파리가 간직하고 있는 혁명의 기억 때문이었다. 보들레르가 만보객으로서 검투사처럼 시어를 포획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을 때 그것의 의미를 여전히 가능케 했던 것은 파리의 거리에 아직까지는 채집할 수 있는 기억의 흔적이, 즉 유토피아의 집단적 소망이 완성되었던 행복한 혁명의 순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대도시 풍경은 어떠한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시간과 공간의 압축으로 이해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그러한 기억의 흔적을 채집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권태의 객관적 이유가 역사 행보의 뒤쳐짐에, 그 집단적 수면에 있다면 20세기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애쓰고 있는 21세기의 깨어남을 돕기 위해 문학은 아니 서정시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은,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그러했듯이, 서정시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저 심연을 악착같이 응시하고 또 응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꿈과 깨어남’의 정신분석적 역학을 역사철학적으로 전유하는 그러한 질문이 여전히 변증법적 문화사의 실천적 덕목으로 유효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 또한 너무나 불충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붙잡을 수밖에 없는 한 방법이 아닐까.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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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Benjamins Baudelaire-Lektüre
‘Blumen des Bösen’, aufgetaucht aus dem Abgrund der Moderne
Kim, Young-Ok(Ewha Frauen-Uni)
Walter Benjamin(1892-1940) hat in den 30er Jahren des 20. Jahrhundert ein umfangreiches Buch zu schreiben geplant: ?Charles Baudelaire - ein Lyriker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 Er wollte am Beispiel der Poesie von Charles Baudelaire(1821-1867) gerade die politisch-ökonomischen wie die kulturellen Konstellationen seiner Zeit herauslesen, in der der Kapitalismus als einzige Religion den Thron bestigen hatte, nachdem er alles Heilige bezwungen hatte.
Worauf Benjamin in seiner Studie zu Baudelaire zielt, ist eine erkenntnistheoretisch fundierte Ästhetik der Moderne, die auf dem Abgrund der menschlichen Existenz aufgebaut wird. Mit solcher Ästhetik der Moderne wollte Benjamin die ästhetische Haltung der Romantik, die die Kunst in die Kategorie der Religion überführt, wie des Klassizismus, der im Künstler selbst den ursprünglichen Grund des Kunstwerkes, nämlich den Schöpfer Gott sieht, und den Ästhetizismus von Nitzscheanischer Provenienz sowie die Widerspiegelungstheorie von dem Vulgärmarxismus revidieren bzw. überwinden.
Diese ästhetische Haltung ist in einem Zeitalter notwentig, in dem jedwede Erfahrung unmöglich geworden ist, d.h. in dem Mensch und Gegenstand, herausgerissen aus dem Zusammenhang ihrer natürlichen Korrespondenz, der willkürlichen Sinngebung ausgeliefert sind. Die neue ästhetische Haltung, für die Baudelaire sich in diesem Zeitalter, in dem ‘die Bedingungen für die Aufnahme lyrischer Dichtungen ungünstiger geworden sind’, entschieden hat, ist die allegorische, die den symbolischen Schein der Schönheit dekonstruiert und so die mythische Geographie der Groβstadt Paris ins geschichtsphilosophische Kraftfeld transformiert. Die vorliegende Arbeit hebt vor allem die Merkmale der Moderne-Kritik Benjamins hervor, die er an Hand der Baudelaireschen Poetik zu machen versucht. Der Zusammenhang zwischen Warenfetischismus, Begriff der Allegorie, und der Moderne - dies stellt das Hauptinteresse von Benjamins Baudelaire Studie dar.
주제어: 알레고리, 상품물신, 판타스마고리아, 아우라
Schlüsselbegriffe: Allegorie, Warenfetischismus, Phantasmagorie, Aura
e-mail: daimon32@hanmail.net
투고일: 2004.03.30 / 심사일: 2004.04.20 / 심사완료일: 2004.05.10
출전: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22호 (2004년 5월)학회URL: http://buechner.germ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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