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서울예술종합대 문창과 교수인 김태용 선생의 시인 변신의 궤적~~~~~~~~~~~~~~~~
자끄 드뉘망, 김태용역, <뿔바지>, 울리포프레스, 2012
<뿔바지>의 작가로 알려진,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자끄드뉘망은 아마도, 어쩌면, 소설가 김태용의 도플갱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유령처럼, 늘 우리를 따라다니며 뒤돌아보면 어느새 사라지는 우리 자신의 저 깊은 곳, 닿을래야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뿔바지>를 읽다보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것은 차갑고 단단하지/ 납처럼 달고,/ 구름처럼 깊지/오후 속으로 사라지는 얼룩말의 빛깔/ 아, 라고 말하면/ 오, 라고 들리지/ 아니 그건 모두가 아는 진실과 무관한/여름 청어의 맛/ 돋아나고 물서는/ 다리를 쎌수 없는 건반/그것은 축축하고 흘러내리지/보리처럼 흔들리고/ 보리처럼 보리처럼 -<얼굴> 전문
남들이 아는 나, 내가 아는 나, 그 간극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 또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라진 카페 드 마리에 앉아 우리의 단편, 너의 단편, 세계의 단편을 보고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사랑하고 싶다"('보리스를 위한 세미나' 중)고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남은 것' 중) 살아 있지만 죽은 자인지도 모른다. 아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자 인지도 모른다.
잔느 드뉘망은 창문을 열어놓고 눈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눈이 많이 왔지. 기억 속에서 눈사람이 녹아내리고 있어. 나는 얼어붙은 눈사람, 눈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빛일지도 몰라. 잔느는 중얼거린다. 겨울 식탁에 놓인 겨울 냄비 안에서 겨울 치즈가 녹아내리고 있다. 얼어붙은 것과 녹아내리는 것. 한번 더 말해도 좋은 문장이다. 얼어붙는 것과 녹아내리는 것. 어떤 시간은 얼어붙고 어떤 시간은 녹아내린다. 잔느는 생각한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얼어붙는 동시에 녹아내리는 시간만 가능할 뿐이야. 이 문장의 비등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왜 모든 독백은 가정법이어야 할까(바크 요온티에. '여름 눈사람'중)
기다림에서, 사물로, 사물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독백으로 결국, 잔느든 자끄든 그들이 돌아간 곳은 언어라는 집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자끄 드뉘망은 죽었다를 알리고 싶은)를 말할 수 있는(없는) 곳이 언어였듯이. 그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 것이 언어였듯이, 그들은 언어에 빚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의 마지막 시에 밑줄을 긋는다. /행간을 읽지 마라 /아무 것도 없다 /행간 없음 시 따위/ 따귀 없음 시도 없음"('가짜 드뉘망'중), "나, 자끄 드뉘망은 나에게 포기를 강요하는 모든 것에 포기를 선언한다. 동지여!"('허깨비불' 중)소통을 원하면서 동시에 소통을 거부하는 몽홀의 자아. 파편의 자유만이 자유이듯이.
드뉘망의 죽음
내가 죽고
친구들은 말했지
그는 손에 쥔 에이스를 본 사람
술의 대가들이 전선 아래를 걷고
머릿속에서 사과가 익어가는 사람
구두 굽을 갈지 못한 것이 후회다
밤의 자서전을 펼치다
중국이란 나라에서는 상형문자를 쓴다지
카페 드 마리에서 술을 시켜놓고 자네를 기다렸어
나보다 먼저 죽은 미쉘 뽈라롱은 말했지
성냥개비를 물고 돌아서 웃었지
마지막 웃음이란 영화도 생각나
너의 식탁을 빌려야 했지만
속옷 차림으로 시를 쓴 뒤에는
거울에 비춰 보이며 퇴고를 했지
그런 사람
나 드뉘망
자끄라고 불린
JD라고 표기된
친구들은 말했지
내가 죽었다고
어쩌면 이 책은 쓸모없을지도 모르고, 한 번 쓱 읽힌 뒤 영원히 책장에 꽂힐 운명에 놓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바지 뒷주머니에 항상 들어있다가 방석으로 사용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 책을 들고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구글 지도로 찾아볼 수 없는 장소에서, 지상의 시계가 가리키지 못하는 어떤 시간에, 마주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책들이 그러하듯이. 어떤가요.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 2007),《포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12),《숨김없이 남김없이》(자음과모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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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출간한 '울리포프레스'는 일인 출판사로 소설가 한유주 씨의 야심찬 기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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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뿔바지' 미스터리 시인, 자크 드뉘망은 누구?
젊은 文人들의 '유쾌한 농담' 프로젝트… 이름 아닌 詩로만 봐달라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입력 2012.08.22 03:16 수정 2012.08.22 10:34
↑ [조선일보]자크 드뉘망이라는 정체불명 시인의 책을 번역·출간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뒤표지 글을 맡은 시인 강정, 교열을 맡은 시인 유희경, 이 책으로 출판사 등록을 한 소설가 한유주, 번역자라고 주장한 소설가 김태용, 마지막으로 해설을 맡은 시인 이준규.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번역·출간의 소회를 밝혀달라는 CEO의 주문에 김태용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침묵이다. 키득거리는 청중의 웃음이 이어진다. 대신 그가 시집 속의 시 '얼굴'을 낭송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차갑고 단단하지/ 납처럼 달고/ 구름처럼 깊지/ 오후 속으로 사라지는 얼룩말의 빛깔/ 아, 라고 말하면/ 오, 라고 들리지/ 아니 그건 모두가 아는 진실과 무관한/ 여름 청어의 맛/ 돋아나고 물러서는/ 다리를 셀 수 없는 건반/ 그것은 축축하고 흘러내리지/ 보리처럼 흔들리고/ 보리처럼 보리처럼'('얼굴' 전문)
◇자크 드뉘망이라는 정체불명 시인
자, 이쯤 해서 진실을 밝힐 차례. 시집 '뿔바지'는 한국 문학의 엄숙주의에 대한 유쾌한 농담 혹은 젊은 시인·작가들의 미학적 도발이다. 소설가가 차린 1인 출판사, 자크 드뉘망이라는 정체불명 시인, 여기에 한국 문학의 젊은 재능들이 팀으로 뭉쳤다. 표지 그림은 시인 박상순, 편집은 시인 최하연, 교열·교정에 시인 유희경, 해설은 시인 이준규, 저자와의 대담은 시인 윤경희, 표지 날개 글에는 시인 박정대, 뒤표지 글은 시인 강정…. 그런데 시집 속에서 이들은 모두 실명을 감췄다.
강정은 자신을 '로마의 떠돌이 탐정 파올로 그로쏘', 박정대는 장드파, 김태용은 바크 요온티에, 박상순은 마리나 막시모바로 '위장'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강정은 자신의 이름이 이탈리아 축구선수 파올로 말디니와 파비오 그로쏘의 조합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문학의 지역성을 돌파하기 위한 유희적 시도이자, 편견과 경계 없이 순수하게 텍스트로만 소통하고 싶다는 젊은 문인들의 발랄한 도전인 것.
◇동어반복의 울타리를 돌파하라
그렇다면 이 유쾌한 농담의 핵심인 자크 드뉘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시집엔 자크 드뉘망의 생몰연대는 물론 아무런 정보가 없다. 원문도 없다. 세계 문학사에 전무후무하게 원본 없이 번역본이 먼저 출판되는 희한한 사례이자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시인은? 번역자 김태용은 끝까지 "실존 인물"이라며 저항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선후배 문인들은 이미 '실패한 농담'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역자의 간절한 부탁을 고려하여 힌트만 제시하자면 이렇다.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소설가 보리스 비앙(Vian· 1920~1959)은 대표작 '세월의 거품'(1946)으로 세계문학의 고전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작가. 그는 이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몇달 뒤 또 한 번 '문학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스릴러 소설을 버넌 설리반(Sullivan)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후 자신이 번역자라고 주장한 것. 이 소설은 1947년 내내 프랑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뿔바지'에는 49편의 시가 실려 있다. '뿔바지'의 의미는 말 그대로 뿔 모양의 바지일 수도 있고, 몽상의 바지이자 꿈 자루일 수도 있다. 때로는 난해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시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주머니이자 독자들도 새로운 해석을 끄집어내기를 기대하는 마법의 주머니. 이 해괴한 시집이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같은 문학적 센세이션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은, 오랫동안 동어반복의 늪을 부유하고 있는 한국문학의 비좁은 울타리를 돌파하려는 경쾌한 시도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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