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희종 미카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니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이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지나간 청춘에 보내는 송가 1
- 송경동
스무살 때 광부가 되고 싶어
을지로5가 인력소개소를 찾았다
아무것도 없는 청춘이었다
가방에는 낡은 옷 몇벌이 전부
갈 곳 없는 나를 땅속에 묻고
이번 생은 베렸다고
이 생을 빨리 지나쳐버리고 싶었다
소개로 3만원을 내고 나니
2만원이 남았다
근처 여인숙 방에 낯선 이 여섯명이 들어갔다
내일 새벽이면 봉고차가 온다는데
2만원을 꼭 손에 쥐고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새우다 희뿌염한 새벽
슬며시 길을 나섰다
인쇄골목 24시간 구멍가게에서 선 채로
막 삶아낸 달걀 세개에 소주 한병을
콜콜콜 따라 마셨다
그 달걀맛이 아직도 짭짤하게 입안을 돈다
너무 쉽게 살아도 안되지만
너무 어렵게 살아도 안된다
.................
혜화경찰서에서
- 송경동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나는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 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색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기록으로
내 머리를 재단해 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 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나의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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