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권혁웅, 지금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

나뭇잎숨결 2011. 3. 3. 07:33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 이였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였다






                                                                                            사진 <정성필>시인



지문 / 권혁웅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왕십리 / 권혁웅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과금별납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외도가 지나쳤다,라고 목월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발병이 날지도 모르지만










서울시 신림동 산77 성 김복례의 하루 / 권혁웅



1

부엌 지붕 새로 스며든 빗물이 판자를 휘어놓았다 식기들이 비스듬히 걸터앉아 아침햇살에 이 빠진 웃음을 웃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구를 계산하는 그릇들도 이 집 식솔들이다



2

지나는 곳마다 고개턱이어서 길들도 한숨을 부려놓는 곳 그 길을 091021-2023527 김복례 할머니가 오른다 마을의 수도꼭지들이 할머니를 따라 쇳물을 쿨럭거린다 소리의 음계를 밟으며 할머니 길을 오르신다



3

이곳에 시멘트 숲이 얼기설기 솟았을 때 김복례 할머니가 왔다 고려 때도 고려장은 없었다는데 자식들은 끈 떨어진 구슬처럼 흩어졌다 아니 구슬이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저녁마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대고 걸레 잡은 손을 휘휘 젓는다 아무도 못 보게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4

산 아래는 지금 영구 임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포크레인은 술 취한 애비를 닮았다 마구 가산을 부수어 놓는다 레미콘이 임신한 여인네처럼 뒤뚱거리며 뒤를 따라온다 흙발로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뛰어 다니는 트럭들....시끄러운 이웃이다



5

바람만 따라오던 넌출 가로등 돌아가고 건너편 산등성이 불빛들도 까무룩 조는 초여름 저녁, 김복례 할머니 형광등 값을 아끼려 일찍 자리에 든다 벌써 눕느냐고 칭얼대며 은초롱꽃들이 등을 켜들고 슬레이트 처마 아래를 들여다본다



6

야채나 생선차도 이곳엔 들르지 않는다 해서 이곳엔 기다림이 없다 그저 마른 방구들 풀썩이며 노는 먼지들뿐이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에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빛의 고딕 성당 서울시 신림동 산 77번지, 거기 김복례 할머니가 산다

 

소문들-짐승 /권혁웅

 

 

 

 

   1

   창피猖披란 짐승이 있어, 무안無顔과 적면赤面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산다 야행성이라 잘 눈에 띄지 않지만 간혹 인가에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진다 팔다리가 가늘고 귀가 뒤로 말려서 비루먹은 곰처럼 생겼다 산정을 좋아해서 오르다가도 꼬리가 무거워 늘 골짝으로 떨어진다 이 짐승의 가죽을 얻으면 얼간망둥이를 면할 수 있다

 

 

   2

   낭패狼狽는 이리의 일종이다 낭은 뒷다리가 짧고 패는 앞다리가 없어서, 길을 가려면 반드시 두 마리가 짝을 이뤄야 한다 전하여 서로의 배필을 찾지 못했을 때를 낭패라 하고, 동성의 짝을 만나 겹으로 쓸모를 잃었을 때를 낭낭패패라 한다 이 짐승을 달여 먹으면 어지자지가 떨어져 한 몸이 둘이 된다

 

 

   3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 있으니 이를 무족마無足馬라 한다 인적 끊긴 지 오래인 인가의 굴뚝을 끌어안고 살다가, 성체가 되면 인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긴 혀로 수염에 붙은 침이나 귓속의 귀지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에 천 냥이나 하는 귀한 짐승이어서 특별히 이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를 말전주꾼이라 부른다

 

 

   4

   암상이라고도 부르는 질투嫉妬는 암컷이고, 수컷은 시기猜忌라고 부른다 떼를 지어 다니며 사람을 잡아가서는 벼랑 위에서 밀거나 동굴에 가둔다 육질을 연하게 하거나 소금물에 재워두기 위해서다 송곳니와 어금니가 두루 나 있어서 고기를 자르거나 으깰 수 있다 구들직장이 아니고서는 이 짐승의 눈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5

   외설猥褻은 사면발이의 한 종류다 눈이 작고 앞니가 돌출해 있어서 서생鼠生을 닮았으나 그보다 작고 바글바글하다 어느 구멍이든 파고들기를 좋아해서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색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나를 잡으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죽이면 넷이 나타나, 마침내 온 집을 가득 채운다 더러우니 먹어선 안 된다

 

 

   6

   개차반 있는 곳에 파리가 있으나 개 중에는 군집을 싫어하는 놈들이 있어서, 이를 청승靑蠅이라 한다 볕 잘 드는 곳에서 눅눅한 날개 말리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다 간혹 날개가 바싹 말라서 굶어죽기도 한다 몸 전체가 푸른빛이어서 청백리들이 좋아한다 처마 밑에서 겨울을 나지만 뇟보나 계명워리가 드는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문예연구》 2010년 봄호

 

 

<1>-군입/권혁웅-

 

 

 

입안에 사막을 들였다는 것은

조바심이 당신을 바짝 구웠다는 증거,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혀끝에서부터 고사목들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어떤 침도 눈물도

그 사람을 넘을 수 없다는 뜻,

당신이 마주한 그 사람이

이곳까지 비그늘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당신이 당신 안에서 노숙하는 기분이 든다면

저 타는 애를 햇빛에 널어보라

기왕에 끓을 거라면

내면에서 막 떠낸 두부라도 먹기 좋게

입안에 썰어 넣으면 좋지

 

 

 

<2>-소문들-유파(流派)/권혁웅-

 

 

 

 

   소림, 무당, 화산, 아미, 곤륜, 개방…… 따위는 물 건너온 허깨비 유파라, 그 세력이 다한 지 이미 오래다 작금에 이르러 중원에 위명을 날리는 것은 새로운 9파 1방이니, 마땅히 시사 상식에 기록해둘 일이다

 

 

   1. 공중(恐衆)

 

 

   최대 유파는 공중인데, 혹자는 이를 공인중개사의 약자라고도 한다 중원의 모든 현과 읍에 지부를 두었으며 집을 매매하는 자에게 구전을 뜯어 규모를 키웠다 기밀문서를 다루는 이런 곳을 일러 복덕방이라고도 하는데, 무예를 연마하는 기원, 심신을 수양하는 근린공원, 생활 터전인 노인정과 함께 공중의 4대 거점이다 최근 정리해고와 의술의 발달로 그 수가 더욱 늘어, 미래의 중원은 공중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참요까지 생겼다

 

 

   2. 초징(楚澄)

 

 

   초나라에서 유래한 청류파로 이름난 문사들이 많이 낫으나 최근에는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교언영색을 일삼아 위명을 제법 잃었다 문필을 업으로 삼아 향교와 서당을 장악했는데 이런 배움터를 초등학교라 한다 학문에 뜻을 둔 자는 이들에게서 배움을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들에게 찍혀 뜻을 꺾은 문사가 부지기수다 악플[惡筆]이라 부르는 암기를 쓰는데, 이를 맞으면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칠공에서 피를 쏟는다고 알려져 있다

 

 

   3. 기독(氣毒)

 

 

   무당파의 후예이며 십일조라는 조직 체계를 내세워 크게 흥성했다 열 명이 한 조를 이루는데 각 조의 우두머리를 십부장, 십부장 열의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여 천부장, 만부장에 이른다 십만부장 이상이 되면 대목이라 하여 그 직위를 세습할 수 있다 신구약진경이란 비급을 귀히 여기나 꼭 거기에 얽매여 살지는 않는다 축도신공, 무소부재검, 전지전능권, 출입매시축복수, 불신지옥인, 박멸발갱이진 등의 절세무공을 쓴다

 

 

   4. 덕후(德侯)

 

 

   장강 이남에 자리를 잡아 오(吳)나라와 덕후[타쿠]라 불리지만 실은 은둔자 무리[히키]와 함께 열도에서 건너온 왜인들이다 둘을 묶어 폐인이라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으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고 칭송하는 이도 있다 비전절기를 전수받은 소규모 구성원들이 은밀히 모임을 갖기 때문에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기문둔갑술, 변신술, 소환술에 능해 남자가 여자로, 노인이 학생으로, 사람이 로봇으로 변신한다

 

 

   5. 파파(婆跛)

 

 

   평소에 노파나 절뚝발이로 위장한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철저히 이익만을 좇는 전문 살수 집단으로 만금을 주면 임금도 암살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펼치는 천라지망을 파파라(婆跛羅)라 하고 파파라에 걸려든 경우를 일러 파파라치(婆跛羅致)라 한다 한번 파파의 표적이 되면 집에서도 길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청운답보라 불리는 경공의 대가들이어서 어디든 잠입과 매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6. 중마(狆魔)

 

 

   중원 제일의 미녀 집단이 미수(美嫂)인데, 이들이 혼인을 통해서 미색을 잃고 삼 자의 내공을 얻으면 미세수(美世嫂)가 되고, 육 갑자를 얻으면 중마가 된다 중마가 되기 위해서는 달리는 버스 통로에서 막춤이라 불리는 고난도의 무예를 시전해야 한다 십 갑자에 이른 으뜸 중마를 아중마(雅狆魔)라 하며 중원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 이들의 비밀결사 모임이 계다 계에서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이 돼지를 계돈이라 한다

 

 

   7. 용역(龍屴)

 

 

   용산에서 발흥했으며 우면산의 검경(劍京), 발치산의 공산(恐汕)과 함께 3대 조폭이었으나 동이와 오환의 대살육 때에—이를 육이오(戮夷烏)라 부른다—검경과 연합, 공산을 궤멸하여 장안을 장악했다 정직한 자를 잡아가고 가난한 자를 태워 죽이며 속이는 자에게 쌀을 주고 부유한 자의 곳간을 지켜, 그 악명이 자자하다 최루탄지공, 개발이익조, 아수라권, 물대포신장, 소요진압진 등의 연합 무공을 쓴다

 

 

   8. 성어(聲漁)

 

 

   뭇사람들을 강시로 만드는 공전절후한 무공을 소유한 유파다 이들은 사람들의 이배혈에 1촌이 채 못 되는 얇은 침을 찔러 넣는데, 이 침을 수편(手鞭) 혹은 핸드폰이라 부른다 수편에 맞으면 이들의 전음입밀에 지배되어 꼼짝없이 놀아나게 된다 목소리 하나로 사람을 낚시질한다고 하여, 스스로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 칭한다 이들의 궁이 남해나 설산에 있어 이들을 벽안의 고수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중원인들이다

 

 

   9. 사군(思君)

 

 

   충의를 으뜸가는 덕목으로 내세우지만 고리대금이 주된 일이다 장문인이 장씨여서 세간에서는 이들을 장문세가(張門世家) 혹은 장사꾼이라 부른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에서 “달아난 고세인 처녀 잡아드립니다”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한다 우공이산이라, 멀쩡한 산을 옮기고 상전벽해라, 보기 좋은 바다를 메우는 게 이들의 일이다 임금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어 탈세와 포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10. 고세(高世)

 

 

   중원이 강역을 크게 넓히자, 살 곳을 잃은 사이(四夷)의 민초들이 낙양 주변에 몰려들어 월하촌을 이루었는데, 여기서 태어난 이들을 고세인(高世人)이라 한다 남만과 북적에서 인신매매로 잡혀온 아녀자들이 낳은 자식도 고세인이다 장강을 경계로 중원의 경제가 크게 나뉘었으니, 강남에 정규직인 장녀(漿女)가 있다면 강북에 비정규직인 고세가 있다는 속담은 이런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3>-필멸의 고릴라/권혁웅-

  

 

 

 

 

   팔작지붕 위에서 이데아를 기다렸죠 도움닫기 하는 자세로 버림을 받았죠 지붕이 날아 갈까봐 거기 앉았던 건 아니에요

   세탁기는 수평을 잡으려고 저렇게 탈탈거리나요? 허우적대는 아이처럼 수면에 한 번 올라오려고 물을 뱉나요?

 

   베란다는 뛰어내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거기에 둔 게 갑자기 남편이 들어와서만은 아니에요

    냉장고가 토라진 바위라면 거기서 달걀을 꺼낼 수는 없겠죠 가슴을 두드린다고 고릴라는 아니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고릴라가 제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죠 고릴라와 우리의 거리는 오랑우탄과 고릴라의 거리와 같다고 합니다 오랑우탄이 불멸이라면

 

   저 얼굴 까만 짐승은 더더욱 흙빛이 되어 덜덜 떨겠죠, 생명보험에 들지 않으면 자식들이 걱정이고 들어두면 아내가 무서워서,

 

   가만 보면 우두커니* 가운데는 꼭 원숭이가 있어요

 

   이마가 반질반질한 스님 한 분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르는 왁자지껄한 무리들은 모두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 우두커니란 본래 한옥지붕 위에 한 줄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조각상들을 일컫는다. 잡상이라고 하며, 앞에서부터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라 불린다.

 

 

 

<4>-가정요리대백과-밥상/권혁웅-

 

 

 

 

   1

   너는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첫째는 발끈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놈의 집구석을 그냥, 확,

 

   부드럽게 삶아서 찬물에 행구어 건진 다음 간장, 설탕, 참기름을 넣어서 조물조물 비비고 싶습니다만

 

   그건 당면 얘기고요 첫째는 제가 소금물에 데친 시금치라는 걸 압니다 둘째는 아직 뻣뻣해서 당근, 셋째는 너무 어려서 계란지단이지죠

 

   밥상은 얌전하고 일가는 단란합니다 깨소금으로 마무리되었거든요 그런데 잡채는 금방 쉬는 게 참 문제는 문제예요

 

 

 

   2

   첫째도 그렇지만 엄마는 둘째가 더 걱정입니다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거든요 이 집 가장은 혼자서만 빛이 납니다

 

   육십 촉은 되겠네요 유전 때문에 아빠는 오이처럼 민숭민숭하다가 미역처럼 풀이 죽었다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둘째와 아빠의 머리를 교대로 보면서 한여름 시원한 냉국을 들이킵니다 그놈, 아빠를 꼭 닮았어, 그러면서요

 

   둘째가 비뚤어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도 깨소금은 들어갑니다 냉국도 금방인 게 문제예요

 

 

   3

   아이더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제발 묻지 마세요

   그건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권혁웅 시인 약력>>

 

*1967년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

*비평집 『미래파』 『시론』, 산문집 『두근두근』,

*신화연구서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등.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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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어슷비슷한 시, 상투적인 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춘문예 제도에서 보듯이 공식과 전형으로 만들어진 타락한 미의 형식, 키치에 가까운 시가 판을 치고 있다. 진정한 미학에서는 중심과 주변이 뒤집혀 있다. 안팎을 뒤집은 영역이 미의 영역이다. 미학에서 주류란 대개는 전복의 대상이고 아주 잠깐 동안은 전복의 결과다. 전위란 앞서 있는 게 아니라 밀려나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의 중심이 서정시에 있다는 것은 계량적인 진실이며, 우리 시의 주변이 서정시 일색이라는 것은 균질적인 진실이다. 안팎을 뒤섞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팎이 존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미학의 비유적 실체는 소라고둥이다. 그것은 소용돌이처럼 혼란스럽지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거칠게 튀어나가서는 덧없이 사라지는 거품이 늘 더 많은 법이다.

우리는 이 거품의 족보를 알지 못한다. 시에 실험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순간, 시는 실패와 좌절을 제 안에 아로새긴다. 현대성과 감상성을 통합하려 했던 박인환이 실패했고, 지적인 조작으로 해학을 실험했던 송욱이 좌절했다. 그러나 그 원심력을 통해서만 미학은 제 영역을 넓혀나간다. 시도의 방법은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다. 없는 중심에서 배회하지 말고 있는 힘껏 박차고 나가야 한다. 가장 높은 데서 시도한 번지점프가, 가장 먼 반탄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실험만이 중심으로 돌아온다.

실험에 성공한 시들이 새로운 서정을 만든다. 멀게는 기하학과 수학으로 욕망을 설명한 이상이 그랬고, 가깝게는 중얼거림과 중언부언으로 운율을 만든 김수영과 중성적인 문체에 개인의 발언을 싣고자 했던 김춘수가 그랬다.

그것은 완성된 시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비스듬히 횡단하는 일, 거기에서 새로운 미의 곡선이 그려진다. 그 선은 늘 모자라거나 넘치지만, 그 자리가 비너스를 낳은 조개껍질이 놓인 곳이다.

누가 횡단했는가? 가령 80년대에는 허물어진 가족으로 사회를 축약한 이성복이 있었고, 허물어진 몸과 언어를 들여다본 황지우가 있었고, 의식으로 무의식의 저 아래를 탐색한 박남철이 있었고, 격렬한 발언을 하는 소심한 화자를 내세운 장석주가 있었고, 공적인 언어를 극한까지 밀고 갔던 김남주와 백무산이 있었고, 시에 악보를 그려 넣은 박태일이 있었고, 서술적 상상의 지도를 그려 보인 김혜순이 있었고, 들끓는 자의식을 가장 단순한 명제로 요약했던 최승자가 있었고, 物과 物物과 헛것을 이야기한 최승호가 있었다. 그 다음 시기에는 정교한 언어 세공사인 송재학이 있었고, 대중적 감성을 파토스로 삼은 유하가 있었고, 일상의 해부학자인 김기택이 있었고, 物主의 서정을 적어간 기형도가 있었고, 시의 에스페란토어를 썼던 장정일이 있었다.

대가들의 횡단 역시 그치지 않았다. 장려한 정신의 인공 낙원을 건축한 조정권이 있었고, 날것으로 사물을 채집한 오규원이 있었고, 극서정의 영역을 선회한 황동규가 있었고, 한국인의 족보를 작성하려했던 고은이 있었고, 아득하고 막막한 그리움 저편을 호명한 김명이 있었고, 담시와 대설의 시인 김지하가 있었고, 바다 저편에서 시의 몸을 대신 보내어 살게 한 마종기가 있었다.

실험의 결과가 괴물이라는 것은, 실험 이후에나 이전에나 우리가 그 결과물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비너스는 모두 전 시대의 추물이었다. 미적 성과에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많은 작품들은, 사실 미래로 뻗은 우리 미의 촉수와 같은 것이다. 미래의 거울로서의 작품들은, 우리의 자화상을 일그러뜨린다. 어쩌면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이 우리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파격은 정격의 반대로만, 부정어로만 정의될 수 있다. 실험을 그렇게 잘라내고 절단하는 작업이다.

최근의 예를 보자. 박상순은 남성, 여성의 말을 버리고 중성어를 시에 실험했고, 이수명은 사물에서 인간화된 의미를 도려내고 사물들끼리의 인과적 관련을 드러냈으며, 함성호는 서정의 어법을 파기하고 관습화된 전문용어들로 이루어진 서정을 구현했고, 차창룡은 이것과 저것을 이것 아님과 저젓 아님의(교차 부정의) 대상들로 드러냈고, 김참은 상상적 풍경을 서사화했고, 함기석은 기호 내용을 박탈한 기호 표현들의 놀이를 조작했다. 이들의 작품들은 당대의 미적 기준에서는 무엇인가 부족하지만, 같은 말로 무엇인가 잉여적이다. 그 부족분과 잉여분이 이 작품들의 미적 효과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불평/불편함은 각질의 표면 아래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미에 대한 기운과 통한다. 굳은살을 터뜨리고 나온 새 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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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시집 [마징가 계보학]

창작과비평 2005.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