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박경리 선생을 추억하며

나뭇잎숨결 2009. 5. 5. 00:19

 

 

 통영앞바다를 내려다 보며 미륵산 산자락에 영원한 안식를 마련하신 고 박경리 선생님이 그립다.

 

 

  <바다의 기별>을 쓴 김훈 작가의 그해 겨울(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의 박경리 선생에 대한 추억을 읽어본다.

 

  1975년 2월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4년 7월 13일에 군사재판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형법상의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김지하는 1975년 2월 15일 밤 아홉 시 사십 분께 형집행정지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나는 그날 아침 열 시께로부터 서울 영등포교도서 정문 앞에서 김자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신이 선포되던 1974년부터 신문기자의 업을 시작했던 나의 밥벌이였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희망이란 없었다.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포기한 사람과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마도 포기한 사람 쪽에 속해 있었던 거 같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청춘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이 부재하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을 향해 필사적인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스스로의 소망이나 지향성을 외칠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폐기처분해버린 소망과 지향성이 타인에 의하여 불붙여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기약없는 겨울을 통과해나가고 있었다. 그날 영등포교도소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교도소 쪽은 김자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또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법의 석방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은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출소자들을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였음으로, 기자들은 하루 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교도소 앞 거리에서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줘 와 모닥불을 때거나 혹은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를 아직도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음으로, 기자들은 저녁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교도소 정문은 텅 빈 벌판이었고, 그 벌판 가장자리에 매우 더러운 몰골의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는 수습기자 한 명을 그 음식점으로 보내 저녁밥을 배달시켰다. 나는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서 짬뽕을 시켜달라고 했다. 기자들 대부분은 짜장면보다는 짬뽕을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되어 온 짬뽕 국물은 차게 식어 있었다. 우리는 내버린 연탄재 주변에 모여 그 차가운 짬뽕을 후루룩 거리며 들이마셨다. 지방판 마감은 대체로 오후 여섯 시였다. 김지하가 다섯시 삼십 분 이전에 출감하지 않는다면, 조간기자들은 지방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간기자들은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 아니냐" 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도소 측 답변은 출소자들에 대한 소장의 정신  훈화가 남아 있고 또 교도서 담장 밖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어 있어 출감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루 종일 추위에 떨고 나서 지방판을 포기해버린 저녁에, 우리들은 연탄재와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얼음이 잡혀오는 짬뽕 국물을 마시면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아마도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이 아니었을까. 내가 짬뽕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을 마시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 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투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들어 올려 미끄러져 내리려는 아이를 등의 한복판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저 여인네가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짬뽕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자의 무리를 떠나서 그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멀리서는 인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네는 과연 박경리 선생이었으며, 그 아이는 그 아버지가 수배망을 피하여 다니던 1974년 4월 19일 날 태어난 강(岡)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 7일 김영주와 혼인하였고 강은 그로부터 일 년 후인 1974년 4월 19일에 태어났음으로, 강은 그 부모의 신혼 초에 점지된 것이 확실하고 강이 태어난 지 일주일 후에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바로 그날 흑산도에 피신해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하는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박경리 선생님의 등에 업힌 저 아이는 생후 10개월 미만일 터였다.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바람 부는  교도소 앞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 가 없었다. 아마도 집 안에 아이를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 쪽으로 바짝 접근헤서 그분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분을 마음 놓고 관찰했다. 

 

  "여기 박경리가 왔다"라고, 나는 내 동료기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 그분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렸다. 칭얼거리를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울지 마라 느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러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여인네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들끓는 그 어떤 사람과도 무관해 보였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으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될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기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뜻한 것들, 정체를 알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뜻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입을 벌려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형무소 앞 광장은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밤 아홉시께 옥문이 열렸다. 나는 언덕 위의 박경리를 버리고 김지하를 맞이하기 위해 교도서 정문 앞으로 내려가서 기자의 무리들 속에 섞였다. 이제 김지하가 나타나면 기자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서로 김지하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두끈을 졸라매었다. 그날 영등포 교도서에서 출감한 정치범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학생들이었고, 김지하와 박형규, 백기완이 이날 석방의 초점이었다. 적어도 기자들에게는 그랬다. 밤 아홉 시부터 학생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이 나올때마다, 만세 소리가 터지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교도소 정문 안쪽에서, 구내 가로등 불빛 속에 머리를 빡빡 깍은 김지하가 정문 쪽으로 걸어오자, 교도소 정문 밖 사진 기자들은 전원이 전투배치되었다. 그들은 교도서 철문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교도서 수위실 지붕 위로 몰려 올라갔다. 취재기자들은 제2선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팔꿈치로 기자를 찍어서 물리치고 또 딴지를 걸며 쑤시고 들어가는 전법으로 김지하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일군의 기지들 속에 낄 수 있었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서 앞 광장을 미친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그때 무등 위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종신형을 받았다. 이제 풀려나니 세월이 미쳤는지 아니면 둘다 미쳤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은 순수한 민주구국투쟁이며 정정당당한 합법운동이다. 이제 참으로 끔찍스런 사실이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나는 부패한 정권, 무능한 권력과 끝끝내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나는 김지하에게 바싹 붙어서 취재를 하면서도 교도서 광장 건너 언덕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아이 업은 여인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지하가 무등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동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출감한 옥문 앞에서 장모를 만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지하는 무등을 타고 기세를 올린 후 그의 지지자 찬양자들의 무리들이 미리 준비해놓은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는 그날 밤 명동성당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김지하가 떠나버린 어둠 속에 그 여인네는 혼자 오래오래 서 있었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지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기자단의 대부분은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환영 나온 학생들, 기독인들의 무리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도소 앞 광장은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고, 아직도 출감하지 않은 백기완을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이 남아있었다.

 

  나는 김지하가 출감하던 순간을 기사로 엮어 전화로 본사에 송고하고 다시 백기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백기완은 밤 열한 시께 석방 되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기자단은 백기완의 석방이 늦어지는 이유를 교도소 당국에 가혹하게 추궁했다. 이미 발이 시려서 마비 지경이 이르렀고 추위와 배고품에 지쳐 기자들은 악에 받쳤다. 기자들은 교도서 당국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교도소 당국의 설명은, 백기완의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집행정지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6년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또 있어서, 그 벌금 십만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담 밖에 알려지자 즉각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군중들인, 기자와 학생들 대부분이 김지하를 뒤쫓아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모금이 될리가 없었다. 기자들은 모금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다만 만져볼 뿐, 그 돈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나는 또 박경리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십만원에 얽힌 백기완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던 모양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보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리고는 그분은 대절해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그분은 등에 엊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열두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원 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에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감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이가 추었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추운 겨울 밤이었다.

 

                                                                     -  김훈, <바다의 기별-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생각의 나무, 2008,  pp.83~94 

 

 

 

 

 

 통영 앞바다

  

  

박경리에게 고향 통영은 무엇인가?

 

[2009-05-04 오후 10:39:00]

 
 

 

작가 박경리에게 고향 통영은 ‘토지’를 집필케 한 창작의 불씨.

                  송호근 교수, 토지에서 통영은 성장(成長)-외상(外傷)-귀소(歸巢)


▲ 특강 전에 마련된 클래식 시간.


작가 박경리에게 고향 통영은 무엇인가?

박경리 선생 1주기를 맞아 가진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박경리 선생과 고향통영과의 관계 는 환생과 재생의 장소, 모순의 잉태, 예술의 탄생, 생의 활기, 삶의 의욕으로 고향 통영의 이미지를 설정했다.

송교수는 박경리 선생이 타계했을때 ‘이제 통영으로 가시나요’라는 추도사를 쓴 것을 다시 되새기며 박경리 시에서 고향통영의 모습을 훔쳐냈다.

“토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물음에 송교수는 거침없이 통영에서 시작됐고 불씨가 통영이라고 주장했다. 토지 이야기는 박경리 선생의 외갓댁 얘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거제가 외가댁인 박 선생은 당시 한쪽에서는 누른 곡식이 익어가는 자연과 생명이 또다른 곳에서는 호혈지기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죽음이 함께 어우러진 삶 그 자체였다.

토지의 맨 마지막은 통영이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일찍이 등졌던 곳이지만 이 작품을 쓰게한 정신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다. 토지의 창작의 불씨를 지피게 한 곳이 통영이다.   

특히 소설 토지에서 나오는 고향 통영은 성장(成長)-외상(外傷)-귀소(歸巢) 또는 환상(幻想)으로 풀이했다.

아픔의 성장으로 시작해 통영은 한(恨)으로 형성됐다.  외상은 일찍 결혼을 하면서 사회과학주의의 지식인과 결혼하고 6.25를 맞아 다시 아픔을 겪으면서 다시 통영으로 오면서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다시 통영을 떠난다. 이러한 성장과 외상은 ‘김약국의 딸’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통영은 비극성과 운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토지의 등장인물 600명중 가장 좋은 인물들을 통영으로 보낸다. 임경희가 죽으려고 통영으로 왔으나 초등학교 교사로 자리잡게 된 점, 이 임경희는 박경리의 분신 즉 환생을 의미한다. 또 임 선생을 설득하려 내려온 유민실과 노리까시로의 이야기를 통해 치밀한 일본관과 양심적인 일본지식인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통영은 모순의 잉태가 시작된다.

토지에는 3세대까지 나온다. 3세대를 다시 통영으로 보내 작가, 음악가, 예술가의 시를 만들어 낸다.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이들을 통영에 살게 했다. 이것이 귀소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통영은 창작의 불씨를 뿌리내린 곳이며, 토양속에 혼이 스며들어있는 곳이였다. 예술혼을 불사르는 DNA가 있는 곳이 통영이었다고 강조했다.

1시간여동안 박경리의 고향 통영, 토지와의 고향 통영과의 관계를 찾아낸 송교수는 결국 북돋아치는 박경리에 대한 그리움에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강의를 마쳤다.

성병원기자(hannews@chol.com)

 

 

 

 

 

 눈먼 말 / 박경리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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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도 인격이 있듯,  문학에도 그 언어를 쓰는 작가의 격이  드러난다.

신경숙 작가의 격이 있고, 김훈 작가의 격이 있다.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이름은 그냥 붙지 않는다.

박경리 선생이 그리운 것은---------------------

희노애락애오욕을 표현하는 박경리 선생의 언어의 격이 그립다는 것이다.

<토지>에서 악인이라 부르는 임이네, 귀녀, 김두수 등을 표현하는 그 품위가 그립다.

임이네를 이홍과, 귀녀를 강포수와, 김두수를 한복이와 연결시켜 악인의 땅을 배려하는 그 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