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시안》신인상 당선작 _ 최수연, 홍정순 /《시안》2009년 봄호
누에의 잠 (외 4편) / 최수연
누에가 입으로 실을 토해 집을 짓고 있다
볕 좋은 아랫목에 앉아 나는 누에를 에워싼 실을 한 가닥씩 뽑아낸다
돌아누워 뿜어내는 누에의 실은 둥글게 말린 길을 만들고
나는 그 길을 한없이 따라가다가 문득 뒤가 무서워져
흰 실 한 가닥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마는데
내가 실을 뽑는 동안 살찐 누에는 의심도 없이 순정한 잠이 들지만
이 혼곤한 잠을 뚫고 어느 날 날아오른다는 날개의 날들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톡톡 끊어지는 실을 한 올씩 뽑을 때에도 누에는 꼼짝 않고 실을 뿜는다
소나기 소리를 내며 뽕잎을 먹어치우던 누에는
몸을 불리며 몇 번의 잠을 건너는 것인데
끝내는 저만의 둥근 방에 들어 오그라든 잠에 갇히는 것인데
한 번 닫히면 그 잠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아 나는
자꾸만 흰 실을 훔쳐내는 것이다
뽑아도 뽑아내도 사방은 온통 흰 빛의 고요뿐, 둥글게 닫히는 그 빛이 서러워
나는 슬며시 안방을 나오고 마는데 문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는 누에,
내게로 몸을 돌리며 흰 실은 몇 개나 되느냐 묻는다
비단을 짤 수도 없는 실, 누가 폐경을 지난 누에의 몸에서
분칠한 날개가 돋아난다고 말을 하는가
일생을 구물거리며 기어온 초승달 하나가
초저녁 창 밖에서 어느새 지고 있다
독작(獨酌)
여름밤 분수대가 있는 광장의 노상주점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신다 붉고 푸른 조명이 거친 물줄기를 따라 소주잔 속으로 파고들 때 그는 내몽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달리는 것이 일생인 속력의 말들이 잠시 머리를 숙이고 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초원의 저편에서 몰려온 한 떼의 구름들이 맞은편 건물의 매끄러운 유리창에 몸을 기댄다 시비를 걸 듯이 후두둑 쏟아지는 소나기, 몽골의 막사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양복 주머니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너무 많은 표정의 그는 빗방울 몇이 무리를 벗어나 반딧불이가 되는 것을 본다 대초원의 별빛 아래를 날아다니던 몇 개의 빛은 이내 젖은 가로등에 걸려 파닥거린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말을 달려 어느새 그리운 이의 집 앞에 당도하고 나는 우리 안에 갇힌 짐승처럼 분수대가 있는 광장의 노상주점에서 술을 마신다 분수는 아까부터 솟아오르고 있다 눈치채지 못하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몇몇 물줄기들의 실종처럼 반딧불이를 따라 떠나간 그는 마두금* 소리에 맞추어 이국의 노래를 바람 속으로 흘려보내고 오늘도 나는 어딘가에 있는 내 안의 그를 그리며 여전히 독작이다
* 마두금 : 몽골의 민속 현악기.
11월의 거미
오래된 자개장 밑에서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거미는 자개를 타고 오르다가 듬성듬성 빛을 잃은 무지개 사이로 들어가 버렸는지 그놈 잡으려다가 그만 놓쳐 버리고 황망히 어두워진 어머니, 방안의 거미는 근심거리라는데 걸레질하는 그녀의 풍속이 앙상하게 떨리던 그 해 11월 나는 비정규의 시간을 건너다가 손목뼈에 금이 가고, 큰마음 먹고 우족 사오던 육순의 정강이뼈는 내리막 골목길에서 간단하게 부러졌다
깁스한 보행처럼 딱딱 소리내던 입동(立冬), 지하 셋방 터져버린 보일러의 이리저리 휜 파이프에서 녹물은 한참을 흘러나왔고 둥근 행성에서의 햇빛의 이력은 늘 윗층집까지만이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축축하고 차가운 호흡에 익숙해야 했다 방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새로 놓은 보일러엔 고장 방지 센서가 부착되어 있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 고장난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나뭇잎들 떨어지는 소리에는 수상한 빛이 묻어 있었다 골목에서는 늘 발이 여럿 달린 소문들이 벽을 타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렸다 이따금 길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어도 보일러 파이프를 돌고 도는 뜨거운 물줄기는 또다시 11월을 어머니 앞에 세우고 그 언젠가처럼 오래된 자개장 밑에서는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거미를 이번에는 어머니 단숨에 후려치셨다 손금에 붙어 있는 잔주름까지 다 펴졌다 아직 내일이 오기 전의 일이었다
전세
도심 창가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일기의 마지막 문장처럼 깊숙이 사생활에 몸을 묻고 지루한 유리문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브라질 농장의 검붉은 열매에 붙어있던 햇살 하나가 커피잔 속으로 귀화한다 아직 울음소리가 마르지 않은 가죽소파에 앉아 적도 아래의 햇살을 한 모금 마신다
커피숍에서 한 사내가 나가자 깨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리문이 삐걱거린다 어느 밀림으로부터 날아와 이 거리에 꽃을 피운 걸음걸이로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그 사내의 일그러진 표정은 우주적이다 그러니까 내가 축축한 머리를 드라이하는 동안, 내가 브레이크에 발을 대고 신호 대기하는 동안, 내가 습관적으로 커피 자판기 앞에서 오지 않는 그대를 생각하는 동안은 모두 감나무가 고욤나무 밑동에 세들어 살 듯이 하였던 것인데
자기 집을 얻게 된 오빠네 어린 조카가 온 방을 휘저으며 뛰어다니던 그 날로부터 우리는, 저 거리는, 오늘은 너무 희미해진 것이다
마른 우물
마을을 한 바퀴 돌아 튀밥같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태우고 읍내로 간다는 버스는 이미 끊어졌다 버스는 하루 세 번 마을은 은행나무 몇 그루, 세상의 잎가진 것들 모두 제 잎을 다 떨구고는 고요할 뿐인 저녁 나는 어떻게 이 마을에 들어왔던가
지나가던 낡은 봉고 한 대를 얻어탄다 헐리기 직전의 다락방 같다 늙은 부부의 몸에서는 산나물 무침 냄새가 야트막한 담벼락처럼 길다 나는 잠시 담벼락 아래에서 몇 자락 남지 않은 쌉싸름한 햇살을 받는다
마을은 마른 우물처럼 산 아래에서 깊고 봉고차의 바퀴는 어느 결말을 향해 천천히 굴러간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만이 끊임없이 이별의 가사를 돌고 있지만 우물에서는 다시 옛날처럼 맑은 물이 솟아나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지금 나는 마른 우물에 뚜껑을 덮듯 한 마을을 빠져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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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연 / 1977년생. .
소설(小雪)을 지나다 (외 4편) / 홍정순
은행잎 지고 겨울비 오는 날
일 피해 사람 피해 찾은 시골집
첫서리 오고, 김장하고 마늘 심은 후
서리태 타작한, 이맘때
바깥 풍경은 나만큼 촌스럽다
누워서도 보기엔 감나무가 최고다
들창에 세 든 지 오래된 모습이라 그렇고,
가지가지 종잘종잘,
새 소리를 달고 있어서 더 그렇다
마늘 심은 밭을 지나는 바람 같은 소리
매점매석 했다 해도
눈감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 감 먹고 살아 온 그 소리는
전대 풀고 나온 나를 창문 앞에 서게 했다
이파리 다 떨군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철물점 연탄난로를 쬐던 거칠고 곱은 손들이 보인다
먹고사는 일에, 온전히 한 해를 다 보낸 발자국소리 들린다
보일러 소리, 냉장고 소리,
창문을 치고 두드리는 계곡 바람 거친데
풍경은 거짓말처럼 소설(小雪) 무렵을 지나고 있다
파리
탈곡기 벨트에 잘린 손가락을 만나도 울지 않을래
왁스는 천원, 뻑뻑한 탈곡기 벨트엔 왁스를
연탄난로 위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는 분주하고
봉다리 커피 종이컵에서 풀릴 때, 양생되는 아침
무수한 연장은 일을 만든다 삶이 연장된다
향미다방 화장실은 아직도 재래식
파리를 본다
문틀 위에 놓인 담배를 본다
코앞에 걸린 휴지를 본다
끈끈이에 휴지된 또 한 생을 본다
파리똥 앉은 파리채를 본다
누구를 위해 빌어 봤음 좋겠다
뒷산 도토리 쏟아질 무렵,
삼거리 곱창집 개업식 무렵,
목숨을 얻고 목숨을 잃고
쭈그리고 앉아서 엉덩이를 옴짝거려야 사는,
뒷다리를 비빈다 날개도 벌어졌다 오므라진다
―대충 살아도 살아진다는데
장갑
사람이 보인다, 장갑을 보면
그 사람의 손도 보인다
다섯 개의 구멍은 저마다의 굵기와 깊이를 가졌다
현장의 시작과 끝은 그들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장갑을 뒷주머니에 꽂으면
그게 작업장의 패션이 된다
찾는 장갑을 보면
기초를 하는지 미장을 하는지 도배를 하는지
다 보인다
행사에서 잠깐 둔갑하는 기사님 장갑,
진짜 이름은 예식 장갑이다
반코팅 장갑은 일용의 기본 장갑
인부들이 갖출 기초 장비
낱개로 사면 일이 없는 사람이요
한 타 사면 큰일 하는 사람이다
KT 직원이 목장갑을 사는 이유는 전봇대 때문,
목수 장씨가 용접 장갑을 사는 이유는 패널 때문,
무수촌 이장 이씨가 반도체 장갑을 사는 이유는 접과 때문,
장갑엔 저마다의 이유가 들어 있다
장갑엔 저마다의 일이 들어 있다
저마다의 목소리는 사는 이유가 된다
사이
소한과 대한 사이
촌사람과 철물점 사이
쫓는 일과 잡는 일 그 사이
눈길과 첫 발자국이 놓인 그 사이
철사 줄과 와야 줄 그 굵기와 길이 사이
가늘고 강한 선 하나, 올무가 되는 그 사이
먼 산 한 바퀴, 올무에 걸려 휘는 그 사이
어머니, 문고리를 잡고 십 남매를 낳는 사이
아버지, 문고리에 걸고 털을 벗기는 사이
동지섣달 환하게 날아오르는 나비
십 남매의 호구지책이었으므로
무수한 연장과 일 사이
담장 아래 장독대와
밑둥치 금간 항아리 사이
쫓는 일과 잡는 일과 먹는 일 사이
추억과 망각 사이
잊혀짐과 버려짐 사이
고를 푼 올무와 문고리 사이
그대 생각
철물점 여자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빨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 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그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 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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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순 / 1972년생. 주소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철물점 아줌마 시인(詩人)등단 화제 | |
홍정순 씨 시(詩) 전문지 시안(詩眼)서 신인상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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