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제 무게만큼의 깊이로 다시 또 떨어진다 / 김춘수

나뭇잎숨결 2009. 1. 9. 12:33

  산문시 열전

  

  갑자기 땅바닥에 떨어진, 제 얼굴은 버리고, 한 노파가 톨이 된 동체만 이끌고 그래도 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득한 건 시계포의 그 많은 시계바늘이 제각기 딴전을 보고 있는 그 표정들이다. (보드레르의 '파리')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가 아니라, 눈 내리는 덕운의 그 우물가에서 만났다면? 치성인과 함께 방긋 혹은 싱긋 웃으며, (로트레아몽의 '노래')

   해질녘, 빨래터를 지나 그 공동 목간에서 예수를 만났다. 새다리처럼 가는 다리, 눈이 오목하게 그늘져 있었다. 아무도 감히 엿보지 못하게. 그래서 그런지 세상은 이내 밤이 되었다. (랭보의 '지옥')

   걸인에게 시혜하지 말 것. 그러나 위대한 모국어는 너무도 난삽해서 사상을 만들지 못하고, 두고두고 갖가지 오해만 낳게 했다. 질척질척 그 언저리를 비만 오게 했다. 언제까지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벌목정정, 장수산이 2천5백 년의 먼지를 털고 깨난다. 그 고요함, (정지용의 '담')

   꽃은 다 지고 말았다. 어제의어제의어제의어제 계절은이미바뀌고있었다. (그것도모르고있었나) 혹은내일은무화이무과(無花而無果), (이상의 '꽃나무)

 

 

 

 

 서서 잠자는 숲

 

 

낮잠

  

  넓적넓적한 꽃잎을 여러 개나 달고 대구 만촌동 옛 내 집 연못에 수련꽃이 피었다. 너무너무 흐뭇하다. 하늘은 쾌청, 연못가 수련꽃 그늘을 고개 빳빳이 세운 어인 삽사리 한 마리 가고 있다. 66년 전 소꿉질친구 옥수나 같은 머리를 땋고 댕기를 길게 드리우고.

 

 

  

  바다 밑

 

   봄에는 물오른 숭어새끼 온몸으로 바다를 박차고 솟아오르다간 제 무게만큼의 깊이로 다시 또 떨어진다. 바다 밑은 물구나무선 하늘이고 하늘에는 물구나무선 발가락이 다섯 개, 발 한쪽은 어디로 갔나.

 

 

  까치

  

  뜻밖이다. 겨울 에게해는 납빛으로 가라앉았다. 눈앞의 사라미스해협은 낮고 좀스럽다.

  나는 눈을 감는다. 60년 전 우리집 넓디넓은 마당귀 키 큰 감나무 제일 높은 가지 끝에 까치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꽁지 통박한 옛날의 그 새, 울지는 않고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왜 거기 가 있는가 하는,

 

 

  어떤 스냅

  

  버스가 하나 대 정차하고 있고 출입구 근처에는 책가방을 든 고등학교 학생인 듯 수삼 인의 청소년들이 서 있다. 이쪽과 저쪽 버스 바로 앞켠의 플라타너스의 체통 큰 줄기에 제각기 한 사람씩 바바리코트의 사나이가 몸을 기대고 있다. 둘 다 저쪽을 보고 있으나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지친 뒷모습들이다. 길을 건너 그쪽에도 두셋 행인의 윤곽이 희미하게 떠 있고, 이쪽 켠에도 행인이 두셋 점철돼 있다. 그러자 갑자기 해가 떨어지고 빗방울이 듣는다. 이 돌변한 상황은 사진에서가 아니고 사진을 보고 있던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진다. 스위치에 손이 가도 불이 오지 않는다. 정전이다. 그때다. 사진 속의 바바리코트의 사나이(저쪽 켠의)가 걸어가고 있다. 뒤통수가 보인다. 코트의 깃을 세우고 비를 맞으며 가고 있다. 하염없이 가고는 있는데 아주 가버리지는 않는다. 사진 속의 다른 한 사나이가 다른 바바리코트의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도 코트의 깃을 세우고 있다. 모발이 비에 젖는다. 버스가 움직이고 빗속에 그만 혼자 남는다. 그런 느낌이다.

 

 

 

  운행(雲行)

  

  소월(素月)의 하늘은 여우비 내린 뒤의 은모래빛, 그 곁에 단재(丹齋)와 우당(友堂)의 입다문 하늘. 어딘가에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하늘도 있으리. 세수가 하기 싫어 저만치 혼자 나가앉은 이상(李翔)의 하늘. 그런가 하면, 춘사(春史)의 하늘에는 오늘도 허리 꺾인 고지새가 한 마리 울고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저자에서

 

  중노의 한 열쇠장수. 그는 도수 높은 안경을 코긑에 슬쩍 얹어놓고 안경알 너머로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입에는 긴 빨부리를 물었다. 빨부리 끝에는 다 탄 꽁초가 물려져 있다. 담배가 타고 있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빨부리를 문 입은 왼쪽으로 조금 비뚤어졌는데 그것은 빨부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무의식 중의 어떤 조화인 듯하다. 그는 지금 자기가 빨부리를 물고 있는지 안 물고 있는지도 자각 못하고 있으리라. 앞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늘여찬 형형색색의 열쇠들은 그와는 아랑곳없다는 표정들이다. 누가 그에게 지금 열쇠를 사겠다고 해도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열쇠장수인 것을 잊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열쇠가 무슨 뜻을 가진다고 할까.

 

 

  빈혈

 
  올봄에는 자주 쑥이 눈에 띈다. 좀 유난스럽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 눈에 띈다. 손톱이 엷어지고 뒤로 자꾸 휘곤 한다. 어릴 때 먹은 쑥버무리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숨을 쉬면 코에서 쑥 냄새가 난다.

 

 

 

  정적

 

  삼가에서 시계는 하물하물 묽어간다. 넝마 같다. 보들레르는 시계포에서 무수한 시계바늘이 제각기 제멋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하늘에는 물고기비늘 모양의 구름이 떠 있고, 땅에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고,

 

 

 

  실제(失題)

  

  한 번 본 천사는 잊을 수가 없다. 봄바다가 모래톱을 적시고, 한 줄기의 빛이 열 발짝 앞의 느릅나무 잎에 가 앉더니 갑자기 수만 수천만의 빛줄기로 흩어진다. 그네가 저만치 새로 날개를 달고 오고 있다.

 

 

 

  바다 하나는

  

  비행기가 바르셀로나 상공을 날 때, 바다 하나는 구름 위에 있고, 바다 하나는 내 눈썹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내 눈썹을 적시며) 프랑스말로 그것을 쉬르레알리슴이라고 하는가, 그러나 아니다. 살바도르 달리가 눈이 멀었다는 건 헛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노부부

 

   서울 변두리 아파트 단지 후미진 길목에 놓인 장의자의 한쪽 귀퉁이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다. 비스듬히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다. 여남은 발 앞의 맞은편에도 장의자가 하나 놓이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다. 할머니는 앉아서도 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조금씩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5월 어느 날 아침,

 

 

 

  persona

 

  싸안을 듯이 하지 말고 내던질 듯이 톡톡 분질러서 사정없이 분지르고 분질러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후기

      2

   <서서 잠자는>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된다. 그러나 나무와 같은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 상태는 아주 정상적일 수밖에는 없다. 자연이니 생명이니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은 로맨틱한 환상일 따름이다. 인간은 <서서 잠자는> 상태를 가눌 수가 없듯이, 인간에게는 그 자신의 차원이 따로 있다. 인간은 일면 자연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면서 다른 일면 문화와 역사를 만든다. 즉 대자적 존재다. 인간된 비애다. 나는 이번의 이 산문시집에서 이런 따위의 인간된 비애를 이모저모로 많이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비애인 줄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1993년 새봄

  김춘수